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어떻게 존재하시고 계신가?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홀로 게신 한 분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사44:6,24). 그리고 구약시대에 신적인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사43:10). 그렇다면 구약시대 과연 그리스도께서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있었다고 말하기도 곤란하고 없었다고 말하기도 곤란하기는 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존재에 있어서는 가능한 이야기이지만, 아직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으셨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구약시대는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그리스도의 직책을 수행할 것을 예언하고 있던 시대에 속한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는 오실 그리스도(메시야)가 있었다고 말해야지, 이미 출현해있는 그리스도가 있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그렇다면 오늘날 하늘에서는 그리스도가 계시는가?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과 다른 제2의 위격을 지닌 아들이 계시는가? 아니 계신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와 다른 분이 계신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 밖에 없는 하나님의 보좌에 아들이신 예수께서 앉아 계시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아들로서 그 직무를 어느정도까지는 수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다. 이때가 되면, 재림하신 예수께서는 아들로서 사탄마귀를 멸망시키실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이 친히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셔서, 회개하고 끝까지 믿음을 붙잡는 자들을 도와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도 우리를 위해 아들과 그리스도로 사역하고 계신 한 분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기를 바란다.

 

1. 들어가며

  그리스도께서 구약시대에도 존재하고 있었을까? 그리스도 곧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야 이미 구약시대에 실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틀린 말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 그리스도는 앞으로 보내주실 미래적인 인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가문에서 육신을 입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셔야 할 인물로 묘사되어 있기에, 구약시대에 그리스도가 있었다고 표현하기는 조금 난감하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미 구약시대 이전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구원의 역사를 세워놓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각 속에는 이미 그리스도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도 그리스도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구약시대 혹은 그 이전의 시대에 그리스도가 인격적으로 밖으로 나타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서 예수께서는 이미 선재하고 있기는 하셨지만, 구약시대에 하나님 이외에 다른 인격적 존재로서 존재하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그러나 삼위일체론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 그리스도께서 구약시대에도 실재하고 있었는지에 관하여 신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중심으로 다시 살펴볼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선재성,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주장하는 분들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상태에서 따로 인격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미 그리스도이신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와 함께 그리고 성령님과 함께 인간의 창조를 의논하였다고 보기 때문이다(창1:26). 그러나 창1;26의 기록은 반드시 선재하신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는 본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한 분 하나님과 그 옆에 있는 천사들에 관한 언급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증거는 구약성경 전체에서 고루 발견된다. 더욱이 창1:26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그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언급하는 문장으로 보지 않으며, 하나님과 그 옆에 있는 천사들이라고 본다. 만약 구약시대에도 세 분 하나님이 계셨다고 한다면, 그것을 믿지 않았던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과연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마8:11). 과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한 분이지만 인격적으로 세 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믿었을까? 그러면 이삭이 믿었는가 야곱이 믿었는가? 그것도 아니면 모세가 믿었으며 다윗이 믿었는가? 아니면 다니엘이 믿었는가? 아니었다. 구약시대 구원받은 인물들은 다 하나님을 한 분 하나님으로 믿었으며, 자기들을 죄로부터 구출해줄 오실 메시야(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간 것이다.

 

3.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는가?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을까? 확실한 것은 천국에서 항상 하나님은 한 분으로 존재하셨다는 것이다. 다만 인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나타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들로도 동시에 존재하셨고, 아들로 오신 하나님은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후에는 다시 하나님의 영역으로 돌아가셨다(요16:28). 그러므로 하늘에서는 항상 하나님께서는 한 분으로 계셨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쳐주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바른 정의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자들(실제로 삼신론자들일 가능성이 높음)은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삼위일체방식이 맞다고 고집한다. 만세전부터 하나님은 삼위일체방식(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세 위격으로 존재하심)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지금도 하늘에서 하나님은 세 위격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세 위격으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틀린 말인 것이기는 하지만, 천국에서 하나님께서 세 위격으로 존재하고 있었다거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가장 확실한 증거는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에 하늘의 광경을 기록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밧모섬에 사도요한은 하나의 큰 음성을 듣게 된다. 그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분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었으며,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았고 눈 같았으며, 그분의 눈은 불꽃같았다. 그리고 그분의 발은 풀무풀에 단련된 빛난 주석같았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자신이 누군지를 가르쳐주었기에 사도요한은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기를 소개할 때에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곧 살아 있는 자다.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계1:17~18)."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하늘에 계신 그분은 더이상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이때 사도요한에게 나타나신 그분은 자신을 2가지로 소개했다. 하나는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계1:17)"고 소개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한 바로 그분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고 자신을 소개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사41:4, 44:6, 48:12). 또한 그분은 자신을 "전에는 죽었지만 지금은 살아있는 자로서,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분은 보좌에 앉아계시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계4:9). 그런데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는 인자인 예수님이시므로(계1:5), 우리는 일곱금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그분을 예수님이자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때 그분은 일곱교회들에게 써보낼 말씀을 요한에게 들려주셨다(계2~3장). 그런데 그때 그분은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곧 지상에 있는 교회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성령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곧 예수님이 원래 보혜사이시지만(요일2:2, 헬라어원문참조), 자기자신을 또다른 보혜사로 이 세상에 파송하신 분이므로, 성령님은 예수님의 또 다른 자기자신인 것이다(요15:26,16:7). 그러므로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이땅에 보내심을 받아 활동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서는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여호와의 눈들(슥4:10)"이라고 언급한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보좌 앞의 일곱 영들"이자 "이 땅에 보내어 이 땅을 두루 감찰하고 계시는 어린양의 눈들"이라고 언급한다(계4:5, 5:6, 2:23). 그리고 하늘에 있는 피조물들인 네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를 찬송할 때에, 그들은 보좌에 앉아계신 이를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 이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계4:8)"이라고 찬양을 드린다. 이전에도 계신 분이 지금 하늘의 피조물 앞에서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 양으로 계시며, 장차 재림하실 예수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주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께 드린 신앙고백의 내용과 동일하게 일치한다(요20:28). 그렇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공식명칭은 "주 하나님"이자, "전능하신 이"인 것이다(계1:8, 4:8).

