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말하는 "율법"과 "율법의 행위들"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 두 단어의 차이를 이해할 때에 갈라디아서는 밝히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율법의 행위들은 유대율법주의자들이 칭의를 얻는 데에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 나아가는데 율법은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율법의 행위들은 사실 걸림돌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이 예수님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오늘은 그것에 대해 알아보자.

2020-09-09(수) 수요기도회
제목: 갈라디아서강해(06) 율법을 주신 목적과 그 한계(1)(갈3:10~4:11)
https://youtu.be/0XyYxqprygg  [혹은  https://tv.naver.com/v/15688133 ]


 

1. 들어가며

  갈라디아서는 바울로부터 전도를 받아 구원을 얻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유대율법주의자들에 의해 미혹을 받아 처음 믿음에서 떠나자, 무엇이 참된 복음이며 무엇이 바른 신앙의 삶인지를 책망하고 바로잡기 위한 책이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의 1차전도여행을 통하여 세워진 교회들로 추정되는데, 그들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하여 칭의를 얻고 성령도 받고 능력도 받은 자들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은 자라도 율법의 의식(규례)들도 지켜야 구원얻는다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꾀임에 넘어가게 된다. 그러자 이 사실을 듣게 된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과 자신이 전해준 복음이야말로 주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신적 기원을 밝히면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칭의를 얻게 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밝혀준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자들이라면 이제라도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결론적으로 말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갈라디아서의 다섯번째 시간으로서, 율법의 기능과 역할 그리고 율법의 한계 및 율법은 폐기되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은 그 첫번째 시간이다. 

 

2. 사람이 복을 얻으려면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얻는가 아니면 듣고 믿음을 통해서 얻는가?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로부터 직접 복음을 들었다. 그것은 율법의 행위를 지킴으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복을 받는다는 것이었고 실제로도 그랬었다. 하지만 바울 이후에 들어온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은 이와는 많이 달랐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지 못한다고 했다. 예수님을 이 믿은 자라도 그는 할례를 받아야 하고(갈5:3~4), 각종 규례들 곧 날(안식일)과 달(월삭)과 절기(유월절, 무교절, 초실절,칠칠절,나팔절,초막절)와 해(면제년, 희년)를 지켜야 하며(갈4:10~11), 음식도 정결한 음식만 먹어야 하며, 자신을 더럽히지 않도록 이방인과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갈라디아 성도들은 그만 바울의 가르침을 버리고 새로운 유대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그들을 향해 강경한 어조로 책망하였다. "너희가 칭의를 얻고 성령을 받은 것이 과연 율법의 행위들을 지켜서였느냐 아니면 듣고 믿어서였느냐?(갈2:16,3:2)" 그랬다. 그들은 율법의 규정들을 지켜서 의로움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 범죄하여 죽음이 그들의 죄값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인류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여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가 결국 죄사함도 받고 칭의도 얻고 성령도 받고 구원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율법주의자들은 갈라디아 성도들로 하여금 바울이 전했던 순수한 복음에서 떠나도록 미혹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람이 정말 칭의를 얻고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으려면, 율법의 행위들이 있어야 하는가? 바울은 말한다. 만약 누군가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었는데, 그가 유대율법주의자의 주장을 따라 다시 할례를 받고 율법의 규례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이 만드는 자들이라고 했다(갈2:21).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율법의 저주들을 속량하시기 위함이었는데(갈3:13), 예수님을 믿은 자가 다시 율법의 규례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량을 헛되이 만들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의 은총을 믿어서 칭의도 얻고 성령도 받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면서, 율법의 행위들로부터 복을 받으려 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게 될 뿐이라고 지적하였다(갈3:13).

 

3.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받았는가?

  이어서 사도바울은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그것은 한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으며 또한 하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에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을 아브라함이 제일 처음 알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랬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신다는 약속을 그대로 믿었다(창15:6). 그러자 그의 믿음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쉽게 말해 그때 칭의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 들어와 갈라디아서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분들은 아브라함이 처음 가졌던 자신의 믿음이 자신이 받은 칭의를 계속해서 효력있게 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그가 얻었던 칭의가 곧이어 없어질 위기에 처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의 가진 믿음이 흔들려서 그만 범죄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칭의 사건이 있고 난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한 채 육체를 따라 큰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창16:1~4). 즉 자신의 아내의 여종인 하갈을 취하여 후손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행위를 잘못 되었음을 그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기 위해, 무려 13년 동안이나 아브라함을 만나주지 않았다. 그리고 13년 이 지난 후에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행위를 회개할 것을 요구하셨다(창17:1). 그것은 바로 자신의 몸에 할례를 행하라는 것이었다(창17:10~11). 다시는 자신의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않겠다는 것을 몸에 새기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정리해보자. 칭의는 사실 믿음으로 시작하고 믿음으로 얻는다. 어떤 자신의 의로운 행위가 있어서 주님께 칭의를 얻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 얻었던 칭의가 영원무궁토록 불변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칭의는 얼마든지 취소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가 회개하기를 요구하셨던 것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온 집안 남자들을 다 데려다가 할례를 행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칭의를 비로소 인쳐주셨다(롬5:8). 그제야 그때 그가 믿음으로 받았던 칭의가 드디어 견고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칭의를 얻은 성도라 할지라도 한 번 믿음으로 얻은 칭의가 영원불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얼마든지 믿음에서 흔들릴 수 있고 믿음에서 떠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통해 얻은 칭의가 소실되지 않도록 늘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회개만이 자신이 믿음으로 얻은 칭의를 보존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그랬기 때문이다. 고로 만약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얻은 칭의가 영원토록 불변할 것이라는 생각하에, 그만 죄짓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는 죽는 그날 칭의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내주하시게 된 성령께서도 구속의 날까지만 성도를 인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엡4:30).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계속해서 거부하고 또한 죄를 책망하시는데도 회개하기를 거부한채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는 자신이 지은 죄들을 속죄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죽는 날 자기 안에 내주하시던 성령께서 그 사람을 떠나가게 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브라함이 받았던 칭의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축복은 그가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얻을 수 있었고 지켜낼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뒤에도 우리는 결코 자신의 믿음을 배반하지 말아야 하며, 믿음에서 떠나가지도 말아야 한다. 혹시 죄를 지었더라도 즉시 회개하여 다시 칭의를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야 한다. 

