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놀랍고도 감명깊은 역사의 대기록이다. 사실 다니엘서 4장은 느부갓네살왕의 신앙고백록이요 회개고백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찌 이방인이 성경기록자가 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우선 거대한 바벨론 도성과 인공 산으로 조성된 공중정원을 유유히 거닐고 있는 느부갓네살왕이 보이는가? 세상 역사는 그가 정복했던 고대근동지역과 그가 세운 건축물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성경은 그가 어떻게 회개하여 하나님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끝까지 이 말씀을 들어보면 당신도 아마 눈씨울을 적시고야 말 것이다.

2020-04-08(수) 수요기도회
제목: 다니엘강해(05) 느부갓네살왕이 꾼 두번째 꿈과 그 해석(단4:1~37)
https://youtu.be/Hb1mGf2yWmA [혹은 https://tv.naver.com/v/13273713 ]


1. 들어가며

  느부갓네살왕은 또 한 번을 꿈을 꾼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난 번과는 달리 자신의 개인신상에 관한 꿈이었다. 왕은 여러 바벨론 술사들을 불러내 꿈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 꿈을 해석해달라고 한다. 하지만 어느누구도 꿈을 해석하는 일에 선뜻 나서지 못한다. 그것은 왕의 폐위에 관한 해석이 아니랄 수가 없는 꿈이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다니엘이 등장했을 때, 왕은 또다시 자신이 꾸었던 꿈을 그에게 들려주고 신들의 영이 있는 다니엘은 얼마든지 그 꿈에 관한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요청했다. 이때 과연 다니엘은 이 꿈 해석을 어떻게 했을까? 이 세상에 충신과 간신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느부갓네살왕은 다신론자였는가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였는가? 과연 하나님의 징계가 누구에게 임하며, 징계의 기간은 어떻게 결정되며, 징계가 철회되기 위해서는 대체 무엇이 필요한가? 오늘은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왕이 꾸었던 두번째 꿈과 그 해석에 얽힌 놀라운 영적인 비밀을 풀어보고자 한다.

 

2. 느부갓네살왕은 왜 역사적으로 아직 발굴되지 않은 조서를 내려야 했는가?

  우리는 단4:1~3의 말씀을 통해, 느부갓네살왕이 천하에 거주하는 바벨론의 백성들에게 하나의 조서를 내렸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아쉽게도 아직 이러한 역사적인 사료가 성경 이외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을 거꾸로 본다면, 대제국 바벨론의 최고통치자가 자기의 종교를 마르둑 신으로부터 여호와 하나님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좋아할 갈대아술사들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실제 사실이었다. 그것은 이제 중년이 되어버린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의 신앙고백선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언어와 민족이 다른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선언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여호와)께서 내게 행하신 표징들과 이적들을 내가 알리는 것은 기쁨이다. 참으로 크도다 그의 표적들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의 놀라운 일이여, 그분의 왕국은 영원한 왕국이요, 그분의 통치는 대대로 이를 것이다(단4:1~3)" 그렇다면, 갈대아의 대제국을 건설했던 느부갓네살왕은 왜 자신이 섬기던 주신 마르둑신을 버리고 여호와하나님을 최고의 신으로 받들겠다고 선언한 것인가?

 

3. 왕은 언제 어디서 어떤 꿈을 꾸었는가?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은 2가지로 유명하다. 첫째 그는 전쟁용사였으며 전쟁광이었다. 그는 고대 근동의 모든 나라들을 하나씩 하나씩 정복해 들어갔으니 적어도 20~30년동안 주변의 나라들을 모두 다 정복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가장 큰 대적은 앗수르였고 애굽이었다. 그는 또 주변의 나라들 중에서 남유다를 정복했으니,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남유다를 넘겨주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언약백성도 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둘째, 그는 건축광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후대에 길이 남기고자 거대한 바벨론도시를 건설했으며(헤로도투스에 의하면 느부갓네살왕이 죽은 후 100년뒤 그 도시를 방문했는데도, 그 웅장함에 압도되었다고 한다), 또한 향수병에 걸려 외로워하는, 자신의 사랑의 아내이자 메대제국의 공주였던 아미티스(Amytis)를 위하여 거대한 작은 산을 만들었는데, 외부에서 그것을 바라볼 때에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다하여, "공중정원"이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정원을 건축했기 때문이다(이 건축물은 세계 제7대 불가사이에 속한다). 그러므로 세상 역사에서는 그를 위대한 전쟁용사이자 위대한 건축가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가 건축한 도시나 공중정원을 단 한 문장도 채 안 되게 짧게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단4:29). 성경은 다만 그가 어떻게 되어서 마르둑신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자가 되었는지를 소상하게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자신이 직접 말이다. 여러분이 혹시 다니엘서를 읽을 때에 발견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다니엘서의 총12장의 말씀들 가운데, 이방제국의 왕이었던 느부갓네살이 직접 기술한 성경책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다니엘 4장의 말씀이다. 다니엘 4장은 다니엘이 쓴 책이 아니다. 느부갓네살의 신앙고백록을 다니엘이 채록한 것 뿐이다. 그러니까 다니엘 4장은 "나 느부갓네살은..."이라고 계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느부갓네살왕의 신앙고백이 성경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왕의 두 번째 꿈을 어떻게 해석해주었는가?

  느부갓네살왕은 이제 왜 자기의 나라에 그러한 조서를 내렸는지에 관하여 소상히 밝힌다. 그러므로 다니엘서 4장의 말씀은 느부갓네살왕의 신앙고백록인 셈이다. 그가 자신의 신앙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그가 두번째로 꾸었던 꿈 때문이었다. 그가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경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그가 일생일대에 2번의 결정적인 꿈을 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첫번째 꿈은 다니엘서 2장에 나오는 거대한 "신상"에 관한 꿈이다. 머리는 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쩍다리는 동(청동)이요, 두 종아리는 철이요, 발과 발가락은 진흙과 철이었던 거대한 신상의 꿈을 꾸었고 그것을 다니엘이 해석해줌으로, 다니엘은 일약 갈대아술사들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리고 두번째 꿈이 바로 다니엘서 4장에 나오는 "큰 나무에 관한 꿈"이다. 그런데 이번에 꾸었던 꿈은 직접 자신이 갈대아의 술사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그것을 해석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그것을 해석해줄 술사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 꿈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그 꿈은 바벨론왕이 폐위되어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내용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꿈 이야기를 듣고도 바벨론이 술사들은 그 해석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박수장이었던 다니엘이 그 해결사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 꿈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다니엘은 다시 왕으로부터 자신이 꾸었던 꿈이야기를 듣는다. 그러자 다니엘은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것은 느부갓네살왕이 최고의 왕이 되고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겠지만, 어느날 하늘에서 내려온 순찰자(천사를 지칭함)에 의해 나무 밑동이가 잘져나간 채 7년을 보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왕은 놀라지 말고 어떤 말을 해도 괜찮으니 그 꿈에 대해 해석해주기를 부탁한다.

