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09)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08)(계3:5)_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이시다(1)_2022-05-06(금)

https://youtu.be/L87C_JHi--E  [혹은 https://tv.naver.com/v/26759086 ]

 

1. 요한계시록에는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심을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가?

  요한계시록은 이미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계3:21). 그분이 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계1:8, 1:17, 22:13). 그러나 그분은 아직도 아들로서 해야 할 사역이 남아 있다. 그러한 일에는 재림과 심판 사역이 있다. 그런데 언젠가 그분이 아들로서의 사역을 마치게 된다면 그분은 이제 모든 것을 끝마치시고 안식하시게 될 것이다. 사실 모든 것의 시작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된 것이며, 그분을 위하여 된 것이었다(골1:16). 그러므로 그분께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 그것들을 완성하시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시작하셨던 모든 것을 끝내실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구속으로 인하여 1차적인 사역을 완성하신 예수께서는 이미 천국에 들어가셔서 주 하나님으로서 일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예수님은 주 하나님께서 가지시고 있는 모든 것들을 가지고 계신 분으로 존재하고 있다. 곧 그분은 첫째로, 주 하나님이시다(계1:8, 22:20~21). 둘째로, 자기 스스로를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고 소개하고 있다(계1:4,8, 2:8, 21:6, 22:13). 셋째로 그분은 자신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올 자'로 말씀하신다(1:4,8, 4:8, 11:17, 16:5). 넷째로, 그분은 전능한 자이시다(1:8, 4:8, 11:17, 15:3, 16:7,14, 19:6,15, 21:22). 그리고 다섯째로, 그분은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이시다(계10:6, 15:7). 그리고 여섯째로, 그분은 보좌에 앉아 계신 이(4:2,3,9,10, 5:1,7,13, 6:16, 7:10,15, 19:4, 21:5)이시다. 그리고 일곱째로 그분은 창조주이시다(계4:8,14:7). 그리고 여덟째로서, 그분은 아버지와 하나이신 분이시다(계1:17, 22:13, 22:1,3, 3:21). 

 

2.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어떤 관계인가?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어떤 관계인가?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신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그렇게 말씀하신다(계2:27, 3:5, 3:21). 그리고 사도 요한을 통하여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라고 증거하고 있다(계1:6, 14:1)

계2: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계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계1: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계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우리는 이상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셨지만 아직까지 하나님의 우편에서 아들로서 해야 할 사역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게는 아마겟돈 전쟁으로 사탄 마귀의 세력들을 쳐부술 일과 진실한 성도들 곧 이기는 자들에게 상을 주실 일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과 심판과 상급 수여가 끝날 때까지 예수께서는 주 하나님이시지만 여전히 아들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실 것이다. 

 

3. 실제 예수님과 아버지께서 하나라는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구약의 성경은 무엇인가?

  분명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가리켜 "나를 보내셨던 자(아버지)"라고 지칭하셨다(요8:18,14:23, 17:18,25). 그리고 자신은 "보냄을 받은 자(아들)"라고 말씀하셨다(요8:32). 그러나 보내셨던 아버지와 보내심을 받은 아들은 '둘'(two)이 아니라 '하나(one)'라고 말씀하셨다(요10:30). 왜 그런가? 그것은 예수님을 본 자는 곧 아버지를 본 것이요(요14:9~10),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통하여 그분의 일을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요14:10). 그런데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말씀하는 것이고, 구약 시대에도 예수님과 아버지가 하나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책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사야서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사야서만을 읽어서는 그러한 사실을 발견하기가 쉽지는 않다. 이사야서와 요한복음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함께 읽을 때에라야 그것을 발견하기가 용이하다. 왜냐하면 이사야서에서는 첫째,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는 자기 선언은 오직 여호와께서만 하셨기 때문이요(시41:4, 44:6, 48:12), 둘째,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오실 길을 예비할 자를 보내신다고 하셨는데, 그는 바로 선구자로서 광야에 외치는 소리라고 하였기 때문이다(사40:3). 그런데 실제로는 예수께서 오셨고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서 그 길을 예비한 자는 세례 요한이었기 때문이다(마3장,막1장,눅3장,요1장). 셋째, 오직 여호와 한 분만이 홀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언급하셨기 때문이다(사44:24). 다시 말해,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 곧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모여 협의를 했다는 것과 같은 진술은 구약에 없기 때문이요, 창1:26~27의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기 때문이다(전 총신대 구약학교수 김정우 교수 논문 참조). 고로 이사야서는 메시야에 대해 예언으로서의 가장 탁월하고 많은 분량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한 분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에 대해서도 역시 아주 많은 분량의 예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4. 이사야 선지자가 들려주는 예수님의 주 하나님 되심의 증거는 무엇인가?

