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06)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가 행함으로 받는가?(약2:14~19)_2020-07-27(월)

https://youtu.be/lO2U3pVCr-A  [혹은 https://tv.naver.com/v/14982185  ]

 

 

1. 구원은 어떻게 받을 수 있나요?

  구원이란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가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천국에 들어가려면 회개하고 믿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막1:15, 마4:17, 행2:39, 20:21). 곧 믿음과 회개가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였던 것입니다.

 

2. 왜 오늘날에 들어와 구원의 요소 가운데 하나인 "회개"가 빠져버린 것인가요?

  그것은 중세시대의 잘못된 구원관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이 "오직 믿음"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고, 이어서 만세전 개인 구원예정론이 개혁신앙의 기초가 됨에 따라 회개는 점차 시야에서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중세시대만 해도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은혜)와 행함(공덕)"으로 주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은총"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베푸시는 은혜가 아니라, 베드로와 교황 그리고 교황의 대리인격인 사제들에 의해 베풀어지는 은총으로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사제들이 영세(세례)를 베풀고,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사해주지 않으면 은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한 모든 사람은 공덕을 쌓을 때에 비로소 죽어서 연옥에 떨어지지 않고 곧바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하여 천주교에서는 선행과 기부와 공덕을 매우 강조합니다. 그것도 부족하니 구제와 고행도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중세의 신부의 한 사람이었던 루터는 고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어보려고 노력해보지만 그 어떤 것도 자신의 구원을 확신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는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고민을 자기 위에 있는 신부님에게 아뢰었고 그러자 그가 건네준 성경책을 받아들고 그것을 읽다가 결국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것을 발견하기에 이르른 것입니다. 루터도 처음에는 회개의 중요성을 같이 언급했지만 "오직 믿음"을 강조하다보니 점차로 "회개"는 뒤로 밀려나기 시작하였고, 조금 후에 등장한 "만세전 개인 구원 예정론"이 퍼짐에 따라 성도들의 시야에서 "회개"는 점차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3. 개신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행함(행위)로서 구원얻는다고 하는 분들의 주장은 과연 옳은 것인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회도 역시 타락하여 그 도가 지나치자, 개신교인 가운데서도 구원은 믿음과 행함으로 얻는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마7:21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라고 하셨으며,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약2:26)"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즉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2:14)"라고 야고보는 분명하게 언급했습니다. 그렇지만 행함을 구원의 요소로 정해버린다면 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행함이 구원에 있어서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이것을 교리화시켜 구원의 필수요소로 정해버린다고 하면, 이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이 한 사람도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4. 행함(행위)를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해서는 아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믿음과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믿음과 행함이 필요하다고 규정해버리면, 그때부터는 다음과 같은 치명적인 단점이 나타나시 시작합니다. 첫째, 얼마만큼 행동으로 옮겨야 구원받을 수 있는지 그 기준을 아무도 정할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은 더욱 요원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20:12)"라는 명령을 행동으로 옮기려면, 과연 얼마만큼 부모에게 잘 해야 공경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침마다 문안인사를 드리면 공경하고 있는 것인지, 매주 외식을 시켜드리고 옷 한 벌씩 사다드려야 그분을 공경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십계명 중에서 10번째 계명인 "탐내지 말라(출20:17)"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대체 어느 정도의 물품을 사야 탐심을 부리지 않은 것인지 사실 아무도 정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행함의 구원의 조건이 되어버리면, 자신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과 회개가 부족할 경우 행함으로 그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고 시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믿겨지지는 않지만 천국에는 가야 하겠는데, 어떻게 잘 안 되니까 헌금이라도 많이 내서 천국을 가려고 시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필연코 자신의 믿음과 회개의 부족한 부분을 봉사를 해서, 선행과 구제를 해서 메우려고 시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셋째, 행함을 구원의 조건으로 설정해버리면, 행위를 많이 한 사람은 자기의 행위(자기의 의로움)를 으시대거나 자랑하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되고, 행함이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지만, 구원을 위해서 행동을 하다보면, 너도나도 자기자랑에 빠지게 되고 그러면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것일 뿐 예수님의 의는 어디론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눅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중에서 바리새인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눅18:11~12).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11-12)" 그가 성전에 나온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자기의 의로운 행위를 자랑하려고 나온 것입니까? 그런데 그 기도를 들어보면 꼭 자기자랑하기 위해 나온 것 같습니다. 결국 행위를 강조하다보면 자기자랑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고로 우리는 행위라는 것을 통해 자신이 제대로 구원을 받는 노정에 달리고 있는지를 확인해볼 수는 있어도 그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설정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5. 구원에 있어서 행함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행함을 구원의 하나의 조건으로 볼 것이 아니라 다른 용도로 그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음 이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볼 것은 자신은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고 하는데, 그리고 수십년을 신앙생활을 해 왔다고 하는데, 그에게 믿음에 합당한 열매들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최소 그의 믿음이 과연 정상적인 믿음인지 아닌 곧 그 믿음이 자신을 구원할만한 합당한 믿음인지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2020년 07월 27일(월)

정병진목사

 

그리스도인들에게 칭의를 어떻게 받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믿음"으로 얻는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칭의관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우리는 성경읕 볼 때 한쪽 면만을 보아서는 아니 된다. 통전적으로 성경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칭의는 믿음으로 받는 것이 맞지만 과연 믿음으로만 받는 것인가? 여기, 진정 성경적인 답변이 있다. 온전한 칭의, 바로 그것은 무엇인가?