  그런데 그때 다니엘의 말을 들어보자. 그가 얼마나 느부갓네살왕을 아끼고 존경하고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다. "내 주여, 그 꿈은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며, 그 해석은 왕의 대적들에게 응하기를 원하나이다(단4:19b)"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들이 세상의 왕을 바라보는 자세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엿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 사실 세상나라의 왕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기름부어 세운 종들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일반은총의 특별한 대상자인 것이다. 아무나 세상나라의 왕이 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무정부상태보다는 그나마 폭군이라도 왕이 있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 있다. 그 정도로 왕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나라의 질서와 권선징악을 위해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비록 이방제국의 신하였지만 왕을 그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신하들 중에 결코 간신으로 살지 않았다. 비록 왕을 위해 나쁜 예언은 왕에게 이루어지기를 않기를 바랬지만, 왕이 잘못하고 있는 것에 관하여는 분명하게 말을 할 줄 아는 충신이었던 것이다. 그는 왕의 꾼 꿈을 해석한 다음 3가지를 왕에게 충고하듯이 말씀드린다(단4:27).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왕에게 첫째, "내가 충성으로 조언하는 것을 받아주소서"라고 말했다. 그렇다. 훌륭한 지도자는 직언하는 신하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둘째, "공의를 행함으로 당신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이 말은 무슨 뜻인가? 그가 그동안 공의롭지 못한 행동을 일삼아왔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 죄가 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공의를 실천하여 그동안 지었던 죄를 씻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직언한 것이다. 셋째, "가난한 자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당신의 죄악을 씻어내소서" 이것은 그가 얼마나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을 착취했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사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 잡아온 포로민들을 바벨론도시의 건설과 공중정원 토목공사에 투입하여 고된 노동에 시달리게 한 것이다. 그리고 합당한 임금도 주지 않고 부려먹은 것 같다. 그러니 이제라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볼 줄 아는 왕이 되기를 다니엘이 간절히 청원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 누가 이러한 직언을 할 수 있겠는가? 왕의 말이 바로 법이었던 시절에, 만약 잘못 말했다가는 그날로 자신의 관직을 박탈당하거나 죽임을 당할 수 있었기 대문이다. 하지만 다니엘은 왕에게 그렇게 말했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 그것은 그 꿈의 해석대로 왕이 폐위되는 것을 다니엘은 진실로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이 그때부터라도 충성된 신하의 말을 듣고, 공의롭게 행하고, 힘없고 불쌍한 자를 돌보아줌으로서, 이전에 잘못했던 과오를 씻어버리기를 소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왕은 과연 다니엘의 충언을 듣고 그대로 실천했을까?

 

5.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받고도 1년이나 회개하지 않았던 느부갓네살왕의 삶은 어떻게 변해버렸는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왕은 다니엘의 진심어린 충언을 받아들였지만 다니엘의 청원한대로 실천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는 공중정원에서 바벨론도성을 바라보면서 누가 과연 자신을 권좌에서 몰아낼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과 자신이 이루어놓은 업적을 믿었다. 당시 세상 모든 나라가 다 자기의 손아귀에 들어왔으며 매년 공물을 바치고 있지 아니한가! 그리고 자신이 수십년에 걸쳐 건설한 바벨론의 위용은, 그저 보고만 있어도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대단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자신이 건설한 거대한 "공중정원"은 관계시설을 이용한 당대 최고의 거대 위락 시설로서(그것은 실제로 작은 산처럼 컸었기 때문이다) 놀랍기 그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니엘로부터 꿈해석을 들은 뒤 1년이 지나도록 다니엘의 충언을 실천에 옮기지 않았다. 그리고 1년 뒤에 그는 결론적으로 자기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더냐?(단4:30)" 그러자 그 순간에 하늘에서부터 큰 음성이 들려왔다.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단4:31)" 그리고 그는 그 즉시 바닥에 꺼꾸려졌다. 그리고는 정신착란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 자신을 짐승으로 여긴 채 동물울음소리를 내면서 들로 나가서 살아야 했다. 그것은 그가 꾸었던 꿈처럼, 일곱 때 곧 7년동안을 그렇게 들판에서 짐승처럼 풀을 뜯어먹고 사는 것이 시작이었다. 그러니 아침에는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고 그의 머리털은 독수리의 깃털처럼 변했으며, 그의 손톱은 새의 발톱같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여기서 심판을 선고하시는 하나님의 꾸지람과 더불어 그래도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크신 지를 엿볼 수 있다. 사실 다니엘의 꿈 해석은 사실 즉시 실행에 옮겨졌어야 했다. 즉시 그가 정신이상자가 되어 야수처럼 변했어야 했지만, 하나님은 그에 대한 심판을 잠시 유보하셨다. 이제나 회개할까 저제나 회개할까를 기다리신 것이다. 하지만 1년이 다 되도록 그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도시와 공중정원을 보면서 자신을 믿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징계를 내리셨다. 하늘에서 거대한 음성이 들려옴과 동시에 그는 반미치광이가 되게 하셨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그에게 작정한 징계의 시간을 보내게 하셨다. 우리가 알 것은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기 전까지 하나님을 정말 오래 참으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번 징계를 내리시면 그 징계를 거둬들이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남유다에게 그랬다.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선택한 도성마저 하나님은 기꺼이 파괴도록 내어버리셨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위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왕을 주님은 하루 아침에 동물처럼 변하게 만들어 미치광이처럼 살도록 한 것이다.

 

6. 일련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했던 느부갓네살왕의 최종적인 신앙의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그런데 그때에 비로소 느부갓네살왕은 정신을 차리게 된다. 높은 권좌에 올라 부러울 것이 없이 살았던 자기자신이 어떻게 되어서 광인이 되어 들판에 버려졌는지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가 다니엘을 통하여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되고 회개하게 된다(단4:34). 이제는 자신이 제국을 통치하는 왕이 아니라 오직 그러한 권세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세상 나라가 통치된다는 것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도 그의 정신이 돌아오게 하신다. 그리하여 다시 왕의 자리에 복직하게 만들어주신다. 그러자 그는 즉시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렸으며, 그분을 찬양했고 그분에게 경배를 드리게 된다(단4:34~35). 그리고는 즉시 자신이 지난 삶을 신앙고백적으로 글을 다음 그것을 바벨론 전국에 있는 백성들에게 조서로 내렸던 것이다. 세상 제국은 자기 느부갓네살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것을 말이다(단4:35). 그리고 얼마나 자신이 교만히 행했는지를 진심으로 고백하여 겸손히 사죄를 드린다(단4:37). 여기까지가 바벨론 느부갓네살왕의 이야기다. 이것으로 느부갓네살왕의 이야기는 끝난다. 아마도 그가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이러한 신앙고백은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만한 수준에 이르렀지 않았나 생각한다.

 

7. 나오며

  느부갓네살왕은 정말 뚝심있는 제왕이었다. 그리고 위대한 건축가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죽인 여러 민족들과 노예들도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을 학대하고 그들을 토목공사에 매진하게 한 것에 대해 한 번도 거리낀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거대한 제국을 만들었고 거대한 도시를 건설했으며, 공중정원까지도 만들어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바칠 수가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나라를 허락하실 때, 왕이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라고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번영을 구가하라고 준 것은 결코 아니다. 느부갓네살왕도 자신이 미치광이가 되어 7년동안 야수로 살지 못했더라면, 아마도 그러한 것을 결코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오직 힘과 권력을 가진 자의 소유라고 생각했을 뿐, 그것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니엘에 계속 붙어 있었다. 다니엘은 그를 위해 한평생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부와 권력에 빠져버린 느부갓네살왕을 하나님께서 만지신 것이다. 그러자 그는 겸손해졌고 인간나라의 진짜 통치자가 누군지를 알아보게 된 것이다. 그렇다.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기자신이 누군지를 모를 수 있다. 오직 자기의 지혜와 힘과 능력으로 오늘의 자신을 일구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고난과 징계는 이처럼 자신을 뒤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겸손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자랑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러한 것을 경험하지 못했어도 듣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른지...

