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천국의 모습은 어떠할까? 이 한 편의 설교는 천국의 모습 그리고 하나님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본 것처럼 보여준다. 천국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2개 있을까가 아니면 3개가 있을까? 그리고 천국에서 우리는 누가 보좌에 앉아계시다는 것을 볼 수 있는가? 오늘날 천국과 지옥 간증에는 가짜를 본 것이 너무나 많이들 돌아다니고 있다. 가짜를 보고 왜곡된 천국신앙을 가져서는 아니 되는데 안타까울 뿐이다. 여기 진짜 천국와 지옥이 어떤 곳인지가 하나도 틀리지 않게 분별해주는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2020-10-16(금) 금요기도회
제목: 가짜 천국과 지옥,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05) - 천국편(04) - (계5:6~14)
https://youtu.be/7N4RGR9Kqy8 [혹은 https://tv.naver.com/v/16265297 ]

 

 

 

1. 들어가며

   요즘 유튜브와 인터넷 공간에 보면 천국과 지옥에 관한 간증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간증들 중에 어떤 것은 가짜 천국과 지옥 간증이 섞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교묘하게 포장되어 있기 때문에 언뜻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잘못된 가짜 천국과 간증은 결국 성도들로 하여금 천국에 대하여 잘못된 선입관을 심어줄 것이 뻔하다. 그렇게 되면 천국신앙에 관하여 올바른 관점을 가지지 못하고 왜곡된 신앙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과 지옥간증을 받아들이는 일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런데 사실 천국와 지옥을 보고온 자들의 간증의 상당부분은 사실상 검증이 불가능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나와있지 아니한 부분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내용들이 과연 신빙성있다고 받아들일 것인가 버려야 하는지는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요번주 화요일부터 천국과 지옥 간증에 대하여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지를 구별하는 방법을 전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 네번째 시간인데, 천국간증 구별법에 관하여 갖는 3번째 순서로서, 이것은 천국에서 하나님 혹은 예수님을 보았다는 간증이, 과연 어떤 것이 진짜고 어떤 것이 가짜인지를 구분하는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2. 천국과 지옥간증을 진짜와 가짜로 구별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사실 여러 사람의 천국과 지옥의 간증들을 듣고 있노라면 고개가 갸우뚱하는 부분들이 더러 있다. 그래서 성경을 찾아본다. 그런데 어떤 것은 성경에 전혀 나오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때에는 그 간증을 믿어야 할지 아니면 믿지 말아야 할지 참으로 고민이 된다. 그런 때에 천국과 지옥 간증이 정말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하는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그것은 이외에 간단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확인하면 되기 때문이다. 첫째, 간증에 나오는 모습들이 과연 성경에 기록된 것들과 일치하는가를 보는 것이다. 모두가 일치한다면 그 간증은 진짜일 가는성이 매우 높다. 설령 성경에 나오지 않는 내용도 진짜일 확률이 높은 것이다.

  둘째, 간증에 나오는 내용이 성경과 불일치하는 것이 종종 있을 때에는 그 간증이 간짜일 확률이 높아진다. 사실 어떤 간증을 들어보면, 성경에 기록된 천국과 지옥의 모습이 오늘날 천국과 지옥을 갔다가 왔다는 분들과 일치하는 모습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일치하지 않는 것도 있다. 그럴 때에는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그것은 진짜가 아닐 확률이 높다고 보아야 한다.

 

3. 천국의 길과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은 어떻게 생겼는가?

  어떤 목사님께서 천국길과 천국문을 보았다고 간증했다. 그분은 우리나라 서울에서 대형교회에서 목회하시고 장로교단에서 신대원장과 교수를 역임하시고 여러 신학책들까지 저술하신 목사님이시다. 그분이 천국과 지옥을 직접 보고 왔다고 책 한 권을 내신 것이다. 벌써 십년도 더 된 것 같다. 그런데 그 책을 들여다보았더니, 천국에 들어가는 길을 이렇게 보았다고 했다.

  첫째, 천국문에 이르기 전에 천국에 들어가는 길이 있었는데, 그 길에는 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옛사람을 태우고 성결케하는 성령의 불이 아닌가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가짜 천국을 보고온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승천이후 천국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곳은 향단의 불 이외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은 이미 정결함을 입은 자들이 들어가는 곳인지라, 천국문에 이르러서 검사받고 들어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은 깨끗하고 거룩한 자만 들어가는 곳이기에, 성령께서 성도를 또다시 정결케 할 필요가 없다. 또한 천국에서 성령께서는 더러운 것을 정결케 하는 일을 수행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 땅에 예수님을 대신하여 보혜사로 보내심을 받아서 일하고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둘째, 그분이 천국문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재료가 문은 황금으로 되어 있었으며 또한 진주문으로 되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문은 회전문처럼 한 사람씩만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셋째, 그 성 안에 들어갈 때에는 자기의 이마와 오른손에 하나님의 인을 맞은 사람만 들어가도록 되어 있더라고 했다. 하지만 이것도 거의가 다 잘못된 것을 본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문은 따로 없으며, 천국에 새예루살렘 성에 문이 있는데, 이 문들은 총12개로 되어있는데, 동서남북에 각각 세 개씩 있다. 그리고 각각의 문들은 한 개의 진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계21:12~13,21). 그리고 이 성에 들어오는 자를 그의 이마와 오른손에 하나님의 인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지도 않는다. 이미 천국에 들어온 자는 누구든지 그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이 쳐져있기 때문이다. 혹 이마와 오른손을 인을 맞은 자만 들여보내더라고 한 것은 이 간증이 사탄이 보여준 가짜라는 것을 증명해줄 뿐이다. 왜냐하면 계13장에 따르면, 이마와 오른손에 표시하는 것은 짐승의 표로서, 사탄이 자기의 소유가 된 임을 표식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마와 오른손에 인을 쳤다는 것은 성경기록과 어긋난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만이 들어가는 것이다. 좀 더 말하자면, 이마에 하나님의 인이 쳐진 자들고 주님을 부인하거나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 지옥에 떨어질 때에는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진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은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자는 다 생명책에 이름이 녹명된 자들 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계21:27).

