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에스겔은 부름받고 난 후 자신의 입을 열어 말로써 예언하지 못했는가?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면서 그는 왜 외치지 못했는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에스겔에게는 행동예언을 많이 시키셨다. 그렇다면 그가 했던 행위예언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들이었는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미 작정하신 일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오늘날에 들어와서도 하나님께서는 왜 죄를 지은 자들을 무조건 용서해주지 아니하시는 것인가? 또한 과연 하나님의 인내에도 끝이 있는 것인가? 그리고 심판의 때가 가까웠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내리는 징계의 도구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구약시대에 내렸던 심판의 도구들과 오늘날 내리시는 심판의 도구들에는 어떤 변화가 있는가? 이러한 놀라운 비밀들이 오늘 말씀 속에 들어 있다.

2019-07-24(수) 수요기도회
제목: 에스겔강해(07) 에스겔의 행동예언들과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들(겔4:1~5:17)
https://youtu.be/ek1kRY8Z7Fg


1. 들어가며

  에스겔은 예레미야와 거의 동시대에 예언했던 인물이다. 예레미야가 비록 에스겔보다 25살 나이 많은 예언자이지만,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심판을 예언하고 있을 때에, 바벨론에서는 에스겔 선지자가 남유다의 포로민들을 향하여 예언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에스겔은 처음 7년동안은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혀를 입천장에 붙혀놓았기 때문이다(겔3:26). 그리고 2년이 지난후부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행동예언을 하게 했다(겔4:1~5:4). 그래서 에스겔은 비록 말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장차 예루살렘과 남유다를 어떻게 처리하실 것인가를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에스겔의 초기사역 가운데 있었던 4가지의 행동예언들(겔4:1~5:4)예루살렘과 남유다에 관한 심판의 도구들(겔5:5~17)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지난 주에 미쳐 다 끝마치지 못했던 에스겔의 소명 중에서 "이스라엘의 파숫꾼으로 세워진 에스겔(겔3:16~21)"에 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2.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움받았던 에스겔의 사명은 어떤 것이었는가?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다(겔3:17). 그렇다면, 에스겔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말해야 했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들을 향해 외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파수꾼으로 세워질 때에는 말 자체를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혀를 입천장에 붙여놓았기 때문이다(겔3:26). 그래서 에스겔은 행동으로 그들에게 예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7년후 남유다가 멸망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말할 수 있도록 입을 열어주셨다(겔33:21~22).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하여 예언할 수 있었다. 이때도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남유다의 파수꾼으로 세우신다고 또한 말씀하셨다(겔33:2~4).

  그렇다면, 파수꾼은 어떠한 사람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성의 높은 망대에 올라가 적군이 자기의 성을 침입하러 오는지를 살피다가 적군이 오는 것을 보면 제일 처음으로 성 사람들을 향하여 경고의 나팔을 부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데 만약 파수꾼의 경고의 나팔을 듣고도 성 사람들이 성을 방어하지 못해서 해가 되는 경우, 파수꾼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파수꾼이 졸았는지 해서 경고의 나팔을 불지 않았는데, 적군이 침입해 손해를 입게 되었다면 파수꾼은 그 책임을 전부다 감당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파수꾼"이란 남들보다 먼저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알게 된 정보를 전달해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래서 파수꾼이다. 왜냐하면 어떤 존재가 진정 하나님인지, 그리고 인간의 상태는 지금 어떤 상태에 빠져 있는지, 또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먼저 알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며,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결코 자범죄들이 사해지지 않으며, 회개를 할 때에라야 예수님의 피로 자신의 죄가 사함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만약 우리가 그러한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파수꾼으로서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파수꾼이 파수꾼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을 때에 다른 사람들이 입을 피해를 고스란히 그에게서 찾겠다고 하셨다(겔3:17~18).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먼저 진리를 알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러한 진리를 전해주어야 한다. 그가 듣든지 아니 듣든지는 그가 결정할 일이기 때문이다.  

 

3. 에스겔은 왜 말로 예언하지 못하고 행동으로 예언해야 했는가?

  남유다의 파수꾼으로 부름받았던 에스겔은 하나님으로부터 행동예언들을 전달받는다. 하지만 에스겔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행동예언들은 결코 쉬운 행동들이 아니었다. 어떤 것은 참으로 곤욕스러운 일이었고, 어떤 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도 있었다. 아울러 어찌 보면 이상한 행동처럼 보이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했다.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들을 행동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입술로 벌려 말로 예언하지 않고, 행동으로밖에 예언하게 된 이유첫째로, 그의 혀가 입천장에 붙어 있어써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요(겔3:26), 둘째로, 남유다의 흥망성쇠는 이미 파멸로 기울어져 있었고, 도무지 되돌이킬 수 없을 만큼이었기 때문이다(겔7:2~4). 그러나 셋째로,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아시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멸망을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심을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함도 들어 있었다(겔2:5).

 

4. 에스겔이 보여준 초기의 4가지 행동예언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는가?

  그렇다면 에스겔이 보여준 초기의 행동예언들은 어떤 것이었으며 그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고 있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앞으로 5년 뒤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것인데, 그때에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하여 안에 있는 자의 1/3이 죽게 될 것이며, 또한 1/3은 쳐들어온 바벨론의 군대의 칼날에 죽게 될 것이고, 마지막으로 나머지 1/3은 포로로 잡혀가거나 잡혀가다가 또한 칼날에 죽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제 4가지 행동예언들을 살펴보자.

