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17(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이 시대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려면(마22:1~10)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cV92MY4BqSc  [혹은 https://tv.naver.com/v/28025134 ]

 

1. 들어가며

  이 시대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는 과연 어떤 교회일까? 그것은 뭐니뭐니해도 천국의 혼인 잔치에 더 많이 참여하는 사람들로 준비시켜 주는 교회가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아무리 즐겁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결국 천국의 혼인 잔치에 성도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러한 교회는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가 아니라 인간이 기뻐하는 교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말씀은 주님께서 직접적으로 가르쳐 준 말씀에 나온다(눅14:15). 그러므로 천국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신부들을 많이 산출하는 교회가 진짜 교회인 것을 잊지 말라. 그렇다면 과연 누가 천국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될까? 그건 만세 전부터 예정된 자들이 들어가게 되는가? 아니면 누구든지 그 잔치 소식을 들었을 때에 그것을 믿고 받아들여 그 초청에 응하는 자가 들어가게 되는가? 만약 천국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만세 전에 있었던 예정을 따라 되는 것이라면 그중에 한 사람도 탈락되는 사람은 없는 것일까? 혹시 그 잔치 안으로 초청을 받았으나 그만 세상일이 좋아서 또한 천국 잔치가 싫어서 거부한 자라도 그 사람이 예정된 채 있는 자라면 다 들어가게 되는가? 과연 천국 혼인 잔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속한 영역이어서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시는가 아니면 인간의 자유 의지가 어느 정도 개입되는 성질의 것인가? 

 

2. 마태복음 22장 1~14절의 비유 말씀은 어떤 말씀인가?

  마태복음 22장 1~14절의 말씀은 천국의 혼인 잔치에 초청함을 받은 자는 많지만 실제로 거기에 참여하는 자는 소수 뿐일 것이라는 교훈에 관한 비유 말씀이다. 이 말씀은 2가지 비유이다. 앞의 비유(1~10절)는 혼인 잔치에 이미 초청을 받은 자가 실제 당일에는 초청을 거부하여 참여하지 못하게 되지만 오히려 원래 초청의 대상에는 없었으나 이방인이 오히려 천국의 혼인 잔치의 들어가게 되므로 잔치 자리가 가득하게 되었다는 비유 말씀이다. 그리고 뒤의 비유(11~14절)는 천국 혼인 잔치에 참여한 자들 중에 예복을 입지 않고 있는 한 사람이 주인에게 발각되어 수족이 결박된 채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게 된다는 비유 말씀이다. 

  그런데 사실 혼인 잔치에 관한 비유 말씀들(1~14절)은 앞에서부터 시작된 비유 말씀들의 세 번째 부분에 해당한다. 주님께서는 이미 유대인들 특히 유대 종교지도자들과의 논쟁 가운데서 2개의 비유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중 첫 번째 비유는 "두 아들의 비유"(마21:28~32)로서,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때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들아,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그러자 첫째 아들은 간다고 해놓고서는 가지 않았지만, 둘째 아들은 가기 싫다고 해놓고서는 뉘우치고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들에게 묻는다. "누가 과연 아버지의 뜻대로 행했느냐?" 그러자 그들이 말한다. "둘째 아들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세리와 창녀들이 그들들(유대 종교지도자들=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왕국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그 이유는 바로 세례 요한이 회개를 외쳤을 때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반응하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비유는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마21:33~41)말씀이다. 어느 날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든 후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떠난 후에, 소출을 받을 날이 가까이 다가오자 자기의 종들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받은 농부들이 주인의 종들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치고 만다. 그러자 주인은 더 많은 종들을 보내게 되지만 똑같이 대우하는 것을 보고는, 자기의 아들은 존대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아들을 보내게 된다. 그러자 농부들은 그는 상속자라면서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고 하고서는 포도원 밖에 내쫓아 그를 살해하고 만다. 그러자 주인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 것이라고 했다는 말씀이 두 번째 비유이다. 이 말씀은 결국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빼앗기게 될 것이고 오히려 열매를 백성인 이방인들이 받게 될 것이라는 비유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어서 세 번째 비유로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혼인 잔치의 비유"(마22:1~14)를 들려주신다. 

 

3. 혼인 잔치의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누구누구를 뜻하는가?

  오늘 본문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최소 여덟 종류의 등장 인물이 나온다. 왕(하나님), 왕의 아들(예수님), 왕의 종들(주님이 보낸 종들), 왕의 군대(하나님이 보낸 심판자들), 미리 초청받은 이들(유대인들), 나중에 초대받은 이들(이방인들), 손님들(혼인 잔치 자리에 참여한 사람들), 사환들(천사들)이 그들이다. 이중에서 첫째로, 왕은 '하나님'을 지칭한다. 왕은 자기의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준비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왕은 자기 아들의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그 나라의 왕이다. 그리고 둘째로, 아들은 이야기 전개 속에서만 나오는데, 이날 결혼식의 주인공으로서 신랑되신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리고 셋째로, 왕의 종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두 종류의 사람들이다. 하나는 이미 초청 대상으로 선정된 자들에게 먼저 보낸 종들로서, 이때 초청받은 자들은 혼인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이내 보낸 종들은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또 하나는 초청받은 자가 오기를 거부하자 다시 보낸 다른 종들이다. 그러자 이미 초청받은 자들 중에서 두 부류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그 외에 남은 자들은 종들에게 모욕을 주고 그만 그 종들을 살해하고 만다. 여기서 '다른 종들'이라는 표현에서 '다른'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같은 종류의 다른'이라는 뜻을 가진 '알로스'라는 단어이다. 고로 이들은 예수님의 사도들이나 그 뒤에 보낸 전도자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중에 다시 초청받은 원래 초청함을 받은 자들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세 종류의 사람들로서, 하나는 밭을 샀다고 하고서 오지 않은 자요, 또 하나는 상업하러 가야 한다 하면서 참여하지 않은 자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나머지 사람들로서 주인이 보낸 종들을 모욕하고 죽였던 자들이다. 앞의 두 초청 대상자들은 '소유'와 '돈'에 집착하여 천국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가리키며, 뒤의 초청 대상자들은 평행 본문인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장가들어서 아내를 기쁘게 하려는 자로서 세상의 '쾌락'을 천국의 혼인 잔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자들이라고 하겠다. 넷째로, 왕의 군대들이 나온다. 이때 왕은 자신의 군대들을 보내 그들의 도시를 불태워 버린다. 이는 A.D.70년에 실제로 일어난다.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불태워졌고, 거기에 있던 120만 명의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섯째로, 나중에 초청받은 자들은 종들이 나가서 사거리(큰 길)의 출입구(길목)에서 발견했던 자들로서, 그들은 선한 자들도 있었고 악한 자들도 있었다. 이는 원래 초청 대상은 아니었지만 나중에 초청을 받아 천국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이방인들'을 지칭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배우겠지만 여섯째로, 손님들이 있는데, 이들은 그때 초청받아 피로연에 참석하고 있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그들은 손님들이 아니라, '식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는 자들'이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일곱째로,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사람이 있다. 이는 수족을 결박당한 채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던져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덟째 마지막으로, '사환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4. 믿음이 없어 천국의 혼인 잔치의 중요성을 잘 모르면 천국 혼인 잔치에 초청했을 때에 어떻게 반응하게 되는가?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그만 믿음이 없어 천국의 혼인 잔치의 중요성을 잘 모르게 된다면 초청 대상자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첫째로, 천국 혼인 잔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소유(밭)와 돈(장사)을 따라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로, 천국 혼인 잔치의 중요성을 잘 모르면 세상이 주는 쾌락(장가듦)을 천국의 혼인 잔치보다 더더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다. 셋째로, 이들 중에 이미 초청을 받은 채 있었던 자라 할지라도 막상 천국 혼인 잔치에 들어오라고 하면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될 것이다. 넷째로, 이렇게 되면 천국 혼인 잔치의 당일날이 찾아왔다고 할지라도 세상에 푹 빠져 영적인 일에는 도무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다섯째로, 천국의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는다고 하여도 실제로는 거절하고 말 것이다. 여섯째로, 천국의 혼인 잔치로 초대하는 자들을 오히려 잡아서 모욕을 주고 심지어 핍박하고 죽이는 일도 서슴없이 행할 것이다. 일곱째로, 이미 천국 잔치에 참여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 나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믿음으로 어찌하든지 천국의 혼인 잔치에 관심을 기울여 그 말씀을 들었을 때에는 모든 세상 관심사를 우선 내려놓고 천국 혼인 잔치의 초청을 받아들여 천국 혼인 잔치의 신부가 되고 피로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5. 오늘 비유의 핵심은 무엇이며, 유대인들의 혼인 잔치와 천국의 혼인 잔치는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사실 오늘 비유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1~2절에 나와 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이 비유의 핵심은 주인의 마음이다. 자기의 아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하객들이 축하하러 올 것인지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만약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의 피로연인데 그 자리에 참여하는 자가 없다면 그 잔치는 잔치가 아니라 슬픔의 장소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을 보니, 이 잔치를 주관하는 왕은 '사람인 왕'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2가지 뜻을 내포하는데, 하나는 하늘에서 진행될 천국 혼인 잔치가 이 세상의 결혼 잔치와 매우 닮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잔치를 배설하는 분이 '사람인 왕'으로 표현됨으로서, 한 분 하나님께서 잔치 자리의 배설자이자 아들로서 거기에 참석해 있는 자들의 신랑도 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의 혼인 잔치와 실제 천국의 혼인 잔치는 어떤 것은 같고 어떤 것은 다를까? 오늘날 세대주의자들은 이 두 잔치가 똑같은 것으로 해석하여, 7년 공중 혼인 잔치라는 교리를 만들어 내었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둘은 같은 것도 있지만 다른 것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 '같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둘 다 결혼식이 먼저 있고 나중에 피로연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둘은 서로 '다른 점'도 있다. 첫째는 유대인들의 혼인 잔치와는 달리 하늘의 혼인 잔치에서 신부들은 한 명이 아니라 단체적인 신부들이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둘째는 유대인들의 혼인 잔치에서 피로연의 예복은 주인이 조끼처럼 만든 것을 그냥 나눠 주지만, 천국에서 진행되는 혼인 잔치의 예복은 먼저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직접 준비해야 하는 예복이라는 점이다. 그것도 회개와 순종 그리고 충성으로 말이다. 이 뒷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더 자세하게 다루게 될 것이다. 

