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어둠의 일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가? 그냥 대충 살면 아니 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우리가 어시간을 사용할 때에 어떻게 사용해야 시간을 구원해 낼 수가 있으며, 성령충만한 삶을 살 수가 있는가? 그 비결이 오늘 말씀 안에 들어 있다.

2021-02-03(수) 수요기도회
제목: 에베소서강해(14) 하나님을 본받는 삶과 성령충만한 삶(엡5:1~2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B-kkaw1cMG4 [혹은 https://tv.naver.com/v/18302404 ] 

 

 

1. 들어가며

  에베소서는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심오한 책일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구원경륜과 예정론이 들어 있으며, 영적 싸움에 관한 놀라운 진리의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여러 번의 시간을 통하여, 새 사람인 교회가 어떤 존재인지를 살펴보았다. 이어서 우리는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인들에게 합당한 삶인지를 살펴보고 있다. 그것은 에베소서 4:1~6:20에 기록된 말씀이다. 그중에서도 오늘은 하나님을 본받는 자의 삶과 성령충만을 받는 방법을 살펴보고자 한다(엡5:1~21). 특히 오늘 말씀 안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놀라운 비밀과 성령충만한 삶이 무엇인지에 관한 진리의 말씀들이 들어 있다. 

 

2. 에베소서의 4장과 5장의 위치는?

  우리는 지난 몇 시간을 통하여 에베소서 4장을 살펴보았다. 에베소서 4장은 에베소서의 후반부(4-6장)의 첫 시작이다. 여기 4:1-16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연합과 성장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4:17-6:20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구성원 각자의 새 생활에 대한 권면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6:21-24은 짤막한 결어 부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에베소서 4장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삶에 대한 교훈들이 듬뿍 들어있는데, 첫째 부분(엡4:1~6)을 통하여 우리는 교회의 구성원들이라면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켜야 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둘째 부분(엡4:7~16)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면서 5가지 직분을 교회에게 주셨으며, 이러한 직분자들로 인하여 성도가 온전케 될 수 있고, 그 목표치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라고 배웠다. 그리고 셋째 부분(엡4:17~24)에서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이전의 생활방식을 따르던 옛사람을 버리고 오직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창죄된 새 사람을 계속해서 입어야 한다고 배웠다. 그리고 넷째 부분(엡4:25~32)에서는 서로 지체가 된 형제자매들은 서로에게 죄를 짓고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이제 오늘은 에베소서 5장을 살펴볼 차례다. 에베소서 5장은 에베소서 5:1~6:20의 말씀 속에 위치해 있다. 그중에서 첫째 부분(엡5:1~14)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본 받는 삶을 살아야 함을 권면하고 있으며, 둘째 부분(엡5:15~21)은 성도로서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꼭 실천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셋째 부분(엡5:22~6:9)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대 이웃관계들 곧 아내와 남편의 관계, 자녀와 아비들의 관계, 종들과 상전들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넷째 부분(엡6:10~20)에서는 성도들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갖추어야할 장비로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언급하고 있다. 그중에서 오늘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본받는 삶(엡5:1~14)과 성도로서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실천사항들(엡5:15~21)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3. 그리스도인들은 왜 더러운 행위를 멀리해야 하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되어야 하는가?

  에베소서 5:1~14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더러운 행위들을 멀리하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이때 사도바울은 에베소 성도들로 하여금 사랑을 받는 자녀들같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다(엡5:1).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성도들을 사랑한 것같이 사랑 안에서 계속해서 걸어갈 것을 권면하였다(엡5:2).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어떻게 성도들을 사랑하셨던 것인가? 그것은 자신을 하나의 예물로서 그리고 하나의 희생제물로서 넘겨주셔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물"이라 함은 피없는 예물들을 가리키고, "제물"이라 함은 피를 가진 제물들을 가리킨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생애를 예물로 하나님께서 드리셨으며, 그분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드리셨다.

  이어서 사도바울은 성도들에게 음행과 불결함과 탐욕을 버리라고 권면한다(엡5:3). 탐욕은 우상숭배하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에베소 성도들이 성령을 모신 자가 되었음에 불구하고, "음행과 불결함과 탐욕"을 버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가? 사도바울은 그런 자들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상속받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엡5:5). 그렇지만 사람들은 헛된 말로 성도들을 속일 것이라고 했다. 만약 그가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혹시 자신이 음행을 저지르거나 불결하고 탐욕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자신의 구원에는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런 이들을 향해 단호하게 경고한다. 그런 자들 위에 하나님으로부터 진노가 내려오고 있으며, 끝내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왕국에서 상속을 가지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엡5:5~6).

  그렇다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왕국)에서 상속을 받지 못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는 들어가겠지만 그곳에서 받을 상속분이 없다는 뜻일까? 그런데 놀라지 말라. 사도바울의 경고는 경고의 수준이 아니다. 왜냐하면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처럼, 음행하는 자와 우상숭배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이다(계21:8). 그러므로 이런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혹 징계는 받을른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진노는 받지 않는다는 자들의 말을 믿지 말라. 아니다. 사도바울은 믿는 이들이라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하는 아들들에게 계속해서 임하고 있다고 언급했기 때문이다(엡5:6). 

 

4.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왕국)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그렇다면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상속받게 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왕국"은 두 개의 왕국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하나의 왕국을 가리키는 것인가? 다시 말해,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들어가게될 하나님의 왕국은 그리스도의 왕국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왕국인가? 성경에는 그리스도가 왕으로 통치하는 왕국이 있다고 말한다(엡5:5, 딤후4:11, 벧후1:11). 하지만 하나님께서 왕으로 통치하는 왕국도 있다고 말한다(마12:28, 21:31, 행14:22, 28:31, 갈5:21). 예를 들어, 스가랴 14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재림하시어 천하의 왕이 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슥14:5,9). 그렇지만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다스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고전15:25,딤후2:12).어떤 것이 맞는 표현인가? 장차 세상이 새롭게 되어 도래할 왕국(나라)은 그리스도의 왕국(나라)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왕국(나라)인가? 그것에 대한 해답은 요한계시록에 있다(계11:15,17). 