  이사야서가 들려주는 예수님의 주 하나님 되심의 증거는 무엇인가? 사실 이사야 선지자의 활동시기는 A.D.700년경이었지만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탁월한 계시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러면 이사야서에서 들려주는 예수님의 주 하나님 되심의 증거들은 대체 무엇인가? 첫째, 이사야서에서는 누군가 '여호와의 오실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세례요한에 주 예수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셨기 때문이다. 둘째, 이사야서에서는 하나님만이 홀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계3:14). 셋째, 여호와만이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께서 '나는 처음으로 마지막이다'라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계22:13). 넷째, 이사야서에는 장차 오실 메시야는 아기이자 아들로 오실 것인데 그 아기와 아들은 '기묘자인 모사(뛰어난 보혜사)'요, '전능한 하나님' 혹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울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사9:6), 실제적으로 아기이자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 보혜사와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5.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자신을 어떻게 묘사하였는가?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께서 하나님이신지를 잘 몰라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그들은 예수께서 만세 전부터 하나님으로 계셨던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은 요한복음에서는 바로 첫 장부터 알려주고 있다. 즉 요한복음에서는 1장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으로 계셨다가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또한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본 후에는 곧바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그렇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다(요1:1~3, 49).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지만, 둘은 하나라고 말씀하셨다(요10:30). 그리고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했을 때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아버지를 보이라고 하느냐"고 말씀하심으로 예수께서 곧 아버지라고 보아야 함을 말씀하셨던 것이다(요14:9). 아버지가 아들과 어떠한 밀접한 관계에 있는지를 시간 관계상 다음 시간에 또 계속적으로 더 살펴보도록 하자. 

 

2022년 05월 06일(금)

정병진목사

 

요한이서는 누가 썼으며, 누구에게 쓴 책인가? 이 책을 왜 초기 교회 사람들은 '요한이서'라고 명명했는가? 사도 요한은 왜 요한일서 외에도 요한이서의 편지를 써 보내야만 했는가? 초신자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은 무엇이며, 또한 누구를 가장 조심해야 하는가?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믿음은 왜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리도 중요한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왜 이단세력들을 가까이하면 아니 되는가? 이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오늘의 말씀이다. 2022-01-05(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서신강해(08) 진리 안에서 사랑하고 미혹하는 자를 물리치는 방법(요이1:1~1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IqdK5RJyMtQ [혹은 https://tv.naver.com/v/24488603 ]

 

1. 들어가며

  요한이서는 어떤 책인가? 사실 요한이서는 성도들에게 왠지 낯설은 책이다. 왜냐하면 요한이서는 요한일서에 비하면 그리 많이 읽혀지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요한이서는 요한일서에서 이어서 나오는 책으로 우리에게 주어져있다. 그렇다면 과연 요한이서는 요한일서의 저자였던 사도 요한이 쓴 것일까? 아니면 '장로'로 지명된 어떤 특정한 무명의 인물이 기록한 것인가? 그리고 요한이서는 요한일서와 대체 어떤 관련이 있길래 '요한이서'라고 명명되어 있는가? 이제 곧 요한이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요한이서는 전형적인 편지 형식의 서신서이다. 편지로서 요한이서를 보면 오히려 요한일서가 파격젹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요한일서는 송신자와 수신자를 기록하지 않고 있으며, 문안인사나 끝인사도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한이서와 요한일서와 관련이 있다고 하는 가정하에 요한이서를 본다면, 이 책은 과연 어떤 목적을 따라 기록된 것인가? 요한일서에 미처 기록하지 못했던 내용이 있어서 저자가 그것을 요한이서에 기록한 것인가? 아니면 요한일서의 편지를 보내고 난 후 수신자들에게 발생한 어떤 특정한 사건 때문에 저자가 다시 요한이서를 써서 보낸 것인가? 기왕 요한이서를 공부하려 들어왔다면, 지금이야말로 요한이서를 제대로 공부할 때가 아닌가 싶다. 

 

2. 요한이서는 어떤 책인가?

  요한이서는 누가 쓴 책인가? 요한이서는 이 책을 '장로'라고 자신을 밝히고 있는 분이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요이1:1). 그렇다면 이 '장로'라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헬라어로 보니, '호 프레스뷔테로스'라는 단어인데, 그것은 '그 장로'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떤 특정한 인물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장로'는 사도 요한인가 아니면 다른 특정한 인물인가? 이를 위해서 우리는 요한이서의 내용과 필체에 관심을 갖지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책 제목이 '요한이서'라고 명명되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요한일서에 붙어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저자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요한이서에 나오는 거의 대부분의 용어들이 요한일서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진리, 아버지와 아들, 사랑, 새 계명, 처음부터, 미혹하는 자,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 적그리스도" 등이 아예 똑같은 단어이다. 그리고 중심주제도 거의 같다.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 "미혹하는 자를 주의하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요한이서는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구체적이고 실체적이다. 즉 요한일서에 비해 새롭게 추가된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았을 때, 요한이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당시 사도 요한은 그의 나이가 90세 정도는 되었기에 장로라고 명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초대 교부들 대부분은 요한이서를 사도 요한 저작으로 인정한다. 예를 들어, 폴리캅(Polycarp), 이레네우스(Irenaeus),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등이 그렇다. 다만 이 책의 저자가 자기자신을 가리켜 ‘장로’(1:1)로 표현한 것을 두고 사도 요한이 아니라 다른 익명의 장로(Eusebius, Papias)로 추측하는 분들도 있기는 하지만, ‘장로’라는 호칭이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에는 나이가 지긋하고 연륜이 많은 자에 대한 존칭의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벧전 5:1), '장로'라는 호칭은 사도 요한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3. 요한이서의 수신자는 누구인가?