2020-07-26(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05)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받는가?(눅18:9~14)
https://youtu.be/rTJLMimO5MA [혹은 https://tv.naver.com/v/14980142 ]

 

1. 들어가며

  칭의란 무엇인가? 칭의란 보편적으로 우리 인간은 의롭지 아니하지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주심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칭의는 과연 언제 얻게 되는가? 또한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요소가 더 있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칭의는 언제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상태가 되는가? 그리고 내가 칭의를 받았다는 것은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그래서 오늘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성경적인 답변을 찾아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과연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인가?

 

2. 바울의 칭의관은 어떤 것인가?

  바울은 그의 서신인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사람의 의롭게되는 것(칭의)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롬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이 말씀만을 들었던 사람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줄로 믿어버린다. 특히 갈2:16에서는 "오직 믿음"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으므로,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되는 줄로 알 것이다. 그러나 갈2:16를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오직"이라는 단어가 실은 없다. 그렇지만 한글성경만을 본 사람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되는 줄 안다. 

  그렇다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어떻게 함으로 의롭게 되는가?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 의롭다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데에는 그리스도 없이는 불가능하다. 오직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인하여 죄있는 우리가 죄없다고 칭함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서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는 없다(롬3:20). 그렇다면 단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칭의는 다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더 이상 다른 그 어떤 요소도 필요없는가?

 

3. 예수님의 칭의관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바울의 칭의관을 살펴볼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데에 예수께서는 어떠한 말씀을 하셨는가? 그것은 놀랍게도 믿음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요소 한 가지를 더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대부분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간과하고 있을 것이다. 칭의는 믿음으로써 얻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서는 온전하다고 할 수 없음을 예수께서 가르쳐준 칭의관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사람이 어떻게 칭의(의롭다함)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누가복음 18장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가운데 나온다(눅18:9~14).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있고 다른 사람은 멸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들으라고 예수께서 한 비유를 들으셨다. 그것은 두 사람의 기도에 관한 것이었다. 그중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다. 그는 따로 서서 거만하게 기도하고 있었다. "하나님이여, 나를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이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1~12)" 실로 이 사람의 행위는 틀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율법에 하지 말라고 하는 규정을 너무나 잘 준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금식과 십일조도 잘 드리고 있었다. 아니 율법의 규정들보다 더 많은 것을 행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율법에는 금식하라는 규정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율법에는 다만 7월 10일 속죄일에 "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말씀만 나와 있다(레23:27).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금식하라는 말로 해석하여 지금도 실천한다. 그런데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그것 말고도 이레(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금식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소득의 십일조도 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율법규정에 의하면, 곡식과 과실의 십일조와 우양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규정은 있어도, 소득의 십일조까지 전부 다 드리라는 규정은 없다(레27:30~33). 그런데 당시 바리새인들은 회향와 박하와 근채의 십일조까지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마23:23). 그러니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이상의 행위들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로 거만하게 행동했다. 으시댔다. 그리고 그것을 하지 못하는 자들을 멸시했다. 자기는 매우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기도하고 있는 내용을 들어보면, 그는 자기를 자랑하려고 기도하러왔는지, 하나님께 기도하러 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세리는 어떠했는가?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가슴을 치면서 기도하고 있었다. 그는 통회하는 심정으로 기도하고 있었고,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죄인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속죄를 베풀어 주십시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 그의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것은 2가지였다. 첫째는 "오직 하나님만 내 죄를 용서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곧 내게 속죄를 베풀어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오직 주님 뿐이십니다."라고 믿었던 것이다. 둘째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렇다. 그는 속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죄를 겸손히 고백하는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평가는 어떠했는가? 저 바리새인이 아니라, 이 사람 세리가 의롭다하심을 입은 채로 그의 집으로 내려갔다고 말씀하셨다(눅18:14). 그렇다. 자신을 의롭다하고 믿고 있는 바리새인이 의롭다 함을 입은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죄인이라는 것을 겸손히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던 세리가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우리는 이상의 사실을 통하여, 칭의가 믿음만으로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도 예수께서 직접 들려주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예수께서는 회개없는 칭의는 온전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칭의에는 반드시 진실한 회개가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칭의관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죄를 용서해줄 수 있다는 믿음과 겸손히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회개가 있어여 한다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4. 바울의 칭의관은 예수님의 칭의관과 다른 것인가?

  그렇다면, 바울의 칭의관과 예수님의 칭의관은 다른 것인가? 얼핏 보기에는 바울이 실수한 것 같이 보인다. 사실 어떤 누구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능가할 자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사도바울도 로마서 4장에서, 회개가 동반될 때에 칭의가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칭의가 된다는 것을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그 말씀은 로마서 4:11에 나온다. 

