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13) 구원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1) 예수는 바로 그 그리스도다(마16:13~20)_2020-08-03(월)

https://youtu.be/6gAHo7FR_C4 [혹은  https://tv.naver.com/v/15090249 ]

 

 

1. 구원얻는 믿음은 과연 누구에 대한 믿음인가요?

  사람이 구원얻기 위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자기자신 믿음이 있다고 말할 때, 바로 그 믿음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2.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나요?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의 내용은 2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또 하나는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3. 예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나요?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분이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유월절날에 유대나라의 예루살렘 성문밖 골고다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대제사장이자 그리고 대속제물로서, 또한 하나님의 성막 자체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에 관하여는 회개와 천국복음(12)번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탄생하셔야 했습니다. 고로 성육신은 대속의 죽음을 위한 불가피한 하나님의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죽으신 뒤에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가 다시 살아나신 이유는 그의 죽음이 인류을 위한 죽음이라는 것을 증거해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분이 죽고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그분의 죽음이 과연 자기의 죄로 인한 죽음이었는지 아니면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죽었다가 약속대로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하여, 그분은 자기 죄로 죽은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으로 죽으셨고 대속의 제사가 완전하게 하나님께 상달된 것에 대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4. 예수께서 구원자가 되기 위한 2가지 조건은 무엇인가요?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사실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이 예수께서 탄생할 기쁜 소식을 베들레헴 목자들에게 전달할 때에 이렇게 알려주었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소테르=구원자)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 그러면 예수께서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나요? 그것은 2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분이 그리스도로 오시는 것이며, 또 하나는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둘 중의 하나라도 조건이 충족되지 않게 된다면 그분은 결코 인류를 구원할 구원자가 되실 수가 없습니다. 

 

5.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약속된 바로 그 그리스도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베드로는 예수께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물어보셨을 때에 "당신은 그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마16:16). 그런데 그 고백은 예수께서 구원자이심을 고백하는 완전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셔야 구원자가 되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 오늘은 예수께서 "바로 그 메 시야"라는 사실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사시면서 사람들에게 "내가 그 그리스도니 나를 믿으라"고 했다고 해서 그분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메시야가 되시려면, 구약에 약속된 약 350가지 이상의 메시야(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을 몇가지만 살펴 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그분의 혈통에 관한 예언이 들어맞아야 합니다. 그분은 "유다지파의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어야 했습니다(마1:1, 롬1:2~3, 창22:18, 삼하7:14, 창49:10). 그런데 예수께서는 혈통적으로 볼 때 바로 그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마1:1~16, 눅3:23~38). 둘째, 그분의 신분에 관한 예언이 일치해야 합니다. 이때 그분은 아기이자 아들로 오셔야 하고(사9:6),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야 하며(창3:15), 처녀의 아들로 오셔야 합니다(사7:14). 그랬는데 딱 그렇게 되었습니다. 셋째, 그분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해야 합니다(미5:2). 그랬는데 예수의 모친이 나사렛에서 살다가 호적령 때문에 요셉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고 그때에 예수님을 거기서 출산하게 됩니다. 넷째, 그분의 공생애에 관한 예언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맹인과 못 듣는 자, 못 걷는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되어있는데 그대로 되었습니다(사29:18, 35:5~6, 26:19, 61:1~2, 마11:5). 다섯째, 그분의 죽음은 인류 위한 대속의 죽음이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대로 되었습니다(사53:5~6). 여섯째, 죽었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했는데(욘1:17,2:10), 또한 그대로 되었습니다. 이렇듯 예수께서는 메시야에 관한 구약의 350가지의 예언을 고스란히 성취하셨기에 오늘날 우리도 역시 그분을 메시야로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2020년 08월 03일(월)

정병진목사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아니된다. 왜냐하면 그분의 탄생이야기 속에 놀라운 사실들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사가 요셉과 마리에게 일러준 그분의 이름 속에 그리고 그분에 대한 칭호 속에는 그분이 누군지에 관한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니면 하나님이신가?

