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유다는 왜 멸망을 당해야 했는가? 무슨 죄가 하나님의 진노를 거둬들이지 못하게 했는가? 오늘날 한 국가의 흥망성쇠는 과연 무엇과 깊은 관련이 있는가? 그것은 놀랍게도 에스겔23장의 말씀에 잘 나와 있다. 그것은 단순히 우상숭배 행위만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 우상숭배행위 가운데서도 자식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우상숭배 행위를 할 때 하나님은 칼을 빼신다. 더불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권력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칼을 빼신다. 대체 남유다는 무슨 죄를 지었는가? 현재 우리나라도 패망하지 아니하려면 에스겔서를 통해서 무엇을 배우고 깨우쳐야 하는가? 오늘은 그것을 들여다보자.

2019-09-11(수) 수요기도회
제목: 에스겔강해(11)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행음과 그들에 대한 심판(02)(겔23:1~49)
https://youtu.be/X1hBetp7KVQ


1. 들어가며

  남유다의 멸망의 원인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기본적인 속성은 그분은 한없이 오래 참으시며, 인자가 풍부하시고, 긍휼히 많으시다는 것이다(출34:6).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더이상 참으시지 않으실 때가 있다. 왜냐하면 심판하실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언제 심판을 집행하시는가? 과연 하나님은 언제 분노를 거둬들이지 아니하시고 분노를 폭발하시는가?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오홀리바"라는 별명을 가진, 남유다의 멸망의 원인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눈으로 들여다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에스겔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남유다, 진정 왜 멸망당하고 말았는가?

 

2. 에스겔 23장의 위치는?

  그렇다면 실제로 남유다의 멸망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 원인이 적나나하게 기록된 부분은 에스겔과 16장과 23장이다. 사실 에스겔서에서 심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유를 말씀하고 있는 성경이 바로 에스겔 16장과 23장이다. 에스겔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준으로 이전에 쓴 것과 이후에 쓴 것으로 나뉘는데, 멸망 이전에 쓴 심판에 관한 예언은 1장에서부터 24장까지 나온다. 그리고 25장부터 32장까지는 이스라엘 주변에 위치한 이방나라 7개국에 관한 심판에 관해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준으로 이후에 쓴 것 곧 회복에 관한 쓴 예언이 바로 33장부터 39장까지에 나온다. 그리고 나머지 40장부터 48장까지는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에 대한 환상이 나온다. 참골, 성전의 회복에 관한 환상은 소위 제3의성전 건축에 대한 환상이라고 해석하는 분들이 많은데, 절대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에스겔서 40~48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전인 '교회'에 관한 환상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이것은 시간이 지나보면 알게 될 것이다.) 고로 에스겔서 23장은 예루살렘 멸망을 다루는 에스겔24장 직전에 주어진 예언으로서, 남유다가 북이스라엘처럼 왜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장이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진단하신 것이다.

 

3. 그렇다면 남유다는 왜 멸망하게 되었는가?

  에스겔 23장에 의하면, 남유다의 멸망의 원인은 딱 2가지로 나온다. 첫째는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 때문이다. 그것도 자기자식을 불에 태워 이방신들에게 바치는 우상숭배의 악까지 행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주변의 강대국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기 때문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에 지도자들 특히 정치나 종교의 지도자들은 과연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가? 누구에게 찾아가 부르짖어야 하는가? 그것은 당연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결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다. 어찌하면 그때 하나님은 영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의 남편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므로 남유다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는 남편을 찾았어야 했다. 하지만 남유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남유다도 북이스라엘에 이어 130년만에 멸망을 받는다. 이제는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을 좀 더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도록 하겠다.

 

4. 남유다의 우상숭배 행위와 주변의 제국을 의지하려는 태도는 어떠했는가?

  남유다는 북이스라엘과 거의 똑같은 수준으로 우상숭배 행위를 저질렀다. 아니 북이스라엘보다 더했으면 더했다. 그런데 남유다의 우상숭배를 북이스라엘의 행위보다 더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 왜냐하면 남유다에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소 곧 하나님의 성전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성전이 없었기에, 그들은 애굽의 신들을 본따서 만든 가짜 성전을 만들어 놓았다. 그것도 남유다에 비하면 북이스라엘이 워낙 땅이 넓다보니 가짜 성전을 2개씩이나 만들어놓았다. 북쪽에는 '단'에 만들었고, 남쪽에는 '벧엘'에 그것을 만들어 세워놓았다. 그런데 그 모습은 애굽의 신들이었던 송아지 모양의 우상들이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을 다른 별명으로 부르셨는데, 남유다는 "오홀리바"라고 부르셨고, 북이스라엘은 "오홀라"라고 부르셨다. 왜냐하면 '오홀리바'는 "그녀 안에 내 장막이 있다"는 뜻이고, '오홀라'라는 "그녀의 장막"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남유다에는 하나님의 처소가 예루살렘에 있었다. 하지만 북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만든 가짜 장막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남유다도 북이스라엘만큼이나 우상숭배를 하다가 결국에 멸망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남유다 사람들이 섬겼던 우상들은 대체 어떤 것이었으며 그들은 얼마만큼 우상숭배에 물들어 있었는가? 남유다 사람들이 섬겼던 우상들은 크게 3가지였다. 첫째, 그들의 하늘의 신들을 섬겼다. 그것은 하늘의 태양신(니므롯)과 태양신의 아내인 하늘황후(세미라미스) 그리고 태양신의 아들인 담무스를 신으로 섬겼다. 이것들은 고대 바벨론의 신들이다. 둘째, 가나안 우상들을 섬겼다. 가나안 우상의 대표는 바알과 아세라 신이며, 모압신은 그모스, 암몬신은 몰렉(몰록,밀곰)이었다. 그런데 몰렉신은 상당히 잔인하여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행하는 의식을 행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남유다를 멸망시키려고 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들 중의 2개 가운데 하나우상숭배인데, 그중에 우상숭배 가운데서도 자기자신을 불에 태워 신에게 바치는 우상숭배행위였다. 왜 죄없은 어린 자식을 불에 태워바치는가? 하나님은 그것을 보고 진노하고 또 진노하셨다. 그중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킬 수 없도록 만든 인신제사 행위는 남유다 12대 왕이었던 아하스왕 때에 일어났고, 제14대 왕이었던 므낫세왕 때에 있어서 결국 므낫세 증손자때 남유다는 멸망을 당하게 된다.

