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158) 애굽 고센땅에 들어간 야곱가족 70명의 숫자가 주는 영적 의미(창46:1~27)_2021-07-23(금)

https://youtu.be/HJJK9_ZVUzg  [혹은 https://tv.naver.com/v/21509344  ]

 

1. 창세기에서 야곱 이야기와 요셉 이야기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요?

  창세기에서 야곱과 요셉 이야기는 영적으로 볼 때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 중에서 이기는 자들이 누군지를 알려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중에서 요셉 이야기는 이기는 자들 중의 이기는 자들이 누구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자기 형제들의 주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애굽 온 땅의 주인이 되어서, 다스리는(왕노릇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요셉이 17살 때 꾸었던 꿈으로도 이미 나타났으니, 그것은 첫째로, 요셉의 형들의 곡식단이 요셉의 곡식단에게 절하는 꿈으로 나타났으며, 둘째로, 해와 달과 열 한 별들이 요셉에게는 절하는 꿈으로 나타났습니다. 

 

2. 영적으로 야곱이 이주하여 살게 되었던 애굽의 고센 땅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우리는 창세기가 상징하는 바를 잘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이미 애굽에 들어가서 왕 노릇하고 있는 요셉의 청원으로 인하여 야곱과 그의 식구 70명이 애굽의 고센 땅으로 이주하게(들어가게) 되었던 것에 대해서 우리는 예표론적으로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표를 이해하기에 딱 좋은 하나의 예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요한계시록의 기록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3대 7중 재앙들이 나옵니다. 그것은 일곱 인 재앙, 일곱 나팔 재앙, 일곱 대접 재앙을 가리킵니다. 나중으로 갈수록 재앙은 더 선명해지고 강도가 높아지는 것이 이 3대 7중 재앙의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일곱 인 재앙이 자연과 사람의 1/4을 파괴하는 재앙이었다고 한다면, 일곱 나팔 재앙은 자연과 사람의 1/3을 파괴하는 재앙입니다. 그리고 일곱 대접 재앙은 자연과 사람을 완전히 파괴하는 재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모습도 예표로 표현하자면 3가지로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그래서 보다 더 선명해집니다. 그것은 첫 번째는 야곱의 70명의 식구가 애굽의 고센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예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예는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성령을 받은 자들이 영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예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2의 탈출기였던 출애굽 사건에 등장하는 '애굽'이라는 나라를, 오늘날 우리가 창세기의 제1의 탈출과 대입하여 해석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요셉이 야곱의 70명의 식구들을 애굽으로 초청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에 요셉도 "하나님이 이 큰 탈출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려고...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창45:7, 히브리어원문)"라고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자신의 가족 70명을 데리고 애굽의 고센 땅으로 간 것은 세상의 기근을 피해 살기 좋은 기름진 땅 곧 천국으로 이사가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3. 야곱이 애굽에 데리고 간 가족들의 숫자가 왜 70명인가요?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의 요청으로 인하여 야곱은 요셉이 보내온 수레를 타고 애굽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이때 야곱은 자기의 아들들과 손자와 손녀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건너가는데, 그때 애굽으로 들어간 아들들과 손자와 손녀들의 이름과 숫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아가 난 자식이 34명이요, 실바가 난 자식이 16명이요, 라헬이 난 자식이 14명이니(이 숫자에 요셉의 처 아스낫이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들어감), 빌하가 난 자식이 7명이니, 도합 70명이 애굽으로 이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숫자에는 야곱의 12며느리들의 이름이 빠져 있습니다. 아마도 이방인이었던 가나안 여자들이었기 때문이 그들이 70명이 숫자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봅다. 그러니 70명의 자식들 이외에 그곳에 들어간 자는 야곱 자신과 이미 애굽에 들어가 있었던 요셉입니다. 고로 애굽에는 총 72명이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서, 창세기의 기자였던 모세가 그 숫자를 70명이라고 기록한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7'은 이 세상에서의 완전수이기 때문이요, '10'은 가작 작은 단위이지만 충만한 수이기 때문입니다. 

