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 강해(11) 오순절날 방언이 복음전파에 활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01)(행2:5~13)_2022-06-16(목)

https://youtu.be/Dj0meeD1FXM  [혹은 https://tv.naver.com/v/27450228 ]

 

1. 오순절날 방언이 복음전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순절 방언이 120명의 성도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구약 시대에는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사람의 영 속에 들어가니까 사람의 영에게 생명이 공급되고 생명이 공급되니 영이 살아나서 말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때 처음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 처음으로 방언이 터져 나올 때 그 방언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종류의 전혀 딴 언어로서 영의 언어였다. 고린도전서 14:2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한 바로 그 '글로싸'가 터진 것이다. 사람은 알아듣지 못하고 하나님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터져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그 언어를 알아듣게 하시는 은사를 주셨다. 그래서 듣는 이들이 15개국에서 온 헬라파 유대인들이었는데 자기들이 태어난 곳의 지방말로 방언을 듣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이한 일 앞에 놀라고 있었다. 

 

2. 오늘날 방언에 대해서 어떤 주장들이 있는가?

  그런데 오늘날에 들어와서 방언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들을 내놓고 있다. 그것은 보통 3종류다. 첫째는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가 아니라 그냥 단순한 지방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1개국에서 찾아온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사용하던 언어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순절날 터져 나온 방언(글로싸) 처음부터 지방말(디아레크토스)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최근 들어와서는 인터넷 온라인 상에서 많은 시청자들을 확보하고 있는 '마지막 사명'의 앤드류 강이 주장하는 바이다. 둘째는 방언은 헛소리 지껄임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데 이것을 방언의 은사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방언은 귀신 소리요 마귀 방언이요 고린도 현상이라는 것이다. 방언은 고린도에서만 일어난 특이한 현상으로서 그것은 이방신의 영향으로 나타난 귀신 소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성경통독 사경회를 개최하였던 우리 교회(통합측)의 원로 목사님의 주장이다. 그럼, 어떤 주장이 옳은 것인가? 그것은 독자들의 몫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것이 이렇다고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회개와 천국복음에서는 성경에 나온대로 '방언'(글로싸)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표적이요(막16:17~18), 사도 바울이 언급했던 바,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요 하나님과의 대화 채널이라고 본다. 글로(방언)가 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인지에 관하여서는 본 교회 홈페이지 "유튜브방송설교"란의 "성령의 은사(28강)" 참고하기 바란다. 

 

3. 방언과 맞물려 꼭 필요한 은사는 무엇인가?

  방언과 더불어 꼭 필요한 은사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방언 통역'의 은사다. 사도 바울은 바울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이기 때문에 방언을 말하는 자는 반드시 역하기를 기도하라고 말하였다(고전14:13). 방언을 하지만 만약 통역이 없다면, 방언의 은사는 예언의 은사만 못하다고 하였다(고전14:5). 그러므로 방언을 하는 자는 자기의 영이 무슨 말로 기도를 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를 방언 통역을 통해서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4. 방언 통역을 해 보면 그 내용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방언을 통역해 보면 어떤 내용으로 영이 말하고 있을까? 방언 통역은 사실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영적인 수준에 따라 방언 통역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수준이 달라진다. 그러니까 똑같은 방언을 들려주어도 통역하는 분의 영적 수준에 따라 방언 통역이 다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방언 통역을 받으려면 제대로 방언 통역을 할 수 있는 분을 만나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다. 그렇다면 아예 방언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건 아니다. 개인의 영을 건축하고 재건하고 복구하기 위해서는 방언이 참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고전14:4). 왜냐하면 방언을 하면 자기의 덕을 세운다고 사도 바울이 말했는데, 이 단어는 '오이코도메오'라는 단어로서, 그 뜻이 '짓다. 건축하다'. '세우다. 설립하다', '재건하다. 다시 세우다', '복구하다. 복원하다'의 뜻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이 시대에도 온전한 방언 통역을 하시는 분들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방언 통역으로 공개한다"는 책을 쓰신 송재근 목사 유순자 사모님은 2013년까지 43년 동안 약 1,000회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약 20만 명 이상의 방언 통역을 해 오신 분들이다. 이분들 말에 따르면, 방언의 내용은 크게 2가지다. 하나는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이것은 방언의 약 10~20% 정도를 차지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의 영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인데, 그때에는 주님(정확히는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이것은 약 80~90%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주의 종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요, 일반 평신도는 자신의 영이 드리는 기도의 분량이 훨씬 더 많다. 