  나이가 많은 사도 요한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 책은 대체 누구에게 써 보낸 책인가? 장로는 이렇게 말한다. "선택함을 받은 부녀와 그녀의 자녀들(1:1))" 혹은 "선택함을 받은 너의 자매들의 자녀들(1;13)"이 그 수신자라고 말한다. 그러면, '부녀' 혹은 '너'로 지칭되는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먼저 '부녀'를 헬라어로 보면, '퀴리아'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퀴리오스'('주')의 여성형 명사로서, 어떤 여성의 이름일 수도 있고, 주님의 몸된 교회 공동체 전체를 지칭하는 표현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퀴리아'를 어떤 개인으로 보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우리'와 '너희'가 비교되면서 등장하는데 개인을 지칭하기 보다는 교회공동체를 향해 부르는 표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이서의 수신자로 등장하는 '퀴리아'란 아마도 교회공동체를 지칭하는 대유명사인 듯 하다. 그러므로 여기어 덧붙혀 퀴리아의 자녀들 역시 교회공동체의 각 구성원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4. 요한이서는 왜 기록했으며,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 장로는 왜 요한이서를 기록해야 했는가? 앞에서 살펴본대로 본 저작을 나이 많은 장로였던 사도 요한으로 가정한다면, 이 편지는 요한일서를 보내고 난 뒤고 얼마 안 있어서 써 보낸 편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첫째, 본 서신의 내용이 요한일서를 읽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한 교회공동체를 향한 사도 요한의 칭찬과 기쁨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요이1:4~6). 그리고 둘째, 이 편지를 써 보내야 했던 직접적인 목적이 중후반에 나오기 때문이다(요이1:7~11). 그것은 바로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인 세력을 경계하라는 메시지다. 그것도 그들을 결코 가까이 하지 말고 그들을 배척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요한일서를 보내고 난 뒤에 어떤 일들이 교회에서 일어난 것을 알게 된 장로 요한은 이 책을 곧이어 써보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요한이서는 편지 형식을 고스란히 갖춘 전형적인 서신서라고 할 수 있다. 이 편지를 당시 상황을 고려해보나면, 장로 요한이 에베소교회나 혹은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의 회람용 서신으로 이 편지를 기록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 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이 편지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이 편지의 송신자가 수신자에게 전하는 인삿말(1:1~3)이다. 그리고 둘째는 본 편지를 보내는 2가지 주된 목적(1:4~11)이 나온다. 그리고 셋째는 끝 인삿말(1;12~13)이 나온다. 

 

5. 장로 요한이 첫 인사말에서 전하고 있는 '진리'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장로 요한은 서두 인삿말(1:1~3)에서 각 절마다 '진리'에 대해 언급한다. 이 편지의 발신자인 장로 요한 뿐만 아니라 "진리를 아는 채 있는 모든 자들"도 역시 수신자인 퀴리아와 그녀의 자녀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언급한다(1절). 그리고 진리가 장로 요한 및 그와 함께 있는 이들 안에 머물고 있으며, 또한 그 진리는 그들과 영원히 함께 할 것이라고 확신있게 말한다(2절). 그리고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부터 나와서 진리와 진리 안에 함께 할 것이라고 말한다(3절). 그렇다면 장로 요한이 말하고 있는 이 '진리'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우리가 이 진라('알레데이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이서의 말씀과 함께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의 책을 함께 검토해본다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장로 요한이 쓰고 있는 '진리'가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도 동시에 많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진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되는 말이다(요1:17, 14:6). 또한 예수께서는 진리를 말씀하는 분이시다(요8:40,45). 그리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말씀 또한 진리다(요17:17,8:40) 더욱이 예수께서 떠나가시면서 당신을 대신하여 보내주실 보혜사 성령도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하셨다(요15:26, 16;13).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요한이서에서는 진리에 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진술이 나온다. 그것은 '진리'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부터 나오는 어떤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요이1:2,9). 고로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말씀이 곧 진리이자 아버지와 아들이 하신 말씀이 곧 진리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아닌 다른 존재가 하는 말은 진리라고 말할 수 없다. 특히 마귀가 하는 말은 결코 진리가 아니며 그것은 거짓이다(요8:44). 왜냐하면 그는 거짓말장이요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인량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알아야 한다.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을 알 때에 그 사람은 진리 안에 거할 수 있게 되며,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요17:3). 그래서 장로 요한은 진리를 받은 자는 진리 안에서 걸어가는(행하는) 자라고 말했다. 특히 장로 요한은 부녀와 그녀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매우 기쁘다고 하면서 이 편지를 썼다(요이1:4).

