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31(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1) 예수께서 행하신 첫 표적과 이 사건이 주는 영적인 의미(요2:1~1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6AxoOHhg1fE  [혹은 https://tv.naver.com/v/28949313 ]

 

1. 들어가며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맨 처음에 무슨 일로 시작하셨을까?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첫 번째 사역을 어떻게 시작하셨으며 또한 그때 어떤 기적을 행하셨는지 명확하게 나오지 않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그것이 분명하게 나온다. 그것은 갈릴리 가나에 있는 어떤 혼인잔치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예수께서 행하신 '첫 표적'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대체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이 어떤 종류의 사건이었길래 사도 요한은 그것이 예수께서 행하신 '첫 표적'이라고 그렇게 힘주어 말하고 있는가? 또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이 주는 영적인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은 진정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것을 들어주신 일에 불과한가 아니면 더 큰 영적인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 것인가? 

 

2.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은 단순 부탁에 대한 수락인가 아니면 어떤 다른 의미가 있는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맨 처음에 행하신 일은 물을 포도주로 만든 일이다. 이것은 갈릴리 가나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2가지 가정을 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예수께서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다. 즉 이것은 마리아의 청을 들어주다가 생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일은 이것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표적이라는 것이다. 이 일은 단지 예수께서 어머니의 부탁을 들어준 정도가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려는 의도가 있으며 또한 예수님 자신에게도 이 사건이 주는 어떤 의미가 있기에 그렇게 했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둘 다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만약 그때 마리아의 청원이 없었다면, 이러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요, 또한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려는 의도가 없었거나 자기자신에게도 어떤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일을 행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먼저, 예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의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11절에 나와 있다. 예수께서 이 표적을 행하심으로 그분의 제자들의 그분을 믿었다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사건 직전에 예수께서는 6명의 제자들을 뽑으셨다. 그들 중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안드레와 이름이 안 나오는 제자(이는 사도 요한임에 틀림없다)가 있다. 그리고 안드레의 전도와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인하여 제자가 된 베드로, 요한의 형제 야고보 그리고 예수께서 직접 불러내신 빌립과 그의 친구 나다나엘(바돌로매)이 그들이다. 그런데 이들중 안드레와 요한은 세례 요한을 통해 예수님이 누군지를 간접적으로 들었다. 그것은 그분이 첫째,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자, 둘째, 먼저 계신 이요, 셋째, 성령이 머물러 계신 이이며, 넷째, 성령으로 세례주는 이이자,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를 받았다. 그런 후에 제자들은 점차로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을 랍비이자, 그리스도,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기록한 이, 요셉의 아들이며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이스라엘의 임금(왕), 인자라고 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세례 요한의 소개와 자신들이 알고 있었언 것을 바탕으로 한 간접적인 신앙고백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 진정 누구신가를 알아야 했다. 그것은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심으로 인하여, 그분은 못하실 것이 없는 전능자이시자, 만물의 창조자이신 것을 그들이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이어서 예수께서는 자기자신에게는 어떤 목적으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인가? 우리는 이 사건을 쓰고 있는 사도 요한을 통하여 이 사건이 예수께서 행하신 '첫 표적'이라는 사실을 듣게 된다. 이는 이 표적이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원문상으로 보더라도 이것이 "표적들의 시작"이라고 나오기 때문에, 이 표적은 이어서 등장하게 될 다른 표적들의 샘플이 되며, 또한 그것들과 매우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 사건의 서두에서 아직 당신이 표적을 일으킬 때는 아니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이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이 사건은 예수님에게도 매우 큰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그럼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때에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표적이라는 것이다. 

 

3. 예수님은 자기자신에게 어떤 의도로 이 표적을 행하신 것인가? 

  이 사건의 발단은 예수의 어머니께서 예수님에게 이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이야기함으로 시작된다. 포도주가 떨어지지 않았다면 아마 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졌고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그의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이야기함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 그리고 제자들은 왜 이 잔치자리에 참여하게 된 것인가?

  우리는 이 사건이 갈릴리 가나에서 일어났으며, 이때 예수의 어머니는 잔치의 주관자로 참여하고 있었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잔치에 초청받은 자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이는 예수께서 어머니의 부탁이할지라도 꼭 들어주어야 할 위치에는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서 잠깐 초대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군지를 살펴보자. 제일 첫 번째로 들어갈 제자는 아마도 나다나엘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다나엘은 갈릴리 가나 출신의 제자였기 때문이다(요21:2). 그리고 예수께서 그를 처음 만나셨을 때에 그가 앞으로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그에게 말씀해주셨기 때문이다(요1:50). 고로, 제자들 중에 우선 순위로 초대된 자는 아마도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이었을 것이고, 이어서 다른 제자들도 같이 초대되었을 것이다. 또한 예수님도 이 잔치에 초대되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 잔치의 주인공과 어떤 인척관계가 있었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예수님의 어머니는 이 잔치에 초대받은 것이 아니라, 잔치의 주관자로서 등장한다. 즉 그녀는 이 잔치의 마실 것들을 담당하는 봉사자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문에는 또한 '연회장(잔치의 최고주관자)'이 나온다. 그는 이 잔치에서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주관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이때 예수의 어머니는 이 잔치의 마실 것의 주관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만약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 문제가 되었다면, 그것은 예수의 어머니에게는 좀 난처한 상황이 되는 것이고, 총 책임자는 신랑이든지 신부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예수의 어머니는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를 연회장이나 신랑이나 신부에게 말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부탁을 한다. 그리하여 이 사건이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이 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4절을 헬라어에서 직역해 보자.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여인이여! 나의 때(적절한 시간)는 [아직] 다다르지 않고 있나이다" 그렇다. 포도주가 떨어진 일은 사실 마리아의 잘못도 아니며, 예수님의 잘못은 더더욱 아니다. 예수님은 이때 포도주가 떨어졌다면 야단치거나 섭섭해할 입장인 것이지 책임질 입장은 아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말 한 마디가 예수님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들이 포도주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3절). 그때 예수께서는 포도주가 필요하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반응하셨는데, 이는 '포도주'가 자신에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내 때가 아직 다다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사건은 예수님에게도 어떤 커다란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4. 예수께서 말씀하신 '나의 때'란 어느 때를 말씀하신 것인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의 때(호라)"는 어떤 시각을 가리키는 것인가? 여기서 '때'는 '호라'라는 단어로서 그 의미가 '가장 좋은 시간, 적합한 시간'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 때란 예수님에게 있어서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할 어떤 사건의 때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예수께서 자기 자신이 직접 포도주가 되거나 아니면 포도주를 풍성하게 만들어야 할 때는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장차 그렇게 되어질 일에 대한 예표로서, 자신이 직접 포도주를 만들겠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때'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있어서 '나의 때'는 어떤 때를 가리키는 것인가?