 

4. 야곱이 애굽에 데리고 간 가족들의 숫자가 70이라는 것은 영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창세기의 경우, 야곱이 들어갔던 애굽은 사탄의 왕국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애굽이 사탄의 왕국으로 상징화되는 것은 B.C.1446년경의 출애굽 때입니다). 애굽의 고센 땅은 기근이 없는 풍요로운 땅, 곧 하나님의 백성만이 거주하는 땅으로서, 천국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70이라는 숫자는 천국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천국에 가면, 예배드릴 때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 성도들과 천사들이 모입니다. 이때 모든 성도들은 각기 예배드리는 자기의 자리가 각각 따로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보좌로부터 시작하여 앞좌우에 24장로들이 24반차의 대표자로서 맨 앞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줄을 맞춰서 예배를 드리는데, 첫번째 줄부터 70번째(정확히는 72번째) 줄까지는 자리(보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자리(보좌)에 앉아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서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70이라는 숫자는 예배드릴 때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자들의 줄(라인)의 숫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5. 천국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의 24장로와 그리고 그 뒤에 있는 70줄은 천국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천국에서는 그 중심이 새 예루살렘 성이요, 그 성의 중심은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그 보좌에 예수께서 앉아계십니다(계3;21). 그리고 그 보좌의 앞과 좌우에 둘러서 24장로들이 앉아있는 24보좌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24장로들은 구약의 구원받은 자들의 대표와 신약의 구원받은 자의 대표들로 구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12아들이 24장로에 다 들어있는 것도 아니며, 신약의 12사도들이 24장로 안에 다 들어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중에 천국에 가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야곱의 12아들들 가운데 24장로 안에 들어간 사람은 딱 두 사람으로서, '유다'와 '요셉' 뿐입니다. 그리고 어린양의 12사도들로서 24보좌에 앉아있는 사람은 오직 베드로 뿐이며, 이후에 바울이 그 사도들의 한 사람으로 24보좌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를 중심으로 24장로들의 보좌가 각각 따로 놓여있고 그 뒤로 보좌들이 놓여 있는데, 그 보좌들의 숫자가 144,000개요, 그 보좌들의 줄수가 70(정확히는 72)이며, 각 줄에는 대표자가 한 사람씩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70줄을 대표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72번째 줄 뒤로부터는 보좌가 없으며, 서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죽는다면 나는 과연 72번째 줄 안에 있는 보좌에 앉아있는 사람이 되어있을까요? 아니면 그 뒤 저 멀리에 서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되어 있을까요? 우리가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사실 이기는 자가 되는 것에 있지만 기왕이면 이기는 자들 중에서도 72줄 안에 있는 보좌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는 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2021년 07월 23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141) 요셉은 성령의 시대에 이기는 자의 예표다(창37:12~24)_2021-07-05(월) 

https://youtu.be/egcbW_NDgaQ  [혹은 https://tv.naver.com/v/21156011  ]

 

1. 창세기에서 요셉이야기는 경륜적으로 볼 때 어떤 이야기인가요?