 

6.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어 장로 요한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 곧 진리 안에서 걸어가고 있는 부녀와 그녀의 자녀들 때문에 매우 기뻐한다. 실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어 아들이 되셨다. 그러므로 아들을 소유한 자는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소유한 것이며, 진리를 소유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장로 요한은 "진리가 우리 안에 거주하고 있으며, 진리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요이1;2)"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퀴리아와 그녀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걸어가고(행하고) 있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인가? 그것은 진리이신 아버지와 아들이 걸어간대로 행하는 것을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한 마디로, 사랑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요, 새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요이1:4~6).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의]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그렇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인들을 위해 그들이 지은 죄를 용서해주려고 화목제물로써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이 '사랑'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셨다는 말을 정확히 이해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디에 따로 있는 아들이 있어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다.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요1:1~3,14,18, 딤전3:16),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임마누엘 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마1:23). 즉 아기이자 아들로 오신 분은 원래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셨던 것이다(사9: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기 위해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것 그리고 그분의 몸을 우리 인류의 화목제물이자 속죄제물로 바치신 것이 곧 '사랑'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아들을 성령을 통하여 받게 된 모든 믿는 이들은 자기 속에서부터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의 품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을 모신 자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을 받은 자 처음부터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요이1:6). 그러므로 모든 믿는 자들은 형제와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자기 안에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7. 당시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은 누구였는가?

  늙은 요한 사도는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왜 그토록 심히 중요하게 여긴 것일까? 특히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을 적그리스요 미혹하는 자라고 말하는 것인가?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 그 자체만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 실은 이 진술에는 엄청난 더 큰 비밀이 담겨 있다. 왜냐하면 에수님의 성육신에 대한 인정은 결국 이단이 되느냐 정통 신안을 갖는 것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변수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당시 영지주의 이단 세력들의 미혹이 매우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아버지와 아들을 각기 다른 존재로 보고 있었으며, 예수와 그리스도를 별개의 존재라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것 자체를 부인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또한 부인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은 이와같은 많은 진술들을 부인한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주 크고도 중요한 문제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육신을 믿고 혹은 부인하는 것은 그 바로 진리의 영을 따르는 사람인가 아니면 미혹의 영을 따르는 사람인가를 분별해주는 중요한 잣대가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실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구원과 멸망 곧 천국과 지옥이 갈려지기 때문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영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고만 보았다. 그리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영적인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문제라든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지 아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신 것인지 아닌지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안았다.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구원의 정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육신의 사건은 죄를 지은 인류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 만약 그날 예수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지 않으셨다면 모든 인류는 죄의 댓가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고 또한 죽어서는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모든 모람들 가운데에는 그 어떤 사람도 대속제물로 죽을만한 흠없는 사람이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육신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가 없다. 그런데 그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부인하는 이들이 영지주의자들이었다. 아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가 바로 적그리스도요 이단이라는 것을 알고 그들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8. 왜 성도들은 영지주의자들을 받아주지 말고 멀리해야 하는가?

  왜 성도들은 영지주의자들을 자기의 집 안으로 모셔들이지 말고 그들을 멀리 해야 하는가? 심지어 노 사도는 그들에게 인사도 하지 말라고 주문하는가? 그것은 그들은 암덩어리로 누룩과 같이 그들을 용납할 때 많은 영혼이 주님의 성육신을 부인하여 더럽혀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육신이 아니고는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없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그 일을 행하신 것인데, 성육신 자체를 부정하고 있으니 큰 일이 되는 것이다. 영지주의 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성육신은 일종의 타락이다. 그들은 신성한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을 리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가게 되면 그는 결국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정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초신자들이 잘 알 리가 없다. 더욱이 영지주의자들은 초기교회의 성도들의 손님대접 습관을 악이용하려고 하기 땜누에 그 문제는 더욱 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손님대접하는 일은 구약시대부터 손대접하기를 힘쓰라는 말씀에 따라, 히브리인들이나 지금의 베두인들까지도 기본적으로 실천하는 풍습이었다(히13;2, 롬12;13, 눅9:3~5, 10:7~11). 그런데 이것을 악이용하여 마치 자기들이 참된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인량 가장하여 침투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니 이들의 가르침을 들은 자들은 쉽게 이들의 마수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늙은 노 사도는 요한일서를 보낸 후에 빨리 이 문제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둘째 편지를 써 보낸 것이다. 교회가 이단세력에 의해 잠식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그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자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는 아예 집에 들이지도 말라. 그리고 그들에게 인사도 건네지 말라. 만약 그들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들의 악한 일에 동참하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이단의 가르침을 믿고 따라간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장로 요한은 일차적으로 그런 자는 자기가 주님을 위해 힘써 일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요이1:8a). 그리고 그리스도로부터 온전한 보상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요이1:8b). 그리하여 이단에 빠진 것을 회개하지 못하는 자가 발생한다면, 그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지 못한 채 영원한 멸망에 처하고 말 것이다. 

