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4(주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야곱이 이삭의 뒤를 이어 왕적 지위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창28:10~15)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yQyHgkJbI1Y  [혹은 https://tv.naver.com/v/31325368 ]

 

1. 들어가며

  하나님의 뜻은 대체 어떻게 이뤄지는가? 하나님의 뜻은 어찌하든지 반드시 이뤄진다. 단지 시간과 공간의 문제만이 조금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뤄가시는 데에는 3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직접 일하시는 방식이 있다. 예를 들어, 천지창조 때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일하셨다(사44:2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당신의 종인 천사들을 시켜서 일할 때도 있으며(눅1:19), 때로는 우리 인간을 불러내어 그를 통해 일하실 때도 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써서 일하시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후한 상을 주시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영적인 존재 가운데 가장 연약하고 무능한 인간이지만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순종할 때 하나님은 이를 매우 기뻐하시며 그가 일한 만큼 후한 상을 주시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야곱도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130세가 될 때까지 험악한 세월을 보낸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들이 그에게서 다 성취되었다. 그는 대체 어떻게 살았길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다 성취할 수가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지금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자들의 반열에 들어가 있는 것인가? 그 놀라운 인생과 신앙의 비밀을 이제 살펴보도록 하자. 

 

2. 야곱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는가?

  야곱은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삭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신의 부친 이삭이 쌍둥이를 낳았는데, 맏이가 에서였고 자신은 차남이었다. 그러므로 태어나면서부터 장자의 권리와 축복은 형 에서의 손에 있었다. 그렇지만 결국 야곱은 형으로부터 장자의 권리를 넘겨받았고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까지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자식들 만큼은 맏이만 자신의 후사가 되게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아들들로 하여금 자신의 후사들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12명의 아들들 가운데 무려 2명이나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최고의 자리인 24장로들이 되게 하였다. 그런데 그가 130살이 되어서 애굽의 바로 왕 앞에 섰을 때에, 그는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된 우리 조상들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니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 그의 인생이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생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에게 불어닥친 수많은 난관들을 과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으며,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신앙을 인정받은 후 하늘에서 왕적 지위를 누리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인가?

 

3. 야곱이 극복했어야 했던 장애요소들은 무엇이었는가?

  야곱의 험난한 인생은 그가 차남으로 태어남으로 시작되었다. 만약 그가 장남으로 태어났었더라면 그의 인생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차남으로 태어남으로 인하여 장자가 갖는 권리를 하나도 갖지 못했다. 더욱이 그의 아버지 이삭은 처음부터 장자의 복을 에서의 몫으로 정해놓았다. 그러므로 야곱이 76세가 될 때까지 장자의 몫은 에서의 것이었다. 또한 자신의 형인 에서도 장자의 축복만큼은 자신이 받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것마저 야곱이 빼앗아가자 에서는 동생을 죽이려고 20년간 칼을 갈았다. 다행히도 그 기간동안 외삼촌 라반의 집에 피해 있었지만 외삼촌 또한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20년 동안이나 야곱을 부려먹고 아무것도 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와 형과 친족으로부터 받는 고통을 다 이겨내었다. 그렇다면 그가 겪어야 했던 어려움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가?

  첫째, 야곱은 자신의 아버지의 한계를 극복해야 했다. 왜냐하면 아버지 야곱은 처음부터 장자인 에서를 사랑하였고 그에게 장자의 복을 주려고 했기 때문이다(창25:28). 이삭은 젊었을 때에는 번제물로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려 그의 신앙을 인정받았었다. 그러므로 그의 인생에는 장애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잘못된 관념이 하나 자리잡고 있었으니, 그것은 장자권에 관한 것이었다. 에서가 야곱보다 먼저 태어났으니 장자의 축복은 당연히 에서의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내 리브가가 쌍둥이를 잉태하였을 때에 하나님부터 받은 계시에 관심을 가졌어야 했다. 그것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는 예언적인 말씀이었다(창25:23). 하지만 이삭은 늘 자신에게 사냥하여 고기를 바치는 에서를 좋아했다. 자신의 눈이 흐려져서 더 이상 오래 살 것 같지 않은 시점까지 그랬다. 그때는 이삭의 나이가 136세였고, 에서와 야곱의 나이는 76세였다. 다행히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축복은 야곱이 받기는 했지만,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이러한 잘못된 편견을 딛고 어머니와 더불어 장자의 축복을 받기까지 엄청난 세월을 인내하면서 기다려야 했다. 

  둘째, 야곱은 형제간에 장자권의 경쟁과 죽음의 위기를 극복해야 했다. 야곱의 형 에서는 들사람이었다. 사냥꾼이었다. 활을 잘 쏘는 자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늘 에서의 편이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야곱도 만만은 상대는 아니었다. 엄마 뱃속에서 나오면서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올 만큼 욕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형으로부터 장자의 권리를 빼앗으려고 호시탐탐 노렸다. 그리고 그의 나이가 15세쯤 되었을 때에 형이 사냥하고 돌아오는 시간에 팥죽을 쑤어 형의 배고픔을 자극하였고, 형으로부터 장자의 권리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팥죽을 먹게 하였다. 그래서 장자의 권리를 넘겨받았다. 하지만 문제는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는 것이었다. 그래서 76세가 되었을 때에 어머니와 합작하여 기어코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자 자신의 동생 야곱이 장자의 축복까지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에서는 분이 한없이 끓어올랐다. 그래서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이었지만 그는 동생을 죽이려고 하였다.  낌새를 알아차린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시킨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외삼촌 집에 있으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 이삭은 야곱에게 그곳에 가서 친족 가운데서 아내를 얻어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20년을 지낸 후에 돌아오게 되는데, 형 에서는 그때도 여전히 분이 풀려있지 않았다. 동생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에서는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야곱을 죽이려고 나선다. 그러자 야곱은 얍복강에 홀로 남아 사활을 건 기도에 들어간다. 이미 20년전에 벧엘에서 영안이 열렸던 야곱은 그때 두 무리의 군대를 보게 되는데, 한 무리는 자신의 앞을 지나쳐 갔지만, 나머지 한 무리와 함께 얍복강에 함께 남아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그 무리의 대장격이 되는 천사가 그만 야곱의 손에 붙들리게 된다. 영안이 열리게 되면 천사와 귀신의 손을 붙잡을 수가 있다. 야곱은 그 천사를 하나님을 대신하는 존재라 생각하고는 자신에게 축복하기 전에는 놔주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 천사는 자신이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야곱의 환도뼈를 치고는 그에게 축복한 후 떠나갔다. 그러자 하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사활을 건 야곱의 기도를 들으시고 앞서 보낸 한 무리의 천사들을 에서에게 보내신다. 에서는 자신의 동생이 마음을 풀기 위해 먼저 보낸 세 떼의 예물을 보았지만, 그 다음에 한 무리의 무장한 군인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내 주눅이 든다. 자신의 군사에 비하면 놀라운 무장을 한 군사들 앞에 오금이 절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코가 땅에 닿도록 절하면서 용서를 비는 동생을 용서해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드디어 야곱은 96세 때에 가서 형으로부터 장자의 권리와 축복을 완전히 넘겨받게 된다. 