  예수께서 요한복음에서 말씀하고 있는 '나의 때'는 적어도 3가지 의미로 나온다. 첫째는 그가 죄인들의 손에 팔리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실 때를 가리킨다(마26:45).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내어주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말하였다(요7:30,8:20,13:1). 

요7:30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8: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리고 둘째는 그가 죽으신 후에 영광을 받으실 때를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값을 피로 대속하시고 다시 부활하실 때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죽으시기 전에 이렇게 기도하시고 말씀하셨다(요17:1,12:23). 

요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요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는, 그분이 재림하시어 거룩한 신부들을 취하여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때를 가리킨다(마26:45, 계19:7~9).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나의 때'의 완성에 해당하는 때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거룩한 신부들을 얻으시어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마26: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계19:7-9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5. 예수께서는 첫 표적을 왜 혼인잔지집에서 셋째날에 일으키신 것인가?

  고로 우리가 이 사건을 바라볼 때, 우연히 잔치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짐으로 예수께서 자신의 어머니의 부탁을 받아 단지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으로 바라볼 수 없다. 하지만 예수님의 삶에 있어서 우연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필연적인 것이고 사건마다 어떤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예수께서 돌아가시던 시각에 예루살렘에 개기일식이 있었지 않았는가? 그런데 개기일식이라는 것이 갑자기 일어나고 싶다고 해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시고 운행하게 하실 때부터 이미 작정된 일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첫 표적을 행하실 것도 이미 만세전에 작정된 대로 되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첫 표적이 '셋째 날에' 어떤 '혼인잔치 집에서'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다. 

  고로 이 사건은 사실 '셋째날'에 일어난 사건은 우연이 아니며, 동시에 '혼인잔치집'에서 일어난 것도 우연히 아닌 것이다(1절). 왜냐하면 이 사건의 시작을 사도 요한은 '셋째 날에'로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날이 셋째 날이었다는 것은 사도 요한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장에서 '이튿날에'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오듯,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났었는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세례받으시던 날이 첫째 날이요 그리고 그 다음 날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일컬었다. 그날이 또한 둘째날이었다. 그리고 다시 하루가 지나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언급하였다. 그날은 적어도 두 명의 자신의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가게 되었던 셋째 날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있은 후에 다시 셋째 날이라고 했으니(요2:1), 이날은 실제로는 여섯째 날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섯째 날이란 대체 어떤 날을 가리키는가? 그 날은 한 마디로, 천지창조 때에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던 바로 그날이요 이 둘이 하나가 되던 결혼식 날이었다. 다시 말해 예수께 여섯째날에 이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은 창조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계신다는 뜻이다. 그때는 아담과 하와만이 결혼하던 날이었지만, 앞으로 언젠가는 예수님과 성도들이 신랑과 신부로 참여하는 결혼식을 치를 날이기 때문에, 미리 예표적으로 이날에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이다. 그리하여 잔치의 기쁨을 한층 더하신 것이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이 날을 '여섯째 날'이라고 하지 않고 '셋째 날'이라고 기록한 것은 예수께서 셋째 날에 부활하셔서 영광을 얻으시는 날도 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 등장하는 소품까지도 이 사건이 창조의 마지막 날이자 동시에 안식의 날을 앞 둔 여섯째 날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유대인의 정결 의식(율법)에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봉사자들이 이 여섯 항아리에 아구까지 물을 채웠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여섯째 날 맨 마지막 시간에 사람인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이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6. 사람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어떻게 해서 이러한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이 사건을 바라볼 때 예수님의 측면에서 이 사건을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우리 인간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사람에게 왜 기적이 필요하며 또한 어떻게 해야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지도 알려준다. 

  첫째로, 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함께하는 기적이 필요한 것인가? 그 답은 간단하다. 인간의 계획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예상치 않은 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신랑이 이 결혼잔치를 위해 얼마나 꼼꼼하게 잔치계획을 세웠겠는가! 잔치에 먹을 것이 떨어지거나 마실 것이 떨어진다면 신랑에게는 아주 수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랑은 보다 더 철저하게 준비를 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한 것이다. 포도주가 동이 나서 모자라게 된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다. 그런데 그 시각에 어디가서 포도주를 마련해 온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곳에 전능자께서 함께 하고 있었다. 

  둘째로, 어떻게 될 때 사람에게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될 때 사람에게도 기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이 사건에 따르면 3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이런 일이 있을 때에는 예수님께 청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찾아서 부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그 일은 마리아의 몫이었다. 마리아는 이 잔치의 주관자의 입장이었기에 그것에 대한 책임을 일부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를 예수님과 의논한 것은 아주 잘한 것이다. 또 하나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마리아의 몫이었다. 그녀는 그동안 예수님을 잉태할 때부터 아주 특별한 소식들을 접해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브리엘 천사가 그녀에게 나타나 그녀에게 잉태될 자는 성령으로 잉태될 자이며,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기가 탄생하던 날에 베들레헴의 목자들이 와서 그녀에게 말하기를 그 아이는 이 세상을 구원할 구주이며 그리스도이자 주님이라는 것을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동방박사으로부터 그 아이가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들은 것도 있었고, 예수께서 12살 때에는 성전을 자기의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했던 것도 가슴에 새겨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무슨 일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 문제를 연회장이나 신랑과 의논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가져간 것이다. 그분은 모든 것을 수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그 잔치집의 일꾼으로 봉사하고 있었던 봉사자들의 순종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그때 일하던 일꾼들을 '하인들'이라고 번역해 놓았지만 실제는 '하인들(둘로스)'가 아니라 '봉사자들(디아코노스)'이다. 이들은 자원하여 그 잔치일을 도우러 온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봉사자들에게 마리아가 말했다. "그가 혹 너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너희는 그대로 행하라(5절)" 이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시키는 일이 혹 사리에 맞지 않고 이상하게 들릴지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말고 즉시 행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들이 그대로 시행한 것이다. 빈 여섯 개의 돌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운 것이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께서 이제는 그것을 떠다가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다. 그때 연회장은 이미 포도주가 된 채 있는 물을 마시고는 감탄을 하면서 신랑을 불러 칭찬을 한다. "모든 사람은 처음에 좋은 포도주를 내놓는 것이 일반이오. 그리고 그들이 취하게 된 때에 더 못한 것을 내놓기 마련이라오. 그런데 당신은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간직한 채 있었소(10절)". 사실 찬사는 예수께서 받으셔야 마땅한 것이지만 새로 맛 본 포도주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인지를 몰랐던 연회장은 신랑을 칭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당신이 행하신 일도 감추신다. 얼마나 겸손한 미덕인가?

