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18(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25) 제7표적으로서 나사로의 부활기적이 주는 놀라운 영적인 의미(요11:1~4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Q9EGv0pmz4w [또는 https://tv.naver.com/v/32508737]

 

1. 들어가며

  요한복음에는 총 7개의 표적들과 7개의 예수님의 자기 선언이 있다. 그중에 7번째 표적과 5번째의 예수님의 자기 선언이 요한복음 11장에 나온다. 요한복음 11장은 나사로의 소생 기적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기적이면서 동시에 표적이다. 왜냐하면 나사로의 소생 기적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 주는 가장 중요한 기적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 예수님에 관하여 어떤 자기 선언을 하셨는가?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예수님의 7번째 표적과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그리고 예수께서는 병들어 죽게 된 나사로에 대한 소식을 들었음에도, 왜 나흘이나 뒤에 나사로를 찾아가신 것일까? 그리고 나사로가 살아난 것은 부활인가 아니면 소생 기적인가? 그리고 예수께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왜 눈물을 흘리신 것인가? 그래서 오늘은 나사로의 죽음과 소생 기적과 관련하여 본문의 말씀이 들려주는 영적 의미 등을 찾아보고자 한다. 

 

2. 요한복음 11장에는 어떤 표적과 어떤 자기 선언이 나오는가?

  요한복음 11장에서는 7번째 표적이 나온다. 이름하여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기적'이 그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총 7가지의 표적들이 나온다. 그중에서 첫 번째는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이다(요2장), 그리고 두 번째는 왕의 신하의 병든 아들을 고치신 사건이 나온다(요4장). 세 번째는 38년 된 중풍병자의 치유 사건이 나오고(요5장), 네 번째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온다(요6장), 그리고 다섯 번째는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오시는 장면이 나온다(요6장), 그리고 여섯 번째는 나면서 시각 장애인이 된 사람을 고치신 사건이 나온다(요9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사로의 소생 기적 사건이 나온다(요11장). 그런데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모든 표적들은 사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관한 것을 증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증거들이 이 표적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곱 가지 표적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관하여 예수께서 스스로 자기 자신에 관하여 말씀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요6장의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예수께서는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선언하셨다(요6:35,48). 그리고 초막절 설교 후 나면서 시각 장애인이 된 자를 고치신 이후에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9:5). 그리고 세 번째로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아나게 하시기 직전에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12:25~26). 그렇다.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의 소생 기적 사건은 예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위대한 표적이었던 것이다. 

 

3.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왜 예수께서는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사건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이 사건으로 인하여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약 5리(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베다니에 나사로와 두 명의 누이동생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나사로가 병들어 있어오다가 이제 곧 죽게 될 무렵 마르다와 마리아는 전갈을 보내, 예수께서 친구처럼 지내왔던 나사로가 병들어 있다고 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했다. "이 병은 죽음을 향하여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것으로 인하여 영광을 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요11:4 직역)"라고 했다. 왜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병든 것이 죽음을 향하여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는가? 실제로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시에 곧 죽었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실 일이 있었던 것이며, 그것은 자기에게도 영광을 받게 할 그러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죽은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려내심으로 예수께서는 생명을 가지고 사망을 이기실 것임이 곧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4. 예수께서는 왜 나사로가 죽은 지 4일째 되는 날 나사로에게 가셨는가?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기 전에 나사로가 병들어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베뢰아 지역에서 오히려 이틀을 더 머무셨다. 그리고 다시 이틀이 지나 베다니의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왔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베다니의 나사로의 무덤에 오신 것은 마르다와 마리아로부터 기별을 받은 후 4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나사로의 소식을 기별하러 보내고 난 뒤 곧바로 나사로는 사망했다. 예수께서는 이틀이 지나자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이미 아셨다. 그러나 그가 잠들었다고 말했다. 제자들은 그것이 육체가 잠든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잠든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자 단도직입적으로 나사로가 죽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가실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디두모라고 하는 도마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했다. 왜냐하면 얼마 전에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기에 유대를 떠나 베레아로 도망쳐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유대 땅으로 가자고 하자, 도마가 의협심을 가진 채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은 즉시 그에게 달려가 그를 살려내지 않으시고, 썩은 냄새가 나도록 나흘이나 기다리신 것인가?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인가? 예수께서는 늘 이처럼 몰인정한 사람이었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나사로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며, 예수께서 몰인정한 사람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의도와 목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나흘이나 늦게 나사로의 무덤에 도착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2가지다. 첫째는 거기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조문하러 온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사로가 죽은 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 가서 나사로를 살려냈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유대인들은 틀림없이 예수께서 기절한 나사로를 살려냈다고 조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삼척동자도 다 알 수 있는 시간이 지나기를 주님께서도 기다리신 것이다. 둘째, 나사로가 사람으로서는 완전히 죽어 도저히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었음에도 예수께서 그 사람을 살려낸 것을 통해 예수님만이 사망 권세를 이기고 사람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전능자라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 주기 위함이다. 그래서 곧 있으면 예수께서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텐데, 그렇지만 3일 만에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유대인들로 하여금 받아들일 준비를 해놓기 위함이었다. 즉 예수의 부활을 받아들일 사람을 만들기 위해,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확실히 죽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인지하고 있는 그때에 나사로를 찾아간 것이다. 

 

5. 마르다가 가지고 있던 믿음과 예수께서 바라시는 믿음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예수께서 늦게 오시자 마르다는 설움에 복받친 깊은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러자 주께서는 그녀의 오빠 나사로가 소생할 것을 그녀에게 말씀하신다. 그러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신다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물으신다. 그러자 그녀는 "주여, 그러하외다.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답변한다. 마르다는 종말에 있을 부활에 대해서는 믿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의 오빠가 부활 때에는 살아날 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 있어질 일이요 먼 미래에 있을 일이므로, 그것을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예수께서 실제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기 위해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시려고 한다. 그래서 마르다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한다. 하지만 마르다는 이미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난다면서 소용없는 일이라고 간접적으로 말씀드린다. 하지만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신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리고 나사로를 큰 소리로 불러 살려내신다. 