 

2020년 04월 08일(수)

정병진목사 


오늘은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세상법이 하나님의 법과 충돌하게 될 때 성도는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그리고 성도가 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에 성도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가? 또한 하나님께서는 언제 우리가 겪는 고통의 순간에 개입하시게 되는가? 우리는 이 모든 대답을 오늘 이 메시지를을 통해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메시지를 다 듣는 순간 우리는 숭고하게 변하는 자기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020-04-01(수) 수요기도회
제목: 다니엘강해(04)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불어닥친 시련(단3:1~30)
https://youtu.be/GyNrTsN1IHE


1. 들어가며

  다니엘서는 총12장으로 구성된 역사책이자 예언서이며 묵시서에 해당한다. 그중에 전반부(1~6장)은 다니엘의 생애에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과 그가 보고 들었던 간접적인 묵시들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면, 후반부(7~12자얘은 다니엘이 직접 보았던 4가지 묵시들을 다루고 있다고 하겠다. 그중에서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다니엘서 제3장은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느부갓네살왕의 금신상경배 거부로 인하여 풀무불에 던져넣어진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다니엘서 3장을 통해서 무엇을 살펴볼 수 있을까? 그것은 크게 3가지다. 첫째는 세상권력자들이 승승장구하여 권력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과연 어떤 일을 계획하게 되는가 하는 것과 둘째는 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법이 충돌할 경우는 성도들은 과연 어떤 법을 따라가야 하는가, 그리고 셋째는 위기상황에 직면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은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관한 것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2. 느부갓네살왕은 왜 금신상을 제작하게 했을까?
  승승장구하는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과연 엄청난 권세가 주어지게 된다면, 그는 대체 무엇을 추구하게 되는 것인가? 사실 성도들은 자신에게 권세가 주어지면 더욱더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사용하려고 애를 쓸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장 루시퍼가 타락할 때에 그가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와 권력을 탐하다가 결국 하늘에서 쫓겨나서 마귀가 되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일어났던 세계 최고의 권력자이자 권세자였던 느부갓네살왕은 과연 그 때에 어떻게 행동했을까? 오늘 다니엘 3:1~7의 말씀을 살펴보니, 그는 자신을 더욱더 과시하려고 거대한 신상을 세우게 했으며, 자기 밑에 있는 나라의 관리들과 백성들로부터 충성심을 보이도록 그 신상에게 경배하도록 하는 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자신을 신격화하는 작업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그럼, 느부갓네살왕은 언제 어느 시기에 이러한 신격화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한 것일까? 그것은 다니엘2장에 나오는 큰 신상에 관한 꿈을 꾼 직후였을까 아니면 그보다 훨씬 훗날의 일이었을까? 지난 주에도 살펴보았지만,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왕의 꿈을 해석할 때에는 자신이 3년과정의 왕궁자문학교를 마친 바로 직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다니엘이 학교만 졸업했을 뿐 아직 관직을 받지 못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왕의 꿈을 해석해준 나이는 약 17~20세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그때 다니엘로부터 자신의 꿈의 내용과 해석을 들었던 느부갓네살왕의 반응은 과연 어떠했는가? 그는 다니엘 앞에 넙죽 엎드려 절을 하였고 예물과 향품을 신에게 바치듯 바쳤다(단2:46). 이는 그가 다니엘을 신적 존재로 예우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는 그때 다니엘의 하나님을 향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의 하나님은 신들 중의 신이요 모든 왕들의 주재"라고 고백했었다(단2:47). 또한 그분만이 이 세상의 모든 비밀한 것들을 드러내보일 수 있는 분이라고 고백했었다(단2:47). 그 뒤에도 왕은 다니엘에게 귀한 선물을 많이 주게 하였고 그를 세워서 바벨론 온 지방을 다스리게 했다. 그리고 그를 바벨론의 지혜자의 어른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다니엘의 청원에 따라, 다니엘의 꿈해석을 위해 중보기도로 도와준 다니엘의 세 친구를 바벨론지방의 관리로 임명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금신상 낙성식은 다니엘 2장의 꿈해석 사건이 있은 직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잊어버린 채 널따란 두라평지에 높이가 60규빗(27m30cm)나 되는 거대한 금신상을 그때 즉시 세울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왕이 자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축하의식의 하나로서 금신상 제막식을 하였을 개연성이 많으므로, 주변의 열강들을 다 제하고 나서, 특히 유대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신전에 있는 성전기명들을 빼앗아 자기의 신전의 보물창고에 들여놓은 후 축하잔치로서 그 일을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겠다. 그러니까 금신상의 낙성식(제막식)은 남유다를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이후 예루살렘 정복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했을 가능성이 많아 보이는 것이다(B.C.588~586년경).

  그러므로 전쟁에서 승리한 느부갓네살왕은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이 가진 권력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고 또한 대소신료들의 충성심을 시험해봄과 동시에 그것을 견고하게 하기위해 금신상 낙성식을 거행하게 했을 것이다. 특별히 신상을 제작하려 할 때에 그것을 자신이 과거에 꾸었던 꿈에 나온대로 신상을 제작하게 하지 않았고(단2:32~33), 신상의 머리부터 발까지 전부를 다 금을 녹여 발라서 만든 것은 자신의 제국 곧 금머리의 나라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신의 속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1절). 이렇듯 이 세상에 속한 권력자들은 자신에게 능력과 권세가 주어지면 반드시 자신을 높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느부갓네살에게서 사탄마귀의 속성을 여실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다니엘로부터 자신이 꾼 꿈의 해석을 들을 때만 해도 참으로 겸손했었는데, 그가 금새 자신의 치적으로 인해 권세가 놓아지자, 그는 금방 자신을 신격화하려는 욕망으로 가득채워버린 것이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 놓일지라도 우리 성도들은 내게 영광이 돌아올 귀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오직 주 예수만을 높일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다.

 

3. 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법이 충돌할 경우 성도들은 어떤 법을 따라가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배자들에게 권력을 주어 나라를 맡기신 것은 그것을 사용해 자신을 높여 신격화하라고 주신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능력과 권세로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권선징악을 실천하고, 외부세력으로부터 자기백성을 지켜낼 뿐만 아니라 자기가 다스리는 백성으로 하여금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보호하라고 주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으로 주어진 세상권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는 지배자가 있다면 성도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그냥 왕에게 빌붙어서 왕이 하자는대로 다 행하면 되는 것인가? 하나의 법과 왕의 법이 정면으로 충돌하는데도 전혀 상관하지 않고 왕의 명령에만 충성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다. 이러한 질문의 대답을 오늘 다니엘의 세친구들이었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자신의 주군인 느부갓네살왕이 세운 금신상에 절을 했을까? 그런데 사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갈대인들도 다 알고 있는 유다포로민 중의 속한 자들이었다(단2:8,12).그런데 그들은 다니엘로 인하여 포로민이었지만 왕의 총애를 입고 지방장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의 명령에 충성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받은 관직에 보답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를 잘 감당하던 그들에게도 시험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그것은 자신의 왕이 제국 내의 모든 지방장관들과 신료대신들 그리고 백성들와 민족들과 언어들이 다른 사람들을 모아놓고는 왕의 금신상 낙성식에 참여한 뒤에, 그 신상에게 절을 하는 의식을 행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약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 순간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행동했을까? 태양이 뜨거워서 쓰러진 척하면서 절하는 흉내를 잠시 취하면 되는가? 아니면 그것을 거부한 채 서 있어야 하는가?