2019-12-06(금) 금요기도회
제목: "주님"이라는 칭호 속에 담긴 메시야의 비밀(눅2:8~12)
https://youtu.be/8oWXgYawh3I


1. 들어가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태어나셨다. 그런데 메시야 탄생에 관한 성경말씀을 살펴보면, 그분이 아들로 태어나기는 했으나 그분이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는 그분의 탄생과정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둘째는 그분의 이름이 그러하며, 셋째는 그분의 호칭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그분이 탄생할 때에 천사가 목자들에게 가르쳐준 칭호 가운데 나타난, 메시야의 비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2. 예수님의 탄생과정에 나타난 메시야의 비밀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탄생과정에는 신비한 부분이 있다. 그분은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통해 탄생한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분의 탄생에 관한 헬라어동사를 통해서 확인해 볼 수가 있다. 헬라어에는 "낳다"는 단어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아버지가 자식을 보다"는 뜻의 동사 "겐나오"라는 동사가 있고 또 하나는 "어머니가 자식을 낳다"는 뜻의 "틱토"라는 동사가 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자식을 보다(겐나오)는 뜻의 아들로 태어나셨다. 그렇더라도 혈통적으로 보았을 때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은 아니다(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을 뿐이다)(눅3:23, 6:42). 왜냐하면 요셉의 씨가 들어가서 태어난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 요셉은 마리아와 정혼상태에 있었다. 그러므로 법적으로는 요셉은 마리아의 남편이었다. 그러므로 요셉의 아들이라 불리운다(눅4:22,요1:45). 그러나 요셉의 씨를 통해 탄생하지 않았기에,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겐나오"한 아들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마리아라는 여인을 들어쓰시어 아들을 보셨다. 마리아는 당시에 처녀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성령이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이 덮는 것이 필요했다(눅1:35). 그리하여 처녀 마리아의 태중에서는 성령으로 아들이 잉태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태어난 아기는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러므로 아버지로부터 나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나오신(겐나오)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지, 출생에 의한(틱토)에 의한 하나님의 아들이기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출생에 의해 아들이 되었다면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수가 없다.

 

3. 지어질 그분의 이름 가운데 나타난 메시야의 비밀은 무엇인가?

  한편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잉태되기 전에는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서 마리아에게 앞으로 되어질 일을 일러주셨다(눅1:26~38). 그때 천사 가브리엘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 마리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요셉의 아들도 아니며, 마리아의 아들도 아니라, "지극히 놓으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려질 것이라고 했다(눅1:32).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어부르라고 하셨다(눅1:31).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아기로 잉태되고 마리아가 이제 아기를 낳을 무렵,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요셉에게 보냈다. 요셉은 꿈 속에서 주의 천사의 방문을 받았다. 그때 주의 천사는 요셉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장차 약혼녀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부터 된 것이라고 알려주었고, 그녀가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고 부르라고 했다(마1:20~21). 이것이 태어날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 이유다. 참고로, 대부분의 자식의 이름은 부모나 조부모가 이름을 지어준다. 하지만 "예수"라는 이름은 주의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렇다면, 장차 불려질 "예수"라는 이름은 대체 어떤 이름인가? 그 이름의 뜻은 마1:21에서 천사가 가르쳐주었다. "왜냐하면 그분 자신이 자기의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장차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다"고 했다. 다시 말해,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볼 때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 혹은 "여호와께서 구원자이시다"라는 뜻의 함축적인 표현이라는 사실이다. 다시말해, "예수"라는 말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메시야의 비밀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그들의 죄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구원자로 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된 아기는 누구인가? 그것은 여호와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의 기자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설명하면서, 그분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고 했다(마1:23). 이것을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뜻이다. 고로,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로,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이자 여호와라는 이름을 포함하는 새로운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계3:12). 그러므로 신약성경 27권 어디에서도 우리는 구약의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가 없다. 오직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라는 이름만 등장한다. 특히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 마지막 절에서도 오직 "예수"라는 이름만 등장하고 있을 뿐이다(계22:21).

