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30(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29)] 다락방강화(1)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요13:31~14:15)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Q-xColgXlB0 [또는 https://tv.naver.com/v/40839383]

1. 들어가며

  우리는 요한복음 중에서 13장부터 17장까지의 말씀을 가리켜 다락방강화라고 부른다. 사복음서에는 3종류의 집중적인 말씀이 있으니, 산상수훈의 말씀(마5~7장)과 다락방 강화(마24~25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락방 강화(요13~17장)의 말씀이 있다. 오늘 우리는 이것들 중에서 지난 주에 이어 다락방강화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한다. 다락방강화란 예수께서 인류구속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수난을 당하시기 전에 제자들과 가진 마지막 만찬 자리인 마가락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록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밤에,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다. 그리고 성만찬을 제정하셨다. 그리고 가룟유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언급하셨다. 하지만 가룟유다는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룟유다가 떠난 뒤, 주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그리고 이제 떠날 때가 되었음을 언급하셨다. 그러자 걱정하는 자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면서 3가지 약속을 해주셨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라고 하시면서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설명해주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 인류를 사랑하시는가에 대한 절절한 고백이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께서 성만찬 제정 이후에 주신 다락방 강화의 첫번째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 

 

2.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려고 나가자 왜 예수께서는 그 일로 인해 영광을 얻으셨다고 말씀하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대체 어떤 경우 영광을 받으시는가? 예수께서는 가룟유다가 자신을 팔려고 나가자 자신이 이제 영광을 얻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들로 인하여 하나님도 영광을 얻으셨다고 말씀하셨다(요13:31~32). 왜 예수께서는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려고 나가자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인가?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이 영광인지를 알려준다. 요한복음은 크게 표적의 책(요1~12장)과 영광의 책으로 나뉜다(요13~21장). 그중에서 영광의 책은 다락방강화에서 시작되는데 그것은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려고 나가는데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 영광이라는 개념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크게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뤄지는 것을 가리킨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좁은 의미로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실행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 인류의 속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사탄마귀와 죽음이 정복되며,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여 원래 있던 영광스러운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살아나서 부활승천하시어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일이 직접적인 실행은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파는 것이었다.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 순간에 인자가 영광을 얻었으며, 아버지도 그 일로 인해 영광을 얻으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으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불법을 행한 사탄마귀가 심판을 받게 되고 지옥에 떨어질 인류의 구원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새 계명이란 대체 어떤 의미인가?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가시면서 이제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새 계명을 주신 것이었다. 그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더러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새 계명'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사실 옛 계명을 축약한 것이다. 사실 옛 계명은 십계명을 가리키는데, 예수께서는 십계명을 단 두 계명들로 요약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다(신6:5, 레19:18).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두 계명들을 한 번 더 축약하셨다. 그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이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보면, 시간적으로 새로운 이라는 의미의 '네오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아니하고, 질적으로 새로운 이라는 의미의 '카이노스'가 쓰였다. 왜냐하면 이미 구약시대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을 압축한 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질적으로 새로운 계명이 되는가? 그것은 첫째로, 서로 사랑해야 할 대상과 범위가 훨씬 더 넓어졌기 때문이요, 둘째로, 거기에는 하나의 조건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했던 것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먼저, 서로 사랑해야 할 대상과 범위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그것은 옛 계명에서 이웃사랑이 할례받은 유대인들에게 한정되었는데, 새 계명은 그 범위를 제한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둘째, 서로 사랑하되 어떻게 사랑하라고 하셨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셨던 것고 같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이다(요13:1). 귿들의 목숨이 끊어져 더이상 그들의 운명을 바꿀 수 없을 때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비근한 예로서, 자신을 모른다고 부인할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하셨고, 자신을 배신하여 팔아넘긴 가룟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 사랑의 실천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사건이다(요13:4~11). 그리고 앞으로 자신의 목숨을 제자들을 위해 내놓는 것이었다(요15:12~14). 그렇다. 주님의 사랑은 이처럼 끝없는 사랑이요 조건없는 희생적인 사랑이다. 심지어 원수까지도 용서해주시는 사랑이다. 우리는 이 사랑을 배워서 실천함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고로 예수께서는 제자도의 표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요13:35).