 

5. 방언 통역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방언 통역은 일반적으로 2가지 형태로 진행된다. 하나는 방언하는 자가 방언을 하면 그것을 멈추게 하고 방언 통역자가 방언 통역을 해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방언하고 방언 통역하고' 이런 식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방언하는 자는 방언을 하게 하고 방언 통역자는 직독직해로 계속해서 방언 통역을 하는 것이다. 후자가 훨씬 더 영적 수준이 높은 것이다. 그렇다면, 방언 통역자들은 어떻게 방언 통역을 하는가? 그것도 2가지 형태인데, 하나는 상대방이 방언하는 것을 들어 보면 그 내용이 무슨 내용이라는 것이 떠오르는 형태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형태는 실수가 많다. 자기의 생각이 많이 가미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방언하는 자의 말이 자기의 언어로 들리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우리나라 말로 들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그대로 말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의 단점은 상대방의 허물을 폭로하는 경우, 공동체가 방언하는 자의 죄를 듣고 심한 충격에 빠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를 그대로 말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순자 사모님 같은 경우는 그것을 그 사람만 아는 것으로 바꿔서 통역해 달라고 요청하여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방언 통역은 그것이 제대로 될 수 있으면, 교회 공동체를 세우고 복음을 전파하는 데 매우 유익한 채널이 될 수 있다. 

 

2022년 06월 16일(목)

정병진목사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 중에 가장 중요한 은사는 대체 무엇인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것을 방언의 은사라고 보았다. 그럼 오늘날에도 진짜 그러한가? 바울은 방언의 은사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면서, 방언의 은사가 가진 장점과 단점을 알려준다. 그리고 좀 더 바람직한 신령한 은사로서 예언의 은사와 방언통역의 은사를 추천한다. 왜 바울은 이러한 2가지 은사를 추천해야 했는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2021-09-08(수) 수요기도회

제목: 고린도전서강해(21) 방언과 예언과 방언통역의 은사에 대하여(고전14:1~19)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TAFyAGbodLQ  [혹은 https://tv.naver.com/v/22356999 ]

 

1. 들어가며

  모든 은사에도 대전제가 있다. 그것은 사랑의 은사가 모든 은사 사용에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무리 신령한 은사라고 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지 아니하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랑이 기본적으로 겸비된 사람에게 어떤 은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 어떤 은사가 우리와 우리 교회에 필요할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은사들의 문제를 직시하면서 은사들 중에는 개인을 세워주는 은사가 있는가 하면 교회를 세워주는 은사가 있다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4장의 전체 내용이다. 그렇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잘못된 은사 사용에 대해서 알려주고 바른 은사 사용을 위한 실제적인 예로서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비교하여 말한다. 그것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비록 방언의 은사가 신비롭게 보이고 멋있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공예배에서 무분별하게 사용되면 오히려 공예배의 혼란만 가중시킬 뿐 교회를 세우는 데에는 유익하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신령한 은사를 사모한다면 방언의 은사보다는 상대적으로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한다. 그렇다면 대체 방언의 은사는 어떤 은사를 가리키며, 예언의 은사는 어떠한 은사이길래 바울은 예언의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권면하는가? 그리고 대체 방언이 가진 한계는 무엇인가?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서 방언과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의 정의와 아울러 이 은사들의 유익성과 한계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이러한 3가지 은사를 어떻게 받을 수 있고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것에 대한 부작용은 없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고린도교회에 예배 중 은사 사용에 있어서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예배 중 은사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방언의 은사 사용이 교회를 건축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은 어떻게 그것을 알았을까? 그것은 고린도교회가 방언의 은사를 최고의 은사로 알고 사모하면서 그 은사를 예배 중 사용했지만 그것이 교회의 건덕에 전혀 유익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방언을 말하다 보면 방언이 자주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방언의 소리를 분석해 보면 어떤 방언은 일정한 형식이 있고 그 소리가 분명하기도 하지만 어떤 방언은 도무지 방언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유치하게 들리는 방언도 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가 방언의 은사를 매우 귀하게 여기고 또한 사모하다 보니, 일종의 좋은 방언과 나쁜 방언이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방언이 지닌 한계점을 지적하면서 방언이 공중 예배에서 사용될 수 없다는 이유를 설명한다.

