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5(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5) 생수와 예배에 관하여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말씀(요4:1~42)_2022-10-05(수)

https://youtu.be/EMzCkOuNO40  [혹은 https://tv.naver.com/v/29743485 ]

 

1. 들어가며

  사마리아 여인, 그녀는 사마리아의 수가성에 살고 있던 어떤 여인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물을 뜨러 왔다가 예수님과 마주치게 된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시면서, 왜 베뢰아를 거쳐서 가는 우회 길을 선택하지 아니하시고 그날 따라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가는 직행로의 길을 선택한 것인가? 혹시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더 큰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일까? 그때 예수께서 그녀에게 주실 수 있다고 하신 '생수'는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리고 그 여인이 질문했던 '예배'의 핵심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보편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사마리아 여인은 사마리아 동네의 창녀였던 것일까? 우리는 요한복음 4장에 관련지어 참으로 질문할 것도 많이 가지고 있고 알아볼 것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영혼의 갈증은 예수님을 만나면 끝이 난다"는 제목의 설교의 본문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으며, 전도법 강의에 주요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요한복음 4장의 핵심 주제는 대체 무엇인 것인가? 오늘은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중심으로 이 이야기의 주제를 한 번 살펴보고, 그동안 풀지 못했던 궁금증들을 풀어봄으로서 주님이 주신 위대한 말씀의 진면목을 함께 나누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2. 요한복음 4:1~42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의 핵심 주제는 대체 무엇인가?

  요한복음 4:1~42절에는 사실 3가지 중요한 작은 주제가 나온다. 첫째는 '생수'를 주제로 하여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께서 대화를 나눴다는 내용이다. 둘째는 '예배'를 주제로 하여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께서 대화를 나눴다는 것이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는 추수에 관하여 예수께서 제자들과 대화를 나눴다는 내용이 이어 나온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4:1~42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대체 무엇인가? '생수'인가, '예배'인가, '추수'인가? 오늘 본문을 다 공부하고 나면 저절로 알게 되겠지만, 사실 오늘 본문 말씀은 '추수'라는 거대한 주제 가운데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 그리고 제자들과의 대화 및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대화가 등장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다른 길을 통해서 갈릴리로 갈 수도 있으셨는데, 일부러 사마리아 길을 통과하여 가는 것을 선택하셨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또한 그분의 양식이 다름이 아니라 이 땅에 '자신을 보내셨던 이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요4:34)이라는 말씀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곧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일부러 사마리아로 가신 것이다(요4:6). 헬라어 원문을 보면, 그와 같은 사실을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데, 특히 4절 말씀에, "그런데 그분은 사마리아를 통하여 통과하여 가는 것을 반드시 해야만 하셨다(원문)"는 말씀에 들어 있다. 그렇다. 그분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제 추수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아셨다. 그러고는 희어져 추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들을 향해 일부러 찾아가신 것이다. 그때에 가장 먼저 사마리아 전도의 첫 시작점으로 주님의 눈에 들어온 사람을 만났으니 그가 바로 우물가의 한 여인이다. 

 

3. 사마리아 여인은 정말 창녀였는가?

  그렇다면 그날 물을 뜨러왔던 여인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과연 '창녀'였을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녀의 신분을 창녀라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느 때에 신부가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했는데, 그녀가 창녀였다고 설교함으로 대부분의 주석들이 이 여자를 창녀로 주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4장에서는 그녀를 어떤 여자로 표현하고 있는가? 그것은 창녀가 아니라 기구한 운명을 가진 여인으로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여자를 주님께서도 '귀네'라고 불렀기 때문이다(요4:21). 이것은 주님께서 그녀를 귀부인으로 칭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이 여자는 낮 12시에 물을 뜨러 온 것이 아니라 오후 6시에 물을 뜨러왔던 평범한 여인이었기 때문이다(요4:6). 왜냐하면 오늘 본문 6절에 의하면, 그 여인이 물을 뜨러 온 시각이 '대략 6시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그 시각이 오후 6시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시간은 로마의 시간법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힌 시간을 요한복음 19장에서도 로마시간법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준 시간이 '제 6시'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그 시각이 아침 6시였기 때문이다(요19:14).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쓴 복음서이기 때문에 공관복음의 시간 기록 방법처럼 유대인의 시간법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 시각은 예수께서 여행 중에 피곤해서 지쳐 있는 시간이었다고 말씀하고 있다(요4:6). 즉 예수께서 낮 12시부터 피곤하여 물가에 앉으신 것이 아니라, 아침부터 온종일 걸으신 후에 비로소 저녁 6시쯤 되어 사마리아 동네에 도착하셨기 때문에 피곤하신 것이다. 셋째, 만약 이 여자가 창녀였다면 나중에 그녀가 동네에 들어가서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간증할 수도 없으며,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창녀가 말한 것을 귀담아 듣고 예수님을 만나러 나올 사람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요4:28~30). 그런데 보라. 이 여인의 말을 듣고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넷째, 이 여인은 남자를 여러 명 거느린 여자가 아니라 정식으로 남편을 다섯 명 두었지만 기구한 운명 때문에 그때 같이 살고 있던 남자와는 결혼도 못한 채 지내왔기 때문이다. 남편을 다섯 두었다는 것을 통해 그 여인을 창녀라고 볼 수 없다. 창녀는 남편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고로 그녀는 기구한 운명 때문에 결혼을 하기는 했지만 사별을 했거나 아니면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한 불쌍한 과거를 가진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새로 만난 남자와는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채 지금 살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 여인을 비롯한 사마리아 동네 사람들 전체가 당시 메시야를 매우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여인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했을 때 동네 사람들도 메시야를 만나러 물가로 나아온 것이다. 

