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은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유일한 계시서(묵시서)다. 그런데 이 책은 편지의 형식을 빌어서, 사도요한이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게 보낸 서간집이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은 예언과 상징들로 구성되어있기에 읽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것을 이단들이 주로 사용해왔다. 심지어 종교개혁자 루터도 이 책을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우리는 이 책을 덮어도어야 하는가? 만약 우리가 제대로 이 책을 이해할 수 있기만 한다고 한다면 엄청난 영적인 유익이 들어있다. 오늘은 그 서두의 말씀이다.

2019-12-01(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이며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가?(계1:1~6)
https://youtu.be/74WbjKy5QA4


1. 들어가며

  요한계시록은 대체 어떤 책인가? 말세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꼭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아니면 읽지 않아도 상관없는가? 그런데 선뜻 이 책을 읽기에는 조금 망설임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이단들이 이 책을 해석하다가 그만 이단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이단이 어떻게 나오는지는 나중에 좀 더 공부하게 될 것이다). 지금도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이단들이 많이 사용하는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아예 손을 뗄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책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영적인 유익들이 너무나 크고 많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오실 분이신 하나님께서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의 관계도 소상하게 알 수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는지 그분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시는지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은 대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가장 정확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요한계시록은 무슨 책인지, 그 성격에 관하여 한 번 살펴보고, 요한계시록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 책인지 그 서론격에 해당하는 부분을 조금 살펴보고자 한다. 이 메시지를 듣는 여러분에게 성령의 인도하심과 조명하심이 함께 하기를 바란다.

 

2.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인가?

  요한계시록은 어떤 유형의 책인가? 그것은 3가지다. 하나는 편지요 또 하나는 예언서이며, 마지막 하나는 계시서(묵시서)라는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편지로서 일곱교회에 부쳐진 것이며, 예언을 말하고 있고, 상징과 환상을 통해서 하늘의 계시를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 책이 왜 이 3가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요한계시록은 편지라는 것이다(계1:4). 이 책은 편지다. 편지는 발신인과 수신인이 있고 그리고 편지의 내용이 있다.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의 발신인은 누구인가? 그는 사도요한이다(계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편지하노니...(계1:4). 그렇다. 이 편지의 발신인은 사도요한이다. 그렇다면, 수신인은 누군가? 그것은 "당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계12:4,19~20, 2:1,8,12,,183:1,7,14))"였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교회였다. 그렇다면 무슨 내용을 쓴 것인가? 그것은 딱 3가지다(계1:19). 사도요한이 "그날 본 것들"(계1장)과 "그때 있는 일들"(2~3장)과 "장차 될 일들(원문:이 일들 후에 당번에 일어나려고 하고 있는 것들)(4~22장)"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편지를 쓰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수신인들이 지금 처해 있는 문제들을 잘 이겨내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로마황제치하에서 우상숭배의 종용을 거부함으로 인하여 고난받고 죽음의 현장으로 몰리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쓴 것이다. 결국 로마황제를 조종하는 사탄의 세력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결국 믿는 성도들이 이기는 것이라고 말이다. 또한 언젠가 주 예수께서 재림하시어 악의 무리들을 처단하실 것이고, 믿는 성도들을 천국에 데려가실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편지이지만 위로와 소망의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둘째, 요한계시록은 예언서라는 것이다(계1:3). 이 책은 예언의 책이다. 예언의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이 책은 미래에 되어질 일 자체를 기록하려고 쓴 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장차 되어질 일이 기록되기는 했지만 어떠한 상황이 발생한다고 할지라도 짐승(사탄의 화신)과 거짓선지자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지시키고자 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예언의 책을 대하면서, 3차세계대전이 언제 일어나는지, 베리칩이 언제 모든 사람에게 박는지, 제3의 성전은 언제 세워지는지에 대하여 관심을 집중한다면, 그는 시한부종말론자가 되든지 사탄의 미혹에 빠져 날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살아갈 것이다. 우리는 신약 이후에 "예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구약시대에 예언자는 딱 2가지를 선포했다. 하나는 "오실 메시야"가 누구며 어떤 일을 할 것인지를 선포했으며, 또 하나는 한 분 하나님을 떠나(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있고, 불의를 행하고 있는 자들을 향해 회개할 것을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예언자로서 마지막 주자는 세례요한이었다. 예수께서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마11:13)'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메시야가 오셔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한 이후에 예언자는 2가지를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는 이미 오신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선포해야 한다. 물론 거기에 다시 오실 주님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도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지은 죄들을 회개할 것을 선포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은 채 주님을 맞이해서 안 되고 그런 상태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계21:8, 21:27, 22:15). 그러므로 미래에 되어일 일들이란 대부분 이미 오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겪어야 할 일들이 어떤 것이며, 회개하는 것만이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인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셋째, 요한계시록은 계시서(묵시서)라는 것이다(계1:1). 그렇다. 요한계시록은 계시(묵시)가 기록된 책이다. 특히 예수께서 사도요한에게 나타나서 준 계시를 기록한 것이다. 계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미지와 환상과 숫자를 통해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은 문자 그대로 풀 수가 없다. 이것은 상징적인 것이기에 상징적으로 풀어야 한다. 이것을 풀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선적으로 구약의 계시(묵시)의 책들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특히 꿈과 환상을 보았던 창세기의 요셉과 다니엘을 잘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을 보았던 자들의 기록들을 살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니엘서, 에스겔서, 이사야서, 스가랴서는 필히 공부해야 한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요한계시록에 쓰여진 계시들을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계시는 어떻게 사도요한에게 주어졌는가? 우선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도요한에게 알게 하셨다. 그리하여 모든 성도들이 알 수 있도록 말이다(계1:1).