  그런데 사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왕에게 불충성하던 신하들이 아니었다. 그래도 왕의 다른 관리들은 그들을 싫어하고 있었다. 아니 미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그들을 무엇인가에 엮어서 없애버리려고 했다. 자기나라 사람도 아닌 주제에 남의 나라에서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기회좋은 날이 왔던 것이다. 갈대아 사람들 몇 명이 금신상 제막식에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절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즉시 다니엘의 세 친구를 참소한다. 왜냐하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그 엄숙한 제막식에서 왕의 신상을 향해 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적들이 왕에게 고소한 내용을 살펴보면 3가지 중에 첫번째의 것은 잘못된 것이다. 적어도 첫번째 것은 거짓모함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고발한 것은 첫째로, 그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했다고 고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이다. 왕의 명령을 함부로 거역할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들이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꿈해석 사건 때에 유다의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고 자신이 직접 스스로 한 말과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꼭 잘못된 행동이라고 정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셋째, 그것은 왕이 세운 금신상에 절하지 아니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옳은 지적이다. 하지만 대적들은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어찌하든지 왕의 반역자 내지는 왕의 명령 불복자로 만들어서 내치려고 했기에, 그들의 행동을 보고 즉시 고발조치를 한 것이다.

  갈대아 사람들의 고발로 인하여, 왕은 즉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불러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진짜 그렇게 했는지를 확인한 다음, 한 번 더 기회를 줄테니, 준비하고 있다가 6가지 이상의 악기소리를 들을 때에 금신상에 절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는 왕이 그들을 아마도 상당히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푼 은총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그때에 이미 왕은 교만해질대로 교만해진 상태에 있었다. 자신을 신의 위치에 올려놓으려고 지금 제막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의 입에서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고 반문했던 것이다(단3:15). 그런데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태도는 놀랍게도 단호한 것이었다. 자신들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기에 번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혹시 자기들이 왕의 명령에 따라 풀무불(용광로)에 던져져서 불이 타서 죽은 한이 있더라고 그들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법이 충돌할 때에 성도는 과연 어떤 법을 따라가야 하는지를 찾아볼 수 있다. 만약 그때에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왕이 세운 금신상에 절했다면(그것을 국민의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제1계명과 다른 신(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그것을 섬기지도 말라는 제2계명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만약 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신의 관직을 발탈당하는 것은 기본이거니와, 자신의 가족들도 몰살당할 것이 뻔할 것이었다. 왜냐하면 왕의 금신상 거부사건은 역적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로 결단하였다. 그렇게 하여 자신도 불에 타서 죽고 가족들도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렇다. 신앙은 이처럼 일대일의 결단이다. 그러므로 자기자신이 자기의 가족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이다. 가족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지 내가 무엇을 한다고 해서 그들의 미래가 꼭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가족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한다. 그랬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죽기로 결단했던 것이다.

 

4.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어려움의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 찾아오시는가? 

  그러자 느부갓네살 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고 말았다(단3:19). 그러자 이미 안색이 변해버린 왕은 평소 때보다 용광로의 온도를 7배나 더 뜨겁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또한 이제 가장 힘센 용사들을 시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풀무불에 던져쳐넣으라고 지시하였다. 그때였다. 화염이 얼마나 거세게 올라왔든지 다니엘을 붙들었던 용사들이 그만 불에 타서 죽고 말았다. 그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풀무불 가운데로 떨어지고 말았다.

  하나님은 과연 성도들이 어떤 상황에 될 때에 개입하시는가? 그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해 어떤 선택을 막 시작했을 때인가? 아니면 중간인가? 아니면 막바지의 상황까지 갔을 그때인가?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끝까지 보시고 개입하신다는 사실이다. 대체로 성도들은 자신이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의 법에 순종한 것을 두고는, 이제는 하나님께서 오셔서 자신을 구해주셔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응당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세상의 법을 불순종한 자들이 가져야 할 합당한 태도가 결코 아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기로 결정했지만 세상에 있는 법을 어겼으니 그 처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하나님의 법도 순종하고 처벌도 받지 않겠다는 것은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겠다는 욕심에 해당한다.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만약 자신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기 위해 세상의 법을 거역했다면 세상법에 따라 처벌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세상에 더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구해주시겠지만, 때가 되어 이제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해야 할 사역을 마치고 천국에 들어갈 때가 되었다면, 하나님은 그를 그 순간에 결코 구해주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 우리는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과연 살아계시기나 하는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겪는 고통과 환난 중에 과연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신가를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염려할 부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걱정하지 않아도 항상 우리를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계신다(이것은 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당신의 계명에 순종하다가 그만 죽는 상황을 보시면서 그것을 모른 채 하시거나 일부러 외면하는 분이 결코 아니시다는 것을 알라.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이 사건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하셨는가? 사드락과 그의 친구들이 죽도록 그냥 놔두셨는가 아니면 그들을 살려주셨는가?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펴주신 사건에 해당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려다가 목베임을 당하거나, 화형을 당하거나, 사자밥이 되거나, 죽창에 찔려 죽었는지 모른다. 그러면 그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는가? 아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도 사실은 죽어보면 알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요한계시록 12장의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이 죽는 현장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지를 짐작케 말씀을 살펴볼 수 있다(계12:10~11). 그것은 우리가 순교할 때에 실제는 우리가 마귀에게 정복당한 것이 아니라 마귀로부터 승리하고 있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그때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개입으로 살게 된다면 그것은 이 세상의 권력자들을 굴복시키는 일이 되는 것이지만, 만약 그때 우리가 죽게 된다면 그때는 마귀가 굴복당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 마디로 마귀가 힘을 잃어버리게 되는 순간이 되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는가? 그것은 마귀가 끝까지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우리들을 볼 때에 감탄해 마지 않으면서 또한 자신의 부하들은 그렇 수 없다는 것을 보고는 낙심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순교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보내셨던 천사(미가엘로 추정됨)로 인하여 그들이 보호하심을 받았고 살아서 풀무불에서 걸어나온 경우에 해당한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러자 이제는 느부갓네살왕이 거꾸리고 말았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보고 자신의 교만함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 겸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왕은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을 찬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누구든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함부로 말라고 경고하면서(자신을 포함하여), 만약 이 명령을 어길 때에는 그 몸을 찢어서 거름더미가 되게 하였다고 했다. 그리고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에서 더욱 더 높여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예는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예라고 하겠다. 우리들이 겪어야 할 대부분의 예는 우리들이 순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순교를 결코 비참한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 순간에는 오히려 사탄이 비참해지고 있는 순간이니 말이다. 사탄의 권세가 힘을 잃어가고 있는 순간이니 말이다. 그렇다. 순교자들로 인해 사탄의 권세가 작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권세가 아주 조그맣게 되는 날에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 순교자의 숫자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계획해 둔 천국백성의 숫자가 채워지고, 마귀의 권세가 작아졌을 것이니 말이다. 순교자의 숫자가 차야 함은 사실 천국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인 목적도 있지만, 실은 사탄마귀의 권세를 점차 축소시켜 그를 심판하기 위함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5. 나오며

  우리는 이상의 말씀을 통해서 사람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반드시 자신을 높이려는 속성을 드러내고 만다는 것을 느부갓네살의 금신상 숭배사건을 통해 배웠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이 세상법과 충돌할 때에 성도는 과감히 하나님의 법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물론 그때에는 세상법이 내리는 형벌을 달게 받을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을 억울하게 생각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과연 성도들이 환난을 받을 때에 언제 어떻게 개입하는가도 배웠다. 그것은 막바지가 임하는 그 순간까지 결코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왜냐하면 그때에 주님께서 나를 살려주실 것인지 아니면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할 것인지는 주님의 소관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여 우리를 건져주신다면 그때에는 세상의 권력자들이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되는 순간이 될 것이요, 만약 내가 그때 우리가 순교하게 된다면 그때에는 마귀가 능멸을 받게 되는 순간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흔들림없이 주님께 우리의 목숨을 내어맡길 수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뒷일은 처리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 것이다. 아멘.

