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 관한 7가지 비유들 가운데, 딱 2가지는 오늘날까지 두 가지 성경해석이 존재한다. 그러한 비유에는 '겨자씨 비유'이며, '누룩'의 비유가 있다. 이 둘은 천국와 확장성과 확장되어가는 능력을 말씀하신 것인데, 어떤 분들은 이것이 가라지를 포함하는 부정적인 천국의 확장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교회가 비정상적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과연 어떤 해석이 맞다고 할 수 있는가? 그래서 오늘은 비유에 관하여 어떤 성경해석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이 비유에 대한 주님의 원래 의도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022-03-13(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천국복음(20) 천국에 관한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마13:31~3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RCCM50V1AP0 [혹은 https://tv.naver.com/v/25680430 ]

1. 들어가며

  천국비유들 가운데에는 해석하기 어려운 비유들이 더러 있다.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비유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름하여,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다. 이 두 비유는사실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 비유를 듣는 대상을 따라 똑같은 주제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겨자씨 비유를 들려주신 후에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같은 종류의 다른 비유를 말씀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른('알로스')'이라는 표현은 "같은 종류의 다른"이라는 뜻의 헬라어 단어이다. 그러므로 이 두 비유는 동일한 주제에 대한 다른 비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비유들이 오늘날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되고 있다. 들어보면 어느 한 가지만 맞고 어느 한 가지는 틀리다고 말하기도 사실 곤란하다. 그러므로 어느 것 하나만 옳은 해석이라고 주장하기가 어려운 것이 이 비유들이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처음에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인가? 그것을 알 수만 있다면 이 비유들에 대한 두 가지 해석 중에 무엇이 더 바른 해석인지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비유해석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면어 이 비유가 무슨 뜻인지를 풀어가고자 한다. 이 말씀에 놀라은 지혜의 영이 함께하기를 바라며, 이 놀라운 비유에 따른 성령의 역사하심이 늘 함께 하기를 빈다.

 

2.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어떤 비유인가?

  겨자 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어떤 비유인가? 이 두 비유는 '천국'에 관한 비유이다. 이중에서 '겨자씨 비유'는 아주 작은 것인데 이것이 큰 것으로 성장한다는 비유이다. 그리고 '누룩의 비유'는 처음에는 보잘 것 없이 작은 것이지만 나중이 되면 그것이 골고루 퍼져나가 모든 것을 다 점령한다는 비유다. 그렇다면 처음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헬라어 원문으로 살펴보자. 

마13:31~33 [같은 종류의] 다른 비유를 그분이 그들에게 내어놓으셨다. 말씀하고 있기를, 하늘들의 왕국(천국)은 마치 어떤 사람(남성)이 자기의 밭 안에 그것을 취한 후에 뿌렸던, 겨자의 씨앗 하나와 같다. 32 이는 모든 씨들보다 가장 작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자라났을 때에는 채소들보다 더 커진다. 그래서 나무가 된다. 그 결과 하늘의 새들이 올 정도이며 그리고 그것(나무)의 가지들 안에 [계속] 둥지를 틀 정도이다. 33 [같은 종류의] 다른 비유로 그분이 그들에게 발언하셨다. 하늘들의 왕국(천국)은 마치 어떤 여자가 그것을 취한 후에 가루의 세 말들(사톤들) 안으로 숨겨 두었던 누룩과 같다. 그것이 전부 발효되었던(부풀어지게 되었던) 때까지. 

 

3. 이 두 비유에 대한 상반된 해석은 무엇인가?

  이 두 비유에 대해서는 상반된 해석이 지금까지 존재해왔다. 하나는 둘 다 천국의 확장성과 천국이 퍼저나가는 능력에 대한 비유라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해석이 존재한다. 그것은 이비유는 천국에 대한 잘못된 확장이라는 것이다. 겨자씨는 천국에 대한 잘못된 외연 확장의 비유이고, 누룩은 천국에 대한 잘못된 내면 확장의 비유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겨자는 일년생 풀인데 그것이 절대 나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며, 또한 새들이 와서 그 나무의 가지들에게 깃들인다고 하는데,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천국비유에서 '새들'은 '악한 자' 곧 사탄을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누룩도 마찬가지로 누룩의 대부분은 다 부정적인 것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의 제물에 누룩을 넣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신약의 예수께서도 누룩을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나 '사두개인들의 누룩'으로 말씀하시면, 제자들이 그들의 잘못된 교훈들(가르침들)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해석이 타당한 해석이 될 수 있는가? 우리 주님께서 비유하셨을 때에는 과연 이러한 두 가지를 다 포함한 것으로 비유하시지는 않았을 것인데 말이다. 왜냐하면 만약 이 비유가 2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는 비유였다면 틀림없이 설명을 해 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비유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없으셨다. 그냥 들으면 그냥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비유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그럼, 주님은 과연 어떤 의도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인가?