 

4. 오늘날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복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믿음만 있으면 자신도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것은 과거 예수님 당시, 할례만 받으면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자들의 생각과 같다. 역시 오늘날에도 자기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칭의도 얻고 하늘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당시 아브라함이 복을 받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어서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은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약속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여호와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다시 찾아오게 되면 아브라함 자신에게 아들이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가리킨다(창18:10,14). 그후 1년만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게 되자 아브라함은 뛸듯이 기뻐했다(요8:56).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시 오신 증표였기 때문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복을 주시겠다고 다시 약속하셨고 그 약속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 다시 말해, 온 천하 만민은 다 여호와께서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복을 받게 된 것이다(창22:17~18).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께서 아들로 오신 예수님(요8:24,28,58)을 나의 구주로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되신 그분을 우리가 나의 구원자로 믿을 때에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칭의도 얻고 하늘의 상속자도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구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죄값을 처리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을 믿을 때에 내가 지은 죄값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또한 그분이 보내주신 성령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생명이 전수되어ㅗ, 나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상속자도 되어 하늘의 기업을 물려받게 되는 것이다. 

 

5. 율법이 언약보다 더 중요한가 아니면 언약보다 율법이 더 중요한가?

  그러므로 우리가 이상과 같은 사실을 통해 정리하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언약)보다 오히려 430년 뒤에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이 결코 약속보다는 우선할 수 없다는 것이다(갈3:17). 사람들도 서로간에 한 번 약속했으면, 그 뒤에는 그것을 누구도 폐하거나 더하지 못하는 것이 상례다. 그런데 어찌 언약 뒤에 제정된 율법이 먼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폐하거나 혹은 거기에다가 다른 것을 더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갈3:15). 사실 칭의를 얻거나 하늘의 상속자가 되는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회개할 때에 주어는 것이지, 결코 율법을 지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갈3:18). 사실 나중에 또한 살펴보겠지만, 율법은 사람이 자신이 무슨 죄를 지어서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이 상실될 위기에 처해있음을 알려주는 시금석이 되는 것이다(갈3:19). 

 

6.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과 그 역할은 무엇인가?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보다 430년 뒤에 주어진 율법은 대체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가? 사도바울은 율법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사도바울은 다만,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복을 받지 못하고, 율법규례들을 지켜야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고 미혹하는 자들을 책망하기 위해 갈라디아서를 썼다. 그는 결코 율법폐지론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강조한 것은 사람이 율법의 규례들을 지켜야만 비로소 칭의도 얻고 성령도 받고 하늘의 상속자도 된다는 거짓된 속임수에 미혹받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임시로 주어진 법이기 때문이요(갈3:19),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를 그 근본적인 이유를 가르쳐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갈3:24). 다시 말해 율법은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필요성을 깨우쳐주기 위해 중간에 임시로 주어진 법이라는 것이다(갈3:23).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율법이 과연 어떤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보았을까? 사도바울은 첫째, 율법은 범법하므로 더해진 것이라고 말했다(갈3:19a).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 자신이 법을 위반했는지도 모른채 있기 때문에 "당신은 법을 위반 것이오"라고 알려주기 위해 추가로 주신 말씀이 율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사람은 율법을 지켜서 그 행위들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사람도 율법의 전 조항들을 다 지킬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담의 타락 이후 이미 죄된 본성이 사람 속에 주입되어 들어있고, 죽는 그날까지 사탄마귀가 귀신을 통하여 우리를 미혹하기 때문에 죄에서 온전히 벗어나서 의만 행하고 살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것을 지켜서 자신이 의로운 자인 것을 드러내라고 주신 법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자신의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일종의 자기자신의 상태를 비춰보아 자신의 상태를 알게 해 주는 "거울"과 같은 것이다. 

  둘째, 이어서 사도바울은 율법은 아들로 주어진 법이 아니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 안에서 제정된 것이라고 말했다(갈3:19b). 여기에 나오는 '중보자'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로 서 있던 모세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왜 "천사들을 통하여"라는 말이 그 중가에 들어있는 것인가?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전통으로 내려온 이야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가 율법을 여호와께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 천사로부터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모세가 80세 때에 미디안 광야에서 양떼를 치다가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은 때에 그가 가까이 가서 더 자세히 보려다가 결국 그곳에서 여호와의 천사를 만나게 된다. 그때에 하나님께는 그때 여호와의 천사의 입을 통하여 모세를 부르셨고 또한 그에게 사명을 주셨다. 그러면 모세가 만난 것은 여호의 천사인가 아니면 여호와 자신인가? 그런데 마찬가지로, 모세가 40일금식 후에 시내산에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을 때에 과연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인가 아니면 이번에도 여호와의 천사를 통해서 받은 것인가?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입술과 손을 사용하여 그에게 율법말씀을 주신 것인가? 한편,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그때 모세에게 말씀을 전해준 자가 "여호와의 천사"였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러한 사상은 유대인의 전통에 사실 뿌리 깊이 스며 있다. 그래서 율법과 구약성경에 조예가 있었던 스데반의 설교에서도 그와같은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그때 스데반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모세)은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말하고 있는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던 자라. 또한 그는 살아있는 말씀을 받았다. 우리에게 그것을 주기 위하여(행7:38)", "너희가 천사들이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행7:53)" 그렇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이기는 맞지만 천사의 중보의 손을 통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 가운데서 가장 구약성경다운 책이라고 일컬어지는 히브리서에서도 마찬가지로 나온다. "왜냐하면 천사들을 통하여 발설되었던 말씀이 견고하게 되었고, 모든 범죄함과 불순종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기 때문이라면, 우리가 [아들로 말미암아 주신]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긴다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겠느냐(히2:2)" 그렇다. 훗날 복음은 아들인 예수님을 통하여 주어진 것이면 율법은 천사를 통하여 주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고를 왜 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여호와께서 직접 나타나 아브라함에 주신 약속이 결국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되었기 때문에, 중간에 끼어들어든 율법이 약속보다 더 우선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유대율법주의자들이 틀렸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사도바울이 율법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율법의 위치가 그렇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율법은 약속 다음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임시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제한적으로 주어진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바울은 율법의 기능과 역할을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는 율법의 한계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하는데, 이후의 내용은 시간관계상 다음 주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7. 나오며