 

2020년 04월 01일(수)

정병진목사 


다니엘은 어린 청소년시절에 하나님을 감동시켜 일평생 자신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산 자였다. 그 일은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인가를 결정함으로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다니엘서 2장에 나오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이 꾼 "큰 신상에 관한 꿈"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왕이 그러한 꿈을 꾸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유다를 떠나 바벨론까지 다니엘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020-03-25(수) 수요기도회
제목: 다니엘강해(03) 느부갓네살왕이 꾼 꿈과 대제국들의 흥망성쇠(단2:1~49)
https://youtu.be/J9TFUoetFNY [혹은 https://tv.naver.com/v/13053175 ]


1. 들어가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늘 하늘에 계신다고 생각할 것이다. 맞다. 하지만 다니엘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왕에게 가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체 무슨 일로 그에게 가셨을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왕에게 무슨 일을 행하셨을까? 우리는 느부갓네살왕이 소집한 갈대아의 술사들의 소집명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무엇을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제 갓 왕궁자문학교를 졸업한 약 20살의 다니엘에게 무슨 일이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는 누구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기뻐하시고 복을 주시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더불이 거대한 대제국들과 왕들의 흥망성쇠가 다 하나님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2. 느부갓네살왕은 왜 갈대아 술사들을 회집시켰는가?

  느부갓네살왕(B.C.605~562)은 신바베론제국의 제2대왕으로서 세상제국의 역사에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왕이 된지 2년이 되던 해(B.C.603) 하나의 꿈을 꾸게 된다. 아니 그것도 연거푸 꿈을 꾼 것 같다. 느부갓네살왕이 "꿈들"을 꾸었다고 단어가 "복수"로 나오기 때문이다(단2:1,2). 그런데 그가 그 꿈을 꾸고 나서는 번민에 휩싸이고 만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뜬 눈으로 샌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크고 무서운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꾼 꿈을 알려주도록 갈대아의 박수들과 술객들과 점쟁이들과 술사들을 소집한다. 그리고 그 꿈을 알려달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러분은 혹시 눈치를 챘는가? 이것은 어딘가 맞지 않는 명령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떤 개인이 밤에 꾼 꿈을 꾸었는데 그것을 남한테 알려달라고 명령한다고 한들 과연 그 꿈을 알려줄 술사들이 대체 얼마나 되겠는지를 말이다. 그때였다. 술사들의 대표자였던 갈대아 술사들이 아람말로 왕께 이렇게 요청한다. "왕이시여, 그 꿈을 당신의 종들에게 말씀하시면 우리가 해석해드리리이다(단2:4)" 그러자 왕은 그들에게 대뜸 "만약 너희들이 내가 꾼 꿈의 내용과 그것에 대한 해석을 내게 보이지 않는다면 너희들의 사지를 찢어져죽일 것이고 너희의 집(가문)까지 싹 거름더미로 만들어버릴 것이다(단2:5)"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반대로 그 꿈과 그 꿈의 해석을 보이면 그에게 선물들과 보상과 큰 영광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느부갓네살왕도 말하기도 무서운 꿈이었기 때문이다.

 

3. 느부갓네살 왕은 왜 갈대아술사들에게 자신이 꾼 꿈을 말하지 않고 그것을 말하고 해석까지 요청했을까?

  느부갓네살왕은 자신이 꾼 꿈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중에 다니엘이 그 꿈에 대해 말하고 그 꿈에 대해서 해석하였을 때, 그가 보인 반응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그때 다니엘을 신처럼 예우해 주었다. 그렇다면 왕은 자신이 꾼 꿈이 무엇이었는지 다 알고 있으면서 왜 그 꿈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려달라고 했으며, 그 꿈의 해석을 보이라고 명령했던 것인가? 그것은 그것이 자신의 신상이나 자신의 제국에 관한 불길한 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것이 아마도 왕이 죽임당하거나 자신의 왕국을 파괴될 것이라는 암시를 받았기 때문에, 그 꿈을 그대로 이야기했다가는 자신과 자신의 왕국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 때문에, 또한 갈대아술사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아니 그 이야기를 듣기 전에 무슨 일을 벌이게 될지 몰른다고 판단했기에 그 꿈 자체를 말해보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불길한 꿈을 그들에게 결코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4. 느부갓네살왕은 왜 꿈을 꾸었을까?

