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89) 왜 초기교회는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여 예배하고 성찬을 나눴을까?(행20:7)_2022-12-28(수)

https://youtu.be/gKQaVxqPWGY  [혹은 https://tv.naver.com/v/32115854 ]

 

1.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중 드로아에 있을 때, 어느 요일에 모였는가?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중, 드로아에 있을 때 드로아에 있는 이방인 성도들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였다. 이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안식일에 모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안식 후 첫날인 주일에 모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당시만 해도 주일은 쉬는 날(공휴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낮에 일하고 밤에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이다.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그때 바울은 어느 성도의 집 3층 다락방 안에 모여서 예배하고 성찬을 나눴던 것이다. 

 

 

2. 안식교는 무엇이 문제인가?

  오늘날 주일에 예배 모임을 가지면 안되고 꼭 안식일(주간의 일곱째 날인 토요일)에 예배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파가 있다. 이름하여 안식교(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다. 그런데 이들이 믿고 있는 교리를 보면, 문제점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구원론과 안식일 준수는 상당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안식교에서 가르치는 대부분의 이러한 교리들이 다 엘렌 지 화이트라는 여사에게서 나왔다라는 것이다. 안식교인들은 엘렌 지 화이트 여사를 선지자라고 믿고 따른다. 이 여사는 안식교를 창시한 죠지 밀러(A.D.1782~1847)의 부인인데, 죠지 뮬러가 죽자 그 배턴을 이어 받은 자로서, 이 여사가 말한 것들은 거의 성경처럼 믿고 신뢰하며 따르고 있다. 사실 죠지 뮬러는 1844년 10월 22일에 주님이 재림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하지만 그때 오시지 않자,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흩어졌다. 하지만 그때 주님께서는 하늘에 오셨고 거기에서 천국에 들어올 자를 가르고 있다고 가르친다. 이름하여 '조사심판'이다. 안식교인들은 이 심판에서 제외되면 결국 구원을 못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조사심판의 핵심은 바로 구원론에 있다. 

 

3. 안식교(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의 구원론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안식교인들의 구원론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안식일 준수와 구원을 매우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고, 계명(십계명)도 준수해야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특히 계명들 중에서 제4계명 곧 안식일을 준수해야 한다는 계명을 실천해야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만약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고, 주일을 지키면 짐승의 표인 666표를 받아 구원에서 제외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지만 계명들을 준수하지 못한 자는 조사심판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생명(하나님의 생명으로서 '조에')을 얻고 죄사함을 받아야 구원이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아무리 계명을 준수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사람이 생명을 얻을 수 없고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 생명을 얻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통해서 뿐이다. 예수님을 믿어 생명을 얻을 수 있고, 회개하여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믿고 계명도 준수해야 구원얻는다는 것은 잘못된 구원론이다. 믿고 회개하면 구원받기 때문이다(마4:17, 요3:16, 롬10:8~9, 행16:31). 

 

4. 안식일에 관한 안식교의 입장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안식교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일종의 생명줄이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식교에서 주장하는 안식일에 대한 입장은 어떤 것인가? 그들의 주장을 모아서 살펴보면, 3가지 정도가 있다. 첫째, 안식일은 폐지된 적이 없기 때문에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법으로서 안식일법은 이미 폐지되었다(갈4:9~11, 골2:16~27, 호2:11, 히4;1,11). 둘째,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고 주일을 지키는 자는 태양신 종교를 따라가는 우상숭배자여서 결국 그들의 이마에 짐승의 표인 666표가 찍힌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개신교인들은 일요일을 태양의 날로 여기지도 아니하며, 태양신을 숭배하는 것도 아니다. 주일에 성도들은 태양신을 숭배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예배하기 위해 모이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초기 교회는 안식일을 지켰는데 콘스탄틴 대제가 일요일을 쉬는 날로 제정하여, 안식일에 예배드리는 자들을 강제로 일요일예배로 바꿨다는 것이다. 아니다. 초기 교회 중에 유대인이었다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처음에는 안식일에 모였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처음부터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였다. 그것은 행20:7의 말씀에도 나와 있으며, 여러 교부들의 어록과 초대 교회가 남긴 책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사도행전 강해 88강을 참고하기 바란다). 

 

5. 왜 초기 교회 성도들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여 예배드렸고 성찬을 나눴는가?

  그렇다면, 왜 초기 교회 성도들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나눴던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안식일은 한 마디로 모형이고 그림자로서 참 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히10:1,4, 골2:16~17). 안식일의 진짜 실체는 예수님이고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성도들이 장차 들어갈 천국을 가리키기 때문이다(히4:11). 다시 말해, 구약에 주어진 안식일은 율법 중 의식법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이것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당신이야말로 이러한 의식법의 실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셨다. 그러므로 의식법들은 완성되어졌다. 그리하여 폐지된 것이다. 다시 말해, 안식일이라는 것은 참된 안식을 주러 오신 예수님에 대한 예표요 모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을 안식일의 주님(퀴리오스)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이 없다면, 사람이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만으로 안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29)"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없이는 참된 안식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참된 안식을 주시기 위해 안식일인데도 병들어 신음하는 자들을 고쳐 주셨다. 그러나 안식일법에 의하면 그것은 불법이었다. 그러나 이는 율법을 만드신 예수님이 불법을 저지른 것인가, 아니면 안식일법을 주신 목적을 모르고 규정만을 내세워 사람을 정죄하는 그들이 불법을 저지른 것인가?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날(안식일)과 달과(초하루)과 절기(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맥추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과 해(안식년, 희년)를 다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결코 따라가지 말라고 했다(갈4:9~11).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와 참된 안식과 평강을 이미 얻은 자들이 다시 율법에 매여 종노릇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붙잡아야 할 것은 율법의 의식법들(할례, 안식일, 절기법, 음식법, 정결법, 제사법)이 아니라, 이러한 의식법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붙잡아야 한다고 했다. 이것들은 다 실체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모형이요 그림자이기 때문이다(골2:16~17). 