  참고로, 아하스왕때의 인신제사 행위를 조금 살펴보자. 그 이야기는 열왕기하 16장에 나온다. 그 이유는 북이스라엘의 제18대 왕이었던 '베가'가 아람나라의 왕이었던 '르신'과 손잡고 남유다를 침공해올 때였다. 그때 남유다의 아하스왕은 16년간 통치하면서 이방신들을 섬기되 자신의 아들을 불가운데도 지나가게 하였다. 몰렉신에 제사한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은 산당들(높은 산들 위에 있는 사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우상을 섬겼다. 그것은 태양과 하늘황후 그리고 담무스에게 제사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아들 중에 히스기야가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심판을 작정하기는 했으나 심판을 연기하게 한 이유가 되었다. 왜냐하면 남유다 13대 왕이었던 남유다의 왕들 가운데 보기드문 선한 왕이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찾았던 왕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분노를 불일듯 일어나게 한 것은 아하스왕의 인신제사행위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앗수르제국을 의지했기 때문이다. 아람나라와 북이스라엘이 처들어오자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어마어마한 은금예물을 보내면서 말이다. 결국 앗수르 제20대 디글랏 빌레셋왕은 아람나라를 패망시켰고, 북이스라엘을 물리쳤다. 그러자 아하스왕은 앗수르왕의 알현차 아람나라의 수도인 다메섹으로 가서 앗수르왕을 알현하였다. 그런데 그가 그곳에서 본 아람나라의 제단은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갔으니 그는 그 제단을 그림을 그려 남유다의 제사장인 우리야에게 보냈는데, 우리야는 왕의 지시에 따라 성전의 번제단을 옆으로 치우고 그리고 물두멍까지 치우고 그 자리에 아람나라의 제단을 세운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겠는가? 아마 히스기야만 아니었다면 그 시대로 남유다도 끝장났을 것이다. 하지만 선한 왕으로서 아하스왕의 뒤를 이은 히스기야는 산당들을 제거하고, 주상들과 아세라목상을 없애버렸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우상처럼 거기에다가 분향하니까 그것도 부수어 없애버렸다. 그리고 유월절제사를 회복시켰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내게 한 왕은 히스기야의 아들이었던 남유다 제14대 왕이었던 므낫세였다. 그는 12살에 왕위에 올라 무려 55년을 통치하여, 67세가까지 남유다를 통치했는데, 그는 남유다의 왕들 가운데 가장 악한 왕으로서 가장 많은 우상숭배를 자행한 왕이었다. 그는 심지어 자기를 책망하는 이사야선지자를 톱으로 썰어서 죽였다. 그리고 그는 가나안 우상들은 바알들과 아세라신도 섬겼고, 하늘의 일월성신을 신으로 섬겼으며, 아히스왕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아들을 불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다. 그도 인신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또한 그는 신접한 자와 무당을 등용하였고, 아세라 목상을 하나님의 성전 안에까지 들여와 세워놓았고 그를 숭배하였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남유다를 멸하려고 작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역대하33장). 만약 자신의 부친 히스기야와 그의 어머니 헵시바("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의 기도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므낫세 왕때에 남유다는 아마 끝장났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기도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그를 회개시키려고 앗수르의 침공을 받게 허락하셨다(므낫세 나이 60세경에). 그는 쇠사슬에 묶여 앗수르의 수도인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께 회개했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주셨으니, 앗수르왕이 그를 돌려보내주었다. 그러자 그가 돌아와서는 그는 하나님의 전에 있는 우상들을 다 제거하고 산당과 제단들을 다 헐어버렸다. 즉 그는 이때부터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아들 아몬(남유다 제15대왕)이 뒤를 이었는데, 또다시 그는 므낫세왕처럼 행하였다. 그러자 반역한 자들이 일어나서 그를 죽여버렸고, 그의 아들 요시야가 남유다의 제16대 왕으로 등극한다.

  결국 남유다는 제16대 왕이었던 요시야의 아들 때에 멸망을 받는다. 그러나 그중에서 요시야왕은 남유다의 왕들 가운데 너무나 선한 왕이었다. 그가 왕이 되자, 그는 율법말씀에 따라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성신을 없애버렸고, 산당들을 제거했으며, 남창의 집을 헐어버렸고, 몰렉신 제사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태양신 숭배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유월절을 회복시켰다. 초막절까지 지켰다. 그런데 그가 실수한 것은 있었으니, 애굽왕 바로느고가 앗수르왕을 치고자 올라갈 때에 그와 맞서다가 그만 전사한 것이다. 결국 왕위는 둘째아들 여호아하스(제17대)에게 넘어갔고, 이어서 첫째아들 여호야김(제18대)과 여호야김의 아들인 여호야긴(제19대)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요시야의 셋째아들인 시드기야(제20대, 마지막왕)에게 넘어가게 되는데, 바로 이 시드기야 왕 때에 남유다는 바벨론 느부갓네살왕의 침공을 받아 최종적으로 멸망을 받게 된다.

 

5. 남유다가 의지한 세 정부(정을 통한 남자)는 누구였는가?
  남유다가 사모했던 주변 대제국은 어떤 나라들이었는가? 히안하게도 남유다는 자기나라 땅 안에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제사장들도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남유다는 자기들의 하나님을 버리고 말았다. 주변 대제국의 신들이 더 좋아보였는지 모른다. 더불어 남유다 사람들은 자기 민족보다는 주변 대제국의 사람들을 흠모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화가 새로웠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옷입는 것도 달랐고 머리모양도 달랐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 대부분은 말을 타고 다녔기에 그들인 대단히 멋져 보였을른지도 모른다. 그래서 속으로 그들을 대단히 연애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문물과 그들의 섬기는 신까지 그냥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동경했던 대제국들은 어떤 나라들이었는가? 그 나라들은 셋이었는데, 처음에는 "애굽"이었다. 그러다가 "앗수르"로 이동하게 되었고, 이어서 나중에는 바벨론으로 이동하게 된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다시 애굽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다가 그만 남유다는 화가난 바벨론왕에게 멸망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느새 이방나라의 신들까지 받아들인 성전은 그만 만신전이 되고 말았고, 덩달아 모든 백성들도 하나님도 섬기면서 동시에 우상들도 섬기는 다신론자들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을 떠났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는 주변의 강대국들을 의지했던 남유다를 멸망시키지 아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그 영향 죄없는 자녀들까지 미치고, 주변의 강대국들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면 하나님은 심판을 집행하시는 것이다.