롬4: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다. 사도바울도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할례를 받은 것은 그가 85세 때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라고 분명히 언급하였다.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고 75세 때에 갈대아우르를 떠나 왔지만, 그의 나이 85세 때에 비로서 그의 믿음을 의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한 사실은 창세기 15장에 나오는데, 그는 그때 자손과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는 받았지만 10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게 되자, 자신의 종 다메섹사람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려고 시도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창15:4)"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리고는 그를 밖으로 끌고 나가 하늘의 별을 보게 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의로 여기셨다(창15:6). 그리하여 비로소 아브라함의 의롭다하고 칭함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이상은 기다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첩 하갈을 들여 자식을 낳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무려 13년동안이나 떠나셨다. 그리고 13년이 지난 후에(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에) 나타나셔서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에게 2가지를 주문하셨다. 첫째는 그의 이름을 바꾸라고 하셨다(창17:5). 그리고 둘째는 할례를 받으라고 하셨다(창17:10~11).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해 낳았던 이스마엘과 자기의 종들을 다 데려다가 함께 할례를 행했다. 다시는 육체를 따라 가지 아니할 것이며, 그후부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100% 순종하겠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할례를 받은 것은 회개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도 나중에 할례가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세례라고 해석하였다골2:11~12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그렇다. 세례는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를 상징하는 것이다(막1:4). 고로 육을 따라 살던 삶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겠다는 결단의 표로서 아브라함이 행했던 할례는 곧 그의 회개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믿음으로 얻은 의를 그때 비로소 인칠 수 있었다. 고로 우리는 칭의가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통하여 인쳐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로 우리는 예수님의 칭의관과 바울의 칭의관이 서로 일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또한 확인할 수 있다. 


5. 아브라함의 칭의는 어떻게 성장하고 완성되었는가?

  이제 우리는 예수께서 언급하시고 바울이 다시 확증했던 칭의에 관해, 아브라함이 걸어간 길을 통해서 다시 정리해보기를 원한다.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85세 때에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의를 얻게 되었다(창15:6). 하지만 그때 그의 의는 불안전한 것이었다. 금새 그는 자신의 아내 사래의 말을 듣고 몸종 하갈을 통하여 아들을 낳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가 잘못되었음을 13년간 교제를 끊으심으로 뉘우치게 하셨다. 그리고 99세에 나타나서는 아브라함더러 할례를 받으라고 하셨다(창17:10~11). 그것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을 살라는 것이었다. 일종의 회개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함으로 할례를 행했다. 그는 그때 비로소 회개를 통해서 자신이 받은 의를 인칠 수가 있었다. 

  그러자 이제 그의 칭의는 더욱 견고해졌다. 그러므로 그후에 더이상 흔들림은 없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따라가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마지막으로 시험해보고자, 그의 나이 125세(유대고대사 요세푸스의 증언) 혹은 137세(미드라쉬와 야살의 책) 때에 자신의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전혀 주저하지 않고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3일 길을 걸어갔고 이윽고 칼을 들었다.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의 칼이 이삭의 심장을 찔렀을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천사를 통해 말씀하셨다. 

창22:15-18 여호와의 사자(천사)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것을 두고 신약시대 예수님의 친동생이었던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침으로서 비로소 그의 칭의가 온전케 되고 완성되었다고 말했다(약2:21~24). 

약2:21-24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행위들)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행위들)과 함께 일하고 행함(행위들)으로[부터]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완성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채워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행위들)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고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85세 때에 믿음으로 시작된 칭의가, 99세 때에 회개함으로 인침을 받았고, 125세(혹은 137세) 때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 칭의는 어느 한 순간에 다 완성되는 것이 아닌 것이었다. 칭의도 발전하고 성장하고 온전케 되는 성질을 가진 것이다. 믿음만을 가지고 있을 때 받았던 칭의는 하나님께 인정되는 칭의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개를 통해 인정받은 칭의는 행동을 통하여 그것이 증명되기 시작한다. 고로 예수께서도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을 "믿음"과 "회개"라고 말씀하셨는데, 바울도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야고보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행동을 통해서 칭의가 완성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6. 나오며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나 칭의를 얻는 여정은 다 처음에는 믿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람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서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부터 칭의를 얻은 성도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출애굽세대들에게 있어서는 광야생활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죄를 씻어내는 기간을 가리킨다. 고로, 이미 믿음으로 칭의를 얻은 자는 회개함으로 칭의가 더 견고해져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믿음이 인침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그는 순종의 삶을 통하여 칭의를 받은 자로서 그가 합당한 자 인지가 증명이 되고 확인이 되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칭의의 어떤 단계로 도달해 있는가? 시작으로서의 칭의단계인가 아니면 인침으로서 칭의단계에 와 있는가? 아니면 행동으로 통해 칭의가 완성되고 있는가? 우리 모두는 완성의 칭의를 통해 구원얻어 천국에도 들어가고 그것에도 상도 받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0년 07월 26일(주일)

정병진목사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눈에 띠는 것은 회개에 대한 강력한 요구다. 세례요한부터 시작된 회개의 촉구는 요한계시록 2~3장에 가서 절정을 이룬다. 그런데 개인구원여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출애굽세대들에게는 회개하는 말씀이 나오지 않는다. 왜 출애굽세대들에게는 회개하라고 책망하지 아니하셨을까? 거기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회개촉구방식에 대한 이해가 요청된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에 나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2020-07-26(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04) 사람이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시7:12~13)
https://youtu.be/K5pH9bDOB3o [혹은 https://tv.naver.com/v/14977232 ]

