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은 그의 사역 20년만에 놀라운 하늘의 환상을 또 한 번 보게 된다. 그것은 이미 14년전에 파괴된 솔로몬의 성전보다도 훨씬 더 크고 위대한 성전이었다. 그런데 그가 보았던 "새 성전"을 두고 어떤 이는 천년왕국 때에 지상에 실제로 건축될 천년왕국성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또 어떤 이는 그것을 영적인 성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 모습이 지상의 성전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을 더 많이 빼닮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보았던 성전(겔40:1~43:11)은 어떤 모습의 성전이었는가?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성전인가?

2019-10-23(수) 수요기도회
제목: 에스겔강해(17) 회복될 새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환상(겔40:1~43:11)
https://youtu.be/mnuPdhHXrW4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는 B.C.572~5733년경 에스겔선지자에게 장차 회복될 새 성전과 새 제사와 새 땅에 관하여 환상을 보여주신다(겔40~48장). 에스겔은 그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지 25년이 되던 해에 능력의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어 그의 영이 바벨론에서 순식간에 이스라엘 땅으로 옮겨져 장차 새롭게 지어질 새 성전과 새 제사와 새 땅에 관한 계시를 보았다. 그중에서 오늘 이 시간에는 그가 보았던 "새 성전"에 관한 환상 부분(겔40:1~43:11)을 살펴보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성전을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천년왕국 기간에 이 땅에 세워지게 될 "제3의성전" 혹은 "천년왕국성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이 땅에 다시 양의 피로 제사를 드리는 날이 과연 올 것인가? 만약 이 주장이 잘못 되었다면, 에스겔이 보았던 새 성전의 환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래서 새 생전은 과연 어떻게 생겼으며 그것을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려져 주님께서 3,500년전에 보여주신 새로운 성전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자.

 

2. 새 성전에 대한 환상 예언은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에스겔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심판이고(겔1장~32장), 하나는 회복이다(겔33~48장). 그중에서 에스겔40~48장은 새 성전과 새 제사와 새 땅에 대한 회복에 관한 예언을 다루고 있다. 에스겔은 그의 나이 50세되던 해 1월 10일, 또 한 번 이상을 보게 된다(겔40~48장). 그는 바벨론의 델아빕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을 힘입어 그의 영이 빠져나간 뒤, 이스라엘의 땅으로 순식간에 이동하게 된다. 그런데 거기에는 장차 회복되어 건설될 새 생전이 눈 앞에 있었다. 그때 새 성전의 이곳저곳을 안내할 안내자가 있었는데, 그는 "놋같이 빛나는 사람"이었다(아마도 천사였든지 성육신 전의 예수님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 그들은 에스겔과 함께 이스라엘의 매우 높은 산(아마도 감람산이었을 것이다)에 있었다. 그때 에스겔은 남쪽을 향하여 "성읍형상 같은 것"(성전은 성전인데 워낙 커서 성읍처럼 보임)을 보게 된다(이것이 바로 장차 회복되어 새로 지어질 새 성전의 모습이다).

 

3. 에스겔은 언제 새 예루살렘 성전에 관한 환상을 보았는가?

  에스겔이 이 환상을 본 때는 그가 포로로 사로잡혀간 지 25년 되던 해였다(겔40:1). 그리고 그 해는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지 14년이 되던 해였다. 에스겔은 사실 제2차 바벨론 포로기에 여호야긴왕과 함께 바벨론에 끌려간 귀족에 해당된다. 그때는 B.C.597년경이었다. 그리고 5년 뒤, 에스겔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는다. 그는 원래 사독가문의 제사장으로서 부시의 아들이었는데, 제사장으로서 직무 한 번을 수행해보지 못한 채 바벨론으로 끌려온 것이다. 그리고 어느덧 25년이 지나갔다. 그가 바벨론으로 끌려갔을 때 나이는 25세였고, 다시 25년이 흘러 그의 나이 50세 되던 해에 이제 새 성전에 대한 환상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 해는 예루살렘이 성이 함락된 때부터(B.C.586년) 약 14년이 흐른 해였다(B.C.572년).

  그렇다면, 왜 여기에 "25"라는 숫자가 등장한 것일까? 에스겔에서 "25"라는 숫자는 첫째, 에스겔이 바벨론에 끌려갔을 때의 나이와 똑같다(겔1:1~3). 둘째,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동방태양을 경배하고 있는 제사장들의 숫자값이다(겔8:16). 셋째, 겔40:1~43:11에 나오는 새 성전에 올라가는 계단(층계)의 총숫자(7개+8개+10개=25개)이다(겔40:22,31,49).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땅의 길이와 넓이가 각각 25,000척과  25,000척이다. 그렇다면, 왜 에스겔서에서는 이렇게 "25"라는 숫자가 자주 등장하고 있는가? 그것은 희년의 수인 "50"의 절반의 숫자와 관련이 있는듯 하다.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꺾어져서 희년으로 들어가는 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심판이 끝나가고 회복의 시작을 알리는 숫자가 25인 셈이다. 그런데 이때 희년은 자유와 해방의 해에 해당한다.

  그리고 에스겔은 그 환상을 1월 10일에 본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월 10일은 의미있는 날이다. 왜냐하면 첫째, 1월 10일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유월절양을 준비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출12장에 보면 유월절규례가 나오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식구대로 한 집에 한 마리의 양을 준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셨는데, 그때 양을 선택하여 집에 두고 검사하는 날이 바로 1월 10일이었다(출12:3~5). 다시 말해, 애굽의 포로생활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가져달 줄 출애굽을 준비하는 짧은 기간이 1월 10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진짜 있을 회복과 자유의 날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새 성전과 새 제사와 새 땅에 관한 환상을 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둘째, 1월 10일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데리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처음으로 텐트를 치던 날이었다(수4:19). 그러므로 1월 10일은 또한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에스겔이 보았던 새 성전과 새 제사와 새 땅에 관한 환상은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4. 새 성전은 어떻게 생겼는가?