 

6.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는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말씀하시고 증거하셨는가? 그것은 나사로를 살려내는 사건을 통해서 증거하고 있다. 그것은 3가지다. 첫째,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주실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함은 예수께서도 역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가 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아들로 오심으로 인하여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수여받았다(요5:26). 이 생명은 영에게 주시는 생명으로서 '조에'라고 부른다. 이 생명은 육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생명이 아니라, 사람의 영에게 생명을 공급한다. 그러므로 이 생명은 아무도 볼 수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 자신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분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공급하실 수 있다는 뜻이며, 죽은 후에는 그를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로 다시 살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을 부활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생명은 영원한 영의 생명이며, 이 생명을 가진 예수께서도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가 있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이신가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한사코 자신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이 땅에 온 것이라고 증거하셨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예수님의 아버지는 요셉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살리셨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파송받은 예수께서도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을 통해, 예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나오신 분이자 아버지로부터 파송받은 자인 것을 증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예수께서도 아버지처럼 전능하신가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전능하신 분이셨던 것처럼 이 땅에서도 전능하신 분임을 드러내셨다. 그것은 여러 가지 것을 통해 증거하셨으니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통해서도 증거하셨고, 38년 된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을 통해서도,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난 자를 고쳐 주심으로 증거하셨다.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는 죽어서 썩어 가고 있는 나사로를 다시 살려낸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버지와 한 분으로서 전능자였던 것이다. 

 

7. 나사로가 살아난 것은 부활 사건인가 소생 사건인가?

  나사로가 죽었다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난 것은 과연 부활 사건인가 아니면 소생 사건인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것은 사실 부활 사건이 아니라 정확히 소생 사건이다. 왜냐하면 나사로는 영원히 죽지 않을 몸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죽을 몸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사로의 소생 사건은 장차 성도들의 부활 사건에 대한 예시 사건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만일 사람이 죽어서 영원히 다시 사는 부활 사건은 어떤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인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성도의 부활의 몸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그것은 성도의 부활은 다음과 같은 7가지 면에서 육의 소생과 다른 특징을 지녔다고 말했다. 첫째는 썩을 것으로 심지만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산다는 것이다. 둘째는 욕된(비천한) 것으로 심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산다는 것이다. 셋째는 약한 것으로 심지만 강한 것으로 다시 산다는 것이다. 넷째는 육의 몸으로 심지만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땅에 속한 것으로 심지만 하늘에 속한 것으로 다시 산다는 것이다. 여섯째는 흙에 속한 자의 형상으로 심지만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으로 다시 산다는 것이다. 일곱째, 썩을 것으로 심지만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산다는 것이다(고전15:42~54). 그러므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은 결코 부활 사건이 아닌, 소생 사건이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소생 사건을 통해 장차 성도들에게 나타날 부활할 것을 미리 보게 하신 것이다. 

 

8.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신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마리아와 그녀를 따라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지켜보셨다. 그리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요11:33). 그리고 우셨다. 그런데 우리가 한글성경으로만 이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로 인해 슬퍼하고 있는 가족들과 조문객들을 지켜보면서, 예수께서도 같이 슬퍼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예수님의 눈물은 그러한 종류의 눈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요11:33의 말씀을 직역하면 이렇기 때문이다. "그분은 영으로 격양되셨다(비통해 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자기 자신을 요동치게 하셨다"(요11:33). 다시 말해, 예수께서 비통해 하신 것은 죽음이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쓸어 가 버린다는 것을 아시고 영으로 격분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에게 있어서 사망은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최대의 권세였던 것이다. 고로 예수께서 이제 사망을 정복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슬픔과 불행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시고는 비통해 하신 것이다. 그리고 사망에 대해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번에 반드시 사망을 정복함으로서, 생명이 사망을 이긴다는 것을 보여 주시겠다고 굳은 결의를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사망의 권세로부터 빠져나오게 하겠다는 결의를 다지신 것이다. 그것을 눈물로 표현하신 것이다. 

 

9. 나오며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고 그분을 믿어서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다(요20:31).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의 모든 장에서 그리고 요한복음에 들어 있는 모든 사건 속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찾아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게 보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요한복음을 지금 잘못 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 있도록 요한복음을 기록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요번의 제 7번째 나사로의 소생 기적을 통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이신 것을 표적으로 분명히 드러내셨다. 그것의 핵심은 예수님만이 모든 인류에게 생명을 공급하실 수 있는 분이신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아버지의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만이 하나님으로서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재림 예수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혹은 보혜사 성령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가 거짓말이다. 만약 자신이 그렇게 주장하려면 그도 역시 예수님처럼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처럼 생명으로 사망을 정복할 수 있어야 한다. 죽어서 썩어 냄새나는 사람을 살려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로 보일 수 있어야 한다. 더욱이 자신이 전능한 자인 것을 드러내 보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 어떤 사람도 그렇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오직 한 분 하나님으로 계시다가 사람으로 나타나신 예수님만이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을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하나님 자신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2023년 01월 18일(수요일)

정병진목사

2023-01-01(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탕감해주셨다는 말씀의 의미는?(마18:21~35)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TYUOawRAayM  [혹은 https://tv.naver.com/v/32116415 ]

 

1. 들어가며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전에 지었던 모든 죄는 싹 다 없어지는가? 아니면 없는 것처럼 여겨주시는 것인가? 어떤 분은 예수님을 믿으면 과거에 지었던 모든 죄를 다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현재 짓고 있는 죄와 그리고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를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과거의 죄야 예수님을 믿을 때에 그분의 피로 용서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현재 짓고 있는 죄를 용서받았다거나 혹은 미래에 지을 죄도 용서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도한 주장이 아닌가 싶다. 아직 짓지도 아니한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은 실체가 없는데도 실체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 하늘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며, 동시에 이 땅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런데 우리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과 동시에 죄를 탕감받았다는 말도 종종 쓰게 된다. 그렇다면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과 탕감받았다는 말은 과연 같은 말인가 아니면 다른 말인가?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과거의 죄는 과연 어떻게 처리되며, 또한 현재 짓고 있는 자범죄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까지 함께 살펴보기를 원한다. 

 

2.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게 될 때에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육안으로 볼 때에는 아무런 변화를 찾아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영의 세계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이 있고,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도 역시 있다.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부터 살펴보자.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게 될 때에 하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 2가지 일이 일어난다. 첫째는 우리가 지었던 과거의 죄들이 예수님의 피로 덮여진다는 것이다. 이때 과거에 내가 지었던 죄들은 다 행위책에 이미 기록된 채 있는데, 그 행위책에 기록된 채 있는 나의 죄들을 예수님의 피가 그대로 덮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 죄를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죄인은 죄는 있으나 죄가 없는 것처럼 되어버린다. 둘째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이다. 누가 구원을 받은 상태에 있느냐 하는 것의 가장 확실한 잣대는 무엇일까? 그것은 과연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느냐이다. 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는 자는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계21:27). 그런데 진정으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그의 이름이 하늘에 있는 생명책에 기록이 된다. 