 

4. 천국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 중에서 과연 누구를 볼 수 있는가?

  천국에 가서 주님을 본다면 어떤 모습의 하나님을 보는 것인가? 만약 누군가 천국에 갔는데 하나님께서 세 분으로 계신 것을 보았다면, 그는 가짜를 본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하나님은 세 분으로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분은 천국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었는데 그 보좌 우편에 예수님께서 앉아계시더라고 간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도 실은 가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보좌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은 다 상징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다시 성경을 보라.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나머지 신약성경에서는 전부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하나님 우편 내지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나온다. 이는 예수께서 실제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천국에 올라가신 후에 어떤 위치(상태)를 차지하셨다는 것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모든 신학자가 다 그렇게 해석한다. 그러므로 실제로 천국에서 예수께서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 것은 상직적인 표현을 실제로 보고 왔다고 한 것이 되므로 그는 가짜를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예수께서 승천후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도 실제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또 다른 보좌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죄와 사탄과 사망을 이기시고 승리하셨다는 뜻이며, 이제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가 되셨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부활승천후에 과연 어디에 앉아계시는가? 계3:21(직역)에 보면, "이기고 있는 자에게, 나는 나의 보좌 안에 함께 앉는 것을 [장차] 그에게 줄 것이다. 마치 내가 이겼던 것처럼. 그리고 그분의 보좌 안에서 나의 아버지와 함께 앉았던 것처럼"이다. 즉 예수께서는 이기시고 아버지의 보좌 즉 한 분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시는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다. 고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시는 모습이 아니라, 보좌 오른편에 앉아계시는 것을 보고 왔다는 자는 가짜 천국을 보고 온 것이다. 

 

5.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실제 예수님의 모습은 사람의 아들 같은 모습인가 아니면 어린양의 모습과 같은가?

  사실 요한계시록의 기록상황은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시고 약 60년 뒤의 하늘의 광경을 사도요한이 본 것을 기록한 것이다. 사도요한은 그때 자신의 육체는 밧모섬에 있었다. 하지만 성령으로 그의 영이 빠져나가 천국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보고 온 것이다. 그런데 사도요한 자신도 결코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다만 보좌에 앉아계시는 예수님과 더불어 일곱금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시는 예수님만 보았다고 했다. 천국에서는 결코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님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다 상징적으로만 표현될 뿐이다. 오직 볼 수 있는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그리고 그분은 발에 끌리는 흰 세마포 옷을 입고 계시며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신다(계1;13). 그러므로 아까 소개해 드렸던 신학대학원교수이자 목사님은 천국에 가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예수께서 앉아계시더라고 간증하셨는데, 그것은 가짜를 본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실제로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이 천국에서 성도들을 보았는데, 그들이 세마포옷을 입고 있었으며, 모두가 다 가슴에 어떤 띠를 두르고 있는데, 12가지 종류에 따라 금띠와 은띠와 동띠를 띠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도 가짜를 본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세마포 옷에 띠를 두른 존재는 예수님과 일곱대접을 가진 일곱천사들 뿐이기 때문이다(계1:13. 15:6). 천국에 있는 성도는 흰 세마포옷을 입고 있거나 몇몇만이 면류관만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계시는가? 한 마디로 천국에서 그분은 사람과 같은 모양으로 계신다(계1:13). 그래서 사도요한은 그분을"인자(사람의 아들)와 같은(유사한) 이"라고 소개했다(계1:13). 그분이 비록 이 땅에서 33년반의 생애를 사셨던 그 몸을 그대로 부활체로 바꾸어 천국으로 가셨지만, 그러므로 그분의 손과 발에는 여전히 상처의 모양을 갖고 계시지만, 천국에서 그분은 더이상 유한한 사람이 아니시다. 그분은 전능하신 이이기 때문이다(계1:8). 그리고 천국에서 그분은 보좌에만 앉아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금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신다(계1:12~13). 그리고 그분의 오른손에는 일곱 별들을 쥐고 계셨는데, 이 별들은 일곱교회의 사자들(메시지 전달자들=주의 종들)이라고 했다(계1:20). 그렇다. 그분은 천국에서 사람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또한 그분은 교회를 돌보시고 계시며, 주의 종들을 권능의 오른손의 붙잡고 계신다. 그리고 그분이 비록 사람의 모양을 취하고 있으나, 위엄과 권능(권세와 능력)은 인간과 전혀 다르시다. 왜냐하면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같고 눈과 같으며, 그의 눈은 불타는 불꽃처럼 생겼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같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의 음성을 많은 물소리와 같고, 그분의 입에서는 양날이 선 칼이 나오고 있고, 그분의 얼굴에서는 해가 힘있게 비취고 있기 때문이다(계1:13~16). 그래서 그분 앞에 가면 어떤 사람도 그분의 위엄과 권능으로 인하여 그만 저절로 엎드려질 수밖에 없다(계1:17). 