 

4. 예수께서는 이제 제자들을 떠나서 어디로 가신다고 말씀하셨는가?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세족식을 통해 보여주셨고, 가룟유다에게 회개할 기회를 부여하심으로 보여주셨다. 그래서 인간으로 오신 예수께서는 이제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비롯한 인류구원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놓으셔야 했다. 그러나 그분의 떠나심은 단순히 제자들을 버리고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래 가졌던 영광의 상태로 들어가시기 위한 떠남이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제자들의 곁을 떠나가 떠나가실 곳은 대체 어디인가? 다락방강화에 따르면, 그것은 4가지 표현되었다. 그것은 '자신을 보내셨던 이'이자(요16:50, '하나님'이시며(요13:3), '아버지'를 향하여(요16:28) 떠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장소는 곧 '아버지의 집'(요14:2) 곧 '천국'(요17:24)이다. 이것은 인자가 이전에 있었던 곳을 가리킨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땅에 창조되기도 전에 아버지와 함께 영광스러운 존재로 아버지의 품 속에 계셨다(요1:18). 그러다가 때가 되어 아들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전에 있던 곳으로 떠나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서 "내가 가는 곳을 지금은 따라올 수 없지만 후에는 따라 올 것이다"(요13:36)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곧바로 죽어서 천국에 갈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과 사역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마치게 되면 베드로도 주님의 뒤를 이어 죽음을 통과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지금 왜 주님을 따라갈 수 없느냐고 하시면서 주님을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이라고 내놓을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님은 베드로의 용기를 가상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래서 실족하지 않도록 얼마 안 있다가 닭 울기 전에 자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고해주셨다(요13:38). 

 

5.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몇 가지로 말씀하셨는가?

  이어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비록 제자들의 곁을 떠나가지만 그들이 근심하지 말아야 할 3가지 이유를 말씀하셨다. 그것은 첫째로, 주님의 떠나가심을 아주 버림이 아니라 잠시 떠나가는 것으로서 곧이서 자기를 대신하여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는 일이므로 근심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다(요14:16~19). 그러므로 오히려 떠나가는 것이 유익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보혜사 성령은 그 단어가 뜻하는 바 대로 '돕는 자'로서 예수님을 대신하여 제자들에게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가르쳐주시고 생각나게 하실 것이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분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주님이 비록 떠나간다고 할지라도 제자들이 언제 어디서든지 기도하면 그 기도소리를 들으실 것이요 기도한 대로 시행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요14:13~14). 우리는 여기서 기도응답의 주체가 누군가를 보게 된다. 이전까지 기도응답의 대상은 하나님이었다. 하지만 예수께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시면 자신이 제자들의 기도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 한 마디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지만 실은 그분이 하나님 자신의 또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로, 예수께서 제자들의 곁을 잠시 떠나가 있는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관계를 청산하시는 것이 아니라 천국 곧 아버지의 집에 가서 그들이 살 장소를 마련하고 처소를 준비하러 가기 때문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다(요14:2~3). 그래서 거처가 준비되면 다시 와서 제자들을 영접하여 그리로 데려가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떠나가심을 제자들을 처소를 준비하기 위해 떠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근심할 일이 아니라 기뻐할 일인 것이다. 

 

6. 장차 제자들이 들어가게 될 천국은 어떻게 생겼는가?

  예수께서 천국에 먼저 가신 이유는 천국에서 제자들이 살 처소를 마련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천국에 집을 잘 지어보려고 이 땅에 사실 때에 그의 직업으로 목수의 일을 하셨다. 그래서 목수의 아들로 30년을 사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의 집을 잘 지어주실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우리 성도들이 거주할 처소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2층천에 있다. 사도 바울은 고후12장에서 자신이 셋째하늘(삼층천)에 다녀왔다고 간증했다. 그렇다면 3층천은 또 어디인가? 천국에 가보시지 않은 분은 이것을 잘 모르겠지만 천국은 두 개의 하늘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지구 위의 새들이 날아다니며 은하계의 별들이 있는 하늘이 1층천이라며, 천국은 두 개의 하늘로 구성되어 있어서, 아래층(2층천)에서 사람들이 거주한다. 그리고 윗층(3층천)에서 예배를 드린다. 그러므로 천국 성도들은 평소 때에는 2층천에서 살다가 예배드릴 때에 3층천으로 올라가서 예배드린다. 참고로 천국의 마을은 총 24개의 마을로 구획이 나눠져 있으며, 거기에는 24장로들이 왕노릇하고 있다. 이들이 예배 때가 되면 자신의 마을 사람들을 이끌로 3층천으로 올라와서 예배를 드린다. 그런데 절기가 되면 24마을에 사는 모든 천국성도들이 다 3층천으로 올라가서 예배를 드린다. 이 모든 사실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 보면 다 알 수 있는 사실이다. 

 

7. 왜 예수님만이 하늘 아버지께서 계시는 곳으로 가기 위한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인가?

