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만세전에 어떤 뜻을 품고 계셨을까? 에베소서는 우리의 시간을 천지창조 이전으로 돌려놓는다. 그리고 한 분 하나님께서 장차 행하시고 하시는 일을 그때에 이미 정하셨음을 알려준다. 그것이 바로 에베소서 1장이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이다. 그것은 사람이 창조되거나 타락한 후에 나온 것 아니기에,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만세전 예정론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정론은 에베소서의 사상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그것은 무엇이 문제인가? 이것을 우리가 잘 모르면 이미 얻은 구원이라도 잃어버릴 수가 있다.
20201-11-11(수) 수요기도회
제목: 에베소서강해(04) 성경적인 참된 예정론은 어떤 것인가?(04)(엡1:3~14)
https://youtu.be/bGczvYuP6MI [혹은 https://tv.naver.com/v/16703087 ]

 

1. 들어가며

  에베소서는 회람서신으로서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책일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를 위한 책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에베소서는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다. 말씀이 창세전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교회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베소서를 통하여 교회가 무엇인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가 어떻게 탄생하였으며,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의 위대한 걸작품이고, 관심의 대상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교회는 천사들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던 놀라운 비밀이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에베소서 1장에서는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에 관한 창세전의 계획과 그 목적을 밝히는 위대한 찬양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지난 3시간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살펴보았는데, 특별히 예정론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계획을 따라 교회를 산출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결국 만세전의 예정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이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칼빈의 2중예정과는 어떻게 다르며, 하나님께서 진정 말씀하려고 하는 예정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오늘은 네번째 시간으로서, 하나님의 예정 부분에서 "견인교리"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구원은 영원한 것이며 안전한 것인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2. 하나님의 구원예정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엡1:3~14의 말씀에 따라, 지난 3번의 시간을 통하여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예정이 창세전에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예정은 결코 개인구원예정이 아니었다는 것도 살펴보았다. 즉 하나님께서는 많은 피조물 가운데 특별히 인간을 선택하시어 그들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고 그들을 하늘나라의 기업을 잇게 할 상속자로서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에 보편적으로 알려진 예정론은  에베소서가 말하는 예정론과 다르다. 사실 우리나라에 보편적으로 소개된 예정론은 칼빈의 예정론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개인에 관한 이중구원예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칼빈의 예정론"이란 성부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사람들 중에서 어떤 개인을 각각 예정하셨는데, 어떤 이는 영원한 생명으로 예정하시고, 어떤 이는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하셨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우리(사람들) 중에 어떤 특정한 개인을 구원하기로 창세전에 예정하셨다는 말씀은 단 하나도 없다. 그럼, 어떻게 개인구원예정이 나왔을까? 그것은 구원이 신적 작정으로 시작된다는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칼빈이 이어받아 나온 결과물로서, 그것은 결코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시되 어떤 개인을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하시지 않았으며, 어떤 개인을 만세전에 멸망에 처하기로 예정하지도 않으셨기 때문이다. 에베소서가 말하는 예정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 중에 주님의 구원의 초청을 받아들임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는 자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예정의 대상은 어떤 특정개인이 아니라 사람들 중에 "불특성 다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예정론을 가장 대변해주는 가장 좋은 예가 마태복음 22장에 나온다. 그것은 어떤 왕이 자기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푼 것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말씀이다. 왕은 자신의 아들의 잔칫날이 다가왔을 때에 혼인잔치에 약속된 사람들을 데려오도록 자신의 종드을 보낸다. 하지만 약속했던 사람들은 한사코 사양하고 잔치자리에 오지 않았다. 어떤 한 사람은 밭에 일하러 간다고 가버렸고, 또 한 사람은 사업하러 간다고 가버렸다. 그러자 왕이 대노하였다. 그리고는 혼인잔치는 준비되었지만 초청받은 자는 합당하지 않으니, 사거리 길로 가서 만나는 대로 사람을 혼인잔치에 데려오라고 시킨다. 그러자 그의 종들이 나가 자초지종을 아뢰고 잔치자릿수만큼 사람을 채추게 된다. 이것이 이 비유의 대강스토리다. 그리고 이 비유를 들려주셨던 주님께서 최종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초청함을 받은 자는 많지만, 선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그렇다.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초청하는데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이 있었기에 이스라엘 민족을 우선 초청대상으로 삼으셨다. 하지만 막상 그들에게 초청장을 보냈을 때 그들은 아들의 혼인잔치에 오기를 거부하고 말았다. 그러자 주님은 자리를 이방인들로 하여금 채울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그렇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경륜인 것이다. 이미 초청대상자에 예정되었어도 거부한 자들은 잔치자리를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선 초청 대상은 아니었지만 그 다음으로 이방인들에게 구원받을 기회가 넓게 열려지게 되었다. 구원받을 기회를 유대인이 발로 걷어차버렸기 때문이요, 모든 민족으로 확대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에 따라 이방인에게도 그 기회가 돌아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에 기쁘게 응답하게 된다. 그러자 혼인잔치에 손님이 가득차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예정이란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한 것이 아니라 구원 안으로 초청받았을 때에 그것에 반응하는 자가 예정되어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구원받을 자는 이미 개인별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잔치자리 숫자만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누가 그 자리에 채워질른지에 대하여는 정해진 불변의 작정이 없었던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초청하실 때에 그 초청에 감사함으로 응하는 자가 예정안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개인구원예정과 개인멸망예정을 만세전 예정을 언급하면서, 에서와 야곱의 경우를 들어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에서와 야곱의 경우는 만세전에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한 사건이 결코 아니다. 두 민족이 어떻게 쓰임받을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사라의 입을 통하여, "큰 자(형=에서)가 어린 자(동생=야곱)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신 것 뿐이다. 그러므로 야곱과 에서의 예정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구원예정이 아니라 그들에 관한 사역예정이며, 개인예정이 아니라 두 민족의 쓰임에 관한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세전예정론에 한 번 빠진 자들은 도무지 칼빈의 이중예정론의 영향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한다. 하지만 오늘날 진리를 따라가고자 하는 성도들은 교단교리나 신학자의 말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 일점일획도 빼버리거나 더하지 않는 말씀을 따라가고자 한다. 그것은 유대인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한 구원계획이다. 지금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다 회개하고 믿어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초청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초청에 응하는 자는 구원을 받겠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자는 전능한 하나님일지라도 그들을 구원하시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누구든지 구원으로 초대를 받았다면 그는 즉시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여 구원받는 사람이 되어야할 것이다. 

