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누군가 이 영상이나 글을 처음 접하는 분이 있다면 이 글을 꼭 끝까지 정독하기를 강력히 권해드린다. 이 글은 우리의 구원에 관한 모든 혼란과 논쟁을 정리하고 종식시키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끝까지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얻은 구원은 과연 완전한 것인가? 그렇게 해서 얻은 영생은 과연 영원히 잃어버리지 아니하는가? 여기 교리나 신학자의 주장 뿐 아니라 정확한 성경적인 가르침이 들어있다.

2020-07-31(금) 금요기도회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11) 믿음으로 얻은 영생,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는가?(요10:27~29)
https://youtu.be/PNq82hFnLuE [혹은 https://tv.naver.com/v/15073120 ]

 

 

1. 들어가며

  사람은 믿음과 회개로 영생도 얻고 구원도 얻는다(막1:15,마4:17,요5:24). 그렇다면 한 번 얻은 구원은 영원한 것인가 아니면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인가? 저마다 나름대로의 성경말씀을 가지고 설명한다. 이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이 사람의 말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저 사람의 말이 옳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더 많은 사람이 옳다고 하는 것을 따라가면 되는가? 아니면 더 많이 배웠거나 위대한 신학자들나 설교자들의 주장을 따라가면 되는가? 아니다. 사람의 해석은 저마다 다양할 수 있고 심지어는 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를 살펴보아야 하고, 사도들은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믿음으로 얻은 영생,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2가지 축복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사실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그것을 크게 정리해 보면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자기가 지은 죄들을 용서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이요(요일1:7,9),  또 하나는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에게 분배된다는 것이다(요:24,10:28,롬8:1,고전15:45). 앞의 일은 우리의 "회개"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며, 뒤의 것은 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앞의 것이 성취되려면 "예수님의 피"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뒤의 것은 성령의 내주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3. 믿음으로 모든 죄를 영원히 용서받을 수 있는가?

  어떤 이는 한 번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 순간에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받아 자신의 죄가 다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 순간에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영원히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19세기 신학자이자 설교가로서 스펄전 목사님이 그렇다. 찰스 해돈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년 6월 19일 ~ 1892년 1월 31일)목사는 영국의 침례교 목사 가운에 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구원론에 관하여 설교한 것을 들어보면, 그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는 순간에 모든 죄를 다 용서받는다는 가르침을 쏟아내고 있다. 그의 설교의 내용을 잠깐 인용해본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단순히 믿으시고 여러분을 위하여 창에 찔리신 그 사랑의 마음에 여러분 자신을 맡기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의 복스러운 손에 맡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여러분의 모든 죄는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 안에는 한 결속체가 있으며, 그것은 하나의 큰 덩어리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그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영원히 사라집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스펄전목사의 설교는 그가 무엇을 강조하려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이 되지만 그분의 주장 가운데 사실이 아닌 것이 있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우리의 모든 죄가 사라진다"는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자신의 과거의 죄와 현재와 죄와 미래의 죄가 영원히 용서된다"는 말씀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의적인 해석이지 성경의 말씀은 아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해서 사람이 구원얻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하는 말이지만 실은 성경에는 그러한 말씀이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다는 것(히9:12,10:14)은 그분의 속죄가 완전하다는 뜻인 것이지 "그분의 속죄가 곧 우리의 죄사함"이라고 하는 등식은 잘못된 것이다. 만약 그분의 속죄가 우리의 죄사함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분의 속죄는 모든 인류를 위한 속죄였으므로(딤전2:6, 요일2:2), 모든 인류가 다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그중에 믿고 회개하는 사람에게만 속죄가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4. 사람의 죄는 어떻게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사람의 죄는 어떻게 용서되는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가 그냥 무조건 다 용서되는가? 아니다. 사실 이 세상과 우주에 있는 그 무엇으로도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은 오직 대속의 죽음을 치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속죄를 받고 구원을 받는 것을 두고 "은혜"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시 물어본다. 예수님을 믿기만하면 자동적으로 자신이 지었던 과거의 죄가 용서받고 그것을 시작으로 현재 짓고 있는 죄들이나 앞으로 미래에 짓게 될 죄들까지 다 용서가 되는가? 아니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주장이다. 성경에는 그러한 말씀이 결코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명확한 사실을 전달해준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믿을 때에 그분에 피에 의하여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하게 되는 것이며, 우리가 직접 회개(자백)할 때 우리가 지었던 죄들이 용서를 받게 되는 것이다(요일1:9). 그러므로 자신이 지었던 죄를 자백하지도 않았음에 불구하고 자신의 죄가 자동적으로 다 용서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성도들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예수님의 피로만 자신의 죄를 사함받을 수 있음을 믿고 그분을 영접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 죽는 그날까지 자신이 지은 죄들을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없이는 결코 죄사함이 일어나지 않으며, 죄사함을 받지 못하면 결국 남아 있는 죄들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고로, 사람의 죄를 용서받으라면 죄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흠없는 속죄제물의 피만이 자신의 죄를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을 믿어야 하고, 자신의 죄를 철저히 자백해야 한다. 여기서 "자백(호몰로게오)"이란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과거의 죄악을 고백하는 것이다. 죄를 인정하고 입으로 말해내는 것이다. 이때는 "하나님, 제가 무슨 무슨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주옵소서"라고 해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해주시는 것이다. 

