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5(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사가랴와 엘리샤벳의 영성,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눅1:39~45과 67~79)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ar2pdB7ufzo  [혹은 https://tv.naver.com/v/31902872 ]

 

1. 들어가며

  우리는 사가랴와 엘리샤벳을 떠올릴 때면 그들이 예수님의 선구자였던 세례요한을 낳은 부모 정도로 생각한다. 특히 사가랴는 주의 천사가 일러준 말을 믿지 아니하여 벙어리가 되었기에, 신앙이 조금 떨어진 사람 정도로 인식한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간단히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영상은 상상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세례요한의 부모 이상의 놀라운 것들을 갖고 있는 분들이다. 이들은 탁월한 예언자였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들은 메시야의 탄생에 있어서도 놀라운 역할을 수행했다. 그렇다면 대체 이들의 영성은 어느정도였을까?

 

2. 사가랴와 엘리샤벳은 어떤 사람들인가?

  사가랴와 엘리샤벳은 신앙이 매우 경건한 인물이었다. 이들 부부는 아론의 자손으로 제사장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 사가랴는 제사장의 24반차 가운데 8번째 반차인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으로서 사독계열의 제사장에 속해 있었다(대상24:10). 그리고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의 목전에 의인으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눅1:6).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모든 계명들과 규례들을 빠짐없이 실천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님이 보시기에도 흠이 없이 행하고 있던 사람이었다(눅1:6). 특히 이들 부부는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다만, 엘리샤벳이 자식을 낳지 못하는 딱한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 알고 보면, 사실 마리아로 하여금 처녀로서 잉태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임신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믿음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특히 이들은 자기들을 찾아온 마리아에게 엄청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것을 통해서도 우리는 이들의 영성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3. 엘리샤벳의 영성은 어떠했는가?

  엘리샤벳은 사가랴의 부인으로서 아론의 가문의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그녀도 제사장의 딸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엘리샤벳은 사실 마리아의 이모다. 성경에서는 친족이라고 나와 있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같은 출생을 가진 골육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마리아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약 110Km이상 떨어진 엘리샤벳의 집을 방문하게 되고, 거기서 무려 3개월이나 머물다 돌아간 것을 보면 엘리샤벳은 먼 친척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장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았을 때, 그녀는 그 말씀을 그대로 믿음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그때였다. 주의 천사가 지금 엘리샤벳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마리아는 곧바로 믿음이 충만해졌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엘리샤벳과 마리아가 매우 가까운 친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엘리샤벳이 나이가 많고 늙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엘리샤벳은 마리아의 이모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또 무엇을 알려주는가? 그것은 마리아의 어머니도 제사장의 딸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즉 마리아의 어머니도 상당히 경건한 가문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사실은 엘리샤벳이 영성에 있어서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자신의 이모인 엘리샤벳의 예언적인 선포 때문이다. 그것은 엘리샤벳이 임신한 지 6개월이 되었을 때에 있었다. 마리아가 엘리샤벳의 집에 찾아왔을 때에, 엘리샤벳이 그녀에게 들려준 소식은 정말 놀라웠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사실들을 엘리샤벳은 알고 있었으며, 장차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된 아이가 또한 어떤 분인지도 알고 있었기때문이다. 

 

4. 엘리샤벳은 마리아에게 어떤 사실을 들려주었는가?

  우리는 엘리샤벳을 보통 세례요한의 어머니 정도로만 알고 있는데, 아니다. 왜냐함녀 그녀는 마리아가 처녀로서 태중에 임신을 하게 되고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게 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엘리샤벳은 마리아가 임신한 지 1달도 안 되었을 때에 가장 먼저 그녀가 임신사실을 알려준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즉 마리아가 자신의 집에 방문했을 때에, 그녀는 마리아가 이전에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알고 있었으며, 뿐만 아니라 마리아의 몸에 잉태된 아이가 어떤 분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엘리샤벳은 마리아에게 일어난 비밀스러운 일을 알고 있었으니, 그녀가 태중에 열매(아이)를 임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렇게 된 것은 마리아가 천사를 통해 일어준 하나님의 말씀을 그녀가 그대로 믿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눅1:42,45). 사실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은 마리아 이외에는 정작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었는데, 1개월 만에 엘리샤벳의 입에서 마리아가 임신하고 있다는 말이 나왔던 것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엘리샤벳이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받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엘리샤벳은 마리아가 임신하고 있는 그 아이가 장차 엘리샤벳의 주님이 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눅1:43). 이는 그녀가 마리아를 '내 주님의 모친'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즉 마리아가 태중에 임신하고 있는 분은 장차 엘리샤벳을 비롯한 모든 인류의 주님이 되실 것이라는 사실을 엘리샤벳은 알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받았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그렇다면, 엘리샤벳은 어떻게 이러한 사실들을 알 수 있었던 것인가? 그것은 그녀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요,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눅1:41). 그렇다. 그녀는 본래부터 의인이었으며, 주의 율법과 규례를 어김없이 실천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기도를 많이 하여 성령의 사로잡힌 바 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마리아가 자신의 집에 도착하여 문안인사를 하자마자, 마리아에게 놀라운 예언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5. 사가랴의 영성은 어떠했는가?

