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가를 한꺼번에 정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올바른 구원론에 관해 8년간을 줄곧 외치다보니 무엇이 올바른 구원관이라는 것이 확실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핵심은 "믿음과 회개"라는 것이다. 왜 그런지를 오늘 말씀에 다 나온다. 그리고 구원론과 맞물려 종말에 대해서도 말씀을 나누다보니 그것도 어느 정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전파하고 있는 종말론이 100% 맞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양한 종말론이 정통 교리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은 상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구원론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을 모르면 그날 땅을 치고 후회할 사람도 아마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본인이 죽는 날에 알게 될 것이다.

 

2021-09-05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구원론과 종말론의 절대성과 상대성의 차이(마19:23~30)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fEC-2RisDCs [혹은 https://tv.naver.com/v/22300111 ]

 

1. 들어가며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관건은 바른 구원관을 갖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과연 죽은 다음에 나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나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지만 죽어보니 그곳이 지옥이더라 하면 얼마나 낭패이겠는가?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의 문제는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아니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은 과연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는가? 오직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게 되는가? 또한 한 번 얻은 구원은 영원히 안전한 것인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회개'는 하면 좋은 것이고 하지 않아도 천국에 들어가는 데에는 지장이 없는가? 사실 구원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다면 종말론은 또 어떠한가? 구원의 최종완성은 우리의 영혼이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입성하는 것이다. 고로 우리의 구원과 맞물려 인간의 최종적인 완성인 종말론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런데 종말론에 대한 견해는 너무나 다양하다. 주님이 환난 전에 오시는지, 환난 중간에 오시는지, 환난 후에 오시는지 각 교단과 목회자의 신앙노선에 따라 각각 다르다. 그럼 우리는 과연 어떤 노선을 따라가야 하는가? 혹시 내가 주께서 환난 후에 오신다고 믿고 있었는데 혹시 주님이 환난 전에 오신다면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이러한 문제를 체계적으로 한 번 쭉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2.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사람이 구원을 어떻게 받는지 하는 것은 기존에 내가 이렇게 들어왔으니 아마 그것이 맞겠지 하고 생각하면 아니 된다. 구원은 과연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천국과 지옥에 들어간 사람들의 간증도 참고하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기존 교리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잠시 내려놓으라. 그리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구원론 하나의 주제만 가지고 설교하더라도 아마 일 년을 설교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은 구원론과 종말론을 서로 비교해보는 시간이므로, 구원론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만 언급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믿음과 회개"라고 할 수 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고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무엇이 진리인지 헷갈릴 때에는 사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먼저 앞세우라. 그것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원얻는 믿음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첫째,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구원자이시며 나의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다. 그분은 원래 하나님이셨는데, 구약에서 약속하신 대로 아들의 신분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래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담당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또한 그분 자체는 죄가 없는 분이심과 그분에게만이 부활 생명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해 그분은 약속대로 3일만에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이, 믿음의 핵심이다. 그리고 둘째, 그렇게 해서 얻은 구원을 무효화시키지 않기 위해서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시작하는 믿음은 사실 어렵지 않게 가질 수 있으나(한국적인 상황으로 볼 때), 그것을 지켜내는 믿음을 계속 자고 있는 것은 쉽지 않다. 만약 우리가 지금 아프가니스탄에 있다고 치자, 과연 우리가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지켜내기 위해 탈레반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 순간에도 그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10:9에서 말하고 있는 "우리가 우리의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얻는 회개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 자신이 예수님을 몰라보고는 전능자가 우리를 구원하러 왔다 간 사실을 인정하지 채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멀리했던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회심으로서의 회개"라고 한다. 이러한 죄의 고백이 없는 자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둘째, 한 번 회심으로서의 죄를 고백했다면 그후부터는 날마다 짓는 자범죄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이때 과거에 지었던 죄들과 자신의 조상들이 지었던 죄들은 같이 회개한다면 더욱 좋다. 왜냐하면 조상들의 죄와 자기가 예수 믿기 전에 지었던 죄들 특히 우상숭배의 죄는 출20:5의 말씀에 따라 귀신들이 사람의 몸 속으로 들어와 3~4대까지 머물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철저히 회개할 수록 귀신들이 주는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후손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회개의 한 파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정 회개했다면 그 뒤부터는 회개했던 죄를 반복해서 짓지 말아야 한다. 만약 지었던 죄를 끝까지 끊지 못하고 반복해서 짓게 된다면 그는 결코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회심할 때에 한 번 회개했다면 그 다음부터는 반복적으로 회개하는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얻은 구원을 완성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예수께서 요한복음 13장에서 온 몸을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요13:10). 

 

3. 한 번 얻은 구원은 영원한가?

  어떤 사람은 자신의 믿음('지키는 믿음'이 아니라 처음으로 믿었던 믿음)과 회개('반복적인 회개'가 아니라 '회심으로서의 회개')로 한 번 구원을 얻었으니 그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이 말 자체는 틀린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 얻은 구원이 영원히 안전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예수님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이라고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우상숭배한다면 그의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계21:8). 고로 이미 믿고 회개하여 구원을 얻었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죄를 범하면서 회개하지 않는 자는 죽을 때에 하늘의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질 것이다(계3:5). 디모데전후서를 보면 믿음을 가졌으나 믿음에서 파선하는 자를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으니 찾아보라. 한 번 가졌던 믿음이라도 그것을 버리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히브리서를 보더라도 한 번 구원을 받은 자라고 할지라도 고의로 다시 죄를 범하고 배도하게 된다면 그에게 회개할 기회가 제공되지 않을 것을 경고하고 있음도 참고할 만하다. 그러므로 한 번 얻은 영원한 구원이 영원히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뤄가야 하는 것이다(빌2:12). 