  셋째, 야곱이 셋째로 넘어야 할 산은 그를 속여서 부려먹고 있는 외삼촌이었다. 왜냐하면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받았지만 외삼촌은 야곱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외삼촌은 자신의 둘째 딸 라헬을 좋아하는 야곱을 이용하여, 딸을 그에게 준다고 하면서 첫째 딸 레아를 먼저 시집보내고 7년을 봉사하게 하였고, 일주일 뒤에 둘째 딸 라헬을 주면서 또 7년을 봉사하게 하여, 무려 14년동안 무임금으로 그를 부려먹게 된다. 그러자 이제 야곱은 자신의 몫을 달라고 한다. 하지만 외삼촌 라반은 무려 10번이나 삯을 번역하면서 주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셔서 6년동안 두 떼나 되는 가축을 얻게 하신다. 또한 외삼촌이 자신을 놓아줄 것 같지 않자, 야반도주하여 그곳을 빠져나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꿈에 야곱을 뒤쫓는 라반을 막아세움으로서 야곱은 안전하게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넷째, 야곱이 마지막으로 극복해야 할 것은 슬픔이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사람이 자신보다 먼저 죽고 유린당하고 없어지는 고통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먼저는 20년만에 고향에 돌아오다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막내 베냐민을 낳으면서 노중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그때 라헬의 나이는 고작 45세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에 가다가 세겜에서 자신의 딸 디나 세겜 추장에서 강간당하는 일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다시 10년 뒤에 아버지 집에 돌아와서는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이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라헬의 아들은 요셉을 잃어버린다. 형제들이 그를 시기하여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곱은 이 모든 고통을 묵묵히 견뎌내었다. 

 

4. 야곱이 자신의 인생의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사실 야곱의 인생은 고단한 인생이었고, 험난한 인생이었다. 하지만 야곱은 모든 어려움들 앞에서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한 번도 문제 앞에 주저 앉은 적이 없었다. 어찌하든지 그는 자신 앞에 놓인 문제들을 이겨내었던 것이다. 사실 그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뜻을 몰랐던 아버지와 형과 외삼촌을 극복해야 했다. 그리고 출생적인 장애를 끝내 극복해야했고, 처가살이의 고생과 아내가 죽고 자식이 유린당하고 또한 잃어버리는 슬픔마저도 이겨내야 했다. 그렇다면 야곱은 이처럼 자신의 인생에 불어닥친 수많은 난관들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인가? 그것은 딱 한 가지를 그가 붙들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그것이 없었다면 그는 여러 번이고 낙심하고 좌절한 채 쓰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것 때문에 모든 문제들을 정면으로 승부하여 뚫고 나갔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이 담긴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를 그 많은 고통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어려움을 뚫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그는 최소 3번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붙들었다.

  첫 번째로는 그의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그가 태중에서 자신의 형과 싸우고 있었을 때에 이를 놓고 기도하는 리브가에게 하나님의 계시적인 말씀이 있었다. 그것은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25:23)"는 말씀이었다. 고로 장막에서 늘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로부터 이 말씀을 새겨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15살 때에는 형 에서에게서 팥죽으로 장자권을 살 수 있었으며, 76세 때에는 어머니와 합작하여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아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는 그가 정차 없이 고향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을 향해 가고 있었을 때에 벧엘에서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다. 그때 야곱은 꿈 가운데서 사닥다리의 환상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그가 영안이 열려서 실제를 본 것이지 추상적인 장면을 본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사닥다리 꼭대기에서 서서 이렇게 그에게 말씀하셨다(찰28:10~15). 그것은 딱 2가지였다. "네가 바로 이삭의 진정한 장자이며 후사(상속자)이다. 너의 후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내가 이 가나안 땅으로 다시 올 때까지 내가 너를 지켜줄 것이며 너를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이었다. 야곱은 이 말씀을 붙들었다. 그러므로 그가 앞으로 어떤 어려움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시고 도와주실 것을 믿었다. 그러니 외삼촌 라반에게 속아서 고생을 하고 있어도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반드시 도와주실 것을 믿었다. 그러자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것은 어떤 나무가지를 놓아두어도 결국 양떼 중에 실한 것은 야곱의 것이 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곱은 6년동안 두 떼를 이루어 외삼촌 라반의 집을 나설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형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고 온다고 해도 오직 하나님만을 붙들면서 필사의 기도를 한 끝에 다시 한 번 하나님으로부터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로는 30년만에 다시 벧엘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들려준 음성이었다. 야곱이 76세 때에 정처없이 길을 떠나서 잠들었던 곳이 벧엘이었는데, 그가 다시 그곳에 도착할 때에는 30년이 지난 싯점이었다. 그런데 그때 또다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난 2가지를 약속해주시었다. 첫째는 "너야말로 사람들 중에 진정한 이긴 자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창35:9~10). 그러니 이제 '야곱'이라는 이름을 떼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살라고 하셨다. 한낱 형의 발꿈치나 붙잡고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과 겨루어 이기는 사람이 되었으니, 그의 이름을 '이긴 자'라고 불러주신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그를 통해 한 민족과 민족의 총회가 나올 것이며, 왕들이 그의 허리 가운데서 나올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창35:11~12). 그것을 야곱은 또 믿었다. 그리하여 야곱은 자신의 아들들을 통하여 12명의 부족들을 만들어 모두가 다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이 되게 하였으며, 자신의 넷째 아들 유다를 왕의 지파로 만들어, 그의 후손 가운데서 다윗왕이 나오게 하였으며, 다윗왕의 33대 후손으로서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열 한 번째 아들 요셉을 애굽의 왕 다음 가는 사람으로 만들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천국에서도 유다와 요셉을 24장로의 반열에 앉게 하였다. 