  첫째, 토판그림제작 행동예언을 살펴보자(겔4:1~3).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토판을 제작한 후 거기에 예루살렘성을 그려놓고, 그것에 포위망을 만든 후 그것을 향하여 사다리를 세우고, 토성을 쌓고, 진을 치고, 공성퇴를 둘러 세워놓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와 예루살렘 성 사이에 철판을 세워 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싸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장차 바벨론 군대가 와서 예루살렘성을 포위하고 공격하는 모양을 그대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둘째, 좌우편 모로 눕기 행동예언을 살펴보자(겔4:4~8). 하나님께서는 이제 모로 누워있되 움직이지 말고 왼쪽으로 북쪽을 향해 390일간 누워있고, 이어서 40일간 오른쪽으로 남쪽을 향하여 누워 있으라고 하셨다. 이는 그로 하여금 하루를 일년으로 계산하여,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죄악을 짊어지는 행동이라고 가르쳐주셨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이 돌아오기를 390년동안 기다리셨고, 남유다가 돌아오기를 40년간을 기다리셨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끝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돌아오지 않았다.

  셋째, 혼합곡식빵 취식 행동예언을 살펴보자(겔4:9~17). 이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더러 장차 예루살렘이 바벨론군대에 의해 포위당한채 390일동안 있게 될 때 성안에서 발생할 상황을 그대로 재현해 보게 하셨다. 그것은 주로 먹기에 좋은 곡물인 밀과 보리와 더불어 먹기가 좋지 않는 곡물인 콩과 조와 귀리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고 그것으로 떡을 만들어 먹되, 390일을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그때 음식물은 하루에 20세겔씩만 먹고, 물은 1/6 힌 만 마시라고 하셨다. 이것은 먹을 것이 없어서 사람이 먹지 못할 곡식까지 먹게 될 것이며, 물도 마시지 어려운 올 것을 예언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그 떡을 인분 불에 구워먹으라고 하셨다. 사실 인분(사람의 똥)은 부정한 것으로서(신23:12~19), 결코 진영 가까이 두면 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것으로 불을 피워먹으라고 한 것은 땔감이 없어져서 결국 사람의 똥을 말려 그것으로 땔감을 사용할 것임을 예언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에스겔은 제사장이었기에 그것은 부정한 것에 접촉하는 일이라며 하나님께 말씀드렸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인분 대신에 쇠똥을 사용하도록 허락해주셨다.

  넷째, 터럭 분산 처리 행동예언을 살펴보자(겔5:1~4). 하나님께서는 날카로운 칼을 가져다가 이발사의 칼로 삼아서 자신의 머리털과 수염을 깍은 뒤에 저울로 달아서 그것을 3등분으로 나누라고 하셨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읍이 에워사는 날들이 되면, 3가지로 터럭을 처리하라고 하셨다. 1/3은 성읍 안에서 불사를 것이고, 1/3은 성읍 주위에서 칼로 치고, 1/3은 바람에 흩날리라고 하셨다. 이는 예루살렘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1/3은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3/1은 바벨론군대의 칼날에 죽는 것이었고, 1/3은 포로로 잡혀간다는 뜻이었다(겔5:12, 7:15).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에스겔더러 4가지 행동예언을 하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상숭배와 가증한 일을 회개하지 않은 예루살렘 성을 파괴할 것이며, 비록 약속의 자손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 엄중한 심판을 집행하실 것을 미리 알게 하셨다.

 

5. 하나님께서 징벌로 사용하는 4가지 도구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예루살렘 성을 파괴하며 그 성 주민들에게 심판을 집행하시는지를 좀 더 깊게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과 그 성 주민들에게 심판을 행하는데 사용하신 도구들은 크게 4가지였다. 그것은 "기근"과 "전염병" 그리고 "사나운 짐승"과 "칼(전쟁)"이었다(겔5:17). 이 중에서 자연적인 재앙으로는 "기근"과 "전염병"과 "사나운 짐승"이 여기에 속하며, 인위적인 재앙으로는 "칼"(전쟁)이 여기에 속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사람과 민족을 치실 때에 사용하는 방법에는, 첫째, 자연을 파괴하심으로 심판하는 방식이 있고, 둘째, 사람을 이용하여 파괴하는 방식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독특한 심판방법을 한 가지 더 본다. 그것은 "사나운 짐승"의 출몰과 공격이다. 당시에 그것은 하이에나나 자칼, 곰이나 사자같은 맹수들의 공격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먹을 것이 없으니 맹수들이 사람까지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도 공생애 가운데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즉 종말의 징조로서,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을 언급하신 것이다(눅21:10~11).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불어닥치는 이러한 4가지 재앙들을 볼 때,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고 빨리 회개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언급하실 때에,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다가 "짐승"을 언급하시는데, 이때의 언급된 "짐승"은 맹수를 가리키지 않고, 맹수처럼 공격하는 귀신들을 언급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주님은 그것들을 "땅의 짐승들"이라고 하셨다(계6:8). 그렇다. 요한계시록에서 "땅의 짐승들"이란 사나운 맹수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적으로 볼 때에 사탄과 짐승과 거짓선지자로 구성된 귀신들이었던 것이다(계16:13~14).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우상을 경배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귀신의 공격을 허락하실 것이다. 보라. 지금 전 세계가 귀신의 공격으로 인하여 동성애가 창궐하고 있고, 베리칩을 666이라고 이용하고 있으며, 자기의 자식들이 귀신들려 고통받게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모두가 다 자신이 지은 지와 조상들이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아서다. 회개하면 이 모든 귀신의 공격들이 떠나갈 텐데,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고 저주에서 벗어났으니 이런 것들은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다. 이제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여전히 믿는 이들도 불신자와 똑같이 저주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죄를 지어놓고도 회개하지 않아서인 것이다.