  둘째,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이 땅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게 되면 이 땅에서도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그것은 성령께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다. 이때 성령은 우리의 존재 중에 영 가운데로 들어오신다. 이때 우리는 우리가 가진 타고난 생명에다가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된다. 이것을 가리켜 '거듭났다'고 말하는 것이다. 거듭났다는 말은 하나님의 생명이 나에게 덧대어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죽어서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하늘의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된 채 있는 사람이며, 이 땅에서는 자기 안에 성령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3. 회개에는 어떤 종류의 회개가 있는가?

  우리는 보통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회개를 한다. 그런데 회개의 종류에도 시간적으로 볼 때에 2가지 종류의 회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처음에 한 번 하는 회개로서, 단회적으로 회개하는 회개 곧 '회심으로서의 회개'가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이 날마다 짓는 죄를 반복적으로 회개하는 '반복적인 회개'가 있다. 그럼 이 둘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첫째, '회심으로서의 회개'는 일생에 한 번 하는 회개로서, 자신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을 때 행하는 회개가 바로 이 회개다. 이전에 하나님이 계신지도 모르고 살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살았던 것을 회개하는 회개가 바로 '회심으로서의 회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회개는 일평생에 한 번 하는 회개다. 우리는 회심으로서의 회개를 통해 거듭나게 되고 하늘의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게 된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성령을 받아 그분와 함께 살게 된다. 

  둘째, 그런데 반복적으로 회개하는 '자백하는 회개'가 있다. 이것은 회심으로서의 회개를 한 사람이 다시 죄를 짓게 될 때, 자신이 지은 죄들을 용서받기 위해 행하는 회개로서, 죽는 날까지 행하는 회개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예수님 이외에 죄짓지 않고 살아갈 완전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고로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이라도 믿고 난 후에 지은 죄들을 그냥 놔두어서는 아니된다. 반드시 자백하는 회개를 통하여 그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래서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회개치 않은 죄 때문에, 죽을 때에 성령이 떠나가면서 행위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 그리고 성밖으로 쫓겨나거나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죽는 그날까지 회개를 해야 한다. 

 

4. 예수님을 믿을 때에 과거에 지었던 죄들은 어떻게 처리되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을 때에 과거에 지었던 죄들은 어떻게 처리되는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탕감받는다'라고 말할 수 있다(마18:27,32). 그렇다면, '탕감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탕감(蕩減)'이라는 단어는 한자어로서, 흔들 '탕' 자에, 덜 '감' 자다. 이는 빚이나 요금, 세금 따위의 물어야 할 것을 흔들어서 덜어준다는 뜻이다. 이것을 우리말로는 '삭쳐준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얼핏 보기에는 빚을 덜어준다는 의미로 풀이되는 단어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탕감한다'는 단어는 그러한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으로 '탕감하다'는 단어는 '아피에미'라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럼, '아피에미'라는 단어는 대체 어떤 뜻인가?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는 '내버려두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문맥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버리다'(고전7:11,12,13), '떠나다'(요4:3, 16:28), '내버려두다'(요14:18), '허락하다'(마3:15), '용서하다(사하다)'(마6:14~15, 약5:15, 롬4:7, 행8:12) 등으로 쓰인다. 그런데 빚이나 죄에 대해서 쓰일 때에는 이 단어의 뜻이 대부분 '사하다', '용서하다'의 뜻을 가진다. 그러므로 '탕감받는다'는 말은 '죄를 용서받는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용서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18:21~35에 나오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에서도 이 단어는 두 번은 '용서하다'는 뜻으로 번역되었고(마18:21, 35), 두 번은 '탕감하다'는 뜻으로 번역되고 있다(마18:27,32).

 

5. '탕감받는다' 혹은 '죄를 용서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렇다면, 우리의 죄를 '탕감받는다' 혹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의 죄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그 죄를 일시적이지만 없는 것으로 여겨준다는 말인가? 우리는 '아피에미'라는 이 단어를 예수님께서 어떤 의미로 사용하셨는지를 알 수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에서 그 의미를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있었다. 그리고 그 돈을 갚아야 할 날짜가 되었을 때에 주인이 그를 불러내었다. 그런데도 그 종은 갚을 것이 없었다. 그러자 주인이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을 종으로 팔아서 그리고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것을 갚으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애원하면서 말했다. "주인이여, 내게 오래 참아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장차 갚을 것입니다."(마18:26). 그러자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 놓아(풀어) 보내면서 그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의 아주 작은 빚을 진 자신의 동료 종을 만났다. 그리고는 그의 목을 조르면서 그 빚을 갚으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동료 종이 엎드린 채 말했다. "나에게 오래 참아 주십시오. 그러면 장차 갚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그가 빚을 갚도록 그를 옥에 가둬버렸다. 그러자 그의 동료 종들이 그것을 보면서 매우 마음 아파하였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을 소상하게 주인에게 알렸다. 그러자 주인이 노하였다. 주인은 일만 달란트 빚졌던 종을 다시 불러오게 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악한 종이여, 네가 간청하니 내가 네게 모든 빚을 탕감하여 주었는데, 너는 왜 네게 빚진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느냐?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그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느냐?"라고 하면서, 그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그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옥졸들에게 넘겨주라고 하였다. 여기서 '옥졸들'이란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고문을 주는 사람, 형벌을 주는 사람'이란 뜻을 가졌다. 그렇다. 만약 그가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해 주었더라면 그도 역시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채 계속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행하지 아니함으로 그는 오히려 형벌주는 자에게 끌려가서 형벌까지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탕감받는다'는 뜻이 어떤 의미인지를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지은 죄들을 아주 없애버린다는 뜻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빚문서를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을 죄에 적용하면, 우리가 과거에 지었던 죄들을 기록된 행위책에서 찢어서 없애버린다는 뜻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빚갚는 것을 일시적으로 유예해 준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빚문서를 없애버릴지에 대해서는 빚을 탕감받은 후에 그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처리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용서를 받은 것은 일시적인 용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서 과거에 지은 죄를 모조리 다 용서받기는 했어도, 우리가 그 뒤에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다시 그 죄를 소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탕감받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6. 탕감받은 죄가 완전히 없어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날 우리가 지은 죄들을 용서받았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탕감받은 것'이다. 용서를 받기는 받았지만 일시적으로 유예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죄 용서받은 자답게 살지 않고, 죄 용서를 받은 은혜에 합당하게 살지 않는다면 우리가 용서받았던 과거의 죄는 일시에 다시 부활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자신에게 아주 작은 양의 빚을 진 자를 불쌍히 여겼더라면, 그는 계속해서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상태에서 살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죽는 날에는 그 빚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주인이 자신을 불쌍히 여김같이 자신도 자신에게 빚진 자를 불쌍히 여겼어야 했는데, 그는 그렇게 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는 우리가 지었던 과거의 죄가 탕감받은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고로 천국에 있는 행위책에서 내가 지은 죄의 목록들이 완전히 찢겨져 없어진 것이 아니다.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피에 덮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탕감받은 우리의 죄를 완전히 사라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용서받은 자처럼 남들의 죄들도 용서해 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용서받은 자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은혜받은 자답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 날, 우리의 죄를 덮고 있는 예수님의 피가 걷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면 죄사함도 받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께서도 우리 속에서부터 떠나가고 말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고 말 것이다. 