 

4. 믿음에 대한 인내와 반복적인 회개 없이도 구원이 가능한가?

  이것을 좀 더 다른 각도에서 보자. 처음 우리가 믿었던 믿음과 그리고 회심으로서의 회개를 통해 자신이 구원을 얻었다면 그는 이제 구원의 노정에 갓 들어선 것이지 그것으로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야고보서를 읽어 보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믿음 자체가 죽은 것이며 그 믿음으로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구원의 노정이 끝나는 보는 구원관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노정에 이제 첫 발을 내 디딘 자가 나의 구원은 영원하며 안전하다고 생각하거나 또한 그렇게 가르치면 절대 아니 된다. 우리는 이미 믿음과 회개로 구원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지켜내야 구원은 유지되는 것이고, 회개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씻어내야만이, 죽을 때에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런 자가 새 예루살렘 성의 신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예수님을 믿었던 자라도 주님을 부인하는 비겁한 자들과 우상숭배자들을 비롯하여 십계명을 어기는 자들은 반드시 불과 유황으로타는 불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을 알라(계21:8). 그래서 이미 구원을 얻은 자라고 할지라도 자기의 겉옷을 계속해서 빨지 않는 자(현재분사형)는 생명나무에 나아가지 못할 것이며,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에 내버려질 것이라고 경고하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계22:14~15).

 

5. 영적인 측면에서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또한 사실 구원이란 영적인 영역에서 볼 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덧붙어진(추가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음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가 진실로 회개하고 믿었다면 그에게는 곧이어 성령께서 들어오실 것이다(요1:12, 계3:20). 그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영 안에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신다(롬8:2, 고전15:45).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드디어 '생명주는 영'이 되셨기 때문이다(고전15:45). 이것을 우리는 '거듭남'이라고 부른다(요3: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그 안에 생명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회개하고 믿어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때에 우리 안에 또다른 생명을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 그 생명은 어떤 생명인가? 첫째는 영원한(정확히는 '시대의') 생명이요, 둘째는 아버지의 생명이요, 셋째는 부활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은 우리가 죽는 그날까지 어느 누구도 깨뜨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 예수님을 믿어 거듭남으로 그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죽는 그날까지 그는 구원받은 채로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언제 사람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 그것은 그가 죽을 때다. 그가 죽을 때에 그간 믿음을 지키지 못해 주님을 부인하였거나 계속해서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면 죽는 순간, 성령께서 그 사람을 떠나게 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그 사람과 함께 지옥에 가시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 그러므로 바울은 한사코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했으며(살전5:19), 또한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고 했다(엡4:30).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붙잡고 있고 인치고 있는 시간은 우리의 구속의 날 곧 우리의 육체가 죽고 우리가 부활체를 입는 바로 그날까지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엡4:30).

 

6. 한 번 우리 안에 들어오신 보혜사 성령께서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그렇다면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영원토록' 떠나시지 않는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요14:16의 말씀이야말로 자신의 주장을 보증해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그것은 한글성경이 가르쳐주는 것이지, 헬라어 원문에는 그렇게 나와있지 않다고 말이다. 성경에는 '영원토록(영원히)' 혹은 '세세토록(세세무궁토록)'이라는 낱말(부사어)가 가끔 나온다. 시간의 영원성을 뜻하는 이 말은 영어에서도 '포에버(forever)'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헬라어로 보면, 그것은 그러한 뜻이 아니다. '에이스 톤 아이오나(eis ton aiwona)'라는 전치사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에이스(into)'는 '~안으로'라는 뜻이지만, 시간을 나타내는 명사와 결합하게 되면, '~까지(till), ~동안(for)'이라는 뜻으로 바뀐다. 그런데 이 전치사 뒤의 단어가 정관사 '톤(the)'과 명사 '아이온(age, period, generation, world)'이라는 단어다. 그런데 '아이온'은 우리말로 '시대, 세대, 세상'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므로, "에이스 톤 아이오나"는 "그 시대까지" 혹은 "그 시대동안"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이는 우리 안에 들어와셨던 성령께서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동안 우리의 구원을 보증해주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죽는 날에 우리의 믿음이 파산되었거나, 우리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아서 겉옷(두루마기)이 더렵혀진 채 계속 있다면, 성령께서는 그날 우리를 떠나고 말 것이다. 그러면 그날 하늘의 생명책에서 우리의 이름은 지워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구원에서 탈락하게 된다. 사실 우리가 그동안 생각해 보았던 끝이 없이 계속되는 '영원토록(영원히)'이라는 말은 정확히는 '세세토록(세세무궁토록)'이라는 뜻으로서, 헬라어 원문을 보면,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톤 아니오논'이다. 이 말은 영어로는 'for the ages of the ages'라는 뜻으로서 한글로 번역한다면, "그 시대들(세대들)의 시대들(세대들)까지"이다. 여기에 나오는 '아이온(시대,세대)'는 단수가 아니라 둘 다 복수의 형태다. 즉 이 문구는 "이 시대와 오는 시대 그리고 이어지는 그 시대와 그 다음의 시대까지"라는 뜻이다. 고로 이 문구야말로 진짜로 영원토록이라는 뜻이 된다(딤후4:18). 이러한 속성은 하나님만이 가지는 속성이자(계4:9) 영원한 세계에 들어갔을 때에 우리가 비로소 이해할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시간(계14:11)이라고 할 수 있다.  