 

6. 나오며

  하나님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의 경우를 보라. 예수께서는 초림 때에는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신 사랑의 하나님이셨으나, 다시 오실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을 심판하러 오시는 심판주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실 때에 회개해야 우리는 심판주로 오시는 주님의 얼굴을 보지 않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족속은 너무나 늦었다. 하나님께서 무려 430년을 기다리셨으나 그들이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절대 파괴될 수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던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게 되었고, 예루살렘 주민들은 기근과 전염병에 죽거나, 바벨론 군대의 칼날에 죽게 되었으며, 나머지는 바벨론사람들에게 포로로 잡혀가 이국땅에서 노예로 살 수밖에 없었다. 남유다 백성들의 씨를 말려버린 것이다. 예루살렘이 과연 어떤 성읍이었는가? 남유다의 주민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그들은 예루살렘 성만큼은 절대 파괴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자기들도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의 결과는 참담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자들에게까지 관대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죄는 반드시 심판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우주질서를 유지되며 하나님께서 공의로운 심판을 집행하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죄를 회개하는 일이다. 회개가 우리를 이 땅의 심판과 하늘의 심판으로부터 건져줄 수 있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19년 7월 24일(수)

정병진목사 


에스겔은 언제 어떤 상태 있을 때에 소명을 받았을까?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소명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러내실 때에 왜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을 먼저 보여주고 그에게 사명을 주셨던 것일까? 그리고 그를 직접 음성으로 부르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왜 그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고 그에게 "인자야"라는 칭호를 사용하셨던 것일까? 사실 "인자"라는 칭호는 구약시대에는 에스겔에게 99% 그리고 다니엘에게 단 한 번 사용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그러한 칭호를 에스겔과 다니엘에게만 사용하셨던 것일까? 그리고 그가 보냄을 받은 대상은 이방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었는데,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고 하셨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패역한 족속"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일까?

2019-07-03(수)

제목: 에스겔강해(04) 에스겔의 소명과 파송(1)(겔2:1~3:27)_2019-07-03(수)

https://youtu.be/wiOvnQoj9iQ



1. 들어가며

  에스겔은 25세에 예루살렘에서 제사장의 일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남유다 19대왕이었던 여호야긴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5년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하지만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환상부터 보여주셨다. 그리고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는 전형적인 선지자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그는 먼저 보았고 그리고 먼저 말했던 것이다. 사실 선지자는 선견자로서 선지자(먼저 말하는 자)이면서 또한 "먼저 보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스겔은 바벨론의 그발강가에서 그의 영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들려 올라가는데, 거기에서 그는 네 생물과 바퀴의 환상 그리고 네 생물 위에 있는 궁창의 환상 그리고 궁창 위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을 본다. 그리고 아울러 거기에 앉아계시는 분의 음성을 듣는다. 물론 그는 거기에 좌정해계신 하나님은 볼 수 없었고 거기에 사람같은 형상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은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으로서 불같았다. 그런데 그 보좌로부터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이 바로 에스겔의 소명에 관한 말씀이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셨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에스겔은 얼마만큼 쓰임을 받았을까?

  에스겔은 30살(B.C.593년)의 나이에 포로민의 상태에서 이방땅인 바벨론에서 부르심을 받아서 22년간 사역한 뒤 그의 나이 52세(B.C.571)에 바벨론 땅에서 그의 사역을 마감하게 된다(순교했다가 전해진다). 그가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아 사역하는 동안 그는 참 모진 고통을 겪어야 했다.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무려 7년동안 이스라엘을 향하여 입을 열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리고 33살에는 그의 아내가 갑지기 죽게 되었으나 슬퍼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슬퍼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이른바 행동으로 보여주는 예언 곧 "행동예언"만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답답한 마음을 오죽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했던 행동 예언은 그를 정신병자 취급할 정도였다고 하니 당사자는 오죽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3. 에스겔은 어떻게 부름을 받았을까?

  그렇다면 에스겔은 어떻게 부름을 받았을까? 그는 먼저,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 보여주었던 환상을 보았다. 그것도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먼저 눈을 열어 환상을 보여주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제사장이었던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과연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를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그가 5년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왔을 때만해도 그는 하나님께서는 유대땅에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의 지성소에 계시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디에 국한되어 갇혀 계시는 분이신가? 아니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의 눈을 열어 하늘에서 온 우주만물과 세계 모든 나라들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싶으셨다. 그래서 먼저 그에게 천상의 모습을 환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나서 보좌 위에 앉아계시는 이의 음성을 들었다. 그것은 이제 그는 불러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세우시겠다는 것이었다.

 

4. 에스겔을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어떤 사람으로 불렀는가?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누가 그를 보내며, 어떤 사람에게 보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알려주셨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부르실 때에 "에스겔아!"라고 말씀하시 않으셨다. 그에게 "인자야"라고 말씀하셨다. 그럼, 왜 많은 호칭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그의 이름으로 그를 불러내지 아니하시고, "인자야"(사람의 아들, 아담의 아들)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그것은 "인자야"라는 말이 갖고 있는 놀라운 뉘앙스가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오직 에스겔과 다니엘에게만 "인자야"라는 호칭을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약 93회에 걸쳐 그를 "인자여"라고 부르셨고, 다니엘에게는 딱 한 번(단8:17) 그렇게 부르셨다. 그렇다면, 이 세상 사람들 중에서 에스겔과 다니엘에 "인자"라는 호칭이 사용되었는데, 이 두 사람의 공통된 특징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가? 그것은 첫째,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서 이방 땅에서 환상을 보았다는 것이다. 다니엘은 B.C.605년 1차포로 때에 바벨론에 끌려간 자였고, 에스겔을 B.C.577년 2차포로 때에 바벨론에 끌려간 자였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의 환상을 보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너무나 불쌍한 사람으로 전락한 상태에 있을 때에 "인자야"라는 호칭을 들었고, 너무나 황홀한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을 본 후에 "인자야"라는 호칭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가?