 

3. 칼빈의 예정론의 5대 교리와 그 핵심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칼빈의 예정론의 핵심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그것은 그가 1559년에 썼던 기독교강요(최종판)를 보면 잘 살펴볼 수 있다. 특별히 기독교강요(최종판) 제3권의 21장부터 24장에 예정론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자 후대의 칼빈의 후예들은 거기에 나온 칼빈의 구원사상을 5가지 교리로 정리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들 그것을 "칼빈의 5대교리"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내 칼빈의 제자였다가 돌아섰던 알미니우스에 의해 칼빈의 예정론이 틀렸다는 것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칼빈의 5대교리를 제대로 한 번 이해하려면, 이것이 생성되었던 과정을 좀 이해하고, 왜 오늘날 칼빈주의가 장로교의 근간이 되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자세한 사항은 전의 에베소서 강해시간(1, 2, 3)에 나와 있으니 그것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오늘은 간략하지만 에베소서 1:3~14에 나오는 말씀을 중심으로, 칼빈의 5대교리를 설명하려고 하는데, 특별히 성경의 견해와 칼빈의 5대교리를 비교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과연 칼빈의 주장이 성경적인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칼빈의 5대교리가 에베소서에서는 순서가 약간 다를 것이이다. 하지만 5대교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떤 것이 먼저 앞선 것이다고 말하기는 조금 곤란하다. 그럼, 칼빈의 후예들은 칼빈의 예정론의 5대교리를 이렇게 정리해서 말했을까? 그것은 "1)전적타락(전적무능력), 2)무조건적인 선택, 3)제한속죄, 4)불가항력적인 은총, 5)성도의 견인"이 그것이다. 그러나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 말씀으로 예정론의 교리를 정리해 간다면,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사..."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것을 가지고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을 하나님의 선택은 "무조건적인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어떤 개인을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무조건적으로 예정하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렇게 개인을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셨다는 말씀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어떤 대상을 정할 때에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그 대상은 어떤 개인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로서, 누구든지 초청하는 구원의 소식을 듣고 반응하여 주님 앞으로 나온 자를 선택하신다는 것이다. 만세전에 구원받기로 선택함을 입은 어떤 개인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피조물인 천사들과 인간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천사가 아닌, 인간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내용은 교회가 탄생할 때까지 비밀로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천사들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것었으며, 그 비밀의 핵심은 결국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하늘의 상속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둘째, 에베소서 1:7절에 의하면, 이번에는 칼빈의 5대교리 중에서 2 가지가 나온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라는 말씀을 통해서는 "불가항력적인 은총"의 교리가 나왔고,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에서는 "제한속죄'라는 교리가 나왔다. 그렇다면, 과연 "불가항력적인 은총"과 "제한속죄"라는 칼빈의 교리는 진정으로 성경에서 나온 것인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아니올시다"이다. "불가항력적인 은총"이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선택된 자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도록 은혜를 베푸시면 그 은혜에 아무도 저항할 수 없다는 교리다. 하지만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파괴되었지만 남아있는 자유로 하나님의 역사를 지금도 거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예수믿어 성령을 받은 자라 할지라도 성령의 소욕을 따라가지 않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판국에 믿지 않는 자들은 어떠하겠는가? 그러므로 주님께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 나아오지 않는 유대인들을 보고 얼마나 안타까워하셨는지 모른다(요5:40,계3:20). 그리고 "제한속죄"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은 성부께서 택한 자들만을 위한 것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누가 구원받을 것인지를 예지예정하셨음으로, 구원받을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한다. 하지만 둘 다 성경적인 견해는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한 속죄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이다(딤전2:4,요일2:2). 다만 사람들이 이것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속죄의 피의 효능을 맛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불가능항력적인 은총을 베풀어주셔야 하는 이유를 인간의 "전적인 타락"에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자신을 구원하는 데에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타락하여 죄인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나,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초청할 때에 그것에 아무것도 반응할 수 없을만큼 타락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을 죄인취급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을 악하다고 정의하며, 선을 전혀 행할 수 없는 무능력한 인간이라고 몰아간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인간이 비록 아담의 범죄로 타락했으나, 선을 전혀 행할 수 없는 것도 아니며, 모든 것이 다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능력으로 죄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시지 않으면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 그래서 인간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시려고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셨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은 예수님의 속죄사역에 절대적으로 기인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전적인 무능력자요 악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인간의 상태를 마12:20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이라고 말이다. 인간은 상한 갈대이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면 언젠가는 꺾여져서 죽을 것이다. 또한 인간은 꺼져가는 등불이기에 그대로 놔두면 언젠가는 꺼져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는 자는 죽어가는 상태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고 구원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4. 성도의 견인교리는 과연 성경적인가?