골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안식일을 준수하지 아니하고 주일에 모여 예배하고 성찬을 나눴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구약의 율법의 실체이신 예수님만이 우리 모든 죄인들에게 죄사함을 가져다 주고 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날 곧 안식 후 첫날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행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321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일요일을 공휴일로 지정해 주니 그날 예배를 드리기에 더욱 편리하여졌기에 일요일인 주일에 예배를 드렸던 것이지, 태양신을 섬긴다는 의미로 일요일에 예배드린 것이 아니다. 고로 성도들은 주일예배를 드린 것이지, 일요일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다. 또한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은 "나는 더 이상 유대교인이 아닙니다"라는 것을 대내외에 알리는 효과도 있었으므로 주일에 예배를 드린 것이다. 

 

2022년 12월 28일(수)

정병진목사

유다서는 역시 바울 서신과 비교해 볼 때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유다는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소개한다(유1:5 헬라어원문). 그리고 그분을 만유의 대주재로 소개한다. 파격적이다. 그리고 그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고 말한다. 중간에 탈락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천사들의 타락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육체를 더럽히고 영혼을 더럽히는 음행의 죄의 심각성을 말해준다. 오늘 메시지는 우리의 신앙의 허리끈을 다시 졸라매줄 것이다.

 

2022-02-23(수) 수요기도회

제목: 유다서강해(02) 유다서에 등장하는 구원론과 천사론과 심판론(유1:5~7)

https://youtu.be/kqmqo7nhyww [혹은 https://tv.naver.com/v/25318020 ]

 

1. 들어가며

  유다서는 좀 특별한 책이다. 이 책은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해 그동안 다른 신약성경을 통해서는 사용하지 않는 고백이 나올 뿐만 아니라 '위경'이라는 책에서 인용된 구절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유다서에는 일반적으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이신칭의의 구원론이 나오지 않고 한 번 받은 구원이라도 그 구원을 잃어버릴 가능성에 대해 언급을 한다. 또한 천사들의 타락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오늘 이 시간은 유다서 강해 두번째 시간으로서, 지난 시간에 배웠던 것 곧 유다서의 개론으로서 유다서의 저자와 기록시기 그리고 편지의 대상과 편지를 쓴 목적에 이어지는 본문으로서, 본론의 첫 부분을 다루고자 한다. 그중에서 오늘 말씀은 유다서를 왜 쓰고자 했었는지를 살펴보는데, 이단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적 전례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이 부분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보다 더 정확하게 알 수있 될 것이며, 성도들의 구원관이 보다 더 확실하게 정립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천사들의 타락 및 소돔과 고모라의 성의 멸망에 따른 심판이 얼마나 혹독한 것이었는지도 함께 깨닫게 될 것이다. 

 

2. 유다서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유다서는 편지글이다. 그러므로 편지형식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이 책이 비록 25절 밖에 안 되는 대단히 짧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서신형식이 모두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서신 형식에 따라 이 책을 구분한다면, 이 책의 구조는 도입부(1~4절), 본론부(5~23절), 종결부(24~25절)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 도입부(1~4절)는 유다가 수신자들에 대한 본인의 문안인사 및 서신의 집필동기를 간략하게 쓰고 있다. 이때 그는 이렇게 썼다. 헬라어로 직역해본다.

유1:1~4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그런데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받은 채 있는 이들이자 그리스도에게 지켜주심을 받은 채 있는 이들에게 [편지한다] 2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들에게 증가되어지길(많게 되기를) 원한다. 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의 공동의(일반의, 공통의) 구원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부지런함으로 [계속] 쓰는 것을 행하면서, 성도들이 한번(단번에) 넘겨받았던 믿음을 위하여 [계속] 힘써 싸우도록 너희에게 권면하면서, 편지를 써야할 압박(필요)을 가졌다. 4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이 가만히(슬그머니, 몰래)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옛적부터 이러한 심판(정죄) 안으로 미리 기록된 채 있는 이들이다. 이들은 경건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함(호색, 음탕, 성적인 방종)으로 바꾸고 있고, “유일한(단 하나의, 홀로) 대주재(세상의 소유주, 주인)이며 곧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있는 자들이다”. 

 

3. 유다서에서 소개해주고 있는 예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인가?

  유다서는 다른 책에 비해서 아주 독특한 부분이 있다. 하나는 예수님을 '대주재'와 구약시대의 '여호와'로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경책으로 알려진 "모세의 승천기"와 "에녹서"의 글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위경에 기록된 말씀이 정경에 들어왔는가? 사실 정경과 외경 및 위경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먼저 유다가 예수님을 홀로 한 분이신 '대주재'로 소개하고 있는 저자의 의도와 예수님이 구약시대 출애굽을 인도한 참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음을 소개해주고 있는 대목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정통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한 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이었던 유다가 자신의 친형이었던 예수님을 2가지로 고백하고 있다. 첫째로, 유다는 예수님을 '주재(데스포테스)'라고 고백하고 있다(유1:4). 그는 예수님을 "유일한(단 하나의) 대주재이며 곧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유1:4)"라고 고백하였다. 사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대주재'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다(행4:24). 그런데 그 명칭을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히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가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둘째로, 유다는 예수님을 구약시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신 여호와라고 고백하고 있다(유1:5). 헬라어 원문(NA28)을 보면, "예수께서 한 백성을 애굽의 땅으로부터 구원하여 내신 후에 두 번째로는 믿지 않았던 자들을 멸망시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유1:5). 이는 자신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구약시대에 역사하신 만군의 여호와로 고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참으로 놀랍고도 충격적인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약의 성도들 중에 어느 누구도 이러한 고백을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님과 20년 이상을 형과 동생으로 같이 살았던 유다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그분을 하나님으로 고백한 것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고백은 유다가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당시에 친유대적인 성도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고백하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귀한 본문이라고 하겠다. 