  그런데 어떤 분은 천국에 하나님은 "보좌에 앉으신 이"이며, 예수님은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계신다고 말한다. 이 표현 자체는 사실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기가 천국에 가보니, 예수께서 어린양으로 모습을 하고 있더라는 것은 그가 가짜를 본 것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예수님은 발에 끌리는 흰 세마포옷을 입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린양"의 모습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요한계시록 4장부터 21:4까지 나오는 사도요한이 본 환상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모습으로서,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천국의 실제 상황은 요한계시록 1장~3장까지(정확하는 4장까지) 그리고 21장 5절부터 22장까지만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사도요한이 다 환상으로 본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사도요한이 보았던 어린양이 실제였다고 한다면 사도요한은 괴물같은 어린양을 본 것이기 때문이다. 계5:6을 보라. 이 어린양은 7개의 뿔들을 가지고 있고, 또한 7개의 눈들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7개의 뿔들"은 그분의 완전한 권세를 가리키고, "7개의 눈들"은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완전한 전지전능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세례요한이, 자기에게 세례를 받고 다음날 거니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과 같은 표현이다. 그분을 특별히 '어린양"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분이 과거 인류를 위해 희생하신 속죄제물이자, 흠없이 점없는 순결한 분이셨던 사실을 그리고 33세에 죽임을 당하셨던 젊은 분이셨다는 것을 표현하는 가장 적합한 것이 '어린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이 천국에서 실제상황이 아니라 환상으로 본 장면 속에 어린양이 등장할 뿐이다. 그러므로 계3~21:4에서는 단 한 번도 보좌에 앉으신 이이 말씀하시는 것이나 어린양이 말씀하시는 대목을 발견할 수 없다. 전부 환상의 장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이 말씀시는 대목은 오직 1~3장에 그리고 21~22장에만 나오는 것이다. 특별히 "보좌에 앉으신 이"는 주 하나님 곧 한 분 하나님을 가리키고, 그분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사람의 아들로서 예수님이라고 불리셨지만, 천상에서 예수님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계시는 인자같은 이로서, 그분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처음과 마지막시고, 시작과 마침이시다(계22:13). 그분이 한 분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장에서 주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계1:8)"이라고 말씀하시고, 21장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가 말씀하실 때에 자신을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마침이다(계21:6)"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을 통하여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의 체현이며,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보았다든지 혹는 성령님을 보았다고 간증하는 것은 가짜인 것이다. 오직 우리는 나타나신 한 분 하나님이신 예수님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6. 천국에서 하나님의 보좌 위에는 누가 앉아 있는가?

  만약 누군가 천국에 가보았더니, 하나님 보좌 위에 아버지 하나님이 앉아 계시고 그분의 오른편에 예수께서 앉아 계시더라고 간증하는 분이 있다면, 그는 가짜를 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천국의 하나님의 보좌에는 예수님이 앉아 계시기 때문이다(계3;21, 20:11, 마25:31). 예수께서 주 하나님으로 거기에 앉아계시는 것이다. 주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의 표현으로 거기 앉아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천국에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이자 "전능하신 이"는 바로 주 예수님이시다(계1:8). 우리는 환상으로 보여지는 예수님의 상징적인 모습과 실제적인 예수님의 모습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이론과 지식으로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고 있는 분은 천국에서도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각각 따로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겠지만, 그것은 실제가 아니다. 글로서 설명할 때나 사용할 수 있는 표현들에 불과하다. 

 

7. 천국에서 "보좌"는 대체 어떻게 생겼으며 무엇하는 곳인가?

