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01(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26) 향유부은 여인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주는 교훈(요11:45~12:19)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Z7PqSZouuBY [또는 https://tv.naver.com/v/32826012]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영적인 복음서로서 대부분 예수께서 하신 말씀 어록에 집중하고 있는 복음서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그것은 사도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에 이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나오는 내용은 가급적 넣지 않으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약 70퍼센트는 공관복음서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과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은 다른 공관복음서에서처럼 공히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사건의 기록은 공관복음서의 기록과는 대체 어떤 것이 같으며 어떤 것이 다른 것인가? 또한 그 이유는 무엇인가? 특히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에서 사도 요한은 왜 공관복음에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는 나사로와 마리아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을 책망했던 제자를 굳이 가룟 유다라고 왜 실명을 거론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체포하자고 결의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왜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처음에는 그것이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고 했으며, 예수님의 예루살렙 입성에 그렇게도 많은 환영 인파가 몰렸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이상의 이야기를 통하여, 요한복음에서만 알 수 있는 놀라운 영적인 비밀들을 발견해 보고자 한다. 

 

2.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함께 모였던 공회는 왜 예수 체포령을 결의하게 되었는가?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두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부류는 제사장 그룹으로서 사두개인들의 한 부류였다. 또 한 부류는 서기관들과 장로들의 그룹으로서 바리새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두 그룹은 원래 서로 정반대의 신앙 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는데에 그 둘은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이들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는 그해 유월절이 되기 전에는 왜 예수님을 그토록 체포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는가?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실제로 실행에 옮기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민족을 위한다고 하는 명분을 들고 나온 대제사장 가야바의 발언 때문이었다. 가야바는 A.D.18~36년까지 대제사장 직무를 수행한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이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중대한 결단을 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떤 논리로 죄 없으신 예수님을 체포하고 죽이도록 공회를 설득하고 사형 법안을 통과시켰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논리였다. 

요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는 예수께서는 비록 죄가 없을지라도 예수께서 살아 있음으로 인하여 온 민족이 망하느니 그를 죽여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때 무슨 소요사태나 로마에 대항하여 무슨 독립전쟁이라도 일으킨 것인가?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도 응당 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살아생전에 단 한 번도 자신의 제자들더러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라고 하신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온 민족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대제사장의 논리는 사실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공회에서는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을 부인할 수 없으니, 예수님께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지 않도록 예수님을 죽여 없애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그분을 살려둔다면 로마인들이 와서 자기 민족의 땅을 빼앗고 민족을 빼앗아 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종교적인 메시야를 정치적인 메시야로 둔갑시켜 제거하려는 나쁜 의도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제사장의 말을 옳게 받아들여, 결국 예수님을 죽여 없애기로 결의한다. 하지만 그때 대제사장 가야바의 발언은 일종의 예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진짜로 한 사람이신 예수께서 인류를 대신하여 죽게 됨으로 유대 민족도 살릴 수 있었고, 이방으로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구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야바는 악한 계획을 말한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한편으로 보면 예언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지 말아야 한다. 잘못된 길을 가게 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지도자들의 위치에 있는 경우는 더욱더 그렇다. 

 

3.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을 왜 다른 공관복음서에서는 요한복음처럼 실명으로 그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는가?

  예수님에 대한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은 사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과는 조금 다르다. 첫째로, 향유 도유 사건 장소가 다르게 나온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이 사건의 장소를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마26:6, 막14:3).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이 장소를 '나사로의 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둘째,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름에 있어서도 차이가 난다. 즉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이 여인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나, 요한복음에서는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라고 명시적으로 나온다. 다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향유 부은 여인을 '한 여자'라고만 기록하고 있다(마26:7, 막14:3). 그런데 이 사건에서 예수께서는 이 여인이 행한 일에 대해서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녀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도 그 여인의 이름을 마태복음 기자와 마가복음 기자는 기록해 두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 이유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자들이 나사로와 마리아를 죽지 않게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기록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산헤드린 공회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까지 함께 죽이려고 모의했었기 때문이다(요12:10). 왜냐하면 나사로의 소생 기적 사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요12:11). 그렇다. 죽은 지 나흘되었던 나사로의 소생 기적 사건은 그만큼 그 당시에는 커다란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가복음 기자와 마태복음 기자가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할 때 쯤에는 유대인들의 기세가 여전히 등등해서 그 이름을 밝혔다가는 그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상황이 달랐다. 요한복음 기자가 이 사건을 기록할 때에는 벌써 A.D.90년 이후의 시점으로서 유대인들은 이미 온 세상에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었고 나라도 이미 망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기록한다 할지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기에, 사도 요한은 그 이름들을 명시한 것이다. 그렇다. 이처럼 성경 기록 하나하나에도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4.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다른 공관복음서의 기록과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 누군지를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라고 말이다(요12:3). 그런데 이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요한복음이 좀더 구체적이다. 첫째,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뜨려 그 기름을 붓되, 예수님의 머리에만 부은 것이 아니라, 발에까지 부었으며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까지 닦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요12:3). 둘째, 마리아가 향유를 깨뜨려 부은 것을 보고 책망했던 제자의 이름이 누군지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제자의 이름은 장차 예수님을 넘겨주려고 하던 '가룟 유다'였다(요12:4). 그렇다면 왜 요한복음에서는 더 분명하게 이 기사를 기록했던 것일까? 

  첫째,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까지 붓고 그분의 발을 자신의 머리털로 씻은 것은 그녀가 자신의 오빠를 살려준 것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그녀가 얼마나 깊이 간직하고 있었는지를 말해 주기 위함이다. 사실 여자의 머리카락은 자신의 인격을 상징하는데, 그녀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다는 것은 그녀가 얼마나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해 주며, 주님께 얼마나 자신을 낮추려 했었는지를 말해 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녀의 마음을 아주 귀하게 여기시고는 그녀를 높여 주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첫째로, 그녀가 한 일은 결코 낭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언급하시고, 낭비라고 말했던 가룟 유다를 책망하셨다. 그리고 둘째로 그녀의 행위는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해 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마리아도 아마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녀가 자신을 매우 낮추자 그녀를 높여 주시기 위해 그녀의 행동을 그렇게 해석하신 것 같다. 셋째로, 그녀가 한 일은 복음이 증거되는 모든 곳에서 기념하라고 하셨다. 이는 그녀의 감사의 마음과 자신을 낮춤이 우리 주 예수님을 아주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예수께서는 며칠 후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다. 