 

1. 들어가며

  B.C.1446년경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착한 곳은 풀 한 포기 없고 물도 찾을 수 없는 척박하고 메마른 광야였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민족을 그리로 인도하셨을까? 그런데 그들은 놀랍게도 그곳에서 무려 40년간동안이나 살아야 했다. 일주일이면 도착할 수 있는 가나안 땅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40년동안을 광야에게 생활하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광야생활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리고 오늘날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광야생활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가 혹 이 광야에 머물러 있을 때, 반드시 수행해야 할 과제는 대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광야에 있는 도들을 어떻게 회개할 수 있도록 이끄시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방식에는 또한 어떤 것들이 있는가? 사람이 진정 회개했다는 것은 무엇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다윗의 시편의 노래를 통하여 사람이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시는지, 회개한 사람은 어떤 열매를 맺게 되는지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나님께서는 왜 출애굽세대들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하지 않으셨는가?

  오늘날 우리는 신약성경의 출발이 회개를 촉구하는 세례요한의 외침으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회개를 외치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왔었다. 그리고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께서도 역시 "회개"할 것을 외치심으로 복음전파사역을 시작하셨다(마4:17). 그리고 부활승천직전에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민족에게 증거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윽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나가 복음을 전파했는데 회개를 전파하였고(행2:38), 다메섹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이방인으로 사도가 된 사도바울도 역시 회개하고 믿을 것을 외쳤다(행20:21).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께서 사도요한에게 들려준 소아시아에 일곱교회에게 주신 말씀도 역시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말씀이었다(계2~3장). 이처럼 회개는 신약성경의 핵심메시지였고, 그것은 결국 믿음과 더불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2가지 핵심요소였다. 

  그런데 죄인이 예수님을 믿어 교회생활을 한 후 천국에 들어가는 과정을 그대로 미리 보여주고 있는 샘플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출애굽1세대들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1세대들에게는 한 번도 회개할 것을 명령하지 않으셨는가? 참고로 이들의 여정이 기록된 출애굽기부터 신명기에는 그 어느 곳에서도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 등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짧은 생각이었다는 것이 금방 들통난다. 왜냐하면 회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이 출애굽1세대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는지를 파악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3. 회개의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회개의 의미는 무엇인가? 구약성경에서 "회개하다"라 의미로 쓰인 히브리어 단어는 "슈브"라는 동사이며, 신약성경에서 쓰인 헬라어 단어는 "메타노에오"라는 동사다. 특히 히브리어의 "슈브"라는 동사는 보통 "돌아오다, 돌이키다"라는 의미로 번역되었다. 그러니까 구약시대에 회개하라는 말의 의미는 "이방신을 버리고 참된 신인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하나님께서 출애굽1세대들에게 회개할 것을 직접적으로 명령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얼마나 강력하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방신을 버리고 참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셨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누가 참된 신인지를 보여주심으로 회개를 촉구하신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나 애굽인들이나 하나 같이 애굽신들을 섬기며 살았다. 다신론적 신관을 가졌던 그들은 강과 동물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을 신으로 섬기고 살았다. 그중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많이 숭배했던 신은 농사에 꼭 등장하는 "송아지"신이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결코 신이 아니며, 오직 참 신은 여호와 하나님 한 뿐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심으로 회개하기를 바라셨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회개를 촉구하는 방식이 약간 달랐던 것이다. 

 

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쓰신 방식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회개할 수 있도롤 사용하신 방식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이적과 기사와 표적이었다. 하나님께서 회개의 방식으로 사용하신 것은 "회개촉구명령"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남북분열왕국이후에 쓰신 방식이다. 출애굽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셨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부터 여호와께서 누군지를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 대부분은 하나님이 누군지를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은 동영상으로 그들을 가르쳐주신다. 그래서 애굽에 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거대한 나일강이 피가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개구리들이 떼로 기어나와서 집떡반죽 그릇에 이르기까지 기어오르는 것을 보았으며, 이가 올라와 사람과 가축에게 기어 오르는 것도 함께 보고 경험했다. 그리고 어느날부터는 파리떼가 불어닥쳐 집집에 가득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고센 땅에는 파리떼가 오지 않은 것을 지켜본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은 보호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된다. 그때 이후부터 그들은 재앙이 히브리인들에게는 내리지 않고 오직 애굽인과 그들이 사는 지역 및 그곳에 있는 가축과 동물에만 내리는 것을 본다. 이후 그들은 애굽인의 가축들 곧 말과 나귀와 낙타와 소와 양에 돌림병이 발생하여 죽는 것을 보았지만, 이스라엘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않는 것을 본다. 또한 우박과 불덩이가 내려 밭에 있는 채소와 들의 모든 나무를 후려치는 것도 보았으며, 메뚜기떼가 일어나 우박으로 인하여 면하고 남은 것을 다 먹어치우는 장면도 본다. 그리고 애굽인들이 최고의 신으로 섬기는 신이 태양신인데 그것이 힘을 잃어 어둠이 가득찬 애굽인 지역을 본다. 그리고 마지막 10번째 재앙으로서 각 집에 있는 장자와 가축의 첫 것이 죽어나가는 재앙도 지켜보게 된다. 그날밤 아직 발효되지도 아니한 반죽을 등에 들쳐메고 출애굽은 시작되었고, 그들 앞에 거대한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 애굽땅을 빠져나오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여러가지 재앙을 내리되, 애굽인들이 신처럼 여기고 있는 나일강과 동물들과 태양을 내려치는 재앙을 내렸던 것이다. 하나님이 진짜 신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5. B.C.1446년경 애굽에서 탈출해 나온 히브리인들은 과연 회개를 했을까?