 

4. 비유들을 해석하기 위한 2가지 성경해석 방법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는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다. 왜냐하면 천국을 사모하고 회개하는 심령으로 나아오는 자들에게 비유는 꿀송이와 같은 말씀이겠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그것을 전혀 이해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것을 듣지 않으려고 귀까지 틀어 막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비유말씀은 참으로 심오한 것이라고 아니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예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는 딱 2가지 종류로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의 하나는 그냥 비유로 말씀하신 경우이고, 또 하나는 알레고리 비유 곧 풍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비유인가 아니면 풍유인가? 

  우리는 마태복음 13장에서 7가지 천국의 비유를 만나게 된다. 그중에서 2가지는 알레고리 비유(풍유)말씀이다. 그리고 나머지 5가지는 그저 단순한 비유다. 그러면 비유란 무엇을 가리키고, 풍유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리고 이 둘의 차이는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7가지 비유들 중에서 그냥 단순한 '비유'는 무엇이고, '풍유'는 무엇인가? 먼저, 비유('파라볼레')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비유란 원래 어떤 것을 다른 것에 곁에 갖다 놓음으로써 비교하는 방법인데, 이는 심오한 사상이나 어려운 이야기를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실례로 쉽고 그리고 명쾌하게 설명하기 위한 수사학적인 기법을 가리킨다. 그런데 알레고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비유이기는 비유이기지만 한 번 더 꽈버린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보통 비유는 실체가 무엇인지를 옆에 있는 다른 일상적인 소재를 가지고 설명한다면, 알레고리 비유(풍유)는 그 실체의 그림자를 다른 일상적인 소재를 가지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즉 알레고리 비유는 어떤 것을 빗대어서 실체를 설명하는 측면에서는 비유와 같지만, 그것의 실체가 아닌 그림자를 다른 대상을 가지고 설명하기 때문에, 그 실체가 무엇인지를 화자(비유를 들려주는 자)가 말해주지 않는한 절대 알 수 없는 비유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여기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놓았다고 치자. 그리고 그가 묻는다. "이 그림은 과연 무엇을 보고 그린 그림일까요" 그랬을 때, 사람들은 어떤 대답을 할까? 어떤 이는 그냥 '동그라미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또 어떤 이는 '원뿔'이라고 대답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원기둥'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그것은 '태양'이다, 그것은 '축구공'이다, 그것은 '둥그런 접시'다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무엇인지는 질문을 던진 자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풍유인 것이다. 그러므로 알레고리 비유는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만약 말하는 자의 설명해주지 않는다면 더욱어 그 해석은 많아질 수밖에 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알레고리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는 반드시 해설을 해 주셨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7가지 비유들 가운데 해설이 있는 비유가 바로 풍유였떤 것이다. 그리고 해설이 없는 비유는 그냥 단순한 비유였던 것이다. 고로. 제자들을 따로 불러 비유를 설명해주셨던 '씨뿌리는 자의 비유'와 그리고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가 바로 풍유의 비유였던 것이다. 

 

5. 왜 비유풀이와 짝풀이로만 성경을 해석하는 신천O의 해석법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런데 오늘날 이 비유와 알레고리 비유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호리는 이단이 있다. 대표적으로 신천O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모든 성경말씀을 다 비유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비유풀이와 짝풀이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신천O는 그들의 교주인 이만O의 의도에 따라 모든 성경말씀을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뭐를 말해도 그 끝은 이만O를 향하게 된다. 어떤 성경을 해석하든지 신천O의 교주인 이만O를 향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금까지 신천O 교주 이만O를 신처럼 떠받드는 것이다. 그런데 찬찬히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성경해석법을 보라. 그것이 바로 알레고리 성경해석 방법인 것이다. 곧 그들의 말로 '짝풀이'식 성경해석 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말씀은 이긴 자요 보혜사로 온 이요 재림주가 이만O라고 하는 것으로 향한다. 그러므로 이만O가 자신을 재림주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다들 그렇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것을 그렇게 믿도록 빠지게 하기기 위해 그들은 모든 성경을 알레고리적으로 푼다. 사실 알레고리 성경해석 방법은 기독교 초기 교부였던 오리겐(A.D.185~254)이 사용하던 방법이였다. 하지만 결국 이 방법은 이단으로 갈 수밖에 없어서, 교회는 이같은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단 하나 허용되는 성경해석법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모형론적 성경해석방법"이다. 이것은 구약의 성경말씀은 신약의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알레고리 성경해석법의 위험성을 없애고,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기에, 사도 바울도 이 해석법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고전10장을 읽어보라). 사실 예수께서도 구약성경이 자신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요5:39), 구약성경인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의 글이 다 자기를 가리켜 말씀하고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눅24:44). 그러므로 모형론적인 성경해석법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가능한 방법이지만, 그것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각각의 낱말에 교주가 원하는 말씀으로 짝을 맞추어 설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성경해석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결국 이것을 말하는 화자의 의도대로 성경이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거짓의 영이 들어간 이단 교주가 이 방법을 사용하면 많은 선량한 성도들이 미혹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경해석 방법은 쓰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신천O가 얼마나 교묘하게 이 방법으로 기존의 선량한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맨 아래의 부록의 메시지를 참고하면 금방 이해가 갈 것이다. 