 

3. 바울은 왜 방언의 은사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는가?

  그래서 바울은 교회에서 은사를 사용하려면 방언의 은사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고 그것을 사용할 것을 권면한다. 그렇다면 왜 방언을 공중 예배에서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방언 자체가 지키는 한계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점에서 그렇다. 첫째,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이므로, 그것을 공중 예배에 사용한들 아무도 알아듣는 자가 없으며 그 방언을 듣고 '아멘'이라고 할 자가 없다는 것이다.일만 마디의 알아 들을 수 없는 방언보다는 한 마디의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이 더 유용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방언을 사용하려면 반드시 방언 통역자를 세워야 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둘째, 방언은 개인을 세워주는 은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방언은 개인을 세워주는 은사이지만 예언은 교회를 세워주는 은사이기 때문에 바울은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왜 그런가? 여기서 '세운다'는 말은 '덕을 세운다'라는 뜻이 아니다. 이 단어는 '오이코도메오'라는 단어로서, 이 단어의 일차적인 뜻은 '짓다. 세우다. 건축하다'의 뜻이지만, 이 단어에 대한 이차적인 뜻이 '다시 짓다. 다시 세우다. 다시 건축하다'는 뜻으로서 '복구하다, 복원하다'라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는 교회를 건축하거나 교회의 쓰러지고 허물어진 곳을 일으켜 세우는 은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영적으로 무너져 있다. 그런데 허물어져 있는 자신의 영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사실 방언이 필요하다. 방언을 하게 되면 자신의 영을 건축하여 튼튼하게 만들어 주고 이미 허물어져 있는 자신의 영도 다시 복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언은 교회 자체를 그렇게 세워주고 복구하는 일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바울은 기왕 신령한 은사를 사모한다면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한 것이다. 셋째, 방언의 은사는 방언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도 알아 들을 수 없는 언어이기 때문에 마음에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적으로 깨닫고 돌이키고 배우게 하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 것이다. 

 

4. 방언이란 어떤 은사를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대체 '방언'의 은사는 어떤 것인가? 방언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정의하고 있는 곳은 사실 성경을 통틀어서 고린도전서 14장 밖에 없다. 나머지는 그곳에 그러한 현상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방언이라는 언어가 대체 어떤 것인지를 말해 주지는 않고, 그곳에 방언의 은사가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방언을 어떤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가? 그것은 고린도전서 14:2과 고린도전서 14:14~15에 나온다. 이 말씀을 헬라어 원문으로 직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전14:2  왜냐하면 방언으로 발언하고 있는 자는 사람들에게 발언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발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영으로 비밀들을 발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전14:1415  왜냐하면 내가 만일 [계속]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으면, 나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지라도 나의 이성(생각=누스)은 열매가 없이 있느니라. 15 그러면 무엇이 있느냐? 나는 영으로 [장차] 기도할 것이다. 그럴지라도 역시 나는 이성(생각=누스)으로도 역시 기도할 것이다. 나는 영으로 [장차] 찬송할 것이다. 그럴지라도 나는 이성(생각=누스)으로도 역시 찬송할 것이다.