 

4. 보좌에 앉아계신 이는 누구시며 하나님의 보좌는 누구의 보좌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보좌에는 누가 앉아계시는가? 그분은 이 세상에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계3:20, 7:15~17). 그분은 장차 재림하여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실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계20:11). 그렇다. 하나님의 보좌에는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가 앉아계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그분을 우리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하지만 그분이 보좌에서 내려오게 되면, 그분은 예수님으로 보인다. 예수님이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그 보좌(단수)를 일컬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라고 부른다(여기서 '보좌'는 단수)(계22:1,3). 만약 하나님의 보좌가 따로 있고 어린양의 보좌가 따로 있다면 그 보좌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들"이라고 했어야 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오직 단 한 개의 보좌만을 언급할 뿐이다.

 

5. 하늘에 계신 어린양의 모습은 인류구속을 위해 사람이 되신 하나님에 대한 역할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도 말한다. 어린양이 하나님의 오른손에서 장차 되어질 일이 기록된 일곱인으로 봉한 두루마리를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하나님과 어린양이 각각 다른 존재인 것을 말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체와 상징 그리고 하나님과 그분이 어린양으로 하신 역할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데에 기인한 잘못된 판단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는 상징적인 표현들이 수두룩한데, "어린양"도 상징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발에 끌리는 옷을 입으신 예수님(계1:13)은 실제이다. 하지만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상징이다. 그러면, 왜 예수님을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라고 표현하고 있을까? 그것은 예수께서 인간의 속죄를 이루셨다는 것을 모든 피조물들로 하여금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묘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어린 양"은 예수님에 대한 상징적인 묘사에 해당한다. 다음을 보자.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계5:6)" 그렇다.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에게 일곱 뿔들과 일곱 눈들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이 실제라면 예수님인 괴물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 예수님은 괴물이 아니다. 이것은 불꽃같은 눈으로 인간과 세상을 완전히 감찰하고 계시는 예수님에 대한 상징적인 묘사인 것이다(계1:14, 2:18, 23). 그렇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분이 바로 보좌에 앉아계신다. 그런데 그분이 한 때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하나님은 피흘릴 수 없으므로, 피흘릴 수 있는 사람이 되셨다, 딤전3:16),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셨다. 그래서 그분의 역할에 대한 가장 적합한 묘사로서, 일찍 죽임을 당한 흠없는 어린양(요1:29)이 나온 것이다. 이는 그분이 우리의 유월절의 어린양이라는 표현과 같다(고전5:7). 그러므로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위하여 어린양으로서 오셔서 그 역할을 감당하신 것을 일컫는 상징적인 표현에 해당한다. 그렇다. 어떻게 장차 되어질 이 우주와 세상의 역사가 기록된 두루마리를 하나님 이외에 어느 누가 펼쳐보이겠는가? 오직 하나님 자신이 펼쳐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인류구속을 위해 어린양이 되신 그분께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으로부터 책을 취하여 펼쳐보이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땅에 사람으로 존재하기 전에 보좌에 앉아계셨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구약시대에 다니엘이 보았고, 이사야가 보았으며, 에스겔이나 스가랴가 보았던 바로 그 하나님이신 것이다.

 

6. 만세전부터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따로 있어 그분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는가?

  그렇다면, 신약성경에 기록되어있는 말씀들 중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하여(히1:2) 혹은 그리스도를 통하여(골1:15~17) 혹은 말씀으로(요1:1~3) 세상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한글성경만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헬라어의 전치사를 제대로 번역하지 못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자,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시며, 말씀이었던 그분을 통한 창조에 대해서 원문성경(괄호)은 어떻게 나와 있는지를 살펴보자.

히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통하여)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골1:15-17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프로토토코스)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그분 안에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통하여) 그를 위하여(안으로)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요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하나님에게서부터)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정관사없음)이시니라 2 그(말씀)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하나님에게서부터)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통하여)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렇다. 아들이나 그리스도 혹은 말씀은 다 동일한 표현들에 해당한다. 다만 아들이나 그리스도는 인격적인 표현의 범주 안에 속한다면, 말씀은 비인격적인 범주 안에 속한다(그렇지만 성경번역자들은 다 인격적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도구가 지혜라는 말도 나오는데, 이도 똑같은 표현에 해당한다.

잠8:12,17-23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18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공의도 그러하니라 19 내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나으며 내 소득은 순은보다 나으니라 20 나는 정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의로운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21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가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 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지혜)를 가지셨으며 23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지혜)가 세움을 받았나니
시136:5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104:24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그렇다. 잠언서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전지성과 전능성을 지혜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지혜는 만물이 있기 전부터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신약시대에는 만물이 있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이 나왔고 이 말씀에 의하여 천지만물이 창조되었으니 이 말씀이 없이는 하나도 창조된 것이 없었던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므로, 그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분이 예수님이기에, 또한 예수님은 아들이나 그리스도라 불렸기에, 모든 만물은 다 아들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은 바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 분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혜를 내보내시어 그 지혜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음에 대한 다른 묘사이며, 지혜나 말씀을 인격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들과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보라. 하나님께서는 아들과 혹은 성령과 상의하여 만물을 지었다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오직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혼자서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끼어들지 못한다.

사44:24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시136:4-5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5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렇다. 만물이 있기전에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만이 계셨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지혜로 내보내어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 지혜를 인격적으로 표현하면, 그것이 아들이요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특별히 아들이나 그리스도라고 표현하신 것은 이 땅에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을 창조주요 전능자로 모든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온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 말씀이자 지혜는 하나님으로보터 나왔으니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또 다른 표현들이다(그러나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실 때에는 아들의 인격을 따로 가지셨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아직 인격이 아니었던 말씀과 지혜(하나님의 전지성)가 신약시대에는 육신이 되어 인격체로 나타나셨다. 그분이 바로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동정녀마리아에게 태어나심으로 인격을 입으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지혜이시다. 그러므로 아들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보면, 그분은 아기이자 아들로 오실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를 "기묘자인 모사(보혜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부를 것이라고 했다(사9:6). 그러므로 아들이 선재하셨는가를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해야 한다. 하지만 구약시대에는 아직 그것이 인격적으로 따로 밖에 나타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인격적으로 아들이신 신분으로 아버지와 함께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혜로 이루신 일들에 대한 다른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7.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만세전에 아버지와 다른 영광을 가지고 따로 계셨는가?

  그렇다면,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아들이신 예수님의 기도에 나오는 표현 즉 아들이 아버지와는 다른 또 다른 영광을 가지고 계셨다는 표현은 대체 무슨 뜻인가? 그것은 헬라어를 좀 더 정확하지 못하게 번역한 데서 오는 이해의 불충분이며, 이미 예수께서는 만세전부터 이 세상에 오시도록 계획된 독생하신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다른 표현에 해당한다.