 

5. 힘들었어도 야곱의 인생이 아름다운 이유는?

  비록 야곱이 힘든 인생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그의 인생을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가 살면서 부딪혔던 모든 문제를 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이겨내었다는 점이다. 그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어머니를 통해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뤄진다는 것을 굳게 믿고 살았다. 그리고 그의 인생 모든 순간에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질 때 그 말씀을 믿고 앞으로 나아갔다. 말씀이 있으면 그 말씀을 붙잡고 모든 어려움을 견뎌내고 극복하였던 것이다. 그는 특별히 자신을 하나님께서 장자로서 축복해주신다는 것을 붙들었기에 그는 자신의 출생적인 장애를 극복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그를 지켜주시며 떠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었기에 외삼촌 집에서 눈 붙힐 겨를이 없이 지낼 때에도 그 험난한 처가살이를 견뎌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창31:38~41). 그리고 자신의 형이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죽이려고 온다고 해도, 하나님과 담판하여 자신의 가족을 전부 지켜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가족을 지켜주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서야 비로소 밤새 씨름하던 천사를 놓아주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106세에 자신의 고향에 돌아왔어도 자신의 아들들 중에서 왕노릇할 자가 나온다는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또한 철저히 믿었다. 그러므로 그의 아들을 중에서 왕노릇하는 하는 자가 2명이나 나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야곱의 허무맹랑한 것을 붙든 것이 아니었다. 더더욱 자신이 지어낸 말을 믿은 것도 아니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믿은 것이다. 한 번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반드시 실현된다는 것을 믿은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인생은 그가 믿은 대로 되었다. 

 

6. 나오며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살다가 간 사람을 고르라면 단연코 우리는 야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인생은 장자권이 없고 장자의 축복에서 배제된 차남으로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출생적인 장애 앞에서 좌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출생적인 약점을 비관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들었고 그것을 철저히 믿었다. 왜냐하면 온 세상은 변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로 되어진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출생적인 장애는 96년이 지난 다음에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형과 외삼촌의 난관들을 하나씩 하나씩 이겨나갔다. 그는 너무 무리 하지도 않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기 전에 미리 어떤 행동에 돌입하지지도 않았다. 그만큼 철처히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살다간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인생이 생각할 때 가슴이 벅차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도 결코 녹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도 야곱처럼 수많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역시 이기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든 자에게 야곱과 동일하게 하늘에서 왕노릇할 수 있는 지위를 주신다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이다(계2:26~27). 앞으로 우리에게 어떠한 험난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른지 몰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너무나 가슴 벅찬 인생을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2022년 12월 04일(주일)

정병진목사

 

천국에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가? 그리고 천국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누구나 다 왕 노릇할 수 있는가? 아니다. 천국에 들어가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거기에서 왕 노릇하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당신을 창조의 시작이신 이라고 말씀하셨다(계3:14). 우리가 합당한 조건을 갖춘 자가 된다면 얼마든지 보좌를 창조하실 수 있는 이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천국에서 보좌에 앉아 다스리는 자가 되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보좌 자리란 대체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할 때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는가? 여기, 그것의 5가지 열쇠들이 있다.

 

2022-03-27(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천국복음(31) 천국에서 받을 상(3-4) 천국에서 보좌자리를 차지하는 이기는 자는 누구인가?(2)(계3:14~2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_ufOIGpX_MA [혹은 https://tv.naver.com/v/25945474 ] 

 

1. 들어가며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쩌면 천국으로의 여행을 준비하는 순례객과 같은 것이다. 바로 천국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 종착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복 받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천국에 들어가는 자이자 그때에 주님께로부터 칭찬과 상을 얻는 자일 것이다(딤후4:7~8,18). 그렇다면 천국에서 성도들이 얻게 되는 상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것은 총 3가지다. '천국 집'과 '면류관'과 '보좌 자리'가 그것이다. 이것들 중에서 '천국 집'은 우리가 주님께 기도 생활 잘하고 예배만 잘 드려도 좋은 집의 재료를 확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천국 집은 주님을 사랑한다는 영적인 표현들을 통하여 지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두 번째로 '면류관'도 상으로 주어진다. 그런데 이것을 받으려면 그만큼 주님이 자랑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되어야 가능하다. 이런 자들에게는 머리에 관이 쓰여지게 되는데, 그 모양이 월계관이나 왕관 혹은 티아라관처럼 생겼다. 그리고 그 면류관에 박힌 보석들도 다 그 종류와 크기와 모양과 색깔이 다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럼 천국에서 가장 귀한 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셋째로 '보좌 자리'다. 그럼 보좌 자리란 어떤 상을 가리키며, 보좌에 앉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리고 누가 과연 그러한 보좌 자리에 앉게 되는가? 오늘은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신 2가지 말씀과 더불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3가지 조건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이 저 천국에 준비된 그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 '보좌 자리'는 어떤 상을 가리키며, '보좌에 앉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천국에 가면 성도들이 예배하는 시간이 있다. 다만 천국에서 드리는 예배는 헌금 시간이 없고, 설교 시간이 없을 뿐이다. 거기에서도 찬양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천국 성도들은 3층 건물 정도로 보이는 커다란 스타디움에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예배드릴 때면 24반차 중에서 하나의 반차가 올라와서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그때에 성도들 중에 보좌에 앉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물론 모든 좌석은 다 지정석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성도들은 보좌 자리에 앉지 못한 채 서 있는 상태에서 예배를 드린다. 왜 그러는 것일까? 그것은 보좌 자리라는 것이 천국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아주 귀한 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보좌 자리란 천국에서 누리는 최고 수준의 상으로서, 천국에서 성도들이 갖는 지위와 신분을 표현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에는 성도들 중에 일부가 144,000석 중에서 자신에게 마련된 보좌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린다.