  그것은 첫째로, 사람은 아무리 놀라운 계시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사람의 아들" 곧 "아담의 아들"이요, "흙의 아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라도 하나님께서 훅 불어버리면 날라가 없어지고 말 인생인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 사도바울에게도 하나님께서 교만하지 말라고 그의 몸에게 사탄의 가시를 넣어주었을 것이다. 둘째로, 비록 사람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시키신 사명에 충성을 다한다면,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게 해 주시겠다는 암묵적인 선언이 바로 "인자야"라는 호칭이었던 것이다.

 

5. 에스겔을 불러내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어떤 말씀을 주셨는가?

  먼저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불러서 보내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하셨다. 그는 이미 보좌의 환상을 보았던 분이 바로 보좌에 앉으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둘째, 이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누구에게 보내는지 말씀하셨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여호와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낸다고 하셨다(겔2:3). 그렇다면 "패역한 자"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륜적으로 반역하는 자라는 뜻이다. 얼마나 그들이 못된 자였으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러한 표현을 쓰셨을까?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민족을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건져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주었건만 그새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여러 이방신들과 온갖 피조물을 자신의 하나님이자 조물주로서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한 분 하나님에 만족하지 않고 푸른 나무 아래서, 산 꼭대기에서, 무성한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높은 고개 위에서, 제단 사방에서, 심지어 성전에서 우상들을 만들어 섬겼기 때문이다(겔6:13).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이거니와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제사장들이 각양 곤충과 짐승의 신을 숭배했으며, 동방태양에게 절을 하였으며, 여인들은 담무스를 위해 애곡하였다(겔8장).

  그렇다면, 사람이 패역한 사람이 될 때에는 어떤 상태에 들어가는 것일까? 그것에 대해 겔12:2에서는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즉 하나님께서 보여주는데도 일부러 외면하지 보지 아니하고며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데도 일부러 귀를 가리고 듣지 않으려는 상태가 바로 패역한 사람의 상태인 것이다(겔3:27). 사람이 만일 패역한 사람이 되어버리면, 아무리 진리를 알려주어도 들으려 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잘못을 책망한다고 해도 곧이듣지를 아니하는 것이다.

 

6. 나오며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가서 예언하라고 보낸 사람들은 가서 외치면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전부가 귀를 틀어막고 듣지 않으려는 사람이었고, 눈이 있으나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가려버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이방인들이 아니었다. 차라이 이방인들이었다면 말을 더 잘 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자기 민족이 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한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에스겔에게 가시와 찔레와 전갈로서 다가왔다. 그들은 오히려 에스겔을 핍박하고 고통을 주며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도 선지자는 어떤 자인가? 그래도 듣든지 아니듣든지 가서 외치는 자가 선지자다. 그것이 바로 선지자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바로 그러한 사명을 맡겼던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그러한 사명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우리들도 에스겔처럼 7년을 벙어리가 지내며 행동예언을 할 수 있으며, 젊었을 때 아내를 잃어버리고 그리고 자기 아내도 죽었도 슬퍼하지 못하게 가로막는다면 과연 우리는 순종할 수 있을까? 그것이 바로 선지자아 가야할 길이요 선지자의 사명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말씀맡은 자의 길이요 사명인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19년 7월 3일(수)

정병진목사



에스겔은 왜 강해져야 했는가? 에스겔의 이마는 왜 다이아몬드처럼 경도가 강해져야만 했는가? 그것은 이미 완악해지고 딱딱히 굳어버린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보다는 더 강력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들을 깨뜨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하고, 그 중에서 한 생명이라고 회개케 하여 구원얻게 하는 일에 자신이 쓰임받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에스겔은 선지자로서 부름을 받았지만 무려 7년동안 아무말도 못하는 벙어리로 지내야 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혀를 입천장에 붙여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그것은 이제 곧 불어닥칠 이스라엘 멸망을 더이상 연기하거나 취소시키지 않으시겠다는 표시다. 심판을 받드시 집행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에스겔의 마음은 정말로 답답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순종과 겸손의 훈련부터 먼저 시키셨다. 그러자 에스겔은 정말로 강해졌으며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는 복음전파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2019-07-10(수)
제목: 에스겔강해(05) 에스겔의 소명과 파송(2)(겔2:1~3:27)
https://youtu.be/I5lhKxIEwYU


1. 들어가며

  에스겔은 30살(B.C593년)에 부름받아 22년간 사역(B.C.571년)하였다. 그의 사역초기에는 자신의 혀가 입천장에 붙어 있어서, 벙어리처럼 살아야했다. 만약 누가 선지자로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면, 가서 큰 소리로 외쳐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7년동안 벙어리처럼 말을 못했다. 하나님께서 막으셨기 때문이다. 다만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에게 그러한 일을 시키셨다는 말인가? 사실 에스겔은 이제 남유다의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쳐야 할 당사자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외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그것도 무려 7년동안이나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에스겔 보내었던 대상은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이방민족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이스라엘 민족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에스겔의 어떤 말이나 행동에도 전혀 반응하지 아니하는 패역한 민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패역한 족속을 향하여 에스겔을 보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역해야 할 선지자는 과연 어떤 자세와 각오로 현지로 들어가야하는가? 그리고  그곳에 가서 과연 무엇을 외쳐야 하는가? 오늘은 선지자가 가야 할 대상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민족이었으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할 예언의 메시지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나님께서는 어떤 대상을 향해 에스겔을 보내셨는가?