요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직역: 아버지여, 지금 당신은 나를 단번에 영광스럽게 하소옵서. 세상이 있기 전에 당신 곁에서 계속해 있도록. 당신자신 곁에서 내가 아직도 가지고 있는 그 영광으로)
요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직역: 아버지여, 나는 당신이 이미 내게 주신 채 있는 있는 것을 원하나이다. 나 있는 곳에 그들도 역시 나와 함께 있기를, 세상의 기초 전에 당신이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당신이 이미 나에게 주신 채 있는 나의 그 영광을 그들이 계속해서 바라보도록)

  그렇다. 아들은 만세전부터 이미 홀로 한 분이신 생각과 계획 속에 있었다. 그러므로 아들이 없었던 시대가 있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서 계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구약시대까지는 아직 아들이 밖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분이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동정녀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태어나시면서 아들로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죽고 부활하신 후에는 다시 하나님께로 가셔서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앉으셨다. 그러기에 우리가 지금 천국에 가면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을 볼 때에는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아들은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이미 아버지의 생각과 계획 속에 인류를 위한 속죄사역을 완성하시고 영광의 자리에 오른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은 창세전에(세상이 있기 전에) 영광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도하신다. 그리고 그 영광이 무엇인지가 이제 드러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다. 만세전에 아직 출현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가지고 계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통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고자 계획하셨다. 그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동정녀 마리아를 태를 통해 이 세상에 들어오셨다(이 세상에 보면 그분은 태어나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30세가 되어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하나님의 계획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계획이 성취될 수 있기를 아버지께 기도하셨던 것이다.

 

8. 나오며

  사실 '아버지'라는 신분은 사실 '아들'이 이 땅에 출현하므로 생겨난 신분에 해당한다. 하지만 홀로 한 분이신 생각과 계획 속에, 처음과 마지막이신 하나님에게는 이미 아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8)"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에게서부터 나와서 세상에 들어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를 향하여 간다"고 말씀하셨다(요16:28)" 이는 구약시대에 아들이 밖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을 뿐 이미 만세전부터 하나님의 품속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그대로 말해준다. 그러므로 아들은 선재하고 있었다고 말해도 된다. 또한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 속에는 아들이 이 땅에 오심으로 만세전에 작정하셨던 그리스도로서의 직책을 수행하실 것도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계획대로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아들로 하여금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동정녀 마리아의 태를 빌어 태어나게 하셨다. 그리고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30살이 되자(제사장의 직무의 규정에 따라), 그리스도로서의 직책을 3년반동안 수행하셨다. 그러나 그때에는 예수께서도 인성을 취하셨기에 우리들처럼 시공간이라는 제한 속에서 사셔야 했다.

  하지만 인류의 구속사역을 마치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이제 하나님으로서 무소부재하신 분이 되셨고, 동시존재가 가능하신 분이 되셨다. 그리고 하늘에 오르신 후에는 당신을 대신하여 당신의 영을 보내주셨다. 그분이 바로 보혜사 성령님이시다. 그 영은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영이었기에 "아버지의 영"이자 "하나님의 영"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승천하신 아들이 보내주시는 영이기도 하기에 "아들의 영"이자,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증거하시는 영이시므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이 영을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일곱 영"이라고 부른다. 이는 일곱이란 숫자가 이 세상에서의 완전수에 해당하므로, 이 세상에 보내어진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 것이다. 특히 일곱영이라고 함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을 염두해 둔 표현이라고 하겠다. 또한 천국에서는 예수께서 보좌에 앉아 계신다. 그리고 보좌에 내려와서는 아들로서 일들을 아직도 감당하고 계신다. 그런데 이 어린양의 모습도 일곱뿔들을 가지고 계시고 일곱 눈들을 가지고 계신다. 어린양의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 곧 성령이므로, 예수께서 비록 천상에 계시기만 오직 관심은 이 땅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 역시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하고 계심을 알고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위해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오셨고, 또한 보혜사 성령까지 보내주셨다. 그러나 천국에 올라가신 예수님은 아직도 아들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계신다. 그것은 아들이 해야 할 일이 2가지였고 한 가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일의 하나는 인류구속사역이요, 또하나는 하나님의 대적하는 마귀와 그의 귀신들을 처단하는 일이다. 인류구속사역은 이미 2천년전에 골고다언덕에서 이루셨지만, 마귀와 귀신들에 대한 박멸은 재림하심으로 성취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보좌에 앉아계시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들로서 아직도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아들의 신분을 가지고, 중보자로서 일하고 계시고, 멜기세덱의 만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으로서 일하고 계신다. 그리고 천국에 우리 성도들이 들어갈 집(처소)을 예비하고 계시며, 장차 재림하시어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를 멸하실 심판을 준비하고 계신다. 그리고는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불못에 멸하심으로 아들로서 그분의 두번째 사역을 완성하실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아들로서의 역할을 그치게 된다(고전15:24~28). 그러면 그때부터는 더이상 하나님을 아버지나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로서 해야할 사역을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때부터 하나님은 홀로 한 분으로 존재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또한 이루신 하나님을 우리는 영원히 찬양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그 모든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만세전부터 아버지의 품속(계획,생각)에 있었다가 나타나시어 우리를 구속하신 우리 주 예수님께 영원히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기를 바란다. 아멘. 아멘. 아멘.

 

[추신] 사실 이 말씀을 믿는 이들이 다 이해하기까지는 몇 년이 혹 몇 십년이 걸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쓰여 있는대로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저 역시 성경에 있는 대로 전하는 것이 곧 목회자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2018년 3월 18일(일)

정병진목사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라 진정 한 분이신가? 그렇다면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등장하고 있는 부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서로 다른 두 개의 인격의 하나님인가 아니면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성과 인성의 역할을 구분한 것인가? 이번에는 지난 주에 이어 삼위일체론과 양태론이 잘못 말해온 하나님에 대해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이에 따른 몇 가지 의문점들을 함께 풀어가도록 하자.