  오늘날에 이신칭의 교리는 많이 왜곡되어 있다. 왜냐하면 오직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오직 믿음"이라는 말도 성경에 나오지 않을 뿐더러,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이요, 그것은 아들로 오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귀하고 소중한 일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간에 들어있는 과정은 생략한 채, 그냥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까 칭의도 받았고 구원도 이미 받았어"라고 쉽게 말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유대인들이 "내가 할례를 받았으니까, 나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아브라함의 복도 받을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아니다. 믿음도 어떤 믿음인지를 똑바로 알아야 한다. 어떤 약속에 관한 믿음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분명히 아는 자는 결코 성령을 외면하지 않으며 죄를 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서 칭의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이내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한 채 육체를 따라 행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받은 칭의가 보존되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처럼 할례와 같은 회개가 같이 있어야 한다. 회개 없이는 결코 한 번 가졌던 믿음이 고스란히 보존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서 말씀을 들었던 아브라함도 믿음에서 떠나 육체대로 행한 것이 실제일진대, 다른 사람들은 이에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행위들로부터가 아니라 믿음으로부터 칭의를 얻는다고 말할 때에는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를 알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복음을 믿게 되었으니, 내게 율법 따위는 필요 없어"라고 말해서도 아니 된다. 율법은 제한적이지만 율법으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았더라도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고 거역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율법의 역할은 계속해서 필요하다. 왜냐하면 율법을 모르면 지금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위반하고 있는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성령의 음성에 따라 순간순간마다 책망을 받고 있다면, 그는 자신이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회개하겠지만, 만약 자신의 자유의지로 성령을 거역하고 있다면 그는 율법을 통해서라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회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이 시간에는 율법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앞부분을 살펴보았다. 다음 주에는 그 나머지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율법이 지닌 한계점까지는 살펴보고자 한다. 

 

2020년 09월 09일(수)

정병진목사

누가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믿음"과 비교한 것은 "율법의 행위들"이었는가 아니면 "율법"이었는가? 오늘날 성도들 중에는 상당수가 자신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아무런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예수님만 믿고 있으면 다 OK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데,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에 점치러 가고 있다면 그는 과연 천국 들어갈 수 있을까? 자신이 예수님을 믿었을 때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예수믿고도 우상숭배하고, 예수믿고도 간음해도 천국간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해보자.

2020-09-02(수) 수요기도회
제목: 갈라디아서강해(05) 율법의 행위와 믿음 그리고 언약과 율법의 비교(2)(갈3:1~29)
https://youtu.be/XzYPc-cGn4U [혹은 https://tv.naver.com/v/15570088  ]

 

 

1. 들어가며

  우리는 지난 시간에 갈라디서 3장 강해 첫번째 시간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 좀 더 깊이 살펴보았다. 갈라디아서 3~4장은 교리편으로서, 믿음과 율법이란 대체 어떤 것이며, 둘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는 말씀이다. 특별히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에서 "율법의 행위들과 믿음"을 비교하면서 언급한 것은 사람의 의롭게 되거나 성령을 받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들로부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얻게 된다는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 대한 실례로 바울이 어떤 한 사람을 언급하는데, 그는 바로 "아브라함"이다. 우리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그가 어떻게 복을 받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율법의 행위와 믿음"의 상관관계를 좀 더 들여다보고자 한다. 바울이 말하려고 했던 "율법의 행위들(원문)"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이 율법과는 어떤 상관이 있는지 그 실체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갈라디아서 3~4장에 보면, "율법의 행위"의 반대편에 있는 "믿음"에 관하여 말씀한다. 그렇다면,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들려주시고자 했던 믿음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사도바울에 의하면, 그것은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는데에 필요하며 또한 사람이 성령을 받게나 성령의 능력을 얻기 위해서필요한 것으로 언급된다. 즉 사람이 죄사함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또한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려면 꼭 필수한 것이 "믿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칭의에서 시작하여 천국에 입성하기까지 꼭 필요한 "믿음"이란 어떤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며, 대체 무엇을 믿는 믿음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렇다면, 칭의에서부터 천국 입성을 위해 꼭 필요한 "믿음"이란 대체 어떤 믿음을 가리키는가? 여기서 가리키는 "믿음"은 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대체 누구시며 인류의 구원을 위해 그분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믿는 것이 바로 그 믿음인 것이다. 한 마디로 오직 예수만이 구원자이심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에 대한 대표자로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믿음"도 당연히 그가 예수님을 어떻게 믿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져야 한다. 보통 "하나님을 믿으면 땅을 기업으로 받고 자손이 많아지는 축복을 얻는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뛰따라오는 축복인 것은 맞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고, 진짜 복은 그의 씨(후손)으로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신다는 것이며(창18:10,14, 요8:24,28,58), 그와 같이 일을 행하신 한 분 하나님을 믿을 때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창22:18, 요8:56).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을 가진 자는 결국 대적 사탄마귀의 문을 차지하는 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창22:17). 결국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적어도 공적인 진술에 속하는 것으로서,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용서해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한 분 하나님 자신이시며,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그분이 피흘려 죽으신 것을 내가 확실히 믿습니다."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믿는 자들은 흔히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진술은 진정 사실인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즈레 자기는 율법과는 상관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율법을 지켜도 되지만 안 지켜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하면, 첫째,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며 이방인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예수께서 오셔서 율법을 폐지하셨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셋째, 사도바울도 사람이 의롭게 되고 또한 성령을 받게 된 것이 율법의 행위이 있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오로지 예수님만 믿어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녕 그게 사실인 것인가? 우리는 갈라디아서에서 네 구절, 로마서에서 세 번에 걸쳐 등장하는 '율법의 행위'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고 한다.

 

가. "율법의 행위"라는 문구는 어디에서 등장하는가?

  자, 먼저 "율법의 행위"라는 말씀이 등장하는 성경구절부터 살펴보자. 