 

6. 주님은 원래 어떤 의도로 이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 것인가?

  그러하면, 예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과연 그냥 단순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인가? 아니면 예수께서 설명해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풍유로 말씀하신 것인가? 그렇다. 이상에서 우리가 알게 된 성경해석 방법에 따르면 이 비유들은 단순한 비유에 해당한다. 이것은 풍유가 아니라, 그냥 단순한 비유인 것이다. 만약 이 비유들이 풍유였다면 주님께서는 이 비유들도 제자들에게 따로 설명해주셨을 것이다. 하지만 이 비유들은 설명이 하나도 없다. 고로 고로 이 비유는 단순한 비유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그냥 들으면 바로 알 수 있는 비유인 것이다. 그것을 억지로 꽈서 들어야 비로소 들리는 그러한 말씀이 아닌 것이다. 고로 이 비유는 천국의 확장성과 확장되어가는 능력을 말씀하신 것이지, 이것은 천국의 부정적인 확장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이 비유는 단순히 천국의 확장성과 확장되어가는 능력을 말씀하시고자 함이었던 것이다. 

 

7. 나오며

  우리는 오늘 '비유'에 관한 해석 방법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천국을 말씀하실 때에는 주로 비유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유들 중에는 알레고리 비유들이 가끔씩 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경계하기 위해 그러한 비유들은 다 설명을 해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레고리 천국 비유 말씀을 예수께서 들려주신 설명 이외의 다른 것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성경에는 짝이 있다고 하면서 단어 하나하나를 성경말씀을 가져다가 끼워맞춰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이단 교주의 교묘한 사상을 주입 받아서 결국 이단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와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를 해석할 때에는 예수께서 들려주신 해석 이외에 다른 방법을 동원해서는 아니 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굳이 그렇게 하려는 단체가 있다면 그곳은 십중팔구는 이단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오늘 우리가 읽었던 두 가지 천국의 비유 말씀 곧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결코 그림자를 비유로 언급한 알레고리 비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이것은 그냥 이해되는 바로 그것을 붙잡으면 된다. 이 비유들은 천국의 확장성과 점령 능력에 관한 말씀인 것이다. 천국말씀이 처음에 사람들에게 잘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절대 실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천국 말씀에는 확장 능력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어느 날 천국에 들어가기를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는 다이나마이트처럼 그들을 뒤흔들어놓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발견하게 된 자는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나 좋은 진주 장사의 비유이서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사게 될 것이다. 천국은 그 정도로 가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만 우리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전파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아는 자는 깨닫고 점차로 깨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혹시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자신도 그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2022년 03월 13일(주일)

정병진목사

 

 