  그럼 천국에서 보좌 자리에 앉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2가지를 뜻한다. 하나는 천국에서 다스리며 통치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심판하며 분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스리는 자들도 사실은 2가지 계층이 있다. 하나는 왕으로 통치하는 자가 있고, 또 하나는 주인으로 다스리는 자가 있는 것이다. 이 중에서 왕으로 통치하는 자들은 그들이 다스릴 고을들이 있으며, 백성들이 있다. 그리고 주인으로 다스리는 자는 자기 집에 일하는 종들이 있다. 그들은 시녀(여자 일꾼)와 경호원(남자 일꾼)이다. 참고로 왕으로 통치하는 자들은 144,000석의 70줄의 좌석 가운데 1번 줄에서 6번 줄에 앉아 있으며, 주인으로 다스리는 자는 70줄 가운데 7번 줄에서 70줄 까지에 앉아 있다. 그렇다고 천국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세상의 경우처럼 비참한 신분이라는 것은 아니다. 기쁨으로 와서 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스리는 자들도 그를 목양하는 것이지 그들을 철장으로 치는 것을 행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천국에서의 신분이 천국에서 크게 둘로 나눠지는 것이다. 다스리는 자와 섬기는 자로 나눠진다. 그럼 나는 과연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어떤 신분의 그룹에 속하게 되는 것일까?

 

3. 천국에서 보좌 자리는 누가 차지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천국에서 보좌 자리는 대체 누가 차지하게 되는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허투루 사람들을 아무나 그 자리에 앉게 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행한 대로 보상해 주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계22:12).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한 모든 것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다 천국에서 보상해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보상의 수준은 제일 약한 수준으로는 '천국 집'으로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중간 정도의 수준으로는 '면류관'으로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장 높은 수준으로는 '보좌 자리'로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보좌 자리에 앉는 수준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교회의 성도들 중에서 '이기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기는 자'라는 말은 크게 3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숱한 역경들에 대해서 '극복하는 것'을 가리키며, 둘째로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는 '승리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 때에는 남보다 '우세하는' 자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누가 이기는 자인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당시 사도 요한이 쓴 일곱 교회의 편지 속에 들어 있다. 특별히 일곱 교회 중에서도 보좌에 앉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개의 교회 곧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신 말씀과 라오디게아에게 주신 말씀 속에 들어 있다. 

 

4.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보좌 자리는 누가 차지할 수 있는가?

  주님께서는 누가 천국에서 보좌에 앉아 다스리는 자가 될 수 있는지를 먼저는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2가지를 말씀해 주셨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인데, 어떤 것이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인지에 대해 주님은 구체적으로 2가지로 말씀해 주셨다.

  첫째는 거짓된 가르침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다(계2:24~25). 당시 두아디라 교회에는 이세벨이라고 하는 거짓 여선지자가 있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당시 두아디라 안에 있는 여러 교회의 주의 종들을 꾀여서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게 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역 조합이라는 조직에 들어가서 그들이 섬기는 수호신이나 우상을 숭배하고, 신전 창기들과 음행을 행하고, 그리고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러한 일은 사회생활을 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서 죄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아디라 성도들 중에 일부는 그녀의 가르침을 거부하였다. 그것은 엄연히 잘못된 우상 숭배 행위요 음행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사람들은 왕따를 당하기 일쑤였고, 교회 밖에서는 사회적인 홀대를 받았으며, 경제적인 불이익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이들은 그녀의 거짓된 가르침을 따라가지 않았다. 이들이 바로 이기는 성도 곧 역경을 극복하는 성도인 것이다. 이들이 바로 천국에서 왕 노릇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둘째는 예수님의 사역을 끝까지 성실히 준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계2:26~28). 그렇다면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여 천국 백성을 산출해 내고 그들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가도록 돕는 것이었다. 이 일을 위해 주님께서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가르치시기도 하셨다. 그리고 병든 자들을 고쳐 주시기도 하셨다(마4:23, 9:35). 이는 천국이 실상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렇다. 누가 과연 천국에 들어갈 때에 왕 노릇을 하는 자가 되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하여 천국 복음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전파하는 자이다. 구원받는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이들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가도록 도와주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런 자들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고 하셨다(계2:26). 그렇게 되면 이들은 천국에서 섬기는 성도들을 목양할 것이며, 어떤 이들은 철장 권세를 사용하여 다른 이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5.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보좌 자리는 누가 차지할 수 있는가?

  이어서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말씀으로 누가 보좌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지를 3가지로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포함하여 다섯 가지 말씀에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자가 천국에서 다스리는 자, 왕 노릇하는 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과연 보좌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나머지 3가지 조건은 대체 무엇인가?

  첫째, 영적인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라고 하셨다(계3:19). 여기서 열심을 내라는 말은 뜨겁거나 차겁거나 하는 것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라오디게아 성도들이 어느 때부턴가 뜨뜻미지근하게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왜 그럼 그들의 신앙은 식어버렸으며, 죄에 대해서는 유야무야된 것인가? 그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세상적인 부요함 때문이었다. 그러자 주님은 세상적인 부요함 때문에 식어버린 그들의 신앙의 열정을 다시 회복하시기를 촉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역시 오늘날 육적인 일들에 만족하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일들에 열심을 품고 수행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기도할 때에는 기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 회개할 때에는 회개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하는 것이다. 천국 말씀 잔치가 열리면, 열심을 내어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다시 하나님에 대해서는 히에라볼리의 온천수처럼 뜨거워져야 하겠고, 죄에 대해서는 골로새의 냉천수처럼 차겁게 거절해야 한다. 