  그렇다면, 천국에서 하나님의 보좌는 어떻게 생겼는가? 그것은 구약시대에 여러 선지자들 예를 들어, 이사야나 에스겔이나 다니엘 그리고 시편기자(특별히 다윗)과 미가야 선지자 등이 그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높이 들린 한 개의 보좌(의자)였다. 거기에 지금은 예수께서 앉아계신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은 그 보좌를 두고서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라고 일컬었다(계22:1,3). 여기서 "보좌"는 단수다. 한 개의 보좌를 "하나님의 보좌"라고도 부르고, "어린양의 보좌"라고도 부르기 때문이다. 그 보좌에 구약시대에는 "여호와"라고 불리셨던 이가 앉아계셨다(사6:1~5). 그리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인 주 하나님께서 앉아계셨다(단7:13). 그런데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에는 "예수"라고 불리시는 이가 앉아계신다(계3:21). 한 분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당신 자신을 여호와라고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예수라고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능전능하신 분으로 인류의 구속을 위해 동시에 존재하시기도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 때만해도 한 분 하나님은 천국의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시면서도 동시에 이 땅에 아들로서 존재하셨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러니 예수께서 지상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면서 동시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 위에 내려올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아들로서 지상에 계셨을 때에 하나님의 보좌는 "아버지의 보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던 것이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에 예수께서 그곳에 앉으신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의 보좌가 예수님의 보좌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보좌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 보좌는 한 분 하나님께서 좌정하시는 보좌이신데, 성경을 보면 크게 2가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통치의 역할이요 또 하나는 심판의 역할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보좌가 그 일을 하는 것은 아니며,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것을 행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이 보좌가 왕으로 통치하는(다스리는) 보좌라고도 부로고(시103:19),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보좌라고 부른다(시9:7). 그런데 이 보좌가 한 때는 아버지의 보좌이기도 했다(예수님의 공생애 때에). 그러나 지금은 아들이신 예수께서 앉아계시는 보좌가 되었다. 그런데 계3:21에 의하면, 예수께서 아버지와 함께 하나의 보좌에 앉으신 것처럼, 이기는 자들도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여기서 '함께'라는 말은 통치와 심판의 역할을 수행하게 해주겠다는 뜻인데, 예수께서는 실제로 당신이 앉으신 보좌를 당신의 12제자들(나중에는 가룟유다 제외됨)에게도 나눠주셨다. 사실 예수께서는 당신만이 아버지의 보좌에 앉아 통치하시고 심판하셔야 하는데, 그 역할을 이제부터는 제자들에게 나눠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마19:28, 눅22:28~30, 계20:4, 고전6:2~3). 그러므로 이러한 약속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24보좌"다(계4~5장). 그러므로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이후 하늘에는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서서 24보좌가 있다. 구약시대에는 누구도 볼 수 없었던 보좌들이 예수님의 부활승천이후에 경륜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피조물이 통치와 심판의 역할에 동참한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송구스럽고 황공스런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까지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무엇으로 감사해야 할까? 

 

8. 왜 지금도 천상에서는 "하나님"에게만 경배하지 않고, "하나님과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에게도 동시에 찬양과 경배를 올리고 있는가?

  영국의 대신학자 리차드 보컴(보쿰)교수는 "요한계시록 신학(한들출판사, 2000년)"이라는 책을 통해서 놀라운 사실을 언급했다. 그것은 유대인적인 사고로서, 어린양에게도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찬양과 경배를 동일하게 드린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계5장). 하나님은 결코 두 분이 되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네 생물과 24장로들과 천만천사들이 어린양에게도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경배를 동일하게 드리고 있다면 그것은 결국 그들이 예수님을 한 분 하나님과 동일시한 것이 아니라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유대인들에게 2인자 하나님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요한계시록 5장을 읽어보면, 모든 생명체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양을 드리고 경배하는 장면이 나온다. 결국 우리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이야말로 한 분 하나님의 표현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다만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세 분으로 체험하고 있을 뿐이다. 구약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을 체험하였고, 신약시대에는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예수님을 통하여 체험하였으며, 그분이 부활승천하신 이후에는 그분이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님을 통하여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전능하신 한 분 하나님은 동시존재가 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을 가지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을 때에는 아버지와 아들로 분리되셨으며, 지금 하늘에 예수께서 하나님으로 계시지만 동시에 이 땅에 성령님께서 하나님으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9. 나오며

  만약 지금 내가 천국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볼 것인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에서도 우리가 이 땅에서 체험하는 하나님처럼 하나님을 세 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천국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계시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한 개의 보좌에 앉아계신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것은 바로 천국의 실제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갔더니 아버지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시고, 그분의 오른편에 예수께서 [땅바닦이든지 보좌이든지 어딘가에] 앉아계시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 분이 있다면, 그분은 지금 가짜 천국을 보고 온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시며, 또한 우리가 볼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사실 천국에서 예수님은 결코 일곱개의 뿔들과 일곱개의 눈들을 가진 괴물어린양으로 모습으로 실제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예수께서 어떤 능력과 권세 그리고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모습이다. 그분은 지금도 천국에서 일곱인으로 봉인된 미래의 되어질 일들을 펼치시고 있는 분이시다. 그분이 이 세상과 우주역사의 주관자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이 한 분 하나님의 체현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분이 심판주로 오실 날이 머지 않았다. 깨어 있어야할 때가 된 것이다. 가짜 천국과 지옥을 보고 온 자들에게 속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왜곡된 천국의 모습을 보고 왜곡된 자세로 신앙을 했다가는 제대로 신앙생활하기가 힘들다. 그러므로 이제는 똑바로 보고 똑바로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다음에 더 살펴보겠지만 우리는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고, 그곳에서 면류관을 쓰는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 그냥 거기 들어간 모든 자에게 다 면류관을 씌워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10월 16일(금)

정병진목사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인가? 요18:37에 의하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고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목적은 진리를 증언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그렇게 강조하신 것인가? 자기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사람 앞에서 예수께서는 진리를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예수님이 진리이시고 진리의 말씀만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는 이들 중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바울이나 어떤 유명 신학자의 말을 동일선상에 두려는 자들도 있다. 그게 옳은 것일까? 만약에 예수님의 말씀과 바울의 말 혹은 신학자의 말의 충돌된다면 그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실제로 그러한 말씀이 있고 신학적인 언급이 있다. 예를 들어, 루터는 성경에서 야고보서를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바울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고 가르치지 말라고 했다.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루터는 유대인들을 죽이라고 했다. 칼빈은 자신의 이중예정론교리를 따르지 않는 자를 죽이라고 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은 그 답을 찾아보자.