롬2: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3: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갈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갈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렇다. "율법의 행위"라는 말씀은 오직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만 나오는 아주 특별한 문구다. 그리고 이것은 대부분 사람이 "칭의"를 얻는 데에 필요한 것으로서, 그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라고 얻는 것이라고 하는 문장들에 주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만약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칭의를 얻고 성령을 받았던 자가 율법의 행위를 중요한 것으로 돌이킨다면 그는 저주 아래로 다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나. "율법의 행위들"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비교하는 것은 "율법의 행위들"과 "믿음"이지, "율법"과 "믿음"이 아니다. 다시 말해, 칭의를 얻든지 성령을 받든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듣고 믿음을 통해서 그것들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도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율법의 행위들"이란 율법 전체를 가리키는 것인가? 아니면 율법 중에서 어떤 행위들을 수반하는 특별한 것들 곧 의식법을 가리키는가? 즉 율법 중에서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지키고, 절기를 지키며, 음식을 가려먹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는 그런 종류의 율법을 가리키는 것인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행위들"은 율법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는데,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이 "율법"과 "믿음"을 비교하지 않고, 오히려 "율법의 행위들과 믿음"을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노모스(율법, 법)"라는 단어를 다양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율법의 다양한 의미들 가운데 특별히 "율법의 행위들"과 "믿음"을 비교한 것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의 말씀이라는 것을 염두해 둘 필요가 있다. 고로 우리는 "율법의 행위들"이라는 것은 율법 전체를 가리킨다고도 말할 수는 있겠으나, 정말 정확한 의미는 율법 중에서 어떤 의식을 통해서 자신을 의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행위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 것에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할례, 안식일 준수, 여러 절기를 지킴, 음식을 가려서 먹음, 불결한 것과 접촉을 조심함" 등이 있다. 특별히 바울이 언급했던 "율법의 행위들"이란 율법 중에서도 의식적인 것들을 언급하고 있음을 갈라디아서 본문은 말한다. 그럼, 그가 율법의 행위를 말할 때에는 어떤 것을 염두해 두고 말한 표현이었을까? 

갈4:9-11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갈5:2-4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그렇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칭의도 얻고 성령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율법주의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다시 날(안식일, 금식일)을 지키고, 달(초하루=월삭)을 지키고, 절기(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를 지키며, 해(안식년, 희년)를 지키려고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래야만 자기도 의로워질 것 같고, 구원에 더 가까이 이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속임수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미 믿음을  통해 구원의 노정에 들어선 이가 다시 할례를 받게 된다면 그는 율법전체를 행할 의무가 생긴 것이요 그렇게 하면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님의 구속은총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때문에 오히려 그런 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것이고 은혜로부터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바울은 율법의 의식적인 행위들을 통해서 자신을 의롭게 하려는 자들을 두고 다른 교회(골로새교회)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골2:20-22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골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렇다. 사도바울은 골로새교회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도 그리스도 말고 다른 어떤 규례를 지킴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자들을 향하여, 이미 지나간 초등학문이요 장래 일의 그림자인 율법의 규례들을 붙들려고 하지 말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제는 그림자가 아니라 몸(실체)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구약의 의식적인 법들을 다 이루심으로 완성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의식적인 행위들을 다시 지킴으로 의롭다함을 얻으려고 시도하느냐고 책망한 것이다. 그렇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들을 지켜서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그렇게 되는 것이다. 칭의에는 다른 어떤 것도 거기에 끼어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4. 예수께서는 율법과 율법의 행위들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그렇다면, 율법에 관하여 예수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8장에 의하면, 당신은 스스로 계신 자존자요 여호와이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주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을 만나서 "네 씨"를 약속하셨던 여호와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이요, 모세에게 나타나 율법을 수여하신 분도 역시 예수님이었던 것이다.

  바로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율법에 관하여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율법말씀"에 관한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 다른 것은 그것을 기준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렇단 예수께서는 율법에 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그것을 축약한다면 산상수훈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마5:17~20절에 나온 말씀의 그것의 핵심이다. 우리는 이 말씀에 더하지도 말아야 하고 빼지도 말고 그대로 믿고 받아야 한다. 

마5:17-20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허물어뜨리려고) 온 줄로 생각(예상)하지 말라 폐하러(허물어뜨리려고)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성취하려고)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렇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다.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이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예수께서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는 뜻이다. 고로 예수께서는 율법을 그대로 다 준수해야 했다. 그리고 율법에서 부족한 것은 또 보충하기도 하셨다. 그분이 오셔서 보충한 것에는 도덕법(십계명법)이다. 특히 말과 마음의 영역까지도 죄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예를 들어, 형제에게 "라가"라고 욕하는 것도 지옥불에 던져질 범죄라고 하셨다. 이는 형제를 해하려는 것이고 미워하는 것이 되기에 그것은 살인죄가 된다고 하셨다(마5:21~22). 또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도 이미 마음에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마음으로 짓는 죄까지도 간음죄라고 하셨다(마5:28). 이처럼 율법의 원 제정자이셨던 예수께서는 구약에서는 약하게 제시된 것도 더 보충하여 한층 더 도덕법을 강화시켜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죄인으로 하여금 확실히 죄인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야 율법으로부터 확실히 정죄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에게로 와서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율법 중에서 실제로 어떤 것은 그분이 완성하심으로 폐지하신 것들도 있다. 그분께서 오셔서 율법을 허물어뜨린 것이 아니라 완성하심으로 폐지하신 것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 중에서 어떤 것들은 이제 더이상 사람을 정죄하는 용도로 쓰일 수 없게 된 규례들도 있다. 그러한 것들로는 "의식법"들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율법 중에서 안식일법을 포함한 절기법, 정결법, 제사법, 성막법, 음식법 등이 바로 이러한 의식법에 속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안식일을 율법의 규례대로 지키지 않아도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롬14:5). 왜냐하면 예수께서 안식일의 제정자이자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안식일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라도 그분에게 가면 안식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구약의 안식일은 사실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고 예수님이 안식일의 실체이셨던 것이다. 그러한 예로서는 음식법도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그분에게 가면 구약의 율법에서 먹지 말라고 규정해놓은 음식들 예를 들어, 돼지고기나 오징어를 먹어도 그것이 죄가 되지는 않는 것이다(더 정확히는 행10장의 보자기 환상에서 그것이 언급되어 있음). 뿐만 아니라 정결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가 문둥병자나 시체와 접촉해도 그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분을 믿을 때에 그분이 공생애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구약의 율법 중에서 완성되어버린 것이 많다. 고로 구약의 의식적인 규례들은 더이상 지키지 않아도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그것을 지켜 행한다고 더 의로워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고 누릴 수 있으며, 우리를 억압했던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좀전에도 말했지만, 예수께서 오셔서 도덕법(십계명) 만큼은 한층 더 강화시켰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결코 도덕법을 폐지시킨 적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십계명들(십계명들) 중에서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고 일컫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는데 그가 어쩌다 우상숭배를 하게 되었다면, 그는 천국에서 자신이 일찍이 쌓아두었던 상급이 허물어지고 줄어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 그렇다. 예수믿고 간음하고, 예수믿고 거짓말을 한다면, 그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그가 받을 상급은 많이 줄어들어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가 천국에 턱걸이로라도 들어간다는 것에 가정하에 그러한 것이다. 요한계시록 21:8을 보라. 부활승천하시어 보좌에 앉아계신 예수께서는 예수님을 믿어도 우상숭배한 자를 불못에 던지겠다고 하셨다. 또한 간음하고, 거짓말하는 자들도 만일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불과 유황 못에 던져 그를 태우게 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도로 하여금 구원얻게 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결코 말로만, 그리고 입술로만 하는 고백은 아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지키는 믿음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계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그렇다. 성도들이 구원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계명들(십계명들)을 여전히 지켜야 하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여전히 지켜야 한다. 당시 로마황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 하나님"으로 부르라고 하였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 중에 오직 예수믿는 사람들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수님만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끝까지 고백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러한 고백과 함께 장렬하게 순교할 수 있었다. 