 

4. 그분에게 불려질 칭호 가운데 담겨있는 메시야의 비밀은 무엇인가?

 

1)태어난 아기께 붙여진 2가지 칭호 "구주"와 "주"

  누가복음 2:8~12의 기사는 예수께서 이제 곧 태어나셨고 아기는 말구유 안에 누워있을 때였다. 베들레헴의 들판에서 양떼를 치고 있던 목자들에게 주의 천사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에게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것은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소테르)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는 소식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에 대한 3가지 명칭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구주(소테르)"라는 단어와 "그리스도" 그리고 "주(퀴리오스)"라는 단어다. 여기서 "구주"라는 몇칭은 그분이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를 알려주는 칭호에 해당하며, "그리스도"는 그분의 직책에 관한 명칭이며, "주"라는 단어는 그분의 신분에 관한 칭호다. 그런데 "구주"와 "주"라는 칭호가 놀랍기만 하다. 이것은 구약시대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사용되어질 수 있는 거룩한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2)태어난 아기께 붙여진 "구주"라는 칭호

  구약성경 가운데 이사야서는 예수께서 유일한 "구원자"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언급하였다. 그중의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사43:11의 말씀이다. 거기에는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구원자가 없느니라"라고 나온다. 구약성경은 몇몇 부분(아람어)을 제외하면 전부다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기에 여기에 나오는 단어 "구원자"는 "야솨"라는 단어다(참고로 히브리어로 "구원"이라는 명사는 "예슈아"라는 단어다). 그래서 눅2:11의 말씀을 히브리어 단어들로 문장을 전환하면,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야솨'가 나셨으니 곧 '메시야'요 '아도나이'니라"이다. 분명히 이사야서에는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구원자가 없다고 하였다(사43:10~11). 분명히 그전에는 없고 그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사43:10).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다윗의 동네에 "야솨"가 태어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태어난 "야솨"를 하나님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야솨"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날 태어난 아기는 하나님이신 구원자가 태어나신 것이다.

 

3)태어난 아기께 붙여진 "주(님)"이라는 칭호

  그런데 태어난 아기에게 붙혀진 또 하나의 칭호가 있었다. 그것은 그분의 신분에 관한 칭호로서 "주님"이라는 칭호다. 이것은 헬라어로는 "퀴리오스"요, 히브리어는 "아도나이"라는 칭호다. 태어난 아기를 그리스도라고 칭하는 것은 실제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그분의 직책에 관한 칭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분의 신분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주님"이라는 칭호는 좀 다르다. 이것을 함부로 사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랬다가는 참람죄를 지어 죽음을 면치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어날 아기의 칭호를 주의 천사는 "주님(퀴리오스)"라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지칭하는 칭호에는 "주(아도나이)"와 "하나님(엘로힘)"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여호와"라는 명칭은 사실 하나님의 이름인 것이지 칭호는 아니다. 그렇다면, "주"와 "하나님"은 여호와의 칭호인 셈이다. 이것들 중에서 "하나님(엘로힘)'은 전능한 창조주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이며, "주님"이라는 칭호는 그분이 모든 만물 곧 천사와 사람과 자연만물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야훼)"라는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었다. 그래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올 때에는 다른 호칭으로 바꾸어 불렀다. 그것이 바로 "아도나이(나의 주님)"라는 호칭이다. 그러므로 "주"라는 호칭은 원래 "주님"이라는 뜻 외에도 "여호와"의 이름을 대신하는 용어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한 대표적인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사도행전에 사도 베드로가 설교하는 가운데, 예수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으라고 초청할 때에, 그는 요엘서 2장을 인용하는데, 그때 베드로는 욜2:32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으로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지만 원래 요엘서의 말씀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의 유대인 성도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주"라는 칭호로 바꾸어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아기를 주의 천사가 유대인에게 "주님"이라고 소개했다는 뜻은 대단한 것이다. 태어난 아기가 바로 "여호와"요, "하나님"이라고 알려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태어난 아기는 구약성경에서 보내주신다고 약속한 메시야이시다. 하지만 동시에 그분은 구원자요, 주님이시다. 구약시대로 친다면 그분은 바로 다름 아닌 "여호와"라는 뜻이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고로 우리는 태어난 아기에게 붙여주는 칭호 속에서도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파악할 수가 있다(참고로, 그렇더라도 신약시대에 아들과 아버지는 분명히 구분된다).