  그렇다면, 에스겔이 보았던 새 성전은 어떻게 생겼는가? 새 성전의 모습은 그림으로 그려보면 간단하다. 하지만 그것을 말로 설명하다보면 복잡하기 그지 없다. 그렇지만 그 모습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요약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의 사방의 담은 정사각형인데 길이와 넓이가 각각 500척이다. 1척이 1규빗(45.6cm)에 어른의 손바닦길이를 더한 것으로서 보통 53.2cm라고 한다. 그러므로 500척은 액 266m정도 된다. 고로 성전의 크기는 약 20,450평 정도 된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담의 크기는 두께와 넓이가 각각 6척(3.2m)이다. . 새 성전(500척*500척)은 사실 성막(378평=100규빗*50규빗)에 비하면, 54배 차이가 난다. 그만큼 새 성전은 사이즈가 크다. 둘째, 성전은 이중구조(바깥뜰과 안뜰)로 되어 있으며, 둘 다 사방 중에서 동쪽과 북쪽과 남쪽에만 1개씩 문이 있다. 즉 서쪽에는 문이 없는 것이다. 문의 크기는 길이가 25척이요, 넓이가 50척이다. 문안쪽에는 좌우에 각각 3개씩의 문지기의 방이 있다. 셋째, 외부에서 외소까지는 총 25개의 층계를 올라가야 한다. 즉 외부에서 바깥뜰문으로 들어갈 때에는 7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하고, 바깥뜰에서 안뜰로 올라갈 때에는 또 8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하며, 마지막 안뜰에서 외소(성소)로 올라갈 때에는 10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한 계단의 높이를 30cm로 계산한다면, 7.5m가 된다. 넷째, 외부에서 문을 통과하여 바깥뜰에 들어가면, 바깥뜰벽으로부터 50척정도의 크기가 벽에서부터 박석이 깔려있고, 문의 좌우에 각각 5개씩 방들이 있다. 그런데 서쪽에는 문도 없고 방도 없다. 그러니, 동쪽벽에 붙어서 10개의 방이 있고, 북쪽과 남쪽에도 각각 10개의 방이 있으니, 새 성전의 바깥벽에 붙어있는 집들이 총 30개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백성들이 기거하는 방이며, 거기서 제물을 먹기도 하고 쉬기도 하는 것 같다. 다섯째, 안뜰 동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앞에 번제단이 있고, 번제단을 지나서 더 앞으로 가면 성전이 있다. 성전은 외소(성소)와 내소(지성소)가 구분된 집이 있는데, 외소와 내소 모두에서 오직 외소에만 나무제단이 하나 놓여 있는데, 그것은 "여호와의 앞의 상"이라고 불린다(겔41:22). 다시 말해, 새 성전 안에는 성막이나 솔로몬성전의 성소에 있었던 일곱금촛대, 분향단, 떡상이 없으며, 지성소 있었던 법궤도 없는 것이다. 달랑 하나 여호와의 앞의 상이라 일컬어지는 나무제단만 있을 뿐이다. 여섯째, 외소와 내소의 성전 좌우에는 제사장들이 거하는 "거룩한 방"이 있고, 안뜰의 북쪽문을 열고 내려가면 왼쪽편에 회랑(다락방)이 3층으로 지어져 있다(겔42:10~14). 일곱째, 성전의 동쪽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나오는데 그 물은 성전 남쪽으로 흘러가면서 강을 이루게 되고, 강 좌우편에 나무들이 심히 많고, 강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과 고기가 가득한 모습이었다. 특기 강 좌우편에 있는 나무들은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할 뿐더러 열매가 끊이지 않았으니 달마다 새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하였고,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약 재료로 될 것이라고 했다(겔47장).

 

5. 새 성전은 천년왕국성전일까 아니면 다른 것인가?

  그렇다면, "새 성전"은 과연 천년왕국에 사용되기 위해 건축될 미래의 성전인가 아니면 또 다른 성전인가? 사실 이러한 성전이 장차 존재할 것인지에 대해서 랍비들의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A.D.90년 구약39권을 정경으로 결정하는 얌니야 종교회의 때에 에스겔서의 40장부터 48장까지를 과연 정경 속에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결국 이것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말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에스겔이 말하는 새 성전은 실제로 예루살렘에 건축되기는 불가능한 모양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정의 크기나 땅의 크기가 실제 예루살렘은 너무나 작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예수재림 이후에 이땅에 건축될 "천년왕국성전(제3의 성전)"인가 아니면 "또다른 성전인가"하는 것은 다음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에 이 땅위에 세워질 물질적인 제3의 성전이 아니라 영적인 성전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첫째, 성전의 크기가 실제 예루살렘의 땅의 크기보다 훨씬 크기에 실제로 건축되는 어렵다는 점이다. 둘째,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와 강을 이룬다는 것은 사도요한이 A.D.95년경 셋째하늘에 올라가서 보았던 새 예루살렘 성의 모습을 그대로 쏙 빼닮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의 모습과 에스겔의 성전이 비슷한 것이다. 셋째, 겔33~39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이미 예수님의 재림으로 회복이 종료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다음은 새하늘과 새땅의 모습의 견본으로 보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하기 때문이다. 즉 겔33~39장에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회개를 외치는 파숫꾼으로 세례요한을 통한 회복, 직접 목자로 오시되 다윗이란 이름으로 오시는 선한 목자 예수님을 통한 회복, 성령의 내주를 통한 회복, 하늘의 군대의 준비, 아마겟돈전쟁(곡과마곡의전쟁)을 통한 회복이 나왔었다. 그러므로 이 다음은 하늘에서 있을 성전과 예배와 땅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제3의 성전을 이스라엘에 건축하고 어린양의 피의 희생제사를 드리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디 때문이다. 이미 구약의 예언과 예표에 따라 이미 어린양되신 예수께서 번제단에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구속을 완성하셨는데 또 다시 어린양의 피의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은 경륜을 거꾸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타당하지 않다.

 

5.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우리는 위의 말씀들을 통해서 에스겔이 보았던 새 성전은 영적인 성전으로서 "교회"를 예표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 이 땅 위에 세워진 교회는 구약의 물질적인 성전과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전의 중간단계에 있는 성전으로서, 사람공동체인 영적인 성전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땅의 속성과 더불어 하늘의 속성을 동시에 다 지니고 있는 독특한 성전이다. 즉 교회는 이 땅에 속한 성전으로서 일곱금촛대(성령의 인도하심), 분향단(기도생활), 떡상(말씀생활)을 필요로 한다. 이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도하면서 모세로부터 시내산 율법을 받아 지키면서 가나안땅으로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 속성으로서 교회는 생명을 흘려보내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다. 성령을 통해서 생명주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측면에서 보면, 교회는 하늘에 속한 성전이다.

  그렇다면, 새 성전이 완공되었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사실 에스겔 11장에 보면, 남유다의 우상숭배와 음란 그리고 하나님이 아닌 주변강대국들에 대한 의존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신다(겔11:23). 아니 떠나가신 것이다. 그것을 에스겔선지자가 전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만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문을 지나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즉시 남유다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에게 멸망당하고 말하고 함께 성전도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하지만 새 성전이 완성되자,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동쪽 문으로 되돌아서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된다(겔43:4). 그때 에스겔은 한 사람(천사이거나 성육신 전의 예수그리스도)이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 목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으로서 많은 물소리와도 같았다(겔43:2). "인자야,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영원히 있을 곳이라(겔43:7)" 그렇다. 에스겔이 보았던 새 성전은 "하나님의 보좌"였던 것이다. 천국에서 하나님의 보좌는 새 예루살렘 성 안의 한 중심에 있다. 그런데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본 새 성전 중심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없다. 다만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차 있었다. 왜냐하면 새 성전이 하나님의 보좌 자체였기 때문이다. 고로, 새 성전을 교회라고 본다면, 오늘날 지상의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보좌인 셈이다.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요, 그분의 발을 두시는(통치하시는) 곳인 셈이다.