 

4. 예수께서 '대주재'이시며, '여호와'라고 하는 신앙고백은 오늘날에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오늘날 21세기를 살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다가 이 편지를 쓰고 있던 당시인 A.D.70~80년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주 하나님'이자 '여호와'로 고백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누구인가?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고백하기 힘든 사람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유대인들인데, 그중에서 예수님의 친동생이 이러한 신앙고백을 한 것이다. 고로 우리는 중간에 유다를 변화시킨 충격적인 사건을 상정해야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사실 예수님의 친동생들 중에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사실 때에 아무도 그를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요7:5).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예수께서 잠깐 자신을 착각하고 떠돌아다니는 이상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 그들은 확 달라졌다. 죽은 자가 살아서 그들 앞에 나타났었기 때문이다(고전15:6~7). 그건 도무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죽은 사람은 절대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없으며, 문들을 닫아놓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들어올 수가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있은 후,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더이상 선지자나 교사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을 보고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안타깝게도 유다서 1:4~5에 나오는 "대주재"와 "예수님"을 번역할 때, 성경과 다르게 번역하고 있는 책들이 허다하다. 특히 킹제임스 버전 쪽의 성경책들은 전부다 이 2가지를 잘못 번역하고 있다. 킹제임스 번역본의 하나인 킹제임스 흠정역을 우선 보자. 이 번역본에 따르면 유1:4~5에 나오는 예수님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그들은... '유일하신 주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라. 그러므로 비록 너희가 전에 이것을 알았을지라도 내가 너희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곧 '주'께서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구원하시고 그 뒤에 믿지 않는 자들을 멸하셨으며(유1:4~5). 그렇다. 우선 킹제임스 번역본에서는 '대주재'라는 단어를 '주 하나님'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리고 '주 하나님'과 예수님을 따로 구별시켜놓았다. 즉 예수님 이외에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 따로 있는데 그분이 하나님이라고 번역해놓은 것이다. 한 마디로 킹제임스 버전에서는 예수님을 더이상 한 분 하나님이 아닌 것처럼 번역해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도 마찬가지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신 분을 '주께서'라고 번역해놓았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NA28)은 '예수'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안타깝지만, 우리말 개역개정판 성경에서도 마찬가지다. '주께서'라는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헬라어성경과 킹제임스 버전 쪽의 성경책은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인가? 그것은 간단하다. 킹제임스 쪽의 번역본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다수사본' 혹은 '공인원문(표준원문)'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TR(Textus Receptus)에서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본은 11세기 이후에 나오는 소문자 사본으로서, 그 권위가 많이 떨어지는 사본들이다. 보다 다 원문에 가까운 사본은 초기(4~5세기)에 나오는 대문자사본들로서, 이 대문자사본에서는 예수님을 '대주재(데스포테스)'라고 표기하고 있고,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하내신 분도 '예수님'이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소문자사본 계열에서는 예수님과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서로 나누려고 하는 것인가? 그리고 구약의 여호와가 예수님이 아닌 것처럼 번역하려고 한 것인가? 그것은 간단하다. 그것은 삼위일체 교리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작업이라고 하겠다. 여호와(아버지)도 하나님이요, 예수님도 하나님이며, 성령님도 하나님이신데, 여호와는 예수님이 아니며, 예수님은 성령님이 아니고, 성령님은 여호와(아버지)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들의 생각에 천국에 아버지 하나님은 한 가운데에 있는 보좌에 앉아계시고, 오른쪽에는 예수님이 앉아계시고, 왼쪽에는 성령님 혹은 비둘기가 앉아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인 고백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원래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분이라고 성경에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는 여호와로서 족장들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시되었고 활동하셨다.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만세전의 계획을 따라 사람의 몸을 입고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다. 이 분은 아들로 오신 하나님 곧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이 예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뒤에 그분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며 동시존재가 가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신 이후부터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동시에 활동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고백을 예수님의 친동생이었던 유다가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진실로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아주 귀중한 본문이라고 할 수 있다. 

 

5. 하나님을 말씀을 따르지 않고 도덕적으로 부패하여 음란을 일삼고 있는 이단 세력들에게 유다가 예시해주는 3가지 심판은 무엇인가?

  유다는 경건하지도 않고 음행을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죄가 아니라고 하고,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장차 받게될 심판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전에 이미 일어났던 3가지 심판의 사건들을 예시한다. 첫째는,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부분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심판받아 죽었다는 것이다(유1:5). 다시 말해 애굽에서는 출애굽 세대들은 비록 애굽에서 구출을 받았지만 자신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믿지 못한 결과 결국 광야에서 엎드려 죽어서 멸망을 받았다는 것이다. 둘째는 자기의 처음의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의 처소를 떠나간 천사들을 하나님께서는 큰날의 심판때까지 영원한 쇠사슬로 흑암 아래에 가두셨다는 것이다(유1:6).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주신 지위와 그 직분을 망각한 그들의 최후를 유다는 영원한 흑암이라고 말했다. 셋째,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아드마 스보임(신29:23, 호11:8)이 음란하고 동성애를 행함으로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았다는 것이다(유1:7). 하나님께서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육체를 더럽히고 음란을 일삼는 자들을 가만 두지 않고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게 하신다는 것이 이 본문말씀이다.