 

7. 나오며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신 첫번째 표적은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마리아의 부탁에 대한 결과이지만 실제는 제자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이 사건은 예수께서도 앞으로 자신의 공생애를 어떻게 꾸려가야 하는지를 알게 해주는 표적이었다. 즉 예수께서도 자신을 어떻게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며 또한 죽고 부활하신 다음에는 장차 천국에서 진행될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지를 염두해두시고 행하신 기적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예수께서 전능하신 창조주이자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또한 이 사건을 통하여 모든 인생은 자신의 계획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그렇더라도 그러한 위기를 타계할 방법이 예수님에게 있음을 배우게 된다. 그것은 곧 '기도'(청원)와 절대적인 '믿음'과 절대적인 '순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지금 내게 진정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이 사건의 사람들처럼 주님을 경험하고 주님의 능력을 맛보는데,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내게 필요하고 부족한 것이 있다면 지금 그것을 구하고 믿음으로 반응해보자. 왜냐하면 예수께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된다. 그때에는 우리도 역시 물떠온 봉사자들처럼 놀라운 기적을 맛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2022년 08월 31일(수)

정병진목사

 

천국, 예수님 시대 이후부터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된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장소는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못 들어가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대표는 '죄'다. 왜 그런가? 그 죄를 없이하려고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게 해 주는 최소조건은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충분조건은 왜 필요한 것인가? 이 한 편의 설교가 우리의 미래를 엄청나게 바꿔놓을 것이다.

 

2022-02-27(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천국복음(07)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3가지 조건은 무엇인가?(마21:31~3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1OX0pPhFbHo [혹은 https://tv.naver.com/v/25403493

 

 

1. 들어가며

  이 세상 사람들 중에서 누가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구제를 많이 하고 고아를 돌보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돌아보며, 사회사업에 힘쓴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가? 아니면 이 세상 이웃에게 전혀 사랑의 손길도 베풀지 않고 인색하게 살았지만 그가 예수님을 믿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인가? 이제 와 돌아보니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한지도 벌써 8년 4개월이 다 되었다. 그동안 오직 한 길을 달려왔다.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성경에 나온 대로 전하고 또 전했다. 그러다 보니 성경에 나오는 '천국'(하늘들의 왕국)과 또한 셋째 하늘에 실재하고 있는 천국에 관한 영적인 비밀들을 많이 깨닫게 되었다(아니 정확히 하나님께서 알려 주셨다고 해야 옳다). 그러니 오직 주님의 은혜로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지금까지 전했던 천국입성 조건에 관한 모든 사실들을 종합적으로 나눠 보려고 한다. 이 말씀 하나로서 우리는 내가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며, 내가 과연 천국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어떤 신분으로 그곳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메시지를 영원히 기억하길 바란다. 

 

2. 천국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천국'이란 사실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용어다. 헬라어로 보면, '하늘들의 왕국'을 줄여서 '천국'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늘들'이라는 말은 하늘이 셋이 있다는 뜻일 수도 있고, 구약시대에 하늘을 '샤마임'이라는 복수 용어로 사용하고 있어서 그것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천국은 상태적인 천국만을 가키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장소적인 천국'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은 후에 부활체가 들어가는 장소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구원이 완성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마귀가 없다. 귀신도 없고 죄도 죽음도 없다. 거기는 슬픔도 없고, 아픔도 없고, 어둠도 없다. 그곳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통치만이 실현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으며, 그 보좌 위에 이기고 승천하신 예수께서 앉아 계신다(계3:21). 그러므로 천국이라는 개념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잠시 실현될 때도 상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것이다. 

 

3.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최소 조건과 충분조건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장소적인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최소 조건은 무엇이며, 충분조건은 무엇인가? 여기서 최소 조건이라는 말은 이것만 갖추면 천국에는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뜻하며, 충분조건은 천국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영원토록 누릴 영광과 신분과 지위까지 얻을 수 있는 조건을 가리킨다. 어떤 이는 천국에 들어가려면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믿음만 있으면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은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은 믿음이 있기에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은 그날에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한 채 밖으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떤 이는 행함으로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이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행함이 없이 믿음과 회개로 천국에 들어간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한 편(아마 오른편) 강도의 경우인데, 그 강도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였고 예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했으며, 죽으면 낙원(천국)에 들어간다는 것까지 알았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위해 행한 일은 없었다. 그래도 그는 그날 주님과 함께 낙원(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그것은 한 마디로 '믿고 회개하는 것'이다(막1:15, 마4:17, 계22:14). 믿고 회개하는 자가 구원을 받아 궁극적인 장소인 천국 안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4.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성경 전체를 살펴보았을 때,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최소 조건에 속한 것으로서 2가지이며, 충분조건으로 보면 다 합쳐서 3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럼, 먼저 최소 조건은 무엇인가? 첫째 조건은 그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그렇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물'이란 죄를 씻는 물 세례와 같은 것을 의미하며, 성령은 성령을 받는 성령 세례를 가리키는 것이다. 즉 죄사함과 성령을 받는 것이다. 그런 자가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것이고, 이렇게 거듭 태어난 자가 결국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죄사함'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에 회심의 회개를 통하여 과거의 지은 죄를 용서받는 것을 가리키며,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의 내주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는 하나님의 생명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었다(요5:26). 그러다가 그분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당신 대신 보내 주셨다. 생명이신 예수께서 생명의 영으로 성령을 대신 보내 주신 것이다(고전15:45). 그러므로 오순절 이후에 오신 성령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들어와 하나님의 생명을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사람에게 들어간 것을 두고 거듭났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사자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사자의 생명이 있어야 하고, 독수리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독수리의 생명을 지녀야 하듯이, 사람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생명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생명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사함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대부분 은혜와 선물로서 주어진다. 