 

6. 나오며

  에스겔이 보았던 새 성전의 모습(겔40:1~43:11)은 지상의 그 어떤 성전보다도 거대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때껏 지상에 있던 성전과는 달랐다. 왜냐하면 성소와 지성소에 성물들이 없었기 때문이요, 성전동문으로부터 생명의 물이 흘러나와 모든 생명체를 살리고 강좌우에 달마다 실과를 맺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 하나님이 성령으로 임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에스겔이 본 새 성전은 "교회"를 예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크기에 그 어떤 사람들도 수용할 만하며, 지상의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을 모신 하나님의 처소이며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교회를 통해서 지금도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교회를 아껴야 한다. 교회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교회의 보존을 위해 힘써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하도록 해야 한다. 이는 교회가 곧 하나님의 영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곧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19년 10월 23일(수)

정병진목사

  


에스겔서를 보면 요한계시록의 예고편이자 맛보기편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다. 에스겔도 사도요한처럼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을 보았고,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회복을 말씀하고 있으며, 말세에 있을 마지막 전쟁으로서 아마겟돈전쟁 혹은 곡과 마곡의 전쟁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스겔서는 사실 심판과 회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에서 회복은 5단계로 진행될 것임이 예언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회복이 바로 "악의 세력의 처단을 통한 회복"이다. 그래서 오늘은 인류 최후의 영적 전쟁이 될 "곡과 마곡의 전쟁(혹은 아마겟돈전쟁)"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019-10-16(수) 수요기도회
제목: 에스겔강해(16) 곡과 마곡의 전쟁과 그리고 그들의 멸망(겔38:1~39:29)
https://youtu.be/hcI71mA7Zio


1. 들어가며

  "에스겔"서는 한 마디로 심판의 책이자 회복의 책이라 할 수 있다. 에스겔서 1~24장까지는 남유다의 땅과 백성의 심판을 기록하고 있고, 25~32장까지는 열방의 심판을 기록하고 있으며, 33~39장까지는 남유다의 땅과 백성에 관한 회복을 기록하고 있으며, 40~49장까지는 새 예루살렘의 성전의 회복에 관한 환상을 기록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겔33~39장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멸망받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5단계로 말씀하고 있다. 첫째는 "회개를 외치는 파수꾼의 간절한 외침을 통한 회복"(겔33장)을 말씀하고 있고, 둘째는 "선한 목자로서 다윗과 같은 분으로 오실 메시야를 통한 회복"(겔34~35장)을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셋째는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한 회복"(겔36장)을 말씀하고 있고, 넷째는 "하늘에 있는 성도들 곧 천년왕국에 참여하고 있는 군대를 통한 회복"(겔37장)을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째는, "악의 세력에 대한 총체적인 멸망을 통한 참된 이스라엘의 회복"(겔38~39장)을 말씀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오늘은 "곡과 마곡의 군대의 심판으로 예고되는 인류 최후의 전쟁"(겔38~39장)에 관한 말씀을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2. 마곡의 왕 곡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성령의 내주를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겔36장)"과 "하나님의 군대를 준비를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겔37장)을 말씀하신 후,"곡과 마곡의 심판을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겔38~39장)"을 계속해서 선포하게 하신다. 이것은 이스라엘 회복의 제3단계와 4단계와, 5단계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곡과 마곡"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곡과 마곡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겔38:2과 39:1에 나타나 있는데, 실은 정확히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성경이 가르쳐주는 것은 "곡"은 마곡의 땅에 있는 로스와 메섹과 두발의 왕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곡"은 어떤 왕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고, "마곡"은 "로스와 메섹과 두발"로 이루어진 도시를 대표하는 명칭으로서 곧 나라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로스와 메섹과 두발"은 또한 무엇을 가리키는가? 어떤 이는 이 명칭을 말하기를 , 그것들은 각 도시와 지역에 관한 명칭으로서, "로스"는 "러시아", "메섹"은 "모스크바", 그리고 "두발"은 시베리아의 "투볼스크"를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러시아와 모스크바와 투볼스크"는 전부다 구 소련의 지역이나 도시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장차 회복된 새 이스라엘을 파괴시키려 오는 마곡땅의 왕 곡은 구 소련의 지도자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마곡"이나 "두발과 메섹"은 창세기 10장에 나오는 야벳의 아들들인 것 만큼은 분명하다. 아담의 10대손 노아에게는 셈과 함과 야벳이라는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야벳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관과 두발과 메섹과 디다스를 낳았다고 되어 있다(창10:2). 그러니까 마곡과 두발과 메섹은 야벳의 아들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디시피 야벳의 후손들은 오늘날 백인이자 유럽인의 조상들이다. 그중에서 "마곡과 메섹과 두발"은 이스라엘의 동북쪽지역인 구 소련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마곡의 왕 곡은 회복된 새 이스라엘을 쳐들어오는데, 북쪽에 있는 야벳족속의 후손들과 더불어 바사와 구스와 붓과 고멜과 도갈마 족속과 함께 쳐들어올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겔38:5). 이중에서 "바사"는 셈족의 후예로서 페르시아를 가리키며, 구스와 붓은 함족속으로서 이디오피아와 리비아를 가리킨다. 그리고 고멜은 야벳족속으로서 독일과 영국과 프랑스, 아르메니아 지역의 후예들이며, 도갈마는 터키족이다. 고로 우리는 마곡의 왕 곡이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들로 구성된 연합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장차 회복된 새 이스라엘을 공격해들어올 곡의 연합군은 동서남북의 모든 열방으로 구성된 연합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러한 연합군은 조직된 것이 없었다. 에스겔서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먼 미래의 일로 예언하고 있지만 아직도 이 일은 성취되지 않고 있다.

 

3. 곡이 일으키는 전쟁은 어떤 전쟁이며, 누구와 일으키는 전쟁인가?