계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계11:17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그렇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창조하실 새로운 세상은 "주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다가 가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그리스도로 오신 것이다. 오늘날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은 전혀 다른 존재라고 생각한다. 한 분은 아버지, 한 분은 아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비록 둘의 모습은 다르지만 그분들의 뜻과 속성(본질)은 동일하기 때문에 한 분 하나님이라고 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 분 하나님(엘로힘)께서 구약시대에는 자신을 "여호와"라고 계시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자신을 "예수"라고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만 나올 뿐, "여호와"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사실 구약시대에 알려진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호와"라는 명칭이 있는데, 이 명칭은 원래 "에흐예" 내지는 "아하아[흐]"였다(출3:14). 그런데 "아하야[흐]"라는 이름의 뜻은 "나는 알렙이다(헬라어로 표현하면, 나는 알파이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오셨고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당신 자신을 소개하실 때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끝이라"고 말씀하셨다(계22:13). 이것은 결국 구약시대에 창조의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여호와)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심으로 모든 역사를 마치실 것임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왕국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이신 분"의 왕국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엡5:5을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그 왕국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이신 분의 왕국"이라고 나온다. 즉 "그리스도와 하나님"이라는 문장 앞에 오직 하나의 정관사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왕국"이라는 단어도 복수명사가 아니라 단수로 나온다. 그러므로 엡5:5의 말씀을 직역한다면,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이신 분의 왕국"이라고 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요한계시록 22:1,3에 나오는 하나님의 보좌가 곧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인 것과 같은 이치다. 보좌는 하나로 단수인데 이것을 수식하고 있는 것은 둘로서, 그것은 하나님과 어린양이기 때문이다. 

 

5. 빛의 자녀들이 맺어야 할 열매들은 대체 무엇인가? 

  이제 사도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전에 그들이 어둠에 있을 때에 행하던 행실을 버릴 것을 권면한다. 그리고 이제는 빛의 자녀들처럼 계속해서 걸어갈 것을 권면한다(엡5:8~14). 그렇다면 빛의 자녀들이 걸어가면서 맺어야 할 열매들은 무엇인가? 바울은 빛의 열매를 3가지로 소개하고 있다(엡5:9). 그렇다면, 여기서 "빛"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하나님 내지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빛이시며(요일1:5), 그리스도도 참 빛이자(요1:9) 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8:12). 그러므로 이 빛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결국 그리스도에게 나오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빛의 열매는 "선과 의와 진리"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빛과 반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곧 어둠이다. 그리고 어둠의 열매들이 뒤따라 올 것이다. 이때 "어둠"을 인격화시키면 그것은 어둠의 세상주관자인 마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어둠의 열매들은 "악과 불의와 거짓"이라고 할 수 있다. 사탄은 악한 자(요일3:12,5:18)와 불의한 자이며(욥34:7), 거짓의 아비(요8:44)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빨리 마귀로부터 떠나야 한다. 그래서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않고 빛의 일에 참여해야 한다(엡5:10~11). 왜나하면 그리스도께서 이제 잠자는 자들에게 빛을 비추시고 있기 때문이다(엡5:14)

 

6. 어리석은 자의 삶에서 지혜로운 자의 삶이 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성도가 어둠의 일에 동참하지 않고 빛 안에서 걸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도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행해야 할지 주의하여 자세히 살펴보고 지혜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지혜있는 자같이 해야 한다고 권면하였다(엡5:15).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지혜있는 자가같이 살 수 있는가? 그것을 바울은 다음의 4가지로 언급한다.

  첫째, 세월을 아끼라고 권면한다(엡5:16). 왜냐하면 날들이 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월을 아끼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을 헬라어로 보면, "카이로스를 구속하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카이로스"란 시간은 시간이지만 "크로노스"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을 가리킨다. '크로노스'는 흘러가는 물리적인 시간을 가리킨다. 그런데 '카이로스'의 시간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 의미가 주어지는 시간을 가리킨다. 골로 흘러가는 시간이 진짜 의미 있는 카이로스의 시간로 바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시간 속으로 침투해 들어와야 한다. 그러면 그 순간에는 이 세상에 속한 물리적인 법칙이 중지되며, 하늘에 속한 법칙이 그 시간과 장소에 도래하게 된다. 그러면 이 땅에 속한 물리적인 시간 안으로 하나님의 법칙이 실행되면서, 시간은 물리적인 시간에서 영적인 시간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면 이때에는 물리적인 법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가 통용되는 시간으로 바뀐다. 그러면 기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육체에 속한 자이기는 하나, 우리의 영을 사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시간(카이로스)가 우리에게 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현되기 하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끼라"는 말의 헬라어는 "구속하다. 구원하다. 값주고 되사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사들여 하나님의 시간이 되게 하기 위해서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하나님과 접촉하는 시간을 일부러라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곧 기도하고 말씀듣는 시간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시간 안으로 들어가서 살 수 있고 하나님의 법칙이 통용되는 놀라운 시간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사도바울을 둘째, 주의 뜻의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엡5:17).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뜻 곧 혼의 뜻이 아니라 주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방탕(무질서)이 들어있는 육신을 따라서 술취하지 말고, 오히려 영 안에서  충만케 되어야 한다고 권면한다(엡5:18). 그러면 사람은 영 안에서 무엇으로 충만케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사람이 되시어 인생을 거치고 부활승천하신 그리스도로 충만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부활후에 생명주는 영이 되셨으니(고전15:45), 우리가 영 안에서 충만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으로 충만케 된다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안에 들어오신 그리스도나 성령은 우리가 만질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분이시다. 다만 그분의 움직임을 통하여 우리는 그분이 내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분이 행하는 모든 것들을 확인해 보면 그러한 일들은 다 "살리는 일들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후에 생명주는 영이 되셨기 때문이요, 성령도 생명의 성령이 되셨기 때문이다(고전15:45, 롬8:1~2). 그러므로 성령과 내 영이 하나 된 연합된 영 안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생명주는 영이신 그리스도로 충만케 되는 일이며, 그것은 곧 우리의 삶을 사람을 살리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당신은 사람 살리는 일에 지금도 집중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 사도바울은 사람이 지혜있는 자같이 되려면 말을 더럽고 추한 말을 일절 말하지 말고, 오히려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로 노래하며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권면한다(엡5:19~21). 지혜있는 자는 말을 잘 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자는 서로 복종하는 가운데, 찬양하는 말, 감사하는 일, 살리는 말, 격려하는 말을 해야 한다. 