 

6. 나오며

  모든 인류의 역사는 반복적이다.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하는 자는 예전에 있었던 방식대로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 북이스라엘로부터 배우지 못했던 남유다도 역시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게 되었고 주변 강대국들을 의지하다가 멸망을 받고 말았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나라도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만약 우리나라가 우상숭배(죽은 자를 추모하고,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드린다면)를 계속해서 자행하고, 우리가 행하는 우상숭배의 행위를 통해서 죄없는 우리의 자녀가 희생시킨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 나라를 심판하고 마실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며, 주변의 강대국들을 의지하려 한다면 우리나라도 남유다처럼 우리가 의지하는 나라에 의해 멸망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신차려야 한다. 대제국이 우리를 도와줄 것 같지만 그것을 빌미로 우리나라를 엿보게 되고 오히려 우리나라를 먹으려고 달려들 것이다. 이제는 우리도 국방력을 더 튼튼히 해야 한다. 경제를 높이 끌어올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통령과 위정자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지혜를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도 세상의 주는 것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아니 타락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나라도 남유다처럼 멸망을 당한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2019년 9월 11일(수)

정병진목사

 

B.C.930년경에 탄생했던 남유다는 언제 멸망을 당하게 되었을까? 그때는 선지자들이 활동하던 시대로 표현하면, 예레미야선지자와 에스겔 그리고 다니엘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였다. B.C.586년의 일이다. 그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에 의해 남유다는 344년만에 완전히 문을 닫게 된다. 그런데 에스겔서를 통해서 얻게 된 놀라운 사실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함락되던 날에 에스겔의 아내도 죽었다는 사실이다(겔24:15~18). 그것은 일종의 상징적인 예언이자 행동예언으로서, 에스겔이 가장 많이 실행했던 예언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23장에서 왜 남유다가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밝혀놓고 있다. 그것은 이들의 죄가 북이스라엘의 범죄와 똑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북이스라엘은 무슨 죄를 지은 것이며, 또한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나라가 송두리채 패망하여 뿌리채 뽑혀버리는 신세로 전락했던 것인가? 그것은 딱 2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이 2가지 이유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2019-08-28(수) 수요기도회
제목: 에스겔강해(10)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행음과 그들에 대한 심판(01)
https://youtu.be/JEQzLq7u_vY


1. 들어가며

  B.C.586년 남유다는 왜 멸망당했던 것일까? 남유다는 사실 북이스라엘보다 약 130년 뒤에 멸망당하게 된다(B.C.722년). 그 이유는 놀랍게도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했던 이유도 똑같은 것이었고 그 방법도 동일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한 민족을 멸하실 때에 어떤 경우에도 순간적인 판단에 따라 멸망시키지는 아니한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몇 번이고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후에 실행하신다. 하지만 남유다는 그러한 몇 번의 기회가 자신들에게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자기민족의 멸망을 스스로 자초하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남유다가 왜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견주어 살펴보려고 한다. 자기 영토 내에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성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남유다가 왜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를 심도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2. 에스겔은 어떤 선지자였으며 무엇 때문에 부름을 받았는가?

  에스겔은 B.C.593년 남유다 19대왕이었던 여호야긴왕 때 하나님으로부터 부르받은 선지자였다. 그렇지만 그의 원래의 직업은 "제사장"이었다. 사독계열의 정통 제사장의 가문에서 태어났기에, 그는 25세 때부터 예비제사장이 되어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B.C.598년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제사장으로서 직무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포로로 잡혀간후 5년이 지날 무렵, 그는 하나님의 보좌와 궁창 그리고 거기에 있는 네 생물에 대한 놀라운 환상을 보게 된다. 그리고 보좌에 앉아계신 이로부터 하나의 음성을 듣는다. 그것은 패역한 이스라엘 족속(남유다민족)을 위하여 외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때는 남유다의 국운이 기울어진 상태에 있었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그때로부터 약 5년 뒤인 B.C.586년 남유다가 멸망당하기까지 입이 있으나 외치는 못하는 선지자로 활동해야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혀를 입천장에 붙여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스겔은 자신의 아내가 죽던 바로 그날, 남유다가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러므로 부름받은 뒤 5년동안 에스겔은 말로 하는 예언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예언(행동예언)만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행동예언을 한 선지자로 알려지고 있다.

 

3. 에스겔서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에스겔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겔1~32장)는 남유다의 범죄와 심판에 대한 것이며, 후반부(33장~48장)까지는 남유다의 회복에 관한 예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전반부는  또 다시 1장에서부터 24장까지는 이스라엘의 범죄와 심판을 다루고 있고, 25장부터 32장까지는 열방 7개국에 대한 범죄와 심판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겔33~48장)은 또다시 남유다의 회복예언(겔33~39장)종말론적인 선민왕국의 회복에 대한 예언(겔40~4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본문(겔23:1~21)은 에스겔 전반부(겔1~32장) 중에서 남유다의 적나나한 범죄의 모습에 관한 말씀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남유다의 범죄와 패륜은 에스겔23장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에스겔16장에도 거의 유사하게 기록되어 있다. 관점이 약간 달라서 상호보완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에스겔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을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는가?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불러다가 북이스라엘의 멸망 직전의 모습과 멸망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려주신다. 그것은 한 마디로, 우상숭배와 권력을 좇아감이다. 즉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된 원인은 첫째, 10지파가 하나님을 버린 채 두 마리의 송아지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다. 이것은 초기의 죄였다. 그리고 둘째, 나중에는 북이스라엘 위쪽에 위치한 대제국이었던 앗수르에게 스스로 조공을 바치며 그들을 의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북이스라엘과 더불어 남유다가 멸망하게된 직접적인 요인은 우상숭배행위를 버젓이 저지른 것과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의 권력자들을 의지했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은 원래 이스라엘 민족을 어떻게 생각하셨는가?