 

7. 나오며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함으로 우리는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탕감받는 것'이다. 죄가 있지만 없는 것처럼 여겨준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하나 모든 죄를 다 고백해야만이 죄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는다면 구원받을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신이 지은 죄들이 얼마나 많으며, 또한 생각나지도 않은 죄들도 많이 있을텐데, 그 죄를 어찌다 하나도 빠짐없이 회개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자신의 낱낱의 죄를 다 회개해야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최초로 행하는 회개 곧 회심으로서의 회개를 할 때, 그가 지었던 과거의 모든 죄를 한꺼번에 다 예수님의 피로 덮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죄들을 다 용서받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야만이 죄인들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구원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거의 대부분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사함을 받은 이후에 방종을 하여 "나는 이미 죄사함을 받았으니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어"라고 하면서 죄짓고 살아간다면 그는 틀림없이 구원에서 탈락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심판 때에 예수님의 피를 그 행위책으로부터 거둬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피조물이 되셔서 피흘려 죽으셔야 했는가? 그것은 우리 죄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또 다시 죄를 밥먹듯이 짓고, 죄를 지어 놓고도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면 그는 사실 죄사함을 받은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결국에 구원이 취소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들이 과거의 죄를 용서받은 것은 일시적인 조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모든 죄들은 오직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죄를 다시 소환하지 않도록 이후에 죄를 용서받은 자답게 살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난 후의 삶을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 된다. 내게서 과연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나타나고 있는지를 늘 살펴보아야 한다. 내게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거나, 열매가 없는데도 자신이 받은 죄사함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이후의 삶이 우리의 영원한 용서를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이상 죄를 짓지 않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에 충성하는 것이다. 그래도 실수한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 죄를 회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최종 관문은 '회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믿고 회개하자. 그리고 순종하고 충성하자. 그러한 자들만이 일시적으로 받은 용서가 영원한 용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23년 01월 01일(주일)

정병진목사

2022-11-13(주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우리 성도가 꿈꾸어야 할 진정한 꿈은 무엇인가?(창37:5~1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TvQkPsd3il8  [혹은 https://tv.naver.com/v/30826423 ]

 

1. 들어가며

  사람은 꿈을 꾼다.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다만 꿈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그런데 꿈은 대부분 의미없는 꿈들이다. 그런데 꿈들 중에서도 계시적인 꿈 또한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계시적인 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과 같은 것으로서, 장래의 일을 미리 알려 주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는 두 명의 꿈꾸는 자를 발견하게 되는데, 한 사람은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이라는 인물이요 또 한 사람은 바벨론 포로시절의 '다니엘'이라는 인물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들 중에서 '요셉'의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왜 요셉은 계시적인 꿈을 꾸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는 어떻게 되어서 주님이 항상 함께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그가 꾸었던 꿈은 대체 어떤 계시적인 뜻을 함유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의 꿈이 의미하는 바는 대체 무엇이며, 오늘 우리 성도들이 천국에서 누릴 장래의 지위와 그 꿈은 대체 어떤 관련이 있는가?

 

2. 의미없는 꿈과 계시적인 꿈의 차이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대부분 꿈을 꾼다. 그런데 꿈을 꾸고 나서도 대부분 그 꿈을 기억하지 못한다. 무서운 영화를 보고 나면 악몽을 꾸기도 하고 근심 걱정이 많아도 식은땀 흘리는 꿈을 꾸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꿈들은 대부분 자신의 생각이 무의식 속에서 펼쳐지는 꿈이기 때문에 앞뒤가 잘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꿈의 내용이 잘 연결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러한 이러한 꿈들은 보통 '개꿈'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꿈 중에는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계시적인 꿈들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꿈들을 가리켜 계시적인 꿈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4가지 조건이 들어맞을 때다. 그러면 그 꿈은 계시적인 꿈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첫째, 꿈을 꾸고 난 뒤에도 그 꿈이 잊혀지지 않으며 계속해서 선명하게 기억나는 꿈이라면 그 꿈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꿈을 꾸되 겹쳐 꾸는 꿈이거나 반복적인 꿈 그리고 이어서 꿈을 꾸었다면 그 꿈은 계시적인 꿈일 수 있다. 셋째, 꿈의 내용이 일정한 패턴 즉 일정한 스토리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꿈이라면 그 꿈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 그 꿈이 그대로 성취가 되는 꿈이라면 정말 그 꿈은 계시적인 꿈이라고 할 수 있다. 

 

3. 요셉이 꾸었던 계시적인 2가지 꿈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은 대체 어떤 꿈을 꾼 것일까? 그는 사실 처음부터 형제들에게 '꿈꾸는 자' 즉 '꿈쟁이'라고 불렸다(창37:19). 그만큼 그는 많은 꿈을 꾸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가 꾸었던 많은 꿈들 가운데서 오직 2가지, 겹쳐 꾼 꿈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 꿈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꿈이었다. 그리고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꿈이었다. 그래서 요셉은 그 꿈을 형제들과 그리고 아버지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은 정확히 15년 뒤에 그대로 성취가 되었다. 고로 요셉이 꾸었던 꿈은 계시적인 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떤 꿈을 꾸었던 것인가? 그가 꾸었던 꿈은 이러하였다. 