  이어서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이 어딘지를 알려주신다. 그것은 그 길을 모른다고 도마가 언급했기 때문이다(요14:5). 그때 주님께서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7가지 자기선언 가운데 6번째 선언으로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자신을 통해서만 아버지께 올 수 있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아버지께로 가기 위한 유일한 길이요 유일한 진리요 유일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가 예수님 없이는 갈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으며, 살 수도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아버지의 집으로 가기 위한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며, 아버지의 집을 어떻게 가는지 가르쳐주는 유일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 아버지의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때, 당신 자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만약 이때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다면,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실 수가 없으시다. 자기 안에 아버지께서 계시니 자기를 통하여 아버지께로 올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8.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자기를 이미 본 채 있었는데도 자신의 실체가 누군지를 모른다고 언급하셨다. 고로 제자들이 이미 예수님을 아는 채 있다면, 그는 예수님의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도 아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이미 예수님을 알았고 또한 보았다면 이미 아버지도 안 것이고 또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14:7). 그러자 빌립이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달라고 했다(요14:8). 그러자 예수께서는 자신을 본 자는 이미 아버지를 본 것인데 왜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느냐면서,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또한 아버지 안에 예수께서 계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14:10). 고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시고 있는 레마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 거하시면서 당신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또다른 자기 계시이자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아니면 하나님이신가? 예수께서는 이미 유대인들과의 논쟁에서 자신이 누군지를 알려주셨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여호와로 믿고 있는 바로 그분이라고 하셨다. 그분은 자기를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는데, 그분이 바로 자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요8:24,28,58).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미 자기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셨다(요10:30).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두 분인가 한 분인가? 그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아주 쉽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한 분이셨다(신6:4).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뜻을 정하시고 아들 안에서 아들을 위하여 그리고 아들을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아들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와서 천국에서 사람들이 거주하도록 하실 계획을 세우셨다. 하지만 인간이 타락할 줄도 아신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할 방도를 고민하셨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인류의 죄값을 대신하여 죽을 속죄제물이었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들 가운데 흠없는 속죄제물이 될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사람이 되셔서 인류를 구원하기로 결정하셨다. 그래서 아들로 이 땅에 들어오신 것이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존재가 가능한 유일한 존재이므로 예수께서 아들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하늘에는 보내신 아버지가 계시면서 동시에 이 땅에 보내어진 아들로 존재할 수 있었다. 고로 우리는 예수께서 아들인 것은 분명히 맞지만 그분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려고 죽기 위해 사람이 되어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교회를 사셨다고 말했다(행20:28). 그런데 사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피를 흘리실 수가 없다. 그런데 죄속함은 오직 피흘림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피흘리기 위해 육신을 입고 아들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또다른 자기 계시이자 또다른 다른 표현인 것이다. 그래서 나를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이며, 내 말은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으려면 유일하신 한 분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보내셨던 또 다른 하나님의 표현인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것이다(요17:3). 

 

9. 왜 예수께서는 자신이 제자들의 곁을 떠나가시기 전에 베드로와 도마의 질문을 허락하셨는가?

  예수께서 떠나가시기 전, 주님은 베드로와 도마의 질문을 받아주셨다. 베드로의 질문은 주님이 어디로 가는지 그곳을 알 수 없기에 그곳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요13:36). 그리고 도마는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을 자신은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 길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요14:5). 그 대답으로 예수께서는 자신만이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며, 그 길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진리이며, 그 길로 들어서도록 해주는 생명이라고 하셨다(요14:6). 그리고 바로 아버지되신 그분이 자기 안에 있다고 하셨다. 그러니 자기를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이며, 자기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이는 결국 제자들이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이며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베드로와 도마의 질문을 통해 예수께서 아버지로께로 가는 중보자이심과 동시에 하나님 자신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베드로의 고귀한 질문을 통해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고(마16:16), 도마의 질문을 통해서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요20:28). 바로 이 두 사람의 질문이 있었기에 우리는 예수님이 과연 누구시며 왜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10. 나오며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죽음은 영광으로 나아가는 바로 그 길의 끝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아니 된다. 죽음은 영광의 부활을 위한 기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가룟유다의 배신으로 당신이 죽음의 길에 들어선 것을 기뻐하셨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남겨두고 떠나가는 제자들의 마음을 아셨다. 그래서 그들이 당신이 떠나가면 근심하고 두려워할까봐 그들에게 유언으로 말씀을 남기셨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13~17장에 나오는 '다락방강화'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남기고 간 이 말씀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당신이 잠시 떠나가시면 조금 있다고 보혜사 성령을 당신을 대신하여 돕는 자로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때라도 필요한 것이 있어나 위험한 일이 있을 때에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으니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것이 바로 기도다. 그리고 예수께서 천국에 먼저 가신 것은 우리가 살 처소를 예비하러 가는 것이기 기뻐할 일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예수께서 잠시 제자들의 곁을 떠나간 것은 제자들을 아주 떠나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버린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제자들의 미래를 준비해주기 위함이요, 또한 영이 되셔서 항상 제자들의 곁에서 제자들을 도와주시기 위해 떠나가신 것이다. 그리고 필요한 것마다 채워주시기 위해 떠나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신 것을 기뻐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 오신 보혜사 성령을 환영하고 기뻐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가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지금이라고 기도하여 필요한 것을 얻고 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이 비록 잠시 떠나가심이 영원한 떠나가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우리를 배려하시는 방법의 하나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응답을 자신이 해 주신다는 말씀 속에서 그분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요14:14). 그러므로 예수님을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이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은 아버지의 음성을 들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인들에 대하여 나타내신 사랑이 곧 아버지의 사랑 그 자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신성만 가지고 있어 결코 죽으실 수 없으셨기에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죽기 위해 인성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신 한 분 하나님, 곧 예수님께 영원히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린다. 할렐루야. 