  겔2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가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시작을 배꼽 줄도 자르지 않은 피투성이의 여자아이라고 하였다(겔16:4~6).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길러주셨다. 그랬더니 그 여아가 자라서 왕후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이스라엘 민족은 주변의 가나안민족이나 애굽인들에 비하면 있으나마다 했던 민족이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은 언제였을까? 그것은 개인적으로는 아브라함으로 보며, 민족적으로는 출애굽으로 본다. 어찌 되었던 버려지 피투성이의 아이가 자라가 애굽에 들어가서 거대한 민족이 되었다. 애굽에서 430년을 지내면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그것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갈대아우르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불러내기 전, 경건한 셈의 자손들도 함의 자손들과 함께 바벨론(갈대아우르)에서 섞여 살고 있었다. 야사인 "야살의 책"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함의 후손인 니므롯 부하장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수24:14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조상들도 하나님을 떠나서 유브라데강 저편에서 우상들을 섬기고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가 데라의 셋째아들 아브라함이 더이상 우상을 숭배하는 아버지를 따르지 않기로 결정하고 오직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따르기로 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횃불언약을 체결한다(창15:12~21). 이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약혼식"이라고 부른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눈동자처럼 지켜주시기로 약속하였고,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기로 약속하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언제 이스라엘 민족과 결혼식을 올렸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B.C.1446년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과 시내산에서 체결한 시내산언약 때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내어 광야에 두신다. 그리고 그들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체결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면, 그들을 모든 민족 가운데에 하나님의 보배로운 소유가 되게 하실 것이고, 그들을 이 세상에서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고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출19:5~6). 하지만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버린다면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때부터 아브라함의 후손을 당신의 정혼한 처녀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시내산언약이후에는 당신과 결혼한 신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북이스라엘의 선지자였던 호세아서에 잘 나타나 있다.

 

6.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쪼개진 두 나라를 왜 "오홀라"와 "오홀리바"라고 명했을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민족의 역사를 한 어머니의 밑에서 태어난 두 딸들의 역사라고 표현했다(겔23:2~4). 즉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한 어머니에게 속한 두 딸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때부터 솔로몬왕때 까지의 이스라엘을 한 어머니라고 표현했다. 아브라함은 그 시작이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은 12아들들을 낳는다. 가나안땅에 임한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의 후손들은 거기서 430년을 지내며 자식을 낳게 되는데, 그러자 야곱의 후손은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번성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하여 광야로 이끌고나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군대장관이었던 여호수아를 통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이스라엘 12지파의 기업으로 분배하여 주신다. 그러다가 12지파는 350년간의 사사시대를 겪은 후 주변 나라들처럼 왕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자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최초의 통일이스라엘 왕국의 왕이 탄생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베냐민 지파사람 "사울"이라는 인물이다. 하지만 사울은 교만해졌고 권력유지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도 서슴없이 어기는 사람이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게 되고,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따르는 다윗을 택하여 그에게 통일이스라엘왕국의 제2대왕이 되게 한다. 하지만 다윗의 손자 르호보암 왕 때에, 부친보다 훨씬 더 세금을 많이 부과함에 따라, 지도자 여로보암은 북쪽의 10개의 지파를 이끌어 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북이스라엘"이라는 나라다. 그리고 남겨진 2개의 지파들 곧 베냐민과 유다지파가 솔로몬으로부터 통일조국을 이어받게 되는데, 그것을 후대 사람들은 "남유다"라고 불렀다. 얼마후 북이스라엘의 수도는 "사마리아"로 지명되고, 남유다는 계속해서 "예루살렘"이 된다.

 

7. 북이스라엘은 왜 심판받고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한 어머니의 두 딸인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각각 "오홀라"와 "오홀리바"라고 명하신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그 이름의 뜻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북이스라엘을 지칭하는 "사마리아"를 먼저 보다. 하나님은 왜 북이스라엘을 "오홀라"라고 명하신 것일까? 그것은 북이스라엘에는 그녀가 만든 장막만 있을 뿐 하나님께서 거하실 장막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오홀라"라는 말의 뜻이 "그녀의 장막"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랬다. 여로보암에 의해 탄생한 북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장막"이 없었다. 사실 솔로몬 왕 때에 애굽에 망명했던 여로보암은 애굽에서 살면서 보고 배운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애굽의 우상들"과 "바로의 위대한 권력"이었다. 그는 거기서 애굽인들이 송아지 우상들을 섬기는 모습을 보았고, 대제국을 형성하는 왕의 위엄을 보았다. 그러자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왕 때 여로보암은 북쪽 이스라엘 땅의 두 장소 곧 벧엘과 단에 송아지우상을 세우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애굽에서 보고 섬겼던 송아지신들(아피스와 므네비스)이었던 것이다. 그랬다. 북이스라엘의 초대왕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의 제일 북쪽인 단과 제일 남쪽인 벧엘에 애굽의 우상들을 세워둔 채 그것을 일컬어 "이는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칭했던 것이다(왕상12:28). 그러니 북이스라엘 나라는 단 한 번도 애굽의 침입을 받은 적이 없었다. 이처럼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구심점이 없어진 황량한 벌판 위에 나라가 세워진 것이다. 그러니 북이스라엘 사람 중에 경건한 자는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북이스라엘 9대왕이었던 아합왕이 두로왕의 딸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들여서, 두로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들여오게 되었고, 곧이어 북이스라엘 전체가 우상을 섬기는 국가로 변모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남유다는 어떠했을까? 어쩌면 피장파장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유다를 지칭하는 예루살렘을 일컬어서 "오홀리바"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그 뜻이 "나의 장막이 그녀 안에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이는 예루살렘 안에 하나님의 거처인 성전이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유다 사람도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의 분노를 식게 할 수 없었다. 남유다 백성들은 태양신(니므롯)과 하늘의 황후(세미라미스)와 태양신의 아들(담무스)신을 예루살렘 성전에까지 가져와서 섬겼으며, 앗수르왕이 섬기던 제단을 성전에 자리에 물두멍을 치우고 세운 왕도 있었다.

 

8. 우상숭배의 죄악에 한 가지 더해진 죄는 무엇이었는가?

  그런데 북이스라엘와 남유다는 우상숭배의 죄만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대제국들을 자신의 주군으로 섬긴 죄를 범하였다. 그때 북이스라엘은 "앗수르"를 자신의 주군으로 섬겼으며, 남유다는 처음에는 "앗수르"를 주군으로 섬기다가, 이어서 "바벨론"을 섬기더니, 나중에는 다시 "애굽"을 주군으로 섬기는 우를 범하였던 것이다. 결국 세상 권력을 의지하였던 북이스라엘 나라는 어떻게 되었는가? 자신이 주군으로 섬기던 나라 곧 앗수르왕 살만에셀에게 그만 B.C.722년 멸망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130년 후에는 남유다도 자신이 흠모하던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B.C.586년 멸망을 당하게 된다. 이 부분은 다음 주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9. 나오며

  개인과 한 민족의 흥망성쇠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얼핏 보기에는 주변에 있는 강대국이나 대제국들에게 달려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어찌하든지 주변의 대제국들과 우호친선관계를 유지해보려고 애를 쓴다. 어떤 경우에는 조공과 엄청난 세금을 거둬다가 강대국과 대제국들에게 바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자신이 섬겼던 나라들은 과연 끝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켜준 것일까? 천만의 만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자신을 주군으로 섬겼던 북이스라엘은 앗수르가 멸망을 시키고, 자신을 주군으로 섬겼던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만다. 도움을 받으려고 했던 세력에 의해 오히려 멸망을 받게 된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역사라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은 오직 일편단심으로 하나님만 섬기는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 분 하나님만 섬기는 성도가 진짜 성도이기 때문이다.