 

7. 나오며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 태어났다면 그는 어떤 상태가 되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영적으로 어린아기의 상태로 태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가 이제 갖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마치 신앙의 모든 노정을 다 마친 것처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더러 있다. 그는 지금 도움을 받아 성장해야 할 사람인데 불구하고, 자기는 마치 이미 다 성장한 어른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러한 미성숙한 자가 교회의 직분을 맡게 되면 교회는 상당히 시끄러울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은 늘 불평불만하고 성질을 부리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워야 할 지도자는 참으로 영적으로 성숙한 자여야 한다. 그런 자들의 삶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들은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 자신은 과연 영적인 훈련을 기꺼이 받는 자가 되어 성숙한 자로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훈련도 받지 않은 채, 기도도 하지 않고 말씀도 듣지 않는 자인가? 그러면서도 자신은 성숙한 자처럼 행동하고 있는가? 만약 자신이 성숙한 자라고 한다면, 그는 첫째, 자신을 희생하고 있을 것이다. 둘째, 온갖 더러운 행위를 그쳤거나 그치고 있을 것이다. 셋째, 어둠에 속한 일을 벗어버리고 선과 의와 진리만을 붙잡고 가고 있을 것이다. 넷째, 지혜로운 자가 되어서 영 안에서 그리스도를 자신을 충만케 하고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가? 

 

2021년 02월 03일(수)

정병진목사

 

성경적인 예정론은 무엇인가? 에베소서가 일러주는 예정론은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예정론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칼빈이 말했던 예정론은 올바른 것이었는가? 사람은 구원받기로 언제 예정되는가? 만세전인가 이 세상에서인가? 개인구원예정이 성경에 나오는가? 사역예정이 곧 개인구원예정인가? 그래서 오늘은 사도바울이 들려주는 예정론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2020-11-04 수요기도회
제목: 에베소서강해(03)_성경적인 참된 예정론은 어떤 것인가?(03)(엡1:3~1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ez-arByPKNQ [혹은 https://tv.naver.com/v/18186583 ]

 

1. 들어가며

   에베소서는 회람서신으로서 바울이 교회론에 관하여 쓴 책이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교회를 7가지 방면으로 소개하는데, 그 첫번째 정의가 바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 이에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교회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아주 소상하게 밝힌다. 그러므로 이 부분만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에베소서 1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경륜"이라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들이자 상속자로서 예정하셨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의 말씀에 이어서, 오늘은 하나님의 구원경륜과 더불어 하나님의 창세전 예정에 관하여 좀 더 들여다보려고 한다. 과연 칼빈의 후예들이 말했던 바, 칼빈의 예정에 관한 5대교리 곧 "전적타락,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속죄, 불가항력적인 은총, 성도의 견인"이 과연 얼마나 성경적이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늘 동행하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명철함이 이 메시지를 듣는 모든 성도와 함께 하기를 빈다. 

 

2.칼빈의 예정론은 과연 성경적인가?

  칼빈이 말하는 예정론은 흔히들 "이중예정론"이라고 불리운다.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그의 기쁘신 뜻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사람은 영생으로 예정하시고 어떤 사람은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하셨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은 칼빈의 예정론은 그의 생애의 후기에 비로소 발전되어 완성된 것이다. 그가 쓴 기독교강요 초판(1536년)에는 예정론이 들어있지 않다. 그러다가 제2판(1539년)에 비로소 17개의 장 중에서 한 장을 에정이 차지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3판(1543~1550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하지만 그의 기독교강요 최종판이었던 제4판(1559)에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예정론의 분량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총 25장 가운데, 무려 4장(21~24장)이 예정론으로 할애된 것이다.

  하지만 칼빈의 예정론을 들여다보면 사실은 그가 최초로 만들어낸 이론도 아니다. 그것은 중세의 어거스틴이 말했던 구원의 "신적 작정"을 확대해석하여 집대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인간의 멸망(유기)예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4판(1559년) 제21장 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작정이라고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영생으로 예정하며,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를 예정하셨다. 각 사람은 이중의 어느 한 쪽 결말에 이르도록 창조되었으며, 우리는 그를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한다"고 말했다.

  사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에 대해선 분명한 언급들이 있다(행4:28, 롬8:29~30, 고전2:7, 엡1:5,11). 특히 엡1:3~14절에 집중적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정이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정과 칼빈이 말하고 있는 예정이 다르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안타까운 것은 칼빈은 하나님을 폭군이자 잔인한 분으로 만들 수 있는 이중예정론을 들고 나왔다는 점이다. 그것도 불특정다수가 아니라, 어떤 개인을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구원과 멸망으로 예정하셨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예정론이 얼마나 하나님을 폭군 하나님으로 묘사하게 하는지를 알고, 그의 예정론의  위험성을 빨리 간파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예정론을 따라가다보면, 그의 개인멸망예정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고로 누구든지 그의 예정론 사상을 한 번 듣게 되면, 자신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있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자신이 이뤄가야될 구원에 대해 두렵고 떨림으로 나가지 않는다.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구원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자신의 자범죄를 통회자복하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게 되며, 신앙을 하나의 경주로 생각하지도 않게 된다. 

  그런데 칼빈의 이중예정론의 교리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정의 대상을 집단(공동체, 불특정다수)로 보지 않고, 개인으로 끌고가려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누구는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으셨고, 누구는 멸하기로 예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인간이 그것에 결코 항거할 수 없고, 왈가불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선하신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것이므로, 그냥 따르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그릇이 자기를 지으신 토기장이에게 저항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엄청 큰 실수요, 최악의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않고 미리 정하셨다고 정해놓음으로써, 인간에게는 "너희들은 입닥치고 있어"라고 말씀하시는 분으로밖에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구원에 있어서 주권이 절대적으로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속죄사역을 치르지 않았더라면 인간의 그 어떠한 수고나 노력도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문제는 개인의 구원과 이를 위한 하나님의 주권역사가 개인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진행된다고 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단 한 번도 개인을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는 말씀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서 롬9장에 나오는 "야곱과 에서"의 사건을 마치 개인구원예정의 예표인 것처럼 알고 있다. 칼빈이 자신의 개인구원예정론 교리를 만들 때에 롬9장의 야곱과 에서의 사례를 가져다 썼기 때문이다. 그 요지는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당신 뜻대로 야곱은 사랑하셨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과 틀린 진술이다. 왜냐하면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하신 일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큰 자(형인 에서)가 어린 자(동생인 야곱)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만 예언하셨을 뿐, 그들의 구원을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결정하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에서는 섬기는 자로, 야곱은 섬김을 받은 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 뿐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섬기는 자가 되었다고 해서 그는 구원을 못 받고, 섬김을 받는 자라고 해서 그는 꼭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가 남을 위해 많이 일하고 섬긴만큼 그는 천국에서 큰 상을 받게 될 것이다. 이렇듯, 이 땅에서 자신이 종으로 살도록 예정되었다(개인사역예정)는 사실이 구원을 잃게 된다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어떤 사람을 만세전에 영원한 멸망과 영원한 구원으로 예정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25장을 보라. 거기에 보면 에서와 야곱에 대한 기사가 나오는데, 이는 야곱과 에서의 문제는 두 민족간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야곱족속과 에서족속에 관한 예지예정을 이미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역예정 자체가 구원의 당락을 결정하는 것은 절대 아닌 것이다. 누구든지 메시야를 믿고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종이든 자유자든 상관없이, 그가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그리고 그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상관이 없이,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아니라면, 조선시대에 종으로 살던 사람은 한 사람도 구원받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개인구원예정이 성경에 나온다는 칼빈의 주장은 한 마디로 틀린 주장이다. 