 

 

2023년 08월 30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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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6(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28)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께서 행하신 참으로 귀하고 놀라운 일(요13:1~30)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1rJV4x9OeH0 [또는 https://tv.naver.com/v/40838782]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정말로 특별한 책이다. 그러니까 공관복음 곧 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과는 달리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주 하나님이라는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내용의 70%는 공관복음서에 나오지 않는다. 요한복음은 총 2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 전반부(1~12장)은 예수님의 7가지 표적을 중심으로 기록되어서 '표적이 책'이라고 불리고, 후반부(13~21장)은 예수께서 하나님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을 쓴 것이기에 '영광의 책'이라고 불린다. 그중에서 요한복음 13~17장은 예수께서 마가다락방에서 행하신 사역과 말씀과 기도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13장은 마가다락방에서 있었던 4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세족식(1~20절), 유월절 식사(21~30절), 성만찬 후에 주신 새 계명(31~35절), 베드로의 부인 예고(36~38절)가 들어 있었다. 그중에서 오늘 읽었던 본문의 말씀(요13:1~30)은 마가다락방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한 기록인데,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주는 2가지 사건을 만나게 될 것이다. 

 

2.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얼마나 사랑하셨는를 보여주는 2가지 사건은 무엇인가?

  요한복음 13장은 시작부터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정확히 그 배경을 알려준다. 그때는 유월절 하루 전날 밤이었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세족식과 유월절 식사를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유월절 하루 전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었으며, 유월절식사를 하신 것인가? 그 이유가 바로 1절에 나와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제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 아버께로 가실 때가 왔다는 것을 아시고는 이 세상에 있는 당신자신의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곧 있으면 가룟유다가 자신을 배반하여 떠나가서 대제사장에게 가서 돈을 받고 자신을 넘겨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당신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마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떠나갈 것을 아셨다. 하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혹시 제자들은 주님을 배반하고 버리고 떠난다고 할지라도 당신은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시길 원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2가지 사역을 행했다. 하나는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유월절 식사를 통하여 가룟유다의 마음을 돌이키려는 것이었다. 

  

3. 예수께서 아셨던 2가지 사명은 무엇인가?

  그런데 이때 예수께서는 2가지 사실을 아신 채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그것을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하나는 아버지께서 인류구원을 위한 모든 일을 아들 자신에게 맡기셨다는 것을 아셨다. 그것은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주어서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었다(3절).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나오셔서 이 땅에 오셨지만 다시 하나님이 계신 곳 곧 하나님을 향하여 떠나가야 한다는 것을 아셨다(3절). 그러면 육신의 몸으로는 두 번 다시 이 세상에 오시지 못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그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제자들이 나중에라도 알아차릴 수 있도록 자신이 육체로 있을 때에 무슨 일을 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선택하신 것이 바로 세족식이며, 유월절 식사에 이어지는 성만찬의 제정이다. 고로 이때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당신의 사명은 당신 자신을 인류의 대속죄제물로 내어주는 일이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들이 받게 될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4.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이유 5가지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많은 일들 중에서 왜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려고 하셨던 것일까? 겸손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신 것인가? 섬김과 희생의 도를 알려주시려고 하신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어떻게 해서 죄를 씻음받게 되는지를 알려주시려고 하신 것인가? 아니면 사랑을 보여주시되 행함과 실천을 통한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시려고 하신 것인가? 아니면 주인이자 선생이라도 섬기는 것이 어떤 삶이라는 것을 본보기로 보여주시려고 하신 것인가?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의 세족식은 바로 이러한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하는 복합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첫째,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겸손이 무엇인지를 손수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세족식을 행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자신을 종의 신분으로 낮추어야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섬김을 받아야 하실 분이지 그분이 우리를 섬겨야 할 의무가 없다. 하지만 그분은 종이나 하는 일을 제자들에게 행함으로 육신을 갖고 있을 때에 그분이 행할 수 있는 최대의 겸손을 제자들에게 알게 하신 것이다. 