 

5. 나오며

  예수님은 분명 당신 자신을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분을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이 사실만 단순히 아는 분들은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로구나 하고 생각해 버린다. 하지만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난 분이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운 것이지 사실 그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는 그분의 이름 속에도 들어 있고, 그분에게 붙여진 칭호 속에도 들어 있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예수"라는 이름을 부를 때에 그분의 이름이 "예수"인가보다 하고 생각하지만, 히브리어(아람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라는 단어는 매우 특별하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단어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 내지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을 부를 때에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들어오셨구나를 알고 그렇게 이름을 부른 것이다. 그리고 그분에게 붙혀진 칭호가 있었는데 그것은 "주[님]"이라는 칭호였다. 이 칭호는 그분이 구약시대의 "여호와"인 것을 말해주는 칭호였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었던 "여호와"라는 이름 대신에 "아도나이(주님)"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가져준 주의 천사의 말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이실 뿐만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그분은 우리 죄많은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사람의 육체를 입으신 것이다. 다시 말해, 인류구원을 위해 창조주께서 피조물이 되시어 오신 것이다. 주인이 종의 형체를 입으신 것이다. 죽을 수 없는 분이 죽으시기 위해 육체를 입고 태어나신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구원을 위해 최고로 자신을 낮추신 우리 주 예수님만을 영원히 찬양드리고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드리자. 그리고 우리도 그분의 낮아지심과 겸손하심과 섬기심을 본받아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섬기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다.

 

2019년 12월 06일(금)

정병진목사 


요한계시록에 보면, 네 마리의 말과 그것 위에 탄 자들에 대한 환상이 나온다(계6:1~8). 이는 어린양되신 예수께서 장차 되어질 일이 기록된 두루마리의 일곱개의 인들 가운데 처음부터 넷째 인까지를 뗄 때에 보여진 장면이었다. 그때 네 마리의 말과 그것 위에 탄 자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백마과 홍마와 흑마과 청황색마와 그것 위에 탄 자였다. 그렇다면, 그중에서 백마와 백마를 탄 자는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적그리스도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가?

2019-11-17(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흰 말과 그 위에 탄 자는 과연 적그리스도인가?(계6:1~8)
https://youtu.be/gzYxQb-Rg3U


1. 들어가며

  주님께서는 과연 언제 오시는가? 어떤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당장 오실 것만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것은 우리 신앙의 핵심적인 논조가 아닌 것도 같다. 너무 빨리 오신다고 하면 조급함 때문에 중요한 것을 놓칠 수가 있고, 너무 늦게 오신다고 하면 나태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는 각오를 지닌 채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곧 적그리스도가 등장하고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인들으로 봉한 두루마리에서 첫째 인을 뗄 때에 나오는 흰 말과 그 말 위에 탄 존재를 적그리스도라고 해석한다. 과연 이 해석은 올바른 해석이며, 흰 말과 그말 위에 탄 존재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래서 오늘은 일곱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하여 어린양이 첫째인을 떼시는 장면을 가지고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일곱인은 재앙인가 아닌가?