 

9. 나오며

  장로 요한은 위와 같은 교회의 현실과 이단의 위험성을 너무나 잘 간파하고 있었기에 교회의 성도들에게 요한일서의 편지를 쓰는 것만으로 많이 부족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마지마긍로 파피루스 종이나 잉크로 그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는 것보다는 직접 가서 이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요이1:12~13). 그렇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러한 이단 세력들이 여기 저기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들은 교묘한 속임수로 위장하여 성도들을 미혹한다. 특히 요즘 들어와 이단들은 성도들을 호리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알레고리컬 성경해석법을 들이밀며 성도들을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영지주의 계열의 이단들은 비유로 하신 말씀의의 실체를 알려준다고 접근한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성경의 비밀을 제대로 깨우쳐주는 것인량 가장하여 미혹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종류의 이단들은 대부분 지식을 사용하는 악한 영들 가운데 상당히 높은 계급의 영들이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성경의 비유해석과 논리를 가지고 접근해 들어온다면 먼저 그를 시험해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것을 믿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이단은 교만한 말장난으로 그것을 피해가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 이에 장로 요한은 초신자들은 이러한 이단 세력들을 처음부터 아예 용납하지 않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자신이 마치 훌륭한 성경교사인 것처럼 가장하여 들어오기 때문에, 분별력 없이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가게 되면 그들의 미혹에 금방 빠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 사도는 이러한 거짓 교사들을 빨리 내쳐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 때 사용할 기준은 이것이다.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가 첫째,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것을 부인하는가 인정하는가를 보라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와 예수님이 한 분이신가 아닌가를 물어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분명하지 않거나 잘못 전하는 자는 이단의 세력이 될 수 있기에, 이런 자들은 사도 바울의 말처럼 한 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딛3:10~11). 

 

2022년 01월 05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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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2-01-05 요한이서 헬라어직역과 명령과선포.pptx

2. 2022-01-05 요한이서 헬라어직역과 명령과선포.PDF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상강해(24) 불신앙의 아버지와 신앙의 아들의 차이(삼상14:1~15)_2021-12-14(화)

https://youtu.be/PxNMWBQbdR4  [ 혹은 https://tv.naver.com/v/24069443 ]

 

1. 중과부적의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이길 수 있는 계기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B.C.1048년경 요나단과 그의 군사 1,000명이 블레셋 수비대를 치는 바람에 시작된 이스라엘과 블레셋과의 전쟁은 이스라엘에게 매우 불리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왜냐하면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철병거가 무려 3만 대나 되었고, 기병이 육천 명, 보병은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았기 때문이다(삼상13:5). 그리고 영적인 측면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사울왕과 선지자 사무엘은 전쟁하기 전에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했었는데, 사무엘이 좀 늦어지자 다급해진 사울왕이 제사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번제를 드리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흩어지기 시작하였고 숨기에 바빴으며 심지어는 요단강을 건너가 요단강 동편 땅으로 도망치는 사람도 있게 되었다. 더욱이 무기도 턱없이 부족하여 어떻게 전쟁할 용기가 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이 용기를 내었다. 그가 자기의 병기든 자와 더불어 적진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2. 요나단은 어떻게 해서 적을 교란시킬 수 있었는가?

  요나단은 전세를 빨리 파악할 줄 알았다. 왜냐하면 평지로 가서 전투해서는 승산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평지에는 적의 전차 부대와 기병이 어마어마하게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일대일로 전투할 것을 결정하고는, 그가 갈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일 수 없는 장소를 선택하였으니 그곳은 바위가 가득한 곳이었다. 요나단은 자기 진영으로부터 약 1.5km 떨어진 곳까지 도보로 이동하여 바위를 타고 적진으로 올라간다. 그러면서 그때 요나단은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 "하나님, 내가 바위를 타고 올라가 적진으로 갈 때에 만약 적이 '우리가 너희에게로 갈테니 거기서 기다리라'고 말한다면 우리가 있는 곳에서 그들에게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우리에게로 올라오라'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저들을 우리의 손에 넘기신 줄을 알고 적에게 가서 싸우겠습니다(삼상14:9~10)" 그런데 적이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오라. 우리가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이 있느니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절호의 찬스라는 것을 알아차린 요나단은 병기든 자와 함께 적진으로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다 무찔러 버린다. 무려 반나절 크기의 땅 안에서 20명을 쳐죽이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자 평지에 있는 블레셋 사람들이 공포에 떨기 시작하였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고 땅이 진동하게 된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은 도망치기에 급급한 나머지 자기의 군사들을 쳐죽이면서 도망치는 것이었다. 