 

6. 유다서에 나오는 구원론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유1:5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구원론의 관점을 보게 될 것이다. 사실 친유대적인 서신들로서 유다서나 야고보서 그리고 히브리서는 구원을 쉽게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서신들만을 대해왔던 성도들은 구원에 대해서는 매우 낙관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행위가 의롭지 아니한 자라도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그분의 의가 자기에게 전가되어 의로워진다는 말에 익숙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의 모든 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생각의 결과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이신칭의는 그가 처음 예수믿었을 때의 구원의 여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아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구원의 여정의 첫 출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인생의 모든 여정을 마칠 즈음에 믿음에 따른 행위의 열매를 말하는 것이다. 만약 그때 가서도 열매가 없다면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야고보서는 신앙의 여정에 있어서, 맨 끝에서 자신을 바라볼 때 자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신앙의 모든 여정을 끝마치려 하는데, 행위의 열매가 뒤따르지 않았다면 그의 믿음은 헛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서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왜냐하면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로 나온 출애굽1세대들이 1차적으로는 구원을 받았지만 그들이 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했다고 경고하기 때문이다. 구원을 완성하려면 믿음의 선한 싸움을 끝까지 싸워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실 약속의 땅 곧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믿음을 따라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망불평하고 음행을 저지르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우상을 숭배한다면 그는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렇게 주장하기도 한다. 출애굽해서 나온 1세대들은 다 구원받은 것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예정을 따라 애굽에서 구출되어 나온 것이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꼭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다만 그들이 광야에서 범죄했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여 육체는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게 하셨을지라도만 이미 그들은 구원받은 자들이니 그의 영혼 만큼은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셨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바램일 뿐이다. 신약시대 사도 바울의 설명을 보라. 사도 바울은 출애굽1세대들이 분명 징계를 받아 광야에서 멸망받은 것이라고 했다(고전10:5). 그리고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본보기가 되어 말세를 만난 우리들에게 경고로서 주어진 것이라고 말했다(고전10:11). 히브리서 기자도 역시 광야에 엎드려져 죽은 자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했다(히3:16~19). 그들은 안식의 장소에 못 들어간 것이다. 그러므로 유다가 말하고 있는 바, 애굽에서 광야로 나왔지만 광야에서 멸망받은 자들은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처음 믿었을 때에 구원받았던 사실을 것을 두고 자신의 미래의 구원은 안전하다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었을지라도 다시 범죄할 수 있기 때문이요, 범죄한 것을 자백하여 용서받지 못한다면 우리도 결국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못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다가 말해주고 있는 성경적인 구원관이다. 

 

7. 유다서에 나오는 천사론은 어떤 것인가?

  유다서는 천사들에 관하여도 언급한다. 유다는 천사의 존재를 당연시한다. 그러나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천사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분파가 있었다. 그들은 사두개파들이다(행23:8). 그들은 '천사'만 인정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영'도 없다고 하고 '부활'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유다는 천사들이 있으며, 그 천사들도 역시 심판을 받은 상태에 있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유1:9에 보면, 천사장(천사들의 우두머리)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미가엘'이다. 그리고 천사장인 미가엘이 마귀와 변론을 하였다는 것을 언급한다. 그렇다. 천사들 중에는 더 높은 계급을 가진 천사장의 계급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사들이 어떻게 되어서 심판을 받았는가? 그것은 그들의 처음 지위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유1:6). 그들은 맨 처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로 지음을 받았다(시103:20~22). 그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하나님과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섬기라고 창조된 존재였다(히1:14).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과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섬기지 않고 자신이 오히려 섬김을 받으려 한 것이다. 그들의 가진 처음 지위를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을 시켜, 하나님과 구원받을 상속자를 섬기려하지 않고 자신이 섬김받기를 선택한 천사들을 하늘에서 쫓아버리셨다. 그때는 아마도 최소한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이전의 상황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이 하늘에서 쫓겨나서 영원한 쇠사슬(영적인 어떤 제한)을 묶여 흑암(어둠) 아래에 갇혀진 것이다.

  그럼, 그들이 갇혀진 '어둠(조포스)'이란 대체 어디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빛의 나라인 천국의 반대편으로서, 이 우주와 지옥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곳은 늘 어둡다. 먼저는 공중인데 이는 그들이 하늘에서 쫓겨나와 공중의 권세잡은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엡2:2). 그리고 일부는 지옥 어두운 곳에 던져진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벧후2:4).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이 싸울 대상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이 어둠의 세상주관자들이라고 하였다(엡6:12).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범죄하면 하늘에서 쫓아버리는데, 하물며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데려가시겠는가?

 

8. 유다서에 나오는 심판론은 어떤 것인가?

  또한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 성을 비롯한 아드마와 스보임의 심판도 알아야 한다(신29:23, 호11:8). 유다가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이 확실하다는 것을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사건을 통하여 언급했기 때문이다(유1:7). 그럼, 어떻게 되어서 소돔과 고모라와 그의 이웃 도시들이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게 되었는가? 그것은 당시 교회에서 활동했던 초기 영지주의자들처럼, 그들은 음란하였고 다른 육체를 따라갔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유황과 불을 내려 그 성들을 다 태워버리셨다(창19:24). 그러자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나는 모든 것들이 다 파괴되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잘못된 일이라고 규정해놓은 것을 행하는 것은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에게는 기회가 있다. 심판을 받기 전에 회개하여 그 죄를 씻어버리면 되기 때문이다(요일1:9). 그러나 천사들은 다시 회복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들을 위한 속죄제물과 속죄의 피가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영원한 속죄의 피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자백함으로 그 피로 자신의 죄를 씻음받을 수 있다. 심판 받기 전에 죄를 회개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것뿐이다.  