  B.C.593년 에스겔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지 5년이 지난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갈대아의 그발강가에 있던 에스겔을 불러내셨다. 그런데 그때 에스겔은 갑자기 북쪽에서부터 강한 폭풍과 큰 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보게 된다. 환상이었다. 환상의 시작은 하늘에 있는 네 생물(생명체)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환상의 끝은 궁창 위에 있는 보좌 위에 앉으신 이에게 있었다. 그러자 거기에 앉은 이로부터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인즉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는 말씀이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선지자로서 보내는 대상은 누구였는가? 첫째로, 이방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이었다(겔2:3,3:5~6). 그들은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이 아니라, 말을 알아듣지 못할 나라가 아니라 자기 민족이었다. 둘째, 그들은 에스겔의 예언을 잘 받아주거나 잘 순종할 백성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었기 때문이다. 셋째, 그들의 이마가 얼마나 딱딱하고 마음은 굳어있고 얼굴은 뻔뻔한 사람들이었다(겔2:4,3:7).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마는 굳어져서 어떠한 말도 들을 수 없는 상태였다. 그들의 마음도 닫혀 있어서 들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말을 들었다고 해서 그들이 반응할 사람들도 아니었다. 이미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있었던 것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왜 에스겔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내야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에스겔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선지자로 보내려고 하는가? 그런데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깨우쳐 회개하게 하려함이 아니었다. 이는 그러한 때는 지난 뒤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에 대한 소망은 접은 상태였기 때문이.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내긴 보내지만 그들에게 아무 말을 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래서 그의 혀를 입천장에 붙혀놓아서 어떤 말도 하지 못하게 막으셨다(겔3:26). 그래서 에스겔은 선지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지만 무려 7년동안이나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행동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름하여 "행동예언"만을 하게 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에스겔에서 언어예언이 아니라 행동예언만을 하게 한 것인가?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하나님을 뜻을 전달해주는 선지자가 있었다는 것을 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겔2:5).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패역한 족속으로 전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겔12장에 보면, 패역한 족속이란 어떤 족속을 의미하는지 이렇게 나와 있다.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겔12:2)"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희망과 기대를 이미 접은 상태였다. 그러니 그들이 듣고 회개하지 못하도록 아예 음성으로 예언하는 것을 막으셨던 것이다. 왜 이 지경까지 된 것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우상숭배 때문이었다. 남유다의 제14대 왕이었던 므낫세왕 때부터 남유는 급속히 기울기 시작하였다. 므낫세왕은 남유다에서 가장 유명했던 왕 중의 하나인 히스기야였다. 하지만 므낫세는 정반대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남유다의 멸망을 결정하게 하게 했던 못된 행동들을 골라서 했다. 그것도 무려 55년간이나 말이다. 므낫세왕을 지나서 아몬시대에 이르러 남유다의 범죄를 더욱 더 심각해졌으니, 그들이 섬긴 우상의 수가 무려 유다의 고을의 수만큼 많았으며, 그들은 성전에서조차 버젓이 태양신숭배를 자행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남유다마저 멸하기로 작정하셨던 것이다. 그렇다. 다른 그 어떤 죄보다도 가장 큰 죄는 우상숭배의 죄다. 제1계명과 제2계명을 어길 때에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신다. 피조물을 하나님으로 섬길 때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집행하시는 것이다.

 

4. 하나님께 부름받은 선지자가 가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는 곳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인데, 하나님을 말씀을 전해야 할 대상은 그리 녹록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당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들려주고자 하는 말씀을 대신 그들에게 전하는데, 그들이 듣든지 아니듣든지 전하는 일을 해야 했다. 냉대와 박대 속에서도 꿋꿋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자가 바로 선지자의 직책이었던 것이다.

  사실 선지자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초기 선지자들로서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은 선지자들이 있다. 이러한 선지자들은 가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도 행하는 선지자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선지자는 대체로 지도자들로부터는 배척을 받지만 백성들로부터는 환영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후기 선지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한 명도 기적을 행하는 선지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달하는 선지자였다. 그것도 대부분 책망하는 말과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후기 선지자들은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에스겔도 이사야, 예레미야 선지자와 더불어 후기 선지자에 해당하는 자로서, 가서 예언만을 할 수 있는 선지자였다. 그러니 그가 가서 해야 할 일은 어느 누구도 환영해 줄 자가 없는 상황에서 가서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하는 것이었다. 외롭고 고독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선지자노릇을 하는 것이 힘들었을까? 그러나 사실 오늘날 주의 종들 중에는 능력있는 종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가진 은사와 달란트, 능력과 권세로서 기적을 행할 수 있다. 그러니 환영받는 주의 종들도 많은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불러내셨던 12제자들의 경우도 비슷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12제자들이 나가서 천국복음을 전파할 때에 주님은 그들을 빈 손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그들의 치유와 축사로 인하여 사람들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주었고 그들을 믿고 따라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에스겔은 그 어떤 이적도 행할 수 없는 그러한 선지자였다. 그냥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그의 처음이요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7년동안은 말도 하지 못하는 선지자였으니 그 답답함이 오죽했을까?