 

1. 들어가며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여러개 등장한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사례를 몇 가지 언급하면 이렇다. 첫째로,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에 의하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요10:10)"이라고 하셨고, 둘째로,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막10:45)" 오셨다고도 하셨다. 한편 셋째로,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요일3:8)"이라고 언급했다. 그런데 오늘말씀처럼 예수께서  빌라도 앞에 섰을 때에는 그렇게 말씀하지는 않으셨다. 그 순간에 예수께서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고 이 세상에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진리의 증언하기 위함(요18:37)"이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그 중요한 순간에 왜 그러한 말씀을 빌라도에게 들려준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꼭 붙들어야 할 진리란 대체 무엇이며, 진리를 붙들게 되는 자가 받게 되는 축복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리고 진리를 붙드는 자에게 세상의 반응은 어떠하는지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진리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것이 진리가 되려면 어떤 필요충분조건이 채워져야 하는가?

  진리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에서 진리를 찾아보면, '진리'란 참된 이치나 참된 도리라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어떤 것이 모순되지 아니하고 확하게 바르게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떤 명제나 단어가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2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시간이요 또 하나는 장소다. 어떤 명제나 단어가 진리가 되려면, 언제 어디서든지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키 큰 사람은 아름답다"라고 정의해보자. 이것은 진리라고 말하기가 곤란하다. 항상 키 큰 사람이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명제나 단어가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과 장소가 달라져도 항상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성경에서는 이 세상이나 오는 세상에서도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때에 그것을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통했지만 오는 세상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

 

3.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진리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진리란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 성경에서는 진리는 오직 3가지 뿐이라고 증언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 증언한다. 예수께서 겟네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시다. "아버지(당신)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온 분이 예수님이 진리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다. 그러면 삼단논법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진리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자기정체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진리인 것이다(요1:14,14:6). 그리고 셋째, 예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 오셔서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도 진리이다(요15:26). 그래서 진리의 성령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군지를 증언하고 있으며, 예수께서 들려주셨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점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 세상에 속해 있는 것은 하나도 진리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우리 주님의 재림의 때에 다 사라져 없어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 진리가 없었기에 예수께서 진리를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시오 안내하시기 위해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4. 진리를 붙드는 자가 받게 되는 3가지 축복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제 진리를 붙드는 자가 받게 되는 축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3가지다. 첫째는 이 세상의 모든 억압된 요소로부터 자유케 된다는 것이다(요8:32). 이 세상에서 우리를 억압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죄된 본성이다. 그리고 마귀와 귀신들이다. 진리되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게 되면 우리는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모든 것들 즉 저주와 가난과 질병과 무지까지도 다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둘째는 이 세상에서부터 얻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영생이다(요5:24). 진리이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면 누구든지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믿는 자 안에 하나님의 생명에 분배되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죽는 순간에 얻게 되는 것으로 천국이다(요14:6). 진리이신 예수님을 붙들게 되면, 예수께서는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5. 관건은 우리가 과연 끝까지 진리인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만을 붙들려 하느냐는 것이다.

  고로 문제는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 때 진리를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으로부터 있는 것은 결코 진리가 아니다. 다 변하기 때문이요 없어지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만이 진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예수님 자신이 진리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직접 나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요16:28). 그리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오직 아버지로부터 받은 말씀만을 전하셨기 때문이다(요8:28,12:49,14;10). 그렇다. 예수께서 들려주신 말씀은 예수께서 스스로 만들어내어 말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붙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만이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항상 변하지 않는 진리가 되기 때문이다(히13:8, 벧전1:25).

 

6. 유명신학자나 성경의 저자 바울의 말과 예수님의 말씀과 충돌되었다고 판단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 진리가 없는 이 세상에 진리를 증언하어 오신 것이다(요18:37). 그분은 진리가 성육화되신 분이므로 그분의 말씀은 100%가 진리다. 그분의 말씀은 틀림없다. 절대 거짓이 없다. 아니 거짓이 0.00001%도 섞여있지 않는 순도 100%의 진리의 말씀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보다 더 우위에 두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보자. 오늘날 개신교인들 중에는 칼빈의 교리를 모든 것보다 더 우선시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칼빈의 교리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공격한다. "네가 칼빈보다 똑똑하냐?"고, 그리고 "칼빈처럼 성경을 제대로 풀어낸 사람은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과 칼빈의 주장이 다르다는 것이 발견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께서 칼빈과 같이 말씀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도 칼빈은 틀리지 않았다고 계속 주장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거의 맹신에 가깝게 칼빈을 추종한다. 그리고 그의 말씀을 실어나른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믿고 실어나르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님의 말씀만을 그대로 믿고 따라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성경에는 단 한 번도 어떤 개인에 대한 구원을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예정해 놓았다는 성경구절이 없다. 단지 개인에 관한 사역적인 예정만 있을 뿐이다. 그를 어떻게 쓰실 것인가를 예정해 놓으신 것은 많다. 하지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았다는 성경말씀은 없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구원으로 초청하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언급하셨다(마22:1~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그것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만세전부터 예정되어 있다고 항변한다. 아니다. 과연 우리는 누구의 말씀을 100% 신뢰하고 따라가야 하는가? 칼빈인가 예수님인가?