[부록] 신천O에서는 "선한 사마리인의 비유(눅10:25~37)"를 어떻게 알레고리로 풀어서 성도들을 미혹하는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이야기는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제 그것을 모형론적인 성경해석방법을 사용하여 알레고리적으로 풀어보겠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죄인인 인간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맞아서 거반 죽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려간다"는 말은 범죄나 타락을 가리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품을, "여리고"는 세상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 죽어가는 사람 곧 죽지는 않았으나 가만히 두면 곧 죽을 사람은 "상한 갈대"이자 "꺼져가는 등불"같은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사람을 본 "제사장"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요, "레위인"은 종교지도자들을 돕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둘은 그냥 지나갔다. 하지만 "여행하는 중에 있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겼다. 여기서 "여행 중에 있는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사마리인처럼 멸시와 천대를 받았고 배척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하늘로부터 이 땅에 오셔서 다시 하늘로 가시는 여행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자의 상처에 부었던 "기름과 포도주"는 성령(생명)과 예수님의 속죄의 피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를 돌보아주기 위해 데려간 "주막"은 교회요, "주막주인"은 교회의 목회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튿날 주막 주인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돌보아 달라고 준 "두 데나리온"은 예수께서 2천년 뒤에 다시 재림하시겠다는 뜻이요, 부비가 더 들면 그때 갚아준다고 한 것은 교회의 성도들이나 목회자들이 죄인을 양육하고 봉사하고 섬긴 것에 대하여 그날에 보상해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단순한 비유 말씀인 것이지 알레고리적인 비유는 아니다. 그래도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모형론적으로 푼다면 그렇게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비유를 들려주신 주님의 원뜻은 누가 진정한 이웃인지 물어보는 율법사에게 이웃이 진정 누군지를 가르쳐주는 비유인 것이다. 즉 이 본문은 "어려움을 당한 자에게 자비를 베푼 자가 진정한 이웃이다. 너도 이와같이 행하라"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다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신천지에서는 어떻게 알레고리 방식으로 풀고 있는가? 이런 식이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오늘날의 기존 교회 성도들이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내려간다"는 뜻은 기존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서, 그러한 신앙생활은 계속해서 내려가는 신앙생활일 뿐이다. 그러면 강도와 같은 사탄마귀를 만날 수밖에 없다.또한 "거의 죽게 되었다"는 것은기존교회에서는 영생을 얻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도 기존교회의 목자들인 "제사장들"이나 그 목자를 돕는 전도사님들인 "레위인"은 본 체 만 체 할 뿐이다. 하지만 "어떤 사마리아인"은 지금은 비록기존교회로부터 배척을 받으며,이단삼단 하면서 사이비 이단 교주라고 비난하는 신천지의 약속된 목자(이만희)를 가리킨다. 그가 와서 비로소 강도 만난 자를치료해주기 시작한다. 그때 사용한 것이 바로 "기름과 포도주"다. 그런데 기름과 포도주는 잔치할 때에 고기를 잡고(눅15장의 둘째 아들의 비유)포도주(요2장의 가나혼인잔치)를 즐기는 것이니, 신천지에 와서 그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그러면 날마다 천국잔치가 열리는 것과 같다. 또한 그 잔치가 열리는 장소로서 "주막"은 신천지증거장막성전을 가리키고, "주막주인"은 신천지 각 지파의 지파장과 사명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두 데나리온"은 초림의 예수께서 떠나가셨다가 다시 오실 이천년의 시간이 다 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때 주막주인에게 사마리아인이 보상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예수께 영으로 오셔서 이만희의 육체와 합일되고, 이만희가 인치는 자로서 신천지 성도들을 인치면 그들은 제사장이 될 것이다. 그러면 그때에는 세상의 열방사람들이 재물을 싸들고 와서 신천지 성도들에게 "우리는 하나님이 당신들과 함께 하심을 들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완전한 영적인 해석이다.
  그러면 이 해석을 듣는 사람들은 이렇게 심오하고 깊이 있는 영적인 해석이 어디 있느냐면서 신천지만이 천국잔치를 열어 알려주는 유일한 단체요 거기에만 구원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을 알레고리적으로 푸는 것은 매우 위험한 해석이라고 할 수 없다. 특히 이단교주가 자신의 사상을 주입하고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성경을 알레고리적으로 푼다면 그것을 당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온 비유라도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해석해주지 않는 비유는 알레고리적으로 풀려고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단이 속임수로 사용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글 전체보기] https://dongtanms.kr/91958 2022년 03월 13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천국복음(18) 천국비유로서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의 핵심은(마13:24~30)_2022-03-11(금)

https://youtu.be/374cIcnIHhQ  [혹은 https://tv.naver.com/v/25679649 ]

 

1.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는 어떤 비유인가?

  '비유'(파라볼레)란 원래 어떤 것을 다른 것의 곁에 놓음으로써 '비교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심오한 사상이나 어려운 이야기를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실제에 빗대어 쉽고 명료하게 설명하는 이야기 전개 방법을 가리킨다. 이러한 비유 중에서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는 누가 과연 마지막 불타는 곳에 들어가게 되며 누가 과연 천국 곳간에 들어가게 되는지를 알려 주는 비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비유는 다른 복음서에 나오지 않는 마태복음만의 독특한 비유이다. 사실 마태복음 13장에는 천국에 관한 7개의 비유들이 있고, 그중에서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비유는 총 넷이다. 그것으로는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 '좋은 진주를 구하는 진주 장수의 비유',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물'의 비유가 그것이다. 이외의 나머지 3가지 비유('씨 뿌리는 자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는 다른 복음서에도 나오는 비유인 것이다. 그러니 성경을 해석할 때에도 독특한 비유는 상당히 조심해서 해석해야 한다. 