 

6. 누가 과연 결국 구원을 얻게 되는가?

  우리는 오늘 본문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결국 '구원론'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럼 구원의 완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천국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날 어떻게 될 것인지 혹시 들어보았는가? 그날 결혼식이 진행될 때에는 오늘날의 스타디움처럼 생긴 '영광의 광장'에 입성하게 될 것이다. 들어가는 순서가 있고 치장도 다르고 환영하는 수준도 다르다. 그럼 누가 들어가는가?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먼저 그곳에 초청되었던 자들 중에는 한 명도 못 들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천국의 피로연 자리가 많이 비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주인은 사거리에 나가서 이방인들이라도 혼인 잔치 소식을 전해 주어 그들이라도 들어오게 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렇지 않다고들 말한다. 이미 만세 전에 구원받기로(천국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는 자들만이 그곳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래서 그들이 주장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것에 관해 어마어마한 분량의 책을 쓴 분들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 나온 수많은 성경 구절을 다 읽어 보았지만, 실제 만세 전에 이미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만이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된다는 말씀은 단 한 구절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근거로 대는 말씀 중에 요한복음 5:24이나 요10:28~29 혹은 엡2:8~9 등의 많은 말씀을 다 읽어 보아도, 거기에는 만세 전에 예정된 자만이 들어간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전부다 해석을 자기들이 이미 정해 놓고 거기에 갖다 붙이는 형식으로 말하고 있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요10:28~29의 말씀도 그렇다. 그들은 이렇게 해석한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영생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스스로 영원히 멸망당하지 않는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예수님에게 붙여 주신 하나님은 너무나 크신 분이기 때문에,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부터 그들을 빼앗아 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한 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2가지 커다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들의 가정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구원받을 이들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자들"이라고 이미 정의를 내려놓고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은 헬라어 원문을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29절을 헬라어 원문으로 읽어 보라. 개역 성경과 다르다. 하늘 아버지께서 그들(양들)을 예수님에게 주셨다는 말씀이 나오지 않는다. "나의 아버지께서 이미 나에게 주신 채 있는 것(중성,단수)은 모든 것들보다 크다"고 나와 있다. 즉 예수께서 영생을 주시려고 하는 자들은 주님께서 꼭 구원하실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무엇인가 주신다는 말씀이 있을 뿐이다. 그러한 것에는 하늘의 권세나 능력, 지혜 같은 것들일 것이다. 이런 것들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보다 더 크기 때문에 아무도 예수님으로부터 그들을 낚아채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이때 양들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만세 전에 예정된 자들인가? 아니다. 그것은 27절에 나와 있다. 27절 말씀을 직역해 보자. "내 양들은 내 음성을 듣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안다. 그리고 그것들은 나를 따르고 있다" 그렇다. 누가 결국 영생을 얻게 되고 멸망케 되지 아니하는가? 그것은 주님의 양들로서 지금도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 자요 주님에 의해서 아신 바 된 자요 주님을 따르고 있는 자다.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주님의 초청에 현재 응하고 있는 자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만약 주님의 음성듣기를 거절하고 주님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가 주님을 만나게 된 자는 결국 영생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며 멸망을 보게 될 것이다. 결국 먼저 초청을 받아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지금 당장 들어가야 할 천국의 혼인 잔치에 들어갈 합당한 준비를 하고 있지 않으면, 결국 천국의 혼인 잔치에 못 들어가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날마다 매순간 천국 혼인 잔치에 들어갈 준비를 현재 하고 있어야 한다. 

 

7. 칼빈의 이중예정론은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존 칼빈(장 깔뱅)(A.D.1509~1564)은 석학으로서 매우 훌륭한 사람이다. 그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성경주석들을 저술했으며, 기독교의 신앙의 근간이 될만한 [기독교강요]를 저술했다. 그는 스위스의 제네바 시를 신정국가를 만들기 위해 법을 제정하고 시도했으며,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요리문답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그리고 세속적인 직업이라도 하늘의 부르심이라고 해석한 자가 바로 칼빈이다. 그런데 그가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기독교강요] 맨 마지막 판(제4판, 1559년)에 가서는 그만 예정론에 놀라운 손질을 가하게 된다. 그의 기독교강요 제4판 제3권 21장~24장을 읽어 보았는가? 거기를 읽어 보면 그의 예정론이 얼마나 잘못 빗나가고 있는지를 발견할 것이다. 그 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개인은 구원받도록(천국에 들어가도록) 예정하셨고, 어떤 개인은 멸망받도록(지옥에 떨어지도록) 예정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러한 예정은 불변적이며 불가항력적이며 무조건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을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데에는 사람의 행위를 보신 후에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 만세 전에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성경과는 다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를 구원받을(천국보낼) 자와 멸망받을(지옥보낼) 자로 정했다는 말씀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불변적이며 불가항력적이고 무조건적이라는 말도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구원과 멸망을 정해 놓고 우리 더러 그걸 받아들이라고 한다면 그분은 편애자이면서 동시에 폭군임에 틀림없다. 이미 정해 놓고 우리에게 그것을 강요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주님이 정한 것이라면 왜 우리를 훗날에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시는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감당해야 할 어떤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미 천국과 지옥이 정해져 있고 불변하는 것이라면 왜 우리더러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시며, '누구든지 내게로 나아와 말씀을 들으라'. '회개하라'면서 우리에게 어떤 결단을 촉구하시겠는가?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면 우리는 왜 매주일 교회에 나와서 설교를 들어야 하며, 나가서 전도해야 하는가? 그럴 필요가 없다. 고로, 칼빈의 [기독교강요] 제4판에 나오는 이중예정론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만, 이러한 것은 있다.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도록 예정하여 보낸 자들 곧 사명적 예정자들은 있는 것이다. 이는 사역적인 예정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구원 예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다만 누구를 구원으로 먼저 초청할 것인지도 주님은 예정하셨다. 그것은 예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하나님의 약속으로서, 먼저는 유대인이요 그 다음은 이방인으로 순서를 정해 놓으셨다. 

  더욱이 그의 [기독교강요]에 나오는 예정론 교리는 시간이 흐르자 알미니안주의자들과의 논쟁을 통해 5대 교리(전적 타락,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인 은혜, 성도의 견인)로 정착이 된다. 이것들 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성도의 견인'교리다. 그의 [기독교강요]의 성도의 견인교리는 나중에 "도르트 회의"(A.D.1618)를 거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A.D.1648)으로 정착이 되는데, 33개 조항의 칼빈주의적 장로교 신앙고백서로서, 제17조 1항은 이렇게 나와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 안에서 용납해 주시고 그의 성령으로써 효력있게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타락할 수 없으며 마지막까지 그 상태에서 꾸준히 인내하여 머물러 있게 되며 또한 영원히 구원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더더욱 아니다. 한 번 구원받은 자는 영원히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번 구원을 받은 자라도 많이 탈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칼빈은 만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는 전적으로 혹은 최종적으로 타락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것도 아니다. 얼마든지 타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12제자 중 가룟 유다를 보라.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선택을 받았지만 타락하여 자살했다. 또한 초대 교회의 성도였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보라. 그들도 십계명을 어겼다가 징계받아 즉시 죽었으며(행5장), 에베소교회의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믿음에서 파선하고 말았다(딤전1:19~20). 히브리서에는 구원 탈락에 관한 경고가 무려 5번이나 나오고 있으며, 유다서에도 나온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이미 구원받아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라도 이기지 못하는 자는 결국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진 채 성밖으로 쫓겨나고 만다(계3:5, 21:27). 만약 한 번 구원이 영원하다면 예수님의 사역자로 직접 부름을 받아 쓰임을 받은 사도 바울일지라도, 왜 빌립보 성도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말했겠으며(빌2:12),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자신은 이미 열심히 경주하고 있지만 자기가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하고 있는 것은 자기가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한다고 말했겠는가?(고전9:27). 그리고 자신이 죽기 전에 썼던 디모데후서에는 자신도 선한 [영적인] 싸움을 싸우고 자신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기까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노라고 왜 말하였던 것인가?(딤후4:7~8) 우리가 받은 구원은 확실한 구원인 것은 맞지만 그러나 구원의 안정성의 문제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역시 우리는 인간인지라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 가야 하는 것이다. 