 

5. 나오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믿음" 지상주의에 그만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님만 믿으면 칭의도 얻고 구원도 받는다고 한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말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믿음은 사실 갖는 것보다는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 죽음을 각오하고 믿음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계14:12). 예수님을 믿다가도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면 그는 구원받기가 어렵게 되고 말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 번 믿었던 사실이 자신의 구원을 영원히 보장해주지도 않는다. 물론 그날에 죽는다면 그는 구원받을 것이다. 하지만 믿은 후에도 우리는 또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 세상임금이 누구인가? 그는 마귀다(요12:31,14:30,16:11). 화가 난 마귀는 빼앗겨벼린 원래의 자기의 사람들이 쉽게 천국가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를 궤계를 잘 알고 대비해야 한다. 쉽게 천국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참된 신앙의 길은 좁은 길이라고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계7:13~14). [초]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선]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도 말씀하셨다(마22:14). 그러므로 우리는 대충 믿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짓 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 믿었으면 그 믿음을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고, 믿었다면 그는 계속해서 죽는 그날까지 회개하며 살아가야 한다. 먼저는 과거에 지었던 죄를 회개해야 한다. 특히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짓고 있는 죄, 즉 자신이 불러들인 자범죄들을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죽는 날에 우리가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한 번 믿음으로 칭의를 얻었다고 해서, 그 칭의가 영원불변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러한 것은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땅을 밟고 살아가다보면 처음 입혀졌던 흰 옷은 또다시 더럽혀질 수 있다. 생각해보라. 율법이 아니라면 내 옷이 더럽혀 있는지 깨끗한지 어떻게 알겠는가?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실 것이라고 말은 하겠지만 성령을 무시하며 살고 있는 자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율법은 폐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완성된 것이다. 그래서 도덕법으로서 십계명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심판의 기준으로서 톡톡히 역할을 해낼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율법의 예표들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신 것인지를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율법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려주는 교과서요. 내 죄목을 알려주는 메뉴얼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율법은 더 이상 필요다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우리가 짓고 있는 죄를 알고서도 무조건 덮어버리는 것과 같다. 썩어가는 상처가 있는데도 그것을 덮어버린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다. 환부를 드러내어 씻어내고 치료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회개"다. 그것이 우리가 오늘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인 것이다. 율법의 도움을 받으면서 말이다. 

 

2020년 09월 02일(수)

정병진목사

한 때 "오직 믿음"이 통용되는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시대는 그렇게 말해야 했던 특수한 상황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믿음을 입술로만 고백하면 다 구원받는다는 산데만주의로 인하여 원래의 종교개혁의 취지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참 믿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칭의를 얻게 되는지, 어떻게 할 때 구원을 받게 되는지 혼탁한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 사도바울이 진정 가슴으로 말하고자 했던 바로 그 원초적인 믿음과 칭의 그리고 구원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끝까지 읽는 이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2020-08-26(수) 수요기도회
제목: 갈라디아서강해(04) 율법의 행위와 믿음 그리고 언약과 율법의 비교(1)(갈3:1~29)
https://youtu.be/AHSYeJQBPOM [혹은 https://tv.naver.com/v/15455418 ]

 

 

1. 들어가며

  갈라디아서는 어떤 책인가? 바울은 자신의 몸이 아픈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부름받은 소명을 이루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나가 복음을 전파한다. 그리하여 세운 교회가 갈라디아 교회들이다. 그런데 이 교회들이 자신이 전해준 순수한 복음에서 쉬 떠나 이내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자 통탄한 마음으로 그들을 깨우쳐주기 위해 쓴 복음의 변증서가 바로 갈라디아서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는 때로 무서우리만큼 강한 어조가 나오기도 하며, 동시에 아비가 어린 자녀에게 들려주는듯한 자상함도 묻어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통해 진짜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으며, 바울이 정말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어떻게 사도로 부름을 받아 쓰임받던 사역자였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분석하여 써내려간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 곧 "율법과 복음"의 비교는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신앙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들려준다. 오늘 이 시간은 지난 주까지 살펴본 갈라디아서 1~2장 곧 바울의 사도직과 그가 전한 복음의 변증에 이어, 갈라디아서 3~4장의 기독교 교리의 첫 개시 부분으로서, 이신칭의와 그리고 이신칭의가 무엇인지 들려주는 아브라함의 전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바울이 들려준 "이신칭의"란 무엇인가?