  하나님께서는 그때 무려 10가지 재앙을 통하여 애굽에 있는 신들을 심판하신다(출12:12). 그때 히브리인들은 대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했던 것일까? 그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상천하지에 참된 신이요 가장 최고의 신임을 믿었어야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방신들을 모조리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단했어야 했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회개였던 것이다. 하지만 애굽군대로 인해 홍해에 갇히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그들은 모세에게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 우리를 죽이려고 이곳에 데려왔느냐? 우리가 애굽사람에게 죽는 것보다 이 광야에서 죽는 것이 더 낫겠노라(출14:11~12)"고 말했다. 이는 하나님에게 대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결코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홍해를 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아라비아 땅에 도착했지만 가져온 물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마라의 쓴 물을 달게 하심으로 주님께서는 치유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셨고, 애굽에서 가져온 먹을 것이 떨어지자 새벽마다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리게 하셔서 40년동안 굶주리지도 않게 해 주심으로 인간의 의식주를 책임지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이후에는 반석을 쪼개 생수를 공급해 주심으로 그분만 있으면 흡족한 인생을 살 수 있음을 가르쳐주셨다. 그것은 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셨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끝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것은 시내산에서였다. 출애굽한지 약 50일이 지난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내산을 불러내셨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자고 하면서,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 섬기던 송아지우상을 만들어놓고는 광란의 춤을 추면서 잔치를 벌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대노하셨다. 이때까지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기적과 기사와 표적을 보여주셨는가? 오직 한 가지. 가짜인 이방신을 버리고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하신 것이 아니었는가? 그런데 그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눈으로 보고 경험한 것은 그저 본 것일 뿐 그들의 머리 속에는 온토 이방인 숭배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시겠다고 하였다. 만약 그때 모세의 슬기있는 답변과 목숨을 건 기도가 아니었다면 그날 이스라엘 백성을 전멸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후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짜 멸하시겠다고 결정한 일이 발생하고 만다. 정탐꾼을 보고를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불신하는 말을 서슴없이 토해냈기 때문이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애굽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땅(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의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14:2~3)"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더이상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민족을 없애버리기로 결정하신다. 그래서 그들은 40년에 걸쳐 광야에서 죽어나간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출애굽1세대들의 불신앙의 역사의 기록이다. 

 

6. 회개를 촉구하는 방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우리는 출애굽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방식이 기적과 기사와 표적이었다는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쓰시는 방식은 각각 다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와 같이 신약에서도 기적을 통해서 회개를 촉구하신 일이 있었다. 그것은 베드로에게 있었다.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곧 예수께서 설교후 베드로에게 말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 말로 안 되는 주문이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그러자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혔다. 그런데 그때 베드로가 보인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회개했다는 것이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들어 순종하기에는 너무나 어리석고 무능한 자이며, 쓸모없는 죄많은 인간인 것을 자백하고 용서를 빈 것이다. 그에게 기적은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라는 방식은 선지자의 외침이나 기적과 같은 방법만이 아니다.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때로는 '환상'을 보여주기도 하시고, '천사'를 보내시기도 한다. 때로는 고칠 수 없는 중한 '질병'을 통하여 회개를 촉구하기도 하시고, '자녀'를 통하여 회개를 촉구하시기도 하신다. 다만 그때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아무쪼록 우리 모든 성도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감각이 있어 회개할 수 있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7. 회개를 촉구한다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께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회개를 촉구하신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것에 대해 오늘 다윗은 놀라운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려 하시는지를 부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윗이 본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재판장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전쟁에서 적군을 죽이기 위해서 막 무기들을 쳐들고 조준하고 있는 군사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날마다 격분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만일 사람이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자신의 칼을 갈고 계시며, 자신의 활을 당기어 겨누신다. 또한 그분은 죽음의 무기들을 예비하신다. 그분이 만든 화살은 불화살이로다(시7:11~13)" 그렇다. 회개하지 않는 자를 하나님은 결코 용서해주시지 아니하신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인 상태로서 긴장이 증가될 뿐이다. 고로 누구든지 어서 빨리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출애굽세대들은 그렇게 많은 기적을 맛보았지만 끝내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광야에서 죽임당하고 말았다. 