 

3. 요한계시록에는 무엇이 쓰여져 있는가?

  요한계시록에는 크게 5가지 주제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중에서 중요한 것은 앞의 두 가지와 마지막 한 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이 누군지를 정확히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요(계1:4~8), 둘째는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를 정확히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계2~3장). 그리고 부수적으로 2가지가 나오는데, 셋째로 사람이 어떻게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를 이기는지가 기록되어 있으며(계6장,7장,12장,13장,14장,15장), 넷째로 이 세상의 역사는 어떻게 진행되고 끝날 것인지(계6~20장)도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째로, 천국과 지옥이 어떤 곳인지(계4~5장, 21~22장)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오늘은 시간 관계상 첫번째 주제인 하나님이 누군지에 관하여 조금만 살펴보도록 하자. 사도요한은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 문안을 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성령님과 예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한다(계1:4~5a).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기록하면서 그분이 곧 오신다는 것을 말한다(계1:5b~7). 그러자 하늘에서 음성이 들린다. 그런데 그것은 주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계1:8)". 계1:8에 보니,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이 누군지를 선언하고 계신다. 그것을 일컬어 "하나님의 자기 선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분은 "나는 알파와 오메라"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분에 대한 수식어가 있다. 그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이며 전능자"라는 것이다. 나중에 배우겠지만, 하나님은 한 분으로서 "보좌에 [스스로] 앉아계신 이"이다(계4:2). 그분은 또한 "주님이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주님이요 하나님이라는 호칭은 요20:28에 보면, 예수님에 대한 도마의 신앙고백과 같은 표현이다. 고로 "주님이요 하나님"이라는 호칭은 "이제도 계시도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에게 쓸 수 있는 호칭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이 편지의 서두에 소개하고 있는 하나님과 성령님과 예수님은 따로 각각 따로 계시는 세 분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이 "주 하나님"으로 소개하신 분은 하나님에 대한 대표적인 소개라고만 보면 된다. 즉 아버지만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주 하나님의 소개 안에는 아버지가 계신다. 그러나 아버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아들도 계시고 성령도 계신다. 왜냐하면 "지금도 계시는 분"이라는 표현은 성령님에게 촛점을 맞춘 표현일 것이고, "전에도 계셨던 이"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촛점을 맞춘 것이며, "장차 오실 이"는 예수님에게 촛점을 맞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금도 계시는 이"를 두고 예수님이나 아버지께서 포함되지 않다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그리고 "전에도 계셨던 이"에게 아들과 성령이 아니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한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한 마디로 그분은 "보좌에 앉아계신 이(계21:5)"이다. 그분은 자신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이다(계21:5).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 하나님께서 세 분으로 존재하실 것이라고 하는 상상을 버려야 한다. 또한 천국에서 하나님의 보좌가 3개가 있을 것이라는 상상도 함께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다. 천국에는 보좌가 한 개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보좌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단수)"(계22;1,3)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그 보좌 위에 어린양으로 표현된 예수께서 앉아 계신다고 말하기 때문이다(계3:21, 7:17, 20:11). 한 분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여호와"로 나타나셨고,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으로 나타나셨다. 그리고 성령은 항상 영으로 계셨다. 계5:6에 보면, 성령님은 "일곱 영들"이자(계1:4,4:5),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어린양의 일곱 눈들"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슥4:10에 보면, 성령님은 "여호와의 일곱눈들"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성령님은 여호와와 예수님의 영이요 눈인 것이다. 한편 아버지와 성령님와 예수님 중에서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와 성령님은 항상 영으로만 존재하셨기에 아무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예수님만이 한 때 인성을 지니셨고 자신의 몸을 부활체로서 하늘로 그대로 가져 가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차 우리가 천국에 들어간다면 우리 눈으로 직접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다.