 

9. 나오며

  오늘 우리는 평소 때 잘 접해보지 아니한 친유대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편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예수님의 친동생이었던 유다가 쓴 것이다. 하지만 이 편지에서 소개되고 있는 예수님은 참으로 놀랍고 또 놀랍다. 왜냐하면 유다는 예수님을 홀로 유일한 만유의 대주재로 소개하고 있으며, 그분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역사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유1:4~5). 늘 하나님을 삼위로만 생각하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참으로 충격적인 말씀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대로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확실히 한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돕기 위하여 그분은 지금도 삼위로 일하시고 계신다. 특히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값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 전능하신 한 분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으로 오셨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과 그리고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몰래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바로 초기 영지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육체가 사람의 영을 더럽힐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혹시 믿는 자가 음행을 저질러도,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자 유다는 이들이 잘못된 거짓 선생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즉시 이들을 경고하기 위해 유다서를 썼다. 그런데 원래 이 편지는 공통으로 받은 구원에 관한 진리를 전하려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단세력이 매우 위험한 세력이었기에 유다는 그들과 힘써 싸워서 올바른 신앙을 수호하라고 이 편지를 쓴 것이다. 이 편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심판하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얻은 구원을 어떻게 이뤄가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유다가 가르쳐준 구원론은 한 번 얻는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그것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례가 보여준가고 유다는 말했다. 그리고 자기의 처음 지위를 지키지 아니한 천사들도 심판을 받아 흑암 아래에 갇혀있다고 했다(유1:6). 그리고 죄 중에서도 음행의 죄 특히 동성애의 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시되 그런 자들은 불못에 보내신다고 유다는 언급하였다(요1:7). 그렇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한 구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야 하는 것이다. 지은 죄들을 빨리 회개하여 악한 영들이 나를 지배하지 않게 해야 한다. 귀신들이 들어오는 통로를 만들어 주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가 죽는 날 우리는 결코 영원한 불의 심판을 받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생에 이르도록 힘써야 한다. 그것은 회개하며 신앙을 수호하는 것이다. 

 

 

2022년 02월 23일(수)

정병진목사

 

 

무엇인가를 한꺼번에 정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올바른 구원론에 관해 8년간을 줄곧 외치다보니 무엇이 올바른 구원관이라는 것이 확실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핵심은 "믿음과 회개"라는 것이다. 왜 그런지를 오늘 말씀에 다 나온다. 그리고 구원론과 맞물려 종말에 대해서도 말씀을 나누다보니 그것도 어느 정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전파하고 있는 종말론이 100% 맞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양한 종말론이 정통 교리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은 상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구원론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을 모르면 그날 땅을 치고 후회할 사람도 아마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본인이 죽는 날에 알게 될 것이다.

 

2021-09-05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구원론과 종말론의 절대성과 상대성의 차이(마19:23~30)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fEC-2RisDCs [혹은 https://tv.naver.com/v/22300111 ]

 

1. 들어가며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관건은 바른 구원관을 갖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과연 죽은 다음에 나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나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지만 죽어보니 그곳이 지옥이더라 하면 얼마나 낭패이겠는가?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의 문제는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아니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은 과연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는가? 오직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게 되는가? 또한 한 번 얻은 구원은 영원히 안전한 것인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회개'는 하면 좋은 것이고 하지 않아도 천국에 들어가는 데에는 지장이 없는가? 사실 구원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다면 종말론은 또 어떠한가? 구원의 최종완성은 우리의 영혼이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입성하는 것이다. 고로 우리의 구원과 맞물려 인간의 최종적인 완성인 종말론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런데 종말론에 대한 견해는 너무나 다양하다. 주님이 환난 전에 오시는지, 환난 중간에 오시는지, 환난 후에 오시는지 각 교단과 목회자의 신앙노선에 따라 각각 다르다. 그럼 우리는 과연 어떤 노선을 따라가야 하는가? 혹시 내가 주께서 환난 후에 오신다고 믿고 있었는데 혹시 주님이 환난 전에 오신다면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이러한 문제를 체계적으로 한 번 쭉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2.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사람이 구원을 어떻게 받는지 하는 것은 기존에 내가 이렇게 들어왔으니 아마 그것이 맞겠지 하고 생각하면 아니 된다. 구원은 과연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천국과 지옥에 들어간 사람들의 간증도 참고하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기존 교리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잠시 내려놓으라. 그리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구원론 하나의 주제만 가지고 설교하더라도 아마 일 년을 설교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은 구원론과 종말론을 서로 비교해보는 시간이므로, 구원론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만 언급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믿음과 회개"라고 할 수 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고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무엇이 진리인지 헷갈릴 때에는 사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먼저 앞세우라. 그것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원얻는 믿음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첫째,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구원자이시며 나의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다. 그분은 원래 하나님이셨는데, 구약에서 약속하신 대로 아들의 신분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래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담당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또한 그분 자체는 죄가 없는 분이심과 그분에게만이 부활 생명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해 그분은 약속대로 3일만에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이, 믿음의 핵심이다. 그리고 둘째, 그렇게 해서 얻은 구원을 무효화시키지 않기 위해서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시작하는 믿음은 사실 어렵지 않게 가질 수 있으나(한국적인 상황으로 볼 때), 그것을 지켜내는 믿음을 계속 자고 있는 것은 쉽지 않다. 만약 우리가 지금 아프가니스탄에 있다고 치자, 과연 우리가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지켜내기 위해 탈레반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 순간에도 그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10:9에서 말하고 있는 "우리가 우리의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얻는 회개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 자신이 예수님을 몰라보고는 전능자가 우리를 구원하러 왔다 간 사실을 인정하지 채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멀리했던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회심으로서의 회개"라고 한다. 이러한 죄의 고백이 없는 자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둘째, 한 번 회심으로서의 죄를 고백했다면 그후부터는 날마다 짓는 자범죄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이때 과거에 지었던 죄들과 자신의 조상들이 지었던 죄들은 같이 회개한다면 더욱 좋다. 왜냐하면 조상들의 죄와 자기가 예수 믿기 전에 지었던 죄들 특히 우상숭배의 죄는 출20:5의 말씀에 따라 귀신들이 사람의 몸 속으로 들어와 3~4대까지 머물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철저히 회개할 수록 귀신들이 주는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후손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회개의 한 파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정 회개했다면 그 뒤부터는 회개했던 죄를 반복해서 짓지 말아야 한다. 만약 지었던 죄를 끝까지 끊지 못하고 반복해서 짓게 된다면 그는 결코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회심할 때에 한 번 회개했다면 그 다음부터는 반복적으로 회개하는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얻은 구원을 완성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예수께서 요한복음 13장에서 온 몸을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요13:10). 