 

2. 일반적인 비유(파라볼레)와 알레고리컬 비유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비유'도 사실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일반적인 비유'가 있고 또 하나는 '알레고리컬 비유'가 있다. 이중에서 '일반적인 비유'는 하나의 주제나 요점을 어떤 대상물을 비교하여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알레고리컬 비유'는 그 비유에 나오는 모든 단어나 문장을 다른 성경 말씀에서 가져와 대입하여 그 의미를 도출하고 풀이해 가는 성경해석법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사실 알레고리컬 비유의 말씀은 말씀하고 있는 화자의 설명이 없이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비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알레고리컬 비유는 조심해야 한다. 화자의 입장을 정확히 전달하지 않으면 이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 나쁜 대표적인 사례가 신천지의 '짝풀이' 해석법이다. 그러므로 초기 교부들 중에 처음에 클레멘트와 오리겐이라는 학자가 이 해석 방법을 사용했으나 그 위험성이 알려지자, 교회에서는 이 방법을 버리고 오직 모형론적인 성경 해석 방법을 취하여 사용하고 있다. 대체로 일반적인 비유는 간단한 주제를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표출해 내기 때문에, 굳이 화자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듣는 자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잘 알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그냥 비유인지 아니면 알레고리컬 비유인지를 알려면, 그 비유에 어떤 설명이 들어가 있는지를 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설명이 되어 있는 비유라면 그것은 알레고리컬 비유이며, 설명이 없으면 그냥 일반적인 비유라고 보면 된다. 고로 마태복음 13장에 나와 있는 7가지 비유들 가운데 '씨 뿌리자는 자의 비유'와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는 알레고리컬 비유에 해당한다. 왜 그런가? 나중에 예수님께서 이 비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셨기 때문이다.

 

3.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는 무엇이며, 이것은 숙명론(운명론)이나 예정론에 관한 비유라고 보아야 하는가?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는 마태복음 24:24~30에 나오는 것으로서, 어떤 주인이 자기의 밭에 좋은 씨를 뿌리고 갔는데, 나중에 그의 종들이 싹이 나고 열매를 맺을 때에 나가 보니, 밭에 가라지들이 보이자, 주인은 자신의 원수가 밤에 사람들이 잘 때에 몰래 와서 가라지들을 뿌려 놓고 갔다는 것이다. 그러자 종들이 그것을 끌어모으기를 묻자, 주인은 그러지 말라고, 가라지들을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된다면서 추수 때까지 그냥 두라고 한다. 추수 때가 되면 추수꾼들에게 가라지들은 먼저 끌어모아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주인의 곳간에 넣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 비유를 알레고리컬 비유로 준 것이었기에, 제자들에게 설명을 해 준다(마13:37~43). 즉 좋은 씨를 자기의 밭에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며, 추수꾼들은 '천사들'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추수 때가 되면 가라지만을 먼저 모아 불사르는 것처럼 그때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렇지만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곡식과 가라지는 처음부터 그러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인가? 아니면 살면서 그러한 사람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두 번째가 맞다. 왜냐하면 가라지를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표현한다면, 처음부터 두 종류의 사람들이 운명론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으로 잘못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부모를 통해 육체를 낳는다. 그러나 영혼은 하나님께서 직접 넣어 주신다. 즉 태중의 아기가 2~3개월 정도 자랐을 때에,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낙원에 있는 영혼들을 그 태중에 넣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들어오기를 바라고 계신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은 처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고 있다. 하지만 죄인들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회개하면서 곡식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천국의 아들들'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자신이 가진 자유 의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따라서, 자신의 미래를 곡식이 되도록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가라지가 되도록 결정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을 그 배후에서 섭리하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지만 말이다. 

 

4.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자꾸 마귀의 말을 들어서 가라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를 교회에서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시는가?

  하나님은 어떤 자식을 처음부터 천국 자식으로 만들어 천국에 데려가고, 어떤 자식은 마귀의 자식으로 만들어 지옥에 떨어지게 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낙원같은 천국에서 영원히 살기를 바라셨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뱀의 말을 듣고 거역의 길에 들어서고 만다. 그러자 모든 인간은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어 마귀의 자녀가 되어버린 것이다(롬6:16). 그렇지만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에(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복음 말씀 곧 천국 말씀을 듣고 곡식이 되기를 바라신다. 그런데 어떤 이는 천국 말씀을 듣지 않고, 마귀의 말을 들어 여전히 자신을 가라지로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럼, 언제 그가 곡식인지 가라지인지 알 수 있는가? 그것은 그것이 싹이 난 이후에 열매를 맺을 때다. 열매를 보면 이것이 곡식인지 가라지인지 비로소 어느 정도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가라지들을 그냥 내버려두시는가?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교회 가운데에 가라지를 뽑다가 믿음이 약한 형제가 실족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 공동체가 사랑이 없어서 교회 안에 약한 자를 용납하지 못하고 그냥 뽑아버린다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가라지라도 열심같은 것은 본받을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나도 저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반면교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5. 이 비유의 핵심은?