 

4. 나오며

  요한계시록은 호기심으로 읽을 책이 아니다. 하나님이 누군지를 알기 위해 읽어야 할 책이요, 어떻게 구원받는지를 알기 위해 읽어야 할 책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혹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촛점을 맞추다보면 그는 틀림없이 임박한 종말론에 빠질 위험성이 커질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날과 그때는 아버지의 권한에 두셨다고 말씀하셨다(행1:7). 우리는 모른다(마24:36). 우리는 다만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자신의 믿음을 지키면서 회개하며 기다리면 된다. 그리고 시간이 주어지면 밖으로는 계속해서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안으로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힘쓰면 되는 것이다. 자꾸 미래에 관심을 쏟게 되면 환난전휴거론같은 터무니없는 종말론에 쉽게 빠지고 말 것이다. 환난전휴거는 1550년대에 천주교에서 처음으로 교리화시켜 세상에 내놓은 미혹 중의 미혹에 해당한다(정말 그러한지는 시간이 지나보면 다 알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환난전에 휴거된다는 말이 없다. 환란을 통과해야 하기에 환난을 이겨내라고 권면할 뿐이다. 이것은 마24장에서 예수께서도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내용이다(마24:29). "그날 환난 후에" 공중에 주님이 오신다고 했다. 그날 한 번 우주적인 공중휴거(둘째부활)가 있을 것이고, 그날에 아마겟돈전쟁(곡과 마곡의 전쟁)이 있을 것이다(이러한 내용은 본 교회 홈페이지에는 정병진목사의 "요한계시록강해"를 참고하길 바란다.). 하나님이 누군지를 알아야 이단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어떻게 구원얻는지를 알아야 미혹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볼 때에는, 반드시 이 두 관점을 가지고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건투를 빈다.

 

2019년 12월 01일(주일)

정병진목사 


공관복음서를 보면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도바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붙들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을 계속해서 따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떻게 해야 사람이 구원받는다고 말하는걸까? 그것은 한 마디로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기는 자"가 된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기는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이기는 자들이 되었을 때에는 대체 어떤 상이 주어지게 되는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요한계시록이 말해주고 있는 구원관에 대해 전체적으로 폭넓게 다뤄보고자 한다.

2019-06-23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구원관은 어떤 것인가?(계14:9~13)
https://youtu.be/kLJaZOGtNjI


1. 들어가며

  신약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공관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누가복음)를 연구하는 학자들, 또 하나는 바울서신(로마서~디도서)을 연구하는 학자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요한신학(요한복음,요한일이삼서,요한계시록)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런데 이중에서 요한의 신학에서는 예수님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요 전능자요 창조주로서 묘사한다. 그래서 요한신학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을 연구하는 기독론을 일컬어 "고(高)기독론이라고 부른다. 그중에서서 가장 나중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요한계시록은 계시(묵시)의 완성의 책이요, 예언의 완성의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일들의 결론이 궁금하다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에게 가서 물어보아야 한다. 특히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구원론도 공관복음서가 말하는 구원론이 있고, 바울이 말하는 구원론이 있으며, 요한사도가 말하는 구원론이 있다. 물론 이러한 세 가지의 구원론은 하나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할 때 약간 다르게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구원론은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 것일까?

 

2. 요한계시록이 말하고 있는 구원론은 어떤 것인가?

  요한계시록이 말하고 있는 구원론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학자마다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단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기는 성도들"에 대한 묘사가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 특히 소아시아 일곱교회에게 주신 말씀에 이기는 자가 계속해서 나온다(계2:7,11,17,26, 3:5,12,21). 뿐만 아니라, 이미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을 일컬어 "이기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계12:11, 15:2, 17:14, 21:7).

계12: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계15: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계17:14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계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3. "이기는 자"가 된다는 것은 누구와의 싸움에서 이긴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성도들은 대체 누구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구원받는 자가 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은 대체 누구인가? 그것은 계12:11에 나와 있는데, 그는 하늘에서 쫓겨난 자 사탄마귀다. 그는 큰 용으로서, 옛뱀이라고도 하고 마귀라도고 하며, 사탄이라고 하는 자다. 그가 하늘에서 쫓겨나서 이 지구로 왔다. 그는 일차적으로 이 지구 위에 쫓겨났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불법을 저질러 지금은 음부로 쫓겨난 상태에 있다. 하지만 그가 음부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 그는 자신의 부하들(귀신들)을 지구와 연결된 음부의 문을 통해 올려보내 그의 일을 지금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귀의 그를 따르는 귀신들을 이기는 것이 곧 우리가 이기는 것이요 구원받는 것이다.

 

4.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볼 때, 어떻게 하면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는가?