  한편, 오늘날 어떤 신앙인들 중에는 바울의 말을 100% 절대적인 말씀으로 알고 따라가는 자들도 있다. 특히 종교개혁자 루터는 바울의 말은 100% 따라가지만, 야고보의 말은 따라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바울의 말은 100%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겠지만, 야고보의 말(야고보서)은 정경(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바울의 말과 상충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것을 신약성경에서 빼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니다. 그것은 그가 너무나 바울의 서신에 편중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럴 때에는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 100% 진리만을 외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비교해보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것을 판정해야 한다.

  또 한 예를 들어보자.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언급한 것들 중에는 오늘날 우리가 적용하지 않는 말씀들이 더러 있다. 바울은 여자는 교회가 잠잠하라고 했다. 그리고 여자가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딤전2:11~12). 하지만 그것이 100% 절대적인 진리의 말씀인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왜 오늘날 교회는 그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고 있는가? 또한 바울은 처녀인 여자는 시집보내지 말라고 했다. 그냥 그대로 지내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고전7:26). 만약 이것도 100% 진리의 말씀이라면, 왜 자기의 딸들은 예외적으로 시집보내고 있는가? 그리고 여자는 기도할 때에 무엇을 쓰든지 긴머리를 하고 기도해야 한다고 했다(고전11:5~6). 그러나 여자 성도들 중에는 짧은 머리를 하고 기도하는 성도가 요즘 한 둘이 아니다. 그렇다. 우리는 오직 진리되신 예수님의 말씀만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만을 절대적인 진리로 믿고 그분의 말씀만을 그대로 따라가야 한다한 마디로 예수님의 말씀만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도바울도 성령의 영감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당시에는 합당한 진리를 선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기록된 내용 중에는 시대를 초월하여 항상 적용될 수 있는 진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자기 생각하기에 사도바울의 말과 예수님의 말씀이 충돌된다고 생각된다면, 우리는 기꺼이 사도바울의 말을 버려야 한다. 아니 그럴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혹시 예수께서 언급하지 않는 부분이 성경에 나온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돕기 위한 보조적인 것이라고 보면 된다.

 

7. 나오며

  그렇다. 오직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만이 절대적인 진리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놀라운 것은 그 말씀은 언제 어디서든지 적용해 보아도 항상 옳은 결론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여 항상 적용되어도 동일한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더 읽고 더 믿고 더 실천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앞에서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그것을 위하여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다고 했다(요18:37). 그러므로 우리가 붙들고 절대적인 신뢰해야 할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오직 그분의 말씀만이 우리를 억압에서 자유롭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분의 말씀만이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며, 그분의 말씀만이 우리를 천국에까지 데려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님의 말씀만을 붙들자. 그리고 진리만을 선포하기로 결심하자. 우리는 어떤 유명 신학자의 말을 전할 것이 아니다. 오직 사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을 말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의 말씀만을 붙들고 전해야 한다. 건투를 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것은 자기 죄로 인함이었는가? 아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오로지 죄많은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대신 피흘려 죽으신 사건을 일컬어 우리는 하나님의 자기의 '대속'이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서 대신 회개하고 대신 기도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정말 성경에도 누군가가 대신 기도하고 대신 회개한 사례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누가 그러한 기도를 드렸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던 것일까?

  성경을 통틀어 대신 기도하고 대신 회개했던 사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 기도의 위력은 대단했다. 대표적인 사례를 고르라고 한다면, 구약시대 때에는 모세와 다니엘이 드린 대신 회개기도가 있으며, 신약에 와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스데반이 드린 대신 회개기도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과연 무엇 때문에 대신 기도를 했으며, 그렇게 기도한 결과는 어떠했던 것일까?

  먼저, 다니엘 9장에 나오는 다니엘의 회개기도의 경우를 살펴보자(단9:3~15). 다니엘은 B.C.605년 바벨론에 의해 제1차포로로 끌려간 소년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5세였다. 그런데 그가 대신 회개기도를 드리던 때는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간 뒤였다. B.C.539년 그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지 벌써 66년이 지나고 있었다. 그때 그는 바벨론을 무너뜨린 메대(메디아)와 바사(페르시아)제국의 제 3대총리 중 수석총리로 일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그는 자기의 조상인 이스라엘 민족이 범죄한 것에 대해 대신 회개하며 대신 기도하였던 것이다.