  그렇다면, 마곡의 왕 곡이 일으킬 전쟁은 어떤 전쟁인가? 그것은 악의 세력들이 영적인 이스라엘인 교회를 파괴하려는 영적 전쟁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먼저 새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날 후에 오래 황폐하였던 이스라엘의 땅을 다시 회복시켜주시어 그곳에 당신의 백성이 다시 돌아와 살게 하실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새 이스라엘은 여러 나라에서 모여들어와 평화로이 살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겔38:8,11). 그래서 회복된 새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벽도 없고 문이나 빗장도 없이 평안히 거주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마곡의 왕 곡을 불러 모든 떼(연합군)과 함께 광풍처럼 달려들어 이스라엘에 올라와서 다시 새 이스라엘을 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겔38:9). 그런데 이 전쟁은 변질될 것인데, 원래는 하나님께서 새 이스라엘 백성을 치도록만 허락하셨는데, 실제 곡의 연합군은 새 이스라엘의 재물의 탈취를 위해 급급할 것이라고 하셨다(겔38:12). 그러자, 스바와 드단과 다시스의 상인과 부자들이 재물의 탈취에만 급급해 있는 곡의 연합군을 비웃을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전쟁을 일으켰던 본래의 목적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렇다면 곡의 연합군이 공격하는 회복된 새 이스라엘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회복될 영적인 새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새 영을 불어넣어 만드실 "교회"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교회는 성령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겔36:26~27, 고전3:16). 그러므로 "곡의 연합군"이란 장차 세상에 모습을 드러날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공격하는 사탄의 세력들을 가리키며, 이때 공격을 받을 "새 이스라엘"은 다름 아닌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4. 곡에 대한 심판은 누구에 의해 그리고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가?

  그렇다면, 에스겔선지자는 곡에 대한 심판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여 곡을 심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회복된 새 이스라엘 곧 교회를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신다.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의 총체인 마곡의 왕 곡이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공격하게 되면 즉시 개입하여 맹렬한 노여움으로 그 세력을 처단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5가지 방법을 사용하시는데 대부분은 자연재앙과 초자연적인 방법을 사용하실 것이라고 했다. 첫째는 대지진으로 치실 것이라고 했다(겔38:19). 둘째는 칼과 전염병과 피와 폭우와 큰 우박덩이로 치실 것이라고 했다(겔38:21~22). 이는 전쟁과 전염병과 자연재난으로 악의 세력을 치실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는 불과 부활을 쏟아부을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켰던 도구들인데, 이것은 종말의 전쟁에 대한 완전한 파멸을 의미한다.

 

5. 곡에 대한 심판의 결과는 어떻게 되는가?

 그렇다면 결국에는 어떻게 되는가? 곡의 연합군의 완전한 파멸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공격하는 악의 세력들을 가만 두지 않고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사실은 요한계시록에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백말을 타시고 오시는 예수님과 그의 군대들 곧 하늘의 천군천사들과 이미 천국에 들어가서 왕노릇하고 있던 성도들(천년왕국의 성도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와 그들을 처단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칼이 그들을 치게 되면 그들이 한꺼번에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틀에 밣히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계19:12~15). 이때 얼마나 많은 곡의 연합군 군사들이 죽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사도요한은 공중에 나는 모든 새들의 큰 잔치가 될 것이라고 했다(계19:17~18). 이때 새들이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말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의 모든 살을 뜯어먹을 것이라고 하셨다(계19:18,21).

  한편, 이러한 곡의 심판에 대해 에스겔선지자도 정확히 묘사하였는데, 그는 겔39:17~20에서, 그날 각종 새들과 들의 각종 짐승을 위한 거대한 잔치가 벌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때 새들과 들짐승은 곡의 연합군 전사의 살을 뜯어먹고 그들의 피를 마실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때 죽을 곡의 연합군의 시체와 무기가 얼마나 많은지, 먼저 시체는 새 이스라엘 족속이 매장할 것인데, 일곱달이 걸릴 것이라고 했으며(겔39:12), 그들의 무기를 태우는데, 무려 7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겔39:9). 이 때 태울 무기들로는 큰 방패와 작은 방패, 활과 화살, 몽둥이와 창이라고 했다. 물론 7달이나 7년의 "7"은 상징적인 숫자로서, 완전하고도 충분한 기간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6. 에스겔에 나오는 곡에 대한 심판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곡과 마곡의 심판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그렇다면 "마곡의 왕 곡"의 연합군은 장차 어떤 세력을 상징하는 것일까? 우리는 에스겔 38:2과 39:1에서 마곡의 왕 곡을 만날 수 있는데, 또한 요한계시록 20장에서 "곡과 마곡의 왕"을 만나게 된다. 요한계시록에서 "곡과 마곡"은 "땅의 사방 백성"(계20:7)이라고 나와 있으며, 무저갱에서 나온 사탄마귀과 곡과 마곡 곧 땅의 사방백성을 미혹하여 성도들의 진영과 사랑하는 성(도시)를 공격할 것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므로 "곡과 마곡"은 장차 도래하게 될 인류최후의 전쟁인 "아마겟돈 전쟁"이자 "곡과 마곡의 전쟁"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고 공격하는 악의 세력의 총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요한계시록에 보면, "곡과 마곡의 전쟁"은 천년왕국 후에 사탄이 일으키는 전쟁이라고 기록되어 있고(계20:7~10), 아마겟돈전쟁은 짐승과 거짓선지자가 일으키는 전쟁이자 천년왕국 전에 있을 전쟁처럼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전쟁에 대한 두 가지 다른 표현이다(이것에 관해서는 정병진목사의 요한계시록강해를 참고하기 바란다). 즉 아마겟돈전쟁은 그 주체가 보이는 짐승과 거짓선지자에 의한 전쟁이라면, 곡과 마곡의 전쟁은 보이지 않는 사탄에 의한 전쟁이지만 같은 전쟁으로서, 그것을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근거는 계20:10인데, 그 말씀을 헬라어 원문에서 직역하면, 한글개역성경은 잘못 번역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개역성경은 천년왕국 전에 아마겟돈 전쟁이 있을 것이고 그 때에 짐승과 거짓선지자만이 불못에 떨어진다고 되어 있지만(계19:20), 계20:10의 말씀을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천년왕국 후에 곡과 마곡의 전쟁이 있고 이 때 사탄마귀가 불못에 떨어지게 되는데, 그때 동시에 짐승과 거짓선지자도 함께 떨어진다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천년왕국은 문자적으로 예수재림이후에 있을 지상의 천년동안의 왕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개념으로서, 믿는 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승천이후에는 곧바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와 왕노릇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부활승천이후에 모든 성도들은 죽은 즉시 곧바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천년동안(충분하고 오랜 기간을 일컫는 표현임) 왕노릇하다가, 주님의 재림시에 악의 세력인 곡과 마곡을 물리치는 전쟁에 동참하는 것이다.