 

7. 내가 믿고 따라가고 있는 종말론은 구원의 잣대가 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날 듣고 있고 믿어왔던 종말론은 과연 구원의 잣대가 될 수 있는가?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가 환난후휴거를 믿었다고 해서 그가 구원을 받고, 자기가 환난전휴거를 믿었다고 해서 그가 구원을 못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다 더 성경적인 견해를 따르지 않은 자들은 그날에 매우 혼란스러움을 경험할 것이 불보듯 뻔하지만 그것이 그의 구원을 좌지우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날이 되면 자기가 믿고 따라왔던 목회자에 대한 실망감도 이만 저만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가 다 자신의 선택의 결과인 것이지 목회자의 책임으로만 되돌릴 수는 없다.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목회자가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어디까지 자기가 어떤 목회자와 어떤 교단의 견해를 따라갈 것인지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자신의 선택의 결과였던 것이지 강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종말론을 어느 것을 믿었다고 해서 교회가 왜 당신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종말론을 믿지 않느냐면서 그를 구박을 하거나 그를 고문을 하거나 그를 교회에서 추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른 말씀은 다 자기가 섬기는 목사님의 견해를 따라가지만, 종말론의 견해에 있어서는 다른 목사님들의 견해를 따라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말론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흔들리거나 허물어지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에 존재하는 다양한 종말론의 견해가 다 정통교회 안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교단마다 그 견해가 다르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고로 어느 누가 환난전휴거를 믿었다고 해서 그를 이단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때 가서 자신의 가슴을 치는 일은 꼭 있을 것이다. 

 

8. 가장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는 종말론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가장 성경적인 종말론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것은 사도요한의 말씀이나 다니엘이나 에스겔 혹은 스가랴서에 나오는 말씀을 우선 적용할 것이 아니라 사복음서와 요한계시록 1~2장과 21~22장에 나온 말씀을 우선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 나와 있는 말씀들은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고 따라가야할 가장 안전한 종말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종말장'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마24장에 나오는 말씀으로서, 마24:29~30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다. 

마24:29-30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렇다. "그날 환난 후에" 주님이 오신다고 했다. 그리고 주님은 모든 사람들이 다 그 환난의 날을 겪게 될 것인데, 환난의 날이 너무나 혹독하여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한다면 모든 육체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셔서 택하신 자들을 위해 그날들을 감해주신다(줄여주신다)고 하셨다(마24:22).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고로 숫자적인 7년대환난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어야 한다. 다 환난을 통과하겠지만 환난의 날을 줄여주신다는 말을 믿고 그 환난의 날을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안전한 것이다. 

  그럼, 휴거는 언제 일어나는가?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인류 최후의 전쟁으로서 아마겟돈 전쟁 전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때가 되면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가 불신자들 및 하나님을 거역하는 땅의 왕들을 미혹하여 하늘의 군대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이때 하늘의 군대의 대장은 재림하시는 우리 주 예수님이시며, 그분을 따르는 군대는 천사들과 이미 구원받아 천국에 있던 성도들들과 그 직전에 휴거받은 성도들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전쟁이 있기 전에 먼저 성도들의 휴거가 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때가 정확히 언제인가? 정확히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오는 7편의 말씀을 보면, '곡식의 추수(성도들의 휴거)'와 '땅의 포도송이의 추수(아마겟돈전쟁)'가 나오는데, 아마도 이러한 순서로 진행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왜냐하면 사실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들의 휴거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신앙생활에 있어서 다른 모든 것은 조금 양보할 수 있는 영역이 될 수 있어도 구원관에 있어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진리가 있다. 그것은 회개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구원관을 갖는 것은 우리의 목숨처럼 소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오직 구원관은 오직 예수님의 가르침을 절대적으로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막1:15, 마4:17, 계22:14). 만약 이러한 구원관을 놓치게 된다면 우리는 구원에서 멀어질 것이고 심지어는 구원에서 탈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계3:5).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과 회개로 구원의 여정에 발을 딛기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완성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그러나 아니다(죽어보면 알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영혼이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에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딤후4:18, 계22:14~15). 그때까지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가 이미 얻은 구원을 이뤄가야 한다(빌2:12). 그런데 우리의 이러한 개인적인 구원의 사건 말고, 주님께서 오셔서 온 세상을 끝내시는 그날이 우리에게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종말의 때가 우리 눈 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의 때에 정신차려야 한다. 그날 주님 앞에 한 치의 부끄러움이 없이 설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열 처녀처럼 언제 주님이 오시더라도 주님 앞에 등불 들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이 언제 오시는지는 사실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소리가 날 때 나의 영혼이 과연 주님을 영접하러 나갈 준비가 되어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날마다 회개하라. 우리의 죄를 남김없이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더럽혀진 옷이 깨끗해지기 때문이다. 신랑되신 우리 주님께서는 죄로 얼룩진 겉옷을 걸치고 있는 더러운 성도를 결코 신부로 취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021년 09월 05일(주일)