 

5.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백하는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 예수믿을 때에는 회심으로서의 회개를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자백하는 회개를 해야 하는 것이다(요일1:9). 왜 그런가? 예수님을 믿었다고 할지라도 죄된 본성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귀신들이 우리를 미혹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라도 죄를 짓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살다 보면 죄를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에는 반드시 자백하는 회개를 하라고 말씀하셨다(요일1:9). 그래야만 죄사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예수님의 피로 깨끗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반드시 자백하는 회개를 해야 한다. 죽는 그날까지 말이다. 만일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죄를 지었는데도 자백하지 않고 남겨두었거나 숨겨 두거나 회개를 뒤로 미룬 것이 있다면, 그는 그 죄로 인하여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21:8에 의하면, 믿는 자라도 비겁하여 주님을 부인한다거나 우상 숭배한다거나 음행하는 자는 반드시 불과 유황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하셨다. 거듭나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라도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어린양의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진다고 하셨다(계3:5, 21:27). 그러면 어떤 자는 새 예루살렘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밖에 남겨질 자도 있을 것이며(계22:15), 어떤 자는 성밖의 더 바깥쪽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자도 있을 것이다(마25:30). 그리고 지옥 곧 불못에 떨어질 자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지옥도 3가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그 후에는 자백하는 회개를 해야 천국에 들어간다. 예수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는데, 그것은 성만찬 후에 세족식 때에 하셨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이다(요13:10). 이미 예수믿을 때에 죄사함을 받은 자라도 살다 보면 짓는 죄로 인하여 더럽혀지기 때문에 그 더럽혀진 것을 씻어서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라도 회개는 필수적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국에 들어가는 최소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은혜로 주어진다기보다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해야 하는 쪽에 훨씬 가깝다. 

 

6. 우리는 왜 내가 짓지도 않은 조상들의 우상 숭배의 죄들을 회개해야 하는가?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는 조상들의 죄들도 회개하라고 권면하고 또한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짓지도 아니한 조상들이 지은 죄들을 왜 내가 회개해야 하는가?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되는데,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회개할 것은 우리 자신이 지은 죄인 것이지 자기 조상들이 지은 죄는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조상들이 지은 죄를 회개한다고 해서 그들의 죄가 용서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자기 죄 때문에 지옥에 던져진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상들의 죄를 내가 대신 회개하는 것은 사실 죽은 조상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조상들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그 결과들이 오늘 나와 내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 조상들이 우상 숭배의 죄를 지으면 그 죄값을 3~4대까지 물린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출20:5). 그런데 영적으로 보니,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뱀들이 들어오게 되어 있다(창3:14, 마12:43~45). 그런데 이러한 뱀들은 더러운 영들이고 독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그 결과들이 나와 내 후손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누군가가 회개하여 그 죄를 씻어내지 않는다면 그 죄값으로 인하여 역사하고 있는 악한 영들 곧 뱀들이 우리와 우리의 후손의 몸과 환경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대신 회개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무 사람의 죄를 회개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꼭 자기의 조상들의 죄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조상들이 범죄했을 때에 우리도 씨[앗으]로서 함께 참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조상들의 허리에서 나온 또 하나의 조상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상들의 죄를 회개할수록 내게는 더욱 좋은 것이다. 사실 우리 한국 사람은 2~3대만 올라가면 완전 우상 숭배자였다. 그것도 수천 년 동안 수십 대를 그렇게 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더러운 영들이 뭉쳐지고 뭉쳐져서 내려오고 그리고 또 내려오고 있었기에, 누군가는 이 악한 영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어려움은 지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여 그것을 내 몸과 내 환경에서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조상들의 죄를 내가 회개해야 하는 이유이다. 

 

7.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세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세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요 맡겨 주신 일에 충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 번째 조건은 천국 입성의 필수적인 조건은 아니다. 믿음과 회개로 거듭나서 지은 죄를 지금도 자백하여 회개하고 있다면 그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에 충분히 들어가려면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천국에서 영광스러운 지위와 신분을 얻기 위함인데, 우리가 천국에서 얻을 이 지위와 신분은 영원무궁토록 우리가 누릴 것이기 때문에, 기왕이면 천국에 들어갈 때에 천국에서 누릴 영광스러운 신분과 지위를 이 땅에서 준비해 가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요, 나에게 죄지은 자라도 용서해 주는 것이요, 상처입고 고통받고 힘들어하는 우리의 이웃을 하나님의 친구로 여기고 돌보아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자기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다.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게 하기 위하여, 그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그렇게 행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구약의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요 신약의 새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길수록 우리는 천국에서 더 높은 신분과 지위를 얻게 될 것이다.

  둘째, 나에게 맡겨 주신 사명에 충성해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몸된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이며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믿는 이들 중에는 이미 천국에서부터 어떤 사명을 부여받아 이 땅에 들어온 사람들도 있다. 주님께서 그 사람을 그러한 그릇으로 쓰시려고 그렇게 결정하시고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토기장이가 흙으로 하나의 그릇을 만들되 자기가 필요한 그릇을 만들듯이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만들어 보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어 보내고,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어 보내신다. 그렇지만 무턱대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보시고 안배하여 그렇게 해 주신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명을 가지고 온 자들은 맡겨 주신 일에 충성해야 한다. 만약 사명을 맡은 자가 있는데 그가 사명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는 반드시 천국에 못 들어간다. 그는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지 못한 채, 바깥 더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마25:13~30). 그러므로 맡은 자는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충성의 마지막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사명을 위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그분을 위하여 나의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계2:10). 죽기까지 충성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그런 자에게 저 하늘에서 놀라운 신분을 주실 것이다. 사명을 맡은 자는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8. 천국에 들어가서 우리가 누리게 될 4가지 축복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말씀대로 순종하고 맡겨 주신 일에 충성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어떤 축복을 누리게 되는가? 그것은 총 4가지다. 첫째는 더 높은 신분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제일 높은 신분이란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것이다. 그리고 섬기는 자가 아니라 섬김을 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만약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적고 충성하는 것도 적었다면 그는 천국에 들어가서 섬기는 자로 살 것이다(마20:26~27). 이것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겠지만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렇게 말씀해 주셨고, 천국에 가 보면 또한 금방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천국에서 섬기는 자로 산다고 해서 그것이 비참하게 느껴지거나 슬프게 느껴지거나 자존심 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너무 염려하지는 말라. 기쁨과 감사함으로 섬기는 곳이 천국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더 앞쪽의 보좌 자리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천국에서는 마냥 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예배를 드린다. 또한 천국에 들어오는 성도들을 환영하기도 한다. 그때에 천국 성도들은 자기의 보좌에 앉게 되는데, 천국의 무수한 성도들 가운데 144,000명만이 자기의 보좌에 앉게 된다. 하나님의 보좌에 가까울수록 높은 신분을 가진 자가 앉는다. 그런데 이 보좌 자리는 영구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은 오직 이 세상에 우리가 살면서 준비해 갈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순종하고 충성함으로 말이다. 셋째는 여러 종류의 면류관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천국에 가면 다양한 종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 면류관의 종류와 크기와 모양이 다르며, 거기에 박혀 있는 보석의 종류와 크기와 모양도 다르다. 천국에서는 이 세상에서 그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섬김의 면류관, 사랑의 면류관, 충성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등 다양한 면류관이 주어진다. 어떤 이는 20개 이상의 면류관을 받는 자도 있다. 그렇다고 고개가 아파서 어떻게 그것을 쓰겠느냐고 말하지 말라. 무게는 이 세상의 무게가 아니기 때문이다. 넷째는 멋지게 지어진 천국집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천국에 있는 집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면서 헌신할 때에 지어진다. 그때마다 천사가 그러한 사실을 보고하면, 그것이 행위책에 기록되고, 행위책에 기록된 대로 집이 지어지는 것이다. 집은 우리가 올리는 충성에 따라 연건평이 정해지고, 집의 크기가 정해지며 그 안에 들어갈 인테리어가 정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이 세상에서 바라고 소망하는 것이 천국에서도 나에게 주어진다. 장미꽃을 좋아한다면 아마 화단에 장미꽃이 심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새를 좋아하는 자들은 새들도 정원에서 노래할 터인데, 새들의 숫자도 이미 정해져 있다. 