 

5.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영접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사람이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때에,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으로 들어오신다(사람마다 시간은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이때 성령께서 또다른(같은 종류의 다른) 보혜사로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 이때 성령은 예수님과 다른 영이 아니다. 예수께서 생명주신 영이 되셔서 성령으로써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다(고전15:45, 요14:16~17).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에는 하나님의 생명(조에)를 가지고 들어오신다사실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직 한 분 독생자이신 예수님에게만 주어졌던 것인데,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는 또다른 자기자신인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공급되어질 때에 모든 신자는 그때에 거듭 태어나게 된다(중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 순간에 하나님의 생명이 분배되어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탄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동시 하늘에 있는 생명책에도 그 사람의 이름이 기록이 된다(계13:8,21:27). 

  사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에도 하나님의 생명책의 존재여부를 알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구약시대에는 지도자로서 모세와 다윗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출3ㄷ2:32, 시69:28), 선지자로서 다니엘과 말라기도 생명책의 존재여부를 알고 있었다(단12:1,말3:16).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육신을 입으신 예수께서도 생명책에 사람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을 언급하셨고(눅10:20), 사도바울이나 사도요한도 생명책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빌4:3,계20:15).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라 할지라도, 이기는 자가 되지 못했을 때에는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음을 경고하셨다(계3:5). 그런데 놀랍게도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 그들은 앞에서 언급한 사람들 중에 있는데, 모세와 다윗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생명책에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지만,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특히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데교회에 주신 말씀을 보라. 예수께서는 이기는 자에게는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럼 거꾸로 해석하면 어떻게 된다는 말가? 그것은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고로 우리는 믿음과 회개로 칭의를 얻고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부인하거나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아서 용서받지 못하면 결국 하늘의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은 자이나 죽는 그 순간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뤄(완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빌2:12).

 