정병진목사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75세 때에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아들을 보기까지는 약 25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가야 했다. 왜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렇게 더디 성취된 것일까?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오늘은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약속과 그 성취의 비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2021-05-14(금) 금요기도회
제목: 창세기강해(98) 하나님의 약속은 정한 때와 기한이 있다(창21:1~7)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0nCZiPFhYVA  [혹은  https://tv.naver.com/v/20227063 ]

 

 

1. 들어가며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 성취될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먼저 약속을 하신 다음에 그리고 그것을 이루신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이라도 금방 금방 성취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러한가?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기까지는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처야 할 과정이라도 있는 것인가?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삭에 대한 약속의 성취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은 과연 언제 성취되는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크게 3가지다. 하나는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기업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땅의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의 씨를 통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지 24년이 지나도록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약속은 더디 성취되고 있었다. 아직 하나님께서 약속한 씨가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약속의 땅도 차지하지 못했으며,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은 때도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의 약속이 최초로 성취가 되는데,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00세였다.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약속한 약속의 씨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사라가 낳은 아들 "이삭"이다. 이삭은 약속의 자손으로서, 혈통적으로 적자일 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적자인 자식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의 첫단추가 꿰어지는 싯점이 바로 이 싯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그에게 약속이 주어진 이후 무려 25년이 지난 다음에는 첫 약속이 성취된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 하나님의 약속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3.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더디 성취된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갈대아우르에게 아브라함을 불러내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어떤 축복을 약속하셨다. 그것은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아브라함이 자식을 낳아 장차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하신 것이다(창12:2). 또한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부푼 꿈을 안고 하나님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가나안 땅까지 이주해갔다. 그리고 거기서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도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축복의 말씀이 성취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어야 했다. 처음으로 자식을 본 때는 25년이 흐른 시점이었고,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한 때에는 그때로부터 약700년이 더 필요했다. 왜 그랬을까?

  왜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직후 아니면 조금 뒤에 그 약속이 성취되지 아니하고 무려 25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서였다. 즉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축복이 아브라함에게 성취될 수 있는 준비가 아직 덜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 약속을 성취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사람으로 준비가 되었더라면 그의 나이 99세가 되기 전에 그는 이미 축복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무려 2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으로부터 첫 후사로서 이삭의 출생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지 않은 데에는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말씀을 잊어버린다거나 모른 채 하시는 분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혹 문제가 있다면 우리 인간편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만한 준비가 덜 되었기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이루시지 않았던 것이다. 

 

4. 아브라함은 언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만한 준비가 되었는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기까지 아브라함은 그것에 합당한 준비를 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되지 아니한 일꾼을 쓰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준비되었을 때에 비로소 성취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99세 때에 하나님의 방문을 받았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2가지 사항을 말씀해 주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실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2가지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첫째는 그의 믿음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이 아직 준비가 안 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이 그의 마음에 있지 않았으니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그에게 사라는 절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람으로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창17:1)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나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면 안 될 일이 없으며, 하나님만이 또한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때까지 아브라함에게는 그것이 부족했거나 없었다. 그것을 깨우쳐주신 것이다. 그래서 그때 비로소 아브라함은 전능자를 바라보게 된다.

  둘째는 자신의 잘못을 그냥 계속 간직하고 있는 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99세가 되기까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열심히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한 말씀의 성취가 되어야 하는데, 그는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고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하시지만, 동시에 당신이 하신 말씀만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99세 나타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그가 따르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에 대한 회개의 의미로서 할례를 받으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뒤 어떻게 했는지 아는가? 그는 그날밤에 즉시 모든 집안의 남자들을 다 데려다가 할례를 시행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진정 이전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회개의 행위였고, 하나님의 전능하심만을 신뢰하겠다는 표시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실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 그때가 언제였는가?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누군지를 정확히 알 때부터였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정확히 인정하고 회개할 때부터였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해 아직 믿음이 준비되지 않았거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함으로 자신을 새롭게 하는 회개가 터지지 않았다면 그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더 멀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이 왜 내게서 성취되지 않는다고 탓할 것이 아니라 왜 그 약속이 내게 성취되지 않고 멀어지고 있는지를 파악하여 그 문제를 헤결해야 한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믿음과 회개였다. 이 이 두 가지 사항이 비로소 준비된 것이 그의 나이 99세 때였다. 그리고 사라의 나이는 그때가 89세였다. 

 

5. 하나님의 약속이 빨리 성취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팁들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뜻이 빨리 성취되게 하려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들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항상 현재에 살고 계신다. 그분은 "전부터도 계속 있어왔고 지금도 여전히 계시며, 지금도 오고 계시는 이"이기 때문이다(계1:8). 그러므로 그분에게 모든 시간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현재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약속이 더딘 것 뿐이지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속히 우리에게서 이루어지기를 한 가득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어떤 생각들이 필요한 것인가? 여기에는 몇 가지 성경적인 힌트들이 있다.