 

2019년 08월 28일(수)

정병진목사 


왜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 있을 때에도, 광야에 나와서도, 가나안 땅에 입성해서도 계속해서 우상을 숭배하였다. 왜 그랬을까? 그들이 진짜로 계속해서 우상을 숭배하였던 직접적인 원인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이스라엘 백성을 곧바로 시내산으로 인도하여 거기에서 율법을 주셨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특히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이유는 무어이었을까? 그리고 그때 그들에게 처음으로 율법말씀을 주셨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때 그들을 율법으로 정죄하여 그들에게 벌을 주려고 주신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가? 오늘날에 들어와서도 율법말씀은 우리를 얽어매어 움쭉딸싹을 하지 못하게하는 올무에 불과한 것인가? 에스겔서에는 창세기나 출애굽기에도 나오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들이 종종 나온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다.

2019-07-31(수) 수요기도회
제목: 에스겔강해(08) 이스라엘의 반역과 우상숭배의 여정(1)(겔20:1~32)
https://youtu.be/0o6Zx3qVJOo


1. 들어가며

  에스겔은 다른 많은 선지자들보다도 환상을 많이 본 선지자다. 그런데 환상과 꿈으로 친다면, 사실 다니엘을 따라갈 선지자가 없겠지만 에스겔도 참으로 많은 환상을 본 선지자임에 틀림없다. 특히 에스겔이 보았던 천상에 있는 하나님 보좌의 환상은 구약의그 어떤  선지자들 가운데도 가장 정확하고 온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영광스러운 하늘보좌의 환상을 본 대신에 그는 엄청나게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으나 무려 7년동안은 입이 입천장에 붙어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7년간은 오직 행동으로만 예언해야 했다. 또한 그의 아내가 이유없이 갑작스럽게 죽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울 수도 없었다. 그것은 사랑하던 성읍 예루살렘의 멸망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오늘은 에스겔강해 8번째 시간으로서, 에스겔이 포로로 잡혀온 지 7년째 되는 해 5월 10일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에 관한 말씀(겔20~23장)에서 첫번째 부분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오늘 속으로 우상을 숭배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하나님께 물으러온 이스라엘의 가증스러운 장로들에 대해 살펴볼 것이고, 과거 이스라엘 조상들(애굽시절, 광야시절, 가나안시절)이 저질렀던 우상숭배의 실상을 들여다 볼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과연 우상숭배에 쉽게 물들게 되는지, 그리고 율법이란 어떻게 되어서 유대인들에게 주어지게 되었는지까지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주에는 율법과 안식일의 상관관계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하게 된 두 번째 이유와 산당과의 관계를 살펴볼 것이다.

 

2.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왜 에스겔을 찾아왔는가?(겔20:1~4)

  이스라엘 장로들이 에스겔을 찾아온 것은 에스겔이 포로로 잡혀간 지 7년째 되던 해(B.C.591년) 5월 10일이었다. 이스라엘 장로 여러 사람이 에스겔에게 여호와께 신탁을 받으려고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기 전에 먼저 에스겔에게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 알려주셨다. 한 마디로 그들이 하나님께 묻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에게 이처럼 분노하신 것일까? 사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 찾아온 것인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벌써 이번이 세 번째다. 첫 번째는 에스겔에 포로로 잡혀온 지 6년째 되던 해(B.C.592년) 6월 5일이었다.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묻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행하고 있는 가증스런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행하는 가증스러운 일에 대해서 먼저 환상을 보여주셨다. 그 모습인즉 이스라엘의 대표격인 장로들이 뜰 문의 담벼락에서 분향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스라엘 장로 70명이 각기 향로를 들고서 벽에다가 그려놓은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 앞에서 향을 피우고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겔8:10~11). 그리고 그 뒤에도 정확한 시기는 나오지 않지만 한 번 더 장로들이 에스겔을 찾아왔다.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에게 묻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속내를 에스겔에게 들려주셨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우상들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겔14:4).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들이 섬기는 우상의 수효대로 보응할 것이라고 하셨다(겔14:4). 그런데 그들이 이번에 또 찾아온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살아있는 한 그들에 내게 묻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겔20:3)"고 하셨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가증한 일이 어떠했었는지를 들려주었다.

 

3. 장로들의 방문에 따른 하나님의 즉각적인 대응이 알려주는 놀라운 영적 비밀은 무엇인가?

  장로들은 한 마디로 앞뒤가 다르고 겉과 속이 다른 회칠한 무덤같은 사람들이었다. 신약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들은 세상적으로는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지도자 그룹에 속하겠지만 실제는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는 지도자들이었다. 그러자 그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를 말씀해주셨다.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앞뒤가 다르고 겉과 속이 다른 자들의 기도를 결코 들어주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들에게 자기에게 간구하기를 매우 바라신다. 하지만 범죄자나 악행자의 요구사항까지 다 들어주시는 분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응답은 항상 의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굴절이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4.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 그들은 어떻게 살았는가?(겔20:5~9)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자신 속 마음을 드러내시는 장면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그것의 예로서, 오늘 말씀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말씀도 여기에 해당된다. 그런데 에스겔에 기록된 말씀은 창세기나 출애굽기에는 그 기사가 나오지 않는 부분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는 애굽 땅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찾아가셨다. 그리고 당신을 나타내셨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찾아가서  말씀하기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다(겔20:5). 이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하나님은 약속하신 말씀은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약속을 지키시려 그들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축복의 시작은 아브라함에서부터였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그 어떤 사람보다도 참으로 기뻐하셨다. 왜냐하면 셋의 후손들마저 다들 우상숭배에 빠질 때에 아브라함은 유독 여호와 하나님만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2가지 축복을 약속하셨다. 하나는 그의 자손이 하늘과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해 주겠다고 했다. 또 하나는 가나안 땅을 그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첫 번째의 약속은 예상 외로 애굽땅에서 이미 성취되었다(출1:7). 그 시작은 기근으로 인하여 야곱과 그의 식구 72명이 애굽으로 들어가서 살게 되었는데, 야곱의 자손들은 거기서 430년을 살면서 숫자가 바닷가의 모래처럼 불어났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키지 못하신 약속이 하나 남아 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것을 이루기 위해 그들을 찾아간 것이다.