  우리는 사가랴가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뽑아서 성소에 들어가서 향단에 향을 사를 때에 주의 천사를 보았고, 그때 천사가 일러준 사실을 믿지 못해 벙어리도 지냈다는 것에만 익숙해 있다. 하지만 그는 믿음이 없는 불신투성이의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의 천사 가브리엘이 그에게 알려준 말씀에 나와 있다.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눅1:13). 자신의 기도가 공중의 권세잡은 자들을 뚫고 하늘까지 모두 다 올라가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 이 세상에 많지 않다. 그런데 사가랴의 기도는 하늘에 상달되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삶은 깨끗했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정말로 율법으로 흠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공중에 악한 영들이 그의 기도를 막지 못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매우 기도에 깊이가 있는 영성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또다른 증거가 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을 낳은 후 그에게 할례를 행했을 때에 그가 예언적으로 선포했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때 그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자신의 아들 요한이 어떻게 장차 하나님께 쓰임받을 것인지를 예언한 바 있다. 그때 사가랴는 먼저 마리아가 잉태한 메시야에 대해서 예언을 하였다. 그 예언의 시작은 이렇다. 

눅1:68-69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그렇다. 그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제 당신의 백성을 돌아보시어 속량하시는 일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하여 구원의 뿔이신 권세있는 메시야를 그의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는 것도 알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조카 마리아가 다윗에서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가문의 후손인 요셉과 정혼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제 마리아가 다윗에서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왕가의 후손을 잉태했다는 것을 알고는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올렸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마리아의 잉태가 어떤 종류의 기쁜 소식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그것은 눅1:68의 말씀을 헬라어 원문으로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눅1:68[직역]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이는 그분이 자기를 위하여 방문하셨기 때문이며, 그분의 백성에게 대속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가랴는 마리아의 임신이 단지 메시야에 대한 임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임마누엘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방문하시어 인류를 구속하시는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것은 사가랴가 그만큼 경건하였고 기도에 전념하였던 영성가였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다시 말해 그는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후세에 길이 남을 찬송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6. 사가랴와 엘리샤벳의 삶이 들려주는 그들의 영성은 어떻게 정리할 수 있는가?

  사실 사가랴와 엘리샤벳의 영성은 요셉과 마리아보다 더 뛰어났으면 뛰어났지 그녀보다 작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마리아보다 더 중요한 하늘의 일들을 잘 알고 있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우선 이들이 뛰어난 영성가였다는 것은 그의 기본적인 삶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먼저 그것은 그들이 주님이 보시기에 의인이었고 주의 율법과 규례를 흠이 없이 실천해온 사람이라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기도는 매우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뛰어난 영성가였다는 사실은 이들 부부가 메시야가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된 사실을 제일 처음 알아본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 부부는 약한 마리아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해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이 자식이 없었던 것은 본인들에게 흠이 있어서가 가 아니라, 마리아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갓 임신을 했지만 약한 마리아의 믿음을 견고하게 해 주기 위해 이들 부부의 임신을 주님이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들이 임신 못한 것은 마리아로 하여금 이들 부부가 이미 많이 늙었고 또한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임신함으로 인하여, 마리아도 처녀이지만 임신할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한 도구로서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에 불행이 찾아왔을 때에 결코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를 간절히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실 일을 지금 준비시키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부부는 장차 태어날 메시야가 어떤 일을 수행할 것인지를 알았던 부부였다. 그렇다. 이들 부부는 대단히 믿음이 훌륭한 부부였던 것이다.

 

7. 나오며

  오늘날에 우리 성도들을 보면, 자신에게 불행이 닥쳐왔을 때에 그들이 어떻게 처신하는지를 살펴볼 수가 있다. 상당수는 그러한 환경이 주어진 것에 대해 원망하거나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또한 어떤 이는 그러한 환경이 자신에게 주어졌는데 불구하고 그것을 타개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그 사람을 통해 어떤 일을 이루시고자 그로 하여금 기도하라고 보낸 싸인인데도 그것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저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 안주해버리는 것이다. 아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더 이상 쓰시지 않는다. 이런 일로 인하여, 그들에게는 더이상의 영적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들을 향한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되지가 않는 것이다. 구약시대 한나의 경우를 살펴보라. 사무엘상 1장을 읽어보면, 그녀도 역시 엘리샤벳과 같이 임신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자꾸 두번째 부인이었던 브닌나가 자신을 놀리고 격동을 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때 한나는 어떻게 그것을 대처했는가? 브닌나를 내어쫓으라고 시켰는가? 아니면,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비관하며 슬퍼하고 그저 안주해버렸는가? 둘 다 아니었다. 그녀는 그때 여호와의 성막에 나아가서 기도하는 것을 택했다. 사실 그녀가 임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기도하라고 그렇게 막았던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장차 다윗에게 기름부을 선지자를 얻고 싶어하시는데, 그러한 선지자를 낳아줄 여인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차 태어날 사무엘이 끝까지 자신의 소임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너무나 필요한 것이었기에, 기도를 시키려고 하나님께서 한나의 임신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에게도 무엇인가가 막혔으면 기도로 뚫어야 한다. 엘리샤벳과 사가랴는 기도로 자신의 문제를 뚫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끝내 기도의 사람이 된 세례 요한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과 동시에 메시야를 낳게 될 마리아에게 견고한 믿음을 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지금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는지 둘러보라. 그러면 우리가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그 해답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2022년 12월 25일(주일)

정병진목사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 중에 가장 중요한 은사는 대체 무엇인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것을 방언의 은사라고 보았다. 그럼 오늘날에도 진짜 그러한가? 바울은 방언의 은사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면서, 방언의 은사가 가진 장점과 단점을 알려준다. 그리고 좀 더 바람직한 신령한 은사로서 예언의 은사와 방언통역의 은사를 추천한다. 왜 바울은 이러한 2가지 은사를 추천해야 했는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2021-09-08(수) 수요기도회