 

9. 나오며

  그렇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회개하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만이 하나님의 왕국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지은 자범죄들을 날마다 회개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과 우리의 주변에는, 우리 조상들이 지은 죄 때문에 우리에게 내려온 악한 영들이 내 몸속에 침투해 있거나 내 주변에 진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는 날까지 회개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진실로 예수믿는 자가 되었다면, 그때부터는 자기의 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조상들이 지은 죄들까지 회개를 지속할 필요가 있다. 그럴수록 악한 영들이 우리 몸에서 제거되고 우리의 환경에서 떠나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귀신들이 떠나간다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부터는 주님의 말씀에 더욱 순종하고, 뿐만 아니라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한다.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늘에서 우리가 받을 영광이 더 크게 준비되기 때문이다. 그날 이렇게 충성한 자는 더 영광스러운 신분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 영광스러운 보좌 자리와 면류관과 천국집을 하사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잠시만 누리다가 반납하는 것이 아니다. 영원토록 우리가 누릴 영광스러운 것이다. 해와 달과 별들이 그 빛의 강도가 다르듯, 천국에서 우리가 받을 영광도 각자 다른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다 이 땅에서 우리가 행한대로 받는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행한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염려하지는 말라. 오후 5시에 들어와서 한 시간만 일했던 자라도 주님은 하루의 품삯을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라. 충성하라. 그러면 영광스러운 우리의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2022년 02월 27일(주일)

정병진목사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있고, 교회 안에 출석하고 있다면 다 구원받은 것인가? 여기 사사시대의 말기에 이스라엘의 법궤와 관련된 사건들이 들려주는 놀라운 교훈이 있다. 법궤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관하는 나무그릇이다. 그런데 이방인들에게 법궤는 결국 심판의 잣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어떻게 되는가? 왜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법궤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5만 70명이나 죽임당하고 말았던 것인가? 여기, 우리가 미래에 받을 구원의 당락을 말해주는 놀라운 말씀이 있다.

2021-12-03(금) 금요기도회
제목: 사무엘상강해(15) 그날 법궤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놀라운 교훈(삼상6:19~7:2)_2021-12-3(금)
https://youtu.be/jh0hSWV7sCA [혹은 https://tv.naver.com/v/23928984 ]

 

1. 들어가며

  이스라엘의 신의 궤였던 법궤 안에는 십계명의 두 돌판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 것까지는 잘 몰랐다. 그들은 법궤를 빼앗았고 그것을 그대로 보관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재앙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돌려주었다. 그리하여 빼앗겼던 법궤가 다시 이스라엘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큰 슬픔이 일어나고 말았다. 일곱 달 전에 블레셋과의 전쟁 가운데 죽은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던 것이다. 대체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법궤는 진정 축복의 도구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재앙의 도구라고 불러야 하는가? 법궤는 구원의 도구라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심판의 도구라고 말해야 하는가? 오늘 이 시간에는 법궤의 이동 경로에 따라 나타났던 사건들을 종합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가 무엇인지를 주목하고자 한다. 이것에는 우리의 구원의 당락을 좌지우지하는 놀라운 말씀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2. 블레셋에 들어간 법궤는 어떻게 되어 블레셋을 초토화시켰는가?

  아벡전투에서 승리한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서 법궤를 빼앗아 전리품으로 소유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매우 기뻐했다. 왜냐하면 애굽신들을 쳤던 이스라엘의 신과의 전쟁에서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기쁜 마음에 들떠 법궤를 자기들의 신이었던 다곤신에게 바치게 된다. 그런데 다음 날 일어나 보니 다곤신이 그만 넘어져 코가 땅에 닿은 채 법궤에 절하고 있었다.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미심쩍었지만 블레셋 사람들은 그것을 일으켜 세워 놓는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다곤신은 또 넘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상의 목이 부러져 있었고 손목이 부러져 있었다. 더욱이 부러진 것들이 저만치 날아가서 문지방에 있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악한 종기가 발생하더니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블레셋의 군주들 5명에게도 종기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블레셋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자기들이 법궤를 빼앗아옴으로 여호와의 손이 자기들을 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회의를 거듭한 끝에 법궤를 다시 이스라엘에 돌려주기로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일이 혹시나 우연이 아닐까 싶어서, 한 번만 더 시험을 해 보기로 한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들이다. 아직 멍에를 멘 일이 없는 젖나는 암소 두 마리에 수레를 달고 그 위에 법궤와 속건제물을 실어 이스라엘로 보내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자기 새끼의 울음 소리를 듣고도 암소 두 마리는 이스라엘 벧세메스로 곧장 가고 만다. 

 

3. 벧세메스로 돌아온 법궤 때문에 감사하는 제사를 드렸지만 오히려 슬픈 사건이 되어 버린 이유는 무엇인가?

  어느 날 벧세메스 사람들이 밀 추수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법궤는 다시 이스라엘의 품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깜짝 놀란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감격하였다. 그래서 수레는 번제물을 태우는 장작으로, 두 마리의 암소는 번제와 다른 제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된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제사장들이었기 때문이다(수21:13~16). 그런데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실로까지 가서 성소를 황폐화시켜 놓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는 이제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는 집이 없었다. 그러자 성소를 섬기던 제사장들은 자기가 분배받은 땅에서 살게 되었다. 그 성읍 중의 하나가 바로 벧세메스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엄청난 큰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벧세메스의 사람들이 법궤를 들여다본 것이다. 그들이 법궤를 덮은 보자기를 열어 젖혔는지 아니면 법궤의 뚜껑을 열어 보았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하여 무려 5만 70명이 죽게 된다. 그런데 얼마 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3만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그 숫자는 이스라엘의 한 개 지파의 숫자였다. 당시 대도시 예루살렘의 인구가 7만 명이었다고 하니, 5만 70명이 죽었다는 것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날 죽은 자들은 벧세메스의 제사장들만 죽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경하러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이 같이 죽었던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 큰 살륙이 일어난 것이다. 

