구원의 조건은 무엇인가? "오직 믿음"인가, "믿음과 행함"인가? 아니면 "믿음과 회개"인 것인가? 그래서 지금까지 나온 여러가지 주장들을 한꺼번에 모아서 비교분석해 보았다. 과연 무엇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론, 다시 말해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말씀하셨고 사도들이 전파하였으며,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강조하신 구원론인지 보라. 아마도 이 글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2020-08-28(금) 금요기도회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39)구원의 조건은 무엇인가(2)(계22:14~15)
https://youtu.be/k1mhtxcp-Dw [혹은 https://tv.naver.com/v/15495136 ]

 

 

1. 들어가며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대체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 지금까지는 약 3가지 견해들이 있어 왔다. 하나는 "오직 믿음"이었고, 또 하나는 "믿음과 행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회개와 믿음"이다. 첫번째는 종교개혁자들이 그렇게 강하게 외친 것이요, 두번째는 중세 로마카톨릭의 구원관과 흡사한 것이며, 세번째는 최근 들어와 알려진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과연 어떤 구원관을 지지하고 있는가? 그리고 "회개"라는 요소는 정말 구원의 필수조건인 것인가 아니면 권장사항에 해당하는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오늘 새에 전한 벽말씀인 "회개와 천국복음(38) 구원의 조건은 무엇인가(1)"에 이어, 그 두번째 시간으로서, 구원의 조건으로서 "믿음과 회개의 중요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구원얻는 방법 3가지 중에서 과연 성경은 어떤 견해를 지지하는가?

  사람이 구원얻는 방법으로 첫번째는 "오직 믿음"이라는 견해가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들고 나온 것이다. 이는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율법의 행위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인하여(갈2:16)"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도바울의 견해를 가지고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구원교리다. 그러나 오늘 새벽에도 말씀드렸지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정확한 것이이지만, "오직 믿음으로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믿음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고 그 사람이 꼭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마7:21~23).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을 믿는 것으로만이라고 알았을 때에, 일반 성도들은 지적인 동의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구원관을 갖게 된다. 두번째는, 중세 로마카톨릭의 구원관이 있다. 그들은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믿음만으로는 안 되고 믿음에 합당한 행위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에는 금식과 기도, 선행과 구제, 심지어 고행까지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 이외에 다른 어떤 행위가 추가되어야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복음이다(갈1:6~9). 왜냐하면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에 들어와 이 두번째 견해는 약간 변경되어서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선한 반응을 주기도 한다. 다시 말해, 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 이것을 뒷받침 한다고 하면서, 행함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 귀가 솔깃해지기 때문이다. 살펴보면, "믿음과 행위 구원론"은 이신칭의 구원론의 단점을 보완하고 진정한 구원을 얻도록 도와주기 위한 것으로 새로 발견된 구원론이기도 하다. 이 구원론은 야고보서의 말씀(약2:14)과 또한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주님의 말씀(마7:20)을 그 근거로 가져음으로서, 어느 정도 성경과 일치하고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사람의 구원론을 믿음과 행위로 설정하게 되면 안 되는 여러가지 측면이 있기도 하다. 첫째, 눅23장에 나오는 한편 강도가 그날 구원받게 된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어떤 행위도 없었는데, 그가 구원받은 이유를 이 기준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행위가 구원에 중요한 요소라는 점은 인정할 수 있을른지 모르겠지만, 과연 얼마만큼의 행위가 뒤따라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기에, 이 구원론으로 구원받을 사람은 생겨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 구원론이 올바른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셋째, 만약 행위가 구원의 요소라고 한다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틀림없이 행위를 통해 그 부족한 부분을 메꾸려고 시도할 것이며, 선한 행위가 남들보다 비교적 더 많이 있는 자는 그 행위로 자신은 이미 구원받은 것처럼 착각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는 필연코 행위가 없는 자들을 보면서 그들을 무시하게 될 것이다. 고로 구원이 믿음과 행위로 받는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다만 행위를 자신의 심판의 기준으로 알고 회개하는 데 사용한다면 그것은 옳은 것이라고 하겠다. 셋째, 구원의 기준을 "회개와 믿음"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고, 사도들도 그것을 증거하며, 부활승천하신 주님께서 아주 강조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세번째 견해가 가장 성경적이라고 하겠다. 왜 구원은 믿음과 회개로 받는 것인지, 이제 그 이유를 하나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3. 왜 "회개"가 "믿음"과 더불어 구원의 조건일 수밖에 없는가?