[참고, 정병진목사의 요한계시록강해(38) 천년왕국과 곡과 마곡의 전쟁(계20:1~10)_2018-04-11(https://dongtanms.kr/index.php?mid=board_qHUM98&page=2&document_srl=48335)]

 

7. 나오며

  성경은 하나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곡과 마곡의 전쟁(겔38~39장)은 인류 최후의 전쟁으로서 요한계시록에서 고스란히 다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계19~20장).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공격하는 세력들에 의한 전쟁이 마지막 시기인 어느날에 전격적으로 감행될 것이다. 그때는 천년왕국 기간 동안 무저갱에 갇혀 있던 사탄마귀가 잠깐 놓임을 받을 때라고 나온다(계20:7~8). 이때 사탄마귀는 짐승과 거짓선지자와 더불어 인류 최후의 전쟁을 치를 것이다. 이 전쟁을 요한계시록 19장에서는 "아마겟돈전쟁"이라고 부르고 있고 요한계시록 20장에서는 "곡과 마곡의 전쟁"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영적인 전쟁으로서 사탄마귀의 세력들이 영적인 새 이스라엘인 교회를 공격하는 전쟁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이 최후의 일전을 지금 앞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끝내는 전쟁이므로 우리는 다만 그분이 하시는 일에 감사하면서 그분의 뒤를 따르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주께서 사탄마귀의 세력들을 완전하게 파멸시키실 것이다. 그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영적인 전쟁을 이기는 공격용 칼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엡6:17). 성경의 칼은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늘 전쟁예행연습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귀신의 공격을 물리쳐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대장이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이다(막16:17~18).

 

2019년 10월 16일(수)

정병진목사

  


구약의 예언자는 대체 무엇을 말하는 자인가? 그것은 딱 2가지였다. 하나는 죄를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일을 하는 자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메시야에 관하여 예언을 하는 자였다. 그것은 이사야선지자도 마찬가지였고, 예레미야선지자 그리고 오늘 우리가 만나게 되는 에스겔선지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구약의 예언의 성취를 두고, 메시야를 통한 교회의 성취로 보지 않고,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대로 성취될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지금도 있다. 그러한 분은 오늘 말씀에 주목하기 바란다. 이것은 구약예언이 어떻게 신약에 성취되는가를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2019-10-02(수) 수요기도회
제목: 에스겔강해(14) 파수꾼과 선한 목자를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겔33:1~34:31)
https://youtu.be/JI8F_GJZe1w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 드디어 남유다를 심판하셨다. 그것은 요약하면 2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그렇게 경고를 하고 또 경고했지만 그들이 우상숭배를 그치지 않았고, 성전에까지 우상을 들여와 더럽혔으며 또한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채 주변강국만을 흠모하며 그들을 의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결국 남유다는 에스겔의 소명이 있은 후 6년 뒤인 B.C.586년 바벨론 느부갓네살왕에 의해 멸망당하고 만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의 벙어리 상태를 풀어주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예언을 하도록 다시 명령하셨다(겔33장).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예언(33~39장) 중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는 4가지 방법 중에서 2가지를 살펴보려고 한다(겔33~34장). 우리는 이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왜 이사야 40~66장의 기록이나 신약성경의 기록(마태복음~요한계시록)이 에스겔의 예언과 일치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회복의 방법 4가지 방법이 신약시대와 성령시대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 직전까지 있을 인류의 구원역사의 구도와 어떻게 일치하는지도 함께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장차 회복하실 대상은 과연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인지 아니면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인지도 함께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려는 것인가?

 

2. 찬란하고 오래 갈 줄 알았던 남유다는 대체 어떻게 망했는가?

  남유다의 심판에 대한 선고 후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의 혀를 입천장에 붙여버리셨다(겔3:26~27). 남유다의 죄는 하늘에 사무쳐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6년이 지난 뒤 남유다 제20대 시드기야 11년 4월 9일, 드디어 남유다는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왕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남유다의 멸망하던 그날, 에스겔 선지자의 아내도 죽게 된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약 5개월이 지나 어떤 도망자가 예루살렘 멸망소식을 가지고 온다. 그런데 그것으로부터 하루 전날 밤, 하나님께서는 혀가 입천장에 붙어버린 에스겔선지자의 입을 열어주신다(겔33:21~22). 그리고 다시 예언하게 하신다. 이번에 행동예언이 아니라 입으로 선포하는 예언을 말이다.

 

3. 제2차로 부름받은 에스겔 선지자에 주어진 사명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다시 에스겔을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명을 주셨는가? 그것은 처음 그가 받았던 사명을 다시 일깨우는 것이었다(겔33:1~9).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이스라엘민족의 파수꾼으로 세웠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럼, "파수꾼의 사명"이라는 무엇인가? 그것은 적군의 공격을 먼저 보고 성 안에 있는 백성들에게 경고의 나팔을 부는 일이다. 적군이 쳐들어오고 있으니 방비태세를 갖추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도 방비하지 않아서 성이 망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성 안에 있는 백성들의 책임인 것이지 결코 파수꾼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경고의 나팔을 불지 않아 성안의 주민이 망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파수꾼에게 성 사람들의 피값을 묻겠다는 것이다. 그렇다. 에스겔은 여전히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 할 책임이 주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약간 다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해주시겠다고 하는 시점에서 그들에게 경고의 나팔을 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했는데도 아직도 불어야 할 나팔이 남아있단 말인가? 그렇다. 이스라엘의 멸망후에라도 두 종류의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예루살렘에 있는 자류인들이요, 또 하나는 바벨론에 끌려간 포로민이 그들이다.

  먼저,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멸망후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잔류인들에게 경고를 해야 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도래하여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상태가 되었지만 앞으로도 심판이 없을 것이라고 결코 오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잔류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다시 힘있는 자가 강포해지고 하나님이 아닌 우상들을 섬기게 된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다시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포로민으로 잡혀온 자들에 대한 경고다. 이제 심판을 받아 포로민이 되어 적국에 끌려온 신세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는 범죄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그러한 마음이 변하여 다시 죄를 짓는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분노를 내리신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잔류민이든지 포로민이든 그들에게 다시 한 번 파수꾼으로서 경고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4. 멸망당한 이스라엘에 관한 회복의 예언은 과연 누구에게 성취될 예언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이제 멸망으로 폐허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강대국 바벨론에게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을 그냥 버리신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에스겔더러 그들에게 다시 소망의 말씀을 예언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해서가 아니라, 앞으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 때문에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회복의 예언은 과연 누구에 대한 예언이었는가?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예언이었는가 아니면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예언이었는가?

  오늘날까지 에스겔의 회복의 예언들 즉 에스겔서 33장부터 48장까지의 말씀은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말씀이니 그들에게서 성취될 것이라고 했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스라엘에 다윗과 같은 성군이 다시 나타나게 될 것이고, 곡과 마곡같은 세력이 육적인 이스라엘에게 쳐들어오겠지만 그들은 결국 하나님에 의해 멸망당하게 말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진짜 회복의 예언은 과연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취되어왔는가를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회복에 관한 예언은 과연 육적인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유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 볼 때 작은 부분적인 것에서는 그렇게 될 일도 있겠지만, 진짜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를 통해서 성취되어 왔고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전까지 있었던 에스겔의 회복에 관한 예언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회복의 예언이 정말 육적인 이스라엘백성에게 베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회복의 예언의 성취는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던 메시야의 말씀들 속에서 아주 많이 나타나는데, 결국 그 예언은 육적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첫째, 장차 동쪽과 서쪽으로부터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아서 믿음의 조상들이었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의 잔치자리]에 앉게 될 것이지만, 나라의 본 자손들은 쫓겨나 바깥 어두운 데(지옥)에 거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8:11~12)

  둘째, 주님께서 오셔서 가장 먼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을 그렇게 찾고 찾았지만 그들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말았지만, 가버나움의 백부장이나 가나안 여자엿떤 수로보니게 여인은 메시야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고백함으로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마15:21~28).