제목: 고린도전서강해(21) 방언과 예언과 방언통역의 은사에 대하여(고전14:1~19)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TAFyAGbodLQ  [혹은 https://tv.naver.com/v/22356999 ]

 

1. 들어가며

  모든 은사에도 대전제가 있다. 그것은 사랑의 은사가 모든 은사 사용에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무리 신령한 은사라고 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지 아니하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랑이 기본적으로 겸비된 사람에게 어떤 은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 어떤 은사가 우리와 우리 교회에 필요할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은사들의 문제를 직시하면서 은사들 중에는 개인을 세워주는 은사가 있는가 하면 교회를 세워주는 은사가 있다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4장의 전체 내용이다. 그렇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잘못된 은사 사용에 대해서 알려주고 바른 은사 사용을 위한 실제적인 예로서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비교하여 말한다. 그것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비록 방언의 은사가 신비롭게 보이고 멋있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공예배에서 무분별하게 사용되면 오히려 공예배의 혼란만 가중시킬 뿐 교회를 세우는 데에는 유익하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신령한 은사를 사모한다면 방언의 은사보다는 상대적으로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한다. 그렇다면 대체 방언의 은사는 어떤 은사를 가리키며, 예언의 은사는 어떠한 은사이길래 바울은 예언의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권면하는가? 그리고 대체 방언이 가진 한계는 무엇인가?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서 방언과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의 정의와 아울러 이 은사들의 유익성과 한계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이러한 3가지 은사를 어떻게 받을 수 있고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것에 대한 부작용은 없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고린도교회에 예배 중 은사 사용에 있어서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예배 중 은사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방언의 은사 사용이 교회를 건축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은 어떻게 그것을 알았을까? 그것은 고린도교회가 방언의 은사를 최고의 은사로 알고 사모하면서 그 은사를 예배 중 사용했지만 그것이 교회의 건덕에 전혀 유익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방언을 말하다 보면 방언이 자주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방언의 소리를 분석해 보면 어떤 방언은 일정한 형식이 있고 그 소리가 분명하기도 하지만 어떤 방언은 도무지 방언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유치하게 들리는 방언도 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가 방언의 은사를 매우 귀하게 여기고 또한 사모하다 보니, 일종의 좋은 방언과 나쁜 방언이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방언이 지닌 한계점을 지적하면서 방언이 공중 예배에서 사용될 수 없다는 이유를 설명한다.

 

3. 바울은 왜 방언의 은사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는가?

  그래서 바울은 교회에서 은사를 사용하려면 방언의 은사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고 그것을 사용할 것을 권면한다. 그렇다면 왜 방언을 공중 예배에서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방언 자체가 지키는 한계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점에서 그렇다. 첫째,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이므로, 그것을 공중 예배에 사용한들 아무도 알아듣는 자가 없으며 그 방언을 듣고 '아멘'이라고 할 자가 없다는 것이다.일만 마디의 알아 들을 수 없는 방언보다는 한 마디의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이 더 유용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방언을 사용하려면 반드시 방언 통역자를 세워야 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둘째, 방언은 개인을 세워주는 은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방언은 개인을 세워주는 은사이지만 예언은 교회를 세워주는 은사이기 때문에 바울은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왜 그런가? 여기서 '세운다'는 말은 '덕을 세운다'라는 뜻이 아니다. 이 단어는 '오이코도메오'라는 단어로서, 이 단어의 일차적인 뜻은 '짓다. 세우다. 건축하다'의 뜻이지만, 이 단어에 대한 이차적인 뜻이 '다시 짓다. 다시 세우다. 다시 건축하다'는 뜻으로서 '복구하다, 복원하다'라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는 교회를 건축하거나 교회의 쓰러지고 허물어진 곳을 일으켜 세우는 은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영적으로 무너져 있다. 그런데 허물어져 있는 자신의 영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사실 방언이 필요하다. 방언을 하게 되면 자신의 영을 건축하여 튼튼하게 만들어 주고 이미 허물어져 있는 자신의 영도 다시 복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언은 교회 자체를 그렇게 세워주고 복구하는 일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바울은 기왕 신령한 은사를 사모한다면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한 것이다. 셋째, 방언의 은사는 방언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도 알아 들을 수 없는 언어이기 때문에 마음에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적으로 깨닫고 돌이키고 배우게 하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 것이다. 

 

4. 방언이란 어떤 은사를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대체 '방언'의 은사는 어떤 것인가? 방언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정의하고 있는 곳은 사실 성경을 통틀어서 고린도전서 14장 밖에 없다. 나머지는 그곳에 그러한 현상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방언이라는 언어가 대체 어떤 것인지를 말해 주지는 않고, 그곳에 방언의 은사가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방언을 어떤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가? 그것은 고린도전서 14:2과 고린도전서 14:14~15에 나온다. 이 말씀을 헬라어 원문으로 직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전14:2  왜냐하면 방언으로 발언하고 있는 자는 사람들에게 발언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발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영으로 비밀들을 발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전14:1415  왜냐하면 내가 만일 [계속]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으면, 나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지라도 나의 이성(생각=누스)은 열매가 없이 있느니라. 15 그러면 무엇이 있느냐? 나는 영으로 [장차] 기도할 것이다. 그럴지라도 역시 나는 이성(생각=누스)으로도 역시 기도할 것이다. 나는 영으로 [장차] 찬송할 것이다. 그럴지라도 나는 이성(생각=누스)으로도 역시 찬송할 것이다.