  이제는 구원의 요소가 믿음만이 아니라 믿음과 더불어 회개가 필수적인 조건일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부터 살펴보자. 성경은 사람이 구원받는 방법으로서 "믿음"과 "회개"를 동시에 말씀하고 있다는 것부터 살펴보도록 하자(막1:15).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믿음도 있어야 하고 회개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2가지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나타난 죄의 문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생명의 문제가 있다. 사람은 이 두 가지를 해결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오직 예수님을 영접할 때 일어나기 때문이다. 먼저 "죄"의 문제는 죄를 "회개"함으로 해결받을 수 있는 문제이고, "생명"의 문제는 예수께서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을 받음으로 해결받을 수가 있다. 그래서 회개와 믿음이 구원의 요소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회개"는 자신의 불신앙의 죄와 자범죄를 해결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이고(눅24:47, 행3:19), "믿음"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요3:16, 5:24, 요일5:12)

막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눅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행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일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4. 사람이 구원받는 데에 믿음과 더불어 회개가 꼭 필수조건으로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사람이 구원받는 데에 믿음과 더불이 회개가 꼭 들어가야 하는 그 이유들은 무엇인가?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사람이 믿음을 통하여 결국 구원얻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얻는다는 주장은 성경에 한 번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직 믿음"은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종교개혁자들이 만들어내었던 구호였던 것이지, 안타깝게도 성경에는 '오직 믿음"이라는 문구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말 성경에 보면, "오직 믿음'이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온다. 그러나 헬라어원문에는 그런 표현이 하나도 없다. 믿음이 중요하지만 믿음만이라고 하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둘째, "오직 믿음"으로 구원얻는다고 강조하게 되면, 잘못된 구원론의 하나인 산데만주의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산데만주의란 18세기 영국에서 나온 잘못된 구원론으로서, 예수님을 믿고 입술로 시인하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사람이 구원받는 데에, 예수님에 대한 단순한 인식론적인 변화나 그의 입술의 고백이 그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 하는 것은 과도한 주장일 뿐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진정한 믿음과 믿음에 따른 충성됨과 회개가 동반될 때에라야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사람이 믿음으로 인하여 칭의를 얻게 되지만 그것이 곧 구원의 완성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죄인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게 된다(갈2:16, 롬3:24). 그리하여 우리 자신은 의롭지 않아도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법정적으로 의롭다고 칭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구원의 여정의 첫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설령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었다고 할지라도 이내 죄를 짓게 되면 입었던 흰옷은 이내 다시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칭의를 통해서 1차적으로 구원얻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다음에 짓는 죄들에 대해서 정확히 말하지 아니함으로, 결국 그 죄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이다. 고로, 칭의를 구원의 완성으로 보면 안 되고, 칭의는 구원의 여정가운데에 이제 첫발을 내디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롬5:9에서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더욱더 많은 것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원문: 받은 후에)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장차] 구원을 받을 것이니(롬5:9)"라고 말했다. 이는 믿음으로 생명을 얻고 회개를 통해 죄사함을 받은 자가 칭의를 얻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구원의 완성이 아니었던 것이다. 장차 구원얻을 날이 오게 되기 때문이다. 

  넷째, 이미 구원얻을만한 믿음을 가진 채 회개하고 믿고 있는 자라도 핍박과 죽음이 몰려올 때에 얼마든지 사람은 주님을 부인할 수도 있는데, 이러한 죄에서 벗어나 신앙을 다시 회복하려면 회개는 필수적인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연약한 믿음을 가진 자가 하루 아침에 순교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지켜낼른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고난과 핍박이 두려워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자라도 다시 믿음을 가져서 구원받으려면 회개가 필요수적으로 필요한 것이다(그러나 실제로 현저히 주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구원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것은 히브리서의 관점이다).