  요한계시록을 해설해놓은 여러가지 책들이나 주장들을 살펴보면, 어린양되신 예수께서 떼신 일곱 개의 인들을 대부분 "재앙"이라고 해석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일곱인들의 재앙과 일곱나팔들의 재앙과 일곱대접들의 재앙으로서 3중재앙이라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해석이 과연 요한이 쓴 묵시(계시)를 잘 해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특별히 일곱 인에 대한 해석 가운데, 둘째 인과 셋째 인과 넷 째인에 대해서는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일치된 해석을 내놓고 있다. 말과 그 탄자를 각각 "전쟁"과 "기근"과 "사망"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째 인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흰 말과 그 위에 탄 자를 "적그리스도"라고 해석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그렇다면, 흰 말과 그것 위에 탄 자를 과연 "적그리스도"라고 해석해도 되는 것인가?

 

3. 무엇이 바른 성경해석의 기준이 되는가?

  그러나 성경을 해석하려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칙을 주의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문자적인 해석이다. 본문이 기록된 헬라어나 히브리어 원문을 살펴보고, 앞 뒤의 문맥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면 거의 대부분 성경해석에 대한 가닥이 잡힐 것이다. 하지만 요한계시록과 같은 경우는 그 내용이 거의 환상과 상징으로 기록된 채 있기 때문에, 그냥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보자. 요한계시록 12:1에보면, "해로 옷을 입은 여자"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여인의 발 밑에는 달이 놓여 있다. 그리고 그녀는 머리 위에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쓰고 있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이러한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옳다. 어떻게 사람이 해(태양)로서 옷입고 있을 수 있으며, 달을 발로 밟고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이런 경우는 다른 잣대로 해석을 해야 한다. 그래서 두번째의 해석방법이 필요하다. 그것을 상징이나 은유로  해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징을 아무렇게나 대입해서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해석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성경의 묵시들(계시들)은 이미 다른 곳 특히 구약에서도 언급된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징이나 은유를 해석하려 할 때에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례를 찾아보아야 한다. 그럴 때에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 갈 것인가가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과연 예수께서는 어떻게 해석했으며, 사도들은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해석한 방법과 사례가 아닌 다른 방법과 사례로서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면 그는 이단이나 사이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예를 들어, 민수기 21장의 장대 위에 높인 달린 놋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보자. 그런데 예수께서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장대에 달린 놋뱀에 대해서 언급하신 적이 있다. 그것이 곧 십자가에 위에 달리신 죄없으신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당시 독뱀에 물려 죽어가는 자들이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볼 때에 살게 되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바라보는 자는 죄로 오염되어 죽어가는 영혼들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회사 가운데 그 본문에 대하여 어떤 해석을 해 왔는가를 참고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본문을 해석하는 데에 참고할 만한 것들이 많이 보여지게 될 것이다. 이처럼 성경해석은 문자적인(문맥적인) 해석, 상징적인 해석, 예수님과 사도들의 성경해석, 교회사적인 해석을 통하여 가장 바른 성경해석을 찾아볼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성경의 원저자로서, 요한복음 14~16장에 나오는 보혜사 성령의 도움없이는 바르게 성경해석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4. 일곱인의 해석에 대한 핵심적인 단서 내지는 열쇠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어린양에 열어젖혔던 일곱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 안의 첫째 인과 둘째 인과 셋째 인과 넷째 인에 대한 해석의 핵심적인 단서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가장 먼저 본문의 문자나 문맥을 통해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이 본문에는 그것이 요한계시록 6:8에 기록되어 있다. 사망으로 [동물이나 사람이] 죽는 4가지 방법들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검(칼)과 흉년(기근)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누가 해를 받아서 죽게 될른지는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사람이나 동물 무두가 다 해를 받지 않나 싶다.