  그렇다. 방언이란 2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첫째, 방언은 거듭난 사람의 영이 하나님과 말하는 언어이다(고전14:2). 곧 거듭난 사람의 영의 언어가 방언인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있지 않다. 그러다가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죄를 대속하시고 하늘에 다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목놓아 울게 된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하셨는지, 그분의 사랑과 희생이 너무나 크시다는 것을 깨닫고 그분을 이제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새롭게 모신다. 그때에 그는 거듭나게 된다. 그러면 성령께서 그 사람의 영 속에 들어오게 된다. 그것을 거듭남이라고 부르는데, 이때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데, 이때 하나님의 자녀가 재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에 그 영이 죽어 있다가 다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 바로 방언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응애'하고 말을 하듯이 자신의 살아난 영이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의 영이 말하는 것이 바로 방언인 것이다. 하지만 이 방언은 자신의 영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대화하는 새로운 채널로 부여한 것이기에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말을 알아들으신다. 만약 그것을 통역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비밀 대화인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방언이란 거듭난 사람의 영의 기도라는 것이다(고전14:14~15).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가 사용하는 일상 용어가 있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한국어다. 그러나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한국 아이들의 경우는 영어와 한국어가 동시에 일상 용어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상 용어는 혼의 언어다. 배워서 하는 것이요, 나와 다른 사람과의 의사 소통의 채널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방언은 다르다. 방언은 영의 언어일 뿐만 아니라 그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다. 내 혼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있지만 내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있는 것이다. 내 영이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바로 방언인 것이다. 그래서 방언 통역의 은사를 가지고 사람이 자신의 영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통역해 보면, 자신의 영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말이 약 80~90% 정도가 되며,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영의 기도는 약 10~20% 정도 된다. 나는 잘 인식하고 있지 않아도 영은 자신의 소원을 알고 벌써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방언이다. 그리고 방언의 분량이 많아지고 깊어지면 어느 순간부터는 방언 찬양도 나온다. 방언에 음률이 붙어서 자신의 영이 노래를 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을 방언 찬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5. 방언은 '외국어' 중의 하나요 고린도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이란 거듭난 사람의 '영의 말'(고전14:2)이자 '영의 기도'(고전14:14~15)라고 분명하게 정의하였다. 하지만 방언이 영이 말하는 언어가 아니라 '외국어'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더러 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방언이라는 은사는 신약성경이 완성됨과 동시에 교회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또한 최초로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하고 있는 나오는 '방언'도 그때 예루살렘을 찾아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지방에서 쓰던 지방어였다는 것이다. 더욱이 고린도전서 14장에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서 '방언'은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무아지경에서 지껄이는 일종의 귀신들의 속삭임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고린도지역에만 나타났던 고린도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고린도전서 14장을 번역하고 있는데, 신약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말이 안 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사료된다. 그분들의 이름을 굳이 거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오로지 성경을 믿고 성경에 나온 말씀대로 따라가야 한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이란 어떤 언어였을까? 정말 '지방말'이었던 것이었을까? 사도행전 2:4에 보면, 오순절날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내려오셨다. 그리하여 그들 모두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으로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한다(행2:4). 그런데 이번에 우리말이 개역개정판으로 넘어오면서 '다른 방언'이라는 용어가 '다른 언어들'로 뒤바뀌었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개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방언'이 '다른 언어들'로 바뀐 것이다. 명백한 성경 번역의 퇴보가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 등장하는 '다른 언어들'은 헬라어로 보면, '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other tongues)'라는 단어로서 완전히 종류가 다른 언어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120명의 성도들이 말했던 언어가 히브리어, 헬라어, 로마어 같은 종류의 이 세상의 언어였다면, 그것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알로이스 글로싸이스(another tongues)'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때 사용된 단어는 종류가 다른 언어로 곧 '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로서 영이 사용하는 특별한 언어인 방언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해 준다. 무엇보다도 오순절날 사람들 중에 어떤 이는 120명 성도들의 말했던 언어를 들은 후에 "이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라고 말했다. 자기들이 전혀 알아 들을 수 없는 언어였기에 술 취한 것 같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방언'은 분명히 '글로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약속한 표적으로서 주어지는 방언도 역시 '글로싸'이다(막16:17). 그리고 오순절날 마가  다락방에서 말해졌던 언어도 '글로싸'였고,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오셔서 베풀어졌던 방언도 역시 '글로싸'였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안수할 때 성령께서 은사를 주셨는데 그때 받은 방언도 역시 '글로싸'이다. 그리고 방언이 무엇인지에 대해 쓰고 있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도 방언이라는 단어도 역시 '글로싸'라고 나온다. 모두가 다, 이 세상에서 사용하지 않은 다른 종류의 방언들(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을 지칭하는 표현들이라고 하겠다. 

 

6. 방언 통역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진행되는가?