 

8. 누가 결국에 천국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가?

  오늘 비유에 따르면 누가 과연 천국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지 나온다. 그것은 이미 초청함을 받은 채 있는 이들 곧 유대인들일지라도 막상 당일에 있는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한다면 그곳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전혀 생각하지 않은 시간에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아 그 자리에 참석하는 이들도 있다고 말한다. 이 비유에 따르면, 이들은 이방인들로서 천국의 혼인 잔치 자리에 들어가는 자들이다. 이들로 인해 잔치 자리는 사람들로 가득차게 된다. 그렇다. 자신은 당연히 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정작 혼인 잔치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오직 이 세상의 일들 곧 소유와 돈과 쾌락에 집착하고 있는 자는 결국 그 잔치에 못 들어갈 것이다. 그렇다. 천국 혼인 잔치에 들어갈 자로서 만세 전에 개인별로 예정이 확정된 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 모두는 지금 이 순간도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루어 구원을 완성해 가야 할 사람들이다.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의 숫자는 이미 정해져 있지만 그 자리에 필연적으로 그 사람이 들어가게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천국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 믿음을 저버리지 말고, 회개하고 말씀에 순종하면서 충성을 다해야 할 것이다. 

 

9. 나오며

  사실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그것은 아마도 천국에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먼저 초청을 받은 자라도 세상일을 위하여 하늘의 혼인 잔치의 초청을 뒤로 미루거나 거절하거나 혹은 싫어한다면 그는 결국 천국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자신이 선택받은 자라고 생각하는 자들 중에, 하나님께서 천국의 혼인 잔치에 초대하려고 보낸 종들을 잡아서 그들을 모욕하거나 핍박을 하거나 죽인 자들도 있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받아들일지는 본인의 소관이겠지만 우리는 칼빈의 경우처럼 한 번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는 반드시 천국에 들어가며 그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주장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럼 지금 나는 어떠한 사람으로 준비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나의 인생의 최대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점검해 보라. 그리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지금 내가 시간과 물질과 달란트를 어디에 쓰고 있는지를 살펴보라. 이 세상에서의 현실 문제에만 집착해 있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힘들다. 이 세상의 소유와 돈과 쾌락을 위해 주일을 밥먹듯이 빼먹는 자가 과연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을지 더욱더 미지수다. 물론 회개하고 다시 시작하면 되겠지만... 결국 천국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구원은 만세 전에 하나님에 의해 예정된 자들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혼인 잔치의 소식을 들었을 때에 그 초청에 응하는 자가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여러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초청을 듣겠지만 실제로 선택을 받아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자는 소수가 될 것이다(마22:14). 그것은 혼인 잔치의 예복을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은 다음주에 계속해서 살펴볼 것이다.

 

2022년 07월 17일(주일)

정병진목사

 

2022-07-10(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오늘날 구원을 위해 교회들이 목숨처럼 지켜내야 할 것은?(막6:10~13)_2022-07-10(주일)

https://youtu.be/gSYeRk8HDHc  [혹은 https://tv.naver.com/v/28024586 ]

 

1. 들어가며

  교회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 항상 우리 물으며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게 교회가 사회 기관 또는 친교 모임 기관으로 전락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럼, 예수께서는 교회의 존재 목적을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음부의 권세가 해하지 못하는 튼튼한 교회를 세우고, 교회생활하는 이들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가게 도와주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16:18~19). 그러므로 겉으 아무리 멋있게 보이고 건물이 화려해 보이며 사람이 많이 모이는 교회라고 할지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퍼센트가 적은 교회라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단지 인간의 친교 모임이 될 뿐인 것이다. 그래서 이번 주와 다음주는 교회 창립 기념 주일을 맞이하여 교회 교회되게 만들고 신앙생활하는 성도들로 하여금 꾸준히 천국에 들어가도록 돕는 교회가 되게 하려면 우리가 과연 목처럼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교회가 천국과 회개를 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가 대체로 타락하거나 세상이 부하게 되면 교회는 천국과 회개를 전하지 않는다. 중세 시대는 교회가 타락한 시대였고 오늘날은 세상이 부하게 된 시대다. 그러니 중세 시대에나 지금 시대에는 회개와 천국을 잘 전하지 않는다. 중세 시대에는 약 천 년 혹은 약 오백 년 동안 복음을 전할 때에 천국을 전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연옥에 빠지지 않을 것인지와 죽어서 이미 연옥에 빠져 있는 자신의 가족들을 어떻게 하면 연옥에서 천국으로 보낼 수 있는지를 전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현대 교회도 회개와 천국을 전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는지를 전해 왔다. 그 방법으로서 셀모임을 어떻게 잘 하는지, 제자훈련을 어떻게 하는지를 전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회개의 중요성을 빠뜨리며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 회개와 천국을 전하지 않을 때에는 과연 무엇을 전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는지를 잘못 가르쳐 주거나 혹은 너무 쉽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실제적인 방법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럼 중세 교회는 어떠했을까? 그때는 오직 교회의 사제 계급 곧 신부들의 고해성사를 통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전하였다. 그럼 왜 이렇게 천주교가 타락하게 되었는가?

 

3. 천주교회는 어떻게 천국복음을 전하지 않고 연옥복음을 전하게 되었는가?

  왜 천주교회는 참된 진리의 천국복음과 회개를 전해 주지 않았던 것인가? 그것은 천주교회의 타락과 그리고 세상과의 혼합주의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A.D.378년 로마의 다마수스(Damasus)가 '폰티펙스 막시무스'(라틴어: Pontifex Maximus) 곧 고대 로마의 국가 사제단(Collegium Pontificum)에 속한 최고 사제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A.D.590년 제63대 로마의 감독 그레고리 1세가 자신의 직함을 '교황'이라 사용하면서, 기독교는 로마의 이교도인 태양신 종교와 혼합을 이루게 된다. 그러자 천주교는 갖가지 이방 종교의 의식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이윽고 수많은 교리들을 양산해 내기 시작한다. 그중의 으뜸은 바로 '연옥'이라는 교리다. '연옥'이란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기는 죽었지만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이 가는 임시 감옥으로서,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구원에 대해 보장은 받았지만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정화의 과정을 거치는 장소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때부터 어떻게 하면 연옥에 빠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묻게 된다. 그러자 천주교회가 가르쳐 준 것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에에게 기도를 바치는 일부터 시작하여, 이미 자신의 선행과 공로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고도 남은 잉여 공로가 있는 성인들에게 기도를 바치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유품들도 효력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교회마다 앞다투어 성물을 가져다 놓고 그것을 숭배하고 찾았으니,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앞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을 때에도 비텐베르크 성당 앞에는 평소 3배가 넘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왜냐하면 비텐베르크 성당 안에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속옷과 십자가의 녹슨 못 1개 그리고 마리아의 머리카락 3개 그리고 불가타역 성경을 만들었던 제롬의 이빨 3개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드디어 A.D.1091년도부터다. 교회가 화려한 건축물을 지으려 하고 재정 축재를 하기 위해 재정 모으려다 보니 면죄부를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교황의 도장이 찍힌 면죄부를 사게 되면 연옥에 있는 영혼을 천국으로 보낼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평신도들로 하여금 성경을 보지 못하게 막아버렸다는 사실이다. 사실 정작 성경에는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알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천주교회는 그때부터 일반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그리고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지 못하게 했다. A.D.1123년부터 5차에 걸친 라테란 종교회의 결과 평신도가 성경을 소유하게 되면 종교 재판에 넘겨 온갖 고문을 하고 죽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때부터 마녀사냥을 시작했는데, 그렇게 해서 죽인 성도들의 수가 무려 6천만 명이었다고 한다. 

 

4. 천주교가 잃어버린 회개를 되찾아 준 인물은 누구였는가?

  그런데 이러한 천주교회의 연옥복음에 심히 괴로워하고 있는 신부가 한 사람 있었으니 그가 바로 '마르틴 루터'였다(A.D.1483~1546년). 그도 죄로부터 해방되어 살기를 원했으나 온갖 고행과 선행 그리고 거지 성지순례, 성인 숭배 등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는 괴로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어거스틴 수도원의 원장인 스타우핏츠 신부의 도움으로 성경을 접하고 성경을 읽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비로소 루터는 사람이 구원얻고 천국에 들어가려면 오직 의인은 믿음과 회개로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롬1:17, 합2:4, 시32:5). 그리고 드디어 만성절(모든 성인 대축일) 하루 전날에 비텐베르크 성당에 자신의 생각을 함께 토론해 보고자 95개 반박문을 게제하게 된다. 왜냐하면 당시 중세의 구원관이 성경에서 많이 빗나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그는 중세의 구원관 3가지 중에서 2가지 거부한다. 하나는 교회의 사제가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반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성도가 선행이나 공로가 있어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구원은 하나님의 작정과 구원에 달려있다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5. 루터가 성당문에 게제한 95개조 반박문의 핵심은 무엇인가?