  그런데 칼빈의 이중예정론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맨 마지막인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다. 이 교리는 한 번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믿음을 갖게 된 자들은 결코 믿음을 상실하지 않을 것이며 끝까지 보존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사람이 한 번 구원을 받았으면 계속해서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즉 한 번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는 결코 멸망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구원은 끝까지 유효하며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 교리가 성경적이며 사실인가? 정말 사람이 한 번 믿음을 가져 구원을 받았으면 구원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발생하지 않는가? 그건 아니다. 이미 믿고 회개하여 구원의 노정에 들어온 자라도 결국 탈락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마7:21~23, 딤전1:19,4:1, 고전9:27, 히6:4~8,4:1,10:26~29, 약2:14,26, 계3:5) 즉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과 야고보장로와 히브리서기자와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러한 예는 엄청 나다. 한 번 영생을 가졌다고 해서 그 영생을 결코 잃어버리지 아니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주의자들은 한 번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여 믿음을 가졌으면 그는 반드시 구원을 얻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한 증거로서 성경에 아주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련성경구절은 거의 대부분 미래형이거나 소망들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말씀중에서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는 성경구절은 역시 요한복음 6:37,39과 요한복음10:28~29의 말씀이다. 오늘은 시간관계상 앞에 나와있는 요한복음 6:37과 39의 말씀만 우선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글성경이나 영어성경은 거의 다 이 말씀을 왜곡하여 번역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번역본들이 헬라어원문과는 다른 번역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중성단수"로 번역해야 할 단어를 "남성단수" 내지는 "남성복수"로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우선 요6:37,39의 말씀을 한글성경으로서 살펴보자.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위의 두 말씀을 한글성경으로만 보면, 아버지께서 당신이 구원하기로 예정한 사람을 예수께로 보내주면 그들이 모두 예수님께로 나아갈 것이며, 그런 자를 예수께서는 결코 내쫓아내지도 아니할 것이며, 그들 중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 구원할 것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그러나 헬라어원문성경은 그러한 말씀이 전혀 아니다. 그렇다면, 헬라어는 어떻게 되어있을까? 그것을 먼저, 요6:37의 말씀을 헬라어에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요6: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모든 것이 나를 향하여 다다를(도착할, arrive)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향하여 오고(come) 있는 이(사람)을 나는 결코 내쫓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에게 도착하고 있는 것과 예수님에게 오고 있는 것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헬라어원문에 의하면, 아버지께서 예수께 주셔서 예수께 도착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어떤 것"(중성, 단수)이다. 그러나 '모든'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기에, 중성 복수적인 의미다. 그런데 대한민국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약 20여종의 성경들은 이 단어를 "중성 단수(~하는 것)"로 번역하지 않고, "남성 단수(~하는 자/~하는 사람)" 내지는 "남성 복수(~하는 자들/~하는 사람들)"로 번역하고 있다. 즉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보내고 있는 것은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예수께 주시는 것은 "어떤 것"으로, 예수님에게 구원받으려고 나아오는 자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구원할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주시는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에는 "아버지의 능력, 아버지의 권세, 아버지의 지혜,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힘" 등의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오역은 요한복음 6:39도 역시 마찬가지다. 한글성경으로 보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던 분(아버지)의 뜻이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으로 마지막날에 그들을 부활시켜 구원하는 것이라고 읽힌다. 하지만 헬라어원문은 그러한 뜻이 아니다. 여기서도 "중성 단수"를 요6:37의 말씀처럼, "남성 단수"로 바꾸어놓았다. 그럼, 헬라어원문은 어떻게 되어있을까?

요6:39 그런데 나를 보내셨던 분의 뜻은 이것입니다. 그가 내게 [이미] 주신 채 있는 모든 것을 내가 그것으로부터 잃지 아니하고 오히려 마지막 날 안에 내가 그것을 단번에 일으켜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렇다.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한 사람을 예수께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것들로서 곧 능력과 권세와 지혜와 사랑 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그것으로 자기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마지막 날에 드러내 보여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가 칼빈주의의 예정론의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번역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성경번역자들의 한계를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구원론의 관점을 흔드는 것이기에, 이것을 그냥 두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시대에 이제는 성경의 원문 그대로 번역하여, 예수님과 사도들이 증언했던 구원론의 관점으로 성경을 다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성경이 그대로 열릴 수가 있는 것이다. 