  둘째, 예수께서는 섬김과 희생의 방법과 원리를 제자들에게 깨우쳐주시려고 세족식을 행한 것이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예루살렘 입성하면서부터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등극하면 누가 과연 예수님의 보좌 좌우편에 앉아 다스실 것인지에 대한 초미의 관심사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성만찬 이후에도 '누가 크냐?'고 하는 다툼이 있었기 때문이다(눅22:24). 그때 주님께서는 당신은 섬김을 받는 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로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자가 천국에서 들어가서도 큰 자가 되고 섬김을 받는 자가 된다고 말씀하셨다(눅22:26).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다른 사람들을 발을 닦아주는 종보다 비스듬히 누워서 먹는 자가 더 크지만 예수께서는 섬기는 자로 오셨음을 제자들에게 알게 하시려고 일부러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이다(눅22:27). 

  셋째, 한 번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자라도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씻어서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세족식을 행하신 것이다. 그것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었을 때에 베드로가 그것을 막아섰기 때문에 그 일 때문에 알려진 놀라운 영적인 비밀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한 번 예수님을 믿어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게 되었다면 그 뒤에는 회개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베드로와의 대화를 통해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주님이자 스승이셨던 예수께서 종이 되어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받아 자신들의 발을 씻기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판단했다. 그러자 그는 즉시 주님의 일을 막아섰다. 그리고 말했다. "주님, 당신자신께서 어찌 제 발들을 씻기나이까? 절대 그럴 수 없나이다."(요13:6). 그러자 주님께서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베드로야, 만약 내가 네 발들을 씻기지 않는다면 너는 나와 함께 차지할 분깃(몫)이 없느니라"(요13:8). 이 말씀은 천국에서 받을 상이 없다는 것이다. 즉 주님도 상을 받지 못하고 베드로도 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는 즉시 마음을 바꾼다. "그렇다면, 제 발만 씻어주실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손들과 머리까지도 씻어주소서"(요13:9). 그러자 주님께서는 속죄에 관한 영적인 비밀을 알려주셨다. "이미 목욕한 채 있는 사람에게는 전체를 다시 목욕할 필요가 없고 그 때에는 더럽혀진 발만 씻으면 되느니라."(요13:10). 그렇다. 한 번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의 피에 목욕하여 깨끗하게 된 사람은 매일 목요할 것이 아니라 더럽혀진 부분만 씻어 깨끗하게 하면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 그러므로 한 번 예수님을 믿어 죄사함을 받은 자라도 그 뒤에 다시 범죄하면 온 몸은 더럽혀지지 않고 어떤 부분만 더럽혀지는 것이니 그가 범죄한 바로 그것만 회개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허락한 죄사함이 죽는 그 순간에 취소가 되고 만다.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지워버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의 구원은 취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지은 죄들에 대해서 그냥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자백하여 예수님의 피로 자신의 죄를 깨끗히 씻어내야 한다. 그것을 알려주시려고 주님께서는 더럽혀진 발만 씻어주시려고 하신 것이다. 

  넷째, 사랑이란 생각과 이론만이 아니라 행함과 실천을 통해 증거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세족식을 행하신 것이다. 사랑은 생각만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정말 사랑하신다는 것을 직접 종의 신분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이다. 

  다섯째, 마지막으로 아무리 자기가 주인이며 가르치는 선생이라고 할지라도 섬김이 뒤따르지 않는 것은 진짜 주인이 아니며 진짜 선생이 아니라는 것을 본을 통하여 보여주시려고 세족식을 행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세족식을 마치시고는 그들에게 이러한 의미를 가르쳐주셨다. 즉 "너희 자신들이 나를 선생님이라고 하고, 주님이라고 소리내어 부른다. 그리고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때문이다. 하지만 나 자신이 주와 선생이 되어서 너희들의 발을 씻겼다면, 너희 자신들도 서로들의 발들을 씻겨줄 의무가 있는 것이니라.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본을 보인 것이다. 이제 내가 했던 것처럼 너희들도 행해야 한다"(요13:13~15). 그렇다. 많은 사람이 자신이 주인이며 선생이라고 생각하면 그들은 더이상 종과 제자들을 섬기려교 하지 않는다. 부리려고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천국은 이 땅에서 남을 부리고 명령하고 일을 시키는 자가 크게 되는 나라가 아니라, 그 반대의 나라인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실천했다고 해서 주인과 선생이 갑자기 종과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니, 아낌없이 섬기기를 실천하라고 말씀하셨다(요13:16).