 

5. 에스겔이 전해야 할 메시지는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어떻게 일러주셨는가? 그것은 귀에 들려준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두루마리에 써 놓은 글이었다. 그것도 안팎으로 쓰여있는 글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두루마리를 에스겔에게 보여주셨는데, 하나님의 편 손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애가(장송곡노래)와 애곡(울음소리)과 재앙(치명적인 질병과 같은 재앙들)의 말이 기록된 것이었다. 주님은 그 책을 에스겔의 입에 넣어주시며 그것을 먹으라고 하였다(겔2:8,3:1). 그래서 에스겔이 그것을 먹었는데, 그 두루마리는 입에서 매우 달았다. 그 달기가 꿀 같았다. 하지만 창자 안으로 들어갔을 때에 그것은 매우 썼다(겔2:10,3:3). 그것이 재앙에 관한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자기의 입으로 먹은 것과 똑같은 일이 후에 한 번 더 있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사도요한이 그러한 체험을 한 것이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12제자로서 예수를 증언하고 복음을 전파했다는 이유 때문에 당시 로마황제에 의해 A.D.95~96년경 밧모섬이라는 섬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그때 발에 끌리는 옷을 입으신 예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에게 당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를 편지를 써 보내라고 하셨다(계1장). 그러시면서 보낼 편지의 내용까지 일러주셨다(계2~3장).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도요한의 영을 불러 천상으로 데려가셨다(계4장).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천상의 모습의 보여준 후 장차 되어질 일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보여주셨다(계5장). 그러나 상천하지에 그것을 열어볼만한 존재가 없었다. 하지만 일찍 죽임을 당한 예수께서 그 두루마리를 받으시더니, 그것의 인봉을 떼셨다. 그랬더니 장차 되어질 인류의 모든 역사가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차근차근 일곱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에 들어이는 우주의 역사가 다 공개되었다. 하지만 장차 되어질 일이 그것만으로 끝마쳐진 것이 아니었다. 어린양이 일곱번째 인을 떼었을 때에, 이번에는 일곱 가지의 나팔재앙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곱인을 떼기 직전에, 한 천사가 사도요한에게 작은 두루마리를 먹어준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역사상 두번째로, 천사의 손에 있는 두번째 작은 두루마리를 사도요한에게 보여주셨다. 그것은 B.C.593년에 에스겔이 보았던 첫번째 것과 거의 비슷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면, 에스겔은 보좌에 계신 이께서 직접 두루마리를 먹여주셨다고 한다면, 사도요한은 천사가 두루마리를 먹여준다는 점이다. 물론 둘 다 글은 두루마리(파피루스)이 안팎으로 쓰여있었으며 그 내용은 재앙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먹을 때에 입에서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은 후에는 배에서 매우 썼다. 이것도 에스겔이나 사도요한에게 똑같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훗날 기록된 요한계시록의 말씀 중에 일곱나팔심판과 일곱번째 대접심판이 재앙의 심판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6. 하나님은 왜 에스겔을 강한 자로 만들어야 했는가?

  에스겔의 사역할 당시 이스라엘은 타락할 대로 타락한 상태에 있었으며, 하나님을 대놓고 거역하곤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이 사역을 감당하다가 그만 사역을 중단할까봐 에스겔을 무장시켜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족속들의 이마가 딱딱하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있는 것을 뛰어넘도록 에스겔을 강하게 해 주신다고 약속해주셨다(겔3:8~9). 그것은 먼저, 에스겔의 이마를 화석보다 더 강하게 해주시겠다고 했다. 여기에 나오는 "화석(히, '초르')"은 출애굽기서에서 십보라가 모세에게 할례를 행할 때 사용하던 바로 그 돌맹이이다. 우리말로는 "차돌"인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의 이마를 차돌보다 더 강력한 경도를 가진 금강석으로 만들어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겔3:7~9). 여기에 나오는 "금강석"이란 영어로는 "다이아몬드"에 해당한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지자를 누군에게 보낼 때에는 선지자가 주눅이 들도록 대충대충해서 보내지는 아니하신다. 더 강력하게 무장해서 보내는 것이다. 그것으로 하나님은 우선 에스겔을 영으로 충만하게 해 주셨다. 그리고 어떤 사명을 감당하려 할 때에는 천상의 모습과 음성을 듣게 해 주셨다. 천국이 기다리고 있으니 더 강하고 담대하라는 의미다. 그렇듯 에스겔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단단해지고 강해졌다. 그의 이름처럼 말이다. 그의 이름은 "에스겔(예제키엘)"이라는 말로서, "하나님은 강한 자다" 혹은 "하나님은 강하게 하신다"는 뜻이다. 그렇다. 에스겔이 패역한 족속을 상대로 사역해야 하니 더 강력한 훈련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가장 유능한 사람 중에 하나인 에스겔을 잡아 들어쓰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설 때에 또는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할 때에 절대 떨지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다(겔2:6,3:9).

 

7. 나오며

  그렇다. 선지자는 외롭고 힘들 길을 가는 자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앞에 반대와 고난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이상 에스겔은 그러한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에스겔이 자신이 약해져서는 아니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강하게 하시려고 먼저 하늘에서 벌어지고 있는 놀라운 광경을 그에게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 영광을 위해서는 자신이 비록 "아담의 아들(벤아담=인자)"이지만 고군분투할 것을 권면하셨다. 왜냐하면 그가 가서 만나야 할 사람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자기의 민족이지만 가장 강퍅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은 결코 에스겔이 전한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고해주셨다. 그렇지만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들의 이마가 딱딱한 상태에 놓여있기는 하지만, 에스겔의 이마는 차돌처럼 더 강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을 덧붙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에스겔의 이마를 금강석(다이아몬드)같이 만들어주실 것이라고까지 말해주었다. 그만큼 선지자는 강해져야 하고 반대와 냉대와 조소 속에서도 흔들림없이 자신의 사명을 완수해가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믿는 이들이나 많은 주의 종들은 다 이러한 길을 가야 할 것이다. 아니 이러한 길이 예비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두려워하지말고 업신여기지도 말라.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내 인생을 꽃피우게 해줄 수단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19년 7월 10일(수)

정병진목사 


1

에스겔은 자신이 포로로 잡혀간 바벨론의 어느 강가에서 약 3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그때는 바야흐로 B.C.593년경이었다. 그런데 그의 부르심의 시작은 하나님의 보좌에 대한 환상을 봄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의 영이 하늘로 불려 올라갔고, 아직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갔는데, 그는 거기서 "네 생물들"과 "네 바퀴들"와 "궁창"과 "하나님의 보좌"를 본다. 그리고 이어서 "보좌 위에 앉으신 이"를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 그런데 그것은 매우 두렵고 무서운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A.D.95년경 사도요한이 쓴 요한계시록을 통해 우리는 또다시 하나님의 보좌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데 달라진 것이 있다. 그렇다면, 그때와 이때는 대체 무엇이 달라졌는가? 그리고 어떻게 달라졌으며 얼마나 달라진 것인가? 우리는 이 두 가지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발견할 것이다.