  둘째,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붓고 발을 씻겨 드리는 것을 보고 책망하고 있는 제자의 이름을 요한복음은 가룟 유다라고 밝힘으로서, 가룟 유다가 말한 것 곧 약 3백 데나리온어치나 되는 옥합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한 가룟 유다의 마음이 실은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는 도적으로서 돈궤에 들어온 돈을 빼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요12:6). 이는 돈 욕심 때문에 주님을 파는 가룟 유다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드리는 마리아의 대조를 통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간접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5. 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승리의 입성 때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는가?

  요한복음에서는 예루살렘 입성 때에 예수께서 타셨던 운송 수단이 바로 '어린 나귀(오나리온)'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요12:14).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오직 여기에 한 번 사용될 뿐이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이자 이스라엘의 왕이 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초라한 어린 나귀를 타셔야 했던 것일까? 정말 개선장군처럼 입성하는 왕의 행렬처럼 백마를 타고 오셔야 하지 않으셨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발이 땅에 닿을 듯한 어린 나귀를 일부러 타셨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 일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어린 나귀를 준비했어야 했다. 나중에야 그것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메시야 예언의 성취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스가랴 9:9의 말씀에, "시온의 딸,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높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었다. 또한 정치적인 메시야가 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도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유대 민족과 이방인들의 대속제물로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환호하는 군중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인가? 그 대답은 비교적 간단하다. 그의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이 어떤 은밀한 장소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를 위한 구속사건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로서 길이길이 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입성이 열광적인 입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이유를 공관복음서에서는 사실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누가복음에서는 열렬히 환영하는 인파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본 어떤 바리새인이 주님을 모시고 입성하는 제자들을 책망하기를 요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는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한다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19:40). 환영하는 무리들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 왜 그날 그렇게 많은 인파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다는 것인가? 그것은 나사로 소생 기적 사건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죽은 지 나흘되어서 몸이 썩어서 냄새가 나던 나사로를 주님께서 살려 주셨는데, 이 사건에 대해 예루살렘 사람들과 유월절을 지키러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정말 예수님을 자신들을 구원해 줄 정치적인 메시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할 십자가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알리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입성하신 것이다. 그때 상황이 어떠했는지 아는가? 그것은 당시 바리새인들이 모여서 한 말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요12:19)"

 

6. 나오며

  우리는 요한복음 11장 후반부에서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려고 모의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모습과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본다. 왜 이러한 차이가 생겨났을까? 그것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켜 내려는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시기심으로 비롯된 것이지만 결국 그것은 분노로 표출되었고 결국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을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르는데 사용되고 만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는 결국 사탄의 밥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자세와 각오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자신의 오빠를 죽음에서 살려주신 예수님에 대한 보은으로서 자신의 귀중한 옥합을 깨뜨려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린 마리아의 모습을 닮아가야 하리라고 본다. 뿐만 아니라 조그마한 돈 욕심에 자신의 스승을 팔아버린 가룟 유다의 전철을 우리는 결코 밟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마리아를 보면서 큰 감동을 받으신 것 같다. 그래서 그녀를 오히려 더 높여 주셨다. 그녀의 헌신을 더 아름답게 빛나게 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때 마리아에게서 겸손을 배우신 것이다. 그래서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다. 사람에게서 배우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의 옷깃을 여밀 뿐이다. 

 

2023년 02월 01일(수)

정병진목사

2022-10-09(주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희어진 곡식 추수에 대한 주님의 놀라운 말씀(요4:31~38)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uGBM3uDRZbo  [혹은 https://tv.naver.com/v/29823567 ]

 

1. 들어가며

  가을 들녘에는 산들거리는 코스모스와 함께 황금 물결이 뒤척인다. 다 익은 노오란 벼들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익은 벼들이 수확기가 되면 모두 다 희게 변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익은 곡식을 보면서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우리나라처럼 벼를 재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물이 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보리'와 '밀'을 재배한다. 보통 10월에서 11경에 파종하여, 4~5월경에 수확한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어느 때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면, 앞으로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된다고 했으니(요4:35), 그때는 12월 중순경으로 보인다. 그때는 보리가 땅에서 올라와 파릇파릇할 때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에게로 나아오는 사마리아성의 사람들을 보면서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셨다(요4:35). 그러므로 이것은 곡식의 추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영혼 추수에 관한 놀라운 말씀을 들려주신다. 대체 그 말씀은 어떤 말씀이었으며 추수는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리고 추수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어떠한 상을 내리시는가?

 

2. 예수께서 가지고 계셨던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란 대체 무엇인가?

  예수께서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가고자 하셨을 때에 예수께서는 특별히 사마리아로 통과하는 길을 일부러 선택하셨다(요4:3~4). 그리고 날이 저물 무렵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의 수가성 우물가에 잠시 쉬고 계셨다. 그때에 어떤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뜨러 그곳으로 왔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드실 것을 구하기 위해 그 성안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셨고 대화가 끝난 후 그녀는 성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 제자들은 이제 음식을 사와서 예수께 드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음식을 가지고 있다"(요4:32)고 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어리둥절하였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 음식을 가져다 드린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주님께서는 당신이 먹는 양식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셨던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이었다. 곧 그분은 이미 잡수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육신의 양식이 아니었다. 그분은 이미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던 목적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곧 그분의 양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때 어떤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한 것으로 이미 만족하고 배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영혼의 영역에서 말이다. 특히 그녀가 성안에 들어가서 외칠 때에 그녀로 인하여 무수한 사람들이 나아오는 것을 보시면서 벌써 만족해 하셨던 것이다. 

 

3. 희어진 곡식을 추수할 때가 되었다는 말은 대체 무슨 말인가?

  예수께서 사마리아 우물가에 앉아 있아 있었던 시기는 추수 때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들녘에는 이제 보리와 밀이 갓 올라와 자라고 있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12월경이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여인이 자기 동네에 들어가 예수님을 전파함으로, 예수님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나아오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시면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아직 넉 달이 더 있어야 추수할 때가 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너희들의 눈을 들어 보라. 그리고 그 밭을 보라. 그것들이 희어져서 이미 추수할 때가 되었다"(요4:35). 고로 여기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추수란 '곡식'의 추수가 아니라, '영혼'의 추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벌써 사마리아성 사람들은 곡식이 다 익어서 희어 있었다. 추수 때가 다 되어 있었던 것이다. 