 

8. 회개를 촉구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는 자는 어떻게 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회개를 촉구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한 자들도 동시에 기록되어 있다. 눅18장에 보면, 세리의 회개가 나온다. 그는 회개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에 돌아갔다. 눅19장에 보면, 삭개오의 회개가 나온다. 그는 회개를 통하여, 그의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는 선언과 함께 떳떳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 그리고 눅23장에 보면, 한편 강도의 회개가 나온다. 그는 비록 그날에 죽었지만 죽은 이후 예수님과 함께 낙원(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요9장에 보면, 조상들의 죄로 인하여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가 나온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조상의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눅5장의 베드로를 보면, 그는 사명을 발견하고 가치있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 회개는 용서도 받게 해주고, 구원도 받게 해주며, 천국에도 들어가게 해주고, 병고 고침받게 해주고, 저주가 떠나가게도 한다. 그리고 가치있는 인생이 되게금 만들어준다. 회개가 관건이다. 회개할 때에 이 모든 축복이 우리에게도 임하는 것이다

 

9. 나오며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회개하는 자를 찾고 계신다(벧후3:9). 주님은 시7:12의 말씀을 통하여, 죄를 지은 자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회개하지 않는 자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 인간은 약하나 누구나 범죄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문제는 죄를 지었지만 그 죄를 회개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하다. 만약 지은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는 죄용서와 축복이 따라올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수많은 싸인을 주셨는데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심판과 파멸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찌하든지 회개해야 한다. 회개할 때에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회개할 때 저주도 떠나가기 때문이다. 회개할 때에 우리는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 용서의 하나님과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니 말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07월 26일(주일)

정병진목사

 

구원은 믿는 순간에 받는 것인가 아니면 일생을 통해 이뤄가야할 여정인가? 성경은 믿을 때 그에게 칭의가 주어짐으로 구원의 여정에 첫발을 내딛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완성해 가라고 권면한다. 하지만 언제터인지는 모르겠으나, 믿을 때에 이미 자신은 구원받아버렸으니 구원에 대해서는 더이상 왈가불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떤 면에서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것인가? 여기 그 전체적인 조망이 있다. 

 

2020-07-24(금) 금요기도회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03) 구원은 순간인가 아니면 여정인가(2)(히3:12~4:1)

https://youtu.be/7EDh2mDHheo  [혹은 https://tv.naver.com/v/14964397  ]

 

 

1. 들어가며

  우리가 알고 있다는 구원에 관한 상식 가운데 어떤 것은 알고 있는듯 하나 사실은 모르는 것이 참 많다. 그중에 하나는 "구원은 과연 믿는 순간에 받는 것인가 아니면 죽을 때에 받는 것인가"하는 질문도 여기에 속한다. 구원은 믿는 순간에 다 받아버린 것인가 아니면 구원은 이뤄가는 과정에 있어서 죽을 때에 비로소 완성되는가? 그런데 종교개혁의 전통 가운데 속해 있다는 현대 신앙인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이미 구원을 다 받아버린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에 어디에서 우리는 그러한 근거가 찾아낼 수 있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사람이 구원얻는 것이 과연 믿는 순간인가 일평생을 통하여 얻어가는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 메시는 이전에 했던 메시지의 후편이기에, 전편을 듣고 이 메시지를 경청한다면 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2. 구원은 믿는 순간에 받는 것인가 일평생을 통해 얻어가는 것인가?

  어떤 이는 구원은 믿는 순간에 주어지는 어떤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우리는 믿는 순간에 이미 구원을 얻어버린 것인가? 더이상 구원에 대해서는 걱정이나 생각을 할 필요가 없으며, 이미 구원은 얻어놓았으니 다른 것에만 신경쓰면 되는 것인가? 여기서 우선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칭의"가 곧 구원인가 하는 점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칭의(의롭다함)는 구원과 동일하며, 믿음으로 칭의를 얻은 자는 이미 구원받은 것인가? 오늘날 종교개혁의 전통 아래에 있는 거의 모든 성도들은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쉽게 대답할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에도 칭의가 곧 구원의 완성이라고 기록된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칭의는 구원의 시작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서 칭의를 얻기 때문이다. 고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는 어느 순간에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볼 수는 없다(다만 그늘 그 시간에 죽는 사람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칭의를 얻는 순간에 죽을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은 칭의를 얻은 후에 계속해서 일생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번 믿어서 얻은 칭의가 일생을 살아가는 우리를 구원의 종착역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줄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구원의 첫출발이자 시작은 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결코 구원의 완성까지 보장해주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어 칭의를 받은 자라도 결국 최종적인 구원을 받지 못하고 중간에 탈락하는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즉 칭의를 통해 구원의 여정에 들어섰으나 결국 중간 노정에서 탈락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칭의가 곧 구원의 완성이 된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믿는 순간에 얻기 시작한 것이지만 그것은 일생을 통해 얻어가는 것으로서, 결국 그가 죽고나서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입성할 때 완성되는 것이다. 

 

3. 구원이 믿는 순간에 시작되지만 일평생의 삶을 통해 완성되는 것을 알려주는 샘플은 무엇인가?