  요셉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맨 마지막 부분에 나옵니다. 창세기에서 그의 이야기는 창세기 37장에서 시작되어 50장까지 나옵니다. 그런데 창세기가 어떻께 끝나는지를 살펴보면 요셉 이야기로 끝을 맺기는 하지만 같은 장에 야곱의 장례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 요셉의 장례가 기술되면서 끝납니다(창50:1~3, 22~26). 다시 말해, 우리가 얼핏 예상하기로는 창세기는 요셉 이야기로 끝나야 할 것 같은데 야곱 이야기와 함께 끝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창세기는 야곱 이야기가 끝까지 계속되면서 요셉과 함께 마쳐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창세기가 예표론적으로 볼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시대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그 마지막 꽃이 요셉 이야기로 끝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지만, 야곱 이야기 속에 요셉 이야기가 기술되고 있는 것입니다. 고로 창세기의 전반부(1~11장)가 창조와 타락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면, 창세기의 후반부(12~50장)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족장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야곱 이야기가 자신의 탄생과 더불어 장자의 명분을 샀던 팥죽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는 25장부터 시작되고 있지만 창세기 36장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져 창세기의 마지막 장인 50장에 가서야 비로소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이야말로 성령시대의 사람을 예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표론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은 성부 하나님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고, 이삭은 성자 예수님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으며, 야곱 이야기는 성령 하나님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성령시대에 교회를 세워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2명의 아들들은 바로 성령시대의 열매로서 하늘의 완전숫자인 열 둘의 교회를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요셉 이야기는 예표론적으로 볼 때 교회(성도) 중에서 이기는 자(성도)를 예표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도 땅에 있는 일곱 교회를 말하지만 각 교회의 끝부분에 가서는 그 교회에 이기는 자들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 교회의 이기는 자들이란 대체 누구이며, 또한 그들에게는 어떤 축복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계2장~3장). 그러므로 성경을 통전적으로 관점에서 보지 못하면 창세기이야기는 창세기만의 이야기로, 요한계시록의 이야기는 요한계시록만의 이야기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2. 요셉이 성령시대의 이기는 자의 예표라고 할 때, 그에게 붙은 별명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가요?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꿈꾸는 자"라고 불렀습니다(창37:19). 이것은 요셉을 성령시대의 이기는 자의 예표라고 가정했을 때에, 성령시대에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꿈꾸는 자가 되어야 함을 말해준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요엘 선지자도 말하기를, 말세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실텐데 그런 때가 되면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며, 젊은이들은 환상(이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요엘2:28~29, 행2:17~18). 그러므로 이 예언은 빈 말이 전혀 아니었던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말세를 만날수록 그리고 성령시대에 이기는 자가 원한다면, 꿈꾸는 자 요셉을 주의해서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의 삶이 곧 이기는 자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부를 때에 "꿈꾸는 자"로 불렀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참고로, "꿈꾸는 자"라는 말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그냥 단순히 "꿈을 꾸는 자(dreamer)"가 아닙니다. "꿈쟁이"라고 하는 것이 더 원문에 가까운 번역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 단어가 "꿈(dream)의 바알(baal)"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알"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바알신의 바로 그 "바알"입니다. 우리에게 바알신은 이방신을 대표하는 신으로 각인되어 있지만 원래 그 단어는 "주인, 소유주, 남편, 지배자, 왕"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꿈꾸는 자"라고 번역된 단어를 원문을 살려 번역해 본다면, "꿈의 전문가", "꿈의 왕", "꿈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정말 꿈을 많이 꾸었던 꿈쟁이였기 때문입니다. 

 

3. 요셉의 꿈과 야곱의 꿈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요?

  사실 족장들 중에서 꿈은 야곱이 처음으로 꿉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벧엘에서의 야곱의 사닥다리 꿈입니다(창28:10~15). 그러나 야곱이 꾼 꿈은 '환상'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꾼 꿈은 꿈 속에서 영적인 세계를 직접 본 것이고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그때 영안이 열린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그는 눈을 뜨고도 볼 수 있었던 것을 그가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때 그가 꿈 속에서 본 사닥다리나 그 사닥다리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천사들을 본 것은 실제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때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도 역시 실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꾼 꿈은 이것과는 많이 다른 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꿈은 장래에 되어질 일들을 상징적으로 보는 환상이었기 때문입니다(창37:7,9). 정말 요엘선지자의 말처럼 늙은이로서 야곱은 꿈을 꾼 것이 맞지만 젊은이로서 요셉은 환상을 본 것이 맞습니다(욜2:28~29). 

 

4. 요셉은 2가지 꿈만 꾼 것일까요?