 

3. 한 번 얻은 구원은 영원한가?

  어떤 사람은 자신의 믿음('지키는 믿음'이 아니라 처음으로 믿었던 믿음)과 회개('반복적인 회개'가 아니라 '회심으로서의 회개')로 한 번 구원을 얻었으니 그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이 말 자체는 틀린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 얻은 구원이 영원히 안전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예수님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이라고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우상숭배한다면 그의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계21:8). 고로 이미 믿고 회개하여 구원을 얻었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죄를 범하면서 회개하지 않는 자는 죽을 때에 하늘의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질 것이다(계3:5). 디모데전후서를 보면 믿음을 가졌으나 믿음에서 파선하는 자를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으니 찾아보라. 한 번 가졌던 믿음이라도 그것을 버리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히브리서를 보더라도 한 번 구원을 받은 자라고 할지라도 고의로 다시 죄를 범하고 배도하게 된다면 그에게 회개할 기회가 제공되지 않을 것을 경고하고 있음도 참고할 만하다. 그러므로 한 번 얻은 영원한 구원이 영원히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뤄가야 하는 것이다(빌2:12). 

 

4. 믿음에 대한 인내와 반복적인 회개 없이도 구원이 가능한가?

  이것을 좀 더 다른 각도에서 보자. 처음 우리가 믿었던 믿음과 그리고 회심으로서의 회개를 통해 자신이 구원을 얻었다면 그는 이제 구원의 노정에 갓 들어선 것이지 그것으로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야고보서를 읽어 보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믿음 자체가 죽은 것이며 그 믿음으로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구원의 노정이 끝나는 보는 구원관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노정에 이제 첫 발을 내 디딘 자가 나의 구원은 영원하며 안전하다고 생각하거나 또한 그렇게 가르치면 절대 아니 된다. 우리는 이미 믿음과 회개로 구원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지켜내야 구원은 유지되는 것이고, 회개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씻어내야만이, 죽을 때에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런 자가 새 예루살렘 성의 신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예수님을 믿었던 자라도 주님을 부인하는 비겁한 자들과 우상숭배자들을 비롯하여 십계명을 어기는 자들은 반드시 불과 유황으로타는 불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을 알라(계21:8). 그래서 이미 구원을 얻은 자라고 할지라도 자기의 겉옷을 계속해서 빨지 않는 자(현재분사형)는 생명나무에 나아가지 못할 것이며,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에 내버려질 것이라고 경고하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계22:14~15).

 

5. 영적인 측면에서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또한 사실 구원이란 영적인 영역에서 볼 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덧붙어진(추가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음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가 진실로 회개하고 믿었다면 그에게는 곧이어 성령께서 들어오실 것이다(요1:12, 계3:20). 그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영 안에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신다(롬8:2, 고전15:45).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드디어 '생명주는 영'이 되셨기 때문이다(고전15:45). 이것을 우리는 '거듭남'이라고 부른다(요3: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그 안에 생명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회개하고 믿어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때에 우리 안에 또다른 생명을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 그 생명은 어떤 생명인가? 첫째는 영원한(정확히는 '시대의') 생명이요, 둘째는 아버지의 생명이요, 셋째는 부활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은 우리가 죽는 그날까지 어느 누구도 깨뜨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 예수님을 믿어 거듭남으로 그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죽는 그날까지 그는 구원받은 채로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언제 사람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 그것은 그가 죽을 때다. 그가 죽을 때에 그간 믿음을 지키지 못해 주님을 부인하였거나 계속해서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면 죽는 순간, 성령께서 그 사람을 떠나게 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그 사람과 함께 지옥에 가시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 그러므로 바울은 한사코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했으며(살전5:19), 또한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고 했다(엡4:30).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붙잡고 있고 인치고 있는 시간은 우리의 구속의 날 곧 우리의 육체가 죽고 우리가 부활체를 입는 바로 그날까지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엡4:30).

 

6. 한 번 우리 안에 들어오신 보혜사 성령께서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그렇다면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영원토록' 떠나시지 않는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요14:16의 말씀이야말로 자신의 주장을 보증해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그것은 한글성경이 가르쳐주는 것이지, 헬라어 원문에는 그렇게 나와있지 않다고 말이다. 성경에는 '영원토록(영원히)' 혹은 '세세토록(세세무궁토록)'이라는 낱말(부사어)가 가끔 나온다. 시간의 영원성을 뜻하는 이 말은 영어에서도 '포에버(forever)'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헬라어로 보면, 그것은 그러한 뜻이 아니다. '에이스 톤 아이오나(eis ton aiwona)'라는 전치사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에이스(into)'는 '~안으로'라는 뜻이지만, 시간을 나타내는 명사와 결합하게 되면, '~까지(till), ~동안(for)'이라는 뜻으로 바뀐다. 그런데 이 전치사 뒤의 단어가 정관사 '톤(the)'과 명사 '아이온(age, period, generation, world)'이라는 단어다. 그런데 '아이온'은 우리말로 '시대, 세대, 세상'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므로, "에이스 톤 아이오나"는 "그 시대까지" 혹은 "그 시대동안"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이는 우리 안에 들어와셨던 성령께서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동안 우리의 구원을 보증해주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죽는 날에 우리의 믿음이 파산되었거나, 우리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아서 겉옷(두루마기)이 더렵혀진 채 계속 있다면, 성령께서는 그날 우리를 떠나고 말 것이다. 그러면 그날 하늘의 생명책에서 우리의 이름은 지워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구원에서 탈락하게 된다. 사실 우리가 그동안 생각해 보았던 끝이 없이 계속되는 '영원토록(영원히)'이라는 말은 정확히는 '세세토록(세세무궁토록)'이라는 뜻으로서, 헬라어 원문을 보면,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톤 아니오논'이다. 이 말은 영어로는 'for the ages of the ages'라는 뜻으로서 한글로 번역한다면, "그 시대들(세대들)의 시대들(세대들)까지"이다. 여기에 나오는 '아이온(시대,세대)'는 단수가 아니라 둘 다 복수의 형태다. 즉 이 문구는 "이 시대와 오는 시대 그리고 이어지는 그 시대와 그 다음의 시대까지"라는 뜻이다. 고로 이 문구야말로 진짜로 영원토록이라는 뜻이 된다(딤후4:18). 이러한 속성은 하나님만이 가지는 속성이자(계4:9) 영원한 세계에 들어갔을 때에 우리가 비로소 이해할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시간(계14:11)이라고 할 수 있다.  