  첫째, 요셉이 형들과 함께 곡식단을 묶고 있었는데, 형들의 곡식단이 일어서더니 요셉의 곡식단을 향하여 절하는 꿈이었다. 17세 되었던 요셉은 그 꿈이 하도 선명하고 신기해서 그 꿈을 형들에게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형들은 요셉이 형들 위에 왕이 되어 다스릴 것 같으냐면서 동생 요셉을 미워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같은 종류의 다른 꿈을 꾸었다. 이번에도 절하는 꿈이긴 하였지만 이번에는 해와 달과 별들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 꿈을 들은 아버지가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너에게 가서 땅에 엎드려 절하겠느냐"면서 요셉을 꾸짖었다. 그러나 야곱은 그의 꿈을 마음에 간직해 둔다. 

 

4. 요셉은 어떻게 되어서 계시적인 꿈을 꾸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미없는 꿈을 꾸는데, 왜 요셉은 계시적인 꿈을 꾼 것인가? 그리고 왜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늘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가? 사실 요셉이 꾸었던 꿈은 그의 장래를 알려 주는 꿈이었고 더욱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그가 어떤 지위를 누리는지 알려 주는 꿈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이렇듯 메시지를 갖고 있는 계시적인 꿈을 꾸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알려면 그의 4대 조상까지 올라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적인 꿈을 꾸고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받은 축복을 누리기까지는 그의 조상들이 행했던 놀라운 회개생활과 희생이 요셉에게 내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영을 가지고 있어서 영의 눈(영안)으로 천사를 볼 수가 있고 귀신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귀신들이 사람의 몸속 특히 눈 속에 가득차 있어서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한다. 또한 계시적인 꿈도 꿀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요셉이 계시적인 꿈을 꾸게 되고 주님의 동행하심의 축복을 받게 된 것은 전적으로 믿음으로 살다간 그의 조상들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사는 세상에 이미 하늘은 어둠이 걷혀 있었고 맑은 하늘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조상들은 어떻게 해서 요셉으로 하여금 이런 축복을 누리게 할 수 있었을까? 오늘은 그들 이야기를 다 자세히 살펴보기는 부족하기에 간단하게 그들의 삶을 정리해 본다. 

  첫째, 아브라함은 일찍 죽어 나가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가문의 저주를 끝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우상숭배의 도시인 갈대아 우르를 빠져나왔고 회개하여 100세에 이삭을 낳아 불임의 저주까지 끝냈던 조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삶은 한 마디로 '저주를 끝냄'이었다. 둘째,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모리아산에 기꺼이 자신을 살아 있는 제물로 바친 사람이다. 그의 삶은 한 마디로 '헌신'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야곱은 이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기업을 잇는 후사가 되기 위해 일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상속자가 되기를 사모하고 또 사모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한 마디로 '사모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로 요셉이 축복된 인생을 살아가게 되고 계시적인 꿈을 꿀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의 조상들이 회개하고 믿음으로 살다가 갔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5.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은 천국에서 어떤 위치에 앉아 있는가?

  우리는 신약시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어디에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믿음을 칭찬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마8:11)" 그렇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천국에 들어갈 자가 될 것이며, 거기에서 잔치 자리에 참여하는 귀중한 신분이 된다는 말씀을 주께서 하신 것이다. 그렇다. 실제로 천국에 들어가서 보면 천국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자들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24장로들이다. 그런데 24장로들 가운데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들어 있으며, 더불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낳은 최고의 사람 요셉 역시 천국에서 24장로의 반열에 들어 있다. 왜냐하면 요셉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럼, 요셉은 어떻게 되어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지위를 얻는 사람이 될 수 있었는가?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적인 꿈을 그대로 믿었으며, 여러가지 죄 특히 음행의 죄로부터 자신을 지켜내었고, 자신에게 맡겨 주신 일에 충성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금 천국에 가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은 왕적 지위를 누리는 반열에 참여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사실 창세기 이야기는 창조의 이야기(1~11장)와 구속의 이야기(12~5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구속의 이야기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족장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야곱의 이야기는 동시에 그의 11번째 아들인 요셉의 이야기와 겹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야곱의 이기는 부분이자 열매가 곧 요셉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 이야기를 통해서 어떤 사람이 천국에서 왕적 지위를 누리는 사람이 되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요셉 이야기를 통하여 그 실체가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살펴볼 수가 있는 것이다. 

 

6.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이야기는 무엇으로 귀결되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와 같은 믿음의 족장들의 이야기는 성도들 중에 족장들의 이야기로만 끝난 것일까? 아니다. 왕적 지위에 관한 구약의 이야기는 비단 족장들의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여 사용했던 민족 곧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통해서도 고스란히 다시 한번 재현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처럼 그들의 우상숭배의 저주를 끝내기 위해 애굽에서 탈출하게 된다. 그리고 광야로 나왔을 때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삭처럼 자신을 바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에는 그 땅을 자신의 기업으로 받기 위해 피나는 전쟁을 벌여 그 기업의 상속자가 된다. 마치 야곱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될 때에는 요셉처럼 왕을 세워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된다. 그래서 구약성경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왕을 세우는 것인지를 알려 주는 책이 사무엘상하요, 그 왕들이 또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이야기가 열왕기상하인 것이다. 그래서 첫 번째 세워진 왕은 사울이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우상숭배를 행하여 왕위를 내놓게 된다. 그렇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정하여 왕으로 예정해 놓았어도 왕적 지위를 누리기에 합당하지 않는 사람은 왕위에서 제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로 세워진 왕이 다윗왕이었는데, 다윗왕은 지금 천국에서 가장 빛나는 왕적 지위를 누리는 24장로들 중에 한 명이 되어 있다. 그럼, 그는 대체 어떻게 되어서 천국에서 왕적 지위를 누리는 사람이 될 수 있었는가? 그것은 그가 처음에는 아버지와 형들로부터 소외당한 사람이었으나 들판에서 양떼를 치면서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을 늘 목자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다. 즉 그는 항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왕이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 실로에 있었던 성막을 왕궁 옆으로 옮긴다. 그리고 어느 날은 자신은 백향목 향기나는 궁에서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처소는 펄럭이는 휘장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집을 지어드리겠다고 한다. 그러자 그것이 또한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된다. 그렇다. 다윗이 하늘에서 왕적 지위를 누리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7. 요셉이 꾸었던 계시적인 꿈은 그의 장래에 어떤 일이 있을 것을 알려 주는 꿈이었는가?