  첫째, 모든 약속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는 것이고 그러한 때가 찼을 때에 비로소 약속은 성취된다는 것이다(갈4:4). 갈4:4에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시되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고 증거한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도 하나님이 생각하고 있는 시간이 차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참고로 "시간"이란 절대적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시간으로서, 우리가 준비되면 그 시간이 차는 그러한 종류의 시간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이룰 수 있는 자 곧 그러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나타나거나 그러한 사람이 출현할 때까지 기다리거나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깨우치신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이 그러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얼마나 바라시고 있었으며, 또한 그렇게 되도록 깨우치셨는지를 우리는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셋째, 사람이 어떤 일을 성취한 다음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성취되었다고 할 때까지 하나님은 그를 다루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99세가 될 때까지 사람의 힘만으로는 그의 아내 사라로부터 아들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 사라도 자기를 통해서는 결코 아기가 태어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고, 그리하여 아브라함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회개하게 되자 비로소 하나님의 약속도 성취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자기를 통해 이뤄지기를 희망하는 자들은 회개를 잘 해야 한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이 두가지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그만큼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6. 나오며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성취되는 듯 하나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빨리 그 약속을 성취하고 싶어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복을 받을 준비가 우리에게 되어 있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도 당신이 했던 약속을 곧바로 성취하지는 않으신다. 복을 받을 그릇이 준비되어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시기는 그가 부름받은 때로부터 약 25년이 지난 싯점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왜 내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지 않는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따질 필요는 없다. 그건 내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자신의 뒤를 신중하게 뒤돌아보아야 한다. 그래서 어디에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살피고는 그 문제를 먼저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시간만 흘러갈 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성취되지 않고 계속해서 연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과연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늘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진짜 회개를 통해 귀신이 역사할 수 없는 깨끗한 환경을 갖추어가야 한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잘못된 것들은 하나씩 하나씩 고쳐가나고, 준비가 안 된 것은 지금부터라도 차곡차곡 준비한다면 우리에게도 이삭이 출생하게 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5월 14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88) 하나님의 언약은 언제 아브라함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었는가?(창17:19~27)_2021-05-05(수)

https://youtu.be/B1fUn1M63Rg  [혹은  https://tv.naver.com/v/20017927 ]

 

1. 하나님께서는 여러 번 아브라함에 나타나 말씀하셨는데, 언제 처음으로 영원한 언약에 대해 말씀하셨나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여러 번 나타나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그를 불러내실 때부터 그의 나이 99세 때까지 하나님은 총 5번에 나타나 그에게 약속하셨습니다(창12:1~3, 7, 13:14~17, 15:4~7,13~21, 17:1~21). 이 중에서 네번째 언약을 "횃불언약"이라고 부르며(창15:4~7,13~21), 다섯번째 언약을 "할례언약"이라고 부르는데, 다섯번째 언약이 바로 "영원한 언약"에 해당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영원한 언약의 말씀을 하실 때에는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에 그에게 다섯번째로 나타나실 때였습니다(창17:7,13,19).

 

2.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언약을 누구와 세우셨나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99세 때에 비로소 "영원한 언약"을 아브라함과 맺으셨습니다(창17:7~8,13,19,21). 그런데 이 언약은 실제적으로는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낳아준 아들과 세우는 것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진짜 영원한 언약은 아브라함의 약속의 씨인 이삭과 세우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창17:21).

 

3.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언약을 왜 이삭과 세우시겠다고 하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영원한 언약을 세운다고 말씀은 하셨지만 그 언약이 육체를 따라 태어난 이스마엘에게 이어질 것이 아니라 ,약속의 씨 곧 사라가 아브라함에게서 낳아준 아들에게 이어질 것이므로, 실제 영원한 언약은 아브라함의 아들들 중에서 이삭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비록 아브라함과 영원한 언약을 세우고 있지만 육체를 따라난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과는 세우지 않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약속의 씨로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고안해낸 작품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아들과는 영원한 언약을 세우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해서 다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꼭 약속의 말씀을 따라 난 자와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표명한 것입니다. 만약 혈통적으로 태어난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과 언약을 세운 것이 영원한 언약이 되어버린다면 그 언약은 이삭으로 이어지지 않고 이스마엘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왜냐하면 이 영원한 언약은 여호와께서 그때 아브라함과 세우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진짜는 여호와께 다시 오셔서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과 세울 때에 진짜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표론적으로 볼 때에, 아브라함은 성부 하나님의 역사를, 이삭은 성자 예수님의 역사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진짜가 아니라 예표(모형)에 해당되며, 실제적으로는 여호와께서 아들로 오신 분 곧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고 받아들이며 회개하는 사람들과 세우는 언약이 진짜 언약이며 영원한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회개하는 자가 영원한 언약의 효력을 받게 됩니다. 