  셋째, 포도원 품군의 비유(마21:33~41)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대인들은 빼앗기게 될 것이고 그 나라의 열매맺는 자가 그 나라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21:43).

  넷째, 어떤 임금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마22:1~14)에서도, 예수께서는 먼저 초대받았던 유대인들은 잔치자리에 참석하지 않지만, 주인의 말씀에 따라 오리려 악한 자이든지 선한 자들들이 초대를 받아서 잔치자리에 오게 된다면 그가 천국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22:1~14).

  그리고 다섯째, 무화과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것이 마땅했던 이스라엘백성들이었지만 그들은 잎만 무성할 뿐 메시야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지 못함으로 인해 결국 뿌리채 말라버릴 것이라고 예언적으로 주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21:18~19).

 

5. 에스겔에게 주어진 회복에 관한 예언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하나님께서는 장차 멸망당한 이스라엘을 어떻게 누구에게 회복시키시겠다고 말씀하셨는가? 어떤 분은 장차 이스라엘 땅에 제3의 성전이 세워지고, 제사제도도 회복될 것이며, 천년왕국이 지상에 건설되고 거기에 제사장으로서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이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단언코 말하건데, 그러한 일을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심판에 관한 예언은 분명히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고 그것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지만, 회복에 관한 예언은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며, 오히려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에스겔에게 주어진 회복에 예언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에스겔서 33장부터 48장에 나온다. 그런데 그것을 요약해보면, 딱 5가지다. 다시 말해 장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회복시키실 것인지가 겔 33장~48장에 딱 5가지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첫째, 메시야의 선구자의 출현에 따른 회개의 선포를 통한 회복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에스겔 33장에 적나나하게 나온다. 여기에 보면,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회개를 외쳤던 세례요한의 사역이 나오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회복을 담당할 자로 장차 보내실 자는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선택하는 목자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목자로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에스겔 34장과 37장의 말씀이다. 그리고 그분이 바로 요10장에 나오는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이신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이스라엘의 회복은 하나님의 새 영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 두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겔36:26~27). 이는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성취가 되었다. 넷째, 사탄의 세력을 상징하는 곡과 마곡의 전쟁에 대비하여, 하나님께서 에스겔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군대를 준비시키신 다음(겔37장), 곡과 마곡의 전쟁인 아마겟돈전쟁에서 이미 천국에 들어가 천년왕국에 참여하고 있는 성도들을 군대로 데리고 오셔서 곡과 마곡으로 표현된 사탄의 세력들을 물리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에스겔서 37~39장에 나온다. 그리고 다섯째,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제 성도들을 대리고 새로운 성전인, 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성도들을 데려감으로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에스겔 40~48장에 걸쳐서 나온다. 그러므로 장차 회복은 전부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한 목자로 오셨다가 가시고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교회를 통하여 성취될 회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로, 회복은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 곧 교회에게 일어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사야 40~66장에 나오는 예언의 성취와 겔33~48장에 나오는 예언의 성취가 동일한 것에 대한  다른두 개의 예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6. 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회개와 열매가 중요한가?

  하나님께서는 언약백성으로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면 그들이 하나님만을 잘 섬기며, 그들이 제사장 나라가 되어서 이방인들도 하나님께로 잘 인도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들포도만을 맺혔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하여 젖과 꿀이 가나안땅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버렸으며, 가나안 우상들을 가져다가 섬겼으며, 이 세상 사람들을 의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천년전 유대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만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혜택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천국은 믿음이 있고 회개하는 자요,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이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전에 주셨던 죄인의 파멸과 의인의 구원에 관한 말씀을 다시 하게 했다. 그것이 바로 에스겔33:10~20에 기록된 말씀이다. 그런데 사실 이 말씀은 이미 에스겔 18장에서 주셨던 말씀이다. 하지만 한 번 더 반복하신다. 악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가 돌이켜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인이라도 돌이켜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난다면 그는 반드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에스겔서 33장은 장차 오실 메시야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자들의 자세에 관한 예언의 말씀인 것이다. 이것은 정확히 예수께서 출현하기 6개월 전에 이스라엘의 광야에서 성취되었다. 그것은 바로 세례요한의 회개선포사역이었다. 그는 메시야를 영접하기 위해 회개할 것을 선포했던 것이다.

 

7. 이스라엘의 회복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사항과 그 인물은 누구인가?

  이처럼 이스라엘의 회복의 성취는 첫째로, 메시야의 선구자인 세례요한의 회개선포사역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둘째로, 이제는 메시야의 출현을 통해서 성취되었다. 그런데 에스겔은 장차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스라엘의 목자들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 사람을 통해 이루실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악한 목자들로서 양떼를 돌보지도 않고 자기들의 배만 배불리는 약탈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더이상 그들에게 양떼들을 맡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들을 이스라엘 목자들로 삼아 이스라엘의 양떼를 맡겼지만 그들은 오히려 양떼들을 방치해놓아 목자가 없는 것처럼 만들었기 때문이다(겔34:1~10). 그들은 오히려 자기가 가진 권력과 돈을 이용하여 양떼들을 부려먹었고 억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양떼들이 들짐승에게 먹히도록 그냥 놔 두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에스겔 34장에 나오는, 자기만 배불리 먹고 있는 악한 목자들에 대한 비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선지자를 통해 앞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가 없이 유리방황하며 들짐승에게 좇기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방법은 바로 주 여호와께서 친히 양떼들의 목자가 되어 오시겠다는 말씀이었다(겔34:11~16).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종이엇던 다윗과 같은 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 앞으로 회복하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이 되시고 그의 종 다윗이 그들 중에 왕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9겔34:23~24, 37:24~28).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다윗의 후손으로서 예수께서 오셔서, 친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심으로 성취되었다. 그래서 구약의 예언을 따라 예수께서는, 악한 자들인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고통받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건지셨으며, 그들의 죄들을 용서하기 위해 친히 속죄제물로 되시어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셨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양떼들을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선한 목자이기 때문이다. 고로, 선한 목자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은 구약의 메시야 예언의 중요한 핵심이 되었다. 그래서 진짜 선한 목자로 오셨던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양떼들을 죄로부터 건지기 위해 내놓으셨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목자다. 이것이 바로 에스겔 34장(겔34:23~24)의 성취이자 37장(겔37:24~28)의 성취인 것이다.