 

3. 칼빈이 말하는 "무조건적인 선택"이란 어떤 것인가?

  칼빈은 그의 책인 "가독교강요(1559년)" 제21장~24장에서 창세전의 하나님의 구원예정에 관해 말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주장하는 데에 근거가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다 성경에서 가져온 말씀들을 논리적으로 맞추어 만들었기 때문이다. 굳이 그의 주장을 다섯 가지 항목으로 구분한다면, 다른 신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전적 타락" 내지는 "전적 무능력",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인 은총"이 있는데, 에베소서에서는 엡1:7에 그 근거가 나오며, 그리고 "무조건적인 선택"은 엡1:4절에서 근거가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도의 견인"은 엡2:8~9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칼빈의 예정론의 둘째항목으로서 "무조건적인 선택"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강요(1559년)" 제22장 5절에서 창세전에 성부 하나님께서 개인을 구원하고 유기하는 것에 관하여 절대적인 선택을 하셨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선택은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을 보시고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 즉 공로에 따른 어떤 결정이 아니라,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니 창세전에 그의 공로와는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로 하셨다고 했다. 그러나 칼빈의 이러한 비성경적인 주장을 간파했던 베자의 제자, 알미니우스는 칼빈이 성경에서 이러한 예정교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는 예지선택 혹은 예지선택을 주장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예지의 능력으로 사람의 믿음여부를 조건으로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예정했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성경적인 선택교리라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어떤 개인을 구원과 멸망으로 예정하신 일이 없되, 단 한 건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주님께 나오는 자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 구원을 받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적인 의지로서 일방적으로 결정하신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도록 초청하기는 하지만, 그 초청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구원이 결정되게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택교리에 관한 성경적인 견해는 어떠한가? 그것은 마22장에 나오는 어떤 임금이 자신의 아들을 위한 혼인잔치를 베푼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어떤 임금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베풀었다. 하지만 온다고 약속했던 자들은 한사코 사양하고는 오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주인은 자신의 아들을 위해 잔치에 참여할 예상인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만큼의 음식을 준비하였다. 이제 임금은 자신의 종들을 시켜 사거리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는대로 초청해서 데려오도록 했다. 그러자 종들이 나가서 그러한 사실을 전한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듣고 믿고 따라오는 자들은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차야 할 인원은 차지는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더 멀리 울타리 밖으로 나가서 강권하여 데려다가 혼인잔치의 빈 자리를 채우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혼인잔치에 사람들이 가득찼다. 주인이 생각하는 분량만큼 가득 찬 것이다. 그런데 누가 왔는가를 지켜보려 왕이 들어왔다. 그리고 어떤 친구를 향해 말했다. "친구여, 당신은 어찌하여 [잔치[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와 있느냐?" 그런데 그는 그 예복이 그렇게 중요한지를 잘 몰랐다. 사실 그 친구가 잔치자리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잘나서도 아니었고 권력이 있어서도 아니면 물질이 많아서도 아니었다. 잔치자리에 참여해 달라는 종의 초청소리를 듣고 자원하여 들어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들어올 때 종은 모든 손님에게 흰 옷 한 벌을 나누어주었고 그것을 입으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떤 친구가 그 옷을 소홀히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쫓겨나고 마는데, 그는 밖으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것이 이 비유의 중심이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결론적으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고 하였다. 그렇다.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누구에게든지 열려져 있는 것이다. 누구는 구원하기로 미리 정해놓지 않았다. 다만 잔치잔리에 참석할 사람들로서 부특정다수를 하나님께서 미리 마음에 작정해놓으신 것이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자가 그날 선택함을 입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고관대작이라 할지라도 그가 잔치자리에 참석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결코 잔치자리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적인 예정이다.  

 

4. 칼빈의 말하는 "불가항력적인 은총"과 "제한 속죄"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제는 칼빈의 예정론 가운데 네번째 항목인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제한 속죄'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이 교리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기록하고 있는 엡1:7을 근거로 나온 예정론의 항목들이다(물론 이러한 주장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에베소서 성경적인 근거를 대라고 한다면 이 구절을 댈 수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서, "그분의 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칼빈이 말한 바 "불가항력적인 은혜"란 무엇인가? 여기서 "불가항력적인 은혜"란 하나님께서 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베풀어주실 은총은 그 누구도 거부하거나 저항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사실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강해(1559년)" 제3권 제23장에서 하나님께서 한 번 사람을 구원하기로 정하시면, 인간의 자유의자로서는 결코 그것에 저항할 수 없다고 하였다. 사람의 뜻이 하나님을 저항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사람이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는 어떠한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무리 사랑을 베풀어주시려 해도 인간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마음을 닫아버린다면 하나님께서도 그를 억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의 고집을 강제로 꺾지 않으신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는 칼빈이 말하는 "제한 속죄'에 관해 살펴보자. 그는 "제한 속죄"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택함을 받은 자들만을 위하여 제한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피흘려 죽으신 것은 오직 성부가 선택한 자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의 책 "기독교강요(1559년)" 제22장 7절에  나오는 것으로써, 그는 전세계가 창조주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세상 자체는 예정한대로 자멸하게 그냥 내버려 두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한된 소수만을 저주와 진노와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내어 멸망의 운명을 면하게 하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아버지의 택자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는 어떠한가?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른지도 몰라도,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긍휼과 자비가 없으신 분으로 생각케 만들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온전한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딤전2:4). 그분은 자신을 믿을 자를 위해서만 화목제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요일2:2). 하나님은 칼빈이 말하는 것처럼 쪼잔한 하나님이 아니시다. 주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라도 복음을 듣고 믿어서 회개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5. 칼빈이 말하는 "전적 타락" 혹은 "전적 무능력"이란 어떤 것인가?