  그런데, 우리는 계6:8의 말씀을 통하여, 동물이나 사람이 죽어나가는 4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들 모두가 다 첫째 인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에 의한 사망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붉은 말과 그것 위에 탄 자는 "칼"로 인한 "전쟁"을 상징하고, 검은 말과 그것 위에 탄 자는 "흉년"으로 인한 "기근"을 상징하며, 청황색 말과 그것 위에 탄 자는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둘째 인과 셋째인과 넷째인을 뗄 때에 나오는 말 탄 자는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에스겔나 예레미야나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에 다 나온다. 그런데 사람을 죽이는 또 한 가지 방법이 추가로 더 들어 있다. 그것은 "땅의 짐승들"에 의한 사망이다(겔5:17, 14:21). 사람이 짐승들의 공격을 받고 죽어나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들은 단순히 그냥 짐승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자'와 '곰'과 '표범'이 대제국의 황제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며, 그 배후에는 사탄마귀의 부하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계13장).  고로, 요한계시록의 첫째 인은 칼과 기근과 전쟁과 짐승에 의한 재앙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니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어야 한다.

 

5. 첫째인을 뗄 때에 출현한 흰 말과 그 말 위에 탄 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첫째인을 뗄 때에 출현했던 흰 말과 그것 위에 탄 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말이 흰 말이라는 것 때문에 말탄 자는 계19장 11절에 나오는 "그리스도"가 아닌가를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리스도는 두루마리 책을 떼고 있는 상황이기에 "그리스도"라고 해석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따른다. 더불어 넷째인을 뗄 때에 뛰어나온 말 탄자를 "사망"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흰 말을 타고 있는 자는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에 대한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둘째 인을 뗄 때에도 동일하다. 즉 둘째 인에 떼어질 때에 붉은 말과 그 말 탄 자가 튀어 나왔는데, 그것은 칼로 인한 전쟁이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흰 말과 그것 위에 탄 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첫째, 일곱인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부터 살펴보자.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가슴에 금띠를 띠고 흰 옷을 비고 나타나신 예수께서 사도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네가 본 것들과 지금 있는 일들과 장차 될 일들을 기록하라(계1:19)" 결국 요한계시록 1장은 "네가 본 것들"에 해당하며, 요한계시록 2~3장은 "지금 있는 일들"이고, 요한계시록 4~22장은 "장차 될 일들"에 해당하는 것이다. 고로, 일곱인은 전부 재앙을 가리키는 아니라, "장차 될 일들"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승천이후 재림 때가지는 결코 재앙만 있지 않다. 복음도 전파될 것이고, 순교자고 나올 것이고, 자연에 재앙도 있을 것이며, 기근과 지진, 전염병이 창궐하고 귀신의 공격도 지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곱인을 무조건 "재앙"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서는 아니 된다. 예를 들어, 다섯째인이 떼어질 때에는 이미 죽임당한 성도들이 천국의 제단 아래에서 자기들의 피를 신원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데, 이는 재앙(화, 심판)이라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둘째, 흰 말과 그것 위에 탄자를 그리스도라고 해석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자. 흰 말과 그것 위에 탄 자를 "그리스도"라고 해석하는 데에는 장차 지상에 재림하실 그리스도가 백마(흰 말)을 타고 오시기 때문이다(계19:11). 하지만 두루마리의 일곱 인을 떼시고 있는 분이 어린양이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좀전에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흰 말과 그것 위에 탄 자를 "그리스도"라고 해석하기에는 조금 어색한 것이 사실이다. 셋째, 흰 말과 그것 위에 탄 자를 "적그리스도"라고 해석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자. 흰 말과 그것 위에 탄 자를 사탄이라고 해석하는 데에는 일곱인이 재앙이라는 관점과 사탄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이라는 관점에서 그렇게 해석하는데,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말을 탄 자가 쓰고 있는 면류관을 보면 "적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흰 말을 탄 자의 머리에 쓰고 있는 "면류관"은 "디아데마(왕관)"이 아니라, "스테파노스(승리관,면류관,월계관)"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한 번도 사탄이나 사탄 쪽에서 일하는 자가 "면류관"을 썼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다섯째 나팔 때에 올라오는 황충들이 자기들의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었는데, 그것도 면류관이 아니라, 금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이라고 나올 뿐이다(계9:7). 성경에서 면류관은 오직 예수님과 이겼던 성도들만 쓸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도 죄와 마귀와 죽음을 이기셨고, 성도들도 예수님을 힘입어 죄와 마귀와 죽음을 이기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흰 말과 그것 위에 탄 자"는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문자나 문맥을 통해서 파악할 수 없다면, 그후로는 상징적인 해석을 시도해봐야 하며, 그것도 안 되면 예수님과 사도들은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24장에 보니, 예수님의 해석이 나온다. 마24장에 보면,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 있을 징조들"이 무엇인지에 관해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둘째 인과 셋째 인과 넷째 인에 관해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셨다. 즉 "전쟁"이 있을 것이고(마24:7),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며(마24:7), "전염병"이 있을 것(눅21:11)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더불어 거짓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출현도 있을 것(마24:4~5,11)이라고 했는데, 이들은 바로 사망으로 역사하는 마지막 도구들로서 "땅의 짐승들"이 그것에 해당한다(계6:8). 그렇다면, 흰 말과 그것 위에 탄 자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일"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마24:14). 즉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그렇다. 흰 말과 그것 위에 탄 자는 복음전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첫째로,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만이 "면류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한 번 이기고 끝마치는 일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기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계6:2). 뿐만 아니라 셋째로, 일곱인이 전부 재앙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승천이후 재림 때까지 있어질 일이라고 볼 때에도 복음전파가 가장 타당한 해석이 되기 때문이다.