 

4. 예수께서는 어떻게 해서 여인에게 복된 소식을 전해주었는가?

  예수께서는 이미 선험적인 지식으로 사마리아 동네의 영적인 상황을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군가가 그곳에 가서 복된 소식을 전해주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번 기회에 직접 그곳에 가서 그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해주고 싶으셨다. 그래서 일부러 사마리아 동네를 향하여 간 것이다. 그래서로 그곳 마을의 입구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 그분이 멈춰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동네 사람 누군가는 물을 뜨러 그곳에 올 것이라고 예상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한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그리고 손에는 두레박을 가진 채 물을 뜨러 오고 있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간단하게 물을 달라고 하는 청을 한다. 그러자 일반적인 일이었다면 그것은 너끈히 청을 들어줄 수 있는 일이었지만, 사마리아인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보였기에 그 청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상종하지 않는 시기였기 때문에 그녀는 예수님의 청을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십니까?" 그러자 주님은 그녀가 관심을 갖지 아니할 수 없는 말씀을 그녀에게 들려주신다. 그것은 만약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고 또한 그분이 줄 수 있는 선물 곧 생수가 무엇인지를 알았다면 오히려 자신에게 물을 좀 달라고 했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자 여인은 예수님에게는 물을 길을 두레박도 없고, 그 우물은 매우 깊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떻게 생수를 가지고 있게 되었기에 그러한 말씀을 하는 것이냐면서 반문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 우물 물을 마시는 자는 또다시 목마르겠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물을 마시는 자의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구치는 물의 샘이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자 그녀는 그러한 물이 정말 있다면 자기에게도 주어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게 하고, 물을 긷기 위해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일상적인 화제를 통하여 영적인 진리를 이끌어내시고, 사람들의 관심을 유발시키는 대화법을 통하여 그 여인을 전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5.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주실 수 있다고 하는 '생수'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생수(생명의 물)'는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아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사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답이 들어있다. 첫째로, 그것은 그것을 한 번만 마시더라도 다음 시대까지 결코 목마르지 아니할 물이라고 하셨다(요4:14). 그리고 둘째로, 그 생수는 그것을 받은 자의 속에서 계속해서 솟아오르는 물의 샘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4:14).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생수라는 것은 이 세상의 물질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물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갈증을 영원히 해결해줄 그러한 물은 이 세상에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물이 이 세상의 물이 아니라 천국에서 오는 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천국에는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물이 흘러나오고 있다(계22:1). 고로 이 물은 하나님의 생명(조에)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결국 생명을 가지고 사람 속에 들어오실 '성령'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사도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두 번씩이나 '하나님의 선물'을 '성령'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행8:20, 11:17). 또한 성령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하시면서 그분이 주실 수 있는 것은 '생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계22:17). 그리고 예수께서도 초막절 끝날에 생수의 강에 대해 설교하시면서, 그것은 믿는 자의 뱃속에서 솟아올라오는 성령의 물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요7:37~39). 

요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그렇다. 예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실 수 있는 생명의 물은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성령이 사람의 영 속에 들어오게 되면, 사람의 영의 배에서부터 물이 올라와서 가슴을 채우게 된다. 그러면 그시로 그냥 만족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 사람은 더이상 이 세상의 것을 가지지 않아도 부요한 마음으로 가득차게 되고 세상 것이 하나 없어도 그것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6. 예수께서는 왜 뜬금없이 가서 남편을 불러오라고 했을까?

  그런데 예수께서는 생수를 달라고 하는 여인에게 가서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다. 왜 예수께서는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달라고 하는 그 여인에게 갑자기 자신의 남편을 불러오라고 했던 것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죄인인 것을 모르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즉 죄의 문제 해결없이는 예수께서는 결코 성령을 주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때 그 여인은 과연 어떻게 대답했을까? 그녀는 자신에게는 남편이 없다고 말했다. 이는 그녀가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실은 그녀의 남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솔직하게 대답할 이유가 그녀에게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예수께서 그것을 직접 확인해야 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예수님에게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도 그녀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그대로 고백하자, 그녀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왔는지를 들려준다. 그것은 그녀에게 지금까지 남편이 다섯 명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남편이 죽어서 다시 재혼했는지 아니면 남편이 그녀를 버렸기 때문에 재혼했는지를 알 수는 없지만, 그녀는 이처럼 기구한 인생을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지금 간음을 저지르고 있는 상태와 같았다. 그렇지만 그것을 솔직하게 예수님에게 말씀드린 것이다. 그것이 바로 회개인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자신의 모진 인생을 다 알고 있는 예수님을 가리켜, "당신은 선지자이십니다"라고 말한다. 