  둘째, 세상적인 일이나 죄짓는 일로부터 돌이켜 회개하는 것이라고 하셨다(계3:19).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어느새부턴가 죄에 대해 무감각해져 있었다. 왜냐하면 세상적으로 볼 때에는 그들은 부자로 살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에게는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계3:17). 먼저 그들은 금융 사업을 통하여 집집마다 많은 금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흑양모 사업을 통하여 검은색의 코트들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브루기아 안약 사업으로 인하여 육의 시력이 다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영적인 상태는 가련한 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볼 때 그들은 가진 것이 없었으며, 영적으로 볼 때에 그들은 옷을 입고 있지 않았으며, 영적으로 볼 때 그들의 눈들은 심히 망가져 있었기 때문이다(계3:17). 그러자 주님은 그들에게 세 가지 처방전을 내리셨다. 주님으로부터 3가지를 사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계3:18). 먼저는 불로 정련된 채 있는 금을 사라고 하셨다. 그들의 집에 있는 금은 불순물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순물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금이란 곧 주님이 이 교회에 자신을 소개할 때 했던 말씀처럼, 거짓말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는 진리의 말씀을 사라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신을 "아멘(참, 진리)이신 이, 신실하고 참된 증인이신 이(계3;14)"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돈만 모으는 일로부터 회개하여 진리의 말씀을 얻는 것으로 돌이켜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의 처방전은 주님에게서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흑양모 코트는 영적인 수치를 가리는데 아무런 효과를 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자신들이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는 일에서 돌이켜 이제 회개함으로 자신의 영혼을 단장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세 번째의 처방전은 주님으로부터 안약을 사서 발라 보라는 것이었다. 이는 천국에서 진정 부요한 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제대로 된 눈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오직 회개함으로 고장난 눈을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서 왕 노릇하는 자가 되려면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던 일을 멈춰야 한다. 그것에서 돌이켜야 하는 것이다. 

  셋째, 신랑되신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회복하고 다시 오실 주님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계3:20). 왜냐하면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그들의 마음 문 밖에 서서 그들의 문을 두드릴 것인데 그때에 문을 열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슨 말씀인가? 그것은 2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영적인 무감각에 빠져 있는 신부들을 깨우기 위해 주님이 오실 때에 그분을 맞아들임으로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이다. 주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아가서에서 나오는 말씀처럼, "나의 사랑, 나의 누이, 나의 어여쁜 자, 나의 완전한 자야" 라고 그들을 부르시면서 그들에게 문을 열어 달라고 하는 신랑되신 주님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 하지만 문 앞에 서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둘째로, 주인이 오면 언제든지 문을 열어 줄 준비를 하고 있는 종처럼 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눅12:36~37). 다시 오실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인 것이다. 

 

6. 나오며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과연 주님께서 지금 재림하신다고 하실 때에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지금까지 언급한 다섯 가지 사항을 잘 준수하고 있는 사람인가? 첫째로, 세상적인 부와 쾌락을 추구해도 상관없다는 거짓된 가르침을 과연 거절한 채 오직 하나님만 섬기며 그분만을 따라갈 수 있는가? 둘째로, 주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에 하셨던 사역처럼 천국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셋째로, 영적인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가? 넷째로, 죄에 대해서는 댓가를 지불해서라도 철저히 회개하고 있는가? 그래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가? 다섯째로, 예수님과 친밀해지고 있으며,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다섯 가지 질문에 우리가 OK라고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은 천국에서 보좌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진 구원과 구속은 사실 믿음과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천국에서 우리가 받을 상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한 대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연 우리는 오늘 소극적인 일들 곧 거짓된 가르침과 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적극적인 일로서 영적인 일과 천국 복음 전파에, 그리고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재림 준비에 과연 얼마나 열심을 내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아무쪼록 이 말씀이 우리의 영적인 나침반이 되어서 우리 모든 성도들을 천국에서 보좌에 앉는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2022년 03월 27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천국복음(30) 천국에서 받을 상급(3-3) 천국에서 보좌자리를 차지하는 이기는 자는 누구인가?(1)(계2:18~29)_2022-03-25(금)

https://youtu.be/7idfI1Eo-oE  [혹은 https://tv.naver.com/v/25945195 ]

 

1. 천국에서 보좌 자리는 누가 차지하게 되는가?

  천국에 들어가면 성도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뉘게 된다. 하나는 '다스리는 자'이며 또 하나는 '섬기는 자'이다. '다스리는 자'는 다시 두 종류가 있어서, 주인으로서 다스리는 자가 하나 있고, 왕으로서 다스리는 자가 또 하나 있다. 주인으로 섬기는 자의 집에는 시녀들(여자로서 섬기는 자)과 경호원(남자로서 섬기는 자)이 있다. 그리고 왕으로 섬기는 자는 성밖으로 나가서 왕으로 다스릴 민족들 내지는 나라들이 있다. 특별히 왕으로 섬기는 자를 요한계시록에서는 144,000명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들은 최소한 자기 집에 시녀와 경호원을 데리고 있다. 그리고 144,000명의 다스리는 자들 중에 첫 번째 줄부터 여섯 번째 줄까지는 왕 노릇을 하는 다스리는 자가 된다(참고로, 144,000명은 24반차별로 총 70줄의 좌석이 놓여 있다. 그리고 한 줄에는 여러 명이 있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누가 이 보좌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가?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이 보좌 자리는 이기는 자들이 차지하게 된다(계2:26~27, 3:21).

 

2. 천국에서 보좌 자리에 앉게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천국에서 성도들 중에 보좌 자리에 앉게 된다는 것은 2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이들이 천국에서 자신의 보좌에 앉아서 통치자가 된다는 뜻이다. 이때 통치할 대상은 주인으로서 섬기는 성도들이 될 것이며, 왕으로서 여러 민족들(나라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이들이 천국에서 심판하는 무리에 속한다는 뜻이다. 원래 천국에서 심판하는 자는 인자됨으로 인하여 예수님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고유한 권한이었다(요5:27).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기는 자들에게도 이러한 권한을 나눠 주신다고 하셨다(계3:21, 20:4). 그래서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 중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민족들과 열방 민족들을 심판하는 일을 감당할 자가 있는 것이다(눅22:30, 마19:28). 그런데 이때 성도가 심판하는 자들에 속한다고 해서 이들이 다른 성도들을 지옥에 보내는 일을 결정한다는 말은 아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결정하시기 때문이다. 다만 성도들의 행위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다섯째 인을 떼었을 때 있었던 순교자들의 호소처럼 하나님께 어떤 것을 신원해 달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며, 또 어떤 분들은 니느웨 백성들처럼 당시에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던 자들을 정죄할 수도 있을 것이다. 