 

3.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요나단의 용맹스런 개인 전투로 인하여 적의 기세가 꺾이게 되자, 블레셋에 용병으로 참여했던 히브리인들이 금세 요나단 편에 가담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산지와 토굴에 숨어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블레셋 사람들이 도망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다시 싸우러 나와서 전쟁하였으니, 그렇게 많은 숫자가 참여했던 블레셋이었지만 결국에는 지리멸렬한 군대가 되어 뿔뿔이 흩어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전세가 완전히 뒤집혀진 것이다. 이어 사울은 새로 합류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나가서 종일 싸워 블레셋을 거의 물리치게 된다. 

 

4.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은 드디어 어떤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는가?

  놀라운 사실은 그토록 신앙이 있어 보였고, 인격도 훌륭하여서 예의도 바르게 보였던 사울 그리고 전쟁까지도 잘 치렀던 사울인데, 이번 블레셋과의 전투에서는 좀 다른 면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사울에게서 흠이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그가 전쟁에서 보여 준 승패의 결정은 알고 보니 오로지 군사의 숫자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전에 첫 번째로 치른 전쟁에서 사울은 자기를 따르는 군사가 무려 33만 명이나 되었지만 이번에는 고작 600명만 가지고 전쟁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는 지레 겁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그는 군사력 곧 군사의 숫자에 민감했던 것이다. 둘째, 그의 명령을 살펴보면 지혜롭지 못한 명령이 들어 있었고, 경솔하게 말을 내뱉음으로 인하여 왕의 권위를 상당히 떨어뜨렸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제 반나절 동안의 전쟁에서 승리했기에 계속해서 백성을 전쟁에 참여시키고자, 원수에 대한 보복이 끝나는 때까지 어떤 음식물도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금식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내 이스라엘 군대의 사기 저하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저녁이 되자 누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곧 군사들은 양과 소와 송아지들을 잡아 먹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사울왕의 금식령은 경솔한 명령이자 좋지 못한 작전이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도망가는 블레셋 군사들을 추격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또 한 번의 실수를 하게 된다. 즉 추격하라는 하나님의 공격 명령을 받지 못하자, 사울은 그 이유를 찾아내기로 결정하는데, 그만 자기와 자기의 아들이 뽑히게 된다. 그중에서 요나단이 최종적으로 선택된다. 그러므로 금식령 기간 중에 무엇을 했는지 그에게 물어보자, 요나단은 자기와 자기의 병기 든 자가 전쟁할 때에 배가 고파서 수풀에 있는 꿀을 찍어 먹고 눈이 잘 보여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결국 요나단은 결과적으로 아버지의 명령에 불순종한 사람이 되어버렸고 아버지에게 죽임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렇지만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서 이번 전쟁의 성패가 누구 때문에 반전되었는지를 말하면서 요나단을 죽이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 일로 인해 전의가 많이 약해졌기에 블레셋 병사들에 대한 잔병 처리도 하지 못한 채 전쟁은 끝나게 된다. 

 

5.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과 요나단에게서 발생된 일의 차이는 무엇이었나?

  이번 블레셋과의 전쟁은 사실 사울왕에게 있어서는 진짜 중요한 전쟁이었다. 왜냐하면 사울왕의 사명은 다른 것이 아니라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사울왕은 오히려 나쁜 방향으로 가 버리게 된다. 그것은 적을 두려워하는 간이 작은 사람으로, 군사력만을 의지하는 불신앙의 사람으로, 경솔하고 가벼운 말과 지혜롭지 못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전쟁을 통해 왕의 권위는 상당 부분 약화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요나단은 달랐다. 전쟁의 성패는 군사의 숫자가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요(삼상14:6), 그리고 아무도 용기내는 자가 없을 때에 솔선수범하여 적진에 뛰어들었고, 적들을 물리침으로 침체되어 있는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용감했으며,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을 신뢰하되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것에 응답으로서 전쟁을 하는 매우 깊은 신앙심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불신앙자는 늘 환경을 보고 환경에 따라 흔들리며 허우적댄다. 하지만 진정한 신앙인은 결코 당장 눈에 보이는 환경 요소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이다. 