  루터가 만성절 하루 전날에 나무로 된 성당문에 붙던 95개조 반박문을 읽어 보면 우리는 그가 대체적으로(학자마다 다르겠지만) 3가지 주제로 항의를 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렇다.

  첫째는 진정한 계속된 회개없이는 사제의 어떤 고해성사도 죄용서를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95개 조항의 첫 번째부터 4번째 조항이다. 그 조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1항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마4:17), 그분은 신자들의 전 생애에서 회개가 지속되기를 원하셨다. 
제2항 이 ‘회개하라’는 말씀은 고해성사 곧 사제들에 의해서 집행되어지는 고백과 속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아니 된다.
제3항,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는 마음 속에서의 참회만 국한하지 않는다. 만약 이러한 참회가 육신의 여러 가지 정욕들을 죽이는 외적인 표지들을 낳지 않는다면 그 참회는 아무것도 아니다.
제4항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존재하는 한(즉 진정한 내적인 참회가 없는 한), 죄의 형벌은 [계속] 존재하게 된다. 즉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죄의 형벌은] 존재하게 된다. 

  그렇다. 루터는 사람이 죄용서를 받는 것은 사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누구든지 개인적으로 직접 하나님에게 회개하면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죄를 고할 수 있으며 죄용서를 받을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제직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만제사장설).

  그리고 둘째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은 실제로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아무런 효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요, 째는 교황이 가지고 있다는 사죄권(천국 열쇠) 합당한 것이 아니며, 돈을 받고 면죄부를 발하는 권한이 교황에게는 없다는 것이었다. 루터의 이러한 주장 중 핵심적 조항은 다음과 같다. 

제5항 교황은 그 직권 혹은 교회법의 위세로 부과된 형벌 이외의 어떤 벌이든지 용서할 힘이나 뜻(意志)을 가지지 못한다.
제6항 교황은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였다는 것을 선언 혹은 시인하는 이외에 어떤 죄든지 사할 힘을 가지지 않는다. 참회에 관한 교회법은 산(生存) 사람에게만 부과되는 것이며, 죽은 자에게는 어떤 부담이든지 그 법(諸罰에 對한 敎會의 規定)에 의하여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
제10항 죽은 자에 대하여 연옥을 교회법적 형벌로 유지하려는 사제들의 행위는 무지하고 사악한 짓이다.
제22항 사실상 교황은 연옥에 있는 영혼에 대해서 어떤 형벌도 사할 수 없다. 이 형벌은 교회 법에 의하여 현세에서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제26항 교황은 열쇠(천국)의 힘으로 사죄를 허락할 수는 없다(사실 그와 같은 힘이란 것은 당치도 않다).
제27항 연보궤 안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이 연옥에서 빠져나온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제28항 돈이 연보궤 안에서 딸랑 소리를 낼 때 이득(利得)과 탐욕이 증가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제32항 면죄부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을지어다.
제36항 진정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은 그 누구든지 형벌과 죄로부터 완전히 사함을 받는데, 이는 면죄부 없이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제52항 면죄부로서 구원받을 것을 신뢰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

  결국 이러한 것들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사람이 자신의 선행과 공로, 성지순례와 같은 고행, 성자 유품과 유물 숭배를 통한 행위로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나 자신이 의롭다하심을 얻고 또한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여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루터는 중세 시대에 잃어버린 회개를 되찾아 진정한 회개만이 죄용서를 받게 해 준다는 것을 찾아낸 놀라운 중세 신학자였던 것이다. 

 

6. 루터의 공헌에 맞물려 그가 가졌던 한계는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루터의 모든 주장들은 다 들어맞는 것인가? 아니다. 그가 외쳤던 회개에 관한 부분과 연옥교리 및 교황 수위권에 있어서는 옳은 주장을 했지만 그가 주장한 모든 것이 다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3가지 측면에 있어서 한계를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첫째, 그는 구원을 위해서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로 행하는 모든 것은 무용지물이요 헛된 것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했다. 주님께서 인류를 위해 행하신 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을 때에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진다고 말한 것이다. 그것은 맞다. 하지만 그의 실수 여기서부터 발견된다. 그는 사람이 어떻게 죄용서를 받게 되는지까지는 정확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이후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는 그것이 면류관이 되고 상급이 되고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우리의 신분을 결정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만 생각을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행할 수 있는 자유 의지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오직 죄를 지을 수 있는 노예 의지만 남아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신성 모독죄라고 했으며, 인간이 자유 의지를 사용한다면 구원을 얻는데 적이 될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만약 우리에게 구원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책임이 없다면 왜 주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다 정해 놓고 하는 일을 가지고 말이다. 또한 왜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계속해서 회개하라고 명하셨겠는가? 왜 우리의 시인과 부인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강조하며 말했겠는가? 그리고 왜 구원을 얻기 위해서 주님에게로 나오라고 말씀하셨겠는가?(마5:39~40) 그렇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시면 우리가 반응함으로 구원을 받기 위해 나아오고 결단을 할 수 있는 의지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신다고 했다(마12:18~21).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우리는 꺾여지고 말 것이며, 우리의 심지는 꺼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면 우리가 꺾여진 갈대라도 다시 바로 세워지고, 꺼져가는 등불도 다시 타오를 수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초청하실 때 우리의 반응이다. 우리는 주님의 초청에 반응할 수 있는 정도의 자유 의지는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회개하여 깨끗함을 받으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된다면, 그 모든 것은 천국에서 상급이 되는 것이다. 회개하고 믿었으면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 천국을 위해 살고 천국복음을 전파해야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도 있고 주님 보좌 가까이 나아가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중세 교회와 싸우느라고 미 이런 것을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죄용서받는 것이 회개라는 것까지만 생각했던 것이다. 회개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상황이 그랬기에 어쩔 수 없지 아니했을까...

  둘째, 위와 맞물려서 또 한가지는 신약 성경 중에서 믿음으로서의 행위 곧 회개의 열매로서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나 유다서를 사도적인 저작으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그는 사실 성경을 잘 이해한 것이다. 그는 야고보서는 아브라함의 행위를 강조한 책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에 어긋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사도적인 저작으로 볼 수 없다고 했으며, 이는 지푸라기 서신에 불과하다고 자신의 야보고서 강해 서문에 밝히고 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쓴 이신칭의는 이방인들이 믿음 생활을 시작할 때 필요한 의가 어떻게 믿는 이들에게 전가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야고보가 쓴 야고보서는 인생의 결말에 갔을 때에 자신을 되돌아보건 믿음에 따른 행위가 하나도 없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죽은 것임을 주장하는 것이므로 그 각도가 다르다. 그리고 그는 야고보서가 그리스도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비난했는데, 그것도 잘못된 것이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 무려 21가지가 거의 인용다시피 하고 있으며, 예수님을 심판주(5:9), 재림주(5:8), 생명의 면류관의 수여자(1:12), 치유자(5:14~15)로서 묘사하고 있으며, 비록 자신이 예수님의 친동생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주님이 자신은 종이라고 칭했는데, 그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칭한 것이 무려 10번 이상이나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이것이 더욱 중요한데 그가 종교개혁을 통해서 이루어 놓은 놀라운 발견 곧 회개의 중요성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잃어버렸으며, 결국에는 사람의 구원을 하나님의 절대예정와 절대작정에 따른 구원을 주장하는 칼빈에게 종교개혁의 배턴을 그만 넘겨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는 끝까지 회개의 중요성을 외쳤어야 했다. 그리고 한 번 구원 영원한 구원이라는 잘못된 구원론을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구원론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으면, 그것을 바로 잡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바로 잡지 못한 채 쉽게 배턴을 다음 주자에게 넘겨줌으로서 결국 올바른 구원관의 퇴보를 가져오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다음주에 한 번 더 설교를 통해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7. 나오며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감사한 것은 루터가 중세의 500년간 잃어버린 회개를 되찾아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만으로도 정말 기뻐 춤을 추어야 한다. 비록 그가 '연옥'의 존재를 인정하였다고 할지라도, 그는 연옥의 실상에 대해서 분명한 관점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이 땅에서 수고하는 그 어떤 것도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밝히 드러내 주었다. 또한 참회에 대해서는 이 땅에서 현재 살고 있는 자에게 유효한 것이며,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가 되었든지 형벌과 죄로부터 완전히 사함을 받는다는 것도 드러내었다. 그리고 고해성사나 면죄부와 상관없이 죄용서가 일어난다는 것도 밝히 드러내었다. 아주 잘한 일이다. 그러나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그는 사람이 죄용서받는 것까지는 잘 말했으나, 구원받은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정말 너무나 무시해 버렸고 그것을 능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회개만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죄용서를 가져다 준다는 것을 이제 더 이상 사탄에게 내줄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죽는 날까지 사수해야 할 진리는 바로 진정한 회개만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게 해 주며, 이 땅에서도 벌을 면죄해 준다는 사실이다. 주님께 감사드린다. 그래서 이 시대에 주님께서 알려 주신 회개 이후의 삶에 관한 말씀들을 가슴에 새겨야 하겠다. 회개되어진 자유 의지로서 맡겨진 일에 충성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죽는 날,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면류관 얻고 보좌 자리를 차지하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주님 가까이에 서서 주님께 찬양하고 감격하며 예배할 그날을 위하여... 