  그렇다면, 느부갓네살왕은 왜  꿈을 꾼 것일까? 참 난처한 질문이다. 누가 꿈을 꾼 것을 두고서 왜 꿈을  꾸게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더이상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이 꿈을 굴 때에 꼭 어떤 이유가 있어서 꿈을 꾸는 것이 아니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왜냐하면 왕이 침상에서 매우 고민하다가 잠이 든 상태에서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단2:29). 그것은 왕이 장래에 있을 일들을 골똘히 생각하다가 잠이 든 상태에서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사실 구약시대까지만 해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신과 자신의 뜻을 계시하는 방편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셨고, 천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시기도 하셨기 때문이다(히1:1).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간간히 꿈과 환상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구약시대에 야곱이나 요셉도 꿈을 잘 꾸었으며, 신약시대가 시작될 무렵 마리아의 남편 요셉도 꿈을 꾸어서 미래에 되어질 일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느부갓네살왕이 꾸었던 꿈은 하나님께서 꾸게 하신 꿈이 정확히 맞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치하하고 그들에게 좋은 직장을 주시고자 계획하신 것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꿈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왕에게 일부러 꾸게 하신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왕에게 연거푸 꿈을 꾸게 하셨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니엘이 쓰임받을 수 있는 상황을 마련하여서 다니엘을 높여주기 위함이었다. 그 이유는 에스겔서를 읽어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왜냐하면 겔11:23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남유다가 멸망받기 5년전에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셨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성전마저도 온갖 우상으로 뒤덮혀 있어서 하나님께서 더이상 계실 처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떠나 바벨론으로 가셨다(물론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신다. 그러나 당시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지에 대한 관점으로 말씀을 살펴보자). 그리고 그곳에 가셔서 비록 포로로 끌려갔으나 뜻을 정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보신 것이다(이것이 다니엘 1장의 사건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남유다의 포로민으로 끌려갔지만 왕궁자문위원외 되기 위해 발탁된 탁월한 인재들이었다. 그러므로 3년간의 왕국자문학교를 잘 마치게 되면 그들의 출세는 완전히 보장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출세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을 택했다. 그것은 3년간 왕이 내린 음식과 포도주를 거절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그 귀한 출세의 기회를 잃게 될 수도 있었고 잘못하면 처벌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뜻을 정하여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왕의 말보다 더 소중하게 여긴 것이다. 즉 그들은 3년내내 왕이 내린 하사품 음식을 먹어야 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먹기를 거부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진미 중에는 피를 빼지도 않는 채 잡은 짐승도 있었을 테고, 이방신전에 바쳐진 고기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의 결단이 하나님의 눈에 들었고 그것은 매우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말았다. 정작 고국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성전에서까지 우상을 숭배하는 일을 자행하고 있는데,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비록 포로로 잡혀갔지만 거기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고자 몸부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제 14~15살밖에 먹지 않은 소년들이 말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기특했겠는가?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우선적으로 그들에게 학문하는 지혜와 분별력과 명철함을 주셨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이 일에 주도적으로 앞장섰던 다니엘에게는 꿈과 환상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덤으로 주셨다. 하지만 다니엘은 자신이 그러한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떠벌릴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왕으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한 것이다. 그래서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왕궁자문위원을 찾아내어 꿈을 알게 하고 해석하게 함으로서, 다니엘과 그리고 그 세 친구들을 복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꿈은 하나님만이 아시고 있는 꿈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뛰어난 바벨론 술사라 할지라도 그것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5. 다니엘은 그 꿈을 어떻게 알 수 있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다니엘은 그 꿈을 어떻게 알 수 있게 되었는가? 그도 처음에는 그 꿈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몰랐다. 남의 머릿 속으로 들어가보지 않는 한 어찌 그 꿈의 내용을 알 수 있겠는가? 그것은 상대방의 생각을 읽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바벨론의 그 어떤 술사들도 그 꿈을 알아맞추지 못했다. 그러자 느부갓네살은 근위대장 아리옥을 불러 왕궁의 술사들을 전부 죽이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이젯 갓 왕궁자문학교를 나와 임관만 했을 뿐, 아직 사역지를 얻지 못한 채 있는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자기의 일자리가 필요한 상태였다. 그런데 다니엘이 급히 나가는 아리옥을 보게 된다. 자초지종을 들은 다니엘은 침착하게 대처하기 시작한다.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왕께 그 꿈의 내용과 그 꿈을 해석해주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는 급히 세 친구들에게 중보기도 요청을 한다. "친구들아, 나를 위해 기도해다오. 그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으로 느부갓네살왕이 꾼 꿈을 알려달라고 기도해 주렴. 그리고 나와 너희들 그리고 바벨론의 다른 지혜자들이 죽지 않게금 기도해다오." 즉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기도에 들어갔고, 그러자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느부갓네살왕으로 하여금 꾸게 하였던 꿈을 다니엘에게 즉시 보여주신다. 하나님께서도 빨리 응답해야 할 때에는 빨리 응답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6. 왕의 꾸었던 꿈을 알게 되었던 다니엘이 맨 처음 한 일은 무엇인가?

  그런데 놀랍게도 다니엘이 하나님께서 보여준 환상을 통해서 느부갓네살이 꾼 꿈의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에 그는 어떤 행동을 했을까? 그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찬송을 올린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찬송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에 대해 찬양한다. 그는 이제 19~20살정도밖에 되지 않는 청년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는 기도응답을 받은 이후에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벌써 그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고 있었다. 그는 말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끝이 없어서, 그분이야말로 때와 기한을 바꾸실 수 있고, 왕들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시는 전능한 분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가 환상을 보면서 이미 그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에게 환상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지혜자이심으로 땅에 있는 사람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은밀한 것까지 알게 하시는 분이신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는 즉시 왕의 근위대장인 아리옥을 만나서 자신을 왕 앞으로 인도해달라고 요청한다.

 

7. 다니엘이 왕에게 말했던 그 꿈과 그 꿈에 대한 해석은 장차 어떤 일들에 관한 것이었는가?

  다니엘이 꾸었던 꿈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거대한 하나의 신상(사람의 형상)에 대한 꿈이었다. 그 신상의 "머리"는 "순금"이었고, "가슴과 두 팔"은 "은"이었으며, "배와 넓적다리"는 "놋(정확히는 청동=구리와 주석의 합금)"이었고, 그 신상의 "종아리"는 "쇠(철)"였으며, 그 "발"은 얼마는 "쇠(철)"였지만 얼마는 "진흙"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사람의 손대지 아니한 돌(다듬지 아니한 돌)이 날아오더니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랬더니 쇠와 진흙, 놋, 은, 금이 차례대로 부서져서는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더니 바람에 불려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신상을 쳤던 돌은 점차 태산을 이루더니 온 땅에 가득차는 것이었다. 한편 다니엘이 보았던 꿈은 정확히 느부갓네살왕의 꾼 꿈과 일치했다.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이 꾸도록 하였으며, 그것을 하나님께서 다니엘에 고스란히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제부터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왜냐하면 이 신상은 지금 있는 바벨론제국과 그 뒤를 이어서 일어난 또 다른 제국들을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다니엘은 이 신상에 대하여 그 신상의 각 부분(파트)의 재료에 따라 각기 다른 나라들(왕국들)이라고 해석했다. 그래도 당시 다니엘은 바벨론제국 하에 있었으며, 금머리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으로 해석했을 뿐 다른 것은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다만 아래로 내려가면서 "왕보다 열등한 나라", "셋째 나라", "넷째 나라" 등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들이 어떤 이름의 나라가 될 것인지에 관해서는 그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느부갓네살이 보았던 신상의 모습은 어떤 일정한 법칙이나 규칙같은 것으로 배열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수록 그 재료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아마도 제국들의 영적인 도덕적인 부패가 갈수록 심화되고 나빠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찌 되었든지 느부갓네살왕의 꾼 꿈은 다벨론제국을 시작하여 바벨론보다 더 못한 나라가 일어나고, 또한 그 다음에 그 앞의 나라보다 더 못한 나라가 일어나되, 네번째 나라까지 일어난 후에, 10발가락시대에 들어간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문제는 오늘날 유대인 랍비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개신교회 교회에서는 이 신상에 대한 꿈을 대부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는 것이다. 즉 이 신상의 "금 머리"는 "바벨론제국"을 의미하고, 가슴과 두 팔은 "메대와 바사 제국"을 의미며, 배와 넓적다리"는 "헬라(그리스)제국"을 의미하고, 두 종아리는 "로마제국"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문제는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는 로마제국의 통치연도와 더불어 "손대지 않은 돌(뜨인 돌)"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이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해석으로 갈린다. 하나는 뜨인 돌은 "초림하실 예수"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뜨인 돌은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앞의 해석은 무천년설주의자들의 해석이요, 뒤의 해석은 세대주의자들의 해석이다. 어떤 것을 대입해서 상관은 없겠으나 성경은 초림의 예수께서 오시는 것을 예표인 것이고 장차 재림하실 그리스도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는가 싶다.