 

2021년 12월 14일(화)

정병진목사

 

깊고도 오묘한 하나님의 하나됨의 신비,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의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만세전부터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2가지를 계획하셨다. 하나는 인류의 구원사역이요 또 하나는 마귀박멸이다. 그렇지만 구약시대에는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밖으로 나와 따로 존재하지는 않으셨다. 하나님의 생각 속에 아들(로고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때가 차매 드디어 아들이 밖으로 출현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성육신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나타나신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신성한 하나님이 같이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신성은 아버지인 것이다. 아들 안에 있는 영이 곧 아버지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라고 말씀하신 현장 안으로 들어가보자. 그래서 어떻게 되어서 예수께서 자신을 아버지라고 말씀하셨는지 그 이유를 찾아보고,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리자.

2019-01-13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예수님은 어떻게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라고 말씀하시는가?(요10:27~30)
https://youtu.be/xZPVLFEHK4Y


1. 들어가며

  예수님께서는 당신자신을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씀하셨다(요10:30). 예수님은 분명 이 땅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아버지신데, 어떻게 예수님은 아버지와 자신을 하나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그래서인지 유대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발언을 듣고는 감히 인간인 주제에 신성모독을 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든지 아니면 진짜 아버지이든지 둘 중의 하나인 것이다. 예수님은 진짜 아버지이신가? 예수님은 분명 당신을 하나님의 보내신 자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되어 이번에는 아버지와 하나라도 또한 말씀하셨는가? 그래서 오늘은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당신을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씀하신것인지 그 뜻을 살펴보고,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좀 더 찾아보고자 한다.

 

2.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아니면 하나님이신가?

  많은 믿는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정도로 안다. 이들의 신앙고백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머물러 있다. 다시 말해, "당신은 그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물론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계셨을 때, 그분은 그리스도로서 이 세상에 오셨으며,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목적을 일차적으로 완성하신 후, 부활하신 예수님은 더이상 예전의 예수님이 아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분을 더이상 형님처럼 대할 수가 없었다. 그분은 이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제자들은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우리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분이 인류의 속죄를 위해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였다. 하지만 인류의 속죄를 마치고 부활하신 이후부터 그분은 이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부를 때, 나의 주 나의 하나님 곧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다(계1:8).

 

3.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씀하신 근거는 무엇인가?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예수님의 신성이 곧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 안에 있던 그 영이 바로 아버지였던 것이다. 알고 보면 참 간단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가끔씩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하셨다.

요8:19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요12: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요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요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10: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4. 예수님에게는 신성이 있고 인성이 있었다.

  그렇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실 때에 그분의 신성(신성한 하나님)이 육신을 취하신 것이다(딤전3:16). 즉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이 되신 것이다. 이때 예수 안에 들어온 신성이란 다름이 아니라 아버지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서 예수님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성의 영역에서 볼 때, 예수님은 아버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인성의 영역에서 볼 때 예수님은 아들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들이면서 아버지이셨다(사9:6). 그러나 거꾸로 아버지는 자신을 아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에게는 인성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인 모사(보혜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심으로 신성에 인성이 더해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100% 신성과 100% 인성을 가지신 하나님이 되셨다. 신성과 인성이 하나되신 하나님사람이 되신 것이다. 신성의 측면에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또한 전능하시다. 그리고 무소부재하시다. 두 세 사람이 있는 곳에 함께 하고 계셨으며(마18:20), 나다나엘이 무과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조차 다 아시고 계셨다(요1:48). 말씀 한 마디로 무화과나무를 뿌리채 마르게도 하시고, 바람과 풍랑도 잔잔케 하셨으며, 없는 시신경을 창조하시어 날 때부터 눈 먼 소경을 고쳐주셨다. 그러나 인성적 측면에서 예수님은 어릴 적부터 순종을 배우셨다(눅2:51). 그리고 피곤할 때면 주무셔야 했고(막4:38), 새벽 미명이면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막1:35). 겟세마네동산에서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눅22:44). 혹 이러한 기도의 상황을 굳이 설명하라고 한다면, 인성의 하나님(아들)이 신성의 하나님(아버지)께 기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 예수님은 분명히 사람이셨다. 그래서 마귀에게 시험도 받으셨고 사람들에게 처절한 고난도 받으셨다. 그리고 마지막에서는 피흘려 죽으실 수도 있었다(히2:9, 고전15:3).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것은 인성의 아들이 죽으신 것이지 신성의 아버지가 죽은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기에 아들의 죽으심은 곧 하나님의 죽으심과 방불한 것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아버지가 죽으셨다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아버지는 신성이므로 신성한 하나님은 결코 죽으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인성의 아들로서 죽으신 것이다.

 

5. 예수께서는 성육신 하기 전에도 있었는가?