  바울은 갈라디아서 1~2장을 통하여 자신이 전한 복음과 사도직의 신적 기원에 대해 소상하게 밝혔다. 그리고 자신이 전한 복음 이외에 복음은 설령 하늘에서 온 천사가 전해준 것이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했다. 그리고 갈라디아교회들이 자신이 전한 복음을 그렇게 쉽게 떠나, 예수님을 믿어야 되지만 거기에다가 할례를 받고 율법도 준수해야 한다는 이상한 복음을 좇아가는 보고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사람이 어떻게 의롭다 함을 얻게 되며, 어떻게 성령을 받는지 그 원리를 말한다. 그 핵심은 바로 갈라디아서 2:16이다.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통하여만 가능하다고 언급한다. 아무리 율법의 조항들을 잘 지킨다 할지라도 사람은 결코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 사람이 지켜야 할 계명으로서 십계명(도덕법)과 다른 의식법들을 주셨다. 그런데 사람은 그 모든 법을 다 지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당연지사다. 아담의 범죄 이후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야 했다. 그런데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이미 증거를 받은 것으로서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칭의다. 우리는 결코 의롭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믿음으로 인하여 그분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되어 의롭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사람이 의롭게 될 수는 없는 것이다. 

 

3.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신칭의)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가?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바울이 외쳤던 "이신칭의"를 잘못 이해하거나 과대포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칭의를 받게 되며, 칭의를 받은 자에게 구원은 이미 따논 당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은 후회하심이 없기에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며 그러니 안심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말했던 이신칭의와는 다른 주장들이다. 바울은 믿음만으로만 칭의를 얻는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칭의가 곧 구원이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전통 아래에 있는 개신교인들 중에는 오직 믿음만 있으면 자신의 구원문제는 이미 끝났다도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했던 이신칭의와 오늘날 잘못 알려진 이신칭의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몇 가지 개념들이 있다. 우리가 가진 개역성경에서는 "칭의"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만 주어지는 것처럼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오직"이라는 단어가 이 본문에 들어있지 않다. 우리말 성경번역가가 "오직"이라는 부사어를 거기에다가 집어넣음으로써 잘못 번역한 것이다. 그렇다면, 갈2:16의 말씀을 헬라어원문으로 보자. 

갈2:16 우리는 사람은 율법의 행위들로부터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온 채 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서가 아니라면 [말이다]. 우리도 역시 그리스도 예수를 믿었다.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들로부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신실성)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기 위한 것이다. 율법의 행위들로부터는 모든 육체가 의롭다함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선 사람이 의롭게 되는 데에는 율법의 행위로부터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된다는 말도 실은 없다. 분명한 것은 사람이 칭의를 얻는 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일반적으로 이 문구에 대해서, 신학자들 간에 2가지 상이한 해석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잘 아는 바, 예수 그리스도를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번역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의롭게 되는 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 할례를 받는 것으로도 안 되고,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도 안 되고, 선행을 해서도 안 되고, 금식과 참선을 하는 것으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갖고 있는 신실함을 통하여 우리가 칭의을 얻을 수 있는 해석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구약의 예언을 따라 도성인신하시고 또한 아버지께서 부탁하신 것들을 신실하게 다 이루심으로 결국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는 칭의가 인간에게 주어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믿음"에 해당하는 "피스티스"라는 단어가 원래는 "충성됨, 신실함, 신실성"이라는 어근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어근상 "순교자"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칭의가 주어진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충성되이 자신의 사명에 충실함으로 인하여 주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신실성이 없었다면 우리 죄인들이 칭의를 얻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러한 두번째 해석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잘 들어보지 못한 견해알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번역본이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특별히 우리말 성경에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번역해 놓았으니, 자신이 믿음만 있으면 자신에게 칭의는 따놓은 당상이요, 이미 자신은 가지고 있으니 자신의 구원은 안전하다고 여겨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헬라어에는 "오직"이라는 단어가 있지 않다. 만약 "오직"에 해당하는 거기에 단어가 있었다면 "모노스"는 단어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하지만 그 단어가 없다. "아니라면"이라는 부정어를 "오직"이라는 단어어 바꾸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글성경만 읽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믿음만 있으면 칭의를 얻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라는 말은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을까?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번역해야 하는가 아니면 주격적 소유격으로 번역해야 하는가? 그것은 전자의 번역이 훨씬 원문에 가깝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갈2:16의 말씀 자체가 그것을 반증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인 것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바울도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사람이 의롭게 된다는 것을 이미 알아온 채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본문을 번역할 때에, "믿음'이라는 단어를 "충성됨, 신실함"이라는 뜻을 가지고서 번역함이 좋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이 본문을 주격적인 소유격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칭의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다른 것으로는 결코 인간이 칭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라는 문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그분을 충성되이 믿는 것을 통하여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싶다. 그렇다. 우리가 칭의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그런데 그때의 "믿음"이란 그분을 우리가 믿는 것 때문에 어떠한 환난과 고난을 받게 된다 할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용의를 가지고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심지어 순교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않을만큼의 충성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갈2:16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4. 칭의를 얻었으면 그는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인가?

  오늘날 바울이 말하는 칭의에 관한 문제는 단지 "오직 믿음"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있는 것만은 아니다. 두번째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칭의"가 회개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칭의의 필수적인 요소로서, "믿음"과 더불어 "회개"를 직접적으로 말씀하셨다(눅18:9~14). 그것은 바로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다. 칭의는 믿음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오직 믿음만"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동반될 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칭의에 대해 세번째로 생각해 볼 것은 "칭의"가 곧 구원인가 하는 문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칭의를 받았으면 자신은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칭의가 거져주어진 것처럼 구원도 거져 주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예수님을 믿어 칭의를 얻었다면 자신은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아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칭의는 구원의 여정에 들어선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지 칭의가 구원을 다 이룬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바울도 칭의에 대해서 로마서(3~5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롬5:9)이라고 말했다. 바울은 칭의를 받은 자가 그것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앞으로 그분을 통하여 그분의 진노에서부터 장차 구원을 받을 것이다(혹은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언급한 것이다. 칭의가 곧 구원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롬5:9의 말씀을 헬라어로부터 직역해보자.