 

5. 나오며

  칼빈의 예정론은 사실 그의 처음으로 출판했던 기독교강요(초판, 1536년)에는 나오지 않았던 내용이다. 그의 기독교강요 제2판(1539년)부터 들어가기 시작한 예정론은 이제 제4판(최종판, 1559년)에 이르서는 많은 분량(1장에서 4장으로)으로 늘어났고, 그것은 결국 칼빈의 구원론의 핵심을 차지하게 된다. 이는 사람이 믿고 회개하여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만세전의 예정에 따라 구원얻는 것이라고 바꿔치기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나오게 된 배경을 보면 왜 이러한 구원론이 나왔는지 조금은 이해가 간다. 왜냐하면 중세시대가 예수님 말고 다른 것을 구원의 요소로 집어넣어서 잘못 가르쳐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빈은 믿음으로 얻은 구원론을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 예정에 의한 구원론으로 바꾸어놓았다. 그것도 "개인구원예정론"이자, "이중예정론"으로 말이다.  만약 칼빈의 이중개인구원론이 성경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폭군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횡을 우리는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묵인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권리를 인간에게 강요하시는 폭군이 아니시다. 그분처럼 사랑이 많으시고 인애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시다. 그분은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을 행하시는 그러한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분이 스스로 공의를 허물어뜨린다면 하나님은 심판자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의로우셨다. 그러나 사랑도 많으신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과 만세전의 계획을 따라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인간이 모든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로 예정함을 입은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중 어떤 개인이 만세전에 예정함을 입은 것이 아니다. 믿고 회개하는 자의 불특정 다수를 예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라도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 자는 결국 구원에서 탈락될 수도 있다. 구원은 따놓은 당상이 아니라, 두렵고 떨림으로 이뤄가야 하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은 가장 확실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항상 안전하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얼마든지 성령의 음성을 거부하고 회개를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핍박과 죽음 앞에서 얼마든지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과 회개로 일차적인 구원을 이뤘지만 그것을 지키고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내가 믿는 주님을 부인하지 않아야 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무슨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즉시 즉시 회개하여 죄가 나의 구원의 발목을 붙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11월 11일(수)

정병진목사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기로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셨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는 만세전에 어떤 개인은 구원하기로 예정하시고 어떤 개인은 멸망시키리고 예정하셨다는 뜻인가? 대체 하나님께서는 인류에 대해 어떤 구원경륜을 가지고 계셨던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예정론의 입장에서 풀어가고자 한다. 성경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구원상식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2020-10-28(수) 수요기도회
제목: 에베소서강해(02) 성경적인 참된 예정론은 어떤 것인가(02)(엡1:3~14)
https://youtu.be/sT56GJMRv68 [혹은 https://tv.naver.com/v/16444867 ]


 

1. 들어가며

  에베소서는 에베소교회를 포함한 다른 교회들까지 함께 읽혀지도록 쓰여진 회람서신이다. 이는 바울이 보낸 편지에는 각기 이 편지를 받는 교회 내지 목회자에게 대한 상황와 문제가 나오지만, 에베소서는 그러한 것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편지를 바울의 다른 서신과는 좀 더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편지는 모든 교회를 위한 노사도 바울의 간절한 염원과 소원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편지는 빌립보서와 골로새서 그리고 빌레몬서와 더불어 옥중서신으로서, 바울의 말년에 쓰여진 깊이가 있는 서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에베소서 강해 두번째 시간으로서 에베소서 1:3~14에 나오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다룸에 있어서, 예정론과 견주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경륜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인데, 그중에서 성부 하나님의 예정이 가장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에베소서는 어떤 책이며 그 중심주제는 무엇인가?

  에베소서는 어떤 책인가?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목적이 무엇이며,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하여 성취되고 완성되는가를 다루는 책이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유를 통일하는 것이다(엡1:10). 이 일을 이루시고 완성하시고자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셨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이 책을 "교회론" 책이라고도 한다. 교회는 단순한 조직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의 유기체여서 계속해서 성장하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유기체로서, 만유를 그리스도로 통일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에베소서를 통하여 교회에 대하여 일곱 방면을 소개한다. 교회는 이런 것이라고 말이다. 첫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다(엡1:23). 둘째, 교회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탄생한 새 사람이다(엡2:15). 셋째, 교회는 하나님의 왕국의 백성들이다(엡2:19). 넷째, 교회는 하나님의 권속으로서 하나님의 가족이다(엡2:19). 다섯째,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다(엡2:21~22). 여섯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자 그리스도의 아내다(엡5:22~33). 여섯째, 교회는 단체적으로 영적 전쟁을 치룰 전사 곧 투사다(엡6:10~20). 누가 이처럼 풍성하게 교회를 정의할 수 있을까? 바울을 쓰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3. 예정론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의 구원경륜은 어떤 것인가?

  바울은 편지를 시작하면서 인삿말 직후부터 곧바로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예정론의 관점에서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가지셨던 위대한 경륜을 바울은 교회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류에 대한 구원계획을 세우되 혼자 그 일을 행하지 아니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성령께서 오셔서 그것을 유효하게 하신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엡1:3~14에 나오는 하나님의 인류구원을 위한 예정론의 골자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럼 엡1:3~14의 말씀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것은 "그의 은혜의 영광의 찬송을 위하여"라는 구분이 3번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3~6절까지는 성부의 구원경륜이 나오고, 7~12절까지는 성자의 구원경륜이 나오며, 13~14절에는 성령의 구원경륜이 나온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경륜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통하여 시작되고 진행되고 또한 완성될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 맨 앞부분인 엡1:3~6의 말씀은 성부하나님의 구원계획이다. 바울은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인류구원을 위해 언제 어떻게 구원계획을 세우셨는지를 언급한다.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는 인류구원 계획을 당신의 기분 내키는 대로 세운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창설 전에 계획적으로 세우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없는 하나님의 자녀를 낳아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해주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냥 홀로 계시지 않고 사람을 만드려고 했을까?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타락했을 때에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왜 그들을 위해 친히 피조물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값을 담당하신 것일까? 그것을 바울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라고 말한다(엡1:5). 하나님께서 자식을 보시고 그 자식들을 천국에 데려와 영원토록 왕노릇하게 하시려는 것을 기뻐하셨다는 것이다. 그분이 어떤 마음을 지니고 계셨는지는 사실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돕는 배필을 지으실 때 간접적으로 나타내셨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아담이 홀로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표현하셨기 때문이다(창2:18). 그래서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신 것이 바로 "하와"이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라고, 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언급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없으시면 외로우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천국에 데려가시려기쁘신 뜻을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이 땅에서 구원받아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그분이 주시는 기업을 받아 누려야 한다. 