 

7. 여자는 왜 갑자기 예배할 장소를 물어본 것인가?

  자기의 눈 앞에 있는 유대인이 남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점차적으로 알게 된 여인은 예수께서 진정 선지자라면 알 수 있는 어떤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자기들이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물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조상들은 이 산(그리심산)에서 예배를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말합니다. 예배하는 곳은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예배에 관한 진실을 말씀하신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대상을 예배하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알지 못하는 대상을 예배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리심산에서도 아니며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예배할 때가 오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때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영 안에서 진리로 예배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예배를 받으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8.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렇다면,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예배의 핵심은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먼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면 그러한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영과 진리 안에서'라는 말의 뜻은 대체 무엇인가? 첫째, '영 안에서'라는 함은 유대인들이 예배드릴 때에 너무나 형식에 치우쳐 있었을 뿐 마음은 거기에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예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려 함이요, 둘째, '진리 안에서'라 함은 사마리아인들이 자기들이 정한 방식에 따라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 아님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예배 방식도 잘못된 것이요, 말씀에 없이 자기들이 정한 방식에 따라 예배하는 사마리인들의 예배 방식도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어떠한 예배인가? 그것은 형식에 따라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서 마음을 다해 예배하는 것을 가리키며, 자기의 정한 방식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에 따라서 예배한느 것을 가리킨다. 

  그러자 그 여인이 말한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가 오시게 되면 그분은 전체의 모든 것을 다 알려주실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지금 네가 말하고 있는 이가 바로 그이이다'라고. 그러자 그녀는 지금까지 자기에게 일어났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이해해버린다. 즉 자기와 말씀하고 있었던 바로 그이가 모세가 예언했던 '나와 같은 선지자'(신18:15)로서, 장차 하나님께서 보내실 주실 메시야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자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 둔 채 동네로 들어간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을 향하여 크게 외친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9. 그 여자가 물동이까지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친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놀라은 현상이 나타난다. 그것은 첫째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싶어서다. 그리고 그분에게 감사하고 찬양하고 드리고 싶어서다. 그리고 둘째는 그분을 전하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여인이 메시야를 만나자 그녀는 즉시 예배에 관해 질문한 것이다. 그리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자신이 행했던 만큼 많이 모든 것을 다 자신에게 말했던 사람을 와서 보라고 외친 것이다. 이분이 메시야가 아니라면 또 누구겠느냐고 말이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그녀의 외침을 듣고 메시야를 만나기 위해 야곱의 우물가로 몰려나온다. 그렇다. 한 여인의 능동적이고도 열성적인 외침이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 모두가 메시야를 기다려왔기 때문에 그들은 메시야가 왔다는 외침을 듣고는 메시야를 보기 위해서 우물가로 몰려온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때문에 예수님에게 나아온 것이지만, 나중에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듣고 메시야에게로 나아오게 된다. 그리하여 예수님이야말로 세상의 구주라고 고백하게 된다(요4:42). 그리고 이런 일이 있은 후에 몇 년이 지난다. 그리고 예수께서 인류의 속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 달려 돌아가신다. 그리고 생수와 같은 성령을 오순절날 마가다박방에 모인 120명의 유대인들에게 보내주신다. 그리고 스데반의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자들 중에 일곱 집사의 하나인 빌립을 통해 사마리아에도 복음을 전파하게 하신다(행8:4~13). 하지만 그때에 그들은 성령을 받지는 못한다. 그러자 예루살렘에서 이 소식을 들었던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간다. 그리고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게 된다(행8:14~17). 그리하여 생수와 같은 성령을 값없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약속이 그대로 성취가 된다. 

 

10. 나오며

   예수께서는 왜 다른 길들을 놔두고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가는 길을 선택하셨던 것일까? 그것은 사마리아가 이미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가서 그들을 추수해야 한다는 것을 아시고 처음으로 그 문을 열어젖히고자 일부러 그곳을 찾아가신 것이다. 그때에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가 바로 우물가를 찾아온 사마리아 여인이었다. 주님은 그녀가 메시야를 만나지 못해서 그때까지 자신의 영혼에 갈급함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는 그녀에게 생수에 관한 말씀을 시작으로 그녀에게 복음을 전하신다. 하지만 생수로 비유하신 성령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지 않는 자는 받을 수 없기에 그녀의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한다. 부끄러운 자신의 실상이지만 그녀가 솔직하게 예수님에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자신이 그녀가 찾고 있는 메시야라는 것을 가르쳐주신다. 그리고 그녀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참된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신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과 그동안 대화를 나눴던 분이 메시야이신 것을 알아차리고는, 동네 안으로 들어가서 메시야를 만난 소식을 기쁘게 전한다. 그리하여 드디어 희어져 추수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마리아에도 추수가 시작된다. 이렇게 시작된 추수는 훗날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성취가 된다. 그렇다. 우리 주님께서는 지역과 인종과 민족에 상관없이 누구나 복음을 듣고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그들에게 값없이 생수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누구든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가 되어 주님을 진정 예배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신다. 