  고로, 요한계시록에서 어떻게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었는지를 잘 살펴본다면, 우리도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은 구원받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어떻게 되어서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었는가? 그것은 계12:11에 나오는데, 크게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믿는 이들 자신이 가졌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켜냄으로 이기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계12:11).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구원자이며, 주 하나님이심을 끝까지 지켜낸 것이다. 이것을 반대로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어떤 짐승이나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만을 자신의 구주와 하나나님으로 섬겼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그렇게 하다가 사탄이 음부에서 보낸 짐승에 의해 죽임당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사탄마귀는 우리 믿는 이들의 목숨만을 앗아갈 수 있을 뿐, 우리의 영혼은 결코 노략질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계12:11에 보니,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은 예수님에 대한 자기들의 증언하는 말로서 사탄마귀를 이겼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짐승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짐승의 이름의 표도 받지 아니하는 자들이 살아서 이기는 자들이 되어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요한계시록은 분명히 언급한다(계14:12, 21:7).

계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그런데 이러한 구원관은 사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구원관과 똑같다. 예수께서도 육체를 입고 계셨을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되는지에 관해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자신의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마10: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24:13-14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믿음을 지켜내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과연 우리가 우리가 가진 믿음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을까? 지금 시대야 우리나라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을 일도 없고 죽임당할 위험성이 없지만 만약 우리나라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불법이 되거나 그것을 이유로 우리를 죽이려 할 때 과연 우리는 흔들림없이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가끔씩 그러한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둘째는, 어린양의 피에 자신의 죄를 씻어냄으로 이기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계21:11). 이는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 예수님의 피로 씻어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이 말하고 있는 구원의 두번째 요소다.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만이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가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렇게도 많이 회개를 촉구한다. 특히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교회 가운데, 칭찬을 들었던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교회들이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으며 회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회개없이는 결코 이기는 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회개없이는 지은 죄를 용서받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회개없이는 결코 죽는 날 흰옷을 입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회개는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마지막 관문이다.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회개하면 예수님의 피로 그의 죄가 씻겨지기 때문이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피가 효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예수님의 피는 항상 준비되어있고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용서해주시고도 남음이 있는데 문제는 사람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으니 자신이 지은 죄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다. 죄는 회개할 때에 용서되는 것이지 가만히 놔둔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죄는 빨리빨리 처리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다. 죄를 그냥 놔두었다가 그만 죽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는 죄 때문에 천국에 못들어갈 수도 있다.

 

5. 이기는 자가 되었을 때 어떤 보상이 주어지는 것인가?

  사람들이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구원을 어떤 식으로 설명해놓았을까? 그것의 단적인 예로서, 소아시아 일곱교회에게 주신 말씀 중에서 "이기는 자"가 받게 될 축복을 통해서 요한계시록이 말하고 있는 구원관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정리해보도록 하자.

  첫째, 에베소교회의 경우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는 것"(계2:7)이다. 이는 결국 그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천국에 생명나무가 생명강 좌우에 있기 때문이다. 둘째, 서머나교회의 경우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는 것"이다. 이는 둘째사망 곧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사망 곧 불못에 떨어지는 사망으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구원관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버가모교회의 경우는 "감추었던 만나"를 먹게 되고, "흰 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먼저 "감추었던 만나"를 먹게 된다는 더이상 이 세상이나 지옥의 음식이 아니라 하늘양식을 먹게 된다는 것이므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리고 "흰 돌"을 받게 된다는 것은 그가 심판날에 무죄선고를 받는다는 뜻이다. 무죄선고를 받으니 그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두아디라교회의 경우는 철장권세로 만국을 다스리게 될 것과 새벽별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먼저 철장권세로 만국을 다스릴 자가 된다는 말은 그가 예수재림 이전에 먼저 부활후 승천하여 천년동안 왕노릇하는 일에 동참하였다가 주님의 재림 때에 주님의 뒤를 따라 대열에 합류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인 아마겟돈세력을 처단하는 일에 동참한다는 것이니, 이이도 천국에 먼저 들어가서 천국에서 왕노릇하고 재림 때에 왕의 권세를 행사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에게 "새벽별"이 주어진다는 것은 그에게 별과 같은 영광이 주어진다는 뜻이니, 그가 천국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천국의 어떤 누림에 동참하게 된다는 뜻이다. 다섯째, 사데교회의 경우에는 흰옷을 입는다는 것과, 생명책에서 자신이 이름을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은 첫째, 흰옷을 입는다는 것은 죄사함을 완전히 받아 천국의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뜻이니 그는 반드시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이요, 둘째,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게 해 주겠다고 했으니 역시 그가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뜻이다. 여섯째, 빌라델비아교회의 경우는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된다고 했다. 이는 천국에 반드시 들어간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일곱째, 라오디게아교회의 경우는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된다고 했다. 이는 예수께서 보좌에서 앉아 심판하고 다스리는데, 이 두 가지 일들을 맡겨주신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 경우도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과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등의 어떤 누림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결국 이기는 자가 되면, 지금 죽어서는 곧바로 부활체를 입고 흰옷을 입어서 천국에 들어가 천년동안 왕노릇하다가, 주님의 재림시에는 주님의 뒤를 따라서 만국을 철장으로 다스리는 일을 하게 될 것이며, 그후에는 천국에 들어가서 각종 누림에 참여하게 되고, 천국에서 왕노릇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어찌하든지 이 땅에서 이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6. 나오며