 

8. 나오며

  그렇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결코 다윗과 같은 이스라엘의 왕의 출현으로 인하여 성취된 적이 없었다.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과 같은 왕은 바로 이 땅에 선한 목자로 오셨던 예수님을 지칭하고 있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여호와께서 친히 선한 목자에 관한 약속의 성취자로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구약의 백성들도 하나님을 선한 목자로 표현했을 뿐 아니라(시100:3, 23편, 5:6~7, 78:70~72, 렘23:5~6, 슥12:8), 예수께서도 친히 오셔서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던 사도들도 예수님을 목자로 표현하였던 것이다(행20:28, 벧전5:1~4, 계7:17).이제는 믿음과 회개와 나아오는 모든 이들을 회복시켜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우리 주 예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2019년 10월 02일(수)

정병진목사

  


B.C.586년 남유다가 멸망할 당시에 이스라엘 주변에는 총7개국의 나라들이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 나라들 중에서 두로와 애굽을 부각시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의 원인을 적나나하게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나라 주변에 있었던 나라들은 무엇 때문에 결국에 멸망을 받게 된 것인가? 전쟁을 못해서인가? 아니면 무기가 최신식이 아니어서였을까? 아니면 주변의 강국을 이용하지 못해서였을까? 하지만 이것보다 훨썬 더 빨리 그리고 더 깊숙히 주변을 바라다보게 하는 것은 없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두로를 치고 애굽을 쳤던 바벨론왕의 시선과 언약백성이었언 남유다인의 관점에 따라 애굽은 어떤 나라였는지를 확인해보고자한다.

2019-09-25(수) 수요기도회
제목: 에스겔강해(13) 바다 가운데 큰 악어인 애굽왕 바로와 애굽인들에게 내려질 심판(겔29:1~21)
https://youtu.be/D8F0zXfgIfw


1. 들어가며

  B.C.586년 남유다가 멸망할 시기에 남유다 주변에는 총 7개국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멀리는 2개의 대제국이 남유다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이때 주변 7개국이란 "암몬, 모압, 에돔, 블레셋, 두로, 시돈, 애굽(이집트)"을 가리킨다.이들에 대한 관한 예언이 에스겔서 25장부터 32장까지 나온다. 그런데 이중 마지막 번째인 애굽(이집트)이라는 나라는 고대로부터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던 대제국이었다. 그런데 신흥 제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앗수르와 그 뒤를 이른 바베론은 파죽지세로 고대 근동지방에 있는 나라들을 복속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 남유다도 포함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유다가 멸망당할 즈음에 애굽은 세계 열강 가운데 어떤 위치에 있었으며, 바벨론은 또한 어떤 위치에 있었던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남유다의 멸망 한 해 전인 B.C.587년부터 애굽의 심판과 멸망에 대해 예언하도록 명령하셨다. 그런데 어떤 이방민족보다는 애굽에 대해서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서 많은 예언을 쏟아내도록 하였다. 분량으로 친다면 애굽에 관한 예언은 주변의 나라들에 대한 예언 중 절반 가량이 되며, 에스겔서 전체를 놓고 보더라고 약 1/12이나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토록 애굽의 심판과 멸망에 대해 많은 분량의 예언을 쏟아놓게 하셨던 것일까? 그것과 남유다의 멸망과는 대체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그래서 오늘은 애굽의 심판과 멸망에 관한 예언을 통해, 대제국으로 활동하던 나라라고 할지라도 왜 넘어지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선민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찾아보도록 할 것이다.

 

2. 남유다와 두로의 멸망의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애굽의 심판과 멸망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크게 2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애굽의 심판과 멸망원인을 살펴보기 전에 남유다와 두로의 심판과 멸망의 원인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남유다와 두로의 심판과 멸망의 원인이 애굽(이집트)의 심판과 멸망원인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첫째, 남유다의 심판과 멸망의 원인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남유다의 심판과 멸망의 원인은 크게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우상숭배였고 또 하나는 주변 강국들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였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남유다가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남유다가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까지 온통 우상으로 가득차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하지 말라고 명령했던 산당예배와 예루살렘 성전예배에 온통 우상이 들끓었으니 태양신과 하늘왕후 그리고 담무스를 섬기고 있었고, 가나안의 우상들과 주변나라들의 우상들까지 수입해서 섬기고 있었다. 그러니 하나님의 분노가 하늘을 뒤덮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언약민족이었던 남유다가 하나님을 버리고 주변의 강국들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한 것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과 모세의 시대에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한 언약자손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언약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자신에게 진정으로 복주시고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신들을 수입하여 성전에서까지 섬겼던 것이다. 그런데 더 문제는 어려운 일이 닥칠 때 남유다의 왕들은 주변 열강을 의지했다. 북이스라엘이 아람과 결탁하여 쳐들어오자, 남유다왕은 앗수르왕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엄청난 세금을 거둬 앗수르에 바쳤다. 결국 앗수르에 의해 북이스라엘은 멸망당하게 되었고 남유다도 앗수르의 신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남유다는 애굽을 의지하였다가 바벨론을 의지하였다가 맨 나중에 애굽을 의지하다가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도 애굽도 멸망을 당하게 된다.

  둘째, 두로의 심판과 멸망원인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것은 한 가지다. 그것은 두로왕의 "교만" 때문이었다. 두로는 사실 작은 도시국가였다. 두로와 시돈이 그 나라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두로가 교만한 나라가 되었는가? 그것은 이 도시가 육지와 섬이라는 두 곳에 "두로"라는 도시를 형성하면서 고대 해상 무역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두로는 멀리 4,000km나 떨어져있는 다시스(스위스)에 식민도시를 가질 만큼 해상무역으로 아주 큰 부자가 되었던 나라였다. 그러다 보니, 두로왕이 그만 교만이 하늘을 찔렀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겔28:2)" 그는 자신이 가진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고 큰 무역으로 재물이 더해지자 그만 자신은 다니엘보다 더 지혜로워서 은밀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 없다고까지 생각했다. 사람이면서 신(하나님) 행세를 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두로 자신이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말할 수 없게 하겠다고 하셨다. 그리하여 두로를 철저히 파멸시키는데, 먼저 1차로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을 통하여, 2차는 바사왕 아하수에로를 통하여, 3차는 헬라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을 통해 멸망시키신다. 그런데 지혜와 무역을 통해서 교만해진 두로왕의 타락의 과정이 영락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장 루시퍼의 타락과정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이는 두로왕의 교만에 루시퍼가 길숙히 관여하고 있었음을 암시해준다. 왜냐하면 그것이 두로왕의 심판과 멸망의 원인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겔28:12~19).

 

3.  애굽의 심판과 멸망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럼, 애굽의 심판과 멸망의 원인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2가지다.