  그렇다. 방언이란 2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첫째, 방언은 거듭난 사람의 영이 하나님과 말하는 언어이다(고전14:2). 곧 거듭난 사람의 영의 언어가 방언인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있지 않다. 그러다가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죄를 대속하시고 하늘에 다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목놓아 울게 된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하셨는지, 그분의 사랑과 희생이 너무나 크시다는 것을 깨닫고 그분을 이제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새롭게 모신다. 그때에 그는 거듭나게 된다. 그러면 성령께서 그 사람의 영 속에 들어오게 된다. 그것을 거듭남이라고 부르는데, 이때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데, 이때 하나님의 자녀가 재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에 그 영이 죽어 있다가 다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 바로 방언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응애'하고 말을 하듯이 자신의 살아난 영이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의 영이 말하는 것이 바로 방언인 것이다. 하지만 이 방언은 자신의 영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대화하는 새로운 채널로 부여한 것이기에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말을 알아들으신다. 만약 그것을 통역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비밀 대화인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방언이란 거듭난 사람의 영의 기도라는 것이다(고전14:14~15).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가 사용하는 일상 용어가 있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한국어다. 그러나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한국 아이들의 경우는 영어와 한국어가 동시에 일상 용어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상 용어는 혼의 언어다. 배워서 하는 것이요, 나와 다른 사람과의 의사 소통의 채널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방언은 다르다. 방언은 영의 언어일 뿐만 아니라 그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다. 내 혼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있지만 내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있는 것이다. 내 영이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바로 방언인 것이다. 그래서 방언 통역의 은사를 가지고 사람이 자신의 영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통역해 보면, 자신의 영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말이 약 80~90% 정도가 되며,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영의 기도는 약 10~20% 정도 된다. 나는 잘 인식하고 있지 않아도 영은 자신의 소원을 알고 벌써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방언이다. 그리고 방언의 분량이 많아지고 깊어지면 어느 순간부터는 방언 찬양도 나온다. 방언에 음률이 붙어서 자신의 영이 노래를 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을 방언 찬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5. 방언은 '외국어' 중의 하나요 고린도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이란 거듭난 사람의 '영의 말'(고전14:2)이자 '영의 기도'(고전14:14~15)라고 분명하게 정의하였다. 하지만 방언이 영이 말하는 언어가 아니라 '외국어'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더러 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방언이라는 은사는 신약성경이 완성됨과 동시에 교회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또한 최초로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하고 있는 나오는 '방언'도 그때 예루살렘을 찾아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지방에서 쓰던 지방어였다는 것이다. 더욱이 고린도전서 14장에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서 '방언'은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무아지경에서 지껄이는 일종의 귀신들의 속삭임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고린도지역에만 나타났던 고린도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고린도전서 14장을 번역하고 있는데, 신약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말이 안 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사료된다. 그분들의 이름을 굳이 거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오로지 성경을 믿고 성경에 나온 말씀대로 따라가야 한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이란 어떤 언어였을까? 정말 '지방말'이었던 것이었을까? 사도행전 2:4에 보면, 오순절날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내려오셨다. 그리하여 그들 모두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으로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한다(행2:4). 그런데 이번에 우리말이 개역개정판으로 넘어오면서 '다른 방언'이라는 용어가 '다른 언어들'로 뒤바뀌었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개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방언'이 '다른 언어들'로 바뀐 것이다. 명백한 성경 번역의 퇴보가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 등장하는 '다른 언어들'은 헬라어로 보면, '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other tongues)'라는 단어로서 완전히 종류가 다른 언어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120명의 성도들이 말했던 언어가 히브리어, 헬라어, 로마어 같은 종류의 이 세상의 언어였다면, 그것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알로이스 글로싸이스(another tongues)'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때 사용된 단어는 종류가 다른 언어로 곧 '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로서 영이 사용하는 특별한 언어인 방언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해 준다. 무엇보다도 오순절날 사람들 중에 어떤 이는 120명 성도들의 말했던 언어를 들은 후에 "이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라고 말했다. 자기들이 전혀 알아 들을 수 없는 언어였기에 술 취한 것 같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방언'은 분명히 '글로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약속한 표적으로서 주어지는 방언도 역시 '글로싸'이다(막16:17). 그리고 오순절날 마가  다락방에서 말해졌던 언어도 '글로싸'였고,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오셔서 베풀어졌던 방언도 역시 '글로싸'였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안수할 때 성령께서 은사를 주셨는데 그때 받은 방언도 역시 '글로싸'이다. 그리고 방언이 무엇인지에 대해 쓰고 있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도 방언이라는 단어도 역시 '글로싸'라고 나온다. 모두가 다, 이 세상에서 사용하지 않은 다른 종류의 방언들(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을 지칭하는 표현들이라고 하겠다. 

 

6. 방언 통역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진행되는가?