 

4. 추수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이어서 주님께서는 추수에 관한 놀라운 가르침들을 제자들에게 들려주셨다. 그것은 크게 2가지다(요4:36~38). 그것은 첫째, 영혼의 추수는 뿌리는 이가 있고 거두는 이가 각각 따로 있어 사역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곡식의 추수는 보통 뿌리는 이가 거두게 된다. 그러나 곡식을 거두게 될 때에는 빨리 한꺼번에 수확해야 하기 때문에 일꾼을 고용해서 수확한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한 사람은 뿌리지만 다른 사람이 거두게 된다'고 말씀하셨다(37절). 즉 영혼의 추수는 말씀의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있고 또한 그것을 수확하는 사람이 각각 따로 있다는 것이다. 둘째, 수확하는 이는 자신이 뿌리는 수고를 하지 않았어도 자신이 수확하는 자가 되면 그것을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38절).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드릴 음식을 사오려고 사마리아성 안으로 들어갔었다. 그리고 음식을 사왔을 뿐이다. 그런데 그들이 성에서 나오고 있었을 때에 그 성안에 살던 사람들이 제자들의 뒤를 따라 예수님께 나아오고 있었다. 사실 제자들은 그 누구도 성 사람들에게 예수께 나아오도록 말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이미 예수께서 어떤 사마리아 여인을 통하여 자신이 메시야라는 것을 알려 주심으로 일어난 것이다. 그녀는 기쁜 소식을 성안에 들어가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성 사람들에게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 것은 먼저는 예수님이고 또한 사마리아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 성 사람들이 제자들의 뒤를 이어서 주님께 나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씨 뿌리는 자가 따로 있고 거두는 자가 각각 따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거두는 자는 자신이 씨 뿌리는 수고를 아니하였어도 그것을 거두게 된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다. 

 

5. 왜 예수께서는 어떤 사마리아 여인에게 씨를 뿌리셨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누가 씨를 뿌리는 자인지를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께서 기쁨의 좋은 소식 곧 그들이 그토록 바라고 소망하던 메시야가 왔다는 소식을 들려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그 성 사람들 중에서 물을 뜨러 온 여인에게 가장 먼저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는가? 그것은 그녀가 그 성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많이 익어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성 사람들 모두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녀만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그녀의 굴곡진 인생에서 어느 정도 해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녀는 남편이 다섯 명이나 있었던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잘못 알려진 바 창녀는 아니었다. 창녀는 결코 남편을 다섯이나 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남편이란 정식으로 결혼한 여자에게 붙일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으며 현재 살고 있는 남자는 그녀의 남편이 아니었던 것인가? 그것에는 2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그녀의 남편이 일찍 죽었기에 다시 결혼하여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을 가능성이다. 이런 경우라면 그녀는 상당히 동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남편 잡아먹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또 한 경우는 그녀의 다섯 남편들이 그녀에게 이혼 증서를 주고 이혼했을 경우다. 무엇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남편들이 그녀를 버린 것이다. 이런 경우에 그녀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참 안 됐다"는 말을 듣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마도 후자인 것 같다.

  그러므로 사실 곡식을 익게 만드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사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배 처소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남유다 땅인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늘 자기들 북쪽의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 수확해 놓은 많은 식량을 빼앗기고 살았으며, 자신의 자녀들을 노예로 빼앗기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꿋꿋이 신앙을 지켜왔다. 그래서 자기들도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B.C.322년 자기 동네의 산 곧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웠다. 하지만 약 200년이 지난 B.C.129년에 유대인들에 의해 그 성전이 헐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먼저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과 섞여 사는 사람들이라고 따돌림을 받고 있었고, 동시에 이민족에게는 침입을 받아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모든 상황에서 그들은 간절히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들의 신앙을 인정해 주고 더 이상 고통받지 않는 세상에서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경전은 오직 모세오경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세오경의 성경 기록 가운데 신명기 18장에 나오는 그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신18:15에 나온다. 그것은 바로 모세의 예언과도 같은 말씀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들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어다." 그러므로 그녀는 예수께서 자신에게 생수를 주실 수 있다고 했을 때부터 뭔가 좀 다른 분이 와 있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또한 자신의 과거를 모두 다 알고 있는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그분을 향하여 "당신은 선지자이십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분이 진정 모세가 예언한 바로 메시야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예배의 처소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할 때에는 그리심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라 영 안에서 진리로 예배하면 된다고 답해 주셨다. 그러자 그녀는 말했다. "우리에게 메시야가 오면 그분이 모든 것을 다 알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네가 말하고 있는 이가 바로 그이니라"고 하셨다. 그러자 그녀는 물동이도 버려둔 채 성안으로 들어가서,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고 있던 메시야가 나타났다고 전파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그녀는 그 성 사람들 중에서 첫 번째 추수의 열매 곧 '첫 열매'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 성 사람들은 모진 세파 속에서 모두 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최종 주자로서 예수께서 오셔서 기쁨의 좋은 씨를 뿌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 성 사람들에게 모세도 역시 씨 뿌리는 자에 해당하며, 하나님이 안배하신 모진 세파도 역시 씨 뿌리는 자이며, 예수님이야말로 그들에게 씨 뿌리는 최종 주자였던 것이다. 

 

6. 주님께서 가르쳐 준 영혼의 추수의 비밀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영혼 추수의 비밀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혼의 추수에는 씨 뿌리는 자가 있고 거두는 자가 각각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씨 뿌리는 자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자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진 세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씨 뿌리는 자는 오직 '하나님'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천국 말씀을 씨 뿌리러 오신 자임을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씨를 뿌리는 자는 우리들이 아닌 것이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때로는 어떤 특별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영혼을 추수하려 할 때, 씨 뿌리는 수고까지 우리가 다 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 일은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이다.

  그때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뜨러 온 장소는 어디였는가? 그곳은 '야곱의 우물'이었다. 그런데 그곳은 깊어서 물을 긷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이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야곱도 굴곡진 인생 속에서 결국 하나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눈코 뜰 새 없이 20년을 보내었고 추위와 더위를 이겨내야 했다. 그렇게 간신히 처자식을 얻게 되었지만, 그 집을 나온 뒤 얼마 못가서 이제는 형이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자신을 죽이러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러자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저절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했다.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외삼촌과 형을 안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제 오늘날 다른 영혼을 추수할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씨 뿌리는 수고는 내가 할 것이니, 너희는 다만 거두는 수고만 하거라"라고 말이다. 