  사도바울은 사람이 구원얻는 과정을 크게 세 단계로 말했다. 첫째는 칭의(의롭다함을 얻음). 둘째, 성화(성결과 거룩 즉 깨끗하게 거룩하게 됨). 셋째, 영화(몸의 구속)가 그것이다(롬8:30).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를 얻었다면, 그는 이제 구원을 향한 경주의 트랙에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트랙을 다 달리고 골인지점을 통과할 때에 비로소 그 사람의 구원은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을 알려주는 놀라운 샘플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여정이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애굽에서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고 또한 광야생활 40년을 거쳐, 요단간을 건너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입성하는 모든 것이 곧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의 전과정으로서, 성도들의 구원의 여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의 여정이 곧 어떤 사람 개인이 구원얻는 과정과도 유사하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는데, 그것은 고전10장을 보면, 모형론적 성경해석을 도입했던 사도바울의 해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가. 이스라엘 민족: 1)유월절로 출애굽시작 ---> 2)홍해도강(애굽군대 수장) ---> 3)광야생활(40년) ---> 4)요단강도하 ---> 5)가나안땅입성

  나. 한 사람 개인 : 1)유월절양이신 예수님을 믿음(칭의)으로 인하여 구원의 여정시작 ---> 2)세례(육적 몸을 벗음, 장사지냄) ---> 3)교회생활 ----> 4)육신이 죽음----> 5)천국입성

 

4.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은 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는가?

  B.C.1406년경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던 것일까? 아니다. 극소수만 들어갔을 뿐이다. 그중에 육신이 살아서 가나안땅에 입성한 자는 모세의 시종 여호수아와 유다지파 갈렙 뿐이다. 그렇다. 이 두 사람 외에는 200만명의 백성들은 다 광야에서 징계를 받아 죽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죽이려고 출애굽시킨 것인가? 결코 아니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데려가려고 그들을 불러내신 것이다. 하지만 실제 그 땅에 들어간 자는 극소수였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의 여정에 동참한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구원의 여정을 잘 통과하여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일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은 출애굽1세대들은 과연 죽은 다음에 그들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갔을까? 성경은 그 반대라고 말한다. 그들은 징계를 받아 죽었으며, 진노를 받아 멸망당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세가 그렇게 말했고(민32:13~15), 히브리서 기자도 그들이 결국 안식을 얻지 못했다고 말했다(히3:16~18). 유다서 기자도 유다서 1장에서 그렇게 말했고(유1:5) ,사도바울도 고전10장에서 그렇게 언급했다(고전10:5). 

민32:13-1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에게 사십 년 동안 광야에 방황하게 하셨으므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한 그 세대가 마침내는 다 끊어졌느니라  14 보라 너희는 너희의 조상의 대를 이어 일어난 죄인의 무리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15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다시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리라  
유1:5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고전10: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히3:16-18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5. 왜 출애굽1세대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는가?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사람들을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 데리온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거의 99.9%가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고 말았다. 그것도 징계로 죽었다. 그들은 멸망당한 것이다. 안식을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다. 그렇다면 출애굽1세대들은 왜 출애굽하여 1차적인 구원을 받았고, 구원의 노정에 들어섰지만 구원의 경주를 끝마치지 못하고 중간에서 탈락한 것인가?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성경 전체를 정리한다면, 한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하여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죽게 되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첫째, 그들은 자신을 구원해준 하나님이 누군지를 잘 몰랐으며, 계속해서 송아지 우상을 하나님으로 알고 숭배했기 때문이다(출32:1,3~4).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430년동안 종살이를 하는동안 그들은 어떤 신을 섬기며 살았을까? 비록 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면서도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자신의 신으로 섬겼던 것일까? 아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모르고 있었다. 아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애굽에서 본 신들은 다신들이었으며, 특히 송아지우상(하토르)을 섬기는 것을 보고 자랐다. 그런데 출애굽하여 50일째 되는 날 모세가 십계명과 율법을 받으려고 시내산에 오른 뒤에 소식이 없자, 자기들을 인도할 하나님을 만들자고 하면서 그들은 송아지우상을 만들어 섬겼다. 그들에게 송아지 형상은 결코 우상이 아니었으며,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가 누군지를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는데, 그 하나님을 찾지 않고, 조금만 힘들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이것은 그들이 자기들을 출애굽시켜 이끌어낸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비록 초자연적인 은혜를 힘입어 광야에 나왔어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했던 자들은 다 광야에서 엎드려짐으로 죽고 말았던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구원해 준 하나님이 누군지를 모르고 자기가 믿고 있는 우상을 하나님이라고 숭배한다면 그는 결국 구원에서 탈락하고 말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누군지를 모르고 우상을 하나님으로 숭배하는 자는 십계명 중에서 제1계명과 제2계명 그리고 제3계명을 어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약시대에 들어와 우상을 숭배한 자들의 결국은 어떻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계21:8에 의하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고전6:9~10에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자는 결코 천국에 못들어간다. 