 

4.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란 어떤 것인가?

  바울은 성부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세운 계획이 인간에게는 어떤 성질의 것인지를 다음과 같이 2가지로서 말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인간에서 하늘들에 속한 복을 주시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영적인 복을 주시려는 것이라고 말이다(엡1:3).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하늘들에 속한 복과 영적인 복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복에는 2가지 종류가 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비슷하다. 즉 사람이 받아야할 복에는 육체가 받아야 할 복과 영혼(정확히는 영)이 받아야 복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복을 다 받은 대표적인 사람이 창세기에 나온다. 그 사람은 바로 "아브라함"이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명령을 따라 순종함으로 인하여 이 땅에서 받을 축복과 하늘에서 받을 축복 2가지를 공히 누린 당사자가 되었다. 그럼, 아브라함이 누린 축복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먼저 "육체의 복"이요 "땅의 복"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자손이 번성해 가고 땅을 기업으로 받아 누리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하나 더 복을 추가한다면, 그것은 육체가 건강하게 사는 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사람이 받아야 할 육체의 복이란 자손번성과 땅을 기업으로 상속받는 것과 건강하게 사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을 아브라함이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아브라함은 "영적인 복"도 받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 땅에 속하지 않는 놀라운 복을 받았으니, 그것은 자신이 씨로 말미암아 원수들의 문들을 차지하는 복을 받았기 때문이다(창22:17). 여기서 말하는 "씨"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출생하게 될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이므로(갈3:16), 그분은 창3:15에 이미 약속된 분으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분을 가리킨다. 그분은 누구인가? 그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없이하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리하여 죄없는 예수님을 죽인 사탄마귀는 불법를 저지른 죄로 인하여 그의 머리가 박살나게 되니, 자신이 가진 사망권세를 예수님에게 내주어야 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사망과 질병과 가난과 저주와 무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하늘들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기를 그렇게 바라고 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사람들이 받기를 원했던 하늘들에 속한 3가지의 영적인 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늘이 3가지가 있다는 측면에서 3가지 복인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총 3가지 종류의 하늘이 있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첫째 하늘"이 있고, 해와 달과 수많은 별들이 있는 "둘째 하늘"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천사들이 있는 "셋째 하늘"이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받아야 할 복은 구약시대의 여러 인물들처럼 자손번성과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는 것과 건강하게 사는 것뿐일까?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첫째 하늘에 속한 복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사실 첫째 하늘에도 영적인 복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살지만, 이 땅에도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복이요,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고 그것을 통해 누리는 복을 가리킨다. 그것은 귀신과 천사들의 정체와 속성을 제대로 알아, 죄를 회개함으로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계속해서 천사들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하늘은 비록 공중의 권세잡은 자가 차지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음으로 그들의 권세가 박살나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우리가 죽을 때에 우리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복으로서, 그곳에 들어가 기업으로 땅을 상속받는 것이다. 그런데 셋째 하늘에서 받을 복은육신을 갖고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결정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에서 받게 될 영적인 축복들을 다 받아야 한다. 이것을 사도바울도 원했던 것이다. 

 

5. 예정론의 무조건적인 선택교리와 성경적인 예정론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제는 마지막으로 성부 하나님께서, 곧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구원이 어떤 것인지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만세전에 인류를 구원하시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기를 기뻐하셨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먼저 당신의 자녀가 탄생할 장소를 마련하셨으니 그 장소가 바로 "지구"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지구 중에서도 아담과 하와 살 공간을 만들어주셨으니 그곳이 바로 에덴동산이다. 하지만 인류의 시조인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거짓의 아버지인 사탄마귀의 말을 듣고는 따먹지 말라 했던 선악과를 따먹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의 구원계획에 따라 먼저 그들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어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러주신다. 그리고는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는 아버지의 생명을 성령을 통해 믿는 자들 속에 넣어주심으로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시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사람을 당신의 자녀이자 상속자로 삼으시려 했는지를 살펴보자.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다른 종류로서 당신의 자녀이자 상속자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왜 하나님께서는 굳이 사람(인간)을 선택하신 것인가? 왜 하나님께서는 천사나, 여러 동물들 중에서 그리고 식물들 중에서이나 상속자를 선택하지 아니하셨는가? 그것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고 싶으셨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문제가 아닌가 싶다. 다만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과 그분의 기뻐하시는 뜻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할 것만 가질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무조적인 선택"이라는 말이 나온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타락이나 불순종에 상관없이 만세전에 인간을 당신의 자녀로 낳으실 것과 그들로 하여금 하늘나라를 상속받게 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불순종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온 우주만물 가운데서 인간을 당신의 상속자로 선택하셨다고 할 수 있다. 고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이란 온 우주만믈을 창조하신 이의 주권에 따라 우리 인간이 하늘의 상속자로 선택되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오늘날 "무조건적이 선택"교리는 성경말씀에서 너무나 많이 벗어나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이 교리가 많은 피조물들 가운데 인류가 선택되어졌다는 선택교리로 알려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 개개인을 선택하셨다는 교리로 둔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생명으로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은 영원한 사망으로 예정하셨다고 교리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다. 그것은 예정론을 해석해도 한참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무조건적인 선택교리는 인류 개개인을 위한 하나님의 선택예정으로 고착화되어버렸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전형적인 폭군이자, 편애하시는 분이요 또한 불공평한 분으로 낙인찍혀가고 있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선택교리를, 어떤 개인이 이 땅에서 생겨나기도 전에 그의 운명을 하나님이 미리 결정하신 것이라고 풀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이란 하나님께서 온 우주만물 가운데 인간을 당신의 상속자로 선택하셨음을 뜻하는 것이지, 결코 인간 개개인 중에서 어떤 사람은 천국으로, 어떤 사람은 지옥으로 보낼 것은 예정하시고 선택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예정교리는 하나님을 절대 폭군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선택은 언제나 선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러한 선택에 관해 왈가불가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교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단 한 구절에서도 하나님께서 누구는 구원으로 선택하시고 누구는 멸망으로 선택하셨다는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혹 인간에 관한 어떤 선택이 있다면 그것은 전부다 개인 사역에 관한 예정인 것이지 개인 구원 예정은 없기 때문이다. 