 

6. 나오며

  그렇다. "복음전파"는 예수님 때에나 예수님의 제자들 때에만 있을 일이 아니다. 그리고 가장 잘 나가던 19세기에만 있을 일도 아니다. 이것은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지속되어야 할 일이다. 주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28:18~20). 고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아니 된다. 특히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열심을 내야 한다. 이것이 마지막에 전해야 할 복음이기 때문이다. "회개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해야 한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은 증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누가복음 24:47에 의하면, 그것은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를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증언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눅24:47~48). 이 일을 위해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눅24:49). 그렇다. 우리는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행1:8). 이것은 비바람이 몰아쳐도 해야 일이며,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두 증인"의 사역과 일치한다(계11장). 그렇다. 복음을 증거하자. 그런 자들에게 승리의 면류관이 쓰여질 것이다(계6:2, 2:10, 3:11). 주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지켜주실 것이다(계3:10~11). 주님께서 부탁하신 사명을 완수하기 전까지 주님은 그를 붙들어주심으로 죽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 복음을 증거하자. 오직 천국복음을 증거하는 성도들이 되자.

 

2019년 11월 17일(주일)

정병진목사 


1. 서론

  예수께서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유대땅 베들레헴의 어느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다. 그리고 포대기에 싸여 말구유에 뉘여 있었다. 예수께서는 따뜻한 방 한 켠이 아니라 동물들의 우리인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조금은 안 돼 보이는 갓난아기의 모습이다. 왜냐하면 좀 괜찮은 부모였으면, 아무리 방구하기가 힘든 베들레헴이었다고 하지만  마굿간 한 켠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에 천사가 일러 준 말에 의하면, 그 아기가 표적이라고 한다. 그 갓난아기는 기적 중의 기적인데, 온 인류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있는 아기라는 것이다.  


2. 왜 갓난아기가 인류구원을 위한 표적이 되는 것인가?