 

7. 내가 믿고 따라가고 있는 종말론은 구원의 잣대가 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날 듣고 있고 믿어왔던 종말론은 과연 구원의 잣대가 될 수 있는가?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가 환난후휴거를 믿었다고 해서 그가 구원을 받고, 자기가 환난전휴거를 믿었다고 해서 그가 구원을 못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다 더 성경적인 견해를 따르지 않은 자들은 그날에 매우 혼란스러움을 경험할 것이 불보듯 뻔하지만 그것이 그의 구원을 좌지우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날이 되면 자기가 믿고 따라왔던 목회자에 대한 실망감도 이만 저만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가 다 자신의 선택의 결과인 것이지 목회자의 책임으로만 되돌릴 수는 없다.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목회자가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어디까지 자기가 어떤 목회자와 어떤 교단의 견해를 따라갈 것인지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자신의 선택의 결과였던 것이지 강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종말론을 어느 것을 믿었다고 해서 교회가 왜 당신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종말론을 믿지 않느냐면서 그를 구박을 하거나 그를 고문을 하거나 그를 교회에서 추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른 말씀은 다 자기가 섬기는 목사님의 견해를 따라가지만, 종말론의 견해에 있어서는 다른 목사님들의 견해를 따라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말론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흔들리거나 허물어지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에 존재하는 다양한 종말론의 견해가 다 정통교회 안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교단마다 그 견해가 다르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고로 어느 누가 환난전휴거를 믿었다고 해서 그를 이단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때 가서 자신의 가슴을 치는 일은 꼭 있을 것이다. 

 

8. 가장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는 종말론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가장 성경적인 종말론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것은 사도요한의 말씀이나 다니엘이나 에스겔 혹은 스가랴서에 나오는 말씀을 우선 적용할 것이 아니라 사복음서와 요한계시록 1~2장과 21~22장에 나온 말씀을 우선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 나와 있는 말씀들은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고 따라가야할 가장 안전한 종말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종말장'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마24장에 나오는 말씀으로서, 마24:29~30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다. 

마24:29-30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렇다. "그날 환난 후에" 주님이 오신다고 했다. 그리고 주님은 모든 사람들이 다 그 환난의 날을 겪게 될 것인데, 환난의 날이 너무나 혹독하여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한다면 모든 육체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셔서 택하신 자들을 위해 그날들을 감해주신다(줄여주신다)고 하셨다(마24:22).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고로 숫자적인 7년대환난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어야 한다. 다 환난을 통과하겠지만 환난의 날을 줄여주신다는 말을 믿고 그 환난의 날을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안전한 것이다. 

  그럼, 휴거는 언제 일어나는가?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인류 최후의 전쟁으로서 아마겟돈 전쟁 전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때가 되면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가 불신자들 및 하나님을 거역하는 땅의 왕들을 미혹하여 하늘의 군대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이때 하늘의 군대의 대장은 재림하시는 우리 주 예수님이시며, 그분을 따르는 군대는 천사들과 이미 구원받아 천국에 있던 성도들들과 그 직전에 휴거받은 성도들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전쟁이 있기 전에 먼저 성도들의 휴거가 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때가 정확히 언제인가? 정확히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오는 7편의 말씀을 보면, '곡식의 추수(성도들의 휴거)'와 '땅의 포도송이의 추수(아마겟돈전쟁)'가 나오는데, 아마도 이러한 순서로 진행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왜냐하면 사실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들의 휴거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신앙생활에 있어서 다른 모든 것은 조금 양보할 수 있는 영역이 될 수 있어도 구원관에 있어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진리가 있다. 그것은 회개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구원관을 갖는 것은 우리의 목숨처럼 소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오직 구원관은 오직 예수님의 가르침을 절대적으로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막1:15, 마4:17, 계22:14). 만약 이러한 구원관을 놓치게 된다면 우리는 구원에서 멀어질 것이고 심지어는 구원에서 탈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계3:5).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과 회개로 구원의 여정에 발을 딛기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완성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그러나 아니다(죽어보면 알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영혼이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에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딤후4:18, 계22:14~15). 그때까지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가 이미 얻은 구원을 이뤄가야 한다(빌2:12). 그런데 우리의 이러한 개인적인 구원의 사건 말고, 주님께서 오셔서 온 세상을 끝내시는 그날이 우리에게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종말의 때가 우리 눈 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의 때에 정신차려야 한다. 그날 주님 앞에 한 치의 부끄러움이 없이 설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열 처녀처럼 언제 주님이 오시더라도 주님 앞에 등불 들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이 언제 오시는지는 사실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소리가 날 때 나의 영혼이 과연 주님을 영접하러 나갈 준비가 되어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날마다 회개하라. 우리의 죄를 남김없이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더럽혀진 옷이 깨끗해지기 때문이다. 신랑되신 우리 주님께서는 죄로 얼룩진 겉옷을 걸치고 있는 더러운 성도를 결코 신부로 취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021년 09월 05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115) 에서와 야곱, 과연 유기와 선택 예정의 예표인가?(창25:22~26)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gwyBcEd1I7c  [혹은  https://tv.naver.com/v/20636333 ]

 

1.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을 한 후에 왜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 했나요?(창25:22)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한 후, 걱정할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태중에 있는 아기가 요동을 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혹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리브가는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이런 경우에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말이죠.