  다섯째, 예수님을 한 번 믿었다고 해서 죄짓지 아니하고 살아갈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의의 옷이 전가되었을 뿐, 나의 옛사람은 여전히 죄된 본성에 휘둘리고 살아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귀신들이 안팎으로 우리 성도들을 미혹하여 죄짓게 만들기 때문에, 회개 없이는 그 누구도 지은 죄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없으며, 그러한 죄를 용서받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회개는 필수적인 구원요소인 것이다. 

  여섯째, 한 번 믿었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한 믿음으로 정착된다고 꼭 보장할 수 없으며, 한 번 믿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자신의 과거의 죄나 현재의 죄 그리고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했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죄를 용서받으려면 지은 죄를 자백하여 회개함으로 용서받아야 한다고 분명히 성경은 언급한다(요일1:9). 지은 죄를 자백하지도 아니했는데도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를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요일1:9). 이것은 특히 예수님을 믿고 난 후의 죄들을 처리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일곱째, 믿음으로 인하여 성령을 받아 성령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자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의 이름이 하늘에 있는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고 할지라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 그 자체가 자신의 지었던 모든 과거의 죄들을 다 용서해주고 지금 짓고 있는 죄도 용서해주며 장차 짓게 될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해주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모든 인류를 죄를 다 용서한 것이 맞다면, 사실 모든 인류는 다 구원받아야 한다. 하지만 다 구원받지 못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전 자체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은 모든 믿는 자들로 하여금 누구든지 회개하기만 하면 그분의 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믿는 자는 과거의 지었던 죄도 자백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날마다 짓고 있는 죄를 철저히 자백하여 회개해야 한다. 그렇다고 굳이 아직 짓지도 아니한 미래의 죄까지도 미리 자백할 필요는 없다. 

  여덟째, 예수님을 믿었던 자라 할지라도 그가 십계명(도덕법)을 어긴 자는 죽은 다음에 불못에 던져진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계21:8). 어떤 사람은 한 번 예수님을 믿었으면 어떻게든지 그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데 될 것이라고 낙관론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회개는 주님이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치자, 그런데 무슨 일이 생겨서 그가 무당에게 찾아가서 물어보았다고 하면 그 사람도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또 한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는데, 어느날 회사의 부하직원과 더불어 간음을 저질렀다고 치자,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있기에 그런 죄를 지었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자를 천국에 받아주시지 않는다. 주님도 믿고 우상도 섬기는 자를 받아줄 리가 없는 것이다. 결국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는 천국에 못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회개를 뒤로 미루고 있는지 모른다. 그에게 어느날 갑자기 죽음이 찾아오게 되면 그는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해 불못에 떨어지고 말 것인데도 말이다(계21:8). 

  아홉째, 죄를 짓고도 그가 회개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지은 죄는 없어지지 않은채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칭의를 얻어 깨끗한 의의 옷을 입은 자라 할지라도 다시 죄를 짓게 되었을 때에는 반드시 회개를 통해 예수님의 피로 더럽혀진 자신의 옷을 세탁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계22:14~15). 회개를 통해 자신의 죄를 깨끗히 씻어내야 다시 흰옷을 입게 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았는데도 더럽혀진 옷이 다시 스스로 깨끗한 흰 옷이 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흰 옷을 입은 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양을 드리는 자를 보았던 사도요한이 그들이 누군지를 물었을 때, 24장로들 중에 한 장로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어린양의 피에 자기들의 겉옷을 씻어 희게 하였기 때문이다"고 말했던 것이다(계7:14). 