  그렇다면 '방언 통역'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방언 통역이란 다른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내가 알아듣는 은사를 가리킨다. 원래 방언은 그 사람과 하나님만 소통하는 대화 채널이어서 그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하고 있으며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인데, 방언 통역의 은사를 받게 되면 그 사람의 방언이 무슨 내용인지를 알게 듣게 되는 은사가 바로 방언 통역의 은사인 것이다. 방언 통역의 은사는 보통 3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는 상대방이 방언하는 것이 무슨 내용인지를 영이 느낌으로 그냥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방언 통역은 상당히 실수할 때도 있다. 정확하지 않은 것을 통역하다 보면 방언의 내용에는 없는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상대방의 방언이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들리는 것이다. 즉 한국 사람이라면 한국어로 들리는 것이다. 상대방은 분명히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영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알기 쉽게 한국어로 들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듣고 그대로 말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잘 되신 분은 동시 통역이 가능하다. 상대방의 방언을 들으면서 바로 동시에 통역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시 통역도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주님께서 그 사람의 죄를 들추어 낼 때가 있는데, 그것을 그대로 말했다가 그만 그 사람의 체면이 손상되고 그 사람의 숨은 죄가 드러남으로 성도들을 놀라게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순화하는 말로 바꾸어서 통역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방언하는 당사자만 알아듣고 회개를 할 수가 있다. 셋째, 방언하는 자의 입술에서 글자가 나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의 경우에는 한국어로 글자가 되어 입에서 나오는 것이 영안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입으로 나오는 글자를 읽어 주면 된다. 이것이 방언  통역이다. 이러한 사람은 지구상에 몇 명 안되는 방언 통역 은사라고 할 수 있다. 

 

7. 예언이란 어떤 은사를 가리키며 그것의 7가기 기능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예언'의 은사란 어떤 것인가? '예언'의 은사는 일반적으로 결코 알 수 없는 현재의 상태나 미래의 일을 미리 알고 그것을 미리 말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은사를 가리킨다. 그 대상은 개인이 될 수도 있고, 교회가 될 수도 있고, 국가와 민족이 될 수도 있다. '아가보'라는 예루살렘 출신의 예언자는 얼마 후 나라에 흉년이 들 것을 예언하였으며(행11:27~28), 개인적으로는 바울이 장차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면 그의 손발이 묶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하였다(행21:11). 그렇다면 예언자는 어떻게 현재의 상태나 미래의 일을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보통 세 가지 방법으로 알게 되어 예언을 한다. 첫째, 마음 속에 성령께서 어떤 영감을 떠오르게 함으로 알게 된다. 그때에는 그냥 그것이 알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언을 하게 되는데,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예언은 틀릴 수도 있다. 자기가 마음으로 생각한 것이나 사탄 마귀가 넣어 주는 것을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 현재의 모습이나 미래의 모습이 환상으로 보여지는 것을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이전의 예보다는 더 분명한 것이지만 이것도 사탄 마귀가 보여주는 것을 말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셋째, 현재의 상태나 미래의 모습을 글자로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한국에 살고 있지만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글자가 떠서 보이는 예언이 있다. 글자가 떠서 보이고 영의 상태가 환상으로 보일 정도라면 그분의 영성은 상당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예언의 은사는 예언 뿐만 아니라 책망과 판단, 위로와 권면, 폭로와 가르침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8. 나오며

  우리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다고 성령의 은사를 무조건 무시하거나, 그것을 귀신의 장난으로 보아서는 아니 된다. 2천년 전 오순절날 마가 다락방에 오신 성령이나 지금의 성령은 똑같은 한 분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에 주셨던 성령의 은사가 지금은 없어졌다고 말할 수 없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있는 것이다. 거기에 방언이 들어 있다. 그런데 방언에는 몇 가지 단점이 있다. 그것은 모든 은사들 중에서 자기 개인만을 세워주는 은사라는 것이다. 다른 모든 은사는 다 남을 위해 존재하는 은사들이다. 그런데 방언의 은사는 다르다. 방언의 은사는 이 외에도 2가지 단점이 더 있으니, 그것이 남들이 알아 들을 수 없는 언어이다 보니 그것을 공중 예배 때에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도 없는데 어찌 그 방언을 듣고 성도들이 '아멘'이라고 화답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방언은 아무리 말을 유창하게 한다고 해도 그 말의 뜻을 알아 들을 수 없으니 자신의 인격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방언이 좋은 은사이기는 하지만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씀의 경우처럼 굳이 예배 시간에 방언을 사용해야 한다면, 그때에는 반드시 방언 통역자를 세워서 방언 통역을 듣고 성도들이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예언의 은사를 구하여서 그것으로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야 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맞는 말씀이라고 하겠다. 방언은 사실 자신을 세워 주고 복구하는데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도구다. 그러나 그것 자체로서는 남을 가르칠 수도 없고 깨우치게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교회가 공예배에서는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오직 개인적인 목적으로 따로 기도할 때에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우리가 방언을 말하면 말할수록 다른 은사들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으며, [회개한 후에] 방언을 말한다면 방언을 말하면 말할수록 영적인 능력들이 계속해서 공급되기 때문이다. 