 

4. 법궤는 구원의 도구인가 심판의 도구인가?

  그러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묻지 아니할 수 없다. 대체 법궤는 구원의 도구인가 아니면 심판의 도구인가 하는 것이다. 원래 법궤는 하나님 자신이 그 공간에 있겠다고 만들라고 한 것이요, 그곳에 십계명의 두 돌판을 넣어 두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법궤의 뚜껑 곧 속죄소의 두 그룹 사이에 계셨다. 그러므로 법궤는 확실히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의 전쟁에서 법궤는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었다. 과거 요단강 강물이 마르게 하고, 여리고성을 한꺼번에 무너지게 했던 능력이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다. 오히려 블레셋에게 법궤를 빼앗기고 만다. 왜 그랬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법궤에 관하여 주님이 주신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그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거나 멸시하는 자들에게 법궤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쟁터에 홉니와 비느하스가 법궤를 가지고 갔어도 그들은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았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셨어도 역사하지 아니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법궤와 함께 아니 계시지는 아니하셨다. 왜냐하면 법궤는 신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기뻐했던 블레셋 사람들을 쳤고, 그들의 다곤신을 쳐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블레셋 전역에 악한 종기가 나게 했기 때문이다. 전염병을 창궐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궤가 아무리 신령한 성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법궤는 심판의 도구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요3:16~18). 그러나 법궤는 원래 천국의 모습 그대로를 이 땅에 재현한 것이므로, 법궤 자체는 하나님의 임재의 도구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통로인 것에는 분명하다. 나중에 그것은 확실히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법궤는 구원의 도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5. 벧세메스의 사람들이 법궤를 들여다본 사건으로 인해 알 수 있는 법궤의 비밀은 무엇인가?

  그런데 법궤가 스스로(인간이 보기에) 다시 이스라엘의 품으로 되돌아왔다. 그것도 제사장의 성읍으로 되돌아왔다. 이는 제사장들이 다시 법궤를 모시고 성막을 짓고 하나님을 잘 섬기라는 표시가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벧세메스의 제사장들은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큰 살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일찌기 그들에게 법궤를 모시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에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법궤가 이스라엘 땅에 들어왔을 때에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악한 종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벧세메스에 몰려온 사람들에 의해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 법궤 안을 들여다보는 과오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법에 의하면, 법궤는 제사장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만지지도 말아야 하며, 지성소에 보관하여 아무나 볼 수 있도록 해서도 아니된다고 하였고, 뿐만 아니라 그 속을 들여다보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민4:15, 20). 그런데 벧세메스의 제사장들은 이러한 규정에 주의하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그러한 규정을 배우지 못해서였는지 아니면 그것을 알고도 방치했는지 잘 나타나 있지 않다. 하지만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화가 나셨으면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겠는가!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업신여긴다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자신들이 이겼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신성 모독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을 치셨던 것이다. 그리고 홉니와 비느하스도 치셨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이들이라도 결국에는 죽임당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었던 벧세메스의 사람들이었지만 이들도 죽어 나가는 일은 블레셋과 똑같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법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이 예법을 무시하면 결과는 역시 불신자나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는 자나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교회 안에 들어온 성도들이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예법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을 잘 모르면 예수님을 믿고 있어도 죽임당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고 있어도 사망에 이르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6.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결국에 사망에 이르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 믿는 이들이 법궤의 사건을 통해서 주목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임당하는 일이 발생하는가 하는 것이다. 벧세메스의 5만 70명이 죽게 된 것은 분명 심판의 사건인 것이지 구원의 사건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신자와 똑같이 죽어 나가는 것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이미 하나님께서 가르쳐 준 말씀에 주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배우지 못했든지 아니면 그것에 주의하지 않았든지 결과는 똑같이 나타난다. 다 똑같이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이라도 자기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해서 자신의 구원은 안전하다고 판단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이미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도 죽을 때에 성 바깥으로 쫓겨난다든지 아니면 불타는 영영한 불못에 들어갈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하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멸망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해서 나의 구원은 안전하다고 판단해서는 아니 된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경우에 예수님을 믿어도 구원에서 탈락하게 되는가? 그것은 우리의 구원자되신 예수께서 직접 들려준 말씀을 종합해 보면(공관복음서의 말씀과 요한계시록의 말씀)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죄를 짓는 자는 불과 유황이 타는 불못에 던져지게 된다는 것이다(계21:8).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우상을 숭배하면 결국 불타는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예수님을 믿은 후에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죄된 본성이 우리 안에 있고 귀신이 우리 육체속에 들어 있으며, 악한 영들은 자꾸 우리를 미혹하고 유혹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안 넘어갈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두 번째의 이 말씀이 더 중요하다. 둘째, 자기의 더럽혀진 두루마기를 빨지 아니하는 자는 새 예루살렘 성 밖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계22:14~15).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진정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더렵혀진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해야 한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결국 이미 생명책에 기록된 그의 이름이 지워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계3:5). 오직 회개하는 자가 새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의 믿음의 상태를 보라. 예수님을 믿었다면 자신의 구원은 이미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가 많다. 자신의 구원은 영원불변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구원받은 자라도 얼마든지 미끄러질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의 가장 중요한 관건은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 지은 죄들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었다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받은 줄 알고서 회개하고 있지 않는 자는 결국 구원에서 탈락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성 밖이나 불못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우리가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요일1:9).