  이제는 칼빈이 주장했던 예정론의 첫번째 항목으로서 "전적 타락" 혹은 "전적 무능력"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전적 타락(전적 무능력)"이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되어 있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며, 선을 행하지 않는 무능력의 상태에 빠져 있음을 뜻한다. 하지만 불신자 중에는 하나님을 믿고 싶어서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더러 있으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 중에도 선을 행하는 자는 수두룩하다. 하지만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강요(1559년)" 제23장 3절에서 "사람은 모두가 죄로 더럽혀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가증할 뿐이다"고 하였다. 그래서 인간은 정죄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고로 인간은 영원한 심판으로 사망 안으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죄인이라는 그의 주장은 맞지만, 인간이 구원을 위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주장과 그만한 능력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렇게 인간을 정의하다보면, 인간을 너무나 약하고 무능력한 존재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은 악하며 무능력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주시면 그것에 대해 반응할 정도는 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선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으나, 다만 인간은 아담의 타락이후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는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선한 행위들을 계속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주님이 초청하실 때에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할 수는 있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복음을 듣고 주님 앞으로 나올 수 있는 정도는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타락이란 어떤 것을 뜻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된 본성을 갖고 태어나고 있으며, 그대로 놔두면 죄를 짓다가 사망에 이른다는 뜻인 것이지,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초청까지도 반응할 수 없는 정도는 아닌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처럼 인간은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인 것이다(마12:20). 그대로 놔두면 갈대는 꺾여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꺾인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만지시고 붙들어 주신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 하지만 사람은 있는 그대로 놔두게 되면 곧 껴저버릴 불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불이 이미 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주시고 심지를 간검해주신다면 그는 다시 활활 타오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절대 하나님을 찾을 수 없으며, 선을 행하지도 못하는 절대무능력에 상태에 있다는 것은 과한 해석이다. 다음 주에는 칼빈의 5대교리가 옳다고 주장하는 성경구절이 얼마나 성경에 어긋난 구절이며, 근거가 되지 못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그러면서 반대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예정론에 관련된 성경구절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도 함께 찾아보고 살펴볼 것이다. 

 

6. 성도에게 있어서 바른 성경적인 예정론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고로, 칼빈의 예정론은 성경에서 빗나간 이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칼빈의 예정론과 웨슬리안주의의 원조격인 알미니안주의 비교한 사람이 있다. 그는 밀드레드 와인쿱인데, 그는 자신의 책 "칼빈주의와 웨슬레 신학(생명의 말씀사, 1987, p37)"에서 칼빈의 예정론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교회의 권위에 대항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수호할 논리적인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어거스틴은 그렇게까지는 주장하지 않았지만, 칼빈은 이중예정 중 "멸망으로의 예정"까지 하나님께서 작정하셨다고 말하고 있는데, 와인쿱은 이것마저도 논리적인 발전의 결과이지 결코 성경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예정론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이상의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에,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얻도록 창세전에 예정하셨다. 이는 누구든지 복된 소식을 듣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으며,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도록 예정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회개하고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게 되고 성령의 내주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며,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고로, 개인구원예정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다만 누구든지 자신의 불신앙과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에 하나님의 예정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7. 나오며

  칼빈은 기독교역사에 위대한 인물로 기억될만한 유명한 변증가다. 특히 그는 기독교강요를 써서 사도바울과 어거스틴에 이은 최고의 신학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신구약성경의 주석서는 기독교역사상 최초이자 위대한 업적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칼빈 사후 약 200년동안 그 누구도 칼빈과 같은 주석서를 낸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빈이 주장하는 것이라면 다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도 사람인지라 실수한 것이 있을 수 있고, 자신이 발견해낸 교리가 성경이 아니라 논리적인 비약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 바로 "이중예정론"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려다가, 그만 인간의 남아있는 의지마저 완전 묵살해 버렸다. 인간이 구원얻기 위해 최소한 해야 할 일마저도 인간의 공로와 행위라고 몰아붙히고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그래도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 팩트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미 아담의 범죄에 의해 정죄받은 상태에서 죽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회개하고 믿어서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인류의 시조가 처음 범죄했을 때에 스스로 범죄한 것이 아니라 뱀이 꼬드겨서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기 전에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에 반응해야 한다. 그러면 구원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가운데 그 누구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신다. 그리고 누구든지 구원의 복된 소식을 듣고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인간에게도 자유의지가 어느 정도는 남아 있기 때문에, 성령이 강권할지라도 그분의 초청을 거절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도록 지금도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주고 계신다. 그럴 때마다 사람은 눈을 떠야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의 초청에 응해야 한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적어도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주의 음성에 반응할 정도는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훗날 하나님께서는 심판주가 되실 수 있다. 누구에게든지 구원받을 기회를 제공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판의 날에 주님 앞에서 항변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칼빈의 만세전 개인구원예정론은 잘못된 것이다. 아니 성경에 위배된다고 본다. 칼빈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죄짓게 만들기 위해서 선악과도 만든 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죽을 운명에 처할 죄인들 중에서 당신의 뜻대로 살려줄 자와 멸망으로 계속 나아가도록 내버려 둘 자를 고르는 분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하시는 그러한 분이 아니시다. 모든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직접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속죄제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만큼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분의 긍휼하심과 사랑은 지금까지 온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을 수 있는 분량보다 더 크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날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에 한사코 반응해야 한다. 그리고 죄사함을 받기 위해, 생명을 얻기 위해, 주님 앞으로 나아가서 회개하고 그분을 자신의 인생이자 영혼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자만이 결국 육체를 벗는 순간에 심판을 벗어나 영원한 자유의 땅이요 행복의 땅인 천국으로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11월 04일(수)

정병진목사

 

그리스도인들은 사실 자기 안에 있는 두 사람 사이에 항상 서 있다. 하나는 옛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새 사람이다. 옛사람이란 사탄의 본성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키고, 새 사람이란 성령의 본성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데 혹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사람의 사고방식을 따라 살고 있다면 한 번쯤 그는 심각한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몸의 구속의 날에 성령께서 그런 사람에게서 떠나가신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엡4:30). 그럼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여기에 그 해법이 있다.