  그렇다면 '방언 통역'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방언 통역이란 다른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내가 알아듣는 은사를 가리킨다. 원래 방언은 그 사람과 하나님만 소통하는 대화 채널이어서 그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하고 있으며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인데, 방언 통역의 은사를 받게 되면 그 사람의 방언이 무슨 내용인지를 알게 듣게 되는 은사가 바로 방언 통역의 은사인 것이다. 방언 통역의 은사는 보통 3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는 상대방이 방언하는 것이 무슨 내용인지를 영이 느낌으로 그냥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방언 통역은 상당히 실수할 때도 있다. 정확하지 않은 것을 통역하다 보면 방언의 내용에는 없는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상대방의 방언이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들리는 것이다. 즉 한국 사람이라면 한국어로 들리는 것이다. 상대방은 분명히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영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알기 쉽게 한국어로 들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듣고 그대로 말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잘 되신 분은 동시 통역이 가능하다. 상대방의 방언을 들으면서 바로 동시에 통역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시 통역도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주님께서 그 사람의 죄를 들추어 낼 때가 있는데, 그것을 그대로 말했다가 그만 그 사람의 체면이 손상되고 그 사람의 숨은 죄가 드러남으로 성도들을 놀라게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순화하는 말로 바꾸어서 통역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방언하는 당사자만 알아듣고 회개를 할 수가 있다. 셋째, 방언하는 자의 입술에서 글자가 나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의 경우에는 한국어로 글자가 되어 입에서 나오는 것이 영안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입으로 나오는 글자를 읽어 주면 된다. 이것이 방언  통역이다. 이러한 사람은 지구상에 몇 명 안되는 방언 통역 은사라고 할 수 있다. 

 

7. 예언이란 어떤 은사를 가리키며 그것의 7가기 기능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예언'의 은사란 어떤 것인가? '예언'의 은사는 일반적으로 결코 알 수 없는 현재의 상태나 미래의 일을 미리 알고 그것을 미리 말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은사를 가리킨다. 그 대상은 개인이 될 수도 있고, 교회가 될 수도 있고, 국가와 민족이 될 수도 있다. '아가보'라는 예루살렘 출신의 예언자는 얼마 후 나라에 흉년이 들 것을 예언하였으며(행11:27~28), 개인적으로는 바울이 장차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면 그의 손발이 묶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하였다(행21:11). 그렇다면 예언자는 어떻게 현재의 상태나 미래의 일을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보통 세 가지 방법으로 알게 되어 예언을 한다. 첫째, 마음 속에 성령께서 어떤 영감을 떠오르게 함으로 알게 된다. 그때에는 그냥 그것이 알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언을 하게 되는데,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예언은 틀릴 수도 있다. 자기가 마음으로 생각한 것이나 사탄 마귀가 넣어 주는 것을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 현재의 모습이나 미래의 모습이 환상으로 보여지는 것을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이전의 예보다는 더 분명한 것이지만 이것도 사탄 마귀가 보여주는 것을 말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셋째, 현재의 상태나 미래의 모습을 글자로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한국에 살고 있지만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글자가 떠서 보이는 예언이 있다. 글자가 떠서 보이고 영의 상태가 환상으로 보일 정도라면 그분의 영성은 상당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예언의 은사는 예언 뿐만 아니라 책망과 판단, 위로와 권면, 폭로와 가르침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8. 나오며

  우리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다고 성령의 은사를 무조건 무시하거나, 그것을 귀신의 장난으로 보아서는 아니 된다. 2천년 전 오순절날 마가 다락방에 오신 성령이나 지금의 성령은 똑같은 한 분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에 주셨던 성령의 은사가 지금은 없어졌다고 말할 수 없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있는 것이다. 거기에 방언이 들어 있다. 그런데 방언에는 몇 가지 단점이 있다. 그것은 모든 은사들 중에서 자기 개인만을 세워주는 은사라는 것이다. 다른 모든 은사는 다 남을 위해 존재하는 은사들이다. 그런데 방언의 은사는 다르다. 방언의 은사는 이 외에도 2가지 단점이 더 있으니, 그것이 남들이 알아 들을 수 없는 언어이다 보니 그것을 공중 예배 때에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도 없는데 어찌 그 방언을 듣고 성도들이 '아멘'이라고 화답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방언은 아무리 말을 유창하게 한다고 해도 그 말의 뜻을 알아 들을 수 없으니 자신의 인격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방언이 좋은 은사이기는 하지만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씀의 경우처럼 굳이 예배 시간에 방언을 사용해야 한다면, 그때에는 반드시 방언 통역자를 세워서 방언 통역을 듣고 성도들이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예언의 은사를 구하여서 그것으로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야 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맞는 말씀이라고 하겠다. 방언은 사실 자신을 세워 주고 복구하는데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도구다. 그러나 그것 자체로서는 남을 가르칠 수도 없고 깨우치게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교회가 공예배에서는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오직 개인적인 목적으로 따로 기도할 때에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우리가 방언을 말하면 말할수록 다른 은사들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으며, [회개한 후에] 방언을 말한다면 방언을 말하면 말할수록 영적인 능력들이 계속해서 공급되기 때문이다. 

 

 

2021년 09월 08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성령의 은사(17) 방언통역의 은사란 무엇이며 통역해보면 그 내용은 무엇인가?(고전12:10)_2020-07-09(목)

https://youtu.be/dWmEFlOodmE [혹은 https://tv.naver.com/v/14691577   ]

 

 

1. 방언통역의 은사란 어떤 은사를 가리키는 것인가요? 

  "방언통역"의 은사란 방언을 통역하여 말하는 초자연적이며 신령한 은사를 가리킵니다. 이 은사는 성령의 9가지 특별은사들 중에서 말의 은사(방언, 방언통역, 예언)에 속하는데, 이는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알아들을 수 있는 모국어로 통역하여 말해주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방언(글로싸)"은 사람에게 발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발설하는 것으로서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이 오직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입니다(고전14:2). 그러므로 방언은 통역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그것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방언은 다른 사람도 못 알아들을 뿐만 아니라 방언으로 말하는 당사자도 못 알아듣기에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고전14:13)"이라고 권면했습니다.