 

5. 예수님은 어떻게 자신이 주 하나님이시며 전지전능자이시다는 것을 보여주셨는가?

 

 

6. 유다의 배신을 이미 아셨지만  그의 영혼을 살리시기 위해 주께서는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는가?

 

 

7. 나오며

 

 

2023년 08월 16일(수)

정보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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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예레미야강해(42)[최종회] 하나님의 백성이 범죄하여 멸망당하면 잃어버릴 것 3가지는 무엇인가?(렘52:1~34)_2023-04-07(금)

https://youtu.be/jxvTsUC3Igg [또는 https://tv.naver.com/v/35305423]

1. 남유다는 언제 어떻게 멸망당했는가?

  남유다는 제1대 르호보암(B.C.971~913, 재위B.C.930~913)이 통치한 후에 20대였던 시드기야왕(재위 B.C.597~586) 11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의 3차 침입으로 인하여, B.C.586년 4월 9일 예루살렘이 함락됨으로 멸망한다. 그러니까 남유다는 분열 왕국이 된 후에 344년 만에 이방 민족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제2대 왕인 느부갓네살왕에 의해 멸망당한 것이다. 이러한 남유다의 멸망 기사는 열왕기하 24:18~25:7에 수록되어 있는데, 느헤미야 52장에도 거의 동일하게 나오고 있다. 느헤미야서에서는 열왕기하에 비해 단지 3구절(렘52:28~30)만 추가되어 있을 뿐이다. 아마도 서기관 바룩이 열왕기하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다가, 거기에 3구절을 추가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예언한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2. 남유다가 멸망함으로 범죄한 남유다 백성이 잃어버린 것 3가지는 무엇인가?

  남유다가 범죄함으로 인하여 멸망당함으로 이스라엘은 역사의 무대에서 당분간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이때 남유다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잃어버린 아주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무엇인가? 당시 남유다 백성들은 단지 예루살렘에서 죽임당하거나 아니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남유다가 멸망당함으로 인하여 남유다 백성들이 진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범죄함으로 인하여 멸망당할 때에 잃어버리게 될 것들과 똑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다.

  첫째, 하나님이 선택한 도성 곧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 성'(도시)을 잃어버렸다(렘52:7,14).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그분의 거처를 삼고자 예루살렘을 가리켜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말씀하셨음을 언급했다(시132:13~14, 시78:68, 왕하23:27).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 도성을 다윗이 빼앗은 후에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명했기 때문이다(삼하5:7). 그런데 이 도성이 성벽의 파괴와 함께 이제 다 불타버린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범죄하여 죄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우리도 역시 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계21:2, 22:19). 

  둘째, 하나님의 집인 '예루살렘 성전'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렘52:13,17~23).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영원히 두시겠다고 약속하셨던 처소 곧 집인 성전이 이 때 파괴되었다(왕상8:44). 또한 그때 파괴된 것은 하나님의 집인 성전 뿐만 아니라, 왕의 집인 왕궁과 서민의 모든 집들과 고관들의 집까지 다 불살라졌다(렘52:13).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범죄하여 죄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우리도 역시 저 하늘 새 예루살렘 성 안에 지어진 '천국집'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는 날, 우리가 거듭날 때 들어오신 성령께서 떠나가심과 동시에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우리의 이름이 지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천국에 지어진 집도 바람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다. 당시 성전이 파괴되면서 거기에 있던 성전기명들이 다 바벨론으로 옮겨진 것처럼 우리가 천국집에 올려보낸 모든 것들도 우리가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순간 역시 어디론가 옮겨지고 말 것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땅으로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렘52:27).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주신다고 약속하셨다(창17:8). 그래서 여호수아 때에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였으나, 범죄함으로 인하여 다시 그 땅을 남에게 내어주고 그 땅에서 죽거나 그 땅을 떠나야 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만약 남유다 백성처럼 범죄하고 회개치 못해 죄용서를 못 받게 된다면, 우리도 역시 약속의 땅인 천국에서 쫓겨나 성밖이나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고 말 것이다(계21:8, 22:14~5). 