 

8. 다니엘의 꿈해석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다니엘이 해석한 큰 신상에 대한 해석은 어떠한 방식으로 하든지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3가지다. 첫째로, 다니엘은 오직 하나님만이 비밀한 것을 나타내시고 후일에 될 일을 말씀하실 수 있다고 계속해서 말함으로서 바벨론왕 앞에서 자기는 낮추고 오직 하나님만 높였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하나의 왕들이 세워지고 폐해지는 모든 것과 한 나라와 민족이 세워지고 폐해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관하심 하에 일어난다고 했다는 사실다. 다만 언제 누가 그 일을 성취할 것인가는 그때에 태어나는 사람들에 의해 정해질 것이다. 그렇다. 메대가 일어나 앗수르제국을 멸망시키고, 바벨론이 일어나 애굽과 남유다를 멸망시켰던 것도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진행되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셋째로, 이 세상에 완전한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 완전한 나라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늘의 왕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영적인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나 이 세상에 기대어서는 아니 된다. 이 세상은 우리가 나그네로 살아갈 정거장인 것이지 여기서 우리가 살 영원한 거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이사갈 준비를 해야 한다. 주님이 오라하시면 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9. 꿈을 해석한 후에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받은 축복은 무엇이었는가?

  느부갓네살왕은 다니엘이 자신의 꿈을 말하고 꿈을 해석하자 그만 그자리에 엎드리고 만다. 그리고 다니엘을 경배한다. 그리고 그에게 예물과 향품을 바치도록 한다(단2:46). 이 모습은 느부갓네살왕이 다니엘을 신적인 존재로 예우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어느 누가 다니엘처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도 다니엘의 해석을 통하여 이렇게 고백한다. "너희의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단2:47)" 이것은 느부갓네살왕도 자신이 섬기던 신들보다 다니엘이 섬기던 신이 훨씬 더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한 고백이 아닐 수 없다. 갓 20살된 다니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지고 있다. 그리고 다니엘은 귀한 선물을 더 받게 된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왕은 그를 바벨론 온 지방의 통치자로 삼았으며, 또한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의 어른으로 삼는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왕은 다니엘의 청원을 따라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었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의 태수로 임명하였고, 다니엘은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왕을 보필하는 사람이 되게 하였던 것이다. 이는 다니엘이 자신을 위해 중보기도해 준 친구들의 은혜를 잊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10. 나오며

  다니엘은 참으로 총명하고 지혜로운 자다. 더불어 그는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고 신뢰하는 자다. 그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현장에 있을 때에도 결코 경황없이 행동하지 않았으며, 어떤 문제이든지 모든 문제의 해결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항상 자신이 어디에 위치해 있어해야 하는지를 잘 아는 자였다. 그는 절대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끼워넣지 않았다. 자신은 다만 하나님의 보잘 것없는 종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만물의 주관자요 통치자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 힘썼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다니엘은 자기가 섬기는 주군이 누구라는 것을 꼭 인지하고 붙들었다. 불신자라고 해서 왕을 무시하지도 않았으며, 대제국의 왕이라고 해서 그를 하나님보다 더 높이 여기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나 하늘과 지상의 상하위계질서를 따라 충성했으며, 또한 자신의 위치에서 성실하게 일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바벨론제국이 멸망하기까지 바벨론에서 총리의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심지어 바벨론을 멸망시킨 메대와 바사국에서도 총리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20년 03월 25일(수)

정병진목사

  


세상역사에 있어서 갈그미스 전투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사실 성경에서도 1차 갈그미스전투(대하35:20)와 2차 갈그미스 전투(렘46:2)가 등장한다. 다니엘은 이중에서 두번째 갈그미스 전투 후, 바벨론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인물이다. 그때 그의 나이는 14세쯤이었다. 그런데 그 어린 나이에 그는 자신의 운명을 새롭게 바꿀 위대한 결단을 하게 된다. 그의 결단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그가 받게 된 축복은 무엇이었는가? 오늘은 느부갓네살과 다니엘의 첫대면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을 들여다보자.

2020-03-18(수) 수요기도회
제목: 다니엘강해(02) 뜻을 정한 다니엘과 그가 받은 복(단1:1~21)
https://youtu.be/LNzUsy03a3M


1. 들어가며

    다니엘서는 역사서요 예언서이며 묵시서다. 그중에서 다니엘 전반부(1~6장)은 역사서이자 반묵시서이고, 다니엘서 후반부(7~12장)은 예언서이자 묵시서다. 다니엘서가 놀라운 것은 전세계 대제국들의 흥하고 망하는 거대한 이야기 속에 한낱 작은 몇몇 포로민의 이야기가 어떻게 제국을 뒤흔들어놓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예루살렘 떠나 바벨론으로 오게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사실 너무나 작디 작은 사람들에게 속한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살아있는 신앙의 이야기는 대제국을 뒤흔들며, 하나님의 보좌까지 움직인다. 이것이 다니엘서의 장엄스타일이다. 그중에서 오늘 이 시간에는 신바벨론(바빌로니아) 제국의 2대왕이었던 느부갓네살왕과 다니엘과의 첫 대면의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 다니엘은 어떤 사람이었으며, 그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어놓게 되었는지 그리고 포로민이었지만 어떻게 세상제국의 황제로부터도 감탄할 만한 사람이 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소년이었던 다니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다니엘이 살던 시기는 세계정세가 매우 복잡한 시기였다. 앗수르제국이 멸망하고 신흥 바벨론제국이 일어나고 있었고, 애굽의 바로 느고왕은 유대땅을 지나가면서 한사코 간섭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B.C.606년 제2차 갈그미스전투에서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이 승리함에 따라, 남유다 제18대 여호야김왕 3년에 예루살렘성을 에워싼 후 여호야김으로부터 성전의 기명들을 빼앗고 왕족과 귀족들을 이끌고 바벨론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무리들 중에 바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끼어 있었던 것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던  때는 그들의 나이는 약 14세쯤 될 때였다. 다니엘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다니엘에게 있어서 그 끝은 바벨론을 멸망시킨 메대와 그리고 바사 나라의 고레스왕까지 이어진다. 그에게 있어서 약 80~85년간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여기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3. 왜 다니엘은 바벨론에 끌려가게 되었는가?

  당시 세계정세는 급속히 신흥 대제국이었던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바벨론 느부갓네살왕의 아버지였던 나보폴랏사르(B.C.625~605)는 메대와 연합군이 되어 되어 앗수르를 정복한 후(B.C.612), 그 여세를 몰아 애굽까지 정복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후 바벨론의 초대왕 나보폴랏사르는 갈그미스에서 제1차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때 메대와 바벨론의 연합군에 의해 1차로 멸망당했던 앗수르왕은 하란으로 이동하여 망명정부를 세웠으나 나보폴랏사르에게 또 한 번 패하고 이제는 애굽으로 피신하게 된다. 앗수르의 제28대 마지막 앗수르우발릿왕은 애굽의 원조를 받아 나포폴랏사르와 전쟁하려고 갈그미스로 올라가던 중에 때 아닌 복병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남유다 제16대 요시야왕이 애굽왕 바로느고의 앞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애굽왕 바로느고는 그냥 길만을 터주길 원했으나 요시아가 막아서자 그와 싸우게 되었는데(대하35:20), 그때 요시야왕은 므깃도에서 적이 쏜 화살에 중상을 입고 궁궐로 돌아왔으나 죽고 만다. 이어 대신들은 요시야왕의 둘째아들인 여호아하스를 제17대 남유다의 왕으로 세운다. 한편 갈그미스에서 제1차 전투가 시작되는데(제1차 갈그미스 전투), 그 전쟁은 무승부로 끝나게 된다.