 

2. 방언통역을 하는 사람은 어떻게 방언통역을 하는 것인가요?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의 유형은 크게 3가지입니다. 첫째는 남이 하는 방언을 듣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 즉각적으로 말해내는 것입니다. 느낌으로 방언을 통역하는 것인데, 이것은 약간 잘못 통역할 가능성이 있는 유형입니다. 둘째는 방언으로 말하는 자의 음성이 자기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모국어)로 들려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 통역자는 들은 것을 그대로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통역은 조금 조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장로에게 "주의 종을 대적하지 말라"라는 방언통역이 나오더라도, 직설적으로 말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장로가 모든 성도들 앞에서 목회자를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이 공개되어 그가 무안을 당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직독직해의 방식도 있습니다. 상대방은 낮은 목소리로 계속해서 방언을 말할 때에, 통역자는 그것을 계속해서 통역해내는 방식입니다. 가장 윗단계의 통역방식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합니까? 주님의 말씀이 더이상 주어지지 않고 그칠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습니다. 짧게는 30초에서 아주 길게는 10분 정도까지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평균 2~3분 정도입니다. 

 

3. 방언을 통해해보면 그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방언이란 사실 내 영과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은 "대화"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도 들어있습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내 영과 하나님과의 대화일 뿐만 아니라, 내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고전14:14). 이것을 굳이 퍼센트로 따지자면, 대화는 방언의 약 80~90%를 차지하고, 기도는 방언의 약 10~20%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통역을 해보면, 개인의 속사람(영)이 주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약 10~20% 정도는 나오며, 주님께서 개인에게 주시는 말씀이 약 90~90%가 통역되어 나옵니다. 

 

4. 개인이 드리는 방언기도를 통역해보면 그 내용은 주로 어떤 것들인가요? 

  방언의 약 10~20%차지하는 개인의 기도는 그 내용을 살펴보면, 크게 2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감사기도입니다. 대부분의 영은 가장 먼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둘째, 소원기도를 올립니다. 자신의 소원을 아뢰는 것인데, 이것도은 자기를 위한 소원기도와 남을 위한 소원기도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보통 자기자신을 위한 소원기도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부여하신 책임과 사명을 잘 완수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남을 위한 기도가 나오는데, 그것을 살펴보면, 첫째는 어린 자녀의 경우 가족을 구원해달라는 기도가 참 많습니다. 특히 예수믿지 않는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를 구원해 달라는 기도가 나옵니다. 둘째로 사람의 영은 교회와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목회자와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나라와 민족 그리고 세계선교를 위해 내자신의영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방언기도에는 하나도 이기적인 기도나 헛된 기도가 들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항상 자신의 영혼과 남의 영혼을 위한 기도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5. 방언 중 주님께서 우리 개인에게 주시는 말씀은 주로 어떤 것들인가요?

  놀랍게도 방언은 기도가 주가 아니며, 사실 주님께서 각자의 영혼에게 주시는 말씀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후자가 80~90%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방언기도 중에서 주님께서 개인에게 주시는 말씀만을 떼어놓고 본다면, 그것은 예언과도 거의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차이가 나는 것은 예언은 예언을 말씀하시는 분이 성령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부이지지만, 방언통역은 오직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방언통역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면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방언통역을 통하여 주님께서 내 영에게 하시는 말씀의 형태가 그것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방언 속에서 개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주로 3가지인 형태입니다. 첫째는 개인을 인정해주고 칭한하며 위로하는 말씀이 먼저 나옵니다. 주로 "내가 너의 어떠어떠한 것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가 얼마나 수고하고 있는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얼마나 영혼을 사랑하는지를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어, "내가 너를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했느니라." "너는 내가 말씀의 종으로 세운 특별한 종이니라" 등등의 위로의 말씀이 나옵니다. 둘째는 책망하고 충고하고 경고하고 권면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이미 결혼한 여성분들에게는 "네 남편을 이기려고 하지 말라"고 하고, 일반 평신도에게는 "주의 종을 비난하지 말라. 그를 위해 기도하라." "주의 종을 내쫓는데 가담하지 말라. 그러면 어찌 너에게 죄가 없다고 하겠느냐?"는 말이 나옵니다. 또한 "예수님을 제일로 섬기라", "세상의 미련을 왜 버리지 못하느냐?", "의심하지 말라"는 말씀도 나오고, 가장 많이 나오는 말씀 중에는 "네게는 지금 회개할 것이 있느니라"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바램이나 사명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너는 주의 종이 되거라. 부흥사의 사명을 가지고 있느니라. 기도원을 하라. 선교사로 헌신하라. 미국 가서 목회하라" 등등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방언통역으로 나오는 우리 주님의 말씀에는 결코 당면한 문제의 해결의 열쇠로서 던져주는 말씀은 들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당면한 문제는 우리가 결단하고 결정하며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가 잘못된 결정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에는 주께서 그 부분에 관하여 책망을 하시기는 합니다. 건투를 빕니다. 

 

2020년 07월 09일(목)

정병진목사

 

오늘날 교회에도 여전히 선지자가 존재하는가? 선지자가 존재한다면 그 선지자는 여전히 구약시대처럼 예언을 하는 자인가? 아니면 예언과는 상관없는 자인가? 그리스도인들 중에 많은 이들은 신약시대에는 더이상 선지자직이 남아있지 않다고 알고 있거나, 신약시대의 선지자직에도 여전히 예언이 들어있다는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둘 다 아니다.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선지자의 직분이 있기 때문이요, 오순절이후 선지자 직분을 수행하는 자라도 그는 더이상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신약시대 이후의 선지자직이란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자가 아니며, 그는 교회를 세우는 자라고 분명하게 언급했다(엡2:20). 그리고 우리는 교회를 세우는 자로서 선지자는 2가지 직무를 수행하는 자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신약시대이후의 선지자 곧 교회를 세우는 선지자는 대체 교회에서 어떤 직무를 수행하는 자인가? 오늘날 선지자란 대체 어떤 직분을 가진 자인가? 오늘은 이것에 대해 집중해서 살펴보자.