 

4.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까지 그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지 않으신 것인가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누군지를 모르는 자와는 영원한 언약을 맺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나이 99세 때까지 하나님을 실은 잘 몰랐습니다. 그는 24년을 하나님을 믿고 따라다닌다고 다녔지만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것을 잘 몰랐습니다. 그는 안 되는 일은 처음부터 아예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99세가 될 때까지 자신의 아내 사래가 장차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때까지 자신이 믿고 따라다녔던 분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창17:1).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인간적인 방법,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불임의 저주 가운데 있는 아브라함과 사래를 불러내셔서 복을 주신다고 하셨던 것일까요? 고로 하나님이 누군지를 제대로 모르는 자에게, 하나님은 결코 영원한 언약을 맺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곧 오늘날에 들어와서도 하나님이 누군지를 잘 모르는 자는 결국 영원한 언약이 그에게 성립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자는 하늘나라를 결코 기업으로 물려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천국에 들어가서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차지하는 복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5.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부터 언약의 하나님을 확실히 계시하시며 영원한 언약을 유효하게 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누군지를 모르는 아브라함에게 결코 저주를 풀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에게는 복을 주시겠다고 하는 약속만 있었을 뿐 실제적으로 아브라함은 계속 저주 가운데 놓여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그의 가문이 이미 부친때부터(아니면 그 이전부터) 우상숭배와 살인과 폭력의 죄로 인하여 저주 가운데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의 아내 사라도 데라의 딸로서 자식을 낳지 못하는 불임의 저주 가운데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부름받아 24년이 지났어도 아브라함은 여전히 저주 가운데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99세에 나타나시어 자신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못할 것이 없는 존재이니 ,이제부터는 그가 저주 가운데서 빠져나오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한 채, 자신의 고추를 이용하여 약속의 씨가 아닌 육체적인 씨(이스마엘)을 낳은 죄를 회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 때만 해도 아브라함은 정말 자신의 아내가 자기를 통하여 아들을 낳아줄 줄을 정말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린 13년이라는 세월이 무서웠고 두려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으로 자식을 낳았던 지난 날의 자신의 과거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바로 그날에 자신의 고추 끝을 자르게 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기자신만이 아니라 자기 집안에 있는 모든 남자들을 다 데려다라 고추의 포피를 자르게 됩니다. 만약 이때 그가 정말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는 그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자가 포경수술을 하게 되면 3일간은 도무지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적이 쳐들어와도 속수무책이 되어 몰살당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기꺼이 바로 그날 즉시 모든 남자들의 포피를 다 베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전의 자신의 불신앙의 죄와 잘못을 할례의 의식으로 시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란 아브라함이 진심으로 회개를 시작한다는 표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할례의식은 시간이 지남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할례만 받으면 언약자손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회개는 하지도 않은 채 말이죠. 그러므로 사도바울을 말했습니다. 할례는 마음에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회개하는 마음 없이 할례만 받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결국 할례를 통해 회개의 마음을 하나님께 보이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새 일을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그가 경험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삭의 출생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비로소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눈을 뜨고 회개를 시작하자, 그에게 비로소 영원한 언약을 효과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하나님이 누군지를 정확히 그에게 일러주셨습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창세기 18장~19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하시고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일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도 과연 하나님이 누군지를 제대로 믿고 있는지를 다시금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분이 진정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그분이 육신을 입고 아들로 오신 한 분 하나님 곧 예수님이신지를 믿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세 분으로 있는지를 말입니다. 그리고 진정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있는지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직까지 잘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결코 영원한 언약의 자손이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021년 05월 05일(수)

정병진목사

 

아브라함은 정말 처음부터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을가? 그래서 갈대아우르를 떠나 하나님을 따라나선 것인가? 만약 그것이 맞는 것이었다면 그에게는 실수가 없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커다른 실수들을 범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두번째 실수는 그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매우 약했다는 사실을 들려준다. 그렇다면 그의 두번째 실수는 대체 무엇이며 거기서 그는 무엇을 깨닫게 되었던 것인가? 그 속에는 저주로부터 해방되는 직접적인 열쇠가 들어 있다.

2021-05-02(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창세기강해(85) 하나님의 때와 아브라함의 두번째 실수(창16:1~3과15~17: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wKG8GgloHWM  [혹은 https://tv.naver.com/v/19965887  ]

 

 

1. 들어가며

  처음부터 온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 일컬었던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실수를 통해서 배웠다. 아니 실수가 그의 신앙의 교재가 된 것이다. 그만큼 온전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어렵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내가 실수했다고 생각할 때가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최고의 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몇 번에 걸쳐 실수했는가? 성경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3번은 실수했던 것 같다. 그중에서 첫번째의 것은 그가 부름받은지 얼마 안 된 시점에 있었는데 그것은 지난 주일에 다루었다(설교제목: 창세기강해(78) 실수를 통해 배워가는 아브라함). 오늘은 그가 부름받은지 10년째 되던 해에 있었던 사건을 다룰 것이다. 그는 왜 또다시 실수한 것인가? 그리고 어떤 실수를 한 것인가? 그리고 이번 실수는 그의 첫번째 실수와는 어떻게 다르며, 우리가 이번 실수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 아브라함의 두번째 실수는 무엇이며 언제 일어났는가?