  천국에는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갈 수는 없는 공간적인 장소다. 천국은 결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공간적으로 실재하는 장소에 들어간느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죽어서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다. 왜냐하면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을 받아야 진짜 구원을 받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딤후4:18). 그런데 누가 천국에 들어가는가? 사탄마귀를 이기는 자가 들어간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로, 사탄마귀의 그 어떤 공격이나 기만에도 속지 아니한 채, 오직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예수님을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키야 하며, 예수님 이외에 그 어떤 대상에게도 예수님에게 바쳐야할 경배와 그리고 기도를 결코 하지 않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우리가 죄된 본성과 악한 마귀의 공격의 유혹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늘 지은 죄를 회개하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즉 요한계시록의 구원관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과 회개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어떠한 상황이나 순간에도 믿음을 지켜내고, 목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회개를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2019년 6월 23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말했던 "율법의 행위"란 십계명을 안 지켜도 된다는 뜻이었나?(갈2:11~16) 

https://youtu.be/SJeeCcXP8Pw


1. 사도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말했던 이신칭의의 방법은 대체 무엇인가요?(롬3:28, 갈2:16) 그러나 실제로 개혁교회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요? 


2. 사도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이신칭의를 얻는 방법은 율법의 행위들로부터 있지 아니하고 믿음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있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자인 루터의 "오직 믿음"이라는 구호에 따라, 이 구호를 들었던 성도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고, 그것은 이어서 믿음만 있으면 어떤 잘못을 해도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됨으로써, 설령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속으로 간음을 하거나 미워하거나 거짓말을 해도, 세상의 물질을 탐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 구원받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있지만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고도 결국 구원에서 탈락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사도바울이 말했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하여 되는 것이이었지, "오직 믿음(얄팍한 지적인 동의)"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갈2:16의 말씀 곧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예수를 믿나니...(갈2:16a)"의 말씀은 잘못 번역된 것입니다. 헬라어 원문에 보면, "오직"이라는 말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 어디에도 "오직 믿음"이라는 말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그러나(오히려) 믿음"이라는 말씀은 있지만 "오직 믿음"이라는 말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칭의를 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100% 진리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다는 주장은 사람들을 잘못된 구원론으로 인도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 두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절대 칭의를 얻을 수 없다고 말했던 "율법의 행위[들]"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었을까요? 


3. 사도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율법의 행위들"이란 그것이 십계명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사도바울이 단 한 번이라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전부 다 율법 중에서 의식법들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의롭게 되는 방법으로 여겼던 "율법의 행위들"이란 의식법들로서, 할례를 받는 것, 안식일을 지키는 것,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을 먹지 않는 것, 접촉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접촉하지 않는 것 등을 의미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믿음"이라는 문구를 잘못 이해한 개혁교회 성도들은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믿음만 있으면 칭의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치우쳐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칭의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을 수 있고 그것으로 주어지는 것은 맞지만, 오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얄팍한 지적 동의)만 있으면 주어진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사람이 칭의를 얻는 데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 이외에 다른 의식적인 행동으로 칭의를 결코 얻지 못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칭의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언급했던 "율법의 행위"은 전부다 의식법들을 비교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지 그것이 도덕법을 의미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칭의를 얻으려면 예수님도 믿고 십계명도 지켜야 하나요? 