롬5:9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그분의 피 안에서(피로서) 더욱 더 많이(더 많은 것에서) 의롭게 된 후에,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그 진노로부터 장차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혹은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서 믿고 받아들였다면, 그때부터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분의 피로 더욱 더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결국 그분을 통하여 장차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고로 구원은 우리가 죽는 그날에 완성되는 것이지, 결코 자신이 믿던 그 순간에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의 여정에 첫 발을 내디뎠던 것을 가지고 "예수는 예수님을 믿었으니, 그럼 당신은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이러한 선언이 결국 많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평생을 두고 회개할 것을 잊게 만들어버린다. 평생 회개하여 예수님의 피로 자신의 죄를 씻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이미 믿었으니, 자기가 믿는 순간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았다고 여겨버리는 것이다. 아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우리가 지은 죄를 자백함으로써만 예수님의 피에 의하여 용서받을 수가 있다(요일1:9,7). 이를 거꾸로 말하면, 회개를 통해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는 죄가 아니라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죽는 그날까지 회개해야 한다. 

 

5. 갈라디아성도들은 어떻게 되어서 성령을 받아서 거듭나게 되었는가?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충성되게금 신실하게 믿는 것으로 말미암아 칭의를 얻게 된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하여 "어리석도다 갈라디아서 사람들아"하면서 책망했다(갈3:1). 왜 그랬을까? 그것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사도바울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 때문에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칭의도 받았고 성령까지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만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서 떠나, 할례를 받는 등의 율법의 행위들도 필요하다는 거짓형제들의 말에 금방 속아넘어가버린 것이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다시 그들의 과거를 상기시켜서 말한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과연 율법의 행위로부터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부터냐?"(갈3:2) 그랬다. 베드로가 이방인이었던 고넬료 가정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에도, 할례를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씀듣는 중에 그들에게 성령이 부어졌던 일이 있었다(행10:44~45). 그러자 고넬료 가정의 이방인들도 자기와 똑같이 방언을 말하였고 하나님을 높이 찬양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었던 갈라디아 사람들도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 에베소의 사람들처럼, 오직 복음을 듣고서 믿음으로 인하여 성령을 받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충성되이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을 듣고, 할례도 받고 안식일도 지키며 절기도 지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바울은 그들에게 그러한 행위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어 여기는 것이라고 강하게 책망한다(갈2:21). 만약 누군가가 율법 안에서 의롭다하심을 얻으려고 시도한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마침내 끊어질 것이고 은혜에서 떨어지고 말 것이라고 했다(갈5:4).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만으로 칭의가 불가능함을 시인하는 꼴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성령으로 시작했던 그들이 이제로 할례를 받는 등의 육체로 끝마칠 작정이냐고 꾸짖는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주셨고 그리고 능력을 행하게 하신 일이 어찌 다 율법의 행위 때문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듣고 믿음을 통해서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 엄하게 꾸짖엇던 것이다. 

 

6. 아브라함은 어떻게 되어 의롭다함을 얻었는가?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어떻게 해서 아브라함이 칭의를 얻게 되었는지 사례를 들어 차근차근 설명한다. 아브라함은 율법이 생기기 430년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써 칭의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할례를 받기 전의 상황에서, 믿음을 통하여 칭의를 받은 사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적인 할례가 결코 구원의 표가 되는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칭의가 주어진다고 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3:6~7)" 그렇다. 이 말은 아브라함이 칭의를 얻게 된 데에는 그가 행했던 어떤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육체에 할례를 행해야 비로소 사람이 칭의를 받는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오히려 믿음을 통하여서 칭의가 주어진다고 말한 것이다. 

 

7. 아브라함의 칭의는 그가 처음 믿었던 것으로서 온전한 것이었는가?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의 칭의에 대해서 아주 얄팍한 논리에 그만 함몰되어 빠져나오지 못한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칭의를 잘못 이해하여 믿음만 있으면 자신은 이미 칭의를 받은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던 것처럼, 자기들도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믿고 있다면, 이미 의롭다 여김을 받은 상태에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처음 믿을 때에 주어졌던 칭의가 과연 장차 복을 얻기에 합당한 칭의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칭의는 그 뒤에 따라오는 "회개"와 "순종"을 통해 비로소 온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칭의를 얻게 된 것은 창세기 15장에 나온다. 하지만  이내 그의 칭의는 흔들리고 만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ㅎ한 채, 자신의 육체를 따라 범죄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무려 13년동안이나 떠나신다. 그것이 바로 창16장과 17장에 걸쳐 나온다. 그리고 드디어 창세기 22장에 갔을 때에, 비로소 아브라함은 자신의 순종을 통해서 그의 믿음이 온전하다는 것을 인정받게 된다. 그렇다면, 창세기 15장에서 22장에 이르기까지 아브라함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이것을 알아야, "시작으로서의 칭의"와 "과정으로서의 칭의" 그리고 "완성으로서의 칭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 이제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의 칭의과정을 살펴보자. 