 

3.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 중에서 보좌 자리를 차지하게 될 자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누가 보좌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성도들인지를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 중에서 이기는 자들에게는 만국(민족들, 나라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계2:26~27). 이때 만국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전의 메시지에서도 살펴보았지만, 그것은 첫째로, 성안에 있는 성도들(섬기는 자들)은 목양하는 일도 될 수 있고, 둘째로 성 밖에 있는 성도들을 철장 권세로 질그릇 깨뜨리듯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 중에서 과연 누가 이 보좌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요한계시록 2:24~28에 나와 있듯이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 중에서 '남은 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여기서 '남은 자들'이란 여선지자인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라가지 않은 소수의 무리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사탄의 깊은 것들을 경험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두아디라 교회는 단어 자체가 복수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 두아디라 교회 안에는 두 종류 성도들이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 가운데, 교회 이름이 복수로 나오는 교회는 딱 두 교회 뿐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는 두아디라 교회요, 또 하나는 사데 교회다. 이 두 교회만이 그 교회의 이름이 성경에 똑같이 두 번씩 나온다. 그리고 두 번씩 나오는 교회 이름이 둘 다 복수로 쓰였다(계2:18,24, 3:1,4). 이는 교회가 심판 날에 교회가 크게 두 무리로 분류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 중에는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들이 있고 또한 그녀의 가르침을 따라가지 않는 남은 자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데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데 교회 안에는 자기들의 옷을 더럽힌 다수의 교인들과 그리고 더불어 자기들의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흰옷을 입고 다니는 몇 명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 중 후자들은 다 이기는 자들이 되어 보좌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는 성 밖으로 내어 쫓겨나거나 혹은 불못에 던져지고 말 것이다. 

 

4. 이세벨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세벨의 가르침'이란 무엇이며, '사탄의 깊은 것'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계2:24). 여기에 나오는 '이세벨'은 가명인 것 같아 보인다. 왜냐하면 성도가 과거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숭배했던 '이세벨'이라는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실제 그녀의 이름을 들어서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두아디라 교회 안에는 그러한 지도급 인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 이 여자는 대체 어떤 여자인가? 이 여자는 그녀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여자는 저 이스라엘 왕국 당시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의 아내로 시집온 시돈 왕 엣바알의 딸과 같은 자였을 것이다. 당시 그녀는 정략결혼으로 인하여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에게 시집을 왔다. 그런데 그때에 그녀는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데리고 북이스라엘로 왔다. 그리고 이방 신전을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 세웠다. 그리고 여호와를 섬기는 선지자들을 찾아서 학살까지 하였다. 그렇다면 두아디라 교회에서 이 여자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사실 이 여자의 정체가 누구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는다. 다만 이 여자가 두아디라 도시 안에 위치한 여러 교회들의 종을 가르치고 있었으며 미혹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때 가르쳐진 것은 성도는 음행을 해도 그것이 죄가 되지 않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고 하여도 크게 상관이 없다고 가르쳤다는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에는 그때 당시 성도들의 고민을 풀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두아디라 도시에는 '길드'라는 상업 조직이 있었다. 일종의 무역 협동 조합인 셈이다. 그런데 이 조합에는 구리 세공업 조합도 있었고, 염색 세공업 조합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 조합원들은 자기들의 경제적 차지와 단결을 위해서 자기들의 수호신을 숭배하였다. 이들은 특별히 제우스의 아들 아폴로(두아디라에서는 '티림노스'라 불렀다)를 섬겼으며, 그리고 제물을 제단에 바쳤다. 그리고 남자들은 신전 창기와 음행을 행하였고, 그리고 바쳐진 고기를 가져다가 각 방에서 식사를 하였다. 이때 혼사 이야기도 오갔고, 사고 파는 일에 관하여도 의논하였다. 그러니 이 모임에 나가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그러니 교회 성도들이 주의 종에게 이 모임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물었을 것이다. 그때에, 이세벨과 같은 여선지자는 그곳에 가서 음행을 저질러도,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괜찮다고 가르친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우상의 제물이 자기의 몸을 더럽힐 수가 없고, 음행을 한다 해도 사회의 보편적인 관습이기에 괜찮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구원에는 그리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친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이세벨의 가르침'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5. 누가 두아디라 교회의 이기는 자들이 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단호하게 두아디라 교회 안에 있는 두 종류의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자에게는 엄중한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고 했다. 그것도 그의 눈이 불꽃같고 그의 발이 빛난 주석같은 분이 말하고 있다고 했다(계2:18). 이는 그들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라는 뜻이다.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그리고 이것은 이 땅에서 질병의 침상에 던져지는 일이고, 큰 환난 가운데 빠지게 되며, 그녀의 자식들이 갑자기 죽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런 자들은 죽은 후에 심판을 받아 최소로는 성 밖으로 내어 쫓겨난다든지 아니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 중에는 이러한 이세벨의 가르침을 거부한 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만을 따라가려는 자들이 소수가 남아 있었다. 이들이 바로 두아디라 교회의 남은 자들이다. 이러한 성도들에게 주님은 장차 만국(민족들, 나라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줄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우선 첫째로, 이세벨의 가르침을 거부했다. 그러므로 이들은 교회에 와서도 아마 왕따를 당했을 것이다. 둘째로, 이들은 주님의 행위들을 끝까지 지켰다. 여기서 '주님의 행위들'이란 회개할 것과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핍박을 당해도 조롱을 당해도 그들은 그렇게 참고 인내하면서 복음을 전파한 것이다. 왜나하면 주님께서도 역시 그 일을 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한 마디로 정결한 처녀라고 할 수 있다. 세속에 있는 것들로서, 쾌락(음행)의 정욕과 돈(노동 조합에 바친 우상의 제물을 먹음)의 정욕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4장에서는 144,000명이 누군지를 이렇게 소개한다. 이들은 첫째로 이세벨과 같은 여자로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지 않은 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둘째는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로서 그들의 입에는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라고 했다(계14:4~5).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과연 어디에 속한 것인가? 만약 잘못된 길, 멸망의 넓은 길로 가고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돌이키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미 그러한 좁은 길을 가고 있는 분이라면 세상 끝날까지 그 길을 쭉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2022년 03월 25일(금)

정병진목사

 

 

천국에 들어가면 누가 면류관을 쓰게 되는가? 그리고 성도들이 쓰게 될 면류관에는 실제로 어떤 것들이 있는 것인가? 경주에서 승리하는 자만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았던 순교자들만 면류관을 쓰는 것인가? 천국에서 쓸 면류관은 주의 종들만, 사명자들만이 받는 것인가? 아니다. 여기 천국에서 실제로 쓰게 될 면류관에서 관한 가장 확실하고도 정확한 정보가 우리를 지금 기다리고 있다. 2021-08-01(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천국에서 면류관은 누가 쓰는가?(딤후4:7~8)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CwWIX2wiLxc [혹은 https://tv.naver.com/v/21645982 ]