 

2022년 07월 10일(주일)

정병진목사

 

 

 

 

성경적인 예정론은 무엇인가? 에베소서가 일러주는 예정론은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예정론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칼빈이 말했던 예정론은 올바른 것이었는가? 사람은 구원받기로 언제 예정되는가? 만세전인가 이 세상에서인가? 개인구원예정이 성경에 나오는가? 사역예정이 곧 개인구원예정인가? 그래서 오늘은 사도바울이 들려주는 예정론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2020-11-04 수요기도회
제목: 에베소서강해(03)_성경적인 참된 예정론은 어떤 것인가?(03)(엡1:3~1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ez-arByPKNQ [혹은 https://tv.naver.com/v/18186583 ]

 

1. 들어가며

   에베소서는 회람서신으로서 바울이 교회론에 관하여 쓴 책이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교회를 7가지 방면으로 소개하는데, 그 첫번째 정의가 바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 이에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교회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아주 소상하게 밝힌다. 그러므로 이 부분만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에베소서 1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경륜"이라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들이자 상속자로서 예정하셨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의 말씀에 이어서, 오늘은 하나님의 구원경륜과 더불어 하나님의 창세전 예정에 관하여 좀 더 들여다보려고 한다. 과연 칼빈의 후예들이 말했던 바, 칼빈의 예정에 관한 5대교리 곧 "전적타락,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속죄, 불가항력적인 은총, 성도의 견인"이 과연 얼마나 성경적이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늘 동행하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명철함이 이 메시지를 듣는 모든 성도와 함께 하기를 빈다. 

 

2.칼빈의 예정론은 과연 성경적인가?

  칼빈이 말하는 예정론은 흔히들 "이중예정론"이라고 불리운다.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그의 기쁘신 뜻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사람은 영생으로 예정하시고 어떤 사람은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하셨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은 칼빈의 예정론은 그의 생애의 후기에 비로소 발전되어 완성된 것이다. 그가 쓴 기독교강요 초판(1536년)에는 예정론이 들어있지 않다. 그러다가 제2판(1539년)에 비로소 17개의 장 중에서 한 장을 에정이 차지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3판(1543~1550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하지만 그의 기독교강요 최종판이었던 제4판(1559)에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예정론의 분량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총 25장 가운데, 무려 4장(21~24장)이 예정론으로 할애된 것이다.

  하지만 칼빈의 예정론을 들여다보면 사실은 그가 최초로 만들어낸 이론도 아니다. 그것은 중세의 어거스틴이 말했던 구원의 "신적 작정"을 확대해석하여 집대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인간의 멸망(유기)예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4판(1559년) 제21장 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작정이라고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영생으로 예정하며,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를 예정하셨다. 각 사람은 이중의 어느 한 쪽 결말에 이르도록 창조되었으며, 우리는 그를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한다"고 말했다.

  사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에 대해선 분명한 언급들이 있다(행4:28, 롬8:29~30, 고전2:7, 엡1:5,11). 특히 엡1:3~14절에 집중적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정이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정과 칼빈이 말하고 있는 예정이 다르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안타까운 것은 칼빈은 하나님을 폭군이자 잔인한 분으로 만들 수 있는 이중예정론을 들고 나왔다는 점이다. 그것도 불특정다수가 아니라, 어떤 개인을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구원과 멸망으로 예정하셨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예정론이 얼마나 하나님을 폭군 하나님으로 묘사하게 하는지를 알고, 그의 예정론의  위험성을 빨리 간파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예정론을 따라가다보면, 그의 개인멸망예정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고로 누구든지 그의 예정론 사상을 한 번 듣게 되면, 자신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있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자신이 이뤄가야될 구원에 대해 두렵고 떨림으로 나가지 않는다.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구원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자신의 자범죄를 통회자복하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게 되며, 신앙을 하나의 경주로 생각하지도 않게 된다. 

  그런데 칼빈의 이중예정론의 교리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정의 대상을 집단(공동체, 불특정다수)로 보지 않고, 개인으로 끌고가려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누구는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으셨고, 누구는 멸하기로 예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인간이 그것에 결코 항거할 수 없고, 왈가불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선하신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것이므로, 그냥 따르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그릇이 자기를 지으신 토기장이에게 저항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엄청 큰 실수요, 최악의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않고 미리 정하셨다고 정해놓음으로써, 인간에게는 "너희들은 입닥치고 있어"라고 말씀하시는 분으로밖에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구원에 있어서 주권이 절대적으로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속죄사역을 치르지 않았더라면 인간의 그 어떠한 수고나 노력도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문제는 개인의 구원과 이를 위한 하나님의 주권역사가 개인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진행된다고 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단 한 번도 개인을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는 말씀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서 롬9장에 나오는 "야곱과 에서"의 사건을 마치 개인구원예정의 예표인 것처럼 알고 있다. 칼빈이 자신의 개인구원예정론 교리를 만들 때에 롬9장의 야곱과 에서의 사례를 가져다 썼기 때문이다. 그 요지는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당신 뜻대로 야곱은 사랑하셨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과 틀린 진술이다. 왜냐하면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하신 일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큰 자(형인 에서)가 어린 자(동생인 야곱)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만 예언하셨을 뿐, 그들의 구원을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결정하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에서는 섬기는 자로, 야곱은 섬김을 받은 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 뿐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섬기는 자가 되었다고 해서 그는 구원을 못 받고, 섬김을 받는 자라고 해서 그는 꼭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가 남을 위해 많이 일하고 섬긴만큼 그는 천국에서 큰 상을 받게 될 것이다. 이렇듯, 이 땅에서 자신이 종으로 살도록 예정되었다(개인사역예정)는 사실이 구원을 잃게 된다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어떤 사람을 만세전에 영원한 멸망과 영원한 구원으로 예정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25장을 보라. 거기에 보면 에서와 야곱에 대한 기사가 나오는데, 이는 야곱과 에서의 문제는 두 민족간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야곱족속과 에서족속에 관한 예지예정을 이미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역예정 자체가 구원의 당락을 결정하는 것은 절대 아닌 것이다. 누구든지 메시야를 믿고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종이든 자유자든 상관없이, 그가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그리고 그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상관이 없이,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아니라면, 조선시대에 종으로 살던 사람은 한 사람도 구원받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개인구원예정이 성경에 나온다는 칼빈의 주장은 한 마디로 틀린 주장이다. 

 

3. 칼빈이 말하는 "무조건적인 선택"이란 어떤 것인가?