  둘째, 그들이 광야에 나왔으나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끝까지 원망과 불평으로서 하나님을 거역하였고 대적했기 때문이다(출14:11, 민13:2~3, 출17:3, 민16:3). 무려 10번씩이나 말이다(민14:22). 그들은 광야에서 조금만 힘들면 "우리를 이곳에서 죽게 하려고 데리고 나왔느냐?"면서 불평하였고, 그들이 나왔던 애굽으로 되돌아가자고까지 말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애굽"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애굽은 사탄의 왕국을 지칭하고, 애굽왕 바로는 사탄마귀를 상징하며, 애굽의 군대는 사탄마귀의 졸병들은 귀신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것은 사탄 다시 밑으로 들어가 그에게 종살이 하겠다는 뜻이다. 고로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결단코 천국에 데려가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 때문에 틈만 나면 원망과 불평을 했던 것인가? 살펴보니, 그들은 광야에서 적어도 10번 이상을 원망했는데, 그 내용들은 크게 3가지다. 하나는 "칼에 죽게 하려고 데리고 나왔느냐?"는 불평이었고(출14:11, 민14:2~3), 또 하나는 "목말라 죽게 하려고 데리고 나왔느냐?"는 불평이었다(출17:3).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굶주려 죽게 하려 데리고 나왔느냐""하는 것이었다(민16:3). 다시 "칼에 죽게 하려고 데리고 나왔느냐"는 불평의 하나는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민족이 바다와 애굽군대 사이에 놓여 진퇴양난에 빠졌을 때 했던 원망이었다(출14:11). 그리고 또 한 번은 가데스바네아아서 가나안 땅에 대한 정탐꾼들의 보고를 받은 후에 나왔던 불평이었다(민14:2~3).

  그런데 이들은 원망하고 불평만 했을 뿐 진실로 회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물 한 모금 구하기 어렵고, 풀 한 포기 자라기 어려운 광야로 데리고 온 이유를 잘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광야는 비록 물 한 방울 구하기 힘들고 풀 한 포기 없는 곳이지만,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믿고 따라간다면 부족함이 없는 장소인 것을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으셨다(신2:7).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200만명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 사람도 목말라서, 굶주려서, 칼레 죽게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에 들어와 예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6:31)"이라고 명령하셨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인간을 들의 백합화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로 보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썩어없어질 것들이요 천국에도 가지고 갈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바울의 말처럼,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고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할 것이다(딤전6:8)

  셋째, 하나님이 주시기 위해 준비해 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사모함이 없었기 때문이다(민14:26~35). 비록 애굽에서 빠져나와 광야로 나왔지만 장차 들어갈 가나안 땅에 대한 정탐꾼들의 보고를 받았던 그들은 하나님께 그시로 죽기를 간청했다. 그곳에는 워낙 힘센 민족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그들이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전능자로 믿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한 것은 약속의 땅 곧 가나안 땅이었는데, 그 땅에 기골이 장대한 아낙자손이 살고 있다는 말에 그만 즈레 겁먹고 애굽땅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말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믿음대로 처리해주신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천국에 대한 소망과 사모함이 없는 자는 천국에 못 들어갈 것이다. 우리가 비록 이 땅에 나그네로 살고 있지만 천국에 들어갈 것과 천국에서 받을 상급에 관심이 없다면 그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사람이 어떤 것인지를 이렇게 말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6. 구원의 여정을 사도바울과 히브리서 기자는 무엇에 비유했는가?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여 가나안땅에 도착하는 과정을 하나의 구원경주라고 생각하였다. 한 마리의 말이 달리기 시합을 하여 결국에 골인지점을 통과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비교적 선교 초년기에 썼던 편지인 고린도전서에서, 그는 운동장(스타디움)에서 달리기 하는 선수들처럼 자신도 열심히 상얻기 위해 달려가고 있다고 말했다(고전9:24~27). 그리고 그의 사역의 중말기에 썼던 빌립보서를 보면, 아직도 그는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그때도 달려가고 있다고 말했다(빌3:12~14). 그런데 그의 마지막 서신인 디모데후서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고 말했다(딤후4:7~8). 그렇다. 구원의 여정은 경주에 비교될 수 있는 것이다. 고로 히브리서 기자도 자기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외쳤다(히12:1). 구원의 시작은 출애굽의 경우처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는 것이지만 ,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께서 누가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인지를 일평생을 통하여 추려내는 것과 같아서, 이 경주에서 승리하는 자가 천국에 입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7. 나오며

  구원은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한 칭의로부터 시작된다. 예수님을 진실로 믿는 순간 그는 분명하게 칭의를 얻게 된다. 이것은 순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부터 달리기 트랙에 올라간 선수인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으로 이 땅에 보냈는지를 인지하고,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 자신을 구원해준 하나님이 누군지를 제대로 알아야하고, 원망불평대신 감사와 찬양으로 앞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이 주실 천국을 바라보고 신앙의 경주를 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혹 중간에 잘못하여 실수하고 어리석게 행동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즉시 회개하여 다시 정상적인 페이스에 들어서야 한다. 놀랍게도 광야에서 10번씩이나 원망불평하며 하나님을 거역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멸망당하고 말았다. 회개만 했어도 그들의 육신은 광야에 엎드려져 죽었더라도 그의 영혼만큼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을텐데,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그들은 출애굽 후 자신들이 지었던 죄를 회개하지 못했기에 광야에서 멸망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모든 성도들은 위에서 언급했던 3가지에 부합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회개는 해야 한다. 회개가 모든 것을 원위치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요, 구원의 최종 관문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07월 24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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