 

7. 희어진 곡식을 추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희어진 곡식을 우리가 추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한 일에는 2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추수에 관하여 주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이다. 다시 말해, 씨 뿌리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고, 우리는 다만 거둬들이는 수고만 해도 된다는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요4:37~38에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요4:37~38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씨뿌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수고)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파송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수고한 채 있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수고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참여한 채 있다)

  그렇다. 영혼 추수를 위해서 우리가 수고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다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추수하는 자로 선택하셨으며, 우리가 씨 뿌리는 수고를 아니했더라도 그것을 거둬들이는 자로 선택하여 주심에 감사하면서 주님 말씀에 순종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동안 여러 차례 씨 뿌려 놓으신 수고에 동참하면 되는 것이다. 씨 뿌리는 영역은 주님께서 모진 세파를 그 사람에게 안배하여 그리고 당신이 특별히 세운 종들을 통하여, 그리고 성경 말씀을 통하여 지금도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둘째는, 다만 우리는 그 사람이 익은 곡식인지를 확인하여 천국 창고에 들여보내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사실 익지 않은 곡식을 우리가 추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주님께서 그러한 곡식이 익게 하시도록 기다려야 한다. 곡식이 자라고 익는 모든 과정은 사실 다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이다. 보리와 밀이 사실 토실토실한 알맹이가 되려면 그들이 추운 영하의 겨울을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벼가 토실토실한 알맹이를 내려면 역시 30도가 넘는 날들을 무려 30일이나 통과해야 한다. 그렇다. 씨 뿌리는 일은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다만 그 곡식이 다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를 확인해 보고 익었다면 그 영혼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잘 안내해 주면 되는 것이다. 

 

8. 곡식이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한 영혼이 익은 곡식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왜냐하면 그에게 이 시대 마지막에 전해 줄 복음 곧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해 보면 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기는 마지막 시기로서 알곡을 천국 창고에 들여보내고,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을 자를 만드는 때이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에서 전파하고 있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해 보면 그들이 익은 곡식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서 천국복음을 들었는데도, "무슨? 회개? 예수만 믿으면 되었지"라고 말한다면 그는 아직 익은 곡식이 아닌 것이다. 그때에는 속으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아, 이 사람은 이제 갓 올라온 보리로군". 그렇다. 아직 파릇파릇한 새싹인데 어찌 그 보리를 추수할 수 있겠는가? 주님께서 익게 해야 한다. 그런데 또 누군가에게 "이제는 천국을 준비할 때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는 예수 믿는 자라도 못 들어갈 수 있으며, 천국에서 우리가 받을 신분도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천국을 준비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는데, 그 사람이 우리의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이고 그것을 더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속으로 말해야 한다. "아, 이 사람은 다 익은 곡식이로구나"하고 말이다. 이처럼 그 사람이 다 익은 곡식인지 아닌지 우리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감사한 일인가?

 

9. 영혼을 추수하는 자가 받게 될 상은 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영혼을 추수하는 일을 감당하는 자가 받게 될 상은 대체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이것을 일부러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3가지라고 하셨다. 첫째는 추수하는 자는 품삯(임금)을 이미 받고 있는 것이다고 말씀하셨다(요4:36a). 이 보상은 이 땅에서 받는 품삯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 일을 시작할 때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하늘나라에 미리 저장하는 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을 추수하는 자는 미리 장만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에는 '천국 집'이 있고 '면류관'이 있고 '보좌 자리'가 있다. 그리고 둘째는 영생 곧 다음 시대에 누릴 열매를 우리가 모으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4:36b). 우리는 추수를 통하여 천국의 열매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을 보장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벌써 이 땅에서부터 추수를 통해 천국에서 받을 나의 열매를 모으고 있다. 셋째는 이 땅에서부터 우리가 받을 복으로서 추수하는 기쁨이 있다고 말씀하셨다(요4:36c). 사실 추수하는 기쁨은 추수하는 자만이 알 수 있는 놀라운 기쁨이다. 이러한 기쁨이 우리에게도 충만하기를 바란다. 

 

10. 나오며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되면 과연 어떤 복음이 전파되고 있을까? 주님께서는 그것을 분명하게 제자들에게 말씀해주셨다. 그것은 바로 '천국복음'이다.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거주지) 안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그렇다. 천국복음이야말로 이 마지막 시대에 전파될 최종적인 복음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복음을 우리가 전파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꿈을 꾸어야 한다. 우리에게 주님께서 많은 익은 곡식을 붙여 주실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수많은 영혼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파하여 천국 창고에 들여보내는 일을 해야 한다. 아니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사실 그 일을 행하려고 주님이 오시지 않았던가? "내 양식은 나를 보냈던 분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지 않았던가?(요4:34) 우리도 이제는 꿈을 꾸자. 우리를 통하여 수많은 영혼들이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꿈을 말이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는 영혼들이 그 나라에서 받을 상을 준비하는 것을 말이다. 이런 자들에게 하늘의 상이 날마다 주어질 것이며, 이런 자들이 결국에 영생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할렐루야!

 

 

2020년 10월 09일(주일)

정병진목사

 

2022-09-28(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4) 세례요한에 대한 재평가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의 증언(요3:22~36)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Oz78Yh09CfQ  [혹은 https://tv.naver.com/v/29537866 ]

 

1. 들어가며

  사람은 자신만의 선입관을 가질 수 있다. 이전에 들어왔던 것이 있고, 그것이 점차 고정화될 때에 그것은 이내 고정관념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볼 때에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아니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결국 사람에 대한 평가를 잘못 내리는데 일조한다는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세례 요한에 대한 평가를 다시 들여다 보려고 한다. 세례 요한은 정말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인가? 아니면, 그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천국에서 큰 자가 된 사람인가? 그리고 이어서 우리는 예수님의 탁월성 및 그분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볼 것인데, 예수님에 대한 반응에 따라 어떤 사람은 영생을 얻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 안에 머물기도 한다는 것을 함께 살펴볼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반응이 중요한 것이다. 

 

2.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왜 투덜대기 시작했으며 이때 세례 요한은 그것을 어떻게 해소시켰는가?