 

2022년 10월 05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38)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도 바울의 교회관은?(행9:10~18)_2022-09-09(금)

https://youtu.be/YAHMuCkl_KQ  [혹은 https://tv.naver.com/v/29111775 ]

 

1. 바울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가?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드디어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이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신 것이었다. 그 이유는 하늘에서 바울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이 땅에 그에게 사명을 주어 보내셨던 분께서 이제는 때가 되니 찾아오셔서 그를 불러내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처음부터 이 땅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려고 보냄을 받은 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어둠의 영들에 갇혀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륜도,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도 전혀 알지 못한 채 있었다. 그러다나 어느날 다메섹으로 가는 길을 가다가 빛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그럼, 예수께서 사람에게 오실 때에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난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는 셋째 하늘과 우리가 살고 있는 첫째 하늘이 순간적으로 딱 맞닿아버리면서 즉시 오시는 것이다. 즉 중간의 둘째 하늘이 접혀져 버리면서 오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빛은 프리즘처럼 쫙 펼쳐지게 되는데, 그 속에서 예수님의 형상이 그려지면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다. 그리고 빛 가운데서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2.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경로 3가지는 무엇인가?

  사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경로는 3가지다. 하나는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방문을 맞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구약시대에 해당되며,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나님을 만났고, 모세가 그랬으며, 사무엘이 그랬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이 찾아오실 때에는 이름을 부르시는데, 그때에는 꼭 두 번씩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창22:11), "모세야 모세야"(출3:4), "사무엘아 사무엘아"(삼상3:10). 그러나 하나님의 모습은 결코 볼 수 없다(요4:24).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딤전6:16). 그리고 또 하나는 예수님의 방문을 맞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이후의 일인데, 예수님의 방문을 맞이하는 것도 결코 흔한 일은 아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에 있어서 중대한 일을 행하실 때에는 아버지 하나님이나 예수님께서 직접 오신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경로는 어떠할까? 그때에는 대부분 다 성령께서 오셔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의 경우이다. 그런데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육안으로는 하나님이 오셨는지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셨는가 하는 것은 성령께서 내 안에서 일하시는 결과로서 알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주인이 나였던 것이 그때부터 성령 하나님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세미하게  말씀하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때부터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음이 확실히 믿어지게 되고, 내 인격이 바뀌게 되고, 내 삶의 목적도 달라지게 된다. 그리고 그때 오신 성령께서 내게 어떤 선물(은사)을 주시기도 하신다. 그래서 어떤 이는 방언을 말하기도 하고 환상을 보기도 하고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경우는 두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직접 찾아오신 경우였기 때문이다. 

 

3. 사도바울의 교회관은 어떻게 생겼을까?

  성경에서 '교회관'이라고 함은 거의 다 사도 바울이 말했던 교회관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본다. 물론 교회를 세우셨으며 교회가 무엇인지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셨지만 말이다. 어느날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누군지를 물어보았을 때에, 수석 사도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당신은 그 그리스도이시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 그러자 베드로는 그 신앙고백 위에 "내 교회" 곧 주님이 주인인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한 교회는 음부의 권세(문들)이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16:18). 다시 말해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 위에 교회는 세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러한 교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하게 된다. 그것은 그의 다메섹에서의 체험 때문이었다. 사울이 혈기등등하여 예수믿는 자들을 잡아 결박하고 옥에 가두고 때로는 죽이기 위해 주의 성도들을 찾아 헤매고 있었을 때였다. 열심이 특심이었는지 그는 이방지역에 해당하는 다메섹에까지 가서 주의 성도들을 잡아오려고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그를 둘러 비치었고, 그때 예수님을 보았고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때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9:4). 그러자 문득 자기 앞에 빛 속에 나타난 예수님을 보고는 그는 말했다.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게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9:5~6). 바울은 그때 예수믿는 자들을 못살게 박해하고 있었던 것이지 결코 죽고 사라져 버린 예수님을 박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눈 앞에 이미 죽어서 없는 분이 나타나신 것이다. 그리고 사울의 이름을 부르면서 왜 자기를 핍박하느냐고 말씀하는 것이었다. 그는 사실 예수님을 믿는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서고 있었는데, 그것이 곧 나를 핍박하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을 들은 것이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의 교회관이 정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4. 바울이 다메섹에서 체험한 주님과의 만남과 그분의 지시는 그의 교회관을 어떻게 정립하게 해 주었는가?