  그렇다면 요셉은 창세기 37장에 나오는 2가지 꿈들 곧 곡식단이 절하는 꿈(창37:7)과 해와 달과 별들이 절하는 꿈(창37:9)만 꾸었을까요? 성경에 보면 요셉이 꾼 꿈은 딱 2가지만 등장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요셉이 다른 사람들이 꾸었던 꿈을 해석해주었다는 말씀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형들이 요셉을 부르는 별명이 나옵니다. 그들은 요셉을 "꿈꾸는 자(꿈쟁이)"라고 불렀습니다(창37:19). 그들이 요셉을 가리켜 "꿈쟁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그가 그동안 수많은 꿈을 꾸었고 또한 그것을 자기들에게 말해왔었음을 증언해 줍니다. 이는 요셉이 그동안 자신이 꾸었던 꿈을 얼마나 많이 말했을까를 짐작케 해 줍니다. 그때자 요셉의 형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셉이 말했던 곡식단 꿈과 해와 달과 별들의 꿈이 실제로 이루어지는지, 우리가 한 번 지켜보자(창37:20)" 그리고 그를 죽여 구덩이를 던져넣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요셉이 죽게 되어 요셉의 꿈은 안 맞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고로 요셉의 형들은 그동안 요셉의 꿈을 많이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꿈대로 많이 이루어졌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렇게 되는지 한 번 지켜보자고 한 것입니다. 다행히 큰 형 르우벤의 제안으로 요셉은 죽지 않았지만 그의 옷은 벗겨졌고 구덩이에 던져졌던 것입니다. 

 

5.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요셉이야기를 무엇을 말해주나요?

  고로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요셉 이야기는 상당히 중요한 교훈을 들려줍니다. 특히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꿈이나 환상, 예언이나 방언통역, 혹은 성령의 신령한 은사 같은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오히려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성도들로 하여금 귀신의 장난에 속아넘어가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7~50장에 나오는 요셉 이야기는 성령시대의 이기는 자에 대한 말씀으로서 그 핵심은 꿈과 환상이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요셉 이야기는 꿈과 환상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해석으로 인하여 그의 신분이 수직상승하게 되며, 요셉의 원가족들도 기근 중에도 살아남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울러 요셉을 국무총리로 둔 애굽도 세상의 모든 나라 위에 높여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꿈과 환상을 별 것 아닌 것으로 보는 시각을 교정해야 합니다. 요엘 선지자나 사도 베드로도 말세에는 사람들이 예언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꾼다고 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라면 우리는 환상이나 꿈을 터부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하여 우리의 미래를 잘 대비할 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얼마 안 있으면 세계적인 기근이 우리에게 불어닥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세계적인 재앙과 환난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핍박도 함께 찾아올텐데, 우리도 역시 그날을 잘 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려면 우리도 계시적인 환상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럴려면 어제도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도 요셉처럼 계시적인 환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려면 우리도 역시 영이 깨끗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마음에 상처가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안배를 따라 이 땅에서 보냄받은 자로서 계시적인 환상을 보는 자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도 열심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가짜 꿈과 환상을 보게 되고, 혼란은 더 가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짜에 속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보다 더 철저히 회개하는 것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2021년 07월 05일(월)

정병진목사

 

공관복음서를 보면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도바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붙들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을 계속해서 따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떻게 해야 사람이 구원받는다고 말하는걸까? 그것은 한 마디로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기는 자"가 된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기는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이기는 자들이 되었을 때에는 대체 어떤 상이 주어지게 되는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요한계시록이 말해주고 있는 구원관에 대해 전체적으로 폭넓게 다뤄보고자 한다.