 

6. 나오며

 우리는 에베소서 1:3~14의 말씀을 통하여 만세전부터 세워놓은 하나님 아버지의 인간구원계획을 살펴볼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셨으며 지금도 구원하고 계신다. 그리고 오순절 이후부터는 성령께서 오셔서 그것을 보증해주시고 있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됨을 인치시고 있으시다. 인류구원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리고 성령께서도 함께 일하시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도 황송한 은혜란 말인가? 벌레만도 못한 몹쓸 우리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이 행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행하셨다. 그만큼 우리는 사랑하신 것이다. 그만큼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리 큰 사랑을 베푸시려고 해도 우리가 하나님을 계속 거절하고 손절한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기 대문에 결국 우리는 자신의 행위를 따라 심판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한 구원경륜과 예정섭리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내미시는 사랑의 손길을 꼭 붙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구원을 위해 희생하신 그분의 사랑을 찬양하고 선포하고 또한 널리 알려야 알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지으시고 우리 인간구원을 위해 직접 희생을 치르신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감사하는 가장 중요한 반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20년 10월 28일(수)

정병진목사

 

에베소서는 대체 어떤 책인가? 무엇 때문에 사도바울은 이 편지를 써 보냈던 것인가? 이 편지를 받는 대상은 에베소교회인가 아니면 소아시아 전체 교회인가? 이 책의 핵심주제는 무엇이며, 사도바울은 그 주제를 어떻게 펼쳐나가고 있는가? 각 장에 등장하는 소제는 대체 무엇인가? 한 마디로, 에베소서는 만세전의 하나님의 구원경륜이 무엇인가를 소개해주는 책이며, 그 끝이 교회를 향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책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정 바라시는 교회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오늘 이 에베소서의 첫 시간을 통해 에베소서를 전체를 한 번 들여다보자. 그리고 이것을 통해 무엇을 기대하면서 이 책을 읽고 공부할 것인지를 살펴보자.

2020-10-21(수) 수요기도회
제목: 에베소서강해(01) 성경적인 참된 예정론은 어떤 것인가?(엡 1:1~14 )
https://youtu.be/MvijWYcuR1I  [혹은 https://tv.naver.com/v/16336148  ]

 

 

1. 들어가며

  에베소서는 어떤 책인가? 에베소서는 사도바울의 12개 서신서들 가운데 가장 심오한 책이며, 스펙트럼이 가장 넓은 책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에베소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사도행전의 기록을 통하여 에베소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에 개척했던 교회로서, 3차전도여행 때에 본격적으로 세워진 교회로서, 적어도 2년 많게는 3년동안 바울이 활동하여 세운 교회로 알고 있다. 그런데 바울이 4차전도여행(로마여행) 때쯤 즉 A.D.61~63년경 로마감옥에서 여러 교회들에게 보낼 편지들과 함께 썼던 이 에베소서 편지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엡6:21, 골4:7, 몬1:1). 그래서 흔힌들 에베소서와 더불어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의 편지를 합쳐서 바울의 "옥중서신'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제 오늘 이 시간부터 신약성경 가운데 가장 심오한 책이라고 불리는 에베소서를 공부해볼 것이다. 아무쪼록 이 에베소서를 통하여, 지혜와 계시의 영의 충만케 되어 하나님께서 이 에베소서를 통해 주시고자 하는 모든 축복이 더욱 많아지기를 기대해본다. 특별히 오늘은 에베소서강해 첫시간으로서, 에베소서의 대략적인 개요 설명과 아울러 에베소서의 각장의 내용 그리고 에베소서의 기록목적 및 에베소서 1:1~2에 나오는 머릿말과 그리고 1:3~14에 나오는 예정론의 위치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2. 에베소서는 무엇을 말해주는 책인가?