  어느 날이었다. 한 유대인이 찾아와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정결예식 곧 세례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가 논쟁이 붙었다(요3:24~25). 그러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그 문제를 자기의 스승에게 가서 물어보기로 했다. 그것은 스승인 세례 요한이 증언했던 이 곧 예수님께서 자기들과 떨어진 곳에서 세례를 주고 있는데, 사람들이 다 그리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괜찮은 것이냐고 물은 것이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은 만약 그것이 하늘에서 주어진 채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진행되고 있는 일이라고 말하였다(요3:27). 그리고 자신은 그리스도가 결코 아니며 또한 그분 앞에서 파송받은 채 있는 선구자라는 것을 증언해 줄 자가 바로 자기의 제자들이라고 말했다(요3:28). 그리고 자신은 예수님 때문에 기뻐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가는 것은 신부가 신랑을 찾아가는 것이므로, 그것을 보고 있는 자신은 신랑의 친구로서 매우 기쁘다고 하였던 것이다(요3:29). 그래서 그분은 더욱 더 커지고 그분의 사역은 증가되어야 하겠고 자신은 더 작아지고 자신의 사역은 감소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요3:30).

 

3. 요한복음에서는 세례요한을 어떤 사람이라고 언급하고 있는가?

  만약 우리가 요한복음에 나와있는 세례 요한에 대한 기사만을 읽는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세례 요한을 추켜세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과 관련지어서 자신이 누군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사명대로 자신의 일에 충성했던 이이자 겸손한 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은 '빛'이 아니라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고 하였으며(요1:6~9), 자신은 선지자 이사야의 말처럼 주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한 자라고 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은 그분의 신발끈을 풀기에도 합당하지 않는 자라고 말했으며(요1:23~27), 자신의 존재목적은 그리스도를 이 땅에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했다(요1:31). 그렇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이며,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았던 자이다. 예수님은 먼저 계신 이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주는 이라는 것을 세례 요한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땅에서 난 이로써 땅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요3:31). 그러므로 그는 자신은 점점 더 약해져야 하고 이제 예수님께서 더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4. 오늘날 세례 요한을 저평가하고 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런데 오늘날 교회 가운데 세례 요한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진짜로 세례 요한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 보다도 더 작은 자로 있는가? 나중에 천국에 가 보면 다 알겠지만 천국에서 세례 요한은 24장로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왜 세례 요한은 실제보다 더 작은 자로 평가받고 있는가? 그것은 아마도 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는 기사들 중에서 마태복음 11장과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죽음직전의 사건과 예수님의 평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11장이나 혹은 누가복음 7장에 의하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 때문에 실족한 사람처럼 나오고, 그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잘못 해석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1장에 의하면, 세례 요한이 죽기 전에 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내리신 평가가 나온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평가를 믿어야 한다. 그런데 이 평가에 대한 해석이 아주 분분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과연 세례 요한에게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셨는가? 그것은 크게 3가지다. 첫째, 세례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보다더 더 나은(뛰어난) 자라고 하셨다는 것이다(마11:9). 왜 그런가? 세례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 중의 마지막 주자로서, 메시야(그리스도)가 바로 이분이라고 소개했던 최종 주자였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고만 예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그 메시야가 바로 이분입니다"라고 소개한 마지막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 중에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던 것이다. 둘째,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최고라고 하셨다(마11:11a).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기 전에 먼저 그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가 세례 요한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일으켜진 채 없다고 하셨다(마11:11). 고로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최고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최고'라는 의미는 무슨 뜻인가? 그것은 죄인으로서 여인으로부터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 요한이 최고라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첫째로, 그는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따라 사가랴와 엘리샤벳 사이에 잉태되어 태어났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는 모태로부터 성령으로 충만케 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셋째로, 그는 어려서 광야로 보내져서 금식과 기도로 단련되고 영성으로 무장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려 30년동안 그는 광야에서 지냈다. 넷째로, 그가 30세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메시야의 오실 길을 준비했던 자였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그는 제사장과 선지자로서 예수님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예수님에게 안수를 통해 인류의 죄를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게 했기 때문이다. 여섯째로, 그는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셋째, 세례 요한이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는 예수님의 평가다(요11:11b). 이 말씀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아주 저급하게 평가하고 있다. 그를 천국에서 진짜로 가장 작은 자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5. 세례 요한이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세례 요한이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그것은 보통 2가지로 해석되어 왔다. 첫째는 세례 요한이 마지막에 가서 실족했기 때문에 천국에서 진짜로 가장 작은 자로 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니까 천국에 있는 성도들은 중에 실제로 세례 요한보다 더 작은 자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는 세례 요한이 마지막에 죽기 전에 실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자신의 제자를 예수님에게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질문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마11:3).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례 요한이 질문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지를 모르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요 자신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파송받아 온 자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몰라서 질문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는데 돌아보지 아니하는 것을 조금 섭섭해서 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 하나 잘못했다고 세례 요한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로 전락해버린 것일까? 둘째는, 세례 요한은 구약시대의 인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받은 마지막 주자였고, 그후부터는 구원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받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그가 가장 작은 자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과 가까이 있는가를 기준으로 본다면, 세례요한은 예수님 밖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구원받은 성도는 자기 안에 성령으로서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는 더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구약의 성도나 신약의 성도나 천국에 가면 하나님의 백성이기도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구약의 성도라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을 얻고, 신약의 성도라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는 것은 아닌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늦게 태어난 게 더 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니다. 천국에 들어가 보라. 구약의 성도라고 해서 신약의 성도보다 못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 대한 가장 바른 해석은 무엇인가?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는 이 말씀을 우리가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로, 이 말씀이 헬라어 원문에서는 어떻게 나와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천국에서 작은 자가 되거나 큰 자가 되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첫째로,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이렇다. "그런데 하늘들의 왕국 안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그이보다는 더 크다"이다. 먼저는 이 말씀이 앞 문장을 뒤집는 역접의 문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러나'가 아니라 '그런데'라고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앞의 정의도 맞는 것이지만 그런데' 다른 말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준이 '천국 안에서'라고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천국 안에 있는 성도들이라면 아직 이 세상에 살아있는 세례 요한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인생을 마칠 때 어떤 사람이 될른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가 그만 실족해버리면(걸려 미끄러지면) 그가 쌓아놓은 모든 것이 결국 물거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 안에 들어가 있는 성도들은 이 땅에 지금 살고 있는 어떤 성도들보다도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큰 자가 되고 작은 자가 되는 기준은 무엇인가? 즉 천국에서 받을 지위는 어떤 이유로 변동이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자. 사실 천국에서의 지위는 그 사람이 이 땅에서 행한 것으로 인해 결정되는데, 혹시 실수하여 잘못을 범했다고 할지라도 이미 하늘에 올라가 있는 것들은 결코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늘이 이미 쌓아둔 것이 허물어지는 유일한 경우가 있기는 있는데, 그것은 그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그 사람이 일평생 수고하여 쌓아둔 하늘의 것들은 절대 없어지거나 허물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일평생 모태로부터 성령이 충만하여 30년을 준비하여 예수님을 메시야로 드러내었고 소개한 일과 예수님이 세례받으러 오실 때까지 회개를 외치며 주님이 오실 길을 준비했던 모든 것은 다 하늘에 남아 있다. 마지막에 가서 그의 섭섭한 말 한 마디로 인해 그것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로 고스란히 하늘에 남아 있는 것이다. 사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예수께서 메시야인지 몰라서 "당신이 오실 그이입니까"라고 질문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옥에 갇혀 있는데도 자신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예수님에 대해 조금 섭섭한 마음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렇다. 세례 요한에 대한 평가는 그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는 미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리자면 그는 선지자들의 중의 최고이며, 여자가 낳은 자 곧 죄인이 낳은 자 중에 최고였지만, 아직 그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천국의 기준으로 볼 때 그는 아직 그들보다는 작은 자였던 것이다. 