2016-10-09 금요기도회
제목: 아버지와 아들은 다른 하나님인가 같은 하나님인가?(계5:1~14)
https://youtu.be/5NCXdfHnp_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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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해야 하는가?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기도해야 하는가? 요16:23에서는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되어 있지만, 요14;14에서는 예수께 기도하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면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이신 예수님을 동시에 만나게 될까 아니면 한 분 하나님을 만나게 될까? 하나님이 한 분인지 두 분 혹은 세 분인지를 헷갈리니 기도할 때도 헷갈린다. 그리고 성령님이 누군지를 잘 모르니, 귀신이 주는 것도 성령 하나님이 주셨다고 말하는 일도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한 분이지 아닌지 그리고 하나님과 아들이 동시에 등장하는 본문은 또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바른 해석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나님의 존재방식에 관한 영구불변한 진리

  하나님의 존재방식에 대한 영구불변한 진리는 하나님은 홀로 한 분이라는 것이다. 자 여기를 보라.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6:4)",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43:10~11)",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사37:16),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니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호13:4)" 그렇다. 구약성경에서 오직 하나님은 홀로 한 분뿐이며 다른 신은 없다고 증거한다. 어디 그것이 구약성경 뿐일까? 신약에서도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증거한다.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전8:4)",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엡4:6)",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딤전2:5)", "하나님은 복되시며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시며,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며(딤전6:15)" 그렇다. 신구약성경이 공히 하나님은 한 분 뿐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3.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르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천국에 들어갔을까?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한가? 하나님을 한 분이라고 하면 양태론자라고 하면서 정죄하려 한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삼위일체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양태론을 믿거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면 지옥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구약의 과연 어떤 성도가 아버지 하나님도 있고 아들 하나님도 있으며 성령 하나님도 있다고 믿었던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구약의 성도는 천국에 들어갔다. 그들은 한 분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실 메시야를 믿고 회개를 통해서 천국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신구약성경이 공히 하나님은 한 분 그것도 홀로 한 분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견지해야 할 하나님의 존재방식은 하나님은 홀로 한 분이라는 것이다. 물론 양태론자들의 주장도 거의 대부분 틀렸다. 아버지 하나님이 성육신한 것이 아니며, 아버지가 고난받고 죽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의 오심은 예수님의 재림과 다르며, 성령의 통치가 천국과 다르기 때문이다. 


4.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적인 하나님에 관한 고백일까?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예수님을 어떻게 신앙고백해야 하는 것이 맞느냐 하는 것을 정리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왜냐하면 4세기경 예수님을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태어난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예수의 신성을 훼손하는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100% 인간이셨지만 또한 100% 하나님이라고 하는 정의가 필요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아버지도 하나님이지만 예수님도 하나님이라는 것이며, 더불어 성령님도 하나님이라는 정의가 생긴 것이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곧 아들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 보면, 분명 기도하는 아들이 있고 기도를 받는 아버지가 있으며, 보낸 분이 있고 보냄을 받은 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과 같지 않다고 정의해야 했다. 또한 행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해서 성령께서도 하나님이라고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성령님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는 영이기에, 아버지와 같지 않고 아들과 같지 않다고 정의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출현한 교리가 바로 '삼위일체' 교리가 된 것이다.

  그런데 아들도 하나님이요 성령도 하나님이라고 정의를 하려다보니, 아들도 하나님으로서 만세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성령님도 만세전부터 성부와 성자와 다른 인격을 가진 하나님으로 있었다고 정의해야 했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만세전부터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하지만 또 문제가 발생했다.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결국 하나님은 세 분이라는 뜻과 같은 것이었기에, 삼위일체하나님정의가 삼신론으로 가버릴 위험성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성부도 하나님이요 성자도 하나님이요 성령도 하나님이지만 한 하나님만 계신다고 정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정의다. 하지만 삼위일체에 대한 정의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정의가 아니라는 것을 당신을 알고 있는가? 


5.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

  그렇다고 양태론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약 1700여년동안 교회는 울며겨자먹기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하나님의 존재방식에 대한 가장 올바른 정의라고 여겨왔다. 하지만 주님이 다시 오실 때가 가까이 오고 있고, 진정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싶어하는 겸손한 영을 가진 자들에 의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이 진정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해 바르게 알 수 있는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결국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첫째, 하나님은 홀로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홀로 온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사44:24, 45:18). 그리고 그분은 자신의 이름은 구약의 백성들에게 '여호와'라고 계시하셨다(출3:12, 6:2~3). 그래서 구약의 백성들은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 혹은 '만군의 여호와'라 불렀다. 하지만 맨처음 창조되었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없앨 방법으로 여자의 씨(창3:15)를 보내주실 것을 말씀해주셨다. 또한 그러한 존재는 사람의 죄를 대속할 흠없는 어린양이어야 했기에(출12:5~6, 고전5:7),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야 했다.

  그래서 둘째, 하나님은 사람의 육체를 입고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오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이때 홀로 한 분이셨던 하나님은 인성을 취하시기 위해 성령으로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어 280일만에 세상에 아들로 태어나셨다. 그분이 바로 독생자요, 아들이요,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님이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알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무소부재의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요4:24). 그래서 창조주이신 그분만이 동시존재가 가능하며 상호내재가 가능하다. 다시 말해, 만세전부터 홀로 한 분이셨던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하늘에는 여전히 우주를 통치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동시에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아들이 세상에 태어남으로 인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은 그분을 '아버지'라 불렀다. 사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최초로 부르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셨던 것이다. 구약의 성도는 아무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다. 아니 구약시대에는 아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그리고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 곧 인성을 취하신 하나님은 자신을 '아들'이라고 칭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아들로 오셨다는 측면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했으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측면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인가 예수의 어머니인가? 마리아는 신성한 하나님을 낳은 것이 아니다. 단지 그녀는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을 낳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천주교가 주장하는 마리아에 대한 칭호 곧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말은 틀린 것이다. 어디까지나 인성을 가진 예수님을 낳았기에 그녀는 '예수의 어머니'라고 불려야 마땅하다.


6.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요 아들의 영이시다.

  그런데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 곧 아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 내지는 사람의 아들(인자)로 불리우셨던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목적 곧 대속제물로서 세상죄를 없이하는 어린양의 사역을 수행하신 후에 어떻게 되셨는가? 그분은 하늘로 되돌아가셨다. 원래 있던 곳으로 가신 것이다. 그리고나서 그분의 영인 성령을 보내주셨다. 구약시대에도 성령님이 계셨지만 사람이 되어 오셨다가 하늘로 가신 하나님은 이제 사람 속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으니,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하나님은 영으로 사람들 속에 내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순절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성령님으로 믿는 이들 마음 가운데에 들어오시게 되었다. 그렇다고 구약시대에 성령님께서 계시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 그때에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으로 파송되어 이 세상에서 많은 활동을 하시었다.  