 

 

2021년 09월 08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성령의 은사(17) 방언통역의 은사란 무엇이며 통역해보면 그 내용은 무엇인가?(고전12:10)_2020-07-09(목)

https://youtu.be/dWmEFlOodmE [혹은 https://tv.naver.com/v/14691577   ]

 

 

1. 방언통역의 은사란 어떤 은사를 가리키는 것인가요? 

  "방언통역"의 은사란 방언을 통역하여 말하는 초자연적이며 신령한 은사를 가리킵니다. 이 은사는 성령의 9가지 특별은사들 중에서 말의 은사(방언, 방언통역, 예언)에 속하는데, 이는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알아들을 수 있는 모국어로 통역하여 말해주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방언(글로싸)"은 사람에게 발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발설하는 것으로서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이 오직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입니다(고전14:2). 그러므로 방언은 통역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그것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방언은 다른 사람도 못 알아들을 뿐만 아니라 방언으로 말하는 당사자도 못 알아듣기에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고전14:13)"이라고 권면했습니다.

 

2. 방언통역을 하는 사람은 어떻게 방언통역을 하는 것인가요?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의 유형은 크게 3가지입니다. 첫째는 남이 하는 방언을 듣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 즉각적으로 말해내는 것입니다. 느낌으로 방언을 통역하는 것인데, 이것은 약간 잘못 통역할 가능성이 있는 유형입니다. 둘째는 방언으로 말하는 자의 음성이 자기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모국어)로 들려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 통역자는 들은 것을 그대로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통역은 조금 조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장로에게 "주의 종을 대적하지 말라"라는 방언통역이 나오더라도, 직설적으로 말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장로가 모든 성도들 앞에서 목회자를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이 공개되어 그가 무안을 당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직독직해의 방식도 있습니다. 상대방은 낮은 목소리로 계속해서 방언을 말할 때에, 통역자는 그것을 계속해서 통역해내는 방식입니다. 가장 윗단계의 통역방식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합니까? 주님의 말씀이 더이상 주어지지 않고 그칠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습니다. 짧게는 30초에서 아주 길게는 10분 정도까지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평균 2~3분 정도입니다. 

 

3. 방언을 통해해보면 그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방언이란 사실 내 영과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은 "대화"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도 들어있습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내 영과 하나님과의 대화일 뿐만 아니라, 내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고전14:14). 이것을 굳이 퍼센트로 따지자면, 대화는 방언의 약 80~90%를 차지하고, 기도는 방언의 약 10~20%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통역을 해보면, 개인의 속사람(영)이 주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약 10~20% 정도는 나오며, 주님께서 개인에게 주시는 말씀이 약 90~90%가 통역되어 나옵니다. 

 

4. 개인이 드리는 방언기도를 통역해보면 그 내용은 주로 어떤 것들인가요? 

  방언의 약 10~20%차지하는 개인의 기도는 그 내용을 살펴보면, 크게 2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감사기도입니다. 대부분의 영은 가장 먼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둘째, 소원기도를 올립니다. 자신의 소원을 아뢰는 것인데, 이것도은 자기를 위한 소원기도와 남을 위한 소원기도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보통 자기자신을 위한 소원기도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부여하신 책임과 사명을 잘 완수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남을 위한 기도가 나오는데, 그것을 살펴보면, 첫째는 어린 자녀의 경우 가족을 구원해달라는 기도가 참 많습니다. 특히 예수믿지 않는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를 구원해 달라는 기도가 나옵니다. 둘째로 사람의 영은 교회와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목회자와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나라와 민족 그리고 세계선교를 위해 내자신의영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방언기도에는 하나도 이기적인 기도나 헛된 기도가 들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항상 자신의 영혼과 남의 영혼을 위한 기도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5. 방언 중 주님께서 우리 개인에게 주시는 말씀은 주로 어떤 것들인가요?