  요셉이 겹쳐 꾸었던 2가지 계시적인 꿈은 결국 천국에서 일어날 2가지 영적인 비밀을 알려 주는 꿈이었다. 첫 번째의 꿈은 요셉이 장래 천국에서 다른 형제들로부터 섬김을 받는다는 것을 알려 주는 꿈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형들의 곡식단이 요셉의 곡식단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실제로 이 땅에서부터 요셉의 형들은 자신의 동생 요셉을 찾아가 적어도 4번씩이나 절을 하였다(창42:6, 43:26, 44:14, 50:18). 그것은 형들의 시기로 인하여 요셉이 상인들에게 팔려 애굽에 들어갔으나, 여차저차하여 요셉은 거기에서 총리가 되었고, 기근이 수년째 계속되었을 때 요셉이 총리로서 애굽에서 곡식을 팔고 있었기에, 요셉의 형들이 곡식을 사러 애굽에 들어가면서 총리 앞에서 절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형들은 실제로 요셉에게 네 번씩이나 절을 한다. 꿈대로 이뤄진 것이다. 두 번째의 꿈은 요셉이 장래 천국에서 해와 달과 별들을 다스리는 왕이 된다는 것을 알려 주는 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꾸었던 두 번째의 꿈을 잘못 해석하였다. 왜냐하면 자신과 요셉의 어머니 라헬과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으로 그것을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곱은 요셉에게 절을 하지 않았으며, 요셉의 어머니 라헬은 야곱이 이 꿈을 꾸기 1년 전에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으며, 요셉의 형들은 11명이 아니라 10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꿈은 아버지마저도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천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볼 수 있는 영적인 사람들이 많아서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를 대강 알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왕적 지위를 누리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를 다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이 장차 있을 것에 대해 실례로서 당시 수년간 지속된 기근으로 인하여 수많은 외국 사절단과 왕들이 애굽에 곡식을 사러 와서 요셉에게 절을 하는 것으로 성취되기도 하였다.

 

8. 성도들이 천국에서 누리게 될 왕적 지위는 어떤 것인가?

  그렇다면 성도들이 천국에서 누리게 될 왕적 지위는 실제로 무엇인가? 우선 우리가 알 것은 성도들 모두가 다 천국에서 왕적 지위를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천국에는 왕 같은 제사장도 있지만 종같은 제사장도 있기 때문이다. 천국 성도들 중에 일부가 천국에서 왕적 지위를 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실제로 성도들 중에는 어떤 왕적 지위를 누리는 것일까? 그것은 성경 말씀을 종합해 보면, 요셉의 꿈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첫째로 천국에는 성도들 중에 일부가 다른 성도들로부터 섬김을 받기도 하기 때문이다(마20:26~27). 이것은 성도들이 다른 성도들 위에 군림하거나 왕 노릇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성도들 중, 간신히 구원얻은 성도들 중에 천국에서 왕적 지위를 가진 성도들의 집에 가서 섬긴다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성경 어디에 그러한 말씀이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 중에 누가 크냐고 하는 다툼이 일어나자, 이 땅에서 크고자 하는 자는 천국에서 섬기는 자로 있을 것이고, 이 땅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천국에서 종으로 있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20:26~27 헬라어 원문 참조). 그리고 둘째로 천국에서 성도들 중에 왕적 지위를 누리는 사람들은 성밖으로 나가서 왕 노릇을 하고 성 안으로 들어오는 자도 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계21:24). 그렇다. 성도들 중에 왕적 지위를 누릴 사람들은 성밖으로 나가 민족들을 다스리고 또한 해와 달과 별과 같은 행성들을 다스릴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왕 노릇할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9. 천국에서 왕적 지위를 갖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도 장차 천국에 들어가게 될 때에 왕적 지위를 누리려면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가? 이 땅에서 삶을 보내지 않은 사람 가운데 천국에서 왕적 지위를 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들 이 땅에서 살다간 사람들 중에 왕적 지위를 갖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도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성경의 인물들 중에서 누가 왕적 지위를 얻게 된 사람이었는지를 잘 살펴보고 그들의 삶의 발자취를 우리도 따라가야 할 것이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과 다윗이 천국에서 왕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반열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런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천국에서 우리도 왕적 지위를 얻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회개하여 가문의 저주를 끝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둘째, 우리도 이삭처럼 자신을 주님께 드려 헌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셋째, 우리도 야곱처럼 하늘의 상속자가 되고 왕적 지위를 얻는 사람이 되는 것을 사모하고 사모해야 한다. 넷째, 우리도 요셉처럼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계시적인 꿈을 그대로 믿고 죄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며,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섯째, 우리도 다윗처럼 결코 우상숭배하지 않고 끝까지 오로지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도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왕적 지위를 소유하는 복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10. 나오며

  사실 우리가 꾸는 꿈이나 체험은 모두가 성경에 기반을 두고 있어야 확실하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성도들의 최종적인 신분이자 최종적인 지위가 무엇인지를 성경적인 지지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요셉으로 결론 지어지는 족장들의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윗왕으로 귀결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도 함께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주 예수님께서 최종적으로 말씀하시는 왕 노릇하는 조건은 이와 같은 것인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앞의 것들과 똑같다. 그 내용은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나온다. 그중에서도 두아디라교회에게 주신 말씀 속에 왕 노릇하는 것이 나온다. 그것은 철장 권세로 왕 노릇하는 것인데, 거기에는 2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로 이기는 자들이 되어야 하고, 둘째는 주님이 맡겨 주신 일에 충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계2:26~27). 사실 두아디라교회는 거짓 선지자 이세벨이 활동하는 교회였다. 그래서 성도들이 그녀의 가르침을 따라가서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고 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교회에는 많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가르침을 따라가지 않는 이기는 자들이 있었다. 그렇다. 우리들도 이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탄 마귀의 궤계를 알아차리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상숭배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처럼 저주를 끝내야 한다. 그리고 음행의 죄를 범치 말아야 한다. 요셉처럼 자신을 지켜 음행과 같은 죄로부터 자신을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요셉처럼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에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삭처럼 주님께서 헌신하고, 다윗처럼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들 중에 누군가는 천국에서 왕적 지위를 갖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우리 성도들의 진정한 꿈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할렐루야!