  그렇다면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 비유의 핵심은 천국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처음부터 정해져 있으며, 그대로 되어진다고 말하는 비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비유는 다음과 같은 의도와 목적에서 주어진 비유이기 때문이다. 첫째, 주님께서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 공동체 안에 가라지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라도 원수 마귀는 포기하지 않고 나쁜 씨를 뿌려서 그를 망가뜨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는 교회 안에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째, 교회 안에 있는 가라지를 인위적으로 제거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가라지 하나를 제거한다고 할지라도 또 가라지가 교회 안에 안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믿음이 약한 초신자를 실족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셋째, 자신의 열매를 통하여 자신이 지금 누구의 말을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빨리 확인하여 회개하라는 것이다. 열매를 보면 그 사람이 누구의 말을 듣고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귀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의 말씀만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2022년 03월 11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천국복음(17) 천국말씀을 들었으나 결실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마13:1~23)_2022-03-10(목)

https://youtu.be/jtLdJhtBC_o

 

1.  예수께서 들려주신 씨 뿌리는 비유는 어떤 비유인가?

  어느 날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천국에 관한 비유들을 말씀하셨다.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는 총 7가지였다. 그중에 첫 번째 비유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다(마13:3~9). "보아라,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새들이 와서, 그것을 쪼아먹었다. 또 더러는 흙이 얇은 돌짝밭에 떨어지니, 흙이 깊지 않아서 싹은 곧 났지만, 해가 뜨자 타 버리고,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렸다. 또 더러는 가시덤불에 떨어지니, 가시덤불이 자라서 그 기운을 막았다. 그러나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가 되고, 어떤 것은 육십 배가 되고,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이 비유에 나오는 '씨 뿌리는 자'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천국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며, '씨'는 천국 말씀을 가리키며,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와 '좋은 땅'은 사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의 마음 밭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2. 천국 말씀을 들었어도 결실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 비유에 따르면 네 종류의 마음밭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가 다 천국 말씀을 들은 자들인 것이지 이들 중에 천국 말씀을 듣지 못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의 씨앗이 각자의 마음 밭에 떨어져서 싹이 난 후에 과연 결실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앞의 세 종류의 사람들은 곧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의 마음밭에 말씀의 씨앗이 떨어진 자는 하나도 결실을 하지 못했다. 다만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의 씨앗이 싹이 트기는 했었다. 하지만 가시덤불의 기운에 막혀서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했다.

 

3. 네 종류의 마음밭을 가진 사람은 모두가 다 구원을 받았는가?

  그렇다면, 세 종류의 마음밭을 가진 사람들은 과연 다 구원을 받았을까? 아니다. 마태복음에 나온 천국 말씀의 비유만을 본다면, 이들이 구원받았는지 못 받았는지를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누가복음에 나오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는 그들의 구원 상태가 적혀 있다. 첫째,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 자라고 분명하게 나온다(눅8:12). 왜냐하면 말씀을 듣기는 들었으나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받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빼앗아 가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다. 결국 길가와 같은 마음밭을 가진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자는 구원을 받았는가? 아니다. 이러한 자들도 역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처음에 이들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지만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날 때에는 실족하여 주님을 배반하는 자들이 되기 때문이다(마13:21, 눅8:13). 그러나 셋째,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밭을 가진 자는 구원의 가능성이 조금은 보인다. 왜냐하면 우선 말씀의 씨앗이 사람의 마음밭에 떨어졌고 그것이 싹을 틔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결실을 했느냐 하는 것이다. 가시떨기 사이에 떨어진 씨앗은 가시떨기들 때문에 기운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싹이 나고 자라긴 했지만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럼 '가시떨기'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마태복음의 저자는 그것을 "세상의(시대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라고 말했다(마13:22). 그런데 누가는 그것을 "이생의 염려와 재물(부)의 향락(염려)"이라고 했다. 그렇다. 말씀을 들을 때는 기쁨으로 받지만 환난과 핍박이 일어나면 그만 넘어지는 자들이 가시떨기의 마음밭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런 자들 중에는 혹시 회개를 통하여 구원받을 자가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들 모두가 구원받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네 번째 부류에 속하는 자들을 살펴보자. 이들은 착하고 아름다운 심령을 가진 자들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을 때에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할 정도로 듣는 이들이 아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도 착하고 좋은 마음 안에서 말씀을 들은 후에 그 말씀을 단단히 붙잡은 후에 인내하면서 결실을 만든 자들이 이들인 것이다(눅8:15).  