  바울은 그때 스데반과 주의 성도들이 예수님과 '한 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성도들이 매맞고 성도들이 옥에 갇히고 성도들이 죽임당하게 되는 것을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당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교회를 정의하기를 "교회는 그(그리스도, 예수님)의 몸이라"라고 하였다(엡1:22). 스데반과 주의 성도는 당시 주님과 한 몸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몸은 하나인 것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는 사람과 똑같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12:12)" 그리고 각 지체들은 자기들의 고유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앞에 나타난 예수께서는 더이상 그에게 말씀하지 않고 그에게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를 붙혀준다. 그리고 그가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 바울이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5.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교회가 교회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사도 바울에 의하면 적어도 3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주 예수님을 주님이자 머리로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엡1:21). 왜냐하면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을 머리로 믿고 따르지 않는 자는 교회가 아닌 것이다. 둘째, 자기 안에 성령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고전12:13). 성령 하나님께서 자기 안에 들어와 있어야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보혜사 성령으로 믿는 이들 속에 내주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직신학 책을 보면, 교회의 표지는 다음과 같은 3가지라고 정의하고 있다. 첫째는 말씀의 참된 선포요, 둘째는 성례(세례와 성찬)의 바른 집행이며, 셋째는 권징의 신실한 시행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비록 세례를 받지 않았어도 예수님을 진정 주님으로 믿고 있고, 자기 안에 성령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교회인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들의 모임이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교회는 주님을 사랑하고 지체를 자기의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엡5:28~30). 왜냐하면 주님께서 먼저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기의 몸을 내주셨기 때문이다(엡5:25).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우리를 교회로 만드시기 위해 자기의 몸을 내어주셨는데, 어찌 그러한 사랑을 받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또한 그분이 핏값을 주고 산 이웃 형제자매를 어찌 용서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로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권징을 신실하게 집행하는 데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주님께서 행하셨던 희생적인 사랑을 다른 지체들에게 그대로 행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나니아가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다(행9:17). 사실 예수믿는 자들은 결박하여 옥에 넘기기 위해 다메섹에 들어온 바울은 아나니에게는 원수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용서하고 그 원수와 같은 자를 형제로 받아주라고 하셨다. 또한 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성령을 받게 하고 그의 눈에게 악한 영들을 제거해주라고 하셨다. 그러자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그대로 준행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세례까지 베푼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여러 지체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것이 교회인 것이다. 

 

2022년 09월 09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26) 천상에서 예수님은 여전히 그리스도의 직무를 수행하고 계신다(01)(계11:15)_2022-05-31(화)

https://youtu.be/RiLxLsOvPLc  [혹은 https://tv.naver.com/v/27082945 ]

 

1.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고 있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기본적으로는 "주"(계22:20,21), "예수"(22:16,22:20,21), "그리스도"(1:1,2,5, 11:15, 12:10, 20:4,6), "하나님의 아들"(계2:18),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계5:6,9,12), "유다 지파의 사자"(계5:5), "다윗의 뿌리이자 자손"(계5:5,22:16), "광명한 새벽별"(계22:16), "만왕의 왕, 만주의 주"(17:14,19:16), "목자"(7:17) 등이 있다. 그런데 그분에 대한 신성한 표현도 있다. 그러한 표현으로는 "주 하나님"(계1:8), "전능하신 이"(계1:8), "장차 오실 이"(계1:8), "처음이요 마지막"(계1:17), "알파와 오메가"(계22:13), "시작과 마침"(계22:13), "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계1:18), "보좌에 앉으신 이"(계20:11), "인자같은 이"(1:13) 등이 있다. 

 

2.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몇 번 나오는가?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아래와 같이 총 7번 나온다(계1:1,2,5, 1:15, 12:10, 20:4, 20:6). 그런데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2가지 용례로만 쓰였다. 첫째로는, '예수'라는 이름과 더불어 3번 사용되었다(계1:1,2,5). 그리고 둘째로는, 그분의 직무와 더불어 4번 사용되었다는 것이다(계11:15, 12:10, 20:4, 20:6). 참고로 '예수'라는 명칭은 총 12번 나온다. 

계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계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계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계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계12: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계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계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원문은 '그의')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3.  '그리스도'는 대체 무엇을 뜻하는 단어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라는 말은 그리스도이신 그분의 이름을 뜻한다(마1:21).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무엇을 뜻하는 명칭인가? 그것은 그분이 행하시는 직무를 뜻하는 명칭이다. 사실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구약의 '메시야(마쉬아흐)"라는 명사 단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요1:41). 그렇다면 '마쉬아흐'는 단어는 무슨 뜻인가? 그것은 '기름붓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마샤흐'에서 온 말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구약 성경에 보면, '마쉬아흐'라는 표현을 한글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번역하고 있는 말씀이 나온다. 시편2:2의 말씀이다. 