  놀랍게도 방언은 기도가 주가 아니며, 사실 주님께서 각자의 영혼에게 주시는 말씀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후자가 80~90%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방언기도 중에서 주님께서 개인에게 주시는 말씀만을 떼어놓고 본다면, 그것은 예언과도 거의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차이가 나는 것은 예언은 예언을 말씀하시는 분이 성령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부이지지만, 방언통역은 오직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방언통역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면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방언통역을 통하여 주님께서 내 영에게 하시는 말씀의 형태가 그것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방언 속에서 개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주로 3가지인 형태입니다. 첫째는 개인을 인정해주고 칭한하며 위로하는 말씀이 먼저 나옵니다. 주로 "내가 너의 어떠어떠한 것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가 얼마나 수고하고 있는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얼마나 영혼을 사랑하는지를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어, "내가 너를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했느니라." "너는 내가 말씀의 종으로 세운 특별한 종이니라" 등등의 위로의 말씀이 나옵니다. 둘째는 책망하고 충고하고 경고하고 권면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이미 결혼한 여성분들에게는 "네 남편을 이기려고 하지 말라"고 하고, 일반 평신도에게는 "주의 종을 비난하지 말라. 그를 위해 기도하라." "주의 종을 내쫓는데 가담하지 말라. 그러면 어찌 너에게 죄가 없다고 하겠느냐?"는 말이 나옵니다. 또한 "예수님을 제일로 섬기라", "세상의 미련을 왜 버리지 못하느냐?", "의심하지 말라"는 말씀도 나오고, 가장 많이 나오는 말씀 중에는 "네게는 지금 회개할 것이 있느니라"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바램이나 사명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너는 주의 종이 되거라. 부흥사의 사명을 가지고 있느니라. 기도원을 하라. 선교사로 헌신하라. 미국 가서 목회하라" 등등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방언통역으로 나오는 우리 주님의 말씀에는 결코 당면한 문제의 해결의 열쇠로서 던져주는 말씀은 들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당면한 문제는 우리가 결단하고 결정하며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가 잘못된 결정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에는 주께서 그 부분에 관하여 책망을 하시기는 합니다. 건투를 빕니다. 

 

2020년 07월 09일(목)

정병진목사

 

  방언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교회에서 공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통역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전14:13,28). 그렇지 않으면 믿지 않는 자들이 교회에 왔서는 그만 성도들은 미친 사람처럼 취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늘날에 방언을 통역해 줄만한 사람을 어디 쉽게 발견할 수 있는가? 만약 방언을 통역해 주는 사람이 건전한 목회자라면 좀 낫겠지만, 만약 평신도가 방언을 통역하게 된다면 방언통역은 안 하느니보다 더 큰 문제를 유발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방언통역을 실제로 해보면 일종의 예언과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예언의 단점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떤 사람이 방언을 통역하느냐에 따라 방언의 내용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방언통역을 하는 사람이 대체적인 윤곽만을 통역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다.

  오늘 이 시간에는 방언통역은 왜 필요한지 그리고 방언통역의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실제로 방언을 통역해보면 어떤 내용이 나오는지 그리고 방언의 가치는 과연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 방언통역은 왜 필요한가?

  그것은 첫째로, 방언소리만으로 자신이 무슨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어 답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므로 만약에 방언을 통역하지 아니한다면 자신의 영이 무슨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젼혀 알 수가 없다(고전14:2). 그러므로 답답해진다. 만약 방언을 하는 자가 자기의 영이 지금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 상태 가운데 계속해서 방언으로 기도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누구든지 답답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통역해야 한다. 둘째로, 방언을 통역해보면 그것이 예언처럼 교회의 덕을 끼치기 때문에 방언은 통역할 필요가 있다(고전14:4~5). 사도바울은 말한다.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방언으로 말하는 자가 통역하지 아니하면 교회의 덕을 끼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통역해서 모든 사람이 듣게 할 때에 비로소 방언은 교회에게 덕을 끼칠 수가 있다. 왜냐하면 방언통역을 통해 성령께서 그 사람을 위로하기도 하고 권면하기도 하며 책망도 하기 때문이다.