2019-06-26(수) 수요기도회
제목: 에스겔강해(03) 에스겔이 본 궁창과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겔1:15~28)
https://youtu.be/hgzpsT5Cmw4


1. 들어가며

  B.C.600년경 과연 천상의 모습 특히 하나님의 보좌 주변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구약시대에는 사실 부활체를 입은 성도가 아직은 한 명도 없던 시대였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예수께서 처음으로 부활의 첫열매가 되시어 천국에 들어가셨으니, 에스겔이 사역하던 시대(B.C.593~571)에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구원받은 성도들이 아직은 없었다. 그때는 오직 하나님과 천사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던 시대다. 하지만 이때도 지금처럼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서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는 네 생명체들이 있었고, 하나님께서도 그 보좌에 앉아서 이 우주만물을 다스리고 있었다. 이때 천상의 특이한 존재는 하나님의 보좌 아래에 있는 "네 생물들"이다. 네 생물들은 겉으로 보기는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다 천사들에게 속한다. 하지만 그들을 천사라고 지칭하기보다는 피조물의 원형이라고 해야 더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네 생물들과 더불어 네 생물들 옆에 있는 바퀴의 환상 그리고 궁창과 더불어 하나님의 보좌의 형상 그리고 보좌에 앉으신 이에 대한 환상을 다루고자 한다. 특히 이것이 A.D.95~96년경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천상의 모습과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네 생물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특징과 보좌의 기능과 보좌에 앉으신 이가 누군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에스겔이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던 날에 보았던 천상의 네 생물들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에스겔이 부름받던 때는 에스겔의 나이 30세가 되던 해였다(B.C.593). 그는 이미 25세 때에 남유왕 여호야긴왕과 함께 바벨론에 2차로 포로로 끌려와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포로였기에 성전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에게 하나님의 환상이 임했다. 그가 환상 중에 보았던 것은 네 생물들의 모습, 바퀴와 궁창의 형상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였다. 그 중에서 네 생물들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첫째로, 네 생물의 모습은 크게 보기에는 날개를 지닌 독수리와 같았으나 얼굴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이 생물들은 각기 사면에 얼굴을 가지고 있었으니, 사람과 사자와 소와 독수리의 얼굴이었다. 이들의 얼굴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사람, 들짐승의 왕으로서 사자, 집짐승의 왕으로서 소 그리고 날아근 새들의 왕으로서 독수리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이것은 이 생물들이 지혜와 용기와 힘과 민첩함을 가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을 보좌하여 행정을 집행할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이러한 네 생물들의 날개는 두 쌍으로 되어 있었는데 한 쌍으로는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었고, 한 쌍으로는 날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의 몸을 가린 것은 거룩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수치를 가리기 위한 것이었고, 그들이 날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일을 신속히 집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셋째로, 이들은 독수리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들의 발은 광낸 구리같은 송아지 발바닥 같았다. 이것은 이 생물이 민첩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즉시 묵묵히 순종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어느 방향으로 이동하고 하면 돌이키지 아니하고 곧장 자기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순식간에 이동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행동에는 돌이킴이나 후회가 없다는 것이다. 넷째로, 이들 생물들의 수는 총 넷이었다. 이 생물들의 수가 넷인 것은 이 생물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된 생명체들을 대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의 숫자가 "4"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동서남북, 봄여름가을겨울이 있다. 그리고 이 세상사람들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으로 표현되었으니, 이 생물은 피조물을 대표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 네 생물 곁에 있는 바퀴는 어떤 것이었는가?

  그런데 네 생물곁에는 땅 위에 바퀴와 같은 것들이 네 생물 곁에 4개가 있었는데, 바퀴 안에는 또 다른 바퀴가 있었다. 그리고 바퀴에는 수많은 눈들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이 바퀴의 가운데에는 "영(spirit)"이 있었는데, 이 영은 네 생물들의 영이었다. 그렇다면,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이 바퀴에 눈들이 가득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들의 바퀴가 4개가 있었고 그 안에 영이 있었으며 이 바퀴에 눈이 가득하였다는 것은 이 바퀴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감찰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네 생물들은 보이지 않는 영으로서 이 세상에 보내어져 이 세상에서 돌아가고 있는 일들을 감찰한 후에 하나님께 보고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는 네 생물 곁에 있는 바퀴는 하나님의 감찰하심과 하나님의 섭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4. 네 생물 위에 있는 궁창은 어떤 모습을 가졌고 궁창 아래 있는 생물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리고 네 생물들의 머리 위에는 수정같이 맑은 궁창(넓은 공간)이 있었다. 하지만 보기에 심히 두려웠다. 왜냐하면 궁창 위에 하나님의 보좌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심판주되신 하나님께서 앉아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스겔이 궁창 아래에 있는 네 생물이 날개짓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 날개짓소리는 "많은 물소리"와도 같았고,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았으며,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았다. 이러한 소리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이 생물들의 움직임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군대의 움직임으로서,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모습이 이런 것임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럼, 이 생물들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에 그 명령을 신속히 수행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더불어 항상 이 세상을 감찰하여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동향을 보고하는 것이다. 그러니 보좌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이 날 때에 이 생물들은 자신들의 날개를 고이 접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자세를 즉시 취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종들이 해야 할 일은 "종이 듣겠나이다 말씀하옵소서"라는 자세를 항상 취하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천국에서도 큰 자가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5. 궁창 위의 하나님의 보좌와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는 누구신가?