6. 구원받을 때에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우리가 구원에 관해 말할 때에 특별히 신경써야 할 말씀이 있다. 그것은 요10:28의 말씀이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을 보면, "영생을 받게 되면 그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만약 이 말이 한글로 번역한대로 그게 사실이라면 영생을 받은 자는 결코 멸망받을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믿음에서 파선한 자들이 이야기가 나온다(딤후3:8, 딤전:19~20). 그리고 성도의 신앙의 여정의 예표인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음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분명하게 언급한다(히3:12~4:1,11). 그리고 믿고도 타락한 자들이나 고의로 죄를 범하는 자들 중에는 회개가 안 되어 결국 불사름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히6:6~8, 10:26~27). 또한 사도바울은 이미 구원을 얻은 성도들을 향하여 "영생을 취하라(붙들라)"고 명령하였다(딤전6:11~12). 이는 영생을 얻은 자가 영생에 주의하지 않으면 잃어버릴 수 있음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얼핏 보게 되면 예수님의 말씀과 다른 사도들 및 성경기록자의 말씀이 서로 충돌되는 듯히 보인다. 하지만 헬라어성경원문을 보면, "영원히" 멸망받지 아니한다는 말의 뜻을 정확히 알 수가 있다. 
  요10:28의 말씀은 먼저, 누구에게 영생이 주어지는가 하는 것과 더불어 "영원히"라는 의미를 알아야 한다. 먼저 예수께서는 누구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하셨는가? 그 대상은 "그들"이다. 여기서 그들은 바로 앞에 나와 있는 문맥에 따르면 "주님의 양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고, 주님을 따르고 있는 자들이다. 이는 만세전에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된 자들이 아니다. 사실 태어날 때 모든 사람들은 아담의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리하여 마귀의 지배아래 놓여 있다(요8:44, 요일5:18). 그들 중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따르기로 하는 자들이 결국에 주님의 양으로 선택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고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영원히"라는 단어의 뜻에 시선을 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상 "영원히"라는 말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영원무궁토록" 혹은 '세세토록'이라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영원히 혹은 영원토록'이라는 말과 "영원무궁토록, 세세토록, 세세무궁토록"이라는 말은 문구(부사구) 자체가 다르다. "영원히(영원토록)"은 "에이스 톤 아이오나"이고, "세세토록"은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톤 아이오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아이온"은 "세대(age, generation)", "세상(world)"라는 뜻이다. 그러니 "에이스 톤 아이오나(for the age, till the generation, till the world)"는 "그 세대까지, 그 세상까지"라는 뜻이다. 고로, 한 번 예수님을 믿어 그가 영생을 가진 자가 되었다면 그는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영생이 취소되거나 빼앗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성도가 조금 범죄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로부터 생명을 빼앗아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가 죽은 다음은 달라진다. 그가 죽을 때에 성령께서 그를 떠나가심으로 영생도 그에게서 빼앗길 것이기 때문이다.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분은 "영원토록(에이스 톤 아이오나) 너희와 함께 있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여기에 등장하는 "영원토록"이라는 문구(부사구)도 역시 "에이스 톤 아이오나"이다. 이는 믿는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나가기까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한편 "영원히"에 관한 히브리어는 "올람"이라는 단어인데, 이 역시 마찬가지의 뜻이다. 노아홍수 직전에 사람의 타락은 극에 달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년이 되리라(창6:3)" 고로 만약에 이 말씀에 나오는 "영원히"라는 단어의 뜻이 실제로 "영원무궁토록, 세세토록, 세세무궁토록( forever)"라는 의미였다면, 사람 가운데 성령이 함께 할 사람은 그 뒤로 한 사람도 없어야 한다. 그러나 구약시대에 성령이 함께 한 사람이 있었고, 오순절 성령강림이후에는 모든 믿는 이들 속에 성령이 내주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영원히"라는 문구도 마찬가지로, "그 세대까지"라고 해석해야 한다. 곧 "영원히"는 "세상끝날까지"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또한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다시 오실 예수께서도 승천하시면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시대의 끝까지 모든 날들을)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말씀하셨다. 재림시에 주님은 영원히 그들과 함께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때 그분은 심판주로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사도바울은 엡4:30에서도 성령께서 언제까지 믿는 성도들과 함께 하는지 그 시기를 알려주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구속받는 날까지라고 한정해서 말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우리의 몸이 구속받아 부활체를 입는 그날까지, 성령을 근심하게(슬퍼하게) 해서는 결코 아니 된다는 것이다. 그날까지만 성령의 인침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원히"라는 말은 세세토록이라는 뜻으로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만약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영원무궁토록(forever)"의 의미로서 주님께서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을 의미하는 말씀을 하셨다면, "에이스 톤 아이오나(단수)"라는 문구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복수) 톤 아이오논(복수)"이라고 말씀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 뜻은 "세대들의 세대들까지(till the generations of the generations), 혹은 시대들의 시대들까지(till of the ages of the ages)"라는 의미로서, 끝없이 지속되는 기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단지 "에이스 톤 아이오나"라고 말씀하셨다. 참고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2번의 "세세토록'이라는 말은 전부 헬라어 원문으로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톤 아이오논"으로 나온다. 

 

7. 한 번 믿음으로 성도의 구원의 여정은 시작되었는데, 믿음으로 얻은 그 구원은 어떻게 해야 보존할 수 있는가?