2019-06-23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구원관은 어떤 것인가?(계14:9~13)
https://youtu.be/kLJaZOGtNjI


1. 들어가며

  신약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공관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누가복음)를 연구하는 학자들, 또 하나는 바울서신(로마서~디도서)을 연구하는 학자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요한신학(요한복음,요한일이삼서,요한계시록)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런데 이중에서 요한의 신학에서는 예수님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요 전능자요 창조주로서 묘사한다. 그래서 요한신학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을 연구하는 기독론을 일컬어 "고(高)기독론이라고 부른다. 그중에서서 가장 나중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요한계시록은 계시(묵시)의 완성의 책이요, 예언의 완성의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일들의 결론이 궁금하다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에게 가서 물어보아야 한다. 특히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구원론도 공관복음서가 말하는 구원론이 있고, 바울이 말하는 구원론이 있으며, 요한사도가 말하는 구원론이 있다. 물론 이러한 세 가지의 구원론은 하나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할 때 약간 다르게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구원론은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 것일까?

 

2. 요한계시록이 말하고 있는 구원론은 어떤 것인가?

  요한계시록이 말하고 있는 구원론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학자마다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단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기는 성도들"에 대한 묘사가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 특히 소아시아 일곱교회에게 주신 말씀에 이기는 자가 계속해서 나온다(계2:7,11,17,26, 3:5,12,21). 뿐만 아니라, 이미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을 일컬어 "이기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계12:11, 15:2, 17:14, 21:7).

계12: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계15: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계17:14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계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3. "이기는 자"가 된다는 것은 누구와의 싸움에서 이긴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성도들은 대체 누구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구원받는 자가 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은 대체 누구인가? 그것은 계12:11에 나와 있는데, 그는 하늘에서 쫓겨난 자 사탄마귀다. 그는 큰 용으로서, 옛뱀이라고도 하고 마귀라도고 하며, 사탄이라고 하는 자다. 그가 하늘에서 쫓겨나서 이 지구로 왔다. 그는 일차적으로 이 지구 위에 쫓겨났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불법을 저질러 지금은 음부로 쫓겨난 상태에 있다. 하지만 그가 음부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 그는 자신의 부하들(귀신들)을 지구와 연결된 음부의 문을 통해 올려보내 그의 일을 지금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귀의 그를 따르는 귀신들을 이기는 것이 곧 우리가 이기는 것이요 구원받는 것이다.

 

4.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볼 때, 어떻게 하면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는가?

  고로, 요한계시록에서 어떻게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었는지를 잘 살펴본다면, 우리도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은 구원받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어떻게 되어서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었는가? 그것은 계12:11에 나오는데, 크게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믿는 이들 자신이 가졌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켜냄으로 이기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계12:11).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구원자이며, 주 하나님이심을 끝까지 지켜낸 것이다. 이것을 반대로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어떤 짐승이나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만을 자신의 구주와 하나나님으로 섬겼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그렇게 하다가 사탄이 음부에서 보낸 짐승에 의해 죽임당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사탄마귀는 우리 믿는 이들의 목숨만을 앗아갈 수 있을 뿐, 우리의 영혼은 결코 노략질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계12:11에 보니,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은 예수님에 대한 자기들의 증언하는 말로서 사탄마귀를 이겼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짐승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짐승의 이름의 표도 받지 아니하는 자들이 살아서 이기는 자들이 되어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요한계시록은 분명히 언급한다(계14:12, 21:7).

계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그런데 이러한 구원관은 사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구원관과 똑같다. 예수께서도 육체를 입고 계셨을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되는지에 관해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자신의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마10: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24:13-14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믿음을 지켜내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과연 우리가 우리가 가진 믿음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을까? 지금 시대야 우리나라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을 일도 없고 죽임당할 위험성이 없지만 만약 우리나라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불법이 되거나 그것을 이유로 우리를 죽이려 할 때 과연 우리는 흔들림없이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가끔씩 그러한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둘째는, 어린양의 피에 자신의 죄를 씻어냄으로 이기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계21:11). 이는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 예수님의 피로 씻어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이 말하고 있는 구원의 두번째 요소다.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만이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가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렇게도 많이 회개를 촉구한다. 특히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교회 가운데, 칭찬을 들었던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교회들이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으며 회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회개없이는 결코 이기는 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회개없이는 지은 죄를 용서받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회개없이는 결코 죽는 날 흰옷을 입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회개는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마지막 관문이다.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회개하면 예수님의 피로 그의 죄가 씻겨지기 때문이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피가 효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예수님의 피는 항상 준비되어있고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용서해주시고도 남음이 있는데 문제는 사람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으니 자신이 지은 죄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다. 죄는 회개할 때에 용서되는 것이지 가만히 놔둔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죄는 빨리빨리 처리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다. 죄를 그냥 놔두었다가 그만 죽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는 죄 때문에 천국에 못들어갈 수도 있다.