 

 

2022년 11월 13일(주일)

정병진목사

 

2022-11-11(금) 금요기도회

제목: 사도바울이 받았던 일반은사와 특별은사는 무엇인가?(고전12:7~1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Hip6w897bIg  [혹은 https://tv.naver.com/v/30710654 ]

 

1. 들어가며

  성령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들에게 선물을 주신다. 그것을 우리는 '성령의 은사'라고 부른다. 이것은 구약시대에도 있었고 신약시대에도 있었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에는 일반 은사가 있고 특별 은사가 있다. 일반 은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은사인데 보통 부모를 통해 자녀에게 전달된다. 그런데 특별 은사는 좀 다르다. 특별 은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거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은사이기 때문이다. 특별 은사가 이처럼 특별한 선물인 만큼 이 은사는 신령하며 또한 초자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것을 보면서 그리고 그것을 본인이 경험하면서 절대 전능자인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 굴복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에게 은사는 매우 귀중한 보화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신약의 대 사도였던 사도 바울은 과연 어떤 은사를 받아서 그의 사역에 활동한 것일까? 그가 받은 일반 은사와 특별 은사는 대체 어떤 것일까?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내가 구해야 할 은사는 대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 사도 바울은 어떤 일반 은사를 받았을까?

  우리는 사도 바울의 생애를 사도행전의 기사와 그가 남긴 12개의 편지들을 통해서 그가 어떤 성령의 은사를 받았으며 그것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살펴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어떤 성령의 은사를 받았을까? 은사를 일반 은사와 특별 은사로 구분했을 때에 사도 바울은 어떤 은사를 받은 것일까? 먼저 사도 바울이 받았던 일반 은사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일반 은사'란 성령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초자연적인 은사가 아닌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은사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은사들은 보통 부모와 조상들이 행한 일에 따라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들에게 주시는 은사들을 가리킨다. 재물의 은사, 건설의 은사, 섬김의 은사, 봉사의 은사, 가르침의 은사 등이 일반은사에 속한다. 그러므로 일반 은사는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만약 부모나 조상들 중에 억압이나 착취 그리고 살인하거나 사기를 친 이들이 있다면 그의 후손들은 좋은 은사를 받지 못한다. 대부분 악한 영들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어떤 일반 은사를 받은 것일까? 그가 받은 일반 은사를 큰 것부터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사랑의 은사'를 받았다(고전13:1~2). 그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어떤 은사보다도 사랑의 은사를 강조했다. 사랑의 은사가 없으면 어떤 초자연적인 은사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즉 방언과 예언, 지식의 말씀, 믿음의 은사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만큼 사랑의 은사가 중요한데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크게 받은 은사는 역시 '사랑의 은사'였다. 

  둘째, 그는 '담대함의 은사'를 받았다(행20:23~24). 그는 모르는 사람 앞에 서서 설교할 때나,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 앞에서도 결코 떨지 않았다. 그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했으며 자신의 목숨을 주님을 위해 바치는 것처럼 영광스러운 일이 없다고 늘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 앞에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는 것도 알았지만,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완성하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목숨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셋째, 그는 '복음 전함의 은사'를 받았다. 그는 말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설득하고,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는 그러한 은사를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가는 곳마다 즉 회당에서,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공회 앞에서나 어디서든지 복음을 조리있게 잘 전할 수 있었다. 그의 감동적인 설교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으니, 안디옥 회당에서(행13장), 루스드라의 문 앞 광장에서(14장),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행18장), 밀레도에서(행20장),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에서(행23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벨릭스 총독에게 전한 설교(행24장)는 잘 알려진 설교들이다.

  넷째, 그는 '건설의 은사'를 받았다. 즉 그는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는 은사를 받은 것이다. 그가 세운 교회들은 너무나 많은데, 대표적으로는 비시디아 안디옥교회, 빌립보교회, 데살로니가교회, 고린도교회, 에베소교회 등등이 있다. 

  다섯째, 그는 '세움을 받는 은사'를 받았다. 그는 이방인 선교의 사도로서 세움을 받았으며, 가르치는 자로서도 세움도 받았다. 또한 그는 성경을 쓰는 자로 세움을 받았으며, 율법과 복음의 관계나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는 복음 증거자로서도 세움을 받았다. 

  여섯째, 그는 '가르침의 은사'를 받았다(딤후1:11). 그는 말씀을 잘 가르칠 수 있는 은사를 받았다. 그러므로 그가 3차 전도여행 때에는 두란노에서 약 2년 동안 사람들을 가르쳐 각 지역에 파송하여 교회를 세울 수가 있었다(행19:9~10).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것들 외에도 다양한 일반 은사를 받아서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사용하였다. 

 

3. 사도 바울이 받았던 특별 은사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위와 같은 일반 은사 외에도 사도 바울이 받아서 복음 전파에 사용하였던 초자연적 은사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사실 우리는 특별 은사가 무엇이며, 어떤 종류가 있는지 사도 바울이 써 놓은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비로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의 기본 은사로서 9가지가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제시해 놓았기 때문이다(고전12:8~10). 그만큼 사도 바울은 은사의 모든 것을 알았고 또 체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받은 특별 은사는 무엇이었는가? 그가 받은 특별 은사가 무엇인지 그 은사들을 큰 은사부터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받았다. 여기서 '지혜의 말씀의 은사'란 지혜의 은사가 아니라, 미래의 상태를 초자연적으로 아는 앎의 은사를 가리킨다. 즉 미래의 일들을 마음의 영감이나 환상 그리고 글자로 보든지 음성을 듣는 은사가 이 은사인 것이다. 예를 들어,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 드로아에 있을 때에 마케도냐인의 환상을 본 것이 그 예이다(행16:9~10). 

  둘째, 그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도 받았다. '지식의 말씀의 은사'도 지식의 은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정보를 초자연적으로 아는 은사를 가리킨다. 이것도 역시 마음의 영감이나 환상 글자 혹은 음성을 통해서 알게 되는 은사다. 예를 들어, 바울이 1차 전도여행 중 구브로에 있을 때에 박수 엘루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초자연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앞잡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행13:10~11). 