  사실 제대로 된 믿음은 한 번 갖게 되면, 성령께서 그 사람 속에 들어오심으로 그 순간 그 사람의 이름도 역시 하늘에 생명책에 기록된다. 그렇다면 한 번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 지워질 수는 없는 것인가? 그것은 앞부분에서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지워질 가능성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참고로 그것이 지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았던 선지자들이 구약시대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바로 모세와 다윗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데교회에게 직접적으로 들려주신 말씀 가운데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가능성을 언급하셨다는 것이다. 사데교회는 어떤 교회였는가? 살아있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를 가리킨다. 주님은 그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날린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과 회개로 일차적으로 얻은 구원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고 보존케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럴려면, 하나님의 절대주권만을 믿으면 되는 것인가? 혹은 구원에 대해서는 이미 끝난 일이니 신경쓰지 말고 그냥 지내도 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법이 존재하는 것인가? 성경은 말한다. 한 번 가졌던 믿음이라도 그 믿음을 인내함으로 잘 지켜야 한다고 말이다(마24:13,계14:12). 우리는 사실 믿음을 갖는 것보다 지키는 믿음이 더 어렵다는 것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믿는 순간에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의 영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는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일평생 그 믿음을 잘 지켜나가야 한다. 즉 과제들을 잘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고로 내게 시험이 찾아올 때 믿음을 지키고 주님을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더불어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부인하게 되면 심판으로 나아갈 때 주님도 그를 부인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을 믿는 믿음을 인내하지 못하고 부인하게 되면 그날에 그도 버림받을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마10:32~33). 

 

8. 구원은 결국 어떻게 해서 완성해 나가는가?

 구원은 사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시작된다. 믿고 회개하는 자는 그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다. 그러면 그는 달리기 시합에 출전한 선수처럼 구원의 노정의 트랙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부는 힘껏 골인점을 향하여 달려가야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죄를 지어 쓰러질 수도 있다. 계속해서 못달리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곳에서 주저 앉아있으면 안 된다. 그러다가 구원에서 탈락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하고서 다시 일어나 달려야 한다. 믿음의 고백을 다시 견고하고 붙들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들(십계명)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인내로서 지키는 것이다(계14:12). 그리고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 용서를 받는 것이다(요일1:9). 

  사실 구원은 믿을 때에 이미 시작되었다. 그 때에 이미 우리는 완전하고도 온전한 구원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믿음을 얻은 자라도 죄의 유혹을 다 뿌리치고 승리하는 것이 쉽지 않다. 죄를 지어 회개하지 않아 죽는 날에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떤 경우에는 말과 생각으로 죄를 짓을 수 있다. 그러면 즉시 회개하라. 그래서 죽는 순간에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가도록 자신을 준비하라. 고로 구원에 있어서 최종적인 관문은 회개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회개없이는 구원을 완성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오늘날 우리 믿는 성도들의 위치는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온 그날의 이스라엘 백성과도 같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회개함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광야생활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죄된 본성이 여전히 내 속에 들어 있고, 또한 안과 밖에 우리의 영혼을 노리는 귀신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과 성령을 주셨으며, 예수의 이름을 들려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약하여 죄를 짓는다. 그러나 회복할 수 있도록 하나의 장치를 마련해 주셨다. 그것은 "회개"다. 회개하면 귀신도 힘을 잃어버리고 떠나간다. 회개하면 어떠한 죄를 지었더라도도 다 용서를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그가 죽는 그날에 성령이 떠나가심으로 그의 구원도 상실되고 말 것이다. 또한 우리가 핍박 가운데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다면 그날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될 것이다. 구원은 선물로 주신 것이나,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책임이 여전히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대신해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대신 회개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는 날마다 회개하고 날마다 믿음을 잃지 않도록 말씀을 들어야 하고 실천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말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소망으로 얻은 구원이기에(롬8:24),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야 하는 것이다(빌2:12). 

 

2020년 07월 31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06)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가 행함으로 받는가?(약2:14~19)_2020-07-27(월)

https://youtu.be/lO2U3pVCr-A  [혹은 https://tv.naver.com/v/14982185  ]

 

 

1. 구원은 어떻게 받을 수 있나요?