 

1. 들어가며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받을 상은 무엇인가? 그것에는 3가지가 있다. 하나는 '보좌'자리요, 또 하나는 '면류관'이며, 마지막 하나는 '천국집'이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누가 어떻게 이것을 차지하는지를 잘 모른다. 천국에 들어가면 누구나 다 왕같은 제사장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천국에서 모든 성도들이 한 자리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상상해보라. 서로간에 겹쳐서 예배를 드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다도 앞선 자리에서 예배드릴 자가 있음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천국에서 그 자리는 지정좌석제라는 것을 천국에 들어가보면 알게 될 것이다. 한 번 정해진 자리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서 어떤 자리에서 예배드릴 것인지를 대비해야 한다. 이것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 받게 될 면류관과 천국 집도 잘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오늘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우리가 머리에 쓰게 될 '면류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과연 '면류관'이란 어떤 것을 가리키며. '누가' 쓰는 것이며, '어떤 자'가 받게 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혹시 그동안 면류관에 대해서 듬성듬성 알고 있었다면 오늘은 종합적으로 그것을 살펴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가 이미 준비해놓은 면류관에는 어떤 것이 있으며, 앞으로 받아쓰게 될 면류관은 무엇이며 또한 그것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2. 천국에서 받을 상 3가지는 무엇이며, 어떻게 받는가?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받을 상급은 무엇인가? 그것은 방금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보좌'자리와 '면류관'과 '천국집'이 있다. 그런데 이 3가지는 갑자기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부 다 이 세상에서 준비했던 것을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은 어떤 자가 받게 되는가?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먼저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보좌'자리는 얼마나 충성했으냐 그리고 얼마나 깨끗한 자가 되었느가에 따라 결정이 된다. 그런데 이 보좌자리는 대부분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사명을 주어서 보낸 자들에게 주어지게 될 것이다. 물론 몇 몇은 아닌 자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 성도로서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았고 지금 살고 있는 인류를 계산해보면 약 250~280억 정도인데, 그 중에서 보좌자리를 차지할 사람은 144,000명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반 성도들이 정말 기대하고 소망하고 바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역시 '면류관'과 '천국집'이다. 이것은 사실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면류관'은 어떤 자가 받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그의 충성에 따라, 주어진 과업을 인내함으로 완성한 것에 따라 주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국집'은 그가 얼마나 충성했으며 또한 얼마나 순종했는가에 따라 주어지게 될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 관하여는 다음 주에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3. 면류관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성도들이 천국에서 받을 '면류관'이란 대체 어떤 것을 가리키는가? '면류관(冕旒冠)'을 한자로 살펴보면, '면류관 면(冕)' 자에다가, '깃발 류'(旒)에다가, '갓 관(冠)' 자다. 즉 '면류관'이란 3부분을 합쳐놓은 개념이다. 즉 맨 위에 있는 네모난 붉은 부분으로서 '면'에다가, 달롱달롱 달려있는 구슬들(우리나라는 보통 9개)을 꿰놓은 것으로서 '류'에다가, 마지막으로 머리부분이 들어가도록 동그란 생긴 아랫 부분으로서 '관'을 합쳐놓은 것을 면류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국어사전에서는 면류관이란 “제왕(帝王)의 정복(正服)에 갖추어 쓰는, 직사각형(直四角形)의 판에 많은 주옥(珠玉)을 꿰어 늘어뜨린 관(冠)”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천국에서 성도들이 쓸 '면류관'은 세상 사람들이 쓰는 면류관과는 다르다. 천국에서 성도들이 쓸 면류관은 쉽게 말하자면, '티아라'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동그란 원형의 금색이나 은색의 띠 같은 것에 각종 보석이 물려있는 장신구가 바로 천국에서 성도들이 받을 면류관인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면류관은 '승리관' 내지는 '월계관'이다. 하지만 천국에서 쓸 면류관은 그러한 것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월계관'은 월계수나무 잎으로 동그랗게 만든 것인데, 천국에서 받을 면류관은 각종 보석이 물려있는 티아라의 관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둥글다는 측면에 있어서는 예수께서 쓰셨던 '가시면류관'을 상상하면 되겠다. 

  그렇다면 성경 자체가 말씀하고 있는 '면류관'이란 어떤 뜻일까? 신약성경과 초기교회 문헌과 그리고 그리스 로마의 고전문헌을 총망라하여 집필된 헬라어사전('바우어 헬라어 사전')을 보면, '면류관'은 '스테파노스'라는 단어이다. 그리고 그 뜻은 크게 2가지로 나온다. 하나는 그 단어의 원뜻으로서 "야자수 가지로 엮은 예수에게 씌운 가시관"을 지칭한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긴 승리자에게 씌우는 화관(월계관)" 혹은 "하늘에서 내린 상의 상징으로서 요한계시록에서는 금 화관으로서 뛰어난 지위를 가진 자의 머리 장식"이라고 나와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2차적인 의미인데, 그것은 '상, 보상, 보수' 혹은 '명예, 자랑, 장식이 되는 것'이라고 쓰여 있다. 고로 우리는 하늘에서 받을 면류관을 월계관 정도로 한정해서는 아니 된다. 물론 면류관은 승리한 자에게 주시는 '승리의 면류관'도 있다. 하지만 천국에서 받을 면류관이 전부다 '승리의 면류관'은 아니다. 다시 말해, '면류관'은 주님께서 천국에서 성도들의 머리 위에 씌워주는 티아라처럼 생긴 화관으로서 상으로 주어지는 것인데, 이것은 그 사람이 일생동안 이 땅에서 수고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명예 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님에게는 자랑이 될만한 하며 기쁨이 될 만한 것이다. 