 

6. 세례 요한에 대한 사도 요한의 평가는 어떠한가?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위로부터 곧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계시는 이'이신 예수님은 만물 위에 계신 분이시지만, 땅에서부터 있는 이이자 땅에 속해 있는 이인 세례 요한은 땅에서 말하고 있는 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말 자체부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그분이 스스로 지어내서 하신 말씀이 없다. 왜냐하면 그분이 하신 말씀은 당신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셨던 아버지께서 그에게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기에(요12:49~50), 그 말을 그대로 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아요 나를 보냈던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14:24)"이라고 하셨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의 레마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고 계셨던 것이다(요3:34).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에는 실수가 없다. 즉 예수님의 말씀에는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으며, 불필요한 말씀도 하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달랐다. 그는 땅에서 난 자이기 때문에 말에 실수가 있을 수 있고 섭섭함을 표현하는 말도 간혹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얼마나 그 사람 위에 부어주셨는가 하는 것에 달려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는 성령을 한량 없이 부어주셨지만, 세례 요한에게는 그렇게까지 부어주지는 않으셨던 것이다(요3:34).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는 심판의 권한 마저 주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셨지만 직접 사람이 되어 육체를 입으셨기 때문이요, 육신을 입어 인류의 죄를 속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차 우주의 종말이 찾아올 때,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실 이는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요5:22,27). 그리고 그분이 죽고 부활하실 때에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고(마28:18), 사망의 음부의 열쇠마저 가지셨다(계1:17~18). 

 

7. 사람이 영생을 얻기도 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떨어지기도 하는 것은 대체 무슨 이유에서인가?

  그렇다면 사람이 최종적으로 영생을 얻기도 하고 혹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머물러 있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그것을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으며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이다(요3:36). 즉 하나님의 아들을 계속해서 믿고 있는 자는 결국 영생에 이른다는 것이다. 참고로, 여기서 '영생'이란 '다음 시대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사람이 죽고 났을 때에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서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살고 있을 때에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우리 죄인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믿고 그분의 음성을 순종하며 산다면, 그는 틀림없이 죽어서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즉 다음 시대에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 땅에 살면서도 아들을 믿기를 거부하며, 그분의 음성에 불순종하며 산다면,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을 뿌리친 것이 되어 자신이 지은 죄의 댓가를 자신이 치러야 할 것이다. 또한 이전부터 이미 운명 지워있는 하나님의 진노를 마침내 받고 말 것이다. 즉 그런 자 위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계속해서 머물러 있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가 살아있을 때에 주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아야 하며, 그분을 믿어야 한다. 그것이 결국 한 사람을 영생과 하나님의 진노로 나누기 때문이다. 

 

8. 나오며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여전히 세례 요한에 대해서 아주 얕은 평가를 하고 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이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다. 세례 요한이 살아있는 당시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 그는 아직 죽지 않아서 그가 어떤 사람으로 천국에 들어갈 지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천국 안에 있는 성도들에 비해서 그는 아주 작은 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의 최종적인 상태는 우리가 죽을 때에 결정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는 날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뤄가야 한다. 죽기 전에 우리가 어떤 말을 하며 어떠한 믿음으로 죽게 될른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주인공이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쌓아놓은 모든 상을 다 얻게 될 것이다. 그러한 상에는 천국 집도 있을 것이고, 면류관도 있을 것이고,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지위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전부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준비하는 것이지, 우리가 하지 않은 일들로 인해 천국에 상이 준비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있음으로 인하여 감사해야 한다. 아직도 천국에서 받을 영원한 상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은 오직 예수님을 믿은 자가 얼마나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또한 충성했는가에 달려 있다. 그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한다거나 그분의 음성을 불순종하여 날마다 죄짓고 산다면 그는 죽을 때에 결코 영생을 보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아들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시대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면 즉시 회개하기를 바란다. 성령께서 어떤 것을 하라고 지시하면 즉시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천국에서 어떤 자가 되는지를 결정해주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천국에 들어갈 때에 과연 나는 칭찬을 받고 상급받는 자가 될 것인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떨어질 것인가를 결정해 주기 때문이다. 

 

 

2022년 09월 28일(수)

정병진목사

 

요한복음에서 서문(1:1~18)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선언하는 일종의 선포문과도 같다. 서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성을 공유하시는 하나님으로 나온다. 그분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요,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빛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께서 죄많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으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 땅에 자기자신의 처소를 얻으셨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성막으로 오신 예수님에게 나아가야 한다. 그때에 우리는 속죄의 은총과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다. 이 놀라운 신비가 오늘 말씀에 가득하다.

 

2022-06-29(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06)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에 대한 사도 요한의 위대한 선언(02)(요1:1~18)_2022-06-29(수)

https://youtu.be/kn22nybEroA   [혹은 https://tv.naver.com/v/27973893 ]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의 서문(요1:1~18)에는 어떤 말씀이 기록되어 있을까? 학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요한복음의 서문은 크게 2가지 것을 말씀하고 있다고 하겠다. 하나는 예수께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분은 육체를 입고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요한복음 서문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짧게 줄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의 서문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기록해야만 했던 것일까? 거기에는 장차 요한복음을 읽게 될 독자들이 어떤 영향으로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서다. 그것은 2가지였는데, 하나는 유대인에 의한 핍박이었고 또 하나는 영지주의자들에 의한 미혹이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총체적인 답변을 서문에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요한복음 서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지난 주에는 요한복음 1:1~3의 말씀을 통하여, '말씀(로고스)'의 선재성과 영원성 그리고 창조성을 살펴보았고, 그분이 곧 예수님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서 예수께서 가지고 계신 신성한 본성으로서 '생명'과 '빛'에 대해 다뤄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분의 성육신이 우리들에게 가져다 주는 축복으로서 '은혜'와 '진리(실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이렇듯 예수님에 대한 2가지 본성과 2가지 혜택은 요한복음을 읽는 모든 독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오늘도 제공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 