  사실 그가 그렇게 굳이 기도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직접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자신의 조상들이 지은 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그는 메대와 바사제국의 수석총리가 되었으니 편안한 노후가 보장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그는 하나님 앞에 자복하며 금식하며 눈물로 회개기도를 드린다.

  그는  왜 그런 기도를 드렸을까? 자기 민족에게 그때까지도 여전히 들고 계신 하나님의 징계의 팔을 중단키시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는 마음에서였을까? 아니면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충정심에서 그렇게 한 것일까?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정확한 해답은 이렇다. 다니엘서 9장 2절에 보니, 다니엘은 그때 예레미야서를 읽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70년만에 그치리라(렘25:11~12, 렘29:10)"는 약속의 말씀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약속의 때를 얼마남겨두지 않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도 누군가 기도해야 성취된다는 것을 알았기에(겔36:37), 그가 대신하여 회개기도하며 이스라엘 회복을 간구했던 것이다.

겔36:37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어찌되었든 다니엘은 그때에 비로소 자기 민족의 조상들이 저지른 잘못을 대신 회개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다니엘은 과연 무슨 내용으로 대신하여 기도했을까? 첫째, 자기조상들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버리고 우상숭배한 죄를 대신하여 회개기도를 드렸다(단9:5,9~10). 둘째,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종 선지자들을 보내 회개를 촉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치 않은 죄를 대신하여 회개했다(단9:6). 셋째, 무엇이 참 된 것인 줄 알고 또한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지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은 죄를 대신하여 회개했던 것이다(단9:13).

  그렇다면, 그후 다니엘이 드린 대신기도와 대신회개 때문에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을까? 첫째, 하나님의 징계가 정말 그쳐지게 되었다. 66년간 지속되어온 하나님의 징계가 그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그토록 뼈저린 아픔을 겪어야 했던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그토록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는 우상를 제조했고 그 우상들을 숭배했기 때문이다(겔8:1~17).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기근과 전염병을 보내셨다(겔14:13,19). 그리고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셨다(마23:34). 하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칼(전쟁)을 통해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심판을 집행하셨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다. 그렇게 시작된 하나님의 재앙과 저주가 벌써 66년째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니엘이 그때 회개기도를 시작한 것이다. 그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바사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집을 짓고 편안히 살라고 해방령을 선포하게 된 것이다.

  둘째, 과거에 잃어버렸던 모든 것들을 되찾게 되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끌려갈 때에 성전에 있는 모든 은금기명들까지 같이 빼애겼는데, 바사왕 고레스는 그 모든 것을 아무런 댓가없이 다 내어주었다. 그리고 돌아가서 성전을 짓고 살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경비나 재목들이 필요하다면 주변의 총독들을 통해서 지원해 주겠다고 칙령까지 반포해 주었다. 그렇다. 다니엘처럼 자기 조상들이 지은 범죄라 할지라도 대신하여 기도하면 저주와 재앙도 그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잃었던 것도 다시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니엘 말고도 대신기도를 드린 사람이 또 있을까? 있다. 구약시대에는 모세의 대신 회개기도가 있다. 그는 무슨 회개기도를 대신했을까? 모세는 우상숭배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대신 기도했다. 즉 애굽에서 광야로 나왔지만 다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놓고 섬기며 광란의 춤을 추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신 회개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드렸던 대신기도는 사실 생명을 내 건 기도였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하늘의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했다.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대신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려 했던 심판의 손을 거두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던 것이다.

  한편, 신약에도 대신 기도한 사례가 나온다. 특히 예수님께서 행하신 대신 기도는 대신 회개기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3년반동안이나 자신을 믿고 따르던 자들이 자신을 배반하고 십자가에 자신을 죽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했던 것이다. 자신의 얼굴을 향해 침을 뱉으며 자신을 버린 그들을 향해서, 주님께서는 한 마디의 원망함도 없이 "아버지여, 저들은 자기들의 죄를 알지 못하고 행하고 있으니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시고, 다만 저에게 돌리리옵소서(눅23:34)"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어떻게 되었을까? 무지몽매한 백성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장 심판을 집행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얼마 후 2만명이나 되는 그들 중의 상당수가 오순절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여 구원받게 된다.

  마지막으로 대신 회개기도했던 스데반집사의 경우를 보자. 그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예루살렘교회의 안수집사로 선출된 자였다. 그는 설교도 잘했다. 그래서인지 그만 설교하다가 붙잡혀 산헤드린공회 앞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고 조목조목 유대인들의 잘못을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했으므로 이미 율법시대는 끝이 났고 이제는 이미 오신 메시야를 믿어야 한다고 증거했다. 하지만 기득권을 지키고자 했던 산헤드린공회와 무리들은 심판도 행하지 않은채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여버렸다. 돌에 맞아 죽어가던 스데반은 과연 무슨 말을 했을까? "주여, 배은망덕한 저놈들을 벌하여주시옵소서. 율법을 지키라고 가르치는 자들이 오히려 율법을 어기고 있나이다." 라고 말했을까? 아니다. 스데반도 예수님처럼, "주여, 저들이 짓고 있는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대신 회개하며 대신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행7:60). 그후 어찌 되었을까?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에게 심판을 집행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들 중에 한 사람을 건져내셨다. 그는 바로 바울이라고 하는 청년 사울이었다. 스데반의 대신 회개기도 때문에 기독교역사상 가장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한 사람이 구원받게된 것이다.  이처럼 누군가가 대신해서라도 기도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그 기도를 받으시고 건질 자는 건져내시는 것이다. 당장 내리시려던 심판도 유보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그들 중의 일부를 구원하시는 것이. 그렇다. 성도들이여, 이제는 하나님의 재앙과 징계를 볼 때에 멀거니 그냥 바라보고만 있지 말라.