  구원이란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가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천국에 들어가려면 회개하고 믿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막1:15, 마4:17, 행2:39, 20:21). 곧 믿음과 회개가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였던 것입니다.

 

2. 왜 오늘날에 들어와 구원의 요소 가운데 하나인 "회개"가 빠져버린 것인가요?

  그것은 중세시대의 잘못된 구원관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이 "오직 믿음"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고, 이어서 만세전 개인 구원예정론이 개혁신앙의 기초가 됨에 따라 회개는 점차 시야에서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중세시대만 해도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은혜)와 행함(공덕)"으로 주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은총"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베푸시는 은혜가 아니라, 베드로와 교황 그리고 교황의 대리인격인 사제들에 의해 베풀어지는 은총으로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사제들이 영세(세례)를 베풀고,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사해주지 않으면 은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한 모든 사람은 공덕을 쌓을 때에 비로소 죽어서 연옥에 떨어지지 않고 곧바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하여 천주교에서는 선행과 기부와 공덕을 매우 강조합니다. 그것도 부족하니 구제와 고행도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중세의 신부의 한 사람이었던 루터는 고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어보려고 노력해보지만 그 어떤 것도 자신의 구원을 확신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는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고민을 자기 위에 있는 신부님에게 아뢰었고 그러자 그가 건네준 성경책을 받아들고 그것을 읽다가 결국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것을 발견하기에 이르른 것입니다. 루터도 처음에는 회개의 중요성을 같이 언급했지만 "오직 믿음"을 강조하다보니 점차로 "회개"는 뒤로 밀려나기 시작하였고, 조금 후에 등장한 "만세전 개인 구원 예정론"이 퍼짐에 따라 성도들의 시야에서 "회개"는 점차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3. 개신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행함(행위)로서 구원얻는다고 하는 분들의 주장은 과연 옳은 것인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회도 역시 타락하여 그 도가 지나치자, 개신교인 가운데서도 구원은 믿음과 행함으로 얻는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마7:21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라고 하셨으며,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약2:26)"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즉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2:14)"라고 야고보는 분명하게 언급했습니다. 그렇지만 행함을 구원의 요소로 정해버린다면 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행함이 구원에 있어서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이것을 교리화시켜 구원의 필수요소로 정해버린다고 하면, 이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이 한 사람도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4. 행함(행위)를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해서는 아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믿음과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믿음과 행함이 필요하다고 규정해버리면, 그때부터는 다음과 같은 치명적인 단점이 나타나시 시작합니다. 첫째, 얼마만큼 행동으로 옮겨야 구원받을 수 있는지 그 기준을 아무도 정할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은 더욱 요원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20:12)"라는 명령을 행동으로 옮기려면, 과연 얼마만큼 부모에게 잘 해야 공경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침마다 문안인사를 드리면 공경하고 있는 것인지, 매주 외식을 시켜드리고 옷 한 벌씩 사다드려야 그분을 공경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십계명 중에서 10번째 계명인 "탐내지 말라(출20:17)"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대체 어느 정도의 물품을 사야 탐심을 부리지 않은 것인지 사실 아무도 정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행함의 구원의 조건이 되어버리면, 자신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과 회개가 부족할 경우 행함으로 그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고 시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믿겨지지는 않지만 천국에는 가야 하겠는데, 어떻게 잘 안 되니까 헌금이라도 많이 내서 천국을 가려고 시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필연코 자신의 믿음과 회개의 부족한 부분을 봉사를 해서, 선행과 구제를 해서 메우려고 시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셋째, 행함을 구원의 조건으로 설정해버리면, 행위를 많이 한 사람은 자기의 행위(자기의 의로움)를 으시대거나 자랑하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되고, 행함이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지만, 구원을 위해서 행동을 하다보면, 너도나도 자기자랑에 빠지게 되고 그러면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것일 뿐 예수님의 의는 어디론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눅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중에서 바리새인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눅18:11~12).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11-12)" 그가 성전에 나온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자기의 의로운 행위를 자랑하려고 나온 것입니까? 그런데 그 기도를 들어보면 꼭 자기자랑하기 위해 나온 것 같습니다. 결국 행위를 강조하다보면 자기자랑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고로 우리는 행위라는 것을 통해 자신이 제대로 구원을 받는 노정에 달리고 있는지를 확인해볼 수는 있어도 그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설정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5. 구원에 있어서 행함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행함을 구원의 하나의 조건으로 볼 것이 아니라 다른 용도로 그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음 이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볼 것은 자신은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고 하는데, 그리고 수십년을 신앙생활을 해 왔다고 하는데, 그에게 믿음에 합당한 열매들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최소 그의 믿음이 과연 정상적인 믿음인지 아닌 곧 그 믿음이 자신을 구원할만한 합당한 믿음인지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2020년 07월 27일(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알미니안주의의 약점은 무엇이며 칼빈주의의 약점은 무엇인가?(요8:31~36)_2020-05-07(목)