  애굽에 찾아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눈의 눈을 끄는 가증한 것들을 버리라고 명령하셨다(겔20:a). 그리고 애굽의 우상들을 숭배함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라고 하셨다(겔20:7b). 하지만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눈을 끄는 바 가증한 것들을 버리지 아니하였고, 애굽의 우상들을 떠나지 아니했다(겔20:7~8). 그때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애굽에 있는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고, 레위기 18장에 읽어보면 애굽의 가증한 풍속 즉 근신상간, 음행, 간음, 동성애, 수간, 인신제사를 따르지 말라고 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노하셨다. 그래서 애굽 땅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없애버리시겠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애굽의 신들을 심판하신 뒤에(민33:4), 애굽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광야로 데려가셨다. 왜 그러셨는가? 그 이유는 이방나라의 눈 앞에서 신실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겔20:9). 그랬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킨 것은 애굽에 있는 200만명(장정만 60만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쌍해서도 아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들어서도 아니었다. 사실 그들이 하나님께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셔서 한 번 말씀하시면 그것을 성취하시는 여호와이심을 그들로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5. 사람이 우상을 숭배하게 되는 직접적인 이유들은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 광야에 나왔을 때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들은 왜 애굽의 신들과 가나안의 신들을 숭배하게 되었을까? 결론적으로 그것에 대한 직접적인 이유를 보면 첫째로, 그들의 눈에 그렇게 행하는 것이 더 좋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들이 다 애굽의 신들에게 끌렸던 것이다(겔20:7~8). 이러한 사실은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 이방신을 숭배하는 이방인들의 행위는 훨씬 더 멋있게 보였고 좋아보였던 것이다. 그러자 이방신 숭배를 들여온 것이다. 그리고 둘째, 산당에서 이방신들을 섬기듯 섬기는 것이 훨씬 더 쉬웠고 편리해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솔로몬의 성전건축이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기 산당(높은 산)에 가서 제사를 드리었다. 하지만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산당에서 제사드리지 말라고 하셨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성전으로 와서 경배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는 상당히 번거로웠고 귀찮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동안에 해왔던 것들은 산당제사였다. 그들은 자기들 살고 있는 지역의 가까이 있는 높은 산(바마)에 올라갔다. 그리고 거기서 이방신들을 위해 제사드리던 제사를 사용하게 되었고, 거기서 향을 살랐으며, 음식을 차려놓고 빌었다. 그런데 그것은 멀리 떨어진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행하는 것보다는 훨신 더 쉬웠고 편리했다. 그러나 산당제사를 물리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가나안 땅에서의 우상숭배까지를 다루게 될 다음 주 강해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6. 광야에 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행했는가?

  그렇다. 초자연적인 역사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로 나왔을 때에는 어떻게 행했는가? 그들은 애굽에서 섬기던 신을 버리고 가증한 일을 버렸는가? 전혀 아니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의 상황을 간파하시고 그들의 우상숭배를 막으시고 더이상 그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하지 않도록 그들을 위한 조치로서 "율법" 말씀을 주셨다. 고로 율법이란 우상숭배를 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미리 알려줌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배려였다. 그리고 애굽의 가증한 풍속을 따라가면 안 된다는 것을 미리 알려준 것이었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것을 준행하면 그것으로 인하여 생명을 얻게 하는 좋은 법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임하였다. 그렇다. 처음에 율법은 결코 사람을 정죄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광야에 나온 출애굽 1세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준행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을 율례(의식법들)를 주며, 내 규례(재판법들)를 알게 하였고, 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들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겔20: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애굽 1세대들은 주님의 말씀을 대놓고 거역하고 있었다. 그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반역의 봉기를 올렸고, 율법을 준행하지 않았고 또한 그것을 멸시하였다. 그리고 안식일들의 율례마저 크게 더럽혔다. 그러자 또다시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 쏟아 그들을 다 죽이려고 생각하셨다. 하지만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달리 생각하시고는 곧 이방아나라들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그것을 광야에서 아주 없애지는 아니하였던 것이다.

 

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말씀을 주셨던 본래적인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말씀을 주셨던 본래적인 의도를 생각해본다. 사실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려고 주신 법이 아니라 살리려는 법이요,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올무로서 주신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을 자들을 저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해 주어진 법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원래는 정말 좋은 것이었다. 그것은 복을 주기 위함이었지 결코 저주을 주기 위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이 악해져서 더 많은 죄를 지으려고 하니, 율법은 그들이 지키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세도 자신의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출애굽 2세대들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근본적인 목적을 정확히 설명해주었다. 그것은 놀랍기만 하다.

신30:11-14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계명)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그렇다. 율법은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저주를 받지 않고 복을 받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주신 법이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늘 입술에서 그 율법을 떠나지 않게 하면 얼마든지 지킬 수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우상을 숭배하려고 생각하고 있고, 이웃에게 해를 끼치려는 마음을 가지고고 있는 상태에서 율법말씀을 지키려 하면, 율법은 자기에게 매주 거추장스러운 것이요, 자기자신을를 정죄하는 법이며, 자기자신을 매우 힘들게 하는 법이라고 느껴진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도 율법에 대한 관점을 한 번쯤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율법이 그를 얽매는 올무처럼 작용하고 있다면, 그는 필히 죄를 지으려는 사람이거나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율법은 그렇게 하려고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더러 저주받지 않게 하려고 미리 일러준 법으로서, 율법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도 고맙고 소중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8. 나오며

  사람이 자기 속에 딴 마음을 품고 주님께 찾아오면 주님은 그를 잘 만나주시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자가 주님께 나올 때 그를 만나주는 것이다. 그렇다. 신앙에도 지조가 필요하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으로 애굽에 들어간 자들은 신앙의 지조를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우상을 만들어 섬겼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만 없었더라면 아마도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없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약속을 하셨으면 그것을 신실히 지키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고자 초자연적으로 우상을 숭배하던 히브리인들을 광야로 이끌었다. 그리고 거기서 저주가 어떻게 자기에게 나타날 수 있는지를 알게 하고, 그들이 지키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율법말씀을 주셨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애굽의 우상들과 악한 습성들을 버리지 않았다. 결국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땅을 정복하고 각 지파별로 그 땅을 분배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이번에 이스라엘 민족은 이제 가나안 땅의 우상을 숭배하고 그 풍속을 좇아 행하기이 바빴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길이길이 참으셨다. 무려 800년이나 말이다. 결국 남유다 14대 므낫세왕의 통치와 더불어 시작된 우상숭배와 가증한 행위들은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왕 때에 한층더 심화되었다. 그러자 이제는 끝내시겠다고 결정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증스러운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주님께 나아와서 묻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결코 듣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렘11:10~11). 얼마나 그들이 앞뒤가 다른 삶을 살았으면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2019년 7월 31일(수)