 

3.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남유다를 철저히 심판하셨으나 남겨두신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남유다를 철저히 심판하셨다. 그래서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이셨다. 그러나 그들 중에 일부는 '바벨론'으로 옮기셨다. 포로로 잡혀가게 하신 것이다. 이는 남유다의 백성이 없어진다면 장차 하나님께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메시야가 태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로 하나님께서는 진노 중에서도 남유다에게 긍휼을 베푸시어, 먼저 남유다 백성의 일부를 1차, 2차, 3차에 걸쳐서 바벨론으로 옮겨주셨다. 이를 가리켜, 하나님께서는 '나쁜 무화과' 중에 '좋은 무화과'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렘24:5~7).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범죄 직후부터 장차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지은 죄에 대한 댓가로서, 대신 죽어갈 어린양을 예비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를 가리켜, 아담 때에는 '여자의 후손(씨)'이라고 칭하셨다(창3:15). 그리고 언젠가 때가 되면 '여자의 씨(메시야)가 뱀(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그의 후손으로 20대 만에 아브라함이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 씨를 언급하셨는데, 이때 아브라함에게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요,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또 한 번 언급해 주셨다(창22:17~18). 그리고 계속해서 '이삭의 씨(창26:4)'와 '야곱의 씨(창28:14)'로서 메시야를 보내 주실 것을 반복해서 약속해 주셨다. 이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남유다가 죄를 지었지만 그들을 아주 멸하지는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서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마1:1).

 

4. 약속의 씨를 낳아 줄 사람이 바벨론에 살고 있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고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씨를 낳아 줄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들이 아직도 바벨론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 예레미야서의 말미에 유다 왕 여호야긴의 회복을 언급하고 있다(렘52:31~34). 즉 바벨론의 제3대 왕이었던 에윌므로닥(B.C.562~560)이 자신의 통치 원년에 여호야긴을 감옥에서 풀어주고 그에게 친절하게 대하였으며, 그의 왕위를 그와 함께 있는 바벨론의 왕의 자리보다 더 높여 주었고, 그의 죄수 의복을 갈아 입혔으며, 그의 평생 동안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고, 그가 날마다 쓸 것을 바벨론의 왕이 정해 주었으며, 그것을 종신토록 받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호야긴은 스알디엘을 낳고(마1:11~12), 스알디엘은 다시 스룹바벨을 낳았으며, 그후로도 그의 후손들은 자식을 계속해서 낳음으로, 드디어 야곱이라는 사람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메시야)라 칭하는 예수가 태어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마1:16). 

 

5. 예레미야를 통해서 배우게 된 역사적인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예레미야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가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자 모든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거짓 신인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의 타락과 우상숭배를 더욱더 싫어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도 안타까워하고 미워하시지만 백성의 대표인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의 타락에 대해 매우 분노하신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회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키는 것을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회개만이라도 한다면 진노의 잔이 비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유다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토록 회개하고 돌이킬 것을 외쳤던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고 멸망당했기 때문이다. 고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역시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회개를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서 지옥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안 해서 지옥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특히 지도자들의 타락과 범죄는 더욱더 심각한 것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지도자의 범죄는 한 나라의 존립 자체를 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의 정치적인 지도자와 영적인 지도자가 바로 설 수 있도록 늘 기도해야 한다. 

 

 

2023년 04월 07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예레미야강해(41) 선민이 의지했고, 선민을 괴롭혔고 멸망시킨 이방나라들의 멸망이 주는 교훈(렘46:1~51:64)_2023-04-06(목)

https://youtu.be/lHTWUAOdMBs [또는 https://tv.naver.com/v/35305289]

1. 선민이었던 남유다가 의지했고 선민을 괴롭혔으며 선민을 멸망시킨 나라들은 어떤 나라들이었는가?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이었던 이스라엘, 그중에서도 북이스라엘은 B.C.722년 앗수르의 살만에셀에게 멸망당했다. 그리고 이어서 B.C.586년에는 남유다마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에게 멸망당한다.

  그런데 남유다가 멸망할 당시 남유다가 의지했던 나라가 하나 있었다. 그 나라는 애굽(이집트)이었다(렘46:2~28). 왜냐하면 가장 가까이 있던 강대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북쪽에서 앗수르가 쳐들어올 때나, 동쪽 유브라데스강 하류에서 살던 바벨론이 쳐들어올 때나 남유다는 항상 애굽을 의지하였다. 그런데 그때 남유다가 범죄했을 때에 주변국들이 쳐들어와 남유다를 괴롭히곤 하였으니, 남유다를 괴롭힌 나라들로서는 블레셋(렘47:1~7), 모압(렘48:1~47), 암몬(렘49:1~6), 에돔(렘49:7~22), 다메섹(렘49:23~27), 게달과 하솔(렘49:28~33), 엘람(렘49:34~39) 등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유다에 3차례나 쳐들어와 결국 남유다를 멸망시킨 대제국이 있었으니 그 나라가 바로 '바벨론'(신바빌로니아 제국)이었다(렘50~51장). 