  그동안 우리나라는 요 몇년동안 수많은 재앙과 재난 가운데 시달리고 있다. 일제시대 신사참배로 인해 신사참배를 결의했던 북한이 공산화된 채 지금도 김일성김정일부자의 신상을 섬기며 세상에서 가장 억압받고 통제받는 나라가 되었으며, 그들이 벌인 6.25 남침으로 인해 삼천리 금수강산이 폐허더미가 되지 않았던가? 그리고 2013년 10월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는 WCC를 부산에서 개최함으로 인해 또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 그 다음에 1월이 되자 대학생 MT건물이 무너져 수십명의 인명피해를 시작으로, 그해 4월 16일에는 수학여행중이던 고등학교 2학년들이 타고가던 세월호가 침몰하여 수백명이 익사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던가? 또한 그것으로 인하여 수많은 우상숭배행위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작년 8월 15일에는 종교다원주의자이자 음녀인 로마카톨릭 교황을 이 땅에 불러들여 죽은 자를 위한 미사를 드리지 않았던가? 그것으로 인하여 지금 이 나라와 민족에게 수많은 재앙들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헬기가 추락하고, 집합장소와 건물들이 불타고, 열차가 추돌하고, 공연장의 환풍구가 무너지고, 수십대의 자동차들이 충돌하고 건물이 폭삭 주저앉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징계를 바라 보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 참으로 안타깝구나"하고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다. 이제는 우리도 구약의 모세와 다니엘처럼 자기의 민족을 대신하여 기도하며 대신하여 회개해야 한다. 그렇게 했을 때에 계속 부어지던 재앙이 그치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의 역사를 일으켜 주실 것이며, 그들 중에서 건질 자를 건져주실 것이다.

  성도들이여, 이제는 이 나라와 민족의 우상숭배의 죄를 대신하여 우리가 기도하고 우리가 회개하자. 타락한 한국교회와 대형교회 주의 종들을 대신하여 우리가 대신 회개기도를 드리자. 그리고 아직까지 믿지 않는 자기가족 식구들을 대신하여 회개하며 기도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실 것이며 건질 자는 건져주실 것이다. 아멘.


<대신 회개 기도의 예>

주여, 우리나라와 민족이 수천년간 하나님을 모른 채 살아온 것을 회개하나이다. 용서해주소서

주여, 한국교회가 일제 강점기에 신사를 참배하고 동방요배를 하고 신도세례를 받았던 것을 회개하나이다. 용서해주소서.”

주여, 한국교회지도자들이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는 WCC를 이 나라에서 개최했던 것을 회개하나이다. 그리고 음녀인 교황을 이 나라에 초청하여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를 올렸던 것을 회개하나이다. 용서해주소서.” 

 “주여, 추도예배나 장례예배와 같은 우상배행위를 하지 말라는 주의 종들의 외침을 듣고도 고치지 않은 것을 회개하나이다. 용서해주소서.”

주여, 우리나라의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음란과 사치에 물들어져 가고 있음을 회개하나이다. 용서해주소서.”

주여, 교회 가운데 거짓선지자를 용납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죄를 회개하나이다. 용서해주소서.”

주여, 내 부모와 내 자식이 예수님을 떠나 세상 길로 가고 있어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을 회개하나이다. 용서해주소서

 “주여, 내 남편이 주의 종을 욕하고 박해한 죄를 회개하나이다. 용서해주소서.”

주여,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르고 교회를 욕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 것을 회개하나이다. 용서해주소서.”

주여, 감히 피조물인 주제에 창조주 예수님을 조롱하고 멸시한 잘못을 회개하나이다. 용서해주소서.”

주여, 주님을 믿는 성도가 되었음에도 주일을 범한 죄를 회개하나이다. 용서해주소서.”

주여, 주님을 구원자로 알면서도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지 못하고 이 세상의 물질과 명예와 쾌락에 두었던 것을 회개하나이다. 용서해주소서.”

주여,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성령의 은사를 부정한 죄를 회개하나이다. 용서해주소서.”

주여, 성령이 아닌 귀신들이 활동임을 알면서도 귀신을 따라갔던 죄를 회개하나이다. 용서해주소서.”

주여, 오직 예수 이외에 구원의 길이 없음에도 베리칩을 따라갔던 것을 회개하나이다. 용서해주소서.” 

주여, 구원은 끝까지 경주하여 얻는 것임에도 이미 받은 것으로 알고 방종했던 것을 회개하나이다. 용서해주소서.”

주여,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는 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갔던 죄를 회개하나이다. 용서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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