https://youtu.be/DZNNO-Mov-w [혹은 https://tv.naver.com/v/13686017 ]

 


1. 예수께서는 죄의 노예가 되어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나요?

  예수께서는 이미 죄의 노예가 되어있는 사람들일지라도 아들이 그들을 자유롭게 한다면 그들이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8:36).

 

2. 사람은 어떻게 되어서 죄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나요?

  사람은 태어나면서도부터 이미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죄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사실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류는 죄로부터 해방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러한 인류를 자유롭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배우겠지만 그분은 사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요8:24,28,58). 그러므로 그때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인간이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키며,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절대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3. 당시 유대인들은 어떻게 해야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나요?

  당시 유대인들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받았던 율법을 자기들이 지킬 때에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전히 율법의 속박, 죄의 속박에 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고서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사람이 율법을 지켜서 죄로부터 자유롤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며, 오직 아들이 죄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할 때에라야 그들이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 알미니안주의의 약점은 무엇이며, 칼빈주의의 약점은 무엇인가요?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그가 어떠한 죄를 짓는다고 할지라도 그는 마침내 죄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무모한 확신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하나님 앞에 어떤 의로운 행위가 없으면 자신은 버림받을 것이라는 걱정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을 정리해보면, 칼빈주의자들은 한 마디로 "성도의 견인"(한 번 구원받은 자는 어찌하든지 받은 구원이 보존되어 끝내는 구원받게 된다)교리에 빠져서 자신이 죄를 짓고 있어도,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니, 자신의 구원은 안전하다는 생각 속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알미니안주자들은 자신에게서 의로운 행위들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자신은 버림받을 수 있다는 걱정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자신이 마음 속에 어떤 의로운 기준을 정해놓고는 그것을 성취했을 때에는 안심하고 만족하지만 그러한 행위들이 부족하거나 없을 때에는 늘 자신을 학대하면서 자신의 구원도 불확실하다고 생각해버립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잘못입니다.

 

5.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관은 어떤 것인가요?

  예수께서는 오늘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죄로부터 구출받아 자유롭게 되는 것은 순전히 아들이신 예수님의 절재주권에 속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자 들어보십시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6)" 이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아들만이 죄의 노예가 되어있는 사람들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사람의 능력만으로서는 결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만, 아들이 그를 자유롭게 하면 자유롭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있었던 한 사건의 경우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유부녀입니다. 유부녀가 간음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에 의하면 그 여자는 살 방법이 없습니다. 그녀는 돌에 맞아 죽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신22:22, 레20:10).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녀를 살려내셨습니다. 그럼, 어떻게 살려내셨습니까? 예수께서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그분은 하나님으로서(내일 더 자세히 배우겠습니다), 그녀를 죽음의 위기에서 건져내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 속절대적으로 속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시겠다고 결정하셨다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죽지 않고 살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2020년 05월 07일(목)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구원은 처음 믿을 때 주어지지만 인생의 노정의  끝에 갔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확실한 증거는?(히12:1~2)_2020-03-25(수)

https://youtu.be/0A8w3Gs0mpw [혹은 https://tv.naver.com/v/13053150 ]

 

1.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는다는데 그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하나님 우편 혹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막16:19, 히12:2).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또 다른 보좌가 있어 거기에 앉으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후에도 하늘에서 아들로서 하시는 사역이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대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2가지인데 하나는 당신이 골고다언덕에서 치른 속죄의 제사의 효력을 불신자들과 신자들에게 적용하는 일을 하십니다. 즉 회개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성령을 보내주시고, 이미 믿은 자들이 회개할 때에 그의 죄를 당신의 피로 씻어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세상에서 영적 전쟁을 하는 우리 성도들의 청원을 들으시고 그 기도를 하나님께 전달해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즉 우리 성도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일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에게 도움을 받으려면 먼저는 회개해야 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을 믿을 때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되었지 왜 성도들은 계속해서 회개해야 하는 것인가요?