시2: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마쉬아흐)'를 대적하며 

  그렇다. 그리스도는 예수께서 가지신 어떤 직무를 일컫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기름부음을 받아서 수행하는 어떤 직무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당연히 기름부음을 받아서 사역을 감당하셔야 했다(눅4:18). 그런데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구약 시대에 보니,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서 어떤 직무를 맡기신 3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첫째는 '제사장'에게 기름을 부어 직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부어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신 것이다. 둘째는 '왕'이다. 하나님께서는 왕이 되려는 자에게도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셋째는 '선지자'다. 그런데 구약의 선지자 중에 직접 기름부음을 받고 선지자가 된 자는 오직 한 사람 뿐이다. 그는 사밧의 아들 '엘리사' 뿐이다(왕상19:16). 나머지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선지자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고로 구약 시대에 기름부음을 받아서 거룩한 직무를 수행한 자들로는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예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이러한 3가지 직무를 수행하셨다. 

 

4.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직무는 어떤 것인가?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기름부어 세우라고 하셨던 3가지 직무들 중에서 어떤 직무를 지금도 여전히 수행하고 계실까? 그것은 오직 한 가지 뿐이다. 그것은 '왕'의 직무 뿐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천국에서 왕의 직무 외에는 제사장의 직무나 선지자의 직무가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필요 없게 되었는가? 첫째로, '제사장'의 직무다. 그리고 제사장의 직무 가운데 가장 큰 직무는 제사 드리는 일을 집례하는 것인데, 이것은 예수께서 지상에서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 수행해야 했던 직무였다. 이윽고 예수께서는 그 직무를 다 끝내시고 하늘로 가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늘에서 더 이상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으신다. 둘째로, '선지자'의 직무다. 선지자의 직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일이 주요한 일인데, 이러한 직무 역시 예수께서 이 지상에 계실 때에만 필요했던 직무였다. 천상에 계신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말씀하신다. 또한 천국에서는 무엇인가를 공부하지 않아도 다 아는 곳이다. 저분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신 분이라는 것을 다 알아버린다. 그곳이 천국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천국에서 제사장의 직무와 선지자의 직무를 더 이상 수행할 필요가 없으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천국에서 왕직만 수행하고 계신 것이다. 

 

5. 천국에서 주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같은 분인가 아니면 다른 분인가?

  요한계시록에서는 주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분이 서로 같은 분인지 다른 분인지를 분명하게 계시한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은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시다(계22:20,21).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것은 곧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과 같다. 영국의 대신학자 리차드 보컴 교수는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그는 그의 책 "요한계시록 신학"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를 공유하고 계신다고 하면서, 그분이 행하시는 일은 곧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라고 하였다. 즉 예수께서 통치하는 것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것이요, 예수께서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보좌에 앉으시는 것은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과 천사들과 구원받은 성도들이 어린양에게 유일한 하나님에게 바치는 찬송과 경배를 동일하게 바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세상의 왕국이 이제 주님과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이 되셨다는 음성이었고, 그가 장차 왕으로 다스릴 것이라고 했다(계11:15). 만약 주님과 그리스도가 각각 다른 분이라면, "그가 장차 왕으로 다스릴 것"이라고 표현하지 말고, "그분들이 장차 왕으로 다스릴 것'이라고 해야 한다. 하지만 노랫소리는 주어요 3인칭 단수다. 그분이 왕 노릇하는 것이다. 이 때 그분은 당연히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시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이고 예수께서 왕 노릇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왕 노릇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왕 노릇하는 것이기에, 하늘에서 나는 음성은 "그가 장차 왕 노릇할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주 예수께서는 장차 우리도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자가 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성도가 천국에 들어가서 왕 노릇하게 되는가? 그것은 지상에서 예수께서 왕 노릇했던 것처럼 하는 자들이다.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어떻게 왕 노릇했는가? 그것은 귀신들을 지배하고 다스림으로 왕 노릇하셨다(마12:28). 그러므로 우리도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자가 되려면 이 지상에 있을 때에 예수님처럼 귀신들을 내쫓아야 한다. 천국에서 얻게 될 지위는 이 지상에서 얼마나 왕 노릇하는 자가 되었느냐고 판단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2022년 05월 31일(화)

정병진목사

 

 

이 땅에는 수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있는데, 왜 교회에서 구원자는 오직 예수님 뿐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이는 너무 독단적이고 편협적인 판단은 아닌가? 예수께서 구원자가 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보시고 어느날 괜찮아 보여서 그를 구원자로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그분을 처음부터 구원자로 보내신 것인가? 오늘날 자신을 재림예수요 구원자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아무리 자신이 그렇다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구원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여기 확실한 답이 있다.

2021-12-12(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왜 예수 이외에 다른 사람은 구원자가 될 수 없는가?(눅2:10~1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CXkpxgV84u4 [ 혹은 https://tv.naver.com/v/24059493 ]

 

1. 들어가며

  오늘은 대강절(대림절) 셋째 주일이다. 대강절이란 우리 주님께서 죄 가운데 빠진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탄생한 것을 축하하는 성탄절 전의 4주간을 일컫는 말인데, 오늘은 그 세 번째 절기인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께서 탄생하시던 날에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을 알고 축하해 주는 이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축하객들을 베들레헴에 보낸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한 천사를 시켜 밤에 자기의 양떼를 치고 있던 목자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셨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보낸 것인데, 그들은 별을 연구하던 천문학자들이었다. 이름하여 '동방 박사들'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의 축하는 초자연적인 방법이 동원되어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므로 말씀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실은 거기에도 매우 큰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성도들은 영적인 세계에서도 밝은 자가 되어야 하겠고, 성경 지식에 있어서도 밝은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말씀을 가지고 재림 예수 운운하는 자들 중에는 이단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 소식에 담겨 있는 영적인 사실을 통하여 누가 이단들인가를 분별하고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자인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