  궁창 위에는 한 개의 하나님의 보좌가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는 사람의 모습을 한 어떤 분이 앉아계셨다.

  먼저, 하나님의 보좌의 모습부터 살펴보자. 하나님의 보좌는 그 모양이 남보석(사파이어)으로서 파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는 그분이 생명의 주관자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둘째로, 보좌 위에 앉아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살펴보자. 그분은 허리 위로는 단 쇠처럼 빛나고 있어서 그분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여기서 "단 쇠"란 불에 달아있는 쇠같다는 뜻인데, 불에 달아있는 모습은 빨간색은 아니었고 금과 은을 합친 흰 빛의 색깔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빛에 둘러싸여 있는 분이시다. 그분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허리 아래는 불같이 보였는데, 그 불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모양은 마치 비오는 날에 구름이 빛나는 무지개와 같았다. 총천연색을 지닌 것이다.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으로서, 영생하시는 하나님께서 그곳에 좌정하고 있음을 표현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에스겔은 그분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 보좌로부터 음성이 들렸다.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고 하셨다(겔2:1).

 

6. 하나님께서 좌정해 계시는 하나님의 보좌는 어떠한 기능을 하고 있는가?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으며, 그 위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았던 구약의 인물들이 종종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사야 선지자가 있고(사6:1), 미가야 선지자도 있으며(왕상22:19),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스겔 선지자도 있다. 하지만 시편기자들도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거기에는 그 용도가 어떤 용도인지까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 용도는 크게 3가지였다(구약에는 2가지만 나온다).

  첫째, 하나님의 보좌는 "심판의 보좌"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해 보좌를 베풀었도다(시9:7)", "주께서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시9:4)" 그리고 시97:2에서는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라고 말하였으며, 잠16:12에서는 "그의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서 있다"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보좌의 첫번째 용도가 심판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보좌는 "통치의 보좌"다. 두번째 하나님의 보좌의 용도는 통치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거기에 앉아서 온 우주를 다스리는 것이다. 시103:19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도다"라고 했다.

  셋째, 하나님의 보좌는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서 "경배받는 보좌"다. 그런데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가서 비로소 공개된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시대만 해도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오신 후에, 비로소 예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경배를 받기 시작했으니, 지금도 천국에 가면 예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 곧 천사와 구원받은 성도들로부터 경배를 받고 계신다. 하나님과 어린양은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들 주위에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계7:11)", "24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의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에게 경배하고(계4:10)"

 

7. 구약의 보좌의 모습과 요한계시록의 보좌의 모습은 어떻게 다른가?

  그런데 구약시대는 아직 구속사역이 이뤄지지 아니한 상태이므로, 구약시대에 천국의 모습을 보고 온 자들은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있는 모습을 보고 매우 두려워하였다. 하지만 구속사역이 완성된 후 벌써 60년이 지난 A.D.95년경에 기록된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천국의 모습은 두려운 모습이라기보다는 매우 평온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감사와 찬양과 경배가 주를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된다.

  무엇보다도 구약의 보좌의 모습과 신약의 보좌의 모습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첫째, 보좌에 앉으신 이에 있어서 변화가 생겼다. 구약시대에는 그 위에 오직 홀로 여호와께서 앉아계셨다. 하지만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는 오직 한 개 밖에 없는 하나님의 보좌 위에 예수게서 앉아계신다(계3:21, 7:17, 20:11, 마25:31).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보좌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라고 불린다(계22:1,3). 둘째, 통치와 심판의 보좌가 1개에서 25개로 늘어났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보좌는 1개의 보좌로서 통치와 심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순절성령강림 이후에 하나님의 보좌는 1개에서 24개의 장로들의 보좌가 더해져서, 25개의 보좌가 되었다(계4:2~4,20:4). 그리고 예수께서는 24명의 장로들에게 통치와 심판의 일부를 맡기신다(눅22:30, 마19:28).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간 것만 해도 황송한 일인데 주께서는 믿는 이들 중 이기는 자들에게 천국에 있는 24개의 보좌에 앉게해주시고, 거기에서 심판하며 왕노릇하게 해 주시는 것이다.

 

8. 나오며

  B.C.593년 에스겔은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서 그의 영이 하늘에 이끌려가서 하나님의 보좌에 관한 환상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것의 모습은 심히 무섭고 두려운 것이었다. 그때 하나님께는 높이 들린 보좌 위에 앉아계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는 넓은 궁창 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궁창 아래에는 날개를 펴고 서로 끝이 닿아있는 네 생물이 날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모든 피조물의 우두머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네 생물 곁에는 바퀴 안에 바퀴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생물의 영이 들어있었다. 가장 위엄스러운 것은 네 생물들이 날개짓을 할 때 나는 소리였다. 그것은 전능자의 음성같기도 하였고, 많은 물소리 같기도 하였으며, 많은 군대의 소리 같기도 했다. 에스겔은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전 우주를 통치하시고 다스시며 심판하시고 있다는 것을 금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전능자께서 보좌에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그가 소명을 받게 되기까지의 과정이다. 그런데 오순절성령강림 이후 하나님의 보좌는 이제 위엄의 보좌에서 은혜의 보좌로 바뀌었다(히4:16). 이미 2천년전에 예수께서 사람(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인류를 위한 구속사역을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지금 하늘에 올라가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선물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지켜보면서 감격하고 또 감격할 것이다. 언젠가 우리 모두가 다 그곳에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2019년 6월 26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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