 

2.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서문에서 '말씀(로고스)'에 대해서 무엇을 선언하고 있는가?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서문의 첫 문장에서 의도적으로 '말씀(로고스)'에 대한 선언으로 요한복음을 시작한다. 이는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한 선포를 통해 유대인들의 갖은 핍박에 못 이겨 다시 유대교로 되돌아가려는 자들에게 대하여 올바른 신앙관을 제시하기 위함인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은 '여호와'라고 자신이 이름을 계시한 바로 그분 뿐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서 믿는 이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아버지와 자신은 하나'라는 말씀(요10:30)과 하나님을 가리켜 자신의 친아버지로 언급한 것(요5:18)에 대해서 예수께서 신성 모독죄를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어찌 하나님이 두 분, 혹은 세 분이실 수가 있겠느냐고 반문하였고 또한 어찌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실 수 있겠느냐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있던 이방지역에 사는 유대인 성도들은 이제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출입할 수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을 추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선재하신 말씀으로 하나님과 신성을 공유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알려 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서문의 첫 부분(1~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선재하신 말씀으로서 하나님 자신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3. 말씀(로고스)이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말씀이 하나님이신 이유를 1~3절의 말씀을 통하여 이렇게 말했다. 첫째, 태초에(시작 안에) 말씀이 있어 왔는데,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혹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에게서) 그리고 하나님으로 있어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1~2절). 즉 처음부터 말씀은 하나님으로 있어 왔던 것이라고 말했다. 둘째, 모든 것들(만물)은 말씀을 통하여 존재하게 되었으며, 말씀이 없이는 하나도 존재하게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3절). 고로 말씀은 만물의 창조주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의 통로요 대리자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사도 요한은 말씀이 곧 아버지라고 말하지는 않았다라는 것이다. 말씀이 아버지와는 구별되지만 하나님으로서 같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의 서문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이렇다.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또한 이 말씀은 모든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통로였는데, 이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것이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육신을 입기 전에 아들로 존재하고 있었는가 아니면 다른 하나님으로 존재하고 있었는가? 사도 요한은 분명히 말한다. 예수께서 성육신 하기 전에는 아들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아직 육신을 입지 않았던 그분을 누구냐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그분은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곧 홀로 아버지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18절). 그러므로 하나님은 태초부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교리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후에야 비로소 만들어질 수 있는 교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예수께서 성육신 하기 전에는 어떻게 계셨는가? 그분은 말씀으로 계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품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계신 것이다. 

 

4. 왜 사도 요한은 성육신 하기 이전의 예수님을 굳이 '말씀(로고스)'이라고 표현한 것인가?

  왜 사도 요한은 성육신 하기 이전의 예수님을 굳이 '로고스'('말씀')라고 표현하였던 것인가? 사실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인격체로 나타나기 이전에 그분은 말씀으로 있었다. 말씀이 인격을 입은 후 예수님은 사람이 되시어 비로소 아들이라는 존재로 탄생하셨다. 이러한 말씀의 성육신은 사실 서양 철학에서는 결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서양 철학에서도 우주 만물의 창조의 원리를 말한다. 그것을 그들도 '로고스(말씀)'라고 말한다. 하지만 말씀이 성육신하심으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요한이 '말씀'이라는 개념을 서양 철학에서 빌려왔다는 표현은 사실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도 요한은 선재하신 예수님을 가리켜 굳이 '말씀(로고스)'이라고 표현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요한이 유대인들을 생각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으로 창조되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창1:3). 특히 시편 기자는 하늘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지은 바 되었으며, 그것들의 만상(모든 군대=천사들)은 그분의 입 기운(루아흐=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또한 유대인들은 잠언 8장을 통하여, 지혜라는 것이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가지셨으며, 만세 전과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지혜가 세움을 입었고, 이미 났으며 또한 지혜가 하나님의 곁에서 창조자(장인)가 되어 매일 그분의 기뻐하시는 바가 되었다(잠8:22~31)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요한복음의 서문에 나오는 말씀(로고스)이 곧 창조 사역을 행하셨던 하나님과 같고,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이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는 표현과 유사하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만물의 창조의 대리인으로서 '말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5. 말씀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신성한 본질 2가지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말씀 안에는 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가? 사도 요한은 말씀 안에는 '생명'이 들어 있다고 언급하였으며, 이 생명이 세상 안으로 들어올 때에는 사람들에게 '빛'으로 들어오는 것이라고 했다(4~5절). 즉 말씀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신성한 본질은 곧 '생명'이요 '빛'인 것이다. 

  우선, 말씀 안에 들어 있는 '생명'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생명'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조에'라는 것인데, 이 생명은 '아버지의 생명'이라는 점에서 아버지만 가지고 있는 생명을 가리키며(요5:26), 이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점에서 계속해서 지속되는 생명을 가리키고(요3:16), 이 생명은 '부활 생명'이라는 점에서 사망이 파괴할 수 없는 생명을 가리킨다(요11:25~26). 사실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아들 되심으로 인하여 이 생명을 그에게 주어 있게 하셨다(요5:26). 그리고 예수께서 죽으신 후에는 본인이 생명 주는 영이 되심으로(고전15:45),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그 생명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믿는 이들에게 성령께서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심으로 사람들도 그 생명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영적으로 보면, 이 생명이 사람들에게 분배됨으로 인하여 사람은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생명은 창조된 창조물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생명은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요14:6).