  열째, 이미 믿은 성도들에게 써보내라고 했던 소아시아의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그들이 꼭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간절히 촉구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소아시아 일곱교회들 중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칭찬만 받았던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를 제외한 나머지 5개 교회에게 주신 메시지를 보았는가? 그 핵심은 전부 다 "회개하라"는 것이었다(계2:5, 16, 21~23, 3:3, 19). 회개가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열한째,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 교회(성도들)에게 주신 것은 그들이 구원에서 탈락하는 것이라고 경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만약 사람이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소아시아의 교회들에게 주신 경고를 보라. 첫째로 주님께서는 그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겨버리겠다고 하셨다(에베소교회). 또한 회개하지 아니하면 신속히 와서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칼로 싸워서 그를 쳐버리겠다고 말씀하셨다(버가모교회). 그리고 만약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 살고 있을 때에도 징계를 내릴 것인데, 그것은 그를 질병의 침상에 던져버릴 것이고, 그것에 동조하는 자들은 함께 환난에 처하게 할 것이며, 그의 자녀들은 사망에 이르게 하겠다고 경고하셨다(두아디라교회). 또한 만일 그래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도둑같이 임하여 심판할 것인데, 그때에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일지라도 그 이름을 지워버릴 것이라고 경고하셨다(사데교회). 또한 마지막으로 만일 그래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입에서 그를 통하여 내쳐버릴 것이라고 하셨다(라오디게아교회). 결국 이상에서 교회들에게 보낸 경고를 살펴보면, 한사코 그 사람이 구원에서 타락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히브리서와 같은 공동서신에는 더 강력하게 나온다. 그렇다.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도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될 것이며, 죽은 다음에는 결코 천국에도 못들어가게 될 것이 분명하다. 

  열두째,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갑자기 단체적이고도 민족적인 재앙이 임할 때에는 그 사람도 함께 멸망당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눅13:3,5). 그렇다. 사람이 개인적인 재앙으로 죽게 되는 것은 그 사람 본인의 죄로 인한 것이지만, 주님께서 어떤 민족에게 단체적으로 민족적으로 재앙을 내리실 때에는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으셨다. 그것이 성경의 역사였고 인류의 역사였다. 고로 지금도 코로나와 같은 재앙이 내려지고 있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죄를 회개하는 일이다. 사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하나님의 징계가 일어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날마다 회개하는 것은 생명처럼 귀중한 일이라고 하겠다. 

 

5. 나오며

  구원은 순간에 얻는 것이지만 그것도 여정의 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회개하고 믿었던 그날에 죽을 사람은 거의 없고, 적게는 십년에서 수십년을 더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는 그날까지 과연 믿음을 지켜낼 수 있을른지 사실 알 수 없으며, 지은 죄들을 날마다 회개하여서 자기의 겉옷을 희게 하고 있을 자가 얼마나 될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고로 칭의는 이제 구원의 여정에 첫발을 내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거룩한 본성으로 변화되기까지 무수한 여정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회개"다. 왜냐하면 한 번 믿었다고 해도 여전히 죄된 본성은 죽을 때까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 수많은 유혹으로 죄짓도록 유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은 끝임없이 요동칠 것이다. 고로 지금 자신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두고 자신의 구원이 확고불변하자도 판단하지 말라. 믿음은 죽는 그날까지 지켜내야 할 가장 소중한 자산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날마다 회개하여 자신의 겉옷을 깨끗한 상태로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도 믿음의 지조를 지키고, 날마다 회개하면서 살아간다면 희망의 빛이 보일 날이 올 것이다. 죄된 본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로 바뀌어 있을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의 행위는 하늘의 상급이 되어 천국에서 그에게 안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받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과 회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 번 믿었던 믿음을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지은 과거의 죄들과 현재 죄들을 낱낱이 자백하여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런 자들만이 결국 아들이 준 생명을 유지한 채, 죄용서를 받고 천국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2020년 08월 28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38)구원의 조건은 무엇인가(1)(계2:1~7)_2020-08-28(금)

https://youtu.be/-dGlRf3-PR0 [혹은  https://tv.naver.com/v/15477739 ]

 

1. 사람들은 흔히들 구원의 조건을 어떻게 이야기하나요?