  그렇다면 성령님을 어떻게 정의하면 좋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구약시대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이 땅에 보내어진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며, 오순절이후에는 믿는 자들 속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가리킨다. 사실 하나님은 볼 수 없다. 아니 보이지 않는다. 그분은 영이시기 때문이다(요4:24). 그러나 한 분이시요 영이신 하나님은 동시에 존재하는 당신의 영을 보내서 창조사역을 수행하셨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만물을 지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볼 수는 없지만 그분은 당신의 영을 이 세상에 보내 만물을 짓도록 하신 것이다(창1:2, 시104:30). 성령님은 하나님이 보낸 영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영'이라 불리웠고,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로 계시하신 이후에는 '여호와의 영'이라고 불리웠다. 그러다가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마리아의 몸으로 빌러 태어나심으로 성령님은 '아들의 영'이라고 불리우기도 하였고, '예수의 영'이라고 불리웠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이셨으므로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 불리웠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원래의 보혜사로 이 세상에 오셨으며(요일2:1),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아버지께 받아 성령님을 보내주셨으므로 성령님은 '또다른 보혜사'로 불리웠다. 특히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령님은 '어린양의 일곱눈들'이라고 하고(계5:6),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하나님의 일곱 영들'이라고도 불리운다(계1:4, 5:6). 그리고 보좌 앞에 있는 '하나님의 일곱 등불'이라고도 불리운다(계4:5). 여기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영이 일곱 개라는 뜻이 아니라, 온 땅을 완전히 감찰하시는 영이라는 뜻이다. 즉 일곱이라는 숫자는 영이 일곱 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할수행이 완벽하다 혹은 완전하다는 의미로서 일곱 영인 것이다.


7.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방식

  정리해보자.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떠한 존재방식으로 계시는 분인가? 그분은 홀로 한 분으로 존재하신다. 그리고 구약시대에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로 계시하신 분이시다. 그러다가 인류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흠없는 대속제물이 되시기 위해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셨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하지만 하나님은 동시존재와 상호내재가 가능하신 창조주이자 전능하신 분이므로, 하나님은 하늘에도 계시도 또한 땅에도 동시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아기이자 아들로 오신 하나님(사9:6)은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이제는 믿는 이들 속에 들어가서 활동하실 수 있는 성령님을 보내주셨다. 성령님은 오셔서 사람들에게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책망을 하셨고, 예수께서 누구시며, 그분이 하신 말씀과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가르치고 계신다. 그리고 진리의 길로 인도하고 계신다.


8. 하나님과 예수님이 함께 등장하는 부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성경에 보면, 특히 신약성경에 나오는 부분으로서,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등장함으로 두 개의 인격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은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부분에 있어서 삼위일체론자들의 대답은 간단하다.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아버지로도 계시고 아들로도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이 따로 분리된 인격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진짜 그럴까? 그렇다면, 예수께서 세례받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이같은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 세례받는 아들, 비둘기처럼 내려오시는 성령으로 나타나신다. 그래서 삼위일체론자들은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세 인격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이들의 주장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분명 하늘에 계시고 있다. 그리고 그분이 당신의 영인 성령을 아들에게 보내주고 있다. 그리고 아들로서 인성을 취하신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거기에 계신다. 그러므로 이 장면도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묘사인 것이다. 즉 하늘에는 아버지가 계시고 이 땅에는 아들이 계시며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는 성령이 계시다. 그러나 이것을 두고 세 위격이라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이 장면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곧 동시존재가 가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행하시는 각기 다른 역할의 수행장면이기 때문이다.


9.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성경구절들

  이제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등장하는 것들을 잠깐 살펴보자.  첫째, 하나님 보좌 앞에서 중보하고 계시는 예수님이 각각 따로 있다(요일2:1, 딤전2:5). 그렇다면 중보하시는 보혜사이신 예수님과 중보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따로 있는 것이 분명한 것이 아닌가? 얼핏 보면 그렇다. 하지만 요일2:1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하나님 앞에서 중보하시는 보혜사(대언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중보하는 보혜사(대언자)로 나온다. 그리고 이것은 한 하나님에 대한 2가지 역할을 말하는 것이지 서로 다른 두 인격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좀 더 살펴보자.

  둘째, 아들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장면들을 보자. 예를 들어 겟세마네동산의 기도 혹은 요17장의 마가다락방에서의 대제상적인 아들의 기도 보면, 분명 기도를 드리는 아들이 있고, 기도를 받으시는 아버지가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분명 둘로 보인다. 그래서 삼위일체론자들은 서로 다른 인격을 가진 두 분 하나님이 거기에 계신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두 개의 인격을 가리키는 것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격을 가지신 분은 오직 아들 예수님 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한 번도 인격을 취하신 일이 없다.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신격 안에서만 계셨다. 또한 그분은 한 번도 하나님의 보좌를 떠나신 적이 없다. 하지만 동시존재가 가능한 한 분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어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는 이전에는 가지지 않았던 새로운 인격이 덧붙혀졌다. 이제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도 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의 또 다른 형태로서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이때 예수님은 사람의 성분을 취하셨기에 분명 사람과 똑같이 되신 것이다. 그분은 분명 280일동안 어머니 마리아의 뱃속에서 자라나셨고, 탄생의 과정을 거치셨으며 키가 크고 자라는 과정을 거치셨다. 먹지 않으면 배고팠으며, 피곤하면 쉬셔야 했다. 그리고 다치면 우리와 똑같이 아픔도 겪으셨다. 다만 우리 인간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죄성이 없었다는 것이다(요일3:5, 히4:15, 벧전2:22). 그는 하나님의 영으로 잉태되셨기에 죄된 본성을 취하지는 않으신 것이다. 사실 그분은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임하셨고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기에, 그분의 영이자 그분의 아버지는 요셉이 아니며, 그분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요 성령님이신 것이다(눅1:35). 그래서 아담으로부터 죄된 본성을 물려받지 아니한 예수님은 죄만 없으셨지 우리와 똑같이 성정을 가지셨고 그것 안에서 사셨던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 인성을 취하셨기에 그분은 신성의 아버지에게 겸손히 행하셨다. 항상 물어보면서 하루의 이정을 시작하셨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따라 그대로 순종하셨다(요5:19). 그러나 그분이 가진 인성에도 자유의지가 있었기에 겟세마네동산에서는 자신의 의지와 투쟁하기도 하셨다. 뿐만 아니라 육체를 지닌 인간이었기에 예수께서는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고 유혹도 받으셨다. 만약 예수께서 신성만을 가진 분이셨다면 그분은 결코 악한 자에게 시험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도 약한 인성을 취하셨기에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또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셔야 했다. 그리고 사람인 아들로서, 그분은 당신의 재림의 때를 모른다고 언급하셨으며(마24:36), 신성만을 지니신 아버지보다 크지 않다고 말씀하셨고(요14:28),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서 보낸 아버지보다는 크지 않다고 말씀하셨다(요13:16).