2019-01-20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오늘날 선지자란 어떤 직분을 가리키는가?(엡2:20~22)
https://youtu.be/bHZFalKBBrQ


1. 들어가며

  오늘날에도 예언사역을 하는 곳들이 더러 있다. 예언사역을 하는 곳에는 꼭 환상과 꿈도 같이 나온다. 그리고 축사와 치유사역도 병행하는 곳이 많다. 그런데 한 번 예언사역을 성령사역으로 알고 그것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좀처럼 거기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도들은 예언사역을 무시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성경은 예언사역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언제까지 있을 것이라고 했는가? 또한 초대교회를 세웠던 장본인들은 대체 누구였는가? 그들은 사도들이었는가 아니면 선지자들이었는가? 성경은 교회를 세우는 직분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선지자인 것을 증거하고 있다(엡2:20). 그리고 실제로 이방인 교회들을 집중적으로 세웠던 사도바울도 안디옥교회의 선지자 중의 하나였다(행13:1). 그런데 성경은 동시에 거짓선지자의 미혹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마24:11). 그들을 분별해야 한다고 말한다(요일4:1). 그렇다면 우리 믿는 이들은 오늘날 예언사역과 선지자들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내 영혼과 교회를 세우는데 더 유익이 되는 것일까?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교회가운데 현재도 있는 예언사역과 선지자의 직분과 거짓선지자와 참선지자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오늘도 우리에게 성령의 혜안을 주시기를 기도한다.

 

2. 예언의 은사는 종결되었는가 아직도 여전히 유효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언은 존재하는가? 고전12장에 보면, 예언의 은사는 성령의 은사로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성경이 완성됨과 동시에 성령의 은사도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어디에 그러한 근거가 있느냐고 물어보면, 고전13장을 언급한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행하던 것들 곧 예언과 방언과 지식도 함께 폐해진다고 되어 있다는 것이다(고전13:8~10).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왜냐하면 온전한 것이 오는 때는 그성경이 완성된 때라고 나와있지 않다. 그때는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보는 때라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고전13:12). 그러므로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성령의 은사의 하나로서 예언의 은사는 계속 있을 것임을 알라.

 

3. 지금의 시대에도 우리는 예언하려고 하거나 예언을 받으려 다녀야 하는가?

  그렇다면 성도들은 그때까지 늘 예언을 사모하고 예언받으려 다녀야 하는가? 그런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선지자의 직분이 존재하며(엡2:20), 예언의 은사가 있으니(고전12:10),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받아야 한다(고전14:1)고 주장하는 곳이 있다. 그곳은 대부분 신사도와 빈야드운동 하는 곳이거나 그곳과 관련을 맺고 있는 쪽이다. 그런데 방금 주장하는 것에는 성경에 어긋난 주장이 전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다.

  자, 물어보자. 첫째, 성경은 예언하려고 하라고 했는가 예언을 받아야 한다고 했는가?(고전14:1). 안타깝게도 성령의 은사를 추구하는 사람들 중에는 예언하는 자보다는 예언을 받으려는 자가 훨씬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둘째, 예언받은 은사자가 말하고 있는 예언은 정말 100% 성령의 음성인가 아니면 자신의 생각도 들어가는가? 여기에 "예"라고 대답할 분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가 그것을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양수리 수원지에 있는 물을 깨끗하다. 하지만 서울의 달동네의 수도꼭지에 나오는 물은 녹물이다. 물은 원래 깨끗한 물이었다. 하지만 물을 실어나르는 수도관이 오래 되면 녹물이 나오기 마련인 것이다. 다시 말해, 성령의 은사로 주어지는 예언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그 예언을 받아 말하는 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셋째,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가 예언을 말할 때, 그것은 100% 성령의 음성뿐인가 아니면 귀신이 주는 것도 있는가? 이 질문에 100% 성령의 음성 뿐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가장 큰 문제가 되는 항목이 바로 이 항목이다. 사람이 예언을 말할 때나 받을 때에 거의 대부분은 100% 무방비상태에서 예언을 말하거나 받는다. 도둑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자신을 내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는가? 사탄이 알곡 가운데 순간적으로 몰래와서 가라지가 뿌리고 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탄이 사람을 속이는 가장 큰 수단이 바로 예언과 꿈과 환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이 100% 전부다 성령으로부터 왔다고 보증하기는 어렵다. 왠만하면 구별을 못한다. 그것이 귀신이 가르쳐 준 것인지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는 것인지 잘 분간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을 사탄도 잘 안다. 그러므로 사탄은 예언을 통해서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아버린다. 그러므로 예언을 받는 자는 예언하는 자의 말에 100% 묶여버린다. 예언을 받지 않으면 불안해서 살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예언중독에 걸리고 그러면 거기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예언에 대해 무엇을 경고했는가? 어린아이 때에는 예언도 필요하고 방언도 필요하지만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그것을 버렸다고 했다(고전13:11). 그리고 예언하는 자는 반드시 차서를 따라 예언하되 반드시 분별하라고 했다(고전14:29~31). 하지만 이 세상 어떤 사람이 예언을 분별해낼 만큼 영적이며 성령충만한 자인가? 성경 전체를 다 알고 있는 자라도 그것을 분별해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예언은 분명 성령의 은사이기는 하지만 가장 조심해야 할 영역에 있다.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사탄이 우리를 속이고 묶어두는 데에 가장  잘 이용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 하신 일이 없다. 성령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도 그것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영이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영이라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4. 은사로서의 예언과 선지자의 직무수행은 같은 종류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그런데 예언의 은사와 선지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은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다시 말해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를 선지자라고 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성령받은 자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일뿐 그것은 선지자의 직분을 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선지자의 직분은 교회를 세우는 자이기 때문이다.