  사람들은 흔히 구원의 조건을 3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오직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과 더불어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믿음과 회개가 구원의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2. "오직 믿음"을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종교개혁자들은 중세교회에 대항하여 사람이 구원받는 방법을 "오직 믿음"이라고 외쳤습니다. 사람이 칭의를 얻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서 얻는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갈2:16). 그러나만 종교개혁자들은 칭의가 곧 구원은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롬5:9). 그들은 칭의를 받으면 마치 구원을 받은 것인량 말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이라는 표현은 성경에 단 한 구절도 나오지 않는 어구인데, 마치 그것이 성경에 있는 것처럼 호도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18세기 영국에서 "산데만주의"가 나왔습니다. 산데만주의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입술로 시인만하면 구원얻는다는 잘못된 구원론입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을 믿고 입술로 시인했다면 혹시 지금 그가 죄를 짓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결국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입술로만 시인하는 것을 두고 참된 신앙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3. "믿음과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믿음과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라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마7:21~23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1-23)" 이들의 의도에 대해서는 우리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면 첫째, 눅23장에 나오는 한편 강도는 행위가 하나도 없었는데 그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었는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둘째, 만약 그것이 진짜라면, 구원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얼마만큼 행해야 과연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인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일예배 뿐만 아니라 새벽기도까지 나와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까? 하루에 기도를 3시간정도는 해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까?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을 구원의 조건이라고 한다면 구원받는 사람이 전혀 생길 수도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닙니다. 고로, 행위는 믿음에 따른 열매로서 보아야 하며, 또한 행위는 신앙생활을 다 마쳤을 때에 자신의 신앙이 진짜였는지를 돌아보는 용도로 사용해야 하며, 그리고 언제라도 하나님께서 나 자신을 심판하는 기준은 행함이라는 생각을 가져서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4. 구원의 조건이 "믿음과 회개"인 이유는 어디에 있나요?

  한 때는 구원의 조건을 "오직 믿음"이라고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의 십중팔구는 아마도 그렇게 믿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100%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했을 때에는 산데만주의에 빠져서,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고 있다가 그만 죽는 날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말합니다. 구원의 조건이 "믿음과 회개"라고 말하는 것은 행위구원론자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눅23장의 한편 강도를 보십시오. 그가 그날 구원받았던 데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더불이 자신의 죄인됨에 대한 회개 때문이었는데, 그것을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만약 구원의 조건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자신이 지은 죄들에 대한 회개가 아니고, 믿는 것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얻는다고 한다면, 다음의 예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있다 칩시다. 그런데 그는 어려움이 찾아오면 무당을 찾아가서 물어봅니다. 왜냐하면 기도해도 음성이 들리지도 않고, 교회에서는 목사님도 잘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야 할지 아니면 기존 사업을 계속해야 할지 물어보려면 무당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기독교인들의 약 30%가 무당 점쟁이의 집에 찾아가 물어본다고 합니다. 그럼,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무당 점쟁이에게 찾아가서 물어본다고 할지라도 과연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계21:8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 그렇습니다. 예수믿는 자라도 우상을 숭배하면 지옥에 갑니다. 예수 믿는 자라도 음행하면 불못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고로 예수믿는 자가 마지막에 가서 종국적으로 구원얻는 길은 오직 "회개"하는 길 뿐입니다. 회개할 때 예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피가 우리에게 적용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신이 지은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요일1:9). 자기의 두루마기를 빠는 자라야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계22:14~15).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늘 저녁에 다시 한번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겠습니다. 

 

5.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요?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말은 사실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하다(소조: 건져내다. 구출하다. 구조하다)"의 수동태형은 실제로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마9장에 나오는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 곧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마9:22)"에서는 구원이 그녀가 병에서 고침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14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간구 곧 그가 물에 빠져가면서 하는 말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말은 물에 빠져가는 자신의 목숨을 살려달라는 것이 구원의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도 "구원"이라는 말을, 자신이 죽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로 다음과 같이 사용하셨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요12:27)"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라는 말은 궁극적으로 어떤 것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정리하면, 사람이 죽어서 그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도 자신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면서 최종적으로 썼던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4:18)" 고로 구원이란 자신이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믿음과 회개로서 이 세상을 떠나는 날에 꼭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020년 08월 28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개와 천국복음(09) 믿음과 회개는 전적으로 거저 주시는가?(눅15:11~20)_2020-07-30(목)

https://youtu.be/x4EEOPmWaIM  [혹은  https://tv.naver.com/v/15037389 ]

 

 

1. 믿음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가요?

  믿음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어 구원받게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갖도록 해야 하는 것인가요? 오늘날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하나님께서 거저 선물로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처럼 거저 주시는 것이라다면 사람들더러 "믿으라"고 결코 명령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당시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에게 보인 반응에서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하는 등의 칭찬을 하실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거저 주셨으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감탄하실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회개도 하나님께서 회개시켜야 하는 것인가요?