 

5. 이기는 자가 되었을 때 어떤 보상이 주어지는 것인가?

  사람들이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구원을 어떤 식으로 설명해놓았을까? 그것의 단적인 예로서, 소아시아 일곱교회에게 주신 말씀 중에서 "이기는 자"가 받게 될 축복을 통해서 요한계시록이 말하고 있는 구원관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정리해보도록 하자.

  첫째, 에베소교회의 경우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는 것"(계2:7)이다. 이는 결국 그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천국에 생명나무가 생명강 좌우에 있기 때문이다. 둘째, 서머나교회의 경우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는 것"이다. 이는 둘째사망 곧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사망 곧 불못에 떨어지는 사망으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구원관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버가모교회의 경우는 "감추었던 만나"를 먹게 되고, "흰 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먼저 "감추었던 만나"를 먹게 된다는 더이상 이 세상이나 지옥의 음식이 아니라 하늘양식을 먹게 된다는 것이므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리고 "흰 돌"을 받게 된다는 것은 그가 심판날에 무죄선고를 받는다는 뜻이다. 무죄선고를 받으니 그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두아디라교회의 경우는 철장권세로 만국을 다스리게 될 것과 새벽별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먼저 철장권세로 만국을 다스릴 자가 된다는 말은 그가 예수재림 이전에 먼저 부활후 승천하여 천년동안 왕노릇하는 일에 동참하였다가 주님의 재림 때에 주님의 뒤를 따라 대열에 합류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인 아마겟돈세력을 처단하는 일에 동참한다는 것이니, 이이도 천국에 먼저 들어가서 천국에서 왕노릇하고 재림 때에 왕의 권세를 행사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에게 "새벽별"이 주어진다는 것은 그에게 별과 같은 영광이 주어진다는 뜻이니, 그가 천국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천국의 어떤 누림에 동참하게 된다는 뜻이다. 다섯째, 사데교회의 경우에는 흰옷을 입는다는 것과, 생명책에서 자신이 이름을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은 첫째, 흰옷을 입는다는 것은 죄사함을 완전히 받아 천국의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뜻이니 그는 반드시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이요, 둘째,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게 해 주겠다고 했으니 역시 그가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뜻이다. 여섯째, 빌라델비아교회의 경우는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된다고 했다. 이는 천국에 반드시 들어간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일곱째, 라오디게아교회의 경우는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된다고 했다. 이는 예수께서 보좌에서 앉아 심판하고 다스리는데, 이 두 가지 일들을 맡겨주신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 경우도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과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등의 어떤 누림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결국 이기는 자가 되면, 지금 죽어서는 곧바로 부활체를 입고 흰옷을 입어서 천국에 들어가 천년동안 왕노릇하다가, 주님의 재림시에는 주님의 뒤를 따라서 만국을 철장으로 다스리는 일을 하게 될 것이며, 그후에는 천국에 들어가서 각종 누림에 참여하게 되고, 천국에서 왕노릇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어찌하든지 이 땅에서 이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6. 나오며