  에베소서가 무슨 책인가 하고 물었을 때 사람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분석을 통해서 에베소서는 이러이런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일컬어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 책이라고 말하고, 골로새서를 "그리스도론" 책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에베소서는 어떤 별명이 붙어 있을까?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 책을 "교회론"책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신약성경 가운데 에베소서가 가장 많이 교회의 여러 방면들(적어도 7가지 방면들)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더 큰 그림을 놓칠 수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의 책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에베소서는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가지진 그분의 기뻐하신 뜻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를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를 산출하는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죄인인 인류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소개해주는 책이 에베소인 것이다.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소개해주는 책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경륜의 마지막 꽃은 역시 "교회"다. 하나님의 구원경륜은 결국 교회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의 결과로 나타난 교회가 어떤 성격을 지녔으며, 어떤 역할을 하는 존재인지를 소개해준다. 그 과정에서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가지셨던 작정을 우리에게 알려주는데 그것을 우리는 흔히 "예정론(엡1:3~14)"이라고 부른다. 오늘은 첫 날인지라 에베소서의 각 장의 내용을 파악해봄으로써, 에베소서의 주제가 과연 무엇인지, 교회를 무엇이라고 정의해놓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3. 에베소서의 각 장은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교회는 어떤 방면이 있는가?

  에베소는 어떤 목적으로 기록되었는가? 에베소서는 사실 수신자가 누군지 분명하지 않다. 머릿말에 나오는 "에베소 [안]에 있는"이라는 말도 권위있는 사본에는 들어있지 않다. 그리고 끝맺는 말의 어디에도 이 서신이 에베소 교회를 위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 편지를 에베소교회에게 보낸 것이라고 하지만, 소아시아에 있는 지역 교회들의 회람용 서신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 편지을 받는 교회에게 어떤 문제가 생겨서 보낸 편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의 대부분의 편지는 해당교회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보낸 것들이다. 하지만 에베소서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에베소서의 내용은 광대하고 또한 심오하다. 각 장마다 아주 독특한 표현들과 감동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구절들로 가득하다. 에베소서 1장에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에 있어서 예정론에 관한 말씀들과 지혜와 계시의 영을 소개하고 있고, 더불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로 구원하여서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만드셨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오신 화평의 제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교회가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시민이 되었으며 건축물이 되고 있다고 소개한다. 그리고 에베소서 3장에는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를 소개하는데, 이는 이방인들이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복음 안에서 공동상속자가 되고 공동지체가 되며 공동약속참여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에베소서 4장에서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하나됨을 아주 많이 강조한다. 성령도 주님도 하나님과 하나라고 말이다. 그리고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을 교회의 5중직분(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러한 직분을 교회에 주심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온전하게 세우기 위함이며, 온전함의 분량의 표준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라고 말한다. 즉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까지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2장에서 소개했던 "새 사람"에 대한 계시를 더 확장시키는데, 그것은 교회가 옛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에베소서 5장에서는 삶에서 언어생활을 조심해야 할 것과 죄를 짓는 자는 결국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지 못한다는 것을 경고한다. 그러므로 술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아내와 남편에 관한 지침을 주면서 그것이 곧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 즉 신부인 교회와 신랑인 그리스도의 관계와 같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끝으로 에베소서 6장에서는 자녀들과 종들과 상전들에 관하여 생활지침을 내려주지만, 교회는 악한 영들과 싸움에서 승리해야 할 전사가 되어야 하며,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여 복음전파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리고 에베소서는 4장을 제외하고는 각 장마다 교회가 어떤 것인지를 다른 낱말로 소개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편지가 "교회론"에 관한 심오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베소서의 각 장에서 바울은 교회를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그것은 크게 7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자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라고 소개한다(엡1:22). 교회는 그리스도의 체현임과 동시에 그분이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둘째, 교회는 "새 사람"이라고 소개한다(엡2:15).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새로운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가진 단체적인 새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셋째, 교회는 "하나님의 시민" 혹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소개한다(엡2:19). 여기서 교회를 하나님의 시민 혹은 백성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그들의 왕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니 교회는 왕국시민인 셈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로서 왕국을 통치하는 이로서, 교회는 그분의 통치를 받는 시민이자 백성이라는 것이다. 넷째, 교회는 "하나님의 권속(가족)"이라고 소개한다(엡2:19). 여기서 교회를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칭하는 것은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교회는 "하나님이 거할 처소"로 소개한다(엠2:21). 교회는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이자 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집은 개인집이 아니라 우주적으로 거대한 집이다. 여섯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자 "그리스도의 아내"로 소개한다. 교회를 하나님의 권속이자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소개하는 것에 비해, 다섯번째 소개는 그리스도와 관련지어 소개하는데, 이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아내"라는 것이다(엡5:22~33). 그러니 그리스도는 교회의 신랑이나 남편인 셈이 된다. 마지막으로 여섯째, 교회는 "전사, 투사"라고 소개한다(엡6:10~20). 교회를 최종적으로 악한 날에 악한 영들과 싸우는 영적 전쟁을 치러서 승리해야할 투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4. 에베소서를 비롯한 사도바울의 모든 서신에서 인삿말에는 왜 성령님이 등장하지 아니하는가?

  지금까지 이 책의 대략적인 소개를 했다. 이제부터는 각론에 들어가서 이 책의 머릿말로 가보자(엡1:1~2). 사도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도가 되었으며, 이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이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실한 자들인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 그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을 기원한다. 그런데 여기서 "은혜"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가리키며, "평강"이란 죄와 속박에서 벗어난 자들에게 주어진 평안함의 상태를 가리키는데, "은혜"는 주로 이방인들이 사용하던 용어에 해당한다면, "평강"은 샬롬을 기원하는 유대인들이 주로 사용하던 용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편지의 내용에서처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셔서 하나된 교회를 만드셨음을 은근히 드러내려는 것이다.