10. 예수께서 인성을 취하신 이유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은 사람의 인성을 취하신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인자)이었기에 온 인류의 죄를 속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마귀를 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 한 분이신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야 했을까? 그것은 오직 한 가지 때문이다. 인류의 죄를 속죄하려면 흠없는 어린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피흘려 죽어야 죄값을 지불할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부득불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 중에 아무도 그러한 조건을 갖춘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류의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예수께서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셨다(계3:20, 계7:15~17, 계22:1~3). 어떤 이들은 예수께서 승천이후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셨다고 기록되었지 무슨 소리냐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상징적이며, 비유적이요, 시어적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시16:8, 77:10~11, 98:1).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인류의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승리하셨다는 뜻이며, 권능으로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 천사들 앞에서 왕노릇하실 것이라는 의미다(출15:6, 마26:64, 벧전3:22). 왜냐하면 영이신 하나님에게는 결코 오른쪽이나 왼쪽이 없기 때문이요, 또한 천국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는 2개 내지는 3개가 없기 때문이다. 신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보좌에 관한 환상의 기록들을 죄다 읽어보라. 천국에는 높이 들린 단 한 개의 보좌만 있을 뿐이다(계4:2, 22:1~3, 사6:1~3). 그 보좌에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앉아계신다(단7:9).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보좌에 앉아 계신 이를 '주 하나님'이라 부른다(계4:11, 19:1~2). 


11. 보좌에 계신 이와 어린양은 같은 하나님인가 다른 하나님인가?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보좌에 계신 이'  곧 주 하나님과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은 같은 하나님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하나님인가를 살펴보자.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한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계1:8)" 그리고 요한계시록 4~5장에 보면, 주 하나님께서는 보좌에 앉아계신다. 그래서 그분을 일컫어 '보좌에 앉아 계신 이' 혹은 '보좌에 계신 이'라고 부른다. 한편 거기에는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같고 눈 같으며, 불꽃같은 눈과 단련한 빛난 주석같은 발을 가진 분이 계신다. 그분은 '인자같은 이'라 칭하고 있다(계1:3~15). 그런데 놀랍게도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오는 '인자같은 이'는 단7장에 보면 '보좌에 앉아계신 이'다(단7:9~10). 그리고 그분이 요한계시록 4~5장에 보면, 어린 양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보좌에 계신 이와 어린 양은 다른 분일까 한 분일까? 각각 따로 표현되어 있는 구문만을 보면, 보좌에 계신 이와 어린 양은 다르게 보인다(계5:13). 그렇다면, 보좌에 계신 이는 사람이나 천사의 눈에는 보이는 것일까? 아니다. 볼 수 없다. 어느 때든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했고(요일4:12), 볼 수도 없다고 하였다(딤전6:16). 그리고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어서 독생하신 하나님 곧 예수께서 나타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요1:18). 그러므로 '보좌에 계신 이'는 보이지 않으며 볼 수도 없다. 다만 자신의 영으로 그분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감지할 뿐이다. 그러나 보이는 분은 '인자같은 이'(계1:13)가 있다. 천국에서 예수님은 결코 사람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인자라 불리지 않는다. 인자같은 이 곧 사람의 형상을 모습을 갖추었으나 하나님이신 분라고 불리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4~5장에 보면, 인자같은 이인 예수께서는 보좌에 계신 이로부터 두루마리책을 취하시는데, 그분의 모습이신 어린양이다. 하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어린양은 실제 이 땅에 보는 어린양(양새끼)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양에게 눈이 일곱 개가 달려있고, 뿔이 일곱개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어린양은 인자같은 이 곧 예수님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다. 곧 예수님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인 것이다. '뿔'은 권세와 능력 곧 전능성을 상징하고, '눈'은 온 땅을 감찰하는 전지성을 상징한다. 또한 '일곱'이라는 숫자는 진짜 뿔이 일곱 개와 눈이 일곱 개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완전하다, 충분히 갖추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일곱 뿔'은 온 우주를 주관하고 다스리는 어린양의 전능성을 가리키며, 어린양의 '일곱 눈'은 온 우주를 감찰하시는 어린양의 전능성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어린양이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라면, 이 어린 양은 괴물에 해당할 것이다.더불어 어린양의 일곱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했다(계5:6). 이는 성령님이 일곱 분이라라는 뜻이 아니라 온 땅에 보냄을 받아 활동하고 계시는 성령님께서 완전하고 충분하고 일하고 계심을 뜻한다. 그렇다. 어린양은 실제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보좌에 계신 이로부터 두루마리책을 취하시는 어린양은 상징적인 의미인 것이다. 앞으로 미래에 되어질 일들이 기록된 두루마리의 인봉을 떼고 그것을 펼칠 수 있는 분은 오직 어린양되신 인자같은 이 곧 예수님 뿐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활동은 실제 양새끼가 아니라, 아직도 천국에서 사람의 인성을 취하셨던 아들께서 행하시는 사역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보좌에 계신 이와 어린양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의 두 개의 인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두 가지 역할을 상징하는 것이다. 보좌에 앉아계신 이는 오직 신성만을 가지신 하나님을 가리키며, 어린양은 인성을 취하셨던 예수님을 가리킨다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과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은 다른 두 분의 하나님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보좌에 앉은 이'가 어린양이며, 인자같은 이요, 예수님이기 때문이다(계3:20, 7:15~17). 그러므로 천국에 있는 단 한 개의 하나님의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이면서 동시에 어린양의 보좌인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2:1~3에 보면, 한 개의 보좌(단수)를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보좌에 앉아계신 이'가 보좌에서 내려와 있으면 '인자같은 이' 곧 어린양으로 나타난 '예수님'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계1:17과 22:13에서는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계21:6에서는 '보좌에 계신 이' 곧 '하나님'께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1:18에서는 예수께서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계4:9~10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계19장에 보면, 어린양되신 예수께서 심판하시지만, 계19:2와 20:11에 의하면,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가 심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계17:14과 19:16에서는 예수께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나오지만, 딤전2:15에 보면, 주 하나님께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나온다. 그리고 계19장에 보면, 예수께서 재림하신다고 되어있지만, 계1:8과 4:8에 의하면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가 장차 재림하실 것이라고 되어 있다.