  예수님을 믿을 때에는 응당 회개하고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뒤에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중생을 얻은 상태 즉 성령을 마음 속에 모셔옴으로 구원받은 상태가 됩니다. 이때 하늘에 있는 생명책에 자신이 이름이 기록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그때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받은 구원이 영원하느냐 하는 것은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후에 그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신이 죽는 날까지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데,그때 무슨 일이 있을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핍박이 두렵고 유혹에 못이겨 신앙을 떠나버린다면 그 사람은 당장에는 버림받지는 않겠지만 그가 죽는 날에 그 사람 속에 있던 성령이 떠나시며, 하늘의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비록 예수믿고 구원을 받았어도 그 후에 지은 죄들을 회개하여 용서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 죄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불못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입니다(계21:8). 그러므로 성도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지은 죄들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께서 돌아가셨습니까?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회개하지 않음으로 예수께서도 그 죄를 용서해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요일1:9).

 

3. 히브리서 기자는 구원받는 과정을 한 순간으로 보았나요 하나의 경주로 보았나요?(히12:1~2)

  히브리서 기자는 구원받는 과정을 하나의 순간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으나 그 큰 구원을 잘 간직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잃어버릴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구원이란 일종의 경주와 같은 것이어서, 골인지점에 갔을 때에 비로소 완성된다고 말했습니다. 구원은 믿을 때에 시작되기는 하지만 그날 골인지점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달려가서 마지막에 골인지점에 도착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룰 문제는 하나는 죄의 문제요 또 하나의 문제는 상의 문제입니다. 죄는 회개함으로 반드시 처리해야 하며, 중간에 탈락하기 않기 위해서는 푯대를 바라보고 그날 주님으로부터 받을 상을 위해 힘껏 달려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4. 사도바울은 자신이 구원을 얻고 있다는 증거를 어떻게 표현했나요?

  사도바울도 히브리서 기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구원을 얻는 것을 하나의 경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초기의 서신이었던 고린도전서를 보면, 그는 운동장에서 달리기 하는 선수처럼 경주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경주하는 것은 상을 얻기 위함이며,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 때로는 절제도 해야하며,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달려가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복음을 전파하고 있지만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자기자신도 버림을 당할 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고전9:24~27). 그리고 그가 3차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무렵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3-24)" 그리고 로마에 가서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도 사도바울은 아직도 힘껏 푯대를 향하여 부름의 상을 받기 위해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가지]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2-14)"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죽기 일보직전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

 

5. 그리스도인들에게 천국에서 받을 "상(면류관)"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요?

  어떤 분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신앙생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틀린 말이 전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인지라 항상 감사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말씀을 통해서라도 각성해야 합니다. 죄를 거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고의 말씀도 필요합니다. 만약 좋은 말만 필요했다면 왜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는 소아시아의 일곱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렇게 회개할 것을 경고해야 하셨을까요? 회개하지 아니하면 촛대를 옮겨버리겠다, 토해 내버리겠다, 둘째사망의 해를 받게 될 것이다.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것이다. 등등 말이죠. 고로 우리는 경고의 말씀을 복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상을 얻기위해서라도 부지런히 달려가야 합니다. 사실 상이 없다면 부지런히 달려갈 의미도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부지런히 달려갔습니다. 그래서 죽기 일보직전에 고백하기를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야 구원의 여정이 끝난다는 것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4:18)"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가야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이미 구원받은 자라도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의 중간에 어떤 어려움이 와도 절대 주님을 부인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혹 실수하여 어떤 죄를 지었다라도 그것 때문에 주님을 떠나가지 마시소 꼭 회개해서 그 죄를 용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과 회개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20년 03월 25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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