  첫째는 애굽왕도 두로왕처럼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욥29:3). 그는 생명의 젖줄인 나일강을 두고서, 그것은 자신이 만들었다고 말했다(겔29:3). 당시 바로왕은 호브라(Hpphra, 재위 B.C.589~570)였는데 그는 이집트의 나일강을 일컬어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그것을 만들었느니라(겔29:3)"고 하면서 자신이 나일강을 만든 장본인인 것처럼 말했던 것이다. 나일강은 과연 바로가 만들었는가? 그것은 천지만물의 창조주께서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근으로 고생할 때에 그들을 먹게 하려고 말이다. 그런데 그는 나일강을 마치 자신이 만든 것처럼 자랑하였다. 또한 그는 마치 자신이 나일강을 지배하는 악어처럼 행세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워있는 큰 악어로구나(겔29:3)"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왕을 비유하는 단어로서 왜 "악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그것은 악어가 아니다. "탄닌"이다. 탄닌은 물 속에 사는 어떤 피조물을 가리키는데,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아주 힘이 센 존재다. 아마도 물 속에 사는 공룡같은 종류인 것 같아 보인다. 그러므로 욥기서에는 그와 비슷한 존재로서 "리워야단"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 단어로 한글로서 과거에는 "악어"라고 번역하였다. 바다괴물인 "탄닌"이나 "리워야단"을 한글성경에서는 "악어"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에스겔이 아닌 다른 성경에서는 "탄닌"이라는 단어를 "바다에 사는 용(시74:13~14)"이나 "뱀(출7:10)"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탄닌"이라는 용어가 바다나 물속에 사는 아주 무시무시하고 힘 쎈 공룡같은 것인데, 그것을 아무나 제어하기가 힘든 탓에, 마치 용인 것처럼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난 시간에 두로왕의 타락을 마치 루시퍼의 타락의 과정에 동일시함으로, 두로왕이 루시퍼의 통제를 받았던 대상이 아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듯이, 애굽의 바로 역시 용인 루시퍼의 지도를 받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다. 적어도 루시퍼로부터 어떤 정보를 넘겨받아 자신을 신격화하려고 시도했던 왕들인 것 같다.

  둘째, 애굽이 이스라엘 특히 남유다가 항상 의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피난처가 될 것처럼 행세함으로 이스라엘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했기 때문이다(겔29:6~7).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남유다에게 있어서 애굽은 "갈대 지팡이"라는 말로 애굽의 실상을 적나나하게 폭로하셨다. 여기서 애굽이 "지팡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의지하려는 대상이 바로 애굽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지팡이를 하나님께서는 "갈대 지팡이"라고 하신다. 지팡이는 지팡이되, 갈대로 만들어진 지팡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것을 의지할 때에 지팡이가 부러져서 오히려 자신에게 해를 가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 애굽은 이스라엘이 의지할 나라가 아니었다. 그것은 말만 지팡이일 뿐 실은 전혀 의지할 수 없는 지팡이였던 것이다. 요시아왕의 증조 할아버지는 히스기야왕이었다. 그때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인데, 그때에도 이사야선지자는 애굽을 갈대 지팡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이 찔리리니 애굽왕 바로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사36:6)" 그런데 망해가고 있는 남유다가 애굽을 지팡이로 의지하려고 하고 있다. 남유다의 맨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가 바벨론을 버리고 애굽을 의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애굽은 남유다를 결코 도울 수 없는 지팡이며, 오히려 그를 만질수록 자신이 찔리기만 하는 지팡이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더이상 남유다가 애굽을 의지하지 않도록 애굽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이다.

 

4. 애굽에 대한 심판의 결과는 어떠할 것이라고 했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심판하시겠다고 했다. 그럼 어떻게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셨는가? 다음과 같이 심판하신다고 했다.

  첫째, 나일강의 큰 악어였던 애굽왕 바로를 갈고리를 사용해 아가미를 꿰어서 물 바깥에 있는 뭍에 던져버릴 것이라고 했다(겔29:4~5). 그러면 그 악어와 그 비늘에 붙어있는 고기들이 함께 뭍에 던져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 밖의 땅 바닦에서 파닥거리다가 결국에는 말라 비틀어져 죽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의 먹이가 되게 할 것이라고 했다.

  둘째, 애굽 땅을 사막과 황무지가 되게 하실 것이라고 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장소,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장소가 되게 하시겠다고 했다. 그것도 무려 40년간을 말이다(겔29:8~14). 그래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하는 미약한 나라가 되게 할 것이라고 했다(게[ㄹ29:15~16).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땅을 멸망시켜 황무지가 되게 하실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한 땅이 되게 말 것이다. 그리하여 40년의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 여기서 "40년"이란 진짜 역사적 문자적으로 "40년"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40년"은 인고의 세월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40"은 고난의 숫자요 고통의 숫자이며 버려진 광야같은 숫자다. 그러므로 애굽 땅도 무려 40년간이나 버려진 땅이요 고통의 땅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바벨론 시대이후 애굽은 메대와 바사의 시대까지 실로 애굽은 40년간 전쟁에 패하여 황무지와 같이 버려진 채로 40년이 흘러갔던 것이다.

 

5. 두로를 정복한 바벨론 느부갓네살왕에게 과연 어떤 전리품이 주어졌는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인 체하며 설쳐대면서, 해상무역을 통해 전하의 강자와 부자가 되었던 두로를 어떻게 하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두로왕을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게 붙여서, 두로왕의 부하들이 애굽의 무리를 잡고 물건을 노략질하며, 그들에게 있는 것을 빼앗아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의 보상(삯)이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바벨론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두로를 심판했지만 얻은 것이 별로없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수고와 노고를 기억하고, 그들로 하여금 풍분한 보상을 받도록 조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경은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자라 할지라도 침으로 애굽을 무찌르는 자가 되어서 효과는 동일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은 애굽을 물리치면서 지상의 온갖 진귀한 것들을 동시에 그들로부터 빼앗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들은 호시탐탐 남유다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6. 나오며

  이 지구상에 가장 오래된 나라들 중에 하나었던 "애굽"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항상 동경하던 나라였다. 그들이 비록 그곳에서 종노릇을 한 400년간 하고 살았지만 그들이 그곳에서 빠져나올 때에는 종노릇하러 그곳으로 다시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으로 다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위기가 찾아올 때면 남유다는 다른 무엇보다도 애굽을 의지하려고 애썻다. 왜냐하면 지구상에서 그러나 애굽은 가장 안전한 나라, 전쟁에 지지 않을 나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의 결과는 갈리었다. 애굽이 계속 패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B.C.갈그미스전투에서 애굽은 바벨론과의 싸움에서 지고 만다. 왜나하면 애굽은 결코 사람이 의지할 수도 없고 약해져 있는 "갈대지팡이"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애굽은 바벨론과 바사와 그리스 제국에서 자신을 지팡이로 이용하는 투숙객들을 상대로 장사하여 돈을 좀 벌게 된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집트왕과 같은 자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인 셈이다. 회개를 통해 자신의 죄를 진실로 깨닫고 돌이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영접하는 것은 곧 노아요 욥과 같은 인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2019년 9월 25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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