 

4. 누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누가 천국의 기업을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천국 말씀을 들어도 그것으로 인하여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서도 상 얻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말씀을 들을 때에 언제나 간절히 그 말씀을 사모하면서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머리에 귀를 지니고 있다고 해서 천국 말씀을 다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천국은 사모하고 원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마13:11). 둘째, 듣는 말씀 중에서 혹시 다 깨달을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더이상 천국 말씀을 듣기를 싫어하거나 거절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었으면 그것에 감사하면서 들은 말씀을 꼭 붙잡아야 한다는 것이다(마13:12). 왜냐하면 현재 듣고 있는 말씀을 붙들려고 하지 않는다면, 다른 말씀도 역시 붙들어 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밭을 기경해 놓아서 언제라도 말씀이 자기의 좋은 마음 밭에 떨어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마13:15). 이를 위해서 성도들은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 회개할 때에라야 비로소 말씀을 방해하는 악한 영들이 떠나가기 때문이다. 넷째, 댓가를 지불해서라도 들은 말씀대로 살아서 내 맘에 떨어진 말씀이 자기의 것이 되게 노력해야 한다(마13:19). 

 

5.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으로서 진짜 복된 자는 대체 누구인가?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알 수 있는 영적인 사실은 눈을 가졌으나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가 참으로 복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귀를 가졌으나 천국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가 참으로 복된 자라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말씀을 들려주었지만 그들 모두의 귀를 강제로 열어서 듣게 하시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스스로 마음이 굳어져서(무감각해져서) 말씀에 전혀 반응을 하지 않으려 하는 자를 강제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는 사람으로서 낙오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 말씀을 들을 때에 자신의 마음을 완고하게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만약 그가 그러한 삶을 계속 지속한다면, 그 사람은 영영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듣는 자가 되고 말 것이다. 

 

 

2022년 03월 10일(목)

정병진목사

 

2022년도 3월 특별새벽집회("천국, 소망에서 이제는 실제로") 넷째날입니다.

제목: 천국복음(11) 천국입성의 세번째 조건, 충성이란 어떤 의미인가?(마25:14~30)_2022-03-03(목)

https://youtu.be/7EAknutRHW0  [혹은 https://tv.naver.com/v/25469989 ]

 

1. 천국입성의 실제적인 조건은 무엇인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그것은 최소조건은 2가지다. 하나는 '거듭남'이다(요3:5). 회심으로서의 회개와 믿음을 통해 모든 사람은 거듭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계속적인 '회개'다. 이것은 자백하는 회개를 가리킨다(요일1:9). 처음 예수 믿을 때에 이미 목욕을 했으니 그 이후부터는 발을 씻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충분조건으로 한 가지가 더 있다. 이것이 없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 있겠지만, 주님의 바라심은 충분조건을 채우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바로 '순종'과 '충성'이다. 둘을 하나로 합쳐서 '충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또한 맡겨주신 일에 충성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이야말로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신분과 상급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천국의 입성조건은 충분조건으로 많이 말씀하셨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을 상징하는 등 외에도 자신이 댓가를 지불하여 기름을 준비함이 필요하다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에 혼인잔치의 예복이 될 것이며, 그곳에서의 신분과 상급이 될 것이다. 

 

2. 달란트의 비유는 왜 말씀하신 것인가?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달란트의 비유를 들려주신 것인가? 그것은 주님께서 언제 오실른지 모르니 깨어서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날이 언제 올른지 아무도 모르니, 자칫 잘못하면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실 수 있다. 그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달란트를 썩힐 수도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마24장에 나오는 "충성되고 악한 종"의 비유와 마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를 주신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하여, 주님 오시는 날 그분 앞에 어떤 사람으로 서야할른지를 늘 생각하고 그날을 준비하라고 이 비유를 들려주신 것이다. 

 

3. 주님으로부터 사역을 맡은 주의 종들에게 필요한 '순종'과 '충성'은 무엇 같으며 또한 어떻게 다른 것인가?