  칼빈은 그의 책인 "가독교강요(1559년)" 제21장~24장에서 창세전의 하나님의 구원예정에 관해 말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주장하는 데에 근거가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다 성경에서 가져온 말씀들을 논리적으로 맞추어 만들었기 때문이다. 굳이 그의 주장을 다섯 가지 항목으로 구분한다면, 다른 신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전적 타락" 내지는 "전적 무능력",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인 은총"이 있는데, 에베소서에서는 엡1:7에 그 근거가 나오며, 그리고 "무조건적인 선택"은 엡1:4절에서 근거가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도의 견인"은 엡2:8~9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칼빈의 예정론의 둘째항목으로서 "무조건적인 선택"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강요(1559년)" 제22장 5절에서 창세전에 성부 하나님께서 개인을 구원하고 유기하는 것에 관하여 절대적인 선택을 하셨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선택은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을 보시고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 즉 공로에 따른 어떤 결정이 아니라,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니 창세전에 그의 공로와는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로 하셨다고 했다. 그러나 칼빈의 이러한 비성경적인 주장을 간파했던 베자의 제자, 알미니우스는 칼빈이 성경에서 이러한 예정교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는 예지선택 혹은 예지선택을 주장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예지의 능력으로 사람의 믿음여부를 조건으로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예정했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성경적인 선택교리라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어떤 개인을 구원과 멸망으로 예정하신 일이 없되, 단 한 건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주님께 나오는 자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 구원을 받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적인 의지로서 일방적으로 결정하신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도록 초청하기는 하지만, 그 초청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구원이 결정되게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택교리에 관한 성경적인 견해는 어떠한가? 그것은 마22장에 나오는 어떤 임금이 자신의 아들을 위한 혼인잔치를 베푼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어떤 임금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베풀었다. 하지만 온다고 약속했던 자들은 한사코 사양하고는 오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주인은 자신의 아들을 위해 잔치에 참여할 예상인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만큼의 음식을 준비하였다. 이제 임금은 자신의 종들을 시켜 사거리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는대로 초청해서 데려오도록 했다. 그러자 종들이 나가서 그러한 사실을 전한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듣고 믿고 따라오는 자들은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차야 할 인원은 차지는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더 멀리 울타리 밖으로 나가서 강권하여 데려다가 혼인잔치의 빈 자리를 채우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혼인잔치에 사람들이 가득찼다. 주인이 생각하는 분량만큼 가득 찬 것이다. 그런데 누가 왔는가를 지켜보려 왕이 들어왔다. 그리고 어떤 친구를 향해 말했다. "친구여, 당신은 어찌하여 [잔치[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와 있느냐?" 그런데 그는 그 예복이 그렇게 중요한지를 잘 몰랐다. 사실 그 친구가 잔치자리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잘나서도 아니었고 권력이 있어서도 아니면 물질이 많아서도 아니었다. 잔치자리에 참여해 달라는 종의 초청소리를 듣고 자원하여 들어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들어올 때 종은 모든 손님에게 흰 옷 한 벌을 나누어주었고 그것을 입으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떤 친구가 그 옷을 소홀히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쫓겨나고 마는데, 그는 밖으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것이 이 비유의 중심이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결론적으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고 하였다. 그렇다.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누구에게든지 열려져 있는 것이다. 누구는 구원하기로 미리 정해놓지 않았다. 다만 잔치잔리에 참석할 사람들로서 부특정다수를 하나님께서 미리 마음에 작정해놓으신 것이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자가 그날 선택함을 입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고관대작이라 할지라도 그가 잔치자리에 참석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결코 잔치자리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적인 예정이다.  

 

4. 칼빈의 말하는 "불가항력적인 은총"과 "제한 속죄"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제는 칼빈의 예정론 가운데 네번째 항목인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제한 속죄'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이 교리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기록하고 있는 엡1:7을 근거로 나온 예정론의 항목들이다(물론 이러한 주장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에베소서 성경적인 근거를 대라고 한다면 이 구절을 댈 수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서, "그분의 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칼빈이 말한 바 "불가항력적인 은혜"란 무엇인가? 여기서 "불가항력적인 은혜"란 하나님께서 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베풀어주실 은총은 그 누구도 거부하거나 저항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사실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강해(1559년)" 제3권 제23장에서 하나님께서 한 번 사람을 구원하기로 정하시면, 인간의 자유의자로서는 결코 그것에 저항할 수 없다고 하였다. 사람의 뜻이 하나님을 저항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사람이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는 어떠한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무리 사랑을 베풀어주시려 해도 인간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마음을 닫아버린다면 하나님께서도 그를 억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의 고집을 강제로 꺾지 않으신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는 칼빈이 말하는 "제한 속죄'에 관해 살펴보자. 그는 "제한 속죄"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택함을 받은 자들만을 위하여 제한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피흘려 죽으신 것은 오직 성부가 선택한 자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의 책 "기독교강요(1559년)" 제22장 7절에  나오는 것으로써, 그는 전세계가 창조주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세상 자체는 예정한대로 자멸하게 그냥 내버려 두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한된 소수만을 저주와 진노와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내어 멸망의 운명을 면하게 하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아버지의 택자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는 어떠한가?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른지도 몰라도,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긍휼과 자비가 없으신 분으로 생각케 만들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온전한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딤전2:4). 그분은 자신을 믿을 자를 위해서만 화목제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요일2:2). 하나님은 칼빈이 말하는 것처럼 쪼잔한 하나님이 아니시다. 주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라도 복음을 듣고 믿어서 회개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5. 칼빈이 말하는 "전적 타락" 혹은 "전적 무능력"이란 어떤 것인가?

  이제는 칼빈이 주장했던 예정론의 첫번째 항목으로서 "전적 타락" 혹은 "전적 무능력"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전적 타락(전적 무능력)"이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되어 있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며, 선을 행하지 않는 무능력의 상태에 빠져 있음을 뜻한다. 하지만 불신자 중에는 하나님을 믿고 싶어서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더러 있으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 중에도 선을 행하는 자는 수두룩하다. 하지만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강요(1559년)" 제23장 3절에서 "사람은 모두가 죄로 더럽혀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가증할 뿐이다"고 하였다. 그래서 인간은 정죄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고로 인간은 영원한 심판으로 사망 안으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죄인이라는 그의 주장은 맞지만, 인간이 구원을 위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주장과 그만한 능력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렇게 인간을 정의하다보면, 인간을 너무나 약하고 무능력한 존재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은 악하며 무능력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주시면 그것에 대해 반응할 정도는 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선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으나, 다만 인간은 아담의 타락이후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는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선한 행위들을 계속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주님이 초청하실 때에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할 수는 있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복음을 듣고 주님 앞으로 나올 수 있는 정도는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타락이란 어떤 것을 뜻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된 본성을 갖고 태어나고 있으며, 그대로 놔두면 죄를 짓다가 사망에 이른다는 뜻인 것이지,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초청까지도 반응할 수 없는 정도는 아닌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처럼 인간은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인 것이다(마12:20). 그대로 놔두면 갈대는 꺾여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꺾인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만지시고 붙들어 주신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 하지만 사람은 있는 그대로 놔두게 되면 곧 껴저버릴 불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불이 이미 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주시고 심지를 간검해주신다면 그는 다시 활활 타오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절대 하나님을 찾을 수 없으며, 선을 행하지도 못하는 절대무능력에 상태에 있다는 것은 과한 해석이다. 다음 주에는 칼빈의 5대교리가 옳다고 주장하는 성경구절이 얼마나 성경에 어긋난 구절이며, 근거가 되지 못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그러면서 반대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예정론에 관련된 성경구절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도 함께 찾아보고 살펴볼 것이다. 

 

6. 성도에게 있어서 바른 성경적인 예정론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고로, 칼빈의 예정론은 성경에서 빗나간 이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칼빈의 예정론과 웨슬리안주의의 원조격인 알미니안주의 비교한 사람이 있다. 그는 밀드레드 와인쿱인데, 그는 자신의 책 "칼빈주의와 웨슬레 신학(생명의 말씀사, 1987, p37)"에서 칼빈의 예정론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교회의 권위에 대항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수호할 논리적인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어거스틴은 그렇게까지는 주장하지 않았지만, 칼빈은 이중예정 중 "멸망으로의 예정"까지 하나님께서 작정하셨다고 말하고 있는데, 와인쿱은 이것마저도 논리적인 발전의 결과이지 결코 성경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예정론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이상의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에,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얻도록 창세전에 예정하셨다. 이는 누구든지 복된 소식을 듣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으며,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도록 예정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회개하고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게 되고 성령의 내주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며,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고로, 개인구원예정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다만 누구든지 자신의 불신앙과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에 하나님의 예정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7. 나오며

  칼빈은 기독교역사에 위대한 인물로 기억될만한 유명한 변증가다. 특히 그는 기독교강요를 써서 사도바울과 어거스틴에 이은 최고의 신학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신구약성경의 주석서는 기독교역사상 최초이자 위대한 업적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칼빈 사후 약 200년동안 그 누구도 칼빈과 같은 주석서를 낸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빈이 주장하는 것이라면 다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도 사람인지라 실수한 것이 있을 수 있고, 자신이 발견해낸 교리가 성경이 아니라 논리적인 비약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 바로 "이중예정론"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려다가, 그만 인간의 남아있는 의지마저 완전 묵살해 버렸다. 인간이 구원얻기 위해 최소한 해야 할 일마저도 인간의 공로와 행위라고 몰아붙히고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그래도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 팩트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미 아담의 범죄에 의해 정죄받은 상태에서 죽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회개하고 믿어서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인류의 시조가 처음 범죄했을 때에 스스로 범죄한 것이 아니라 뱀이 꼬드겨서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기 전에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에 반응해야 한다. 그러면 구원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가운데 그 누구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신다. 그리고 누구든지 구원의 복된 소식을 듣고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인간에게도 자유의지가 어느 정도는 남아 있기 때문에, 성령이 강권할지라도 그분의 초청을 거절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도록 지금도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주고 계신다. 그럴 때마다 사람은 눈을 떠야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의 초청에 응해야 한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적어도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주의 음성에 반응할 정도는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훗날 하나님께서는 심판주가 되실 수 있다. 누구에게든지 구원받을 기회를 제공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판의 날에 주님 앞에서 항변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칼빈의 만세전 개인구원예정론은 잘못된 것이다. 아니 성경에 위배된다고 본다. 칼빈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죄짓게 만들기 위해서 선악과도 만든 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죽을 운명에 처할 죄인들 중에서 당신의 뜻대로 살려줄 자와 멸망으로 계속 나아가도록 내버려 둘 자를 고르는 분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하시는 그러한 분이 아니시다. 모든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직접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속죄제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만큼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분의 긍휼하심과 사랑은 지금까지 온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을 수 있는 분량보다 더 크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날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에 한사코 반응해야 한다. 그리고 죄사함을 받기 위해, 생명을 얻기 위해, 주님 앞으로 나아가서 회개하고 그분을 자신의 인생이자 영혼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자만이 결국 육체를 벗는 순간에 심판을 벗어나 영원한 자유의 땅이요 행복의 땅인 천국으로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11월 04일(수)