4. 그건 아닙니다.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이 칭의를 얻는 데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족합니다. 다른 무엇이 거기에 들어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안식교(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에서는 육식을 하지 않는 것, 안식일을 지키는 것 등을 거기에 집어넣습니다. 그것들이 구원을 위한 완전 성화에 필수적인 요건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율법 중에 의식법들은 예수께서 오셔서 완성하심으로 이미 폐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식법들이 오늘날에도 구원얻는 데에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경륜에서 벗어난 행동들입니다. 그러므로 안식교를 통하여 구원얻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안식교의 교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한다면 그도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와 반대의 문제도 매우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오직 믿음"으로 잘못 알아듣고,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칭의도 얻도, 구원도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도 할지라도 현재 간음하고 있고, 우상숭배하고 있는 자는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계21:8). 이것은 부활승천하시어 보좌에 앉아계신 전능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진정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예수님 이외에 다른 요소가 거기에 끼어들지 못하겠지만, 오늘도 간음을 행하고 있는 자는 세상의 쾌락을 좇아가는 자이며, 물질을 추구하거나 죽은 자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은 결국 우상숭배행위가 됨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어도 결국에는 오직 예수님만을 따르지 않는 것이 되어 지옥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신칭의에는 예수 이외에 다른 것이 거기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도 다른 것이 거기에 끼어들어간다면 그것을 제거해야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인정하면서 예수만 믿으면 된다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뒤늦게 사도가 된 바울은 어떻게 되어서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게바(베드로)를 책망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5. 사도바울이 게바를 책망했던 것은 사도가 되는 순서로 본다면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이 보기에 게바가 빗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사도베드로를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칭의는 율법의 행위들 곧 율법의 의식법들을 준행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공로를 믿음으로 얻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베드로가, 할례파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이방인과 식사하다가 그만 그 자리를 쓸쩍 피해 달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안디옥교회의 설립자 바나바도 슬쩍 그 자리를 피해버렸습니다. 벌써 물이 든 것입니다. 베드로가 왜 책망을 받았습니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되는 것인데, 다시 유대인들이 지키고 있는 의식법을 지키려고 이방인과 식사하는 자리를 떴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어떤 의식이나 절차가 사람을 의롭게 만들어주거나 거룩하게 하거나 언약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온전히 믿을 때에 가능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만이 구원자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과 반대되는 행동이 믿음의 체계 안에 들어오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만약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의식적인 행동들 곧 나는 교회에 다니고 있으니 구원받을꺼야, 나는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드드리고 있으니 구원받을꺼야, 나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 구원받을꺼야 하고 생각하는 자는 잘못된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 의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을 진심으로 의지하고 사랑해야 그분의 가르침 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아니하면 모든 것이 다 수포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2018년 12월 21일(금) 

정병진목사 




하나님께서는 만세전에 구원받을 자를 따로 정해놓으신 것일까? 아니면 지금도 구원하시는 주님의 초청에 응답하는 자가 구원받는 것일까? 그리고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절대 구원에서 탈락하는 일은 없는가 아니면 탈락할 수도 있는가? 이 문제는 사람에 따라, 교단과 신학에 따라, 각각 대답이 다르게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따라가야 하는가? 이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분의 말씀이 맞는 것 같고, 저분의 말씀을 들으면 저분이 맞는 것 같다. 그때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제일이다. 그 문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찾아보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답이 들어있는 말씀이다. 이름하여 왕의 잔치의 비유다(마22:1~14).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는 만세전에 구원할 자를 미리 작정해놓으시고 그 사람만 불러서 구원하셨을까? 아니면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따라오는 자를 구원하기로 작정했을까? 그리고 한 번 구원을 받은 자는 영원히 구원을 받은 것일까 아니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일까? 그런데 교단에서 따라 설명은 다르다. 어떤 교단에서는 전자가 맞다고 하고, 어떤 교단에서는 후자가 맞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예수께서는 과연 어떤 자를 구원하러 오셨으며, 구원의 여부에 대해 어떻게 말씀해주셨을까?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해서 크게는 왕의 잔치의 비유(마22:1~14)를 통해서, 작게는 두 아들의 비유(마21:28~32)와 포도원품군의 비유(마21:33~43)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왕의 잔치의 비유, 어떤 이야기가 들어 있는가? 그리고 잔치의 핵심적인 요소 2가지는 무엇인가?

  마22:1~14에 보면, 왕의 혼인잔치의 비유가 나온다. 왕이 자신의 아들의 혼인을 맞이하여 결혼잔치를 베풀었는데, 참석할 손님들에 있어서 문제가 발생했다. 초청받은 자들이 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왕은 또다시 자기의 종들을 보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은 여러가지 핑계를 대고는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또한 어떤 이들은 보낸 종들을 모욕하기까지 했으며, 어떤 이들은 보낸 종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그러자 왕은 대노했고, 군대를 보내어 살인자들을 진멸했으며, 그 동네마저 불살라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잔치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러자 왕은 자기의 종들에게 "혼인잔치는 완벽히 준비되어 있으나 초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로 계속 나가서 만나는 대로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하여 빈 자리를 다 채워나간다. 그래서 잔치가 제대로 열리게 되었다. 그런데 왕이 잔치자리에 와 보니, 혼인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와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러자 그에게 그 이유를 물었지만 그가 대답하지 못하자, 왕은 그의 손과 발을 묶어 더 어두운 바깥으로 내어쫓아버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잔치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뭐니뭐니해도 음식일것이다. 풍성한 음식이 없으면 잔치가 잔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전라도에서 홍어가 나와야 잔치이듯, 이스라엘에서는 소와 살진짐승을 잡아야 한다. 그래서 왕은 소를 잡게 했고 살진 고기를 다 준비하게 하였다. 이제는 하객들만 오면 되었다. 그런데 하객이 오는 데에 문제가 발생하고 만 것이다. 다행히도 왕은 그 문제를 잘 풀므로 잔치가 잘 마칠 수가 있었다.