  지금 우리는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가? 우리 주님께서는 공생애 기간에 제자들에게 말세에 되어질 일을 말씀해 주신 적이 있었다.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하겠지만 그 말을 믿지 말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말세가 되면 거짓 사기꾼들이 일어나서 큰 표적과 기적을 행함으로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마24:23~25). 그런데 지금은 그러한 시대가 아직 이르지도 않았음에도 말씀만을 가지고서 사람의 영혼을 미혹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기적이나 이적도 행하지 않으면서도 성경 말씀만을 가지고서 사람의 영혼을 미혹하는 이단에는 신천지(증거장막성전)가 있고 하나님의 교회(안상홍증인회)가 있다. 이들 중에서 신천지 이만희 총회장은 자신을 재림 예수인 것처럼 포장한다. 그는 말한다. 보혜사에는 영의 보혜사가 있고 육의 보혜사가 있다는 것이다. 영의 보혜사는 성령이시고, 육의 보혜사는 사도 요한인데, 사도 요한에게 임하였던 육의 보혜사가 이제는 자기에게 임하여 자기가 말세의 이긴 자요, 약속의 목자이자, 육의 보혜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통하여 이긴 자를 데리고 육체가 영생하는 천년 왕국에 들어간다고 속이고 있다. 

 

3. 재림하실 예수께서는 어떻게 오시는 것인가?

  성경에서는 예수께서 어떻게 다시 오시는지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것은 하늘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천사가 가르쳐 주었다. "너희 가운데 하늘로 올려지신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 그렇다. 그분이 하늘로 올라가신 것처럼 하늘로부터 오실 것이다. 그리고 구름을 타고 올라가신 것처럼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다(계1:7). 그런데 신천지에서는 구름이 진짜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구름이겠느냐면서 구름은 실제 구름이 아니라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을 받은 자가 곧 자신이요 자신이 재림 예수라는 것이다. 그래서 1984년에 재림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이만희 총회장 속에 들어가서 지금 일하시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만희의 주장은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첫째,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을 비유풀이 짝풀이(알레고리칼 해석)를 통하여 성령이라고 해석하지만 이것은 환상과 실제를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환상이 기록된 것도 있고 실제를 기록한 것도 있다. 예수께서 그날 승천하실 때에 구름을 타고 올라가신 것은 실제를 기록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에 구름이 함께 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상은 다르다. 예를 들어, 요셉이 꾸었던 꿈 가운데 곡식단이 절하는 꿈은 실제가 아니다. 환상이다. 그것은 해석이 필요한 것으로서, 요셉의 곡식단에 절하는 다른 곡식단은 요셉의 형제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곡식단이 다른 곡식단에 스스로 절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가신 것이나 다시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은 실제 일어날 일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다시 오실 예수께서는 부활체로서 영광 중에 하늘로부터 좇아 오시며, 모든 인류가 다 지켜보는 가운데 오시는 것이며, 오실 때에는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는 성도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함께 오시는 것이지, 오셔서 사람 속에 들어가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분은 한국 사람 속에 들어가서 역사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 천사가 일러 준 예수님의 탄생 소식 속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4.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또 사람 속에 들어가서 일을 하실 것인가?

  우리가 재림 예수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오시되, 결코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로 올려지셨던 그분이 다시 오실 그분이기 때문이다. "내가 속히 오리니(계22:12)" 그렇다. 그분은 그때 모습 즉 33년 반의 생애를 사셨던 유대인 청년의 모습을 가지고 오실 것이요, 손과 발에 못자국을 가진 채 오시는 것이지 다른 모양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다. 영화로운 부활체를 입으셨던 그분이 영광 중에 심판주로 오시는 것이지 나이가 들면 늙어가는 사람 속에 오시지 않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성경에 이미 기록된 말씀을 부정하고, 전 세계에서 예수믿는 사람들 중에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게 은밀하게 오셔서 이만희의 육체 속에 들어가서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닌 것이다. 이만희의 주장대로라면 자기만이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믿는 모든 사람이 성령을 받았으니 모두가 다 재림 예수가 된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결단코 또 육체 속에 들어가지 않으신다. 