 

2. 남유다와 관련된 나라들은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세울 때에 남유다의 선지자로만 세우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기 때문이다(렘1:5).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열방의 여러 나라들과 남유다의 여러 왕들을 뽑고 심고 세우고 파멸하는 예언을 맡게 된다. 그중에 가장 먼저 남유다가 B.C.586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에 의해 멸망당한다. 그리고 주변국들도 역시 멸망을 당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남유다와 주변 9개국을 멸망시킨 나라가 누구였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 나라였다. 그 나라는 남유다가 가장 싫어하는 바로 그 나라, 곧 '바벨론'이었다. 그때 바벨론은 남유다가 그렇게 의지했던 애굽을 쳐부수어 무너뜨렸다. 그리고 나머지 남유다의 주변국을 전부다 정복하여 세금과 곡물을 바치게 하였다. 그런데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세계를 뒤흔들어 놓고 고대 근동을 다 차지했던 바벨론이라는 제국도 결국 얼마 못 가서 또 다른 나라에 정복당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참고로 그때 바벨론을 정복한 나라는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이었다. 고로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이 세상의 어떤 나라도 영원한 나라, 영원히 지속되는 나라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혹시 만약이라도 그러한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는 이 땅의 나라가 아니라 저 하늘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일 뿐이다. 

 

3. 남유다를 멸망시켰던 바벨론은 왜 멸망당하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남유다를 멸망시켰던 바벨론은 왜 멸망당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바벨론의 멸망 원인을 살펴볼 수 있는데,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바벨론이 살아계시며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전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다(렘51:15~17). 바벨론은 벨(=마드룩)과 느보를 신으로 섬긴 나라였다(렘51:44, 사46:1). 그들은 자기들의 우상 신을 섬긴 것이지 결코 살아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바벨론이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그 속에 생기가 없고 거짓 뿐인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었다(렘51:17). 그리고 둘째, 바벨론이 멸망당한 두 번째 이유는 그 나라의 교만 때문이다(렘50:29). 그들은 자기들이 고대 근동을 전부 정복하게 되자 기고만장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힘과 지혜와 능력이 뛰어난 것이라고 착각했고,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최고라는 자만의식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의 교만을 두고 보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또 다른 나라에 의해 멸망당하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결국 바벨론이 멸망당함으로 인하여, 70년 만에 남유다 백성들은 다시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원수의 원수의 나라는 우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4. 남유다와 주변 열방 10개국의 멸망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역사적인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남유다 주변 열방 10개국의 패망을 통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역사적인 사실들을 깨달을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비단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선민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으로 특별히 삼으셨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이방 나라들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이 우주의 주관자시라는 것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 단 하나인 절대 주권자는 우리 하나님 뿐이시다. 구약으로 치면 여호와 하나님이시요, 신약으로 치자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둘째, 이 세상의 역사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인간들의 우발적이거나 치밀한 계획에 의한 산물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개인 뿐만 아니라 국가를 심고 뽑을 수 있고, 세우고 허물 수 있기 때문이다. 

  

5. 남유다와 주변 열방 10개국의 멸망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영적인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남유다 주변 열방 10개국의 패망을 통해 다음과 같은 영적인 교훈들도 함께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 이외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의지하는 모든 것은 결국 헛된 것이요 허망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남유다는 한사코 애굽을 의지했다. 하지만 애굽은 결국 바벨론으로부터 남유다가 멸망하는 것을 도와주지 못했다. 이 세상과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결국 허망한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이방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징계와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지만, 이방 사람들은 결국 악의 도구로 하나님께 쓰임받다가 결국 버려지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방신들이 섬기는 신은 우상이요 결국 귀신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나 저주받은 귀신을 섬긴 개인이나 나라는 반드시 망하기 때문이다. 오직 우리 사람으로부터 섬김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 뿐이시기 때문이다. 바벨론이 그랬다. 

  셋째, 하나님은 악한 자들이나 악한 영들(귀신들)을 야당처럼 쓰시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고 나면 오히려 그들을 심판하여 영원한 불못에 던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의 도구로 사용된 자들은 악을 산출한 것이므로 그들은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가룟 유다에게 상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예수님을 팔아 넘겨서 죽게 해야만이 인류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려지게 되기 때문에, 가룟 유다가 그 일을 했으니 상을 주어야 하고 천국에 들여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는 선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악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인을 무고하였고 죽이는 데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이고 파괴하는 것은 사탄이 하는 일일 뿐인 것이다. 우리는 일평생 주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선의 도구로 사용될 망정 결단코 사탄처럼 악의 도구로 사용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3년 04월 06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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