 

2. 리브가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셨나요?(창25:23)

  그때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의 기도를 들으시고, 복중에는 지금 쌍둥이가 잉태되어 있으며, 그들은 나중에 두 민족(나라)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이 복중에서부터 서로 싸우는 것은 장차 서로가 나누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때가 되면 한 족속(이스라엘족속)은 다른 족속(에돔족속)보다 강하게 될 것이고, 큰 자(에돔)는 어린 자(야곱)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서보니, 진짜 쌍둥이였습니다. 그중에 먼저 나온 자는 전신이 붉고 털이 많은 아이였으며, 후에 나온 자는 자기의 손으로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올 정도로 욕심많은 아이였습니다. 따라서 이름을 짓기를 전신이 붉은 장자는 "에서("붉다")"라고 칭하였고, 차자는 "발꿈치를 잡았다"고 하는 뜻으로 "야곱"이라고 칭하였습니다. 

 

3. 오늘날 개신교 중 일부에서는 에서와 야곱이 태중에서부터 하나님의 정하심을 두고서 "선택과 유기(버림받음)"라고 해석합니다. 이것은 바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나요?

  오늘날 개신교 중 특히 장로교쪽에서는 에서와 야곱이 서로 태중에서부터 나누인 것을 두고서, 구원에 있어서 야곱은 선택받은 자이며, 에서는 버림받은 자이 라는 것을 예표하고 있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한 결정이이 그들이 태어난 후에 그들이 선택해서 된 것이 아니라 태중에서부터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그렇게도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크게 잘못된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에서와 야곱를 태중에서 구원론적 관점에서 미리 결정한 것이 결단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에서와 야곱이 태중에서부터 서로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안배하신 것은 맞지만, 구원과 멸망을 이미 태중에서부터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방향을 잘못 설정한 해석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구원을 미리 결정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갈 삶에 대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안배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4. 사람의 쓰임과 구원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그 사람이 어떻게 쓰임받을 것인가 하는 것과 그리고 그 사람이 정말로 구원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아니면 버림을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앞의 것은 쓰임(용도)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고, 뒤의 것은 구원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쓰임을 받든지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회개를 제대로 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누구는 멸망으로, 누구는 구원으로 결정된 채 태어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을 거부한 채 제 길로 가서 결국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다(딤전2:4, 요37). 그러므로 에서와 야곱의 안배는 그들이 장차 어떻게 살아갈(쓰임받을) 것인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것이지, 그들 중에서 에서는 영원한 멸망으로 그리고 야곱은 영원한 구원으로 예정하셨다는 말씀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에서와 야곱의 경우를 비교하면서, 이들이 서로 다른 용도의 그릇으로 빚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에서와 야곱을 서로 다른 용도로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권한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9:21)"라고 말이죠.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를 이 땅에 내보내시기 전에 어떻게 사용하실 것인지를 미리 정하실 권한을 가지고 있으십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자기가 어떤 용도로 쓰임받을 것인지 사명을 부여받은 채 이 땅에 보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에서와 야곱의 경우처럼 미리 정해진 채 태어나는 사람도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은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하시고, 한 사람은 영원한 구원으로 예정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을 매우 왜곡한 해석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비정하고 난폭한 폭꾼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구원과 멸망의 운명을 처음부터 정해놓고 그대로 되게 만들어버리는 그러한 폭꾼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께서 정하신 안배(어떤 용도의 예정) 없이 태어난 사람일지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천국에 들어가서 큰 자가 될 수 있나요?

  그렇습니다. 사람이 잉태될 때 영안으로 보면, 보통 사람이 태중에서 잉태된 지 2~3개월쯤에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태중에 아이 속으로 보내주신다는 것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하늘로부터 보내어지는 영혼은 사람에 따라 0살에서부터 청소년의 시기까지 다양합니다. 대부분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의 나이에 하늘로부터 보내어지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0살에 보내어진 아이는 특별한 사명을 받지 않은 채 태어납니다. 그런 자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가꾸어야 할 지를 배우며 결정하며 살아가야 됩니다. 그런데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이미 정해진 소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 중에는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그것을 잘 감당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자신이 부여받은 사명을 망각한 채, 그냥 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하늘에서 특별한 사명을 받지 않은 채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말씀을 듣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여 천국에서 면류관도 쓰고,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는 종과 같이 남을 섬기는 자가 오히려 천국에서 섬김을 받는 자가 되고 더 큰 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20:26~27). 참고로, 큰 자(에서)가 어린 자(야곱)을 섬길 것이라고 말씀했으니, 에서가 천국에서 더 큰 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과 상급은 이미 정해진 채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 어떤 용도로 쓰임받을 것인지 하나님의 정하심을 따라 태어나는 사람이 있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원은 이 땅에서 자기가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믿음으로 얻게 되는 것이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천국상급도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고로 사람에게 미리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은 결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깨달은 가운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가 결국 복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말라기에서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라고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내일 더 소상하게 다루겠습니다. 

 

2021년 06월 08일(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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