  그러자 전쟁에서 돌아가던 애굽왕 바로느고는 리블라에서 남유다 여호아하스왕을 만나 그를 폐위시키고 25살의 요시야왕의 첫째아들 엘리야김을 여호야김으로 개명한 뒤에 자신의 통치하에 둔다. 그러자 다시 바벨론왕 나보폴랏사르가 제2차 전쟁을 하러 갈그미스로 올라오는데 지병으로 인하여 갑자기 환궁하게 되자, 이제는 그의 아들 느부갓네살이 군대를 이끌고 갈그미스로 가서 애굽왕 바로와 제2차로 갈그미스 전쟁을 치른다(렘46:2). 그런데 놀랍게도 느부갓네살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그러자 남유다로 내려간 느부갓네살은 남유다의 여호야김 왕을 붙잡아 그로부터 성전기명들을 빼앗고 왕족과 귀족들을 포로로 잡아 바벨론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때 포로의 무리에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다니엘서 1:1의 배경이다.

 

4.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왕이 끌어온 포로민족을 위해 실시한 정책은 무엇이었는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은 포로로 잡아온 민족의 소년들을 하루 빨리 자신의 백성으로 정착시키고자 인재등용을 시도했는데, 그것은 잡아온 포로민 중에서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여 학문에 익숙하여 왕국에 모셔설만한 자들을 왕의 관료로 세우는 것이었다. 그때 유다포로민 중에서도 다니엘과 세 친구들(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도 다른 유다인들과 함께 왕실교육생으로 선발된다. 그후 그들은 3년간 갈대아사람의 학문(책)과 언어(아카드어)를 배워야 했다. 이때 환관장(궁중관리들의 최고 우두머리 책임자)은 그들의 이름부터 바꾸었다. 그래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이름은 유대식이름에서 바벨론식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다니엘"(하나님은 나의 심판)은 "벨드사살"(벨이여, 그의 생명을 보존하소서)로, "하나냐"(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와 "미사엘"(하나님 같은 자가 누구인가?)과 "아사랴"(여호와께서 도우신다)"는 각각 "사드락"(달신인 아쿠의 명령)과 "메삭"(아쿠와 같은 자가 누구인가?)과 "아벳느고"(느고의 신하)로 바뀌게 되었다. 이때 느부갓네살왕은 그들에게 대단한 호의를 베풀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 왕이 먹는 음식(기름진 고기음식)과 왕이 마시는 포도주를 먹는 것이었다. 만약 이들이 3년간의 훈련과정을 잘 마치고 왕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면 그들의 장래는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게 되었다.

 

5. 가만이 있으면 출세가도를 달리게 될 다니엘이었지만 그는 그때 어떤 결정을 내렸는가?

  그때였다. 다니엘은 왕이 먹는 기름진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를 자신을 더럽히지 않을 것을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 이전에 다니엘은 고기를 전혀먹지 않는 것도 아니었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고기 중에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음식을 먹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왕궁학교에 입학해보니 왕이 주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이 규례였던 것이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음식을 그대로 먹자니, 그 음식이 하나님께서 금한 부정한 고기음식이거나 피를 빼지도 않은 고기이거나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라면 그것은 율법을 범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음식을 거부한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하는 자신에게 주어진 출세의 기회를 박탈당할 수도 있었다. 아니 거기서 잘못될 경우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 길이 얼마나 위험하며 그 길이 얼마나 자신의 출세를 방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왕이 분정한 식사를 거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 다니엘의 세 친구들(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고 이 대열에 합류하기로 하였다.

 

6. 뜻을 정한 다니엘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셨는가?

  그런데 뜻을 정한 다니엘을 하나님께서는 보고 계셨다. 그래서 아직 14세밖에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자신의 출세까지도 기꺼이 내려놓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불쌍히 여겨주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왕궁학교의 교장이었던 환관장(모든 궁중관리들의 총 우두머리)와 감독관(중간관리자)의 마음에 그들을 불쌍히여기는 마음을 심어 주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니엘의 청원을 들었지만 그들을 처벌하지 않았으며,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게 있었다. 그때 환관장은 다니엘에게 말했다. 만약 다니엘이 청원한 대로 해 줄 경우,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얼굴이 초췌해지면 그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하는데 그때에는 자신의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였다. 다니엘의 기지가 발동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다니엘은 감독관에서 하나의 제안을 한다. 그날 후로 10일간 다니엘과 세 친구들에게는 채식(곡식과 과일들)과 물만 주어 먹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래서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자들보다 더 건강해지면 자기들의 청원대로 해주고, 그렇지 않으면 감독관의 뜻대로 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이에 허락하게 되었는데, 그 뒤에 어떻게 되었던 것일까? 놀랍게도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얼굴은 더 아름다워졌고 살은 더 윤택하게 되었다. 그래서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보였던 것이다. 그러자 그때부터 3년간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부정한 기름진 음식과 방탕하게 하는 술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7. 뜻을 정한 자에게 주어지는 보너스의 축복은 무엇인가?

  사실 어찌보면 이 어린 소년들의 결정은 무모한 일이었지만, 이들의 신앙의 아름다운 결단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 소년들의 삶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우선적으로는 그들을 담당하고 있는 관리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청원대로 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결국 이들은 3년동안 부정한 음식과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으면서 교육생의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둘째,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3가지 보너스의 은혜를 추가로 주셨다. 그것은 다니엘과 세 친구들에게 지식과 분별력과 지혜의 은사를 더해주셨다(단1:17). 이들은 사실 공부도 열심히 해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자들이었는데, 이것에다가 추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은 학문하는 은사를 더해주신 것이다. 셋째, 다니엘에게는 2가지 축복을 더 주셨으니 하나는 환상과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더해주셨고(단1:17), 또 하나는 오랫동안 관직에 머물 수 있도록 해 주셨다는 사실이다(단1:21, 6:28). 그래서 다니엘은 바베론의 제2대왕이었던 느부갓네살로부터 시작하여 바벨론을 물리친 메대나라에서도 국무총리의 일을 보았으며, 이어진 바파(페르시아) 제국에서도 왕의 높은 관리로서 쓰임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만약 다니엘이 14세에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었고(B.C.606), 그때부터 바사왕 고레스 원년까지(B.C.539) 관직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때 그의 나이는 약 81세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적어도 그가 바사왕 고레스 3년까지 생존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으니, 그는 거의 70년이상을 고위공직자로 왕을 섬기는 자로 쓰임받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8. 나오며

  다니엘서의 전반부(1~6장)의 주제는 매우 분명하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주님을 위해 신앙의 정절을 지키게 된다면 그를 하나님께서는 감찰하시사 그를 지켜주시며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다. 또한 궁극적으로는 그런 자들에게 보너스의 축복을 더해 주시고, 세상의 권력자들도 결국에는 그를 인정해 주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그렇다. 세상과 타협하면 쉬울 것이고 가는 길도 편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그 어떤 도움도 이끌어낼 수가 없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뜻을 정해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의 길을 가겠노라고 결정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현장에 직접 개입해 들어오신다. 다니엘은 비록 청소년(14~17살)의 나이였지만 이와같은 사실을 경험을 통해 일찌감치 터득하게 된다. 그러니 그는 죽는 그날까지 철저히 하나님만을 신뢰했으며, 또한 겸비했으며 나중에는 세상 사람들에게까지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오늘 나는 과연 쉽고 편하고 넓은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어렵지만 좁은 길로 행할 것인가? 그것은 바로 오늘 이 시간의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이다.

 

2020년 3월 18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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