  이어 사도 요한은 이 생명이 이 세상에 나타날 때에는 '빛'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이때 빛으로 나타난 분을 우리는 '예수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참고로 이때 물로 나타나는 분을 우리는 '성령'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요한은 세상에 들어오는 그 빛을 가리켜 '참 빛'이라고 했다(요1:9). 그것도 불충분한 빛이 아니라 완전한 빛, 참 빛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헬라어로 '참'(9절)이라는 헬라어 단어('알레디노스')는 거짓과 반대되는 개념('알레테스')으로서의 참 빛이 아니라, 뭔가 부족한 것, 불완전한 것, 부분적인 것에 대한 완전함으로서 참을 의미하는 단어('알레디노스')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말씀 안에 있는 생명과 그 빛의 관계를 이렇게 언급하였다.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어 왔다.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으로 있어 왔다. 그리고 그 빛이 어둠 안에 비추고 있다. 그러나 그 어둠은 그것을 이해하지(따라잡지, 이겨보지) 못하였다(요1:4~5). 그리고 "참 빛이 있어 왔다. 이런 그 빛은 세상 안으로 들어오고 있으면서 지금도 각 사람을 비추고 있다"(요1:9)고 했다. 그렇다. 보이지 않는 생명이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올 때 그것은 빛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리하여 어둠을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어둠'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빛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모든 이 땅의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빛으로 나아와서 빛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므로 빛으로 나아오기를 싫어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날까 두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자는 어찌하든지 빛으로 나아와야 한다(요3:19~21).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빛은 예수님 그 자체였다. 그러므로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자는 그 빛을 믿고 그 빛을 영접해야 한다. 그래야 빛의 아들이 될 수 있으며, 어둠 가운데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요12:35~36).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리켜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요8:12).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할 것이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 사실 어둠은 빛과 결코 서로 공존할 수는 없다. 그래서 어둠은 빛이 오면 그냥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둠은 결코 빛을 이겨보지 못할 것이다.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또한 요한은 생명이 물로도 나타날 수도 있는데, 그것을 가리켜 '성령'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생수(생명의 물)"라는 표현이나(요4:14), '생수의 강'이라는 표현(요7:38)이 곧 성령을 가리키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과거 창세기 강해(172강)를 통해서도 살펴보았지만,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물들 안에 '빛'과 '물'은 포함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빛도 결코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지구 안으로 들어온 것이요, 물도 역시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와서 지구 안으로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에 나오는 것 가운데 창조되지 아니한 2가지는 '빛'과 '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성령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긴 했어도 그분들을 결코 피조물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6. 세례 요한은 누구이며 어떤 목적으로 이 땅에 파송받아 온 것인가?

  사도 요한은 말한다.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받은 채 있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가 바로 '세례 요한'이라는 바로 그 선지자다(6절). 그는 빛이 아니며 그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였다(7~8절). 그럼, 그가 이 땅에 파송받아 온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빛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7절). 그래서 그는 광야의 소리가 되어서 외쳤다. "이 분은 내가 말했던 바로 그분입니다. 이 분은 비록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신 이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나보다 먼저 있어 왔기 때문입니다(15절)" 그랬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는 예수님보다 앞선 자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육신을 입고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7. 참 빛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런데 이 세상에 생명을 주려고 참 빛으로 그분이 오신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속한 땅인 유대 땅에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속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오셨다. 하지만 그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여 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더 이상 혈통과 육정과 사람(남자)의 뜻으로서가 아니라, 자기를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식들이 되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자식들'이란 출생으로 통한 자식을 가리키는 단어 '테크논(children)'이 쓰이고 있다. 참고로 이 단어는 출생을 통한 자녀 뿐만 아니라 양자로 삼아서 자식 삼는 단어로서 '휘오스(son)'가 쓰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생각했다.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으로서 하나님의 자식이 될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혈통을 가진 자들이었어도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배척을 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자식들을 얻는 방법으로 더 이상 혈통을 따르지 않겠다고 하셨다. 또한 육체의 뜻 곧 남여의 결합으로 자식들을 얻지도 않을 것이며, 사람(남자)의 씨를 통해서도 자식을 얻지 않겠다고 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식만을 얻겠다고 하신 것이다(12~13절).

 

8. 이천 년 전에 왜 말씀은 육체를 입고 사람이 되셨는가?

  드디어 2천 년 전에 하나님으로 계셨던 말씀이 육신을 입으셨다. 말씀이 육체가 되신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성육신'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이 땅에 생겼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분이 이 땅에 장막을 치셨다고 했다(14절). 여기서 '장막(성막)'이란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처소를 가리킨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당신 자신의 거주처로서 성육신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요14:9). 그리고 "나를 믿는 것은 나를 보내셨던 이를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요12:44). 예수 안에 아버지가 거하시게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있는 독생자와 같은 영광을 나타내게 되신 것이다(14절).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말씀이 육신을 입으심으로 그분을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2가지 은총이 베풀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육신하신 아들을 통하여 모든 인류는 이제 새롭고 놀라운 혜택을 입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은혜'와 '진리'(실제)가 인간에게 제공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14~18절). 여기서 '은혜'('카리스')라는 말은 값없이 제공되는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진리'('알레데이아')는 거짓에 대하여 참이라는 뜻과 허상과 가짜에 대해서 진짜라는 의미의 '실제'라는 뜻, 둘 다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당시 모세를 통해 율법을 받았다. 그런데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이들에게 제공된다(17절). 왜냐하면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은 '공의'와 '모형'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공된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은혜와 진리는 값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어지게 되었으며,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실제로 보게 해 주는 실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태초 이래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를 보고 살아남을 자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볼 수 있는 형태로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18절).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신 것이다(18절). 그러므로 우리는 신성만 갖고 계신 아버지되신 하나님을 영원히 볼 수 없겠지만 인성을 취하셔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가 가신 예수님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리지 아니할 수가 없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하나님을 볼 수도 없었을 것이며, 직접 가까이 나아가서 그분을 뵙고 만나고 만져 볼 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이 아니었다면 피조물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분 때문에 존재의 은총도 누리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분께 감사드리자. 그분만이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니까...

 

9. 나오며

  예수님은 누구시며 어떻게 존재하고 있었는가? 첫째로, 예수님은 육신을 입기 전에는 말씀으로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통하여 모든 만물을 지으셨다. 그러므로 만물이 말씀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을 입으심으로 우리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구약 시대에 예수님은 빛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이 세상에 들어올 때 그것은 빛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온전하고 완전한 참 빛으로 말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자는 그 빛으로 나오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좋아해서 빛으로 나아오지 않았으며, 빛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그 빛을 영접하는 자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을 주어 그 사람을 하나님의 자식들이 되게 하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자식이 되는 것은 혈통적으로 유대인이 아니어도 된다. 부모가 사랑해서 혹은 남자의 씨가 들어가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이 땅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둘째로, 예수님은 육신을 입어서 사람이 되셨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 주님은 2가지 은총을 쉼없이 부어 주신다. 하나는 은혜와 또 하나는 진리이자 실제다. 율법은 공의와 모형으로 제공된 것이지만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이자 실제로 제공된 것이다. 우리는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며,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실제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서문의 핵심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모든 흐름을 이끌어 간다. 

 

2022년 06월 29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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