 

5.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재림 예수는 어떤 분이신가?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통하여 재림하실 예수님이 누군지를 정확히 알 수가 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던 예수께서는 구주(구원자)로 오셨다는 것이다(눅2: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그렇다. 초림의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그럼 그분은 어디에서부터 구출하기 위해 오신 것인가? 그것은 우리 인류를 죄 가운데서, 사망 가운데서, 사탄 마귀 가운데서 건져내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피흘릴 수가 없고 죽으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사람으로 오셔야 했다. 왜냐하면 피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고(히9:22), 죄의 값은 사망(롬6:23)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대신 피흘려 죽으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를 사람들이 혹시 몰라볼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수백 수천 년 전에 이미 장차 구원자로 오실 분에 관하여 예언으로 알려 주셨다. 그분은 과연 어떤 혈통에서 나오실 것이며, 어디에서 태어날 것이며, 잉태될 때에는 어떻게 잉태될 것인지까지 미리 다 말씀해 주신 것이다. 인간 중 어떤 놈들도 사기를 치지 못하게 하시려고 말이다. 그러므로 베들레헴 근방의 목자들에게 나타났던 천사는, 그분은 다윗의 후손(눅2:4, 삼하7:12, 마1:1)으로서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눅2:11, 미5:2) 구원자로서 오늘 태어나셨다고 알려 주었던 것이다(눅2:11). 그러므로 다시 오실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이 땅에 오셨다가 가셨던 바로 그분이 다시 오시는 것이다. 한국 사람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다시 오시는 그분은 부활체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오시는 것이다. 다시 육체를 입거나 육체 안에 들어가시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약속도 하신 일이 없으며, 그렇게 하실 이유도 없으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오시는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다거나 아니면 육체 속에 들어가셔서 일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께서 초림 때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 사역을 다 부정하는 것이다. 그때 예수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자기가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예수님의 구원자되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 육체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무슨 말씀을 하시고 돌아가셨는가? 그분은 "다 이루셨다"고 하셨다. 인류의 죄값을 다 지불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구원을 위한 그분의 속죄 사역은 완성된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아쉬울 것이 있어서 다시 오시되 늙어가는 육체 속에 들어가신다는 말인가? 

 

6.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살다가 구원자로 택정함을 입은 것인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살다가 어느 날 구원자로 택정함을 입으신 분이 아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신 것이고, 처음부터 그리스도로 태어나신 것이며, 처음부터 주님으로 태어나신 것이다(눅2:11). 왜나하면 어떤 사기꾼이 나타나 내가 성령을 받았기에 이제부터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신 것이며, 그리스도로 태어나신 것이며, 주님으로 태어나신 것이다. 그분은 이미 사람으로 살고 있는 어떤 사람 속에 들어가 남의 육체를 빌려 쓴 적이 없다. 그분은 처음부터 사람으로 태어나신 것이요, 그분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더라, 내가 재림 예수이더라고 말하는 자는 다 사기꾼들인 것이다. 아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구원자로 태어나셨다. 

  그렇다면, 첫째로, 그분이 처음부터 '그리스도'로 태어나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눅2:11) 그것은 그분이 만왕의 왕으로 태어나셨다는 뜻이며, 인류의 속죄제사를 집례할 영원한 제사장으로 태어나셨다는 뜻이자, 온 인류에게 영적인 상태를 알려 주어 회개하여 구원받으라고 외치는 선지자로 태어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둘째로, 예수께서 처음부터 주님으로 태어나셨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인가?(눅2:11). 이는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신 것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신적인 존재 가운데 "주님"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여호와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으며(창15:2),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도 여호와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삼하7:18).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요8:24, 28, 58). 그리고 그분은 처음부터 하나님이셨기에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행하신 것이다. 그분은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리셨으며,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셨으며, 물 위를 걸어서 오셨고, 바람과 풍랑도 말씀 한 마디로 잔잔하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셨기에, 나다나엘을 만나기 전에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를 말씀하실 수가 있었으며, 베드로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도 미리 말씀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만희가 자존한 자인가, 무소부재한 자인가, 전지전능한 자인가? 그는 결단코 재림 예수가 아니다. 우리와 똑같이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고 아프면 병원에 가고 그리고 나이가 들면 늙어가는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7. 나오며

  사실 지금의 이단의 문제는 단지 이단 교주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실은 기성 교회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단이 발생하게 된 그 배경이 교회에서 성경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못한 탓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누군지를 정확히 가르쳐 주지 못했기 때문에 엉뚱한 노인을 재림 예수요 육의 보혜사로 믿고 따라가고 있는 실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영의 실제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신천지 지파장 가운데에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그중에 한 사람도 영의 실제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었어도, "내가 천국에 가 보니 하나님의 보좌에 늙은 이만희가 앉아 있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 청년이었던 바로 그 예수님이 앉아 계시더라"고 말해 주었을텐데, 단 한 사람도 천국을 실제로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이만희의 말장난에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 또한 이단만을 탓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기존의 교회에서도 영적인 세계의 실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교회를 다녔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경을 잘 풀어 준다는 이단에게 빠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영육 간에 실력을 다 갖춘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회개를 많이 하고 은사도 받아서 영적인 계급도 올라가고 영의 세계를 볼 수 있며, 귀신들을 내어 쫓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더욱이 모든 것의 표준은 성경인 만큼 성경 말씀도 체계적으로 공부하여 성경을 비틀어 속이는 이단의 가르침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란다. 

 

2021년 12월 12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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