 

7. 나오며

  그렇다. 예수님을 믿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받은 구원의 완전한 담보가 될 수는 없다. 믿는 자들에게는 지금 자신이 지은 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채 있다.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법궤가 자기 마을에 들어온 것에 대해 기뻐하였다. 잘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관리하는 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아 결국 블레셋 사람들처럼 죽어 나갔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미 하나님 안에 들어왔으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살라고 하셨는지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말씀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얻은 구원을 잃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이미 얻은 구원이라도 무효가 되는 규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공부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보니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믿는 자라도 사망에 이르는 규정이 성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르고 있는 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영적인 지도자들이 그것을 말해 주지 않는 것도 한몫을 한다고 본다. 벧세메스의 제사장들은 그곳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말해 주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것을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하루아침에 죽어 나가는 이들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다시 성경을 보아야 한다. 구원받은 자라도 구원이 무효화되는 규정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애써 얻은 구원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하는 일이다. 믿는 자에게 구원의 최종 관건은 회개를 하고 있느냐 안 하고 있느냐의 차이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2021년 12월 03일(금)

정병진목사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결코 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볼 수도 없는 그분을 존재하고 있다고 믿어야 하는가?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의 세계에 존재하는 놀라운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여주심으로 그분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를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셨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영의 능력을 사용할 혜택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쓸 줄 아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여기, 그 놀라운 초자연적인 기적을 경험케 하는 방법이 있다.

2021-11-14(주일) 주일낮1부예배
제목: 믿음, 그것은 초자연적인 세계를 경험케하는 통로이자 열쇠(요11:39~4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1iq61SWV2tM [혹은 https://tv.naver.com/v/23595164 ]

 

1. 들어가며

  오늘은 믿음에 대해 말해 보려고 한다. 믿음에는 믿음의 내용과 목표 그리고 믿음의 방법과 결과들의 다양한 방면들이 있다. 그런데 이전까지 우리는 믿음의 내용과 목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런 것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의 목표로서 생각했던 것 곧 내 영혼이 구원받는 것, 보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중심으로 말씀을 살펴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내었다.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때 우리가 믿어야 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시며(마16:16), 동시에 주와 하나님이라는 것이었다(요20:28). 그런데 오늘 이 시간에는 이러한 믿음의 내용과 목표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가진 믿음을 실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대체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며, 과연 어떻게 할 때에 우리가 가진 믿음을 진짜 경험할 수 있으며 그 믿음에 따른 혜택을 누리고 살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만약 이 메시지를 제대로 듣게 된다면 그는 아마도 이 메세지가 끝날 때 쯤에는 믿음에 따른 열매를 경험할 수 있는 새 사람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2. 우리는 믿음의 기초로서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교회에 가면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대체 무엇을 믿어야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오늘은 그러한 믿음의 기초에 대해서 말씀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믿음의 기초로서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그렇다. 우리가 믿는 자로서 가져야 할 가장 기초적인 믿음은 2가지인 것이다. 한 가지는 보이지는 않지만 실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분은 처음부터 홀로 계신 분이셨는데, 인류 구원을 위해 아들을 이 땅에 내려보내신 이후 그분은 '아버지'라고 불리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만대 후나 결코 볼 수가 없으신 분이다. 그분은 언제나 말씀으로만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을 우리는 영원히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다. 공중에 지구와 같은 행성들을 매달아 놓을 수 있으시고, 태양 둘레를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돌릴 수가 있으시다. 고로 그분의 능력은 한이 없으시며 그분의 힘은 미치지 않는 영역이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찾는다면 그분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은혜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분은 당신을 찾는 자를 결코 뿌리치지 아니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3. 우리는 왜 하나님을 왜 믿어야 하는가?

  사실 사람이 하나님에 관한 소식을 들어도 인간의 반응은 다를 수 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을 배척하는 사람도 있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어야 하고 그분을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가(히11:6)? 그것은 다음과 같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사람은 처음부터 두 세계를 살아가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슥12:1, 창3:8). 그렇다. 사람은 물질세계와만 접촉하고 살 수 있도록 지어진 것이 아니라 영의 세계와도 접촉하고 살 수 있도록 지어졌다. 왜냐하면 사람은 오감을 느낄 수 있는 육체와 지정의의 혼만 가진 존재가 아니라 영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슥12:1). 그러므로 우리의 육체가 죽는 날에는 곧바로 영의 세계에 진입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영의 세계까지 창조하시고 그 모든 세계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몰라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죽어보면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사실 처음 사람이었던 아담과 하와는 영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았다(창3:8). 둘째, 지금 우리 모두는 이 땅에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운명 지어진 그늘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최초의 사람들이었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이미 죽음이 선고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롬6:23).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가 깨지기 전에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받아야 하고,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로 되돌아가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한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공관복음 이외에 네 번째로 복음서를 써서 남긴 이유를 말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함이요, 그 이름을 믿어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요20:31). 사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아들로 나타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요, 그분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죄값을 처리하기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줄 구원자로 오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시는 셋째 하늘로부터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4.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3가지 혜택이란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러한 소식을 듣고도 긴가민가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지으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를 구원하러 아들로 오셨으며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처리하셨다는 것을 믿는 자들을 위해 은총을 준비해 놓고 계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이러한 혜택을 누리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첫째, 예수님 대신에 우리 곁에서 영원히 우리를 지켜 주시고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며 예수님이 누군지를 가르쳐 주시고 그분이 하신 말씀을 깨우쳐 주실 보호자이자 교사를 주신다(요14:26,15:26).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다. 이 성령을 가리켜 다른 말로 '보혜사'라고 부른다(요14:16). '보혜사'라는 말은 '지킬  보'자에 '은혜 혜'자 그리고 '스승 사'자를 사용하여,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로서는 보혜사가 참으로 좋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살아 계셨다면 그분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 정도 되었을 텐데, 예수께서 이제 영을 보내 주셨으니 모든 사람을 동시에 케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요16:7~11). 그리고 성령께서 사람 속에 들어오시면 성령께서는 그 사람의 분량에 맞게 선물도 주신다. 우리는 그것을 성령의 은사라고 부른다(고전12:7~11). 둘째,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통용되는 물리적인 법칙을  뛰어넘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경험하게 해 주신다(막16:17~18).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보내어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는 5가지 혜택이 베풀어진다. 그것은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여 귀신을 쫓아낼 수 있으며, 사람 속에 들어있는 뱀들을 집어 올릴 수도 있다.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보내 주심으로 사람의 영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가게 되면 그 영이 살아나 말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방언'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설령 우리가 어떤 독을 마실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몸을 해하지 못하도록 지켜 주시기도 하신다. 그리고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그 사람이 치료가 되게 하시기도 하신다. 참으로 신비한 일이요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셋째, 더욱더 감사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필요한 것을 기도하여 받을 수 있는 특권을 주신다(막11:23~24). 왜냐하면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하나님은 우리의 영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필요를 아뢰면 그분이 아버지로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기를 거부한다면 이러한 은혜는 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5. 지금 나도 초자연적인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대체 무엇이 필요한가?