정병진목사

 

하나님께서는 만세전에 어떤 뜻을 품고 계셨을까? 에베소서는 우리의 시간을 천지창조 이전으로 돌려놓는다. 그리고 한 분 하나님께서 장차 행하시고 하시는 일을 그때에 이미 정하셨음을 알려준다. 그것이 바로 에베소서 1장이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이다. 그것은 사람이 창조되거나 타락한 후에 나온 것 아니기에,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만세전 예정론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정론은 에베소서의 사상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그것은 무엇이 문제인가? 이것을 우리가 잘 모르면 이미 얻은 구원이라도 잃어버릴 수가 있다.
20201-11-11(수) 수요기도회
제목: 에베소서강해(04) 성경적인 참된 예정론은 어떤 것인가?(04)(엡1:3~14)
https://youtu.be/bGczvYuP6MI [혹은 https://tv.naver.com/v/16703087 ]

 

1. 들어가며

  에베소서는 회람서신으로서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책일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를 위한 책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에베소서는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다. 말씀이 창세전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교회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베소서를 통하여 교회가 무엇인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가 어떻게 탄생하였으며,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의 위대한 걸작품이고, 관심의 대상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교회는 천사들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던 놀라운 비밀이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에베소서 1장에서는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에 관한 창세전의 계획과 그 목적을 밝히는 위대한 찬양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지난 3시간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살펴보았는데, 특별히 예정론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계획을 따라 교회를 산출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결국 만세전의 예정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이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칼빈의 2중예정과는 어떻게 다르며, 하나님께서 진정 말씀하려고 하는 예정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오늘은 네번째 시간으로서, 하나님의 예정 부분에서 "견인교리"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구원은 영원한 것이며 안전한 것인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2. 하나님의 구원예정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엡1:3~14의 말씀에 따라, 지난 3번의 시간을 통하여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예정이 창세전에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예정은 결코 개인구원예정이 아니었다는 것도 살펴보았다. 즉 하나님께서는 많은 피조물 가운데 특별히 인간을 선택하시어 그들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고 그들을 하늘나라의 기업을 잇게 할 상속자로서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에 보편적으로 알려진 예정론은  에베소서가 말하는 예정론과 다르다. 사실 우리나라에 보편적으로 소개된 예정론은 칼빈의 예정론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개인에 관한 이중구원예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칼빈의 예정론"이란 성부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사람들 중에서 어떤 개인을 각각 예정하셨는데, 어떤 이는 영원한 생명으로 예정하시고, 어떤 이는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하셨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우리(사람들) 중에 어떤 특정한 개인을 구원하기로 창세전에 예정하셨다는 말씀은 단 하나도 없다. 그럼, 어떻게 개인구원예정이 나왔을까? 그것은 구원이 신적 작정으로 시작된다는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칼빈이 이어받아 나온 결과물로서, 그것은 결코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시되 어떤 개인을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하시지 않았으며, 어떤 개인을 만세전에 멸망에 처하기로 예정하지도 않으셨기 때문이다. 에베소서가 말하는 예정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 중에 주님의 구원의 초청을 받아들임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는 자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예정의 대상은 어떤 특정개인이 아니라 사람들 중에 "불특성 다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예정론을 가장 대변해주는 가장 좋은 예가 마태복음 22장에 나온다. 그것은 어떤 왕이 자기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푼 것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말씀이다. 왕은 자신의 아들의 잔칫날이 다가왔을 때에 혼인잔치에 약속된 사람들을 데려오도록 자신의 종드을 보낸다. 하지만 약속했던 사람들은 한사코 사양하고 잔치자리에 오지 않았다. 어떤 한 사람은 밭에 일하러 간다고 가버렸고, 또 한 사람은 사업하러 간다고 가버렸다. 그러자 왕이 대노하였다. 그리고는 혼인잔치는 준비되었지만 초청받은 자는 합당하지 않으니, 사거리 길로 가서 만나는 대로 사람을 혼인잔치에 데려오라고 시킨다. 그러자 그의 종들이 나가 자초지종을 아뢰고 잔치자릿수만큼 사람을 채추게 된다. 이것이 이 비유의 대강스토리다. 그리고 이 비유를 들려주셨던 주님께서 최종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초청함을 받은 자는 많지만, 선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그렇다.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초청하는데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이 있었기에 이스라엘 민족을 우선 초청대상으로 삼으셨다. 하지만 막상 그들에게 초청장을 보냈을 때 그들은 아들의 혼인잔치에 오기를 거부하고 말았다. 그러자 주님은 자리를 이방인들로 하여금 채울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그렇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경륜인 것이다. 이미 초청대상자에 예정되었어도 거부한 자들은 잔치자리를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선 초청 대상은 아니었지만 그 다음으로 이방인들에게 구원받을 기회가 넓게 열려지게 되었다. 구원받을 기회를 유대인이 발로 걷어차버렸기 때문이요, 모든 민족으로 확대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에 따라 이방인에게도 그 기회가 돌아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에 기쁘게 응답하게 된다. 그러자 혼인잔치에 손님이 가득차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예정이란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한 것이 아니라 구원 안으로 초청받았을 때에 그것에 반응하는 자가 예정되어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구원받을 자는 이미 개인별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잔치자리 숫자만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누가 그 자리에 채워질른지에 대하여는 정해진 불변의 작정이 없었던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초청하실 때에 그 초청에 감사함으로 응하는 자가 예정안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개인구원예정과 개인멸망예정을 만세전 예정을 언급하면서, 에서와 야곱의 경우를 들어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에서와 야곱의 경우는 만세전에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한 사건이 결코 아니다. 두 민족이 어떻게 쓰임받을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사라의 입을 통하여, "큰 자(형=에서)가 어린 자(동생=야곱)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신 것 뿐이다. 그러므로 야곱과 에서의 예정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구원예정이 아니라 그들에 관한 사역예정이며, 개인예정이 아니라 두 민족의 쓰임에 관한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세전예정론에 한 번 빠진 자들은 도무지 칼빈의 이중예정론의 영향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한다. 하지만 오늘날 진리를 따라가고자 하는 성도들은 교단교리나 신학자의 말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 일점일획도 빼버리거나 더하지 않는 말씀을 따라가고자 한다. 그것은 유대인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한 구원계획이다. 지금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다 회개하고 믿어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초청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초청에 응하는 자는 구원을 받겠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자는 전능한 하나님일지라도 그들을 구원하시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누구든지 구원으로 초대를 받았다면 그는 즉시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여 구원받는 사람이 되어야할 것이다. 

 