엡2:20-22 너희(에베소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사도바울은 교회를 세워가는 5가지 직분이 있다는 사실을 말했다. 그러한 직분에는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교사다(엡4:11). 이러한 직분은 성도들을 온전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한다. 그래야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성령의 은사로서 예언이 들어가지 않는다. 예언은 예언일 뿐이다.

 

5. 구약시대의 선지자직과 교회시대의 선지자직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나타난 선지자직과 오순절성령강림 이후 교회시대의 선지자직은 같은가 다른가? 그것은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율법과 선지자가 예언한 것은 세례요한까지라고 분명하게 방점을 찍었기 때문이다(마11:13). 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에 대한 예표로서 율법과 선지자의 직접적인 예언은 예수께서 오심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예언의 기능 가운데 하나인 메시야에 대한 예언은 이제 종결된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의 선지자가 행하는 직무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하나는 메시야를 예언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일이다. 그런데 메시야를 예언하는 직무는 예수께서 오셔서 완성하심으로 폐지되었다. 그렇다면 여전히 남아있는 선지자의 직무 하나는 무엇인가? 그것은 회개를 촉구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교회시대에 선지자들은 성도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직무를 여전히 수행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6. 오순절 이후 교회를 세웠던 선지자는 어떤 직무를 수행하는 자인가?

  사도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교회를 세우는 기본적인 2가지 직책과 더 나아가 5가지 직책이 있음을 말했다. 여기서 2가지 직책은 사도과 선지자직을 가리킨다(엡2:20). 그리고 거기에 덧붙혀 복음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라는 직분이 더 있다(엡4:11).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자신을 어떤 직책을 가진 자라고 소개했을까? 그는 딤전과 딤후에서 자신을 사도요 복음전하는 자요 교사라고 소개했다(딤전2:8, 딤후1:11). 그런데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안디옥교회에는 교회지도자들을 소개할 때에 2가지 직분이 나온다. 그것은 선지자와 교사직이다(행13:1). 그런데 안디옥교회의 5명의 지도자들 가운데 사도바울이 그 명단에 들어가 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선지자의 직무도 받은 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사도직, 선지자직, 복음전하는 직, 교사직을 가지고 있는 자였고 그것을 수행하던 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사도행전에 있는, 교회가 출현했던 역사를 통해서, 맨 처음 유대인으로 구성된 예루살렘교회는 사도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행2:36~37). 그런데 이방인으로 구성된 안디옥교회는 선지자들과 교사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행13:1).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에베소교회에 편지를 쓸 때에, 에베소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에 의해 세워졌다고 언급했던 것이다(엡2:20). 그렇다. 사도직과 선지자직은 교회를 세우는 직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이후로 선지자직은 구약처럼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자가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직무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사도베드로와 사도요한은 교회 가운데에 있는 거짓선지자와 거짓교사들에 대해 매우 조심해야 함을 경고했다(벧후2:1, 요일4:1~3). 거짓선지자와 거짓교사들은 교회를 세우는 자가 아니라 교회를 허무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요일4:1~3에서, 거짓선지자들을 분별해야 한다면서, 어떤 자가 거짓선지자인가를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 잘못 가르치는 자라고 하였다(요일4:1~3). 고로 교회시대의 선지자직은 교회를 세우는 자로서, 이미 오신 메시야 곧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잘 가르치는 자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교회시대의 선지자직이란 여전히 구약시대의 직무였던 회개촉구의 직무를 이어받은 자도 해당되므로, 교회시대의 선지자직은 교회를 세우는 자로서, 이미 오신 메시야를 잘 가르치는 자이자, 회개를 촉구하는 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7. 나오며

  오늘날에 과연 누가 선지자인가? 예언의 은사가 나타나고, 병을 고치고 능력을 행하는 자인가? 아니면 사도바울처럼 성도를 온전케 함으로 교회를 세우는 자인가? 그렇다. 오늘날의 선지자는 구약적인 선지자의 직무를 그대로 수행하는 자가 더이상 아니다. 구약적인 선지자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였고 회개를 촉구하는 자였다. 하지만 신약의 선지자는 더이상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는 자가 아니다. 이제는 오신 예수님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자다. 더불어 구약시대의 예언자처럼 회개를 촉구하는 자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사도요한에게 A.D.96년경 마지막 시대에 활동한 두 증인을 소개했는데(계11:3), 그들을 "두 선지자"라고 말했다(계11:10). 그리고 설명에 그들은 율법의 대표자인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자인 엘리야와 같은 일을 행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계11:5~6). 율법이 예표로 말했던 메시야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전파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자가 바로 마지막 시대의 선지자라는 것이다. 물론 이 시대의 선지자는 구약의 율법 가운데 도덕법인 십계명은 폐지되지 않았다는 것을 전하며, 의식법만이 예수께서 오셔서 완성하심으로 폐지되었음을 가르치는 자이다. 건투를 빈다.

 

2019년 01월 20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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