2021-01-27(수) 수요기도회
제목: 에베소서강해(13) 그리스도인의 이웃관계와 하나님을 본받는 삶의 실천덕목들(엡4:25~5:1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AJQEwIifwgk  [혹은  https://tv.naver.com/v/18185785  ]

 

1. 들어가며

  새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된 자들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킬 것과,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면서 교회에게 주신 직분자들 곧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전하는 자와 목사인 교회를 통하여 성도들이 성장하고 온전케 될 것을 권면한 후에, 그렇게 되기 위한 방법으로서 옛사람의 생활방식과 아울러 새 사람의 생활방식을 소개하였다(엡4:1~24). 그리고 이제는 새 사람으로서의 성도가 이웃에 대해 적극적으로 베풀어야할 덕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새 사람된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이웃관계와 하나님을 본받는 자의 실천덕목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자 한다. 

 

2. 옛사람의 생활방식에서 새 사람의 생활방식으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모신 자들이 살아야 할 새로운 생활방식을 소개하는데, 그것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다(엡4:22~2).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벗을 벗을 벗어버리지 아니하는 사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입어야 할 것을 입지 않고 사는 이들도 있다. 만약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옛 사람을 벗어버리면서 동시에 새 사람을 입는 두 가지 방식이 실행되지 않는다면 그는 새 사람으로의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인가? 먼저 사도바울을 옛사람에 대해서 정의를 하는데, 그것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자"라고 하였다(엡4:22). 이것을 헬라어에서 직역해보면, 옛 사람이란 "속임을 욕망들을 따라서 파멸당하고 있는 이전의 생활방식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은 사실 아담의 타락이후 타락한 본성을 따라 살고 있는 인류전체를 가리킨다. 즉 옛 사람은 창조된 아담 안에서 타락한 자들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 불구하고 옛 사람이 살던 방식으로 계속해서 산다면 그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나아가 영원한 멸망에 처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새 사람된 또 다른 사람이 하나 더 있다. 여기서 "새 사람"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소유한 사람을 가리킨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4:24에서 새 사람에 대해 "하나님을 따라서 의와 진리의 거룩하심으로 창조하심을 받은 자"라고 정의하였다. 성령을 통하여 자기 안에 그리스도를 모셔들인 자가, 그분이 자기 안에 거처를 정하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고, 생각의 영을 새롭게 함으로 자신의 생각을 영에 두게 될 때, 그 사람은 새 사람으로 충만케 된다. 그러므로 누군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그는 새 사람의 본성을 늘 입기를 사모해야 한다. 그때 그는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새 사람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웃과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도바울은 새 사람된 그리스도인이 이웃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실천덕목을 여러 개 소개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거짓을 버리고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라는 것이다(엡4:25절). 여기서 "거짓"은 마귀의 대표적인 속성이며, "진리"는 예수님의 대표적인 속성이다. 사실 옛사람의 속성의 하나가 거짓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을 거짓말을 해서는 아니 된다. 반대로 새 사람의 속성 하나가 진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참 된 것말을 말해야 한다. 둘째, 분을 내어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고 있어서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이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엡4:26~27). 참고로, 모든 분이 다 죄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헬라어원문에 따르면, "분을 낼 수도 있으나나 죄를 짓지 말고 있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의분을 낼 수도 있기 때문다. 대표적인 경우가 비느하스의 의분이다(민25:11). 출애굽2세대들이 싯딤에서 모압의 신을 섬기고 모압여인들과 음행을 저지르게 되었을 때, 대제사장 아론의 손자였던 비느하스가 일어나 창으로 당시 음행하는 자의 배를 찔러 죽였는데, 이것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에게 말하기를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라고 평가하셨기 때문이다. 사실 그때에 만약 비스하스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의분을 내지 않았더라면 전염병으로 2만4천명만 죽었을 것이라 이스라엘이 전멸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의분이라고 하루를 넘겨셔는 마귀가 틈을 탈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것이다. 셋째,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일함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엡4:28). 악하고 게으른 것은 죄가 되기 때문이다. 넷째, 모든 더러운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해야 한다(엡4:29)고 했다. 새 사람된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언어습관이다. 어떤 언어를 말해내느냐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은 인격이 성숙한 사람이 되느냐 추한 사람이 되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섯째,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엡4:30).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를 인치시고 보증하는 기간은 구속의 날까지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한 번 믿는 자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는 정확히 "그 시대까지" 곧 그 사람이 죽는 그 순간까지는 결코 떠나지 않지만, 만약 계속 죄를 짓고 돌이키지 아니한다면, 그가 죽어서 몸의 구속을 받아야 할 그 순간에 그를 떠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사람에게 있어서 구속은 3가지다. 영의 구속, 혼의 구속, 몸의 구속이 있다(롬8:23). 이중에 몸의 구속(속량)은 사람이 죽을 때에 일어나는 몸의 부활체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사람이 살아있을 때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의 구속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할 때 곧바로 일어난다. 예수께서 우리의 영의 구속을 위하여 대신 죄값을 치르고 우리를 사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평생 동안 우리는 혼의 구속을 받다가, 죽을 때에 몸의 구속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께서 우리를 보증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죽는 날, 몸의 구속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성령을 존중해드리고 그분이 싫어하는 것은 하지 않으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성령님도 예수님처럼 매우 인격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무안을 당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무시하면 그분은 무시를 당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내 몸을 성전 삼고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님을 존중해드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죽는 날 성령께서 떠나시고 말 것이다. 그리고 여섯째, 모든 성도는 악독과 분냄과 진노와 소리지름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나쁨과 함께 버리고 오직 서로 친절하게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엡4:31~32)고 하였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먼저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본받을 수 있는가?

  사도바울은 이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어야 함을 역설하는데, 그러한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3가지 방법을 준행하라고 제시한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따라 걸어가라고 하였다(엡5:2). 둘째, 어둠에 속한 일들을 제거하라고 하였다(엡5:3~7). 그것은 음행과 불결함과 탐욕이며, 더러움과 어리석은 말과 희롱의 말들이다. 왜냐하면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는 장차 도래할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이신 이의 왕국에서 기업을 상속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셋째, 빛의 자녀로서의 빛의 열매를 맺으라고 하였다(엡5:8~14). 이때 성도들이 맺어야 할 빛의 열매는 선과 의와 진리다. 이 부분에 관하여는 시간관계상 다음 주에 살펴보도록 하겠다. 