3. 칼빈의 예정론의 5대 교리와 그 핵심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칼빈의 예정론의 핵심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그것은 그가 1559년에 썼던 기독교강요(최종판)를 보면 잘 살펴볼 수 있다. 특별히 기독교강요(최종판) 제3권의 21장부터 24장에 예정론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자 후대의 칼빈의 후예들은 거기에 나온 칼빈의 구원사상을 5가지 교리로 정리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들 그것을 "칼빈의 5대교리"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내 칼빈의 제자였다가 돌아섰던 알미니우스에 의해 칼빈의 예정론이 틀렸다는 것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칼빈의 5대교리를 제대로 한 번 이해하려면, 이것이 생성되었던 과정을 좀 이해하고, 왜 오늘날 칼빈주의가 장로교의 근간이 되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자세한 사항은 전의 에베소서 강해시간(1, 2, 3)에 나와 있으니 그것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오늘은 간략하지만 에베소서 1:3~14에 나오는 말씀을 중심으로, 칼빈의 5대교리를 설명하려고 하는데, 특별히 성경의 견해와 칼빈의 5대교리를 비교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과연 칼빈의 주장이 성경적인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칼빈의 5대교리가 에베소서에서는 순서가 약간 다를 것이이다. 하지만 5대교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떤 것이 먼저 앞선 것이다고 말하기는 조금 곤란하다. 그럼, 칼빈의 후예들은 칼빈의 예정론의 5대교리를 이렇게 정리해서 말했을까? 그것은 "1)전적타락(전적무능력), 2)무조건적인 선택, 3)제한속죄, 4)불가항력적인 은총, 5)성도의 견인"이 그것이다. 그러나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 말씀으로 예정론의 교리를 정리해 간다면,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사..."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것을 가지고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을 하나님의 선택은 "무조건적인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어떤 개인을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무조건적으로 예정하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렇게 개인을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셨다는 말씀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어떤 대상을 정할 때에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그 대상은 어떤 개인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로서, 누구든지 초청하는 구원의 소식을 듣고 반응하여 주님 앞으로 나온 자를 선택하신다는 것이다. 만세전에 구원받기로 선택함을 입은 어떤 개인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피조물인 천사들과 인간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천사가 아닌, 인간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내용은 교회가 탄생할 때까지 비밀로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천사들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것었으며, 그 비밀의 핵심은 결국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하늘의 상속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둘째, 에베소서 1:7절에 의하면, 이번에는 칼빈의 5대교리 중에서 2 가지가 나온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라는 말씀을 통해서는 "불가항력적인 은총"의 교리가 나왔고,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에서는 "제한속죄'라는 교리가 나왔다. 그렇다면, 과연 "불가항력적인 은총"과 "제한속죄"라는 칼빈의 교리는 진정으로 성경에서 나온 것인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아니올시다"이다. "불가항력적인 은총"이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선택된 자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도록 은혜를 베푸시면 그 은혜에 아무도 저항할 수 없다는 교리다. 하지만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파괴되었지만 남아있는 자유로 하나님의 역사를 지금도 거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예수믿어 성령을 받은 자라 할지라도 성령의 소욕을 따라가지 않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판국에 믿지 않는 자들은 어떠하겠는가? 그러므로 주님께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 나아오지 않는 유대인들을 보고 얼마나 안타까워하셨는지 모른다(요5:40,계3:20). 그리고 "제한속죄"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은 성부께서 택한 자들만을 위한 것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누가 구원받을 것인지를 예지예정하셨음으로, 구원받을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한다. 하지만 둘 다 성경적인 견해는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한 속죄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이다(딤전2:4,요일2:2). 다만 사람들이 이것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속죄의 피의 효능을 맛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불가능항력적인 은총을 베풀어주셔야 하는 이유를 인간의 "전적인 타락"에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자신을 구원하는 데에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타락하여 죄인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나,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초청할 때에 그것에 아무것도 반응할 수 없을만큼 타락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을 죄인취급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을 악하다고 정의하며, 선을 전혀 행할 수 없는 무능력한 인간이라고 몰아간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인간이 비록 아담의 범죄로 타락했으나, 선을 전혀 행할 수 없는 것도 아니며, 모든 것이 다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능력으로 죄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시지 않으면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 그래서 인간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시려고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셨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은 예수님의 속죄사역에 절대적으로 기인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전적인 무능력자요 악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인간의 상태를 마12:20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이라고 말이다. 인간은 상한 갈대이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면 언젠가는 꺾여져서 죽을 것이다. 또한 인간은 꺼져가는 등불이기에 그대로 놔두면 언젠가는 꺼져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는 자는 죽어가는 상태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고 구원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4. 성도의 견인교리는 과연 성경적인가?

  그런데 칼빈의 이중예정론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맨 마지막인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다. 이 교리는 한 번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믿음을 갖게 된 자들은 결코 믿음을 상실하지 않을 것이며 끝까지 보존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사람이 한 번 구원을 받았으면 계속해서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즉 한 번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는 결코 멸망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구원은 끝까지 유효하며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 교리가 성경적이며 사실인가? 정말 사람이 한 번 믿음을 가져 구원을 받았으면 구원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발생하지 않는가? 그건 아니다. 이미 믿고 회개하여 구원의 노정에 들어온 자라도 결국 탈락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마7:21~23, 딤전1:19,4:1, 고전9:27, 히6:4~8,4:1,10:26~29, 약2:14,26, 계3:5) 즉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과 야고보장로와 히브리서기자와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러한 예는 엄청 나다. 한 번 영생을 가졌다고 해서 그 영생을 결코 잃어버리지 아니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주의자들은 한 번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여 믿음을 가졌으면 그는 반드시 구원을 얻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한 증거로서 성경에 아주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련성경구절은 거의 대부분 미래형이거나 소망들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말씀중에서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는 성경구절은 역시 요한복음 6:37,39과 요한복음10:28~29의 말씀이다. 오늘은 시간관계상 앞에 나와있는 요한복음 6:37과 39의 말씀만 우선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글성경이나 영어성경은 거의 다 이 말씀을 왜곡하여 번역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번역본들이 헬라어원문과는 다른 번역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중성단수"로 번역해야 할 단어를 "남성단수" 내지는 "남성복수"로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우선 요6:37,39의 말씀을 한글성경으로서 살펴보자.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위의 두 말씀을 한글성경으로만 보면, 아버지께서 당신이 구원하기로 예정한 사람을 예수께로 보내주면 그들이 모두 예수님께로 나아갈 것이며, 그런 자를 예수께서는 결코 내쫓아내지도 아니할 것이며, 그들 중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 구원할 것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그러나 헬라어원문성경은 그러한 말씀이 전혀 아니다. 그렇다면, 헬라어는 어떻게 되어있을까? 그것을 먼저, 요6:37의 말씀을 헬라어에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요6: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모든 것이 나를 향하여 다다를(도착할, arrive)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향하여 오고(come) 있는 이(사람)을 나는 결코 내쫓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에게 도착하고 있는 것과 예수님에게 오고 있는 것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헬라어원문에 의하면, 아버지께서 예수께 주셔서 예수께 도착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어떤 것"(중성, 단수)이다. 그러나 '모든'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기에, 중성 복수적인 의미다. 그런데 대한민국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약 20여종의 성경들은 이 단어를 "중성 단수(~하는 것)"로 번역하지 않고, "남성 단수(~하는 자/~하는 사람)" 내지는 "남성 복수(~하는 자들/~하는 사람들)"로 번역하고 있다. 즉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보내고 있는 것은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예수께 주시는 것은 "어떤 것"으로, 예수님에게 구원받으려고 나아오는 자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구원할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주시는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에는 "아버지의 능력, 아버지의 권세, 아버지의 지혜,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힘" 등의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오역은 요한복음 6:39도 역시 마찬가지다. 한글성경으로 보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던 분(아버지)의 뜻이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으로 마지막날에 그들을 부활시켜 구원하는 것이라고 읽힌다. 하지만 헬라어원문은 그러한 뜻이 아니다. 여기서도 "중성 단수"를 요6:37의 말씀처럼, "남성 단수"로 바꾸어놓았다. 그럼, 헬라어원문은 어떻게 되어있을까?

요6:39 그런데 나를 보내셨던 분의 뜻은 이것입니다. 그가 내게 [이미] 주신 채 있는 모든 것을 내가 그것으로부터 잃지 아니하고 오히려 마지막 날 안에 내가 그것을 단번에 일으켜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렇다.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한 사람을 예수께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것들로서 곧 능력과 권세와 지혜와 사랑 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그것으로 자기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마지막 날에 드러내 보여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가 칼빈주의의 예정론의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번역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성경번역자들의 한계를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구원론의 관점을 흔드는 것이기에, 이것을 그냥 두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시대에 이제는 성경의 원문 그대로 번역하여, 예수님과 사도들이 증언했던 구원론의 관점으로 성경을 다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성경이 그대로 열릴 수가 있는 것이다. 

 

5. 나오며

  칼빈의 예정론은 사실 그의 처음으로 출판했던 기독교강요(초판, 1536년)에는 나오지 않았던 내용이다. 그의 기독교강요 제2판(1539년)부터 들어가기 시작한 예정론은 이제 제4판(최종판, 1559년)에 이르서는 많은 분량(1장에서 4장으로)으로 늘어났고, 그것은 결국 칼빈의 구원론의 핵심을 차지하게 된다. 이는 사람이 믿고 회개하여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만세전의 예정에 따라 구원얻는 것이라고 바꿔치기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나오게 된 배경을 보면 왜 이러한 구원론이 나왔는지 조금은 이해가 간다. 왜냐하면 중세시대가 예수님 말고 다른 것을 구원의 요소로 집어넣어서 잘못 가르쳐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빈은 믿음으로 얻은 구원론을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 예정에 의한 구원론으로 바꾸어놓았다. 그것도 "개인구원예정론"이자, "이중예정론"으로 말이다.  만약 칼빈의 이중개인구원론이 성경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폭군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횡을 우리는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묵인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권리를 인간에게 강요하시는 폭군이 아니시다. 그분처럼 사랑이 많으시고 인애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시다. 그분은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을 행하시는 그러한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분이 스스로 공의를 허물어뜨린다면 하나님은 심판자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의로우셨다. 그러나 사랑도 많으신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과 만세전의 계획을 따라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인간이 모든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로 예정함을 입은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중 어떤 개인이 만세전에 예정함을 입은 것이 아니다. 믿고 회개하는 자의 불특정 다수를 예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라도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 자는 결국 구원에서 탈락될 수도 있다. 구원은 따놓은 당상이 아니라, 두렵고 떨림으로 이뤄가야 하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은 가장 확실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항상 안전하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얼마든지 성령의 음성을 거부하고 회개를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핍박과 죽음 앞에서 얼마든지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과 회개로 일차적인 구원을 이뤘지만 그것을 지키고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내가 믿는 주님을 부인하지 않아야 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무슨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즉시 즉시 회개하여 죄가 나의 구원의 발목을 붙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11월 11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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