  믿음과 마찬가지로 회개도 하나님께서 거저 주셔서 회개시키는 것인가요 아니면 우리가 회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인가요? 이것도 믿음과 마찬가지입니다. 회개도 믿음처럼 인간편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에 해당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다 해 주신다거나 대신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지만(벧후3:9), 어떤 사람은 스스로 돌이켜 회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눅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보십시오. 이것을 보더라도, 아버지가 둘째아들의 모가지를 비틀어 강제로 회개시키고 있지 않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지하여야 합니다. 둘째아들이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회개는 인간편에서 자기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이키는 것인 것이지 하나님께서 강제로 행하는 어떤 행위가 아닙니다. 물론 믿음을 갖는 것이나 회개하는 일도 사실은 크게 보면 하나님께서 다 관여하고 계시고 있지만 말이죠.

 

3. 그렇다면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시되, 전적으로 거저주시는 것은 바로 "은혜"입니다. 사실 "믿음"과 "회개"는 인간편에서 하는 우리들의 반응이라고 한다면, "은혜"는 하나님편에서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해 주시는 것입니다. 

 

4. "은혜"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나요?

  "은혜"는 헬라어로 "카리스"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거저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인 사람에게 그냥 공짜로 선물로서 주시는 것이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거저주시는 것인가요? 그것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그것은 절대 얻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은혜"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요? 성경에서 은혜란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단어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의 축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고후13:13)"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주 예수의 은혜로(은혜를 통하여) 구원받는다"고 언급했습니다(행15:11). 그리고 사도요한도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것이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것(요1:17)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은혜가 무엇이길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만 주어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요? 그것은 바울이 로마서와 에베소서의 말씀을 통하여, 이렇게 해설해 주고 있습니다. 

롬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엡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렇습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저주시는 바 선물과 같은 것인데, 그 실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주어지는 속량 곧 죄사함을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오직 흠없고 점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한데, 그것은 사람이 수고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냥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속죄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요, 또한 하나님이 거저주시지 않고는 우리가 누릴 수 없는 혜택이기 때문입니다. 

 

5. 믿음과 회개로 구원받기 위해 우리 인간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거저주시는 은혜에 감사함으로 반응하는 일입니다. 우선은 하나님께 인류의 죄용서를 위해 행하신 일을 믿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엡2:8~9). 그리고 나서 자신이 지은 죄들을 자백함으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요일1:9).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회개는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의 죄가 용서될 것을 믿는 믿음 가운데 자신이 지은 죄를 자백하는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곧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을 거저받았다면 우리가 할 일은 죄를 자백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회개도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우리가 회개할 수 있도록 회개시키신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좀 전에도 눅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회개는 집나간 둘째아들이 해야 하는 일인 것이지 아버지가 해 주는 일이 아님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버지가 둘째아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한 일은 사실상 없습니다. 아버지는 회개하여 집에 돌아오는 아들을 받아들여서 예전에 아들이 갖고 있던 권리를 회복시켜주셨을 뿐 강제로 아들을 회개시키지는 않았습니다. 고로 할 수 있으면 예수님의 죄로 자신의 죄가 용서됨을 믿는 가운데 지은 죄들을 날마다 회개하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며, 가장 필요한 일입니다. 

 

2020년 07월 30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06)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가 행함으로 받는가?(약2:14~19)_2020-07-27(월)

https://youtu.be/lO2U3pVCr-A  [혹은 https://tv.naver.com/v/14982185  ]

 

 

1. 구원은 어떻게 받을 수 있나요?

  구원이란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가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천국에 들어가려면 회개하고 믿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막1:15, 마4:17, 행2:39, 20:21). 곧 믿음과 회개가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였던 것입니다.

 

2. 왜 오늘날에 들어와 구원의 요소 가운데 하나인 "회개"가 빠져버린 것인가요?