 

5. 나오며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의외로 쉬울 수가 있다(물론 이것은 신비에 속한 영역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자신의 과거의 죄를 회개하면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되기 때문이다. 그때에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하시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 그러나 그 다음이 관건이다. 과연 우리 안에 들어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거처를 정하시고, 그분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때에 과연 우리가 그분에게 순종하며 그분의 인도를 따라가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계시는 예수님을 근심하게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결국 성도가 죽는 날에, 성령께서 그 사람을 떠나는 경우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분명 그리스도를 모셔들어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자기가 여전히 주인되어 있는 자가 아주 많다. 타락한 죄된 본성을 이기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가 대대수다. 혼의 인도함을 마치 영의 인도함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아주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사람의 행위를 날마다 벗어버려야 한다. 타락한 본성이 나를 주관하는 삶에서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성령께서 주인되어 이끄시는 새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성령의 본성이 지배하는 새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소극적인 것들은 날마다 우리에게서 제거하면서 적극적인 것들은 받아들여야 한다. 사탄의 속성은 버리고 예수님의 속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거짓은 버리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어둠을 버리고 빛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죽는 날 몸의 구속을 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1년 01월 27일(수)

정병진목사

 

온전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그리고 우리는 진정 얼마만큼 성장해야 성숙한 성도라고 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온전케 하기 위해 교회에게 주신 직분은 대체 무엇인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은 옛사람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새사람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 존재인가? 이제 영적인 지침서인 에베소서의 말씀 안으로 들어가보자.

2021-01-20(수) 수요기도회
제목: 에베소서강해(12)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 및 옛사람에서 새사람으로의 변화(엡4:7~24)
https://youtu.be/v0eydctOG44 [혹은 https://tv.naver.com/v/18040151 ]
 
 

1. 들어가며

  성도의 싸움은 그 대적이 하나가 아니다. 하나는 우리의 혼(Souls)이요 또 하나는 우리의 대적 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이다. 혼은 부인해야 하고,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혼이 우리가 싸워야할 영적인 대적이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마16:24~26). 우리는 혼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할 때에 이미 육체를 따르는 기관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사람은 원래 혼이 자신의 영을 따르도록 창조되었으나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물론 그 중간에 사탄마귀의 개입이 끼어들어왔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정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온전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혼을 부인하고 마귀와 그의 귀신들을 대적해야 한다. 그런데 이 둘과의 싸움이 있음을 언급하는 책이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에베소서"다. 그러므로 에베소는 영적인 싸움을 말해주는 전투책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의 영적 싸움의 대상이 우리의 혼에 속한 옛사람에 대해 다룰 것이다. 과연 우리는 혼에 속한 우리 자신(자아)를 잘 이기고 있는가?

 

2. 에베소서는 어떤 책인가?

  에베소서는 어떤 책인가? 에베소서는 신약 27권 가운데 가장 깊은 책이자 영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베소서는 예정론(에11:3~14)과 만세전의 구원경륜(엡3:1~11)을 언급하며, 속사람과 겉사람(엡3:16) 그리고 옛사람과 새사람(엡4:22~24)을 언급한다. 이것을 다 언급하고 있는 책은 신구약 66권의 책 가운데 에베소서가 유일하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언급하며(엡5:5), 영적인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완전무장해야 할 것을 언급한다(엡6:10~13).

  특히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성부 성자 성령에 의한 예정론은 언급하고(엡1:3~14), 하늘의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을 언급함으로써 영적인 세계에 계시는 하나님과 천사를 언급하고 있다(엡1:21). 통치, 권세, 능력, 주권과 같은 단어들은 천사 중에 높은 천사들의 계급을 가리킨다. 그리고 곧바로 2장에 가서 "공중의 권세잡은 영들"을 언급하고(엡2;2), 성도들이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에베소서 3장에서 하나님의 만세전의 구원경륜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언급한다. 우리는 그것이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교회론치고 에베소서만큼 많이 정보를 제공하는 책은 없다. 에베소서에서 사도바울은 교회의 7가지 방면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의 몸이요, 하나님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이며,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요 새 사람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부이자 아내이며, 전사라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에베소서야말로 신구약성경 가운데 가장 깊은 책이요 영적인 책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에베소서 4:7~24의 말씀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에베소서 4장은 새로운 분기점이다. 왜냐하면 에베소서가 크게 2부분으로 나뉘는데, 1장부터 3장까지가 전반부로서 하나님의 구속목적 및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받은 성도의 지위에 관한 교리적 차원의 진술이라면, 에베소서 4장부터 6장까지의 후반부는 구속받은 성도로서의 새로운 삶에 대한 실천적 차원에서의 의 권면이라고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전반부가 "교리편"을 말하고 있다면, 후반부는 "실천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에베소서의 후반부(4:1~6:20)는 다시 2부분으로 나뉘는데, 앞부분(4:1~16)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연합과 일치 그리고 성장에 관한 권면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고, 뒷부분(4:17~6:20)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구성원 각자의 새 생활에 대한 권면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서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본문은 에베소서 4:7~24의 말씀이다. 이중 앞부분(4:7~16)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온전케 하라고 선물로 주신 교회의 직분과 아울러, 이러한 직분자들을 통한 온전케 하는 사역을 말한다. 그리고 이 사역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뒷부분(4:17~24)은 구속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원칙으로서, 옛사람의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으로 옷입을 것을 권면하고 있다. 

 

4. 교회를 온전케 하라고 교회에게 주신 5가지 직분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에 한 일이 있었다.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사도바울은 그것을 확실히 언급하였다(엡4:7~11). 그것은 교회에게 선물(은사)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때에 마귀에게 의해 사망을 당했던 포로된 구약의 성도들을 예수께서는 자신이 먼저 부활하심으로 성도들을 부활시키시고 그들에게 하늘나라를 선물로 주셨다. 그리고 그때부터 구원받은 자들을 위해 교회에게는 직분의 은사를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주셨으니, 그것이 바로 사도와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와 목사인 교사다(엡4:11).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면서 교회에게 5가지 직분을 주신 것인가? 그것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엡4:12). 그렇다면, 성도는 과연 어떤 자가 될 때 온전케 될 수 있는가? 사도바울은 그것을 2가지 언급했다. 첫째는 봉사(섬김)의 일을 하는 자가 될 때다. 그리고 둘째는 그리스의 몸을 건축하는 자가 될 때다. 그러기 위해서 사도바울은 성도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일치를 이뤄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다는 것이다(엡4:13). 어떤 사람은 믿는 것과 아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길래 둘의 일치를 사도바울이 말한 것인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아는 것은 혼에 속한 일이요, 믿는 것은 영에 속한 일인데, 이 둘이 하나를 이루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이미 사탄의 말을 듣고 타락한 나머지 혼이 육체에 속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혼적인 인간에서 영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묵상해야 한다. 왜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던 분이 종의 형체를 가지고 이땅에 사람으로 오셨으며 죽기까지 복종하셨는가를 묵상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되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셨다. 그러므로 그분만이 하나님와 죄인 사이를 중재하실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되심의 비밀 곧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워야 한다. 그때 우리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5. 교회의 성도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 있는가?