  그럼, 아브라함의 두번째 실수란 무엇이며, 그것은 언제 일어난 것인가? 아브라함의 두번째 실수는 그의 나이 85세 되던 해에 일어났다. 그 때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지 10년 되던 해였다. 하나님께서는 그간에 4번이나 나타나셔서 그에게 그의 씨(자손)에 대한 약속을 해 주셨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장차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했다(창12:2), 그런데 그것은 한 명의 아브라함의 씨(자손)에게서 시작될 것이며(창12:7), 그 씨는 땅의 티끌같이 많아질 것이고(창13:16),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창15:5)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10년이 다 되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브라함의 처였던 사래가 말했다.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내 여종에게 들어가 가문의 대를 잇도록 합시다". 그러나 아브라함도 아내의 말을 듣고 애굽사람 사래의 여종 하갈로 들어갔다. 그래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었다. 아브라함은 매우 기뻐했고 그의 이름도 천사가 하갈에게 가르쳐준대로 "이스마엘(하나님께 들으심)"이라고 지었다. 아브라함은 이제 상속자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일이 있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떠나가셨기 때문이다. 

 

3. 본부인이 자식을 낳지 못하는데 대를 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본부인이 자식을 낳지 못하는데 대를 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담부터 예수님께서 72대손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자식을 낳지 못해 양자를 삼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아담의 10대손이었던 아브라함 대에 이르러서 불임의 저주가 아브라함의 집에 임했다. 사래가 자식을 낳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고학적 발견을 토대로 살펴보니, 고대 근동에 있었던 사회생활제도가 바벨론왕 함무라비 법전에도 들어 있었다. 이 법전은 총 282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거기에 취첩에 관한 조항이 총 5가지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본부인이 자식을 낳지 못했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나와 있으니 그것은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하게 되면 아내는 자기를 대신하여 첩을 얻어주게 되어 있었다. 만약 아내가 첩을 얻어주지 않으면 남편은 스스로 첩을 둘 수 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첩을 얻어주어 남편이 자식을 낳았는데도 남편이 다른 여자를 또 첩으로 얻으려하면 그것은 절대 허용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사래가 아브라함에게 첩을 주어 자식을 낳게 한 것은 자기 집안에서 자손이 끊어지지 않도록 많은 아량을 베푼 것이다. 그리고 그 첩을 통해 아들을 낳아 가문의 대를 잇게 한 것은 아주 잘 한 일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얻은 후 그를 떠나셨다. 

 

