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112) 그리스도의 예표인 이삭과 그리스도의 신부의 예표인 리브가의 만남(창24:54~67)_2021-06-03(목)

https://youtu.be/Sp0K2cNhOuQ  [혹은  https://tv.naver.com/v/20546041 ]

 

1. 창세기에 나오는 이삭과 리브가는 예표론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가요?

  창세기에 나오는 이삭과 리브가의 이야기는 예표론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신부를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이삭은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신다는 약속에 따라 사라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즉 이삭은 아들로 오신 하나님을 예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모리아의 한 산인 골고다에서 제물로 바쳐졌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정확히 그 사건이 있은 후에 약 2000년 지난 다음, 이 땅에 오셔서 골고다의 언덕에서 나무 위에 드려진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삭이 오직 한 사람의 신부만을 맞이한 것도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오직 한 몸인 우주적인 교회만을 당신의 신부로 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리브가 역시 그리스도의 신부를 예표합니다. 리브가는 아브라함과 같은 혈통을 지닌 여인으로서, 다음의 5가지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2. 리브가는 어떤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를 가리키는 것인가요? 

  창세기 24장에 기록되어 있는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둘째형인 나홀의 손녀입니다. 즉 나홀이 낳은 여덟번째아들 브두엘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리브가는 이후 아브라함의 독자였던 이삭의 아내가 됩니다. 고로 이삭이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면, 리브가는 그리스도의 신부를 예표합니다. 이러한 의미로 보았을 때, 리브가는 다음과 같은 5가지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를 예표합니다. 

  첫째, 그녀는 성숙미가 있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가졌습니다. 그는 외모만이 아니라 나이와 인격의 측면에서도 이제 결혼할만큼의 성숙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의 모습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녀는 처녀였습니다. 그는 아직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부는 신앙의 정절과 지조를 지켜내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더럽혀지지도 않아야 할 뿐더러 자신의 순결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교회가 예수님을 자신의 신랑으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의 지조를 끝까지 지켜야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녀는 마음이 견실했습니다. 그녀는 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헌신할 줄도 알았고 또한 매우 부지런했습니다. 또한 남을 배려할 줄도 알았으며 친절했습니다. 그녀는 세심했으며 자상했습니다. 또한 그녀는 마음이 따뜻한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교회도 그래야 합니다. 넷째,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결단해야 할 순간에 단호한 결달을 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섯째, 그녀는 자신이 서 이어야 할 위치가 어디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가정의 영적인 질서가 어떤 것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또한 그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한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3. 리브리가 결단력있는 여인이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우물가에서 범상치 않은 나그네를 발견했던 리브가는 그 손님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그네였던 늙은 종에게 물을 마시게 하였고 또한 그와 함께 왔던 일행에게도 그리고 낙타10필에게도 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집안에 손님들을 모시고 집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그날밤, 자신의 혼사이야기가 오갔습니다. 그리고 늙은 종과 리브가의 오라버니 라반의 혼사담판이 있었습니다. 이때 라반은 자신의 여동생을 시집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당시에는 아버지 대신 오빠가 그러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날은 이미 해가 기울어졌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늙은 종과 수행자들은 그날 밤을 브두엘의 집에서 묵었습니다. 아침이 밝아오자 늙은 종은 이른 아침부터 신부감을 데리고 떠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녀의 오라버니(라반)와 어머니(밀가)에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일이 갑작스럽게 진행된터라, 라반과 밀가는 리브가를 조금이나마 곁에 두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며칠 혹은 열흘만이라도 자기 집에 있다가 가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늙은 종은 아주 강했습니다.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마지 못해 라반이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동생에게 물어보자구요.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리브가가 그 이야기를 듣자 곧장 가겠다고 말을 하셨습니다. 오빠가 "저 사람들과 함께 갈래?"라고 묻자마자 리브가의 대답은 아주 단호했습니다. "예, 저는 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리브가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무엇인가를 정확히 결정해야할 순간에 단호함을 보였습니다. 그때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자는 어떤 순간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면 즉시 결단을 내리는 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리브가의 복종과 겸양과 결단력이 어떠했는가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4. 리브가는 시집가는 그 순간에 무엇을 눈을 떴을까요?

  그리고 리브가는 늙은 종을 따라나섰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이 여인이 복있는 여인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하란을 떠난 리브가는 약 20여일이 지나 가나안 땅 브엘세바 근처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떤 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그러자 첫째, 즉시 낙타에서 내렸습니다. 이는 윗 사람에게 대해 예의를 갖추는 행동입니다. 윗사람을 보았을 때에 아랫사람이 자신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표현해주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남편감을 만나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거의 가까이왔을 때에 어떤 남자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 여인은 낙타 위에서 내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면박(베일)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웠습니다. 눈만 남긴채 베일로 자신의 머리를 두르고는 눈 밑 얼굴 전부를 자신의 베일로 가린 것입니다. 이는 함부로 외간 남자에게 자신의 신체를 내보이지 않겠다는 의미요, 당시 문화의 풍습에 따르면, 자신은 자신과 맺어진 한 사람 곧 신랑에게만 자신의 얼굴을 보여줄 수 있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니 당시 그녀는 경박스럽게 않고 매주 정중하게 행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이처럼 경박하지 않았고 자신의 서열과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여 자신이 해야 할 말과 그리고 해야 할 행동을 정확히 하였던 것입니다. 

 

5. 사도바울은 리브가가 베일을 썼다는 것을 어떻게 예표적으로 해석하나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여자가 자신의 머리에 무엇인가(베일같은 것)을 쓰고 예배시간에 기도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는데, 바울은 그것을 영적 질서에 대한 표현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고전11:3). 또하나 바울은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고전11:10)"라고 덧불혔습니다. 고로 이러한 원리 아래서 바울은 여자가 교회에 나올 때에는 면사포(베일)을 쓰라고 권면했습니다(고전11:10). 그런데 바로 리브가가 그때 남편될 신랑감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 자신의 베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운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머리가 이제 자기자신이 아니라 남편의 것이라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녀는 이제부터라도 자기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남편이 될 이삭의 생각과 의견을 전적으로 따르겠다는 표시를 한 것입니다. 고도 당시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어야 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여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첫번째로 죄를 지었던 여인 하와는 어떠했습니까? 그녀는 아무리 뱀의 말이 옳게 생각되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남편에게 그것을 물어보았어야 했습니다. 그녀의 위치는 당시 머리의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에게 묻지 않고 뱀의 말을 듣고는 뱀의 말을 따라서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와와 그리고 그녀의 남편 아담이 범죄를 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항목들이야말로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가 갖춰야 할 5가지 항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과연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상속자로로서 얼마나 준비되어 있을까요?

 

2021년 06월 03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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