12. 나오며

  그렇다. 보좌에 계신 이와 어린양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다른 두 역할을 가리킨다. 보좌에 계신 이는 신성만을 가지신 하나님을 의미하고, 어린양은 인성을 가지셨던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두 분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다. 한 분 하나님이신데, 신성의 하나님과 인성의 하나님의 역할을 구분해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보좌에 앉아계신 이가 결국 어린양이신 예수님인 것이다(계7:15~17). 그러므로 하나님과 어린양이 각각 다른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묘사이다. 그리고 어린양은 인성을 가지신 하나님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인 것을 잊지 말라. 그렇다. 장차 들어갈 천국에서 우리는 두 분 혹은 세 분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뵐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영원후까지 오직 한 분이신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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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께서는 이 땅에 어떻게 오셨는가?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오셨다. 그래서 그때에 하나님은 예수님에 의해 아버지라고 불리우셨다. 사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라 불리우지 아니하셨다. 왜냐하면 아직 아들을 보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도 가끔씩 하나님에 대해서 아버지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한다(사63:16,64:8, 말1:6). 하지만, 그분이 모든 만물의 창조주라는 측면에서 아버지인 것이지, 정말 낳은 아들 때문에 아버지라 불린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아버지'라는 호칭이 사용된 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처음이었다. 그 어느 누구도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으며, 그분의 거룩한 이름조차 입으로 말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십계명 중 셋째계명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녕되이 일컫는 자의 죄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묻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출20:7).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가 사람의 아들인가? 아니면 그냥 아들이신가? 눅1:35에 의하면, 예수께서 처녀인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실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울 것이라고 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하나님)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칭함을 받으리라, 불리울 것이라)(눅1:35)"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할 때에는 그분을 단지 사람으로 태어나셨다는 측면에서만 칭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셨다는 측면에서도 불리는 명칭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의 신성과 인성을 같이 아울러 부르는 명칭인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까, 그것이 완전히 그분의 신성만을 가리키는 호칭정도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어찌되었든 예수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 태어나심으로 비로소 아들이라고 칭함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을 뜻하는 말인 것을 우선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땅에 아들로 오신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실 때에, 그분은 우리 인간과 어떤 공통점이 있으셨고 어떤 차이점이 있었을까? 그분이 사람으로서 우리와 다른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선 알 것은 그분은 우리 인간과 똑같은 인성을 취하셨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분은 죄된 본성이 없으시다는 것이다. 그분은 아담의 혈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이다(눅1:35). 다시 말해 그분의 부성은 하나님이신 것이지 결코 요셉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그분을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라고 했었고(고후5:21), 히브리서 기자는 그분은 우리와 성정이 같으시지만 죄는 없으시다고 했었다(히4:15). 그렇다. 예수님은 대부분 우리 인간과 똑같으시다. 예를 들자면, 그분도 먹지 않으시면 배고프셨으며, 먹고 소화시켰으면 화장실을 가야 했다. 그리고 많은 일을 행하신 후에는 피곤하기에 쉬셔야 하셨으며, 여기 있으면 저기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었다. 그분은 비록 하나님의 신성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인성의 측면에 있어서는 우리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에 사탄마귀도 그분을 시험하러 들었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기에 사탄은 얼마든지 아담처럼 그분을 유혹하여 넘어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기에 그분에게 세번씩이나 시험한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기에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마4:1~11). 뿐만 아니라 그분은 사람이셨기에 하나님께 기도해야 했고, 고난을 겪어가면서 순종을 배우셔야 했다(히5:8). 그분도 육체로 계신 이상,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아버지께 올리셔야했다(히5:7). 그분이 드린 겟세마네동산의 간절한 기도를 보라(눅22:44). 또한 그분은 사람이었기에 어떤 면에서는 모르시는 것도 있으셨다. 다시 말해, 재림의 날짜에 관해 묻는 질문에 그분은 자신이 다시 오실 날은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으며(마24:36), 아버지는 자기보다 크시다고 말씀하셨다(요14:28). 여기에서 예수께서 아버지가 자기보다 크시다고 하실 때에는 육신을 입고 오신 아들의 측면에서 말씀하신 것이지, 사실 신성의 측면에서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사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기에 아버지와 동일하신 분이시다(요10:30). 그렇다. 예수님은 이 땅에 아들로서 오셨다. 그리고 아들로서 사역하실 때에 그분은 아들로서 지켜야 할 본분을 철저히 다 지키셨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육체로부터 그분의 인성을 분리해낼 수는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기 때문이다(골2:9). 우리는 그분이 육체를 지니신 것을 보고 그 육체가 곧 인성이라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신성이 육체로 거하셨기 때문에, 육체가 곧 인성이라고 말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1장에서는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심으로, 예수께서 취하신 육신이 인성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인성을 취하신 것일까? 다시 말해, 그분은 왜 아들로서 이 세상에 탄생하신 것인가? 그분이 인성을 취하신 것 곧 그분이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궁극적으로 딱 2가지 목적 때문이다. 하나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얻기 위함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의 반역하고 쫓겨난 가운데 인간들을 죄로 유혹하고 있는 마귀를 처단하시기 위함이다. 인간을 구원하시려면 인간의 죄값을 대신해야 하는데, 인간의 죄값은 사망이기에 그분이 죽으시려면 사람이 되셔야 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궁극적인 계획은 하나님께서 어느날 갑자기 세우신 것이 아니다. 이러한 계획은 이미 만세전에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었다. 다시 말해,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낳고 그들로 하여금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할 것이라는 뜻을 품고 계셨던 것이다. 엡1장을 보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3-5)" 하나님의 생각속에는 이미 만세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을 얻으시고 그들의 분량에 따라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마음을 갖고 계셨던 것이다(엡3:6). 그것도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이자 상속자들로 품고 계셨던 것이다(엡3:6, 롬8:17).