  그런데 축복의 기원의 주체에 대해서 우리는 한 번쯤 생각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왜 바울은 모든 편지들의 서두에 "은혜와 평강"의 주체를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을 뿐, 거기에 "보혜사 성령"을 생략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울의 삼위일체 하나님과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아주 절묘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사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유일한 하나님이요 그분의 이름은 "여호와"다.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으로 태어났고 그러한 유일신앙관으로 점철되어 있었던 자였다. 그런데 이에게 예수께서 찾아오신 것이다(행9장). 그런데 공생애 기간 중 그분은 당시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냄을 받은 자"이자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이전까지 하나님은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분이셨으나, 이제 한 분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사람이자 아들의 신분으로 드러내심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의 출현으로 인하여 하늘에 계신 한 분 하나님은 "아버지"라 불리게 되었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계신 분은 "아들"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을 입고 오신 아들이신 예수님을 언급하려면 당연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도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을 비롯한 모든 사도들은 하나님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표현하며 또한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동시에 영광과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린다.

  그렇다면 왜 성령님은 빠져 있는가? 그것은 구약시대 때부터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인 성령을 보내시어 계속해서 일해오셨기 때문이다. 다만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그 성령께서 사람 속에 들어가셔서 역사하시는 인격적인 분으로 일하는 패턴을 바꾸셨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여호와께서 일하신 것은 곧 성령의 일하심이었으며, 신약시대에 예수께서 일하신 것은 성령으로 일하심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부활승천하신 후에 사람 속에 내주하실 수 있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으니, 아버지와 아들만 언급해도 그분과 동일하게 역사하셨던 성령님을 언급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한 번도 성령을 은혜와 평강의 주체로 소개하지 않는다. 

 

5. 교회의 출현과 목적에 있어서  예정론은 그것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그렇다면, 교회의 출현과 목적에 있어서 예정론은 교회와 어떤 상관계가 있는 것인가?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1:3~14에 긴 문장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경륜에 대해 예정론을 가지고와서 설명한다. 교회의 출현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의 목적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출현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바(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그의 몸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요약되고 결론지어져야 할 것이라면서, 이 일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이루셨음을 예정론을 빌어서 설명한다. 다시 말해, 예정론이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경륜이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며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실현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표현되는 단체적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많은 사람들의 예정론은 개인구원예정에 그 초점을 맞춰져 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 어떤 특정 개인을 구원하기로 만세전에 계획하셨다는 말씀은 없다. 개인이 교회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의 단체적인 표현으로서, 자기 안에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어야 교회라 불릴 수 있다. 만약 어떤 모임이 교회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그 안에 그리스도가 아니계시면 그것은 교회가 아닌 친교모임이요, 계모임과 같은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단 한 번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통한 구원경륜의 예정을 결코 개인에게 적용하고 있지 않는다. 전부 "우리"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주 이시간에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6. 나오며

  사도바울이 쓴 책 중에 에베소서만큼 깊고도 광대한 책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오순절 마가다락방의 성령강림사건으로 탄생한 교회의 시기를 천지창조 이전으로 옮겨놓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만물이 조성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교회를 만드실 것을 계획하셨다. 이 교회는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도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한 바 되는 거대한 계획이었다. 고로 교회의 탄생계획은 실로 엄청난 역사를 자랑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교회의 출현이 곧 그리스도의 탄생의 목적이기도 하는 것을 보면, 내가 지금 교회의 일원이 되어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가슴이 벅차오른다. 사실 잠시 눈을 돌려 사도바울 뿐만이 아니라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있어서도 교회에 관한 하나님의 지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살펴보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신앙고백 위에 예수께서는 당신의 교회 곧 "내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부활승천 후 60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사도요한에게 나타나, 그분은 이제 인자같은 전능하신 이로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금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여기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지상에 있어서의 완전수인데도, 천국에도 이 숫자의 교회가 놓여 있으니, 우리는 예수께서 얼마나 이 지상에 있는 교회에 지대한 관심과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오른손에는 일곱별들을 쥐고 계셨는데, 이 일곱별들은 일곱교회의 사자(메시지전달자)라고 했으니, 예수께서 얼마나 교회에 관심을 두고 일하고 계시며, 그중에서도 말씀사역자들에게 가장 큰 관심을 갖고 계시는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 교회는 어떤 말씀사역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분량도 동시에 결정된다. 제자가 스승만 같으면 그것이 최고의 영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땅에 주님이 그토록 바라고 소망하던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이제 다시 한 번 돌아볼 때가 되었다. 교회가 교회의 존재목적을 잃고 방황하고 시기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에서 교회의 마지막 모습은 전사였다. 이 세상의 짐승들인 귀신들과 싸움에서 승리하는 투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교회는 귀신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있는가? 이 싸우을 위해 어떤 전투장비를 채비하고 있으며, 그들을 물리칠 무기 곧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만큼 확보하여 무장하고 있는가?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교회가 세워졌다고해서 모든 성도들이 자동으로 다 천국에 쏙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 곧 "이기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교회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살펴보고, 교회가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이 에베소서를 통해 잘 공부해보도록 하자. 

 

2020년 10월 21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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