 

3.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는 무엇인가?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이 비유 말씀을 말씀하신 것일까? 그것은 이 비유를 통해 누군가 깨달게 할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예수께서는 누구에게 어떻게 하라고 이 비유를 들려주신 것인가? 그것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서 꼭 천국잔치에 들어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마21:45). 하지만 정작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구원받을 존재라는 특권의식을 내세우며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이 비록 선민일지라도 잘못하면 그들이 구원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경고해주시려고 이 말씀을 해주신 것이다. 또한 한 가지 목적이 더 있으니, 그것은 자신이 구원을 받아서 자신은 구원 안으로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인데, 이미 구원받은 자라도 얼마든지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주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4.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3가지 영적 비밀은 무엇인가?

 

가. 첫번째와 두번째 비밀

  그렇다면, 우리는 이 왕의 혼인잔치의 비유를 통해서 어떤 영적인 비밀을 깨달을 수 있는가? 그것은 3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이 비유는 만세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비록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의 우선권이 주어진 자라도, 초청에 응하지 않는다면 어느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다 구원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을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그들은 외면하고 말았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구원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비록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자동적으로 자신의 구원을 결코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게 되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누구든지 주님의 초청에 응한 자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마치실 때에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초)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선)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그렇다. 이 말씀은 구원받을 자가 만세전부터 예정되어있다는 말씀이 아니다. 누구든지 초청을 받지만 그 초청을 받아들이는 자가 선택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구원 안으로 초청을 받지만, 만약 주님의 손길을 뿌리친다면, 결국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만세전에 그를 구원하기로 하나님이 예정해놓으셔서 구원받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누구든지 구원의 복음을 들을 때, 거기에 반응하는 자가 구원을 받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만세전 하나님이 선택을 받았기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할 때에 받는 것이다.

  단, 하나 우리가 생각해보는 것은 구원으로 초청하는데 어떤 순서가 있다는 것이다. 꼭 그것이 구원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도 먼저 구원으로 초청받은 자가 있고 나중에 받는 자가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먼저 초청을 받은 자들이 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원을 약속하셨고 또한 그들 민족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것을 보존해왔기 때문이다(롬9:3~4). 그래서 유대인들이 먼저 구원으로 초청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이 먼저 구원을 받았을까?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배척해버렸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들의 영역을 다른 곳으로 향하셨다. 그래서 선택된 사람들은 나중에 부름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사거리 길을 가다가 붙들린 자들이다. 이들이 누군지에 대해서 마태복음 21장에서는  보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들은 첫째, 유대인들 중에서 세리와 죄인들이었고(마21:31~32), 둘째, 이방인들이었다(마21:40~43). 사실 그들은 그 잔치에 참여할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자들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세리와 죄인들과 창녀들은 지옥에 들어갈 대상이었으며, 이방인들은 지옥의 불쏘시개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듯 그들에게는 말씀도 없었고 하나님도 없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그들에게도 주셨다. 왜냐하면 구원받을 만한 합당한 자격을 갖춘 자들이 구원 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번째로 초청을 받았던 유대인들 중 세리와 죄인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세번째로 초청을 받은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정말 이 잔치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자들이다. 이들은 마을 밖에 사는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도 주님의 초청에 응했다. 그래서 이들도 구원을 받은 자들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세리와 죄인들 혹은 이방인들이 천국잔치에 초대를 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그들이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잔치(천국)에 들어갈 때에, 그들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회개와 믿음이다. 그래서 세리와 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보낸 구원자를 믿었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였다(마21:31~32). 그러자 그들은 구원 안으로 들어가는 자들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은 믿고 회개한 후에 주인이 보시기에 합당한 열매까지 맺고 있었다(마21:40~43). 

  이상의 사실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자기에게 자격이 있어서 구원으로 초청을 받았다 하더라도 주님의 부르심을 거절한다면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라 할지라도 구원 안으로 초청을 받ㅇ르 때에 믿고 회개하면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왕이면 믿고 난 후에 합당한 열매까지 내놓으면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나. 세번째 비밀

  이제는 이 비유에 대한 세번째 영적인 비밀을 살펴보자. 그것은 한 번 믿고 회개하여서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받은 구원에서 제외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자, 사람이 만약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정말 구원을 받았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가 받은 구원은 영원히 안전한가? 아니다. 오늘 왕의 잔치의 비유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어떻게 해서 자신이 구원받았는지를 모르는 자를 구원에서 제외시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마22:11~13). 또한 자신이 받은 구원에 대해 감사할 줄도 모르고 보답할 줄도 모르는 자라도 그도 구원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구원 안으로 들어온 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에 속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을까? 그것은 혼인잔치의 예복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어떤 이가 사거리 길을 가다가 왕의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물론 그는 자격없는 사람들 중의 하나다. 그는 아마도 죄인이었거나 거지였거나 더러운 이방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왕의 잔치에 초대를 받아서 왕의 잔치자리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잔치하는 동안 혼인예복을 입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왜 혼인예복을 입고 있어야 하는지를 잘 몰랐던 것이다. 그냥 따라들어온 것 같다.