  대체 평범해보이는 이 갓난아기의 출생이 어떻게 되어서 인류 구원을 위한 확실한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첫째, 갓난아기는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태어나신 것이기 때문이다(눅2:11). 천사는 그날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태어나셨다고 알려주었다(눅2:11). 다시 말해 인류를 구원할 자가 그날 태어났음을 천사가 알려준 것이다. 그런데 목자들이 베들레헴까지 달려가서 확인해 본 것은 어느 신혼부부가 낳은 맏아들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평범해 보이는 이 아기가 왜 표적이라는 말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태어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바로 구원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시대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구원자는 오직 이스라엘의 왕이시자 홀로 한 분이시며 처음과 마지막이신 만군의 여호와만을 가리키는 용어였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사43:11, 44:6). 고로 그 아이는 본성에 있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태어난 것이다. 그랬다. 이 아기는 어느 신혼부부의 맏아들에 불과한 아기가 아니었다. 이 아기는 성령으로 잉태되신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 이 아이는 정상적인 부부의 관계가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난 아기였기 때문이다(사7:14).

  둘째, 이 갓난아기가 바로 그렇게 많이 예언되어왔던 메시야이기 때문이다(눅2:11). 사실 이 갓난아기는 우연히 태어나서 메시야가 된 것이 아니다. 이미 수천년동안 예언되어왔던 바로 그 메시야로서 태어났던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메시야라고 아무나 주장하지 못하도록 무려 4천년동안 350가지 이상의 예언들을 말씀해주셨다. 메시야는 이러이러한 자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예를 들어, 메시야는 여자의 후손이자, 유다지파의 사람으로 태어날 것이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일 것이다. 하지만 이 아이는 처녀가 낳을 것이다. 그리고 메시야가 태어날 장소는 베들레헴이 될 것이다. 등등. 그런데 정말 4천년이 지난 어느날 이런 메시야의 모든 조건을 갖춘 아기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정말 자라서 메시야가 걸어가야 할 길을 고스란히 그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자신이 메시야로서 감당해야 할 모든 일들을 다 감당했던 것이다. 그렇다. 처녀 마리아가 낳은 아기는 우연히 태어난 단순한 아기가 아니라 구약시대 무려 4천년동안 350가지 이상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였던 것이다.

  셋째, 이 갓난아기가 바로 구약시대에 여호와로 나타났던 바로 그 주님(아도나이)이시기 때문이다(눅2:11). 천사 일러준 세번째의 사실은 그 갓난아기는 사실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으로 나타났던 바로 그분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주님(아도나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지금 구유에 누워있는 그 아기가 바로 그 주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갓난아기는 구약시대에 주님이라고 불렸던 여호와께서 오신 것이다. 일례를 들어보자. 예수께서 이제 공생애를 거의 마칠 무렵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그때에 사람들은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면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열렬히 맞이한다. 그때에 그들은 이렇게 노래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요12:12~13)"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구약의 노래를 부른 것일까? 그때 그들이 불렀던 메시야찬송은 시편 118:25~26이었다. 여기에 보면, "지금 구원하소서(호산나)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되어있다. 그랬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여호와의 신분을 가진 자로서 환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갓난아기는 훌륭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분은 구약시대에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던 바로 그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일까?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죄로부터 건지려면 흠없는 속죄양이 있어야 하고 인류의 죄를 전가받은 흠없는 속죄양이 대신 피흘려 죽어야 한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한 이후 인간들은 죄된 본성아래 있기 때문에 아무도 흠없는 속죄양될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흠없는 사람으로 피흘려 죽으시고자 사람이 되신 것이다. 하나님은 원래 영이시다(요4:24). 그래서 피흘릴 수 없고 죽으실 수도 없다. 그런데 인간이 지은 죄값은 사망이요(롬6:23), 피흘림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피흘려 대신 죽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것이다(히9:22).


3. 나오며

  그렇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유대땅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단순한 갓난아기가 아니었다. 어느 신혼부부의 첫아들로 끝내버릴 아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계획했고 예언했던 모든 것을 성취할 메시야가 태어난 것이요, 그의 본질은 하나님 자신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메시야로서 오기 위해 그날 육신을 입으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류를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성탄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큰 일을 행하신 날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날이다. 우리는 이 날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 날에 감사드려야 한다. 이날에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죄지은 우리 인간이 해야 할 가장 바른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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