  예수께서는 성육신 하기 전에 있었을까? 예수님이 성육신하기 전에는 아직 인성을 취하기 전의 상태이므로 그분은 신성만 가진 하나님 자신으로 계셨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여호와로 자신을 계시하셨던 그분은 아직 성육신 하기 전의 예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과연 아들이 있었을까? 구약시대에는 아들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있으나, 아직은 나타나지 않은 시기라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만세전에 그리스도 안에도 모든 인류를 구속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자 하는 뜻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벧전1:19~20,계13:8).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 속에는 이미 아들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약시대에는 아직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밖으로 나와 있지 않던 시기이므로, 나타난 아들은 없었다고 해야 한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생각과 계획 속에 있는 아들이 드디어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아들로서 인성을 취하면서 사람이 되셨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아버지의 생각 속에 있던 아들이 드디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난 것을 두고 하나님의 성육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벧전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벧전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벧전1: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그렇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이미 알리신 바 되신 이다. 하지만 그때에 아버지로부터 밖으로 나와 계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우리 인류의 속죄를 위하여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6. 예수님의 성육신은 아들의 성육신인가 아버지의 성육신인가?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성육신은 구약시대에 이미 아버지로부터 나와 있었던 아들이 성육신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여 아들이 되신 것이지, 아들이 성육신하여 아들이 되신 것이 아니다. 구약시대에는 아들은 아직 한 분 하나님의 생각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아들로서 밖에서 따로 존재하시다가 육신을 입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실 때에 비로소 아버지로부터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밖으로 나와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성육신이요, 하나님의 생각 속에 있는 아들로 태어나실 이의 성육신이다.  

요16: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아버지를 향하여) 가노라 하시니
요8: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요13: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7. 예수께서 아들로서의 사역을 마치시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육신이다. 이는 오직 인류의 속죄를 위한 성육신이었다. 인류의 속죄는 오직 점없는 어린양같은 보배로운 피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피흘려 죽으시려고 성육신하셨다. 아들의 신분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신 것이다. 그리고 3년반의 공생애를 다 사실 이후에 시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다 이루셨다(요19:30)"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인류의 속죄를 위한 사역을 다 마치셨다는 뜻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육신의 일차적인 목적이다.

  하지만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는 아들로서의 사역을 완전히 마치시지는 않으셨다. 언젠가 마귀와 귀신들을 처리해야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육신을 취하신 이유 가운데 두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심판하여 지옥에 쳐넣기 위함이다(계19:20,20:10,21:6). 그것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행하실 일이다. 그리하여 재림하신 후 예수님은 마귀와 짐승과 거짓선지자들을 산 채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넣을 것이다. 그러면 아들로서 더 이상 하실 일이 없으시다. 그러면 예수께서도 더이상 아들의 사역을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렇게 존재해야 할 이유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그분의 성육신의 2가지 목적이 완성되면, 신성한 하나님만이 만유의 주인으로 존재하시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고전15:22~28).

고전15:22-28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귀신들을 처단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8. 나오며

  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리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말씀하셨는가? 예수님 안에는 이미 신성의 하나님이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성의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심으로 말미암아, 신성과 인성이 같이 공존하는 상태가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 신성한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에, 아버지께로 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성을 취하신 이상 인간의 의지도 있었고 동시에 신성한 의지도 있었다. 그러므로 겟네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내 뜻대로 마옵시오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26:39)"고 기도하실 수 있었다. 예수께서 인성을 취하신 이상 그분도 분명히 인간이기는 했으나 우리 인간들과 다른 것 한 가지는 그분 안에는 죄된 본성(원죄,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성)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히4:15). 그렇다. 그분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기에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으나(신성한 하나님은 마귀에게 시험받지 아니하신다), 그분에게는 죄된 본성이 없으셨다. 그리고 그분 안에 있는 신성한 하나님의 의지가 있었기에, 인성의 의지로서 신성의 의지를 꺾지 않으셨다. 곧 예수님은 결코 죄를 짓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아들로 나타나신 하나님은 인류의 속죄사역을 잘 마치실 수 있었고, 지금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신다. 곧 있으면 재림하여 두번째 인성을 취하신 목적을 성취하실 것이다.

  사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하나님 자신으로서 한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이단을 분별하기 쉽다. 여호와증인은 여호와만 하나님이요 예수님은 피조물이자 미가엘천사장이라고 하기에 이단이다. 안식교에서는 예수님에게는 죄된 본성이 있었으나 죄를 짓지 않아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구약시대에 예수님은 아버지와 따로 존재하셨다가 미가엘천사장으로 나타났다고 하니 이단이다. 예수님만 죄된 본성이 없이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태어났는데, 예수님을 낳았던 마리아조차도 죄된 본성이 없이 태어났다고 주장하고,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니 로마천주교는 세미라미스종교를 혼합시킨 짬봉종교이요 이단적인 세력이 분명하다. 오직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따라가자.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 그분이 심판주요 그분이 창조주이기 때문이다. 그분을 뵈올 날이 머지 않았다. 더욱 더 분발하자. 그분만이 구원자요 하나님이신 것을 널리 증거하자. 건투를 빈다.

 

2019년 01월 13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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