 

5.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과연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을까?

  자, 지금 그 잔치의 현장으로 가서 그 잔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자. 그러면 우리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는 유대인 중에서 세리와 죄인들이었던 자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언약과 율법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들 자체의 신분으로 봐서는 이 잔치에 절대 참여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런데 왕은 자신의 아들을 위해, 혼인예복을 마련해놓았다. 그래서 오는 자마다 그 옷을 갈아입혔다. 그러므로 잔치자리에는 왕이 마련해준 혼인예복을 다 입음으로 왕의 잔치가 되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예복을 입고 있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혼인예복이 무슨 용도이며, 어떻게 해서 마련된 것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왕의 잔치를 모독하는 행위다. 그리고 왕의 베풀어준 호의를 무시하고, 왕의 명예와 위엄을 손상시키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가 거지였다고 치자, 왕이 마련해준 혼인예복을 입지 않고 그 자리에 참여하면, 그 잔치는 어떤 잔치가 되는가? 거지잔치가 된다. 그러므로 왕은 왕이 손수 마련한 비싼 옷을 그들에게 다 입혀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볼 때 왕이 입혀준 혼인예복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피값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피흘려 대신 죽으심으로 만드신 옷이다. 죄인들과 이방인들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고, 자신의 피값으로 만든 옷이다. 그러므로 그 옷은 예수님 값이다. 그런데 그 옷을 소홀히 여기고 입지 않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해서 그들의 신분을 왕의 신분으로 올려놓았는가? 그러므로 그런 자는 이미 구원 안으로 들어와 있다고 하더라도 나중에는 쫓겨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왕이 그러한 자는 손과 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쫓아버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 잔치자리에 들어온 자라도, 어떻게해서 자기가 왕이 마련해준 옷을 입게 되었는지를 모르고, 주인을 모욕하는 자는 결국 구원에서 탈락되는 것이다. 이번에 이 비유의 세번째 영적 비밀이다.

 

6. 나오며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결론적으로 "초청함을 받은 자는 많지만, 선택함을 입는 자는 적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유대인처럼 먼저 부름을 받든지, 죄인이나 이방인들처럼 나중에 부름을 받든지, 오순절 이후 사람이라면 누구나 구원으로 초청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에 주님의 초청을 거절하는 자는 그가 누가 되었는지 그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믿고 회개하여서 이미 구원 안으로 들어온 자라도, 왜 자신이 혼인예복을 끝까지 입어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자는 결국 혼인잔치에서 쫓겨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여, 주님의 초청이 있을 때에 뿌리치지 말라. 그리고 믿음과 회개로 천국백성이 되었다 할지라도, 혼인예복을 단단히 붙들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 때문에 그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분께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구원받은 후에는 예수님께서 기뻐하실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밖에 버려서 불살라지고 말 것이다(요15:6). 건투를 빈다.

 

 

<명령과 선포>

1)감사와 회개

주여, 사람들 중에 누가 최종적으로 구원을 얻는지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먼저 구원으로 초청을 받았더라도 주님의 초청을 거절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이미 구원 안으로 들어온 자라도 자신이 어떻게 구원받은 이유를 모르거나,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명예와 위엄을 실추시킨다면 구원에서 탈락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택한 자만 구원얻는다는 예정론은 잘못된 것임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사람은 선택을 받아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과 초청에 응답할 때에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도 못했고 제대로 보답하지도 못했나이다. 용서해주소서.

 

2)장자권 누림의 결단

주여, 이제는 주님의 초청을 거절하지 않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주님의 속죄의 옷을 끝까지 붙들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주님의 은혜에 열매로 보답하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결코 자만하지 않겠나이다.

 

3)장자권의 누림, 명령과 선포

이제까지 나로 하여금 자신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잊어버리게 하는 악한 영들은 결박을 받으라.

이제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감사한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악한 영들은 떠나가라.

내 영혼아 깰지어다. 내 영혼아 깰지어다.

주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할지어다. 주님이 주신 의의 옷을 꼭 붙들지어다.

 

4)오늘의 말씀의 핵심

1. 구원을 위한 모든 준비는 다 하나님이 해 주시는구나.

2.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주님의 부르시는 초청에 응해야 하는구나.

3. 만세전에 선택을 받았기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에 응답할 때에 구원을 받는구나.

4. 주님의 은혜에 우리가 반응할 때에 우리도 선택을 받는구나.

5. 성도는 자신이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알고 열매로 보답할 줄도 알아야 하는구나.

6. 이미 구원 안으로 들어온 자라도 주께서 주신 예복을 주의하지 않으면 구원에서 탈락될 수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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