정병진목사 


왜 에스겔은 부름받고 난 후 자신의 입을 열어 말로써 예언하지 못했는가?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면서 그는 왜 외치지 못했는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에스겔에게는 행동예언을 많이 시키셨다. 그렇다면 그가 했던 행위예언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들이었는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미 작정하신 일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오늘날에 들어와서도 하나님께서는 왜 죄를 지은 자들을 무조건 용서해주지 아니하시는 것인가? 또한 과연 하나님의 인내에도 끝이 있는 것인가? 그리고 심판의 때가 가까웠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내리는 징계의 도구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구약시대에 내렸던 심판의 도구들과 오늘날 내리시는 심판의 도구들에는 어떤 변화가 있는가? 이러한 놀라운 비밀들이 오늘 말씀 속에 들어 있다.

2019-07-24(수) 수요기도회
제목: 에스겔강해(07) 에스겔의 행동예언들과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들(겔4:1~5:17)
https://youtu.be/ek1kRY8Z7Fg


1. 들어가며

  에스겔은 예레미야와 거의 동시대에 예언했던 인물이다. 예레미야가 비록 에스겔보다 25살 나이 많은 예언자이지만,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심판을 예언하고 있을 때에, 바벨론에서는 에스겔 선지자가 남유다의 포로민들을 향하여 예언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에스겔은 처음 7년동안은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혀를 입천장에 붙혀놓았기 때문이다(겔3:26). 그리고 2년이 지난후부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행동예언을 하게 했다(겔4:1~5:4). 그래서 에스겔은 비록 말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장차 예루살렘과 남유다를 어떻게 처리하실 것인가를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에스겔의 초기사역 가운데 있었던 4가지의 행동예언들(겔4:1~5:4)예루살렘과 남유다에 관한 심판의 도구들(겔5:5~17)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지난 주에 미쳐 다 끝마치지 못했던 에스겔의 소명 중에서 "이스라엘의 파숫꾼으로 세워진 에스겔(겔3:16~21)"에 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2.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움받았던 에스겔의 사명은 어떤 것이었는가?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다(겔3:17). 그렇다면, 에스겔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말해야 했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들을 향해 외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파수꾼으로 세워질 때에는 말 자체를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혀를 입천장에 붙여놓았기 때문이다(겔3:26). 그래서 에스겔은 행동으로 그들에게 예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7년후 남유다가 멸망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말할 수 있도록 입을 열어주셨다(겔33:21~22).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하여 예언할 수 있었다. 이때도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남유다의 파수꾼으로 세우신다고 또한 말씀하셨다(겔33:2~4).

  그렇다면, 파수꾼은 어떠한 사람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성의 높은 망대에 올라가 적군이 자기의 성을 침입하러 오는지를 살피다가 적군이 오는 것을 보면 제일 처음으로 성 사람들을 향하여 경고의 나팔을 부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데 만약 파수꾼의 경고의 나팔을 듣고도 성 사람들이 성을 방어하지 못해서 해가 되는 경우, 파수꾼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파수꾼이 졸았는지 해서 경고의 나팔을 불지 않았는데, 적군이 침입해 손해를 입게 되었다면 파수꾼은 그 책임을 전부다 감당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파수꾼"이란 남들보다 먼저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알게 된 정보를 전달해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래서 파수꾼이다. 왜냐하면 어떤 존재가 진정 하나님인지, 그리고 인간의 상태는 지금 어떤 상태에 빠져 있는지, 또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먼저 알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며,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결코 자범죄들이 사해지지 않으며, 회개를 할 때에라야 예수님의 피로 자신의 죄가 사함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만약 우리가 그러한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파수꾼으로서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파수꾼이 파수꾼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을 때에 다른 사람들이 입을 피해를 고스란히 그에게서 찾겠다고 하셨다(겔3:17~18).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먼저 진리를 알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러한 진리를 전해주어야 한다. 그가 듣든지 아니 듣든지는 그가 결정할 일이기 때문이다.  

 

3. 에스겔은 왜 말로 예언하지 못하고 행동으로 예언해야 했는가?

  남유다의 파수꾼으로 부름받았던 에스겔은 하나님으로부터 행동예언들을 전달받는다. 하지만 에스겔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행동예언들은 결코 쉬운 행동들이 아니었다. 어떤 것은 참으로 곤욕스러운 일이었고, 어떤 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도 있었다. 아울러 어찌 보면 이상한 행동처럼 보이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했다.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들을 행동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입술로 벌려 말로 예언하지 않고, 행동으로밖에 예언하게 된 이유첫째로, 그의 혀가 입천장에 붙어 있어써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요(겔3:26), 둘째로, 남유다의 흥망성쇠는 이미 파멸로 기울어져 있었고, 도무지 되돌이킬 수 없을 만큼이었기 때문이다(겔7:2~4). 그러나 셋째로,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아시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멸망을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심을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함도 들어 있었다(겔2:5).

 

4. 에스겔이 보여준 초기의 4가지 행동예언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는가?

  그렇다면 에스겔이 보여준 초기의 행동예언들은 어떤 것이었으며 그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고 있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앞으로 5년 뒤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것인데, 그때에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하여 안에 있는 자의 1/3이 죽게 될 것이며, 또한 1/3은 쳐들어온 바벨론의 군대의 칼날에 죽게 될 것이고, 마지막으로 나머지 1/3은 포로로 잡혀가거나 잡혀가다가 또한 칼날에 죽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제 4가지 행동예언들을 살펴보자.