  사실 모든 사람은 영을 가진 존재이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반가운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한다면, 그도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존재로서 당당하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의 혜택을 누리며 살 수가 있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혜택을 누리고 살지 못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그럼, 이미 주어진 이러한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에 나와 있다. 주님께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고는 있었지만 그분이 주시는 놀라운 혜택을 믿지 못하는 마르다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말이 만일 네가 믿으면 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네게 말하지 않았더냐?(요11:40)" 여기서 그녀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이 상황에서는 그녀의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오라버니가 나흘 전에 죽어서 무덤에 묻혔고 벌써 썩어서 냄새가 나고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놀라운 혜택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 하나의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네가 (확실히, 단호하게) 믿는다면'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영계에 속한 능력을 힘입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져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초자연적인 능력을 맛보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저 멀리 셋째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 속으로 침투하여 들어오면 죽은 자도 살아난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도 믿음의 분량만큼 기적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6.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 속에 들어오면 어떻게 기적이 일어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 속에 들어오면 무슨 일이 일어나길래 죽은 자도 살아나는 등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가?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빛을 가리킨다. 요한일서 1:5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분 자체가 빛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능력이 빛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수억 킬로미터 떨어진 이 지구의 내 몸속으로 하나님의 빛이 둘러 비치면 내게서 치유가 일어나고 죽은 자도 살아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이 세상에 비치는 빛이 있었는데 그 빛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이다(요1:4~5,9). 그러니 예수께서 명령하시는 말씀은 곧 빛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으로 생명의 빛이 그 사람 속으로 곧바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말함과 동시에 나사로의 육체 속에 생명의 빛이 둘러 비치게 되었다. 그러자 썩어 가던 육체가 다시 회복되고 떠나갔던 영도 그 육체속에 들어옴으로 나사로가 살아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모든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법칙이다. 그분의 빛 곧 하나님의 빛이 그 사람에게 비치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나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생명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셋째 하늘에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초광속으로 오는 것이며, 이것이 사람에게 닿으면 이 세상에서는 고칠 수 없는 병이 고쳐지고 죽은 자도 살아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므로 다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7. 내가 오늘날 이러한 기적을 맛보기 위해 가져야 할 믿음은 어떤 것인가?

  사람은 사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 잘 안 믿으려 한다. 아니 보고도 자신의 이성이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잘 믿으려 하지 않는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맛보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그 능력을 맛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성이 쉽게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3가지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그대로 내게 적용한다면 우리 모두에게도 이러한 놀라운 기적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첫째, 사람은 이 세상의 물질세계에서만 살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물질세계와 영의 세계 곧 두 세계 안에서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영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둘째, 영의 세계가 곧 하나님의 세계에 속한 것이 이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올 때에는 이 세상의 법칙 위에 있는 하나님의 법칙이 통용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고등법원에서 통용되는 법이 있어도 만약 대법원에서 어떤 결정이 나면 상위의 법이 그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지구를 공중 위에 매달아 놓고 태양 둘레를 돌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법칙이 이 세상에 당도하면, 이 세상의 법칙은 중지되고 하나님의 법칙이 통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생명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지 결코 죽이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셋째,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 이 지구에 사는 사람에게 적용되려면 그것을 사람이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주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에게는 그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이다. 

 

8. 믿음을 실제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의 세계의 능력을 경험하고 살아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져 있다. 그런데도 그것을 잘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자들에게 오늘은 한 가지 팁을 알려 드리도록 하겠다. 그것은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은 밀도의 법칙을 적용하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일정의 무게 곧 질량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곳은 어떤 공간을 차지한다. 이것을 부피라고 한다. 밀도라는 것은 화학에서 이 질량을 부피로 나눈 값을 가리킨다. 그 값이 큰 것이 강한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물과 돌멩이 중에 무엇이 더 밀도가 강한 것인가? 그렇다. 돌멩이다. 액체의 물보다는 돌멩이가 밀도가 더 높기 때문이다. 돌멩이가 고체로서 더 강하기 때문에 물에 돌멩이를 던지면 물속을 파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하늘에 있는 구름과 비행기는 어느 것이 더 밀도가 강한가? 그것은 비행기다. 물 알갱이보다는 철로 된 비행기가 더 밀도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있어서 영과 육체는 어느 것이 밀도가 더 강한가? 그것은 영이다. 왜냐하면 육체 속에 영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귀신이 사람의 육체 속에 들어가는 것은 귀신의 영이 사람의 영보다 밀도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영속에 귀신이 들어올 수 있는가? 그건 들어올 수 없다가 맞다. 둘은 동일한 밀도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영보다 더 밀도가 강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다. 하나님의 영은 전능한 창조주의 영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영속에도 들어올 수 있다. 그래서 모든 믿는 자들의 영속에 성령이 들어와 계시는 것이다. 그럼, 벽이나 문과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느 것이 더 밀도가 강한가? 그렇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이 훨씬 더 밀도가 강하다. 그러므로 벽을 뚫고서, 문을 닫았어도 그것을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답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다. 그분이 셋째 하늘에서 우리에게 보내는 빛은 생명의 빛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뚫고 이 세상에 들어올 수 있다. 하나님은 피조된 세계보다는 훨씬 더 밀도가 높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하여 귀신이 더이상 내 몸을 붙잡고 있지 못하게 한 후에 하나님께 기도하여 나를 고쳐 주시기를 요청하고 그것이 내게 도달한다는 것을 마음에 믿는다면 우리는 즉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부를 뿐이다. 

 

9. 나오며

  우리는 성령께서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요한일서를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셨던 예수께서 우리를 지키실 때에는 악한 사탄 마귀라도 우리를 만질 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요일5:18).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께서 어둠의 세상 주관자보다도 훨씬 더 강하시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어둠은 빛이 둘러 비치는 순간 빛을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물러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죄를 짓지만 않았다면 귀신들과 같은 영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성령으로 들어와 계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악한 사탄 마귀보다 훨씬 더 강하시기 때문이다(요일4:4).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믿느냐 아니면 믿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기적은 분명히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른다"고 되어 있다는 것은 믿음의 초자연적인 통로가 되고 열쇠가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막16:17). 또한 예수께서도 마르다에게 "네가 나를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지금 놀라운 영의 세계에서 주인공이 되어 살 수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3-24)"고 하셨다. 그렇다. 믿으면 그때부터 물질계를 뛰어넘는 영의 세계를 내가 작동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초자연적인 기적이 우리의 뒤를 따르게 된다. 이러한 기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기 위해 이 땅에 보내셨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우리도 얼마든지 이러한 능력을 맛봄으로 인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해야 한다. 오 놀라워라, 믿음과 영의 세계의 신비여!

 

2021년 11월 14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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