  그렇다면, 그리스도이자 아들은 언제부터 존재한 것인가? 만세전부터 존재한 것인가 아니면 동정녀 마리아의 태를 통해서 태어날 때부터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의 속성을 모른다면 사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부분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아들로서 만세전부터 존재하셨는지에 대해서 알려면, 우리가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2가지가 있다. 그것은 다윗의 찬양 속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선재성(시110:1)과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 속에 등장하는 아들의 선재성이 관한 부분이다. 오늘날에 여호와증인이나 삼위일체론자들은 이 구절들을 인용하여 예수께서 만세전에 아들로서 존재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과연 예수께서는 만세전에 아들이자 그리스도로서 선재하고 계셨던 것일까?

  먼저, 다윗의 찬양 속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선재성에 관한 부분을 살펴보자.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110:1)" 여기에 나오는 "내 주"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훗날 예수께서 직접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다(마22:43~45). 그렇다면 실로 놀라운 찬양이 아닐 수 없다. 다윗은 예수께서 태어나기 천 년 전의 사람인데, 어찌 이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말인가? 사실 그리스도께서 만물이 창조하기도 전에 선재하셨다고 주장하는 성경구절은 이것뿐이다. 단 한 개의 성경구절이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아들의 대제사장적인 기도를 살펴보자.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5)" 여기에 보면,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미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신 것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그래서 여호와증인이나 삼위일체론자들은 이 구절을 들이대면서, 예수께서는 이미 만물이 창조되기도 전에 그리스도 내지는 아들로 선재하셨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수수께기를 풀려면, 오늘 전했던 말씀의 서두를 잠깐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 아버지가 되셨는가? 분명한 사실은 아들이 이 땅에 탄생할 때부터였다. 그 전까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자 그의 이름이 여호와로서만 존재하셨다. 그 전까지 하나님은 아버지로 존재하신 것이 아니다. 아들이 있어야 아버지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재적인 내용과 다윗의 찬양 및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서,  이 두 가지 사실을 어떻게 조화롭게 풀 수가 있을지를 생각해보자. 여기에 그 해답의 실마리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성과 무소부재성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다. 사실 그분은 천지만물이 창조되기 전에는 그분 홀로 계셨다. 그분만이 자존이 가능하신 분이셨다. 그러나 그분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심으로인하여 그때부터 그분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그분이 만세전에 어떤 계획을 품으셨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을 감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도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만약 그분이 창조사역을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하늘들과 지구를 지었고, 그 지구 안에는 사람을 지었으며, 사람 안에 영을 지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슥12:1). 그런데 이러한 창조의 이야기는 모두가 다 시간 속에서 펼쳐지게 된다. 그렇다고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시간에 제한받는 분은 아니시다. 시간을 한 눈으로 찍어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에게는 과거도 현재이며, 미래도 현재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처음이요 마지막이며, 시작과 끝이며, 알파와 오메가이시기 때문이다(사41:4,44:6,48:12, 계1:17,21:6,22:13). 그분은 시간을 창조하시고 시간밖에 계시는 전능하신 분이기에 시간을 언제든지 되돌려볼 수도 있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시간밖에 거하시는 그분의 관점을 우리는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장차 인류구원을 위한 그리스도 혹은 아들이라는 존재는 이미 있었던 것이다아직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생각 속에는 이미 그리스도가 존재하고 있었고, 아들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이나 그리스도가 언제부터 존재했느냐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인간의 관점이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관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에, 아들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실 때에 존재하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아들은 이미 만세전에 하나님의 생각 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불러내신다. 또한 아직 존재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시편110:1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다윗은 예수님이 탄생하시기도 전에, 그리스도이자 아들이신 예수님을 볼 수 있었는지를 말이다. 그것은 시간을 한 눈으로 찍어보시는 하나님께서 미래에 일어날 일을 다윗에게 미리 보여주셨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생각속에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지상의 사역을 마치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다윗이 본 것은 그리스도의 실제를 본 것이 아니라 미래의 일을 본 것이다. 이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심에 기인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생각 속에는 이미 그리스도가 지상의 사역을 마치고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우편에 계셨던 것이다. 그분의 생각 속에는 자신이 이 땅에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오시어 피흘림의 속죄사역을 완성하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측면에서 볼 때 아들이신 예수님은 동정녀마리아의 태에서 탄생하실 때에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인성의 측면에서 볼 때 아들은 이처럼 시작이 있으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아들은 끝도 있을 것이다. 아직 한 가지 사역을 끝마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까지 아들은 아들로서 존재하실 것이다. 그 일은 바로 원수마귀를 처단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대적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죄짓도록 유혹했던 루시퍼와 그의 졸개들을 심판하셔야 아들로서 사역이 끝이난다. 그 날은 언제일까? 그것은 아들이 재림하시는 날이다.

  이제 오늘 읽었던 말씀(고전15:22~28)을 살펴보자. 이 말씀은 예수님과 성도들의 부활 및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말씀이다. 이때 사도바울은 아들의 사역이 언제 끝마칠 것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그리스도께서 원수마귀를 멸하시고 모든 만물을 자기의 발아래에 두실 때에, 아들 자신도 만물을 복종케 하신 하나님께 복종하심으로써,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계실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이자 아들로서 해야 할 2가지 사역이 두 가지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이자 상속자가 되게 하는 일이었고, 또 하나는 원수마귀와 그의 세력들을 멸하는 일이었다. 전자의 일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구속사역을 행하심으로 성취되었다. 그래서 그날 예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요19:30). 인류를 위한 구속사역을 완성하셨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가 더 남아있다. 그 일은 예수께서 재림하신 직후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들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원수마귀를 지금 당장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때까지 두시려 한다는 것인지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를 생산하는 데에 사탄마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원수마귀가 있어야 인간이 자유의지로서 마귀를 선택할 것인지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 날이 머지 않았다. 그러므로 시간밖에 계시는 하나님, 시간의 시작이요 마침이신 그분께서 원수마귀를 지옥에 쳐넣으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실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또 다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실 것이다(계21:8) "(다)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계21:8)" 이때에, 또 다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심은 원수마귀까지 다 처단하심으로 다 이루셨다는 말씀하신 것이다.그러면 아들이라는 신분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그분만이 홀로 하나님이시며 온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핵심은 인간에게 있었다. 장차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하고 상속자가 되게 하려는 데에 창조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마귀의 유혹 때문에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생각 속에는 이미 하나님 자신이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시어 인간의 죄를 대속하고 죽으실 것도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인간구속을 위한 사역을 완성하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있을 것임도 들어 있었다(시110:1).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원수마귀를 멸하실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아들의 존재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는 더 이상 하나님도 아버지이니 혹은 아들이니 하고 불리우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다시 원래의 모습 오직 한 분으로 계실 것이니 말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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