  셋째, 그는 '믿음의 은사'를 받았다. 여기서 '믿음의 은사'란 본 것도 없고 들은 것도 없는데 그냥 믿는 은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보여 주시고 들려주신 것을 믿는 은사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지혜의 말씀의 은사와 믿음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기 때문이요, 또한 아직 땅 한 평도 없었고 자식 하나 갖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그에게 기업으로 주신다고 하신 말씀과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하겠다는 말씀을 고스란히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 다메섹의 아나니아를 통하여 그를 어떤 사람으로 불러 쓰신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것을 그대로 믿고 자신의 전생애를 바쳐 그 일에 충성하였던 것이다(행9:15, 26:16~18). 

  넷째, 그는 '예언의 은사' 또한 받았다. '예언의 은사'란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마음으로 듣거나,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직접 듣거나, 성부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은 후에 그것을 전달해 주는 은사이다. 또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글자로 보여서 그것을 읽어 주는 은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처음부터 예언의 은사를 받은 선지자였다(행13:1). 또한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그는 방언과 방언 통역의 은사를 언급하였는데, 특히 '예언'하기를 권면한 바 있다. 특별히 그가 예언한 재림 예언은 지금까지 재림 예언의 표준이 되고 있다(고전15:51~54, 살전4:13~18).

  다섯째, 그는 '영들 분별함'의 은사를 받았다. 여기서 '영들 분별함의 은사'라는 것은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로서, 천사와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귀신과 뱀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어떤 현상이 성령에 의한 것인지 악한 영들에 의한 것인지를 분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은사가 능력 행함(기적과 축사)의 은사와 함께 나타나면 사실 놀랍게 주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직접 예수님을 보았고, 주의 음성을 들었으며, 사람 속에 있는 영이 어떤 영인지를 구분하여 그 속에 있는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도 영들 분별함의 은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섯째, 그는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 여기서 방언이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로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방언을 외국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더러 있다. 이것은 은사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어쨌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자신은 방언을 더 많이 말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했다(고전14:18). 그리고 그는 방언 찬양도 할 수 있었다. 

  일곱째, 그는 '방언 통역의 은사'도 받았다. 그는 방언을 많이 말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통역의 은사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방언만 말하지 말고 통역하기를 힘쓰라고 말했던 것이다(고전14:13). 

  여덟째, 그는 '병 고치는 은사' 곧 '신유와 치유의 은사'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2차 전도여행 때에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였으며(행14:8~10), 3차 전도여행 때에는 두란노에서 그의 앞치마만 얹어도 병이 치유되는 놀라운 일들을 행할 수 있었다(행19:12).

  아홉째, 그는 '능력 행함'의 은사도 받았다. 여기서 '능력 행함'의 은사라는 것은 기적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을 때에, 점치는 여종 하나를 만나게 되는데 그때 그녀가 자꾸 전도하는 일을 방해하였다. 그러자 바울은 그 속에 있는 귀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오라고 명함으로 귀신을 쫓아버렸다(행16:16~18). 또한 그 일로 인하여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거기서 기도하고 찬송을 하였다. 그러자 지진이 일어나서 옥문이 저절로 열리고 착고가 풀리는 기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행16:25~26). 그리고 3차 전도여행 때에는 드로아에서 난간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라는 청년을 살려내기도 하였다(행20:9~12). 이처럼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전서 12장에 언급한 9가지 초자연적인 은사를 다 받은 아주 특별한 사역자인 것을 알 수 있다. 

 

4. 사도 바울이 받은 은사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받은 은사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 3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부르심과 사역에 맞는 은사를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은사를 아무렇게나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대부분 이 땅에 그 사람을 보낼 때에 주신 소명에 따라 그 소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그에게 은사를 주신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파할 목적으로 이 땅에 보내어진 사명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는 은사의 거의 전부를 주신 것이다. 고로 오늘날 우리가 은사를 구할 때에는 자신의 사역에 맞는 은사를 구해야 한다. 만약 은사를 받아서 자기 자랑하고 폼 잡으려고 은사를 구하면 안 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은사를 적극 활용하여 주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고 은사를 주신다는 것이다. 은사는 그것이 일반 은사이든 특별 은사이든 상관없이 대부분 태어날 때 갖고 태어난다. 다만 악한 영들이 많으면 그 은사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감춰져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은사를 달라고 기도해서 은사를 받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하기에 어떤 은사가 필요한 것을 절실히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간구해서 받은 은사가 있을지라도 그것을 자신의 사역에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손해가 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사역에 은사를 적극 활용하여 그것으로 주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실 때에는 어떤 은사는 크게 주시고 어떤 은사는 상대적으로 작게도 주신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에 있어서 큰 은사는 빛의 은사쪽이다. 즉 영안이 열려서 영의 세계를 보고 듣고 하는 은사를 크게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의 은사 그리고 예언과 영들분별의 은사는 보다 더 크게 받은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불의 은사 곧 병 고치는 은사나 능력 행함의 은사는 적게 받았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파하도록 세우심을 받은 자는 아무래도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 환상, 영들 분별함의 은사를 더 간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5. 나오며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는 사실 좋고 나쁨이 없다. 다만 은사는 자신의 부르심과 사역에 필요하고 합당한 은사를 구하고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역시 어떤 사람이 태어날 때에 그의 부르심과 사역에 맞는 은사를 같이 딸려 보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은사인데도 자신이 갖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은사를 구하면 아니 되는 것이다. 주신 은사를 활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에게 꼭 필요한 은사만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받았으면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혹시 그것을 자기의 영력의 자랑을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거나, 아니면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절대 아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들에게는 어떤 은사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는 기도하는 은사, 기도 응답의 은사가 있으면 매우 유익하다. 왜냐하면 성도로서 중보기도 할 일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물의 은사와 섬김과 봉사의 은사가 있으면 더욱 좋다. 그리고 각 가정에서 자신이 처음 믿는 가정이라면 영적 권세가 있어야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기에, 영 분별의 은사를 구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가정을 악한 영으로부터 구원해 낸 후에는 그것을 교회의 다른 지체를 섬기는 일에 곧 그들을 영적인 어둠에서 건져내는 일에 사용하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주의 종이라면 복음 전파의 은사와 더불어 지혜와 말씀, 지식의 말씀, 영 분별의 은사, 예언과 방언 통역의 은사, 치유의 은사를 구하면 좋을 것이다. 이러한 은사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케 하고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22년 11월 11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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