 

4. 천국에서 받을 면류관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

  그렇다면,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받을 수 있는 면류관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사도 바울을 비롯한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천국에서 성도들이 받을 면류관에 대해서 성경에 기록해 두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성도들이 받을 면류관이 어떤 것들인지는 우리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천국에서 성도들이 받을 면류관은 한 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금 있다가 살펴보겠지만, 천국에서 성도들이 머리에 쓸 면류관에는 '승리'의 면류관도 있고, '충성'의 면류관도 있으며, '생명'의 면류관도 있다. 즉 다양한 종류의 면류관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양과 생김새와 크기도 각각 다르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박혀있는 보석의 종류도 그 크기와 종류와 생김새가 각각 다르다. 왜 그러한가? 그 이유는 한 사람이 이 땅에서 준비한 것만큼 천국에서 준비되기 때문이다. 즉 이 땅에서 수고한 대로 충성한 대로 면류관이 결정되도 각종 보석으로 치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성경에 기록된 면류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 나와있는 면류관은 응당 있을 면류관이지만,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더 많은 면류관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혹시 보좌자리에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면류관 만큼은 꼭 받아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5. 천국에서 면류관은 누가 씌워주며 언제 받는 것인가? 

  그러면, 천국에서 면류관은 누가 과연 씌워주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딤후4:7~8). 지난 주에 천국에서 '보좌'자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준비해주시고 그 자리에 앉게 하실 것이라고 했다(마20:23). 그렇다. 144,000명이 차지하는 '보좌'자리는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것이며, 그 자리는 그 자리를 차지하기에 합당한 자들이 나중에 앉게 될 것다. 그런데 면류관은 하나님의 아버지께서 씌워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씌워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명의 완성도에 따라 그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즉 주 예수께서 이 땅에 어떤 사람을 내려보내실 때에 어떤 사명을 주어보내시는데, 과연 그것을 완성했는지에 따라서 면류관을 씌워주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꼭 이런 자들에게만 면류관을 씌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를 따라서도 성도들에게 면류관을 씌워주신다. 그리고 이미 우리들 중에는 그러한 사명을 다 완수하여 천국에 이미 면류관이 준비되어진 사람도 있다. 

 

6. 천국에서 면류관은 대체 누가 어떻게 받는 것인가?

  그렇다면, 천국에서 성도들이 받게 될 면류관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과연 누가 받는가?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면류관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면류관은 다 이름들이 있다. 예를 들어, 천국에 들어가 성도들 중에는 어떤 성도는 '충성'의 면류관, '섬김'의 면류관, '사랑'의 면류관을 받을 자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성도는 '생명'의 면류관, '인내'의 면류관 '충성'의 면류관을 받을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면류관은 그 사람이 어떤 일에 헌신했으며 어떤 일에 충성했는지를 따라 주어진다. 

  그러므로 천국에서부터 이미 사명을 받고 이 땅에 온 자들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거기에 따른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 어떤 이는 '충성'의 면류관을 머리에 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이 땅에 살 때에 오로지 주님이 말씀하셨던 그 사명에 온전히 충실했기 때문이다(딤후4:7~8,계2:10). 또 어떤 이는 '생명'의 면류관을 머리에 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생명을 주님께 바쳤기 때문이다(계2:10). 또 어떤 이는 '승리'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달려갈 길을 끝까지 완주하여 경주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고전9:24~25). 또 어떤 이는 '의'와 '영광'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주님으로부터 받는 영광스러운 일을 끝까지 믿음을 지키면서 완수해 냈기 때문이다(딤후4:7~8,벧전5:1~4). 또 어떤 이는 '인내'의 면류관을 머리에 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시련과 유혹으로부터 끝까지 자신을 지켜냈기 때문이다(약1:12).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에 이렇게 정의를 했다. '면류관'은 충성과 인내로 받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 충성한 자 그리고 끝까지 인내로서 사명에 충실한 자가 면류관을 받게 되는 것이다. 

 

7. 천국에서 쓸 면류관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렇다면 천국에서 성도들이 쓸 면류관에는 위에서 말한 것들만 있는가? 아니다. 다른 면류관도 있다. 그러므로 면류관은 모든 성도들이 다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우리가 받아쓸 면류관에는 이미 사명대로 충성한 자가 받는 것도 있지만, 우리 주님께서 보실 때에 이 땅에서 그가 행한 일이 너무나 주님에게 자랑이 되고 기쁨이 되며 소망이 될 때에도 씌워주시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 언급하고 있다. 즉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스테파노스)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2:19)" 그렇다. 면류관은 꼭 승리자 혹은 사명자 혹은 순교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도들 중에서 이 땅에서 살았던 모습이 우리 주님 보시기에 정말 기쁨이 되었을 때에도 주님이 씌워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들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누구나 면류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면류관을 쓰기 위해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본인이 사명자가 아니었더라도 받아 쓸 수 있는 면류관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러한 면류관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아마도 20가지 이상은 되어 보인다. 그 예를 든다면 다음과 같다. 순종의 면류관, 섬김의 면류관, 사랑의 면류관, 봉사의 면류관, 긍휼의 면류관, 온유의 면류관, 나눔의 면류관, 열정의 면류관, 가르침의 면류관, 영혼살림의 면류관, 따뜻함의 면류관, 순수함의 면류관, 꿈을 이룸의 면류관, 진리를 사모함의 면류관... 그렇다면 이러한 면류관 중에 나는 과연 어떠한 면류관을 받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자. 

 

8. 나오며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러한 말씀이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3:10)" 이는 빌라델비아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 교회 성도들 중에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고 인내로서 그 말씀을 지켜낸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이미 어떤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빼앗기기 않도록 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다. 그렇다. 천국에 갔을 때에에 우리가 쓸 면류관은 절대 갑자기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다 이 땅에서 살아낸 흔적을 따라 주님께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성도들 중에 그가 게으르고 나태하고 불충성했는데도 천국에서 면류관을 받아쓸 리는 없을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면류관은 우리가 이 땅에서 충성한 만큼, 그리고 우리가 수고한 만큼, 그리고 우리가 인내해서 맡은 일을 완수한 만큼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주님께서 나를 보시고 "너는 나에게 소망이었고, 너는 내 기쁨이었으며, 너는 내 자랑이었다"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 자에게 주님께서 면류관을 씌워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자에게도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이라고 했다(딤후4:8). 그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이 땅에서 정말로 충성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목숨을 걸고 신앙의 지조를 지켜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연 지금 어떠한가? 과연 나는 천국에서 면류관을 받을 만한 합당한 자인가? 만약 그것이 지금까지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부터라도 다시 시작해보자. 그래서 천국에서 주님이 주신 면류관을 감격적으로 받아쓰는 영광스러운 성도가 되어보자. 건투를 빈다. 

 

2021년 08월 01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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