  첫째, 토판그림제작 행동예언을 살펴보자(겔4:1~3).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토판을 제작한 후 거기에 예루살렘성을 그려놓고, 그것에 포위망을 만든 후 그것을 향하여 사다리를 세우고, 토성을 쌓고, 진을 치고, 공성퇴를 둘러 세워놓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와 예루살렘 성 사이에 철판을 세워 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싸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장차 바벨론 군대가 와서 예루살렘성을 포위하고 공격하는 모양을 그대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둘째, 좌우편 모로 눕기 행동예언을 살펴보자(겔4:4~8). 하나님께서는 이제 모로 누워있되 움직이지 말고 왼쪽으로 북쪽을 향해 390일간 누워있고, 이어서 40일간 오른쪽으로 남쪽을 향하여 누워 있으라고 하셨다. 이는 그로 하여금 하루를 일년으로 계산하여,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죄악을 짊어지는 행동이라고 가르쳐주셨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이 돌아오기를 390년동안 기다리셨고, 남유다가 돌아오기를 40년간을 기다리셨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끝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돌아오지 않았다.

  셋째, 혼합곡식빵 취식 행동예언을 살펴보자(겔4:9~17). 이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더러 장차 예루살렘이 바벨론군대에 의해 포위당한채 390일동안 있게 될 때 성안에서 발생할 상황을 그대로 재현해 보게 하셨다. 그것은 주로 먹기에 좋은 곡물인 밀과 보리와 더불어 먹기가 좋지 않는 곡물인 콩과 조와 귀리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고 그것으로 떡을 만들어 먹되, 390일을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그때 음식물은 하루에 20세겔씩만 먹고, 물은 1/6 힌 만 마시라고 하셨다. 이것은 먹을 것이 없어서 사람이 먹지 못할 곡식까지 먹게 될 것이며, 물도 마시지 어려운 올 것을 예언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그 떡을 인분 불에 구워먹으라고 하셨다. 사실 인분(사람의 똥)은 부정한 것으로서(신23:12~19), 결코 진영 가까이 두면 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것으로 불을 피워먹으라고 한 것은 땔감이 없어져서 결국 사람의 똥을 말려 그것으로 땔감을 사용할 것임을 예언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에스겔은 제사장이었기에 그것은 부정한 것에 접촉하는 일이라며 하나님께 말씀드렸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인분 대신에 쇠똥을 사용하도록 허락해주셨다.

  넷째, 터럭 분산 처리 행동예언을 살펴보자(겔5:1~4). 하나님께서는 날카로운 칼을 가져다가 이발사의 칼로 삼아서 자신의 머리털과 수염을 깍은 뒤에 저울로 달아서 그것을 3등분으로 나누라고 하셨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읍이 에워사는 날들이 되면, 3가지로 터럭을 처리하라고 하셨다. 1/3은 성읍 안에서 불사를 것이고, 1/3은 성읍 주위에서 칼로 치고, 1/3은 바람에 흩날리라고 하셨다. 이는 예루살렘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1/3은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3/1은 바벨론군대의 칼날에 죽는 것이었고, 1/3은 포로로 잡혀간다는 뜻이었다(겔5:12, 7:15).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에스겔더러 4가지 행동예언을 하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상숭배와 가증한 일을 회개하지 않은 예루살렘 성을 파괴할 것이며, 비록 약속의 자손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 엄중한 심판을 집행하실 것을 미리 알게 하셨다.

 

5. 하나님께서 징벌로 사용하는 4가지 도구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예루살렘 성을 파괴하며 그 성 주민들에게 심판을 집행하시는지를 좀 더 깊게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과 그 성 주민들에게 심판을 행하는데 사용하신 도구들은 크게 4가지였다. 그것은 "기근"과 "전염병" 그리고 "사나운 짐승"과 "칼(전쟁)"이었다(겔5:17). 이 중에서 자연적인 재앙으로는 "기근"과 "전염병"과 "사나운 짐승"이 여기에 속하며, 인위적인 재앙으로는 "칼"(전쟁)이 여기에 속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사람과 민족을 치실 때에 사용하는 방법에는, 첫째, 자연을 파괴하심으로 심판하는 방식이 있고, 둘째, 사람을 이용하여 파괴하는 방식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독특한 심판방법을 한 가지 더 본다. 그것은 "사나운 짐승"의 출몰과 공격이다. 당시에 그것은 하이에나나 자칼, 곰이나 사자같은 맹수들의 공격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먹을 것이 없으니 맹수들이 사람까지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도 공생애 가운데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즉 종말의 징조로서,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을 언급하신 것이다(눅21:10~11).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불어닥치는 이러한 4가지 재앙들을 볼 때,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고 빨리 회개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언급하실 때에,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다가 "짐승"을 언급하시는데, 이때의 언급된 "짐승"은 맹수를 가리키지 않고, 맹수처럼 공격하는 귀신들을 언급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주님은 그것들을 "땅의 짐승들"이라고 하셨다(계6:8). 그렇다. 요한계시록에서 "땅의 짐승들"이란 사나운 맹수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적으로 볼 때에 사탄과 짐승과 거짓선지자로 구성된 귀신들이었던 것이다(계16:13~14).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우상을 경배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귀신의 공격을 허락하실 것이다. 보라. 지금 전 세계가 귀신의 공격으로 인하여 동성애가 창궐하고 있고, 베리칩을 666이라고 이용하고 있으며, 자기의 자식들이 귀신들려 고통받게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모두가 다 자신이 지은 지와 조상들이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아서다. 회개하면 이 모든 귀신의 공격들이 떠나갈 텐데,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고 저주에서 벗어났으니 이런 것들은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다. 이제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여전히 믿는 이들도 불신자와 똑같이 저주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죄를 지어놓고도 회개하지 않아서인 것이다.

 

6. 나오며

  하나님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의 경우를 보라. 예수께서는 초림 때에는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신 사랑의 하나님이셨으나, 다시 오실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을 심판하러 오시는 심판주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실 때에 회개해야 우리는 심판주로 오시는 주님의 얼굴을 보지 않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족속은 너무나 늦었다. 하나님께서 무려 430년을 기다리셨으나 그들이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절대 파괴될 수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던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게 되었고, 예루살렘 주민들은 기근과 전염병에 죽거나, 바벨론 군대의 칼날에 죽게 되었으며, 나머지는 바벨론사람들에게 포로로 잡혀가 이국땅에서 노예로 살 수밖에 없었다. 남유다 백성들의 씨를 말려버린 것이다. 예루살렘이 과연 어떤 성읍이었는가? 남유다의 주민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그들은 예루살렘 성만큼은 절대 파괴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자기들도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의 결과는 참담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자들에게까지 관대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죄는 반드시 심판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우주질서를 유지되며 하나님께서 공의로운 심판을 집행하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죄를 회개하는 일이다. 회개가 우리를 이 땅의 심판과 하늘의 심판으로부터 건져줄 수 있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19년 7월 24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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