  천국에는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갈 수는 없는 공간적인 장소다. 천국은 결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공간적으로 실재하는 장소에 들어간느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죽어서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다. 왜냐하면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을 받아야 진짜 구원을 받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딤후4:18). 그런데 누가 천국에 들어가는가? 사탄마귀를 이기는 자가 들어간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로, 사탄마귀의 그 어떤 공격이나 기만에도 속지 아니한 채, 오직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예수님을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키야 하며, 예수님 이외에 그 어떤 대상에게도 예수님에게 바쳐야할 경배와 그리고 기도를 결코 하지 않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우리가 죄된 본성과 악한 마귀의 공격의 유혹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늘 지은 죄를 회개하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즉 요한계시록의 구원관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과 회개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어떠한 상황이나 순간에도 믿음을 지켜내고, 목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회개를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2019년 6월 23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예수께서 이기는 자에게는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해주겠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계3:21)_2019-06-18(화)

https://youtu.be/F4xwW1Bol6g

 

1. 예수께서 두아디라교회의 이기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계3:21)

계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 예수께서는 두아디라교회의 이기는 자들에게 "내 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앉았던 보좌는 아버지의 보좌입니다. 그렇다면, 이기는 성도들이 정말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되는 것인가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보좌에 앉을 수 있겠지만 우리 이기는 자들이 앉게 될 보좌는 아버지의 보좌가 아니라 예수님의 보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보좌에 우리 이기는 자들이 앉는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이기는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왕적 통치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보좌는 원래 3가지 의미가 있어서, 첫째는 심판의 보좌요(시9:7~8), 둘째는 통치(왕으로 다스림)의 보좌이며(계11:15), 셋째는 경배를 받는 보좌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계5:13~14), 피조물인 인간이 결코 하나님처럼 경배를 받는 위치에 설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행위가 되는 것이요, 마귀가 하늘에서 떨어진 결과와 같은 것을 인간도 똑같이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께서는 이기는 자들에게 경배의 역할을 제외한, 심판의 역할과 통치의 역할을 일부 부여하시는 것 같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심판의 역할을 어떻게 12제자들에게 나눠주셨습니까?(눅22:28~30)

  원래 하나님의 보좌는 심판과 통치와 경배의 보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공생애 말기에 12제자들에게 왕적 누림의 역할과 심판의 역할을 나눠주신다고 약속한 바가 있습니다.

눅22:28-30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배정한)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배정하여) 30 너희로 내 나라(왕국)에 있어 내 상(식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심판하게) 하려 하노라

  이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12제자들에게 "내 식탁에서 먹고 마시게" 해 주시겠다는 것은 왕적인 누림에 참여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며,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심판하도록 보좌에 앉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은 심판하는 일을 일부 제자들에게도 나눠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왕의 통치의 보좌가 한 개였는데, 통치의 보좌가 25개로 늘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포함한 24장로들에게도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로서의 보좌는 한 개 그대로 있으나, 왕적인 통치의 기능을 24장로들도 수행할 수 있도록, 예수께서 24개의 보좌를 새롭게 신설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이요(눅22:28~30), 구약시대에는 24개의 보좌를 아무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다만, 다니엘7:9에 암시되어 있기는 함).

 

4. 요한계시록 1장에서 사도요한에게 자신을 소개하셨던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계1:5~6)

  예수께서는 충성된 증인이시자,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살아나신 분(프로토토코스=처음 난자, 초태생, 맏아들)이며, 땅의 임금들(왕들)의 머리(통치자)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왕국)과 제사장들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왕적인 통치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제사장들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5. 요한계시록 1:5에서 "땅의 임금들(왕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계1:5에 나오는 "땅의 왕들"은 계21:24~26에 나오는 "땅의 왕들"로서 장차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갈 자들입니다. 이들은 천국에서 대단히 존귀한 자들인 것입니다. 이들은 이미 "이기는 자들"로서 천년왕국의 통치에 참여했던 자들입니다. 이들이 장차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자신이 가진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들어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기는 자들에게 그러한 영광과 존귀를 감추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내일 이 시간에 뵙겠습니다.

 

 

2019년 6월 18일(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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