  주님으로부터 사역을 맡은 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하늘에서부터 이미 사명을 부여받고 이 땅에 파송받아 온 종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땅에서 자신의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달란트를 통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받은 종들이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둘 다 자신의 소명에 대하여 성실해야 하고 열심을 내야 한다. 하지만 둘은 소명을 맡은 것에 약간 차이가 있다. 이 둘의 차이를 비교한다면, '순종'과 '충성'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마24장의 종은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아예 사명을 부여받고 이 땅에 온 주의 종들이다. 이 종들은 자신이 받아서 이 땅에 온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야 천국에도 들어가게 될 것이고 이미 천국에 이미 준비된 채 있는 신분과 상도 받을 수가 있다. 그렇다고 이러한 종들이 100%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인지라 그에게도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달란트를 받은 자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달란트에 충성해야 천국에도 들어갈 수 있으며, 새롭게 그에게 부여될 신분과 상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의 차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먼저 2가지를 살펴보면 이렇다. 첫째는, 소명을 하늘에서 받았느냐 아니면 이 땅에서 달란트로 받았느냐의 차이가 그것이다. 마24장의 종은 하늘에서 소명을 받고 이 땅에 온 자이다. 하지만 마25장의 종은 이 땅에서 달란트로 소명을 받은 자인 것이다. 둘째는, 마24장의 종은 하늘에서부터 복이 결정되어 있지만, 순종하지 않았을 때에는 벌이 중하다는 것이다. 이 종은 하늘에서부터 이미 보좌자리가 준비되어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성실하게 순종했을 때에는 주인이 그에게 주인의 모든 소유를 맡긴다고 하였으니(마24:47)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자가 된다. 그렇지만 인간인지라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는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날 뿐만 아니라 심한 형벌까지 받게 된다. 채찍으로 맞게 될 것이고, 외식하는 자들이 받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마24:51). 그런데 마25장의 종은 충성하면 그에게 많은 상이 주어질 것이다(마25:21,23). 그러나 만약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묵혀두고 사용하지 않았을 때에는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나게 될 것이다(마25:30). 

 

4. 순종과 충성의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주님의 종들이 사실 '순종'하는 것과 그리고 '충성'하는 것은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조금은 강조점에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순종하는 것이 대부분 오늘날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는 주의 종들이 해야 할 일이라면, 충성하는 것은 오늘날 평신도들이 자신의 달란트와 은사에 따라 교회와 복음전파를 위해 헌신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24장의 '순종의 종'과 마25장의 '충성의 종'은 또 어떤 다른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가? 셋째로, 그것은 다른 사람의 유익이 우선인가 아니면 자신의 유익이 우선이냐 하는 것에 있다. 즉 순종의 종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오직 다른 사람(특히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자다(마24:45). 그러나 충성의 종은 모든 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며 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성하는 자는 자신이 받은 달란트가 왜 자신에게 주어졌는지를 늘 묻는다. 그리고 스스로 그 책임을 깨닫고 그것에 충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결과는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된다. 즉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가 가서 열심히 일하여 남겼던 다섯 달란트는 모두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충성하면 그 남은 결과가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넷째로, 그것이 의무적인가 아니면 자율적인가 하는 것에서 차이가 있다. 아무래도 하늘에서부터 구체적인 사명을 지시받고 온 자는 자율적이지 못하다. 자신이 받아가지고 온 그것에 충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재량권이 그에게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이 받은 구체적인 그 사명에만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달란트를 받은 자는 다르다. 그에게 주인은 달란트만을 맡겼을 뿐이다.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지시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본인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재량권이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든지 그것은 종의 선택사항이다. 중요한 것은 왜 지금 내가 내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이 능력과 재주를 물려받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달란트라 할지라도, 실은 자신을 어머니의 태중에 보내실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렇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부터 받은 달란트를 보다 더 자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그는 마25장의 종으로 부름받은 자인 것이다. 

 

5. 충성이란 어떤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이상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충성'이라는 개념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주인으로부터 받은 것에 대한 성실함과 열심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특별히 마25장의 종의 비유를 통해서 정의해보면, 스스로 주인의 기대와 바람을 알고서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주인의 기대에 부응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재능, 재주, 능력)을 열심히 사용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성하는 자는 자신이 부여받은 능력을 아주 무거운 책임감으로 느낀다. 그리고 그것을 묵혀두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남김으로써 주인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성하는 자는 항상 자신의 달란트를 가지고 오늘도 최선을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기회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를 늘 살핀다. 그리고 그것을 언제 그리고 어떻게 써야 할른지 잘 가늠하여 적재적소에 그것을 배치한다. 그러나 악하고 게으른 종은 이와는 정반대로 살아간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은사를 묵혀두고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주인의 기대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은사를 쓰되 자신의 육체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는데도 그것에 사용하지않고 그러한 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자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는 전혀 일하지는 않는 게으른 자가 바로 게으른 종인 것이다. 그럼 지금 나는 어떠한가? 과연 나는 하나님에게 충성된 종으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게으른 종으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2022년 03월 03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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