  이어 사도바울은 갓 태어난 아이(어린아이)는 성장하여 성숙해져야 한다고 한다(엡4:14~16). 그렇다면 누가 어린아이인가? 사도바울은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잘 넘어지는 자요, 온갖 교훈(가르침)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자라고 말한다. 그렇다. 어린아이는 분별력이 작거나 없기 때문에 금방 휩쓸리게 된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일수록 진리의 말씀을 붙들기 위해서 부단히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사탄은 진리 사이사이에 가라지를 뿌려 우리를 부패시키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야 한다. 이러한 성장은 혼자서 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교회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 세우신 목자인 교사를 통해서(엡4:11) 그리고 기록된 성경말씀을 통해서(딤후3:16~17) 그리고 성도들의 교제(엡4:16)를 통하여 이뤄갈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의 지체들은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고 서로 연결되고 결합될 때 그 몸이 균형있게 잘 자라기 때문이다. 

 

6. 구속받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원칙으로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제 사도바울은 마음의 허망한 것을 좇아가고, 무지함과 마음의 완고함 및 방탕함으로 인하여 더러운 욕심대로 행하고 있는 과거의 에베소 성도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한다. 옛날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는 것과 같다고 했다(엡4:17~19). 또한 자신이 이전에 에베소 성도들을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았다고 역설한다. 고로 세상의 방탕함에서 벗어나 온전한 사람이 되뢰면 누구든지는 예수 안에 있는 진리를 얻기를 바라고, 또한 그러한 진리대로 말하기를 힘써야 한다고 했다(엡4:20~21). 그리고 이를 위한 실제적인 2가지 가르침을 제시했다. 그것은 첫째, 벗어버리는 일을 하라는 것이었고 둘째, 입는 일을 하라는 것이었다(엡4:22~24).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단호하게 벗어버려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옛사람"이고, 단호하게 입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새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잘 이루기 위해서는 오직 이성의 영이 늘 새롭게 되도록 계속해서 힘써야 한다고 했다(엡4:23). 

  그렇다면, "옛사람"이란 무엇을 가리키며, "새사람"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성경에서 "옛사람"이란 용어를 사용한 사람은 오직 바울 뿐이다. 그는 과거에 이방인으로 있을 때 세상의 더러운 정욕을 좇아가던 옛날의 자신(자아)을 "옛 사람"이고 불렀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서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성장해가고 있는 질적인 새로운 나 자신을 "새 사람"이라고 했다. 그럼, 바울이 언급한 옛사람과 새사람의 의미를 좀 더 성경에 나와있는 말씀으로 깊이 들여다보자. 

롬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골3:9-10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죄에게 종노릇하고 있지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자기자신을 가리켜 "옛사람'이라고 칭했다. 예수께서 그날 십자가에서 옛사람을 처리하신 것은 더이상 우리가 죄의 종노릇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했다.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은 한 번으로 끝날 간단한 일은 아니다. 우리 안에 들어있는 죄된 본성이 우리의 육체를 잡고 끊임없이 우리를 세상의 정욕으로 끌어가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된 본성을 따라가는 옛사람이 더이상 자기자신을 주장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늘 자기자신에게 처리해야 한다. 그것은 자기자신에게 늘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즉 참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너는 예수믿을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잖아. 시체가 화를 내는 것이 보았니? 시체가 음란한 짓을 하는 것 보았니? 시체가 남을 미워하는 것 보았니? 아니야. 이미 나의 옛사람은 죽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옛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이 자신게서 점차로 실제화될 것이다.

  그리고는 새사람으로 옷입어야 한다고 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서의 말씀을 통하여 인간을 창조하신 분 곧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온전한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을 입은 자를 "새 사람'이라고 칭했다(골3:10). 그리고 이러한 새사람이 정말 새사람처럼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해야 한다고 했다(갈3:10). 그것은 에베소서의 말씀으로 바꾸어 말하면 곧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단장하는 것이다(엡4:24). 여기서 "의"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리키는 말로서, 하나님과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진리"란 거짓이 전혀 포함되지 않은 진실로 참된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거룩함"은 하나님의 본질로서 세상과는 구별되고 깨끗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에 담긴 핵심골자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렇게 늘 살아가도록 자신 교훈하고 채찍질하려면 "생각의 영"이 새로워져야 한다고 말했다(엡4:23). 생각을 새롭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영과 혼과 육의 순서대로 내 몸이 돌아가면 그때부터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과거의 습관에 매여 옛 생활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인가? 아니면 지금도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귀기울이며, 생명으로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주 예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7. 나오며

  신앙이란 이론만 꿰고 있다고 해서 성숙해지거나 온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원리를 깨우쳤다면 이제는 그대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매로서 신앙을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앙의 실제를 처음 배웠던 그 원리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렵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4장부터 6장까지 무려 석 장을 할애하여, 과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구속받은 공동체의 합당한 생활인지를 언급하였던 것이다. 그중에 첫번째는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말씀들이다. 특히 성도들은 성령의 하나를 힘써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목사와 교사의 도움을 받아 모든 성도들은 온전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도달하도록 성숙하기를 힘써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옛사람의 행위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형상의 표출인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 정말 맞는 말들이다. 우리가 진정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는 이제 유아로서 이 세상에 새로 태어난 것이다. 이때 아이는 절대적으로 부모의 양육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하는 존재가 교회가 있으니 그것은 3가지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둘째는 목사요, 셋째는 운행하시는 성령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러운 과거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겨야 한다. 그런 후에 성도들은 영적 지도자들의 지도를 잘 받아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단계에 도달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나가야 할지를 다양한 방면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 해결책까지 소개해주고 있다. 이제 우리도 부지런히 따라가보자.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사도바울이 언급했던 모든 내용을 우리가 그대로 실천하는 날이 올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1월 20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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