  그것은 중세시대의 잘못된 구원관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이 "오직 믿음"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고, 이어서 만세전 개인 구원예정론이 개혁신앙의 기초가 됨에 따라 회개는 점차 시야에서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중세시대만 해도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은혜)와 행함(공덕)"으로 주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은총"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베푸시는 은혜가 아니라, 베드로와 교황 그리고 교황의 대리인격인 사제들에 의해 베풀어지는 은총으로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사제들이 영세(세례)를 베풀고,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사해주지 않으면 은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한 모든 사람은 공덕을 쌓을 때에 비로소 죽어서 연옥에 떨어지지 않고 곧바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하여 천주교에서는 선행과 기부와 공덕을 매우 강조합니다. 그것도 부족하니 구제와 고행도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중세의 신부의 한 사람이었던 루터는 고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어보려고 노력해보지만 그 어떤 것도 자신의 구원을 확신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는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고민을 자기 위에 있는 신부님에게 아뢰었고 그러자 그가 건네준 성경책을 받아들고 그것을 읽다가 결국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것을 발견하기에 이르른 것입니다. 루터도 처음에는 회개의 중요성을 같이 언급했지만 "오직 믿음"을 강조하다보니 점차로 "회개"는 뒤로 밀려나기 시작하였고, 조금 후에 등장한 "만세전 개인 구원 예정론"이 퍼짐에 따라 성도들의 시야에서 "회개"는 점차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3. 개신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행함(행위)로서 구원얻는다고 하는 분들의 주장은 과연 옳은 것인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회도 역시 타락하여 그 도가 지나치자, 개신교인 가운데서도 구원은 믿음과 행함으로 얻는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마7:21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라고 하셨으며,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약2:26)"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즉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2:14)"라고 야고보는 분명하게 언급했습니다. 그렇지만 행함을 구원의 요소로 정해버린다면 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행함이 구원에 있어서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이것을 교리화시켜 구원의 필수요소로 정해버린다고 하면, 이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이 한 사람도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4. 행함(행위)를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해서는 아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믿음과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믿음과 행함이 필요하다고 규정해버리면, 그때부터는 다음과 같은 치명적인 단점이 나타나시 시작합니다. 첫째, 얼마만큼 행동으로 옮겨야 구원받을 수 있는지 그 기준을 아무도 정할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은 더욱 요원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20:12)"라는 명령을 행동으로 옮기려면, 과연 얼마만큼 부모에게 잘 해야 공경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침마다 문안인사를 드리면 공경하고 있는 것인지, 매주 외식을 시켜드리고 옷 한 벌씩 사다드려야 그분을 공경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십계명 중에서 10번째 계명인 "탐내지 말라(출20:17)"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대체 어느 정도의 물품을 사야 탐심을 부리지 않은 것인지 사실 아무도 정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행함의 구원의 조건이 되어버리면, 자신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과 회개가 부족할 경우 행함으로 그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고 시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믿겨지지는 않지만 천국에는 가야 하겠는데, 어떻게 잘 안 되니까 헌금이라도 많이 내서 천국을 가려고 시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필연코 자신의 믿음과 회개의 부족한 부분을 봉사를 해서, 선행과 구제를 해서 메우려고 시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셋째, 행함을 구원의 조건으로 설정해버리면, 행위를 많이 한 사람은 자기의 행위(자기의 의로움)를 으시대거나 자랑하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되고, 행함이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지만, 구원을 위해서 행동을 하다보면, 너도나도 자기자랑에 빠지게 되고 그러면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것일 뿐 예수님의 의는 어디론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눅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중에서 바리새인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눅18:11~12).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11-12)" 그가 성전에 나온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자기의 의로운 행위를 자랑하려고 나온 것입니까? 그런데 그 기도를 들어보면 꼭 자기자랑하기 위해 나온 것 같습니다. 결국 행위를 강조하다보면 자기자랑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고로 우리는 행위라는 것을 통해 자신이 제대로 구원을 받는 노정에 달리고 있는지를 확인해볼 수는 있어도 그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설정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5. 구원에 있어서 행함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행함을 구원의 하나의 조건으로 볼 것이 아니라 다른 용도로 그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음 이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볼 것은 자신은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고 하는데, 그리고 수십년을 신앙생활을 해 왔다고 하는데, 그에게 믿음에 합당한 열매들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최소 그의 믿음이 과연 정상적인 믿음인지 아닌 곧 그 믿음이 자신을 구원할만한 합당한 믿음인지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2020년 07월 27일(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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