  둘째, 방언통역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방언통역은 보통 2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방언을 말하는 자가 방언을 하고 나면 방언의 통역의 은사를 받은 자가 그 방언을 통역해주는 방법이 있고, 다른 하나는 방언을 말하는 자가 방언을 말하고 있는 것을 들으면서 동시에 통역하는 방법이 있다. 그렇다고 방언기도의 내용이 많다고 해서 많이 통역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라. 어떤 것은 방언의 길이가 길더라도 한 마디로 간단하게 방언통역이 되는 경우도 있으며, 어떤 것은 방언의 길이는 아주 짧은데도 엄청 길게 방언통역이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앞의 통역의 경우는 거의 문구대 문구로 통역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뒤의 통역의 경우는 방언의 내용이 대체적으로 어떤 것인지가 모아져서 즉각적으로 통역이 되는 것이다. 각기 장단점이 있기는 하다. 앞의 경우는 문구대 문구 통역이므로 그것으로 인하여 방언하는 자의 과거의 죄악이 숨김없이 폭로되어 방언하는 자를 시험들게 할 수가 있다. 하지만 뒤의 경우는 방언내용의 대체적인 윤곽은 파악할 수 있으나 정확한 내용을 가늠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두번째의 경우는 방언을 통역하는 자의 분량에 따라 많이 달라질 수 있므로, 방언을 통역할 때에는 어떤 방식으로 통역하는지를 알고 통역을 받아야 할 것이다.

  셋째, 실제로 방언을 통역해보면 어떤 것이 통역이 되는가?

  보통 3가지로 통역이 되어 나온다. 한 가지는 정말 그 성도의 영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가 통역으로 나온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예언처럼 그 사람에게 말하여 권면하고 위로하고 때로는 책망하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성령의 음성이자 하나님의 음성이다.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는 자신의 영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나온다. 이렇듯 방언의 내용은 '기도'이거나 '예언'이거나 '찬양'이다. 대충 분량으로 계산해 본다면 기도의 경우는 약 15%, 예언의 경우가 약 80%, 찬양의 경우는 약 5%정도 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와같이 방언의 내용은 생각 외로 성령께서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고 권면하며 책망하는 것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에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넷째,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통역의 가치는 얼마나 되는 것일까?

  만약 통역이 문자대 문자로 통역된다면 그 통역은 아주 분명한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대충 무슨 뜻인지 윤곽으로 알고 통역한다면 그 통역은 통역하는 자의 신앙과 성경을 아는 분량에 따라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통역된 방언내용이 성경말씀을 대용하거나 성경말씀에 앞설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통역된 방언은 성경말씀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보증해준다고나 할까이다. 그렇다. 오직 성경말씀만이 진리인 것이다(요17:17). 방언통역은 영의 간구 즉 기도하는 자의 영의 소원도 같이 들어있기에 그것은 결코 진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통역에서 혹 예언이 나왔다고 해서 꼭 그대로 되어질 것처럼 운명론에 빠져서도 아니 될 것이다. 방언 중에서 예언적인 부분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니만큼 그것을 들어쓰면 그것을 붙잡고 더욱 기도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방언은 매우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방언의 내용에서 버릴 것은 단 한 가지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즉 방언을 통역해 보면 방언의 내용이 하나님의 영광을 떨어뜨리는 내용이나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간구하는 내용이 전혀 나오지가 않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권면하고 싶은 것은 할수만 있으면 방언통역은 말씀에 대한 바른 정립이 되어있는 목회자가 통역할 것을 추천해 드리고 싶다. 만약 평신도가 방언통역을 하게 된다면 잘못하다가는 잘못된 예언처럼 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방언통역은 사실 목회적으로 매우 유용한 은사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위험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혹 이때까지 방언 통역을 한 번도 받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방언만 하고 있는 성도가 있는가? 그렇다면 신뢰할만한 통역자를 만나 꼭 통역을 받아보라. 그래야 방언기도의 내용을 알면서 기도할 수 있으니, 더욱더 방언기도를 힘있게  그리고 방언기도를 더 기쁜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방언하면서도 답답함을 덜 느끼게 될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예언처럼 방언통역이 나왔다면 그것이 바로 자신의 영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므로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그것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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