4.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떤 것이었나?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첩을 얻어 아들을 얻은 것은 과연 잘못된 것이었을까? 좀 전에서 살펴보았지만 이방인의 풍습으로 보았을 때에는 그건 아주 잘한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본부인이었던 사래의 이러한 결정은 상당히 박수를 받을만한 행동이었다. 자신만이 남편을 차지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기꺼이 대를 이을 후손을 얻는 것을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아니 셈의 가문이 끊겨질 위험 가운데서 있었는데 첩을 통해서 가문을 이을 사람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평가는 전혀 달랐다. 그것은 크나큰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 뒤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떠난 사건을 통해서 확인이 되며, 13년만 다시 나타난 말 속에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즉 하나님께서 그때 주신 말씀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크게 세 가지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내 얼굴 앞에서 걸어가라) 완전하라(흠이 없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잘못은 첫째로,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꾸중하기 시작하면서 그에게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셨기 때문이다(창17:1a). 사실 아브라함은 갈대아우르를 떠나기 전부터 이미 자신의 아내가 불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때가 언제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녀가 시집오면서부터 알려진 것이 아닌가 추측이 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갈대아우르를 떠나왔지만 아브라함의 뇌리 속에서 사래는 항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이었다. 그것은 그때도 그랬고 하란을 떠난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랬다. 그에게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에도 아브라함은 자식의 처가 자식을 낳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창17:17~1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아브라함에게 내뱉으신 첫 마디는 "아브라함아, 너는 내가 못할 것이 없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왜 믿지 못하느냐?"라고 그를 꾸중하신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그의 아들 이삭은 달랐다. 이삭은 40세에 결혼을 했는데 20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때 그가 한 일은 하나님께 자신의 아내가 임신할 수 있도록 기도했다는 것이다(창25:21).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식을 허락하셨으니 쌍둥이를 허락하신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자기 아내는 임신하지 못한다고 결정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러니 그간 단 한 번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내가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았다. 그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창17:1b).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을 두고 하나님과 상의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도 않았으며 자기가 스스로 결정하여 이방인의 풍습을 좇아 둘째부인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기 때문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하갈을 "첩"이라고 번역해놓았지만 히브리어성경에서는 '부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하갈은 둘째부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첫째부인을 무시할 수 있는 위치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사래에게 했었던 말을 살펴보면, 자신의 종을 첩으로 남편에게 주었을 경우 그 첩에 대한 모든 결정권이 본부인이었던 사래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사래나 아브라함이나 본부인이 자식을 낳지 못했을 때에 할 수 있는 우회적인 방법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후처를 들여서 자식을 얻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경을 살펴보라. 메시야의 조상치고 과연 어떤 사람이 자식을 낳지 못해 후처를 통하여 메시야의 조상을 낳았는지를 말이다. 한 사람도 없었다. 후처를 통하여 낳은 자식을 통해 경건한 신앙이 물려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왜 행하지 않느냐? 문제가 생겼으면 나하고 상의해서 해결해야지 왜 이방인의 풍습을 따라가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셋째로, 아브라함은 흠을 가지고 있었다(창17:1c).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후처를 얻어서 그녀를 통해서 자식을 얻으려 했던 것도 문제였지만, 자기로부터 자식을 낳아줄 여인이 함의 자손으로서 애굽여인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메시야의 조상이 되려면 혈통적인 순수성과 신앙적인 순수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자기에게 자식을 낳아주었던 여인은 함의 자손이 아닌가? 자식은 모름지기 엄마의 품속에 자라나는 것이니, 하갈의 손에서 자라난 아이는 반드시 엄마의 신앙을 따라갈 것이 불보듯 뻔한 일인데, 왜 셈의 자손을 통하여 자식을 얻지 않고 이방여인을 취하여 자식을 얻으려 했다는 말인가? 그리하여 나중에 무슨 일이 발생하게 되었는가? 그녀가 낳은 아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곁을 떠나가서 동방에서 살았는데 그후손이 바로 아랍족속이 되었고 그 족속 중에 무함마드가 나와서 이슬람교를 창시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그후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첨예한 대립이 수천년간 지속되고 있으며 그것은 지금까지도 여전하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결정은 흠이 있는 결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넷째로, 첩을 통해서 자식을 낳았던 아브라함의 행동은 가문의 저주를 온전히 해결하지 못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아브라함은 첩을 취하여 자식을 얻었다. 그러니 얼핏 보기에는 자신이 불임의 저주로부터 빠져나온듯 보이지만, 실제로 불임의 저주에는 사래에게 있었으니 저주의 실체를 내버려두고 자기만 저주에서 쏙 빠져나올 꼴이 되고 만다. 비록 자신을 하갈을 통해 자식을 낳았지만 자신의 아내 사래는 여전히 저주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자신의 조카 롯은 포로의 저주에서 건져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웠는데, 자신의 아내를 위해서는 왜 그렇게 행하지 않았는가? 그러고 자신의 아내에게 내려온 불임의 저주는 사실 자기 아버지의 우상숭배의 죄와 살인과 폭력의 죄 때문에 내려온 것인데 왜 그 저주는 가만 두고 우회하여 편법을 써서 자식을 얻으려고 하였는가? 더욱이 자신의 아내 사래는 자신의 진짜 누이동생이 아니었는가? 물론 배다른 엄마의 딸이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아버지 데라의 저주를 옴팍 쓰고 있는 이가 바로 사래인데 왜 사래의 저주는 그냥 놔두고 자신만 저주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방법을 사용하려 했던 것인가? 그것은 이 아브라함이 사래를 통해 자식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첩 하갈을 통해 자식을 얻으려 한 것은 온당하지 않는 행동이었언 것이다. 그녀를 아버지의 저주로부터 풀어주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5. 아브라함 집의 불임의 저주는 어떻게 끝나게 되었는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아브라함이 후처를 얻어 자식을 얻었던 일은 어찌 보면 참 잘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 안으로 들어가보면 그것은 믿음없는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여전히 자기의 아내만큼은 절대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것이고 계속 믿고 있었음을 표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믿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어디 그의 잘못이 이뿐이겠는가? 그는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만을 믿고 따라가야 할 신앙의 집안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적인 방법과 인간적인 방법을 끌어들여 자식을 얻으려 했었다. 그것도 함의 자손인 이방여인을 취하여 자식을 얻는 일임에도 불구하고는 그에게는 아무 꺼리낌도 없었다. 더욱이 자신은 편법을 써서 우상숭배의 저주에서 빠져나오는 모양을 취했지만, 그의 아내는 영영 우상숭배의 저주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데도 그냥 두고 보았다. 만약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그를 책망하지 않으셨다면 큰 일 날 뻔 했던 것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의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고 그를 강하게 책망하셨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놀랍게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곧바로 엎드렸다. 변명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그동안 했던 모든 행동들에 문제가 있었음을 즉각 인정한 것이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지시에 즉각적으로 순종했다. 즉 할례를 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간 저지른 그의 행동들이 불신앙적인 것이었고 편법이었으며 세상적인 방법이었다는 것을 시인하는 의미로 할례를 명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위대함은 다시 한번 부각된다. 왜나하면 실수한 것에 대해 변명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의 시간이 끝나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일하시는 시간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래를 불임의 저주로부터 벗겨주기 시작하셨다. 사라에게 없던 생리가 시작되었고 그리고 곧이어 임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말 1년 뒤에 사래가 아들을 낳아 자기 무릎에 두게 된다. 

 

6. 나오며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문제는 실수한 후에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발전적 방향으로 가지고 가는가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잘못을 모두 인정했다. 그리고 구차하게 변명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할례를 집행함으로써 자신이 행동에 문제가 있었음을 정확히 시인하고 회개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자신의 집안에 흘러 들어온 저주를 마침내 끝낼 수가 있었다. 그렇다. 아브라함 자신의 가문에 드리운 저주가 정말 끝나는 날이 그에게 온 것이다. 이것은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믿고 따라가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저주를 끝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은 회개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할례를 행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잘못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정확히 시인한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도 이 일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회개했기에 그는 모든 저주를 끝낼 수 있었고 축복의 사람으로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오후 찬양예배 시간에는 아브라함에게 할례가 정말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었는지를 좀 더 세밀하게 관찰해 볼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5월 02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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