  창15장을 보자. 여기에는 먼저 시작으로서의 칭의가 나온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나이 84세 때에 일어났다. 그가 부름받을 때의 나이가 75세였으니, 9년여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하지만 처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바 "네가 나를 따라온다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창12:2)"는 하나님의 약속은 도무지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양자를 들이려고 하였다. 자기집에서 낳고 길러진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양자로 들이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은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오로지 아브라함의 몸에서 태어나는 자라야만이 "네 씨"라고 일컬어질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 캄캄한 밤 중에 유난히 반짝이는 별들을 보여주면서, 하나님께서는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이러한 하나님의 그 말씀을 고대로 믿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겨주셨다(창15:6). 이것이 아브라함에 있어서 칭의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창16장에 가면 그가 금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범죄하게 되었다는 것이 나온다. 왜냐하면 그 뒤 1년이 지났지만 그래도 자식이 없자, 아내 사래의 말을 듣고 사래의 여종 하갈을 데려다가 자식을 낳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래서 낳은 자식이 이스라엘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뒤 13년동안 아브라함을 만나주지 않았다. 그가 잘못 행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13년이 지나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다. 그 이야기가 창17장에 나온다. 그리고는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누군지를 소개하신다. "나는 엘샤다이(전능자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 이는 하나님께서 못하실 것이 있겠느냐는 말씀이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인간적인 생각을 생각해내어 네 후손을 억지로 만들었다. 그것은 나를 전능자로 믿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러나 이제부터 네가 진정 네 잘못을 깨닫고 나를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고 따라오려고 한다면 너는 네가 잘못한 것에 대해 회개를 표시를 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네가 실수하고 잘못했던 도구로 사용했던 네 고추의 끝을 잘라내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할례의 시작이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한 것을 두고 해석하기를, 아브라함이 그때 할례를 받은 것은 그가 무할례시에(84세 때에) 믿음으로 받았던 의가 비로서 인쳐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했다(롬4:11). 그리고 그가 할례를 받은 것은 그가 육의 몸을 벗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하였다(골2:11). 이는 유대인들에게는 할례였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례와 같은 것으로 회개의 표시라는 것이다(골2:12). 고로 그때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그가 받은 칭의에 허물어뜨리는 죄를 지은 것에 대한 회개의 표시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믿음을 가져서 칭의를 얻은 자라도 다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과 다시 죄를 짓게 되면 회개를 통해서 다시 칭의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회개의 표시로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뜻에서 자기 집안의 식솔들 중에서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한꺼번에 다 할례를 시행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 그러한 일은 자기가족을 몰살의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었으나 그는 그러한 일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을 시행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창1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아브라함의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성취될 것인지를 말씀하신다. 처음에 희미했던 것이 이제 점차로 확실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람의 모습을 한 채 두 명의 천사들과 함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다. 그리고 그분은 두 명의 천사를 소돔과 고모라성으로 보내신다. 그리고 홀로 남아서 아브라함에게 드디어 아브라함의 자손이 어떻게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될 것인지를 들려주신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다시 오심으로 태어나는 아들을 통해 성취하시겠다는 것이었다. 즉 "내가 내년 이맘 때에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0)"고 하신 것이다. 그러자 사라가 장막문 뒤에 있다가 속으로 웃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나이는 이미 89세, 남편의 나이도 이미 99세가 되어 소망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사라의 반응을 아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4)" 그리고 다시 1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런데 정말 사라에게 아들이 생겨졌고 아들을 낳게 된 것이다. 그가 바로 이삭이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아는가? 그 모습이 창세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요한복음 8장에는 나온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기뻐 소리쳤으며)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그랬다. 그때 아브라함은 이삭이 태어난 것을 보면서 뛸듯이 기뻐하며 즐거워했던 것이다. 왜 그랬는가? 그것은 이삭을 보아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시 자기에게 오셨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아들로 다시 오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믿음에 관한 예표였다. 다시 말해, 그때 아브라함이 낳았던 이삭은 예수님에 관한 예표였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때가 차매 여호와께서 아들의 모습으로 오셨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그 말씀이 성취가 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여호와께서 아들로 오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아들로 오실 때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성취되고 그 약속을 따라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비로소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잘 몰랐던 것이다. 아들이 오심으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성취될 것이고, 그 일로 말미암아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가 탄생하게 될 것임을 당시의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브라함은 나에게 이렇게 하지 않았느니라(요8:40). 아브라함은 여호와가 올 때에 그렇게 기뻐하였으며 환영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제 그 여호와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왔는데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탄식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최초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비로소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창22장의 사건으로 가보자. 그리고 시간이 다시 흘러 적어도 25년 내지는 37년의 시간이 흘러갔다(이것은 학자들마다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성년이 된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에 올라가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주저함없이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 아들을 묶어 칼로 아들의 심장을 찌르려고 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급히 천사를 보내 아브라함을 막아섰다. 그리고 놀라운 약속을 주셨다. 그것은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들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기 때문이니라(창22:16~18)"고 하신 것이다. 그랬다. 아브라함은 비로소 그의 한 명의 씨를 통해서 복을 받게 될 것이고, 천하만민도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것이다. 그러자 그후로는 아브라함을 더이상 시험하지 않으셨다. 

 

8.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처음에 그는 자기로 말미암아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며 자기가 큰 복을 받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땅의 모든 족속들까지도 복을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창12:1~3). 그러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실현될 것인지는 잘 몰랐다. 그러나 도저히 아들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하셨다. 그리고 하늘의 별을 보여주셨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것을 그대로 믿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축복해주었다. 그 믿음을 의롭다고 여겨주신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때 가졌던 믿음은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이내 불신앙적인 행동을 통해 다른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이스마엘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13년동안 그를 떠나셨다. 그리고 다시 오셔서 그에게 회개라고 하셨다. 그것의 표시는 바로 "할례"였다. 그는 이제 두번 다시 자신의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않을 것임을 육체에 새겼다. 그리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따르겠노라고 할례를 행했다. 그러자 비로소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아들을 약속해 주셨는데, 그 아들이 태어나면 여호와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오신 증거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이삭이다. 그때 아브라함은 회개를 통하여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복을 받게 되고 천하만민도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고로 이때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다시 오셔서 아들로 태어나심으로 모든 인류에게 복을 주실 것임을 그가 믿은 것이다. 그리고 아들 독자 이삭을 바치려 함으로 그것은 더욱 온전해졌다.

  그러므로 사도바울도 갈라디아서 3장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믿었던 약속은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뜻을 이룬다는 약속이었음을 언급한다. 그리고 그 약속은 여러 후손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씨 곧 그리스도를 통한 것이라고 언급한다(갈5:16). 그렇다. 사람이 처음 믿었을 때부터 그 믿음이 온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수를 통해서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다시 믿음은 회복된다. 회개할 때 믿음이 온전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순종을 통해서 그것은 확실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처음 믿었을 때 복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출발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칭의를 얻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 이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회개를 통해 온전한 믿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순종을 통해 확고해져야 한다. 이런 자들이 믿음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자들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자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9. 나오며

 우리는 언제부턴가 믿기만 하면 구원얻는다는 잘못된 교조주의 신앙에 빠져버렸다.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데만주의(Sandemanism)도 바로 그러한 인식론적 구원론의 하나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정립할 때가 되었다. 회개가 동반되지 않은 믿음은 사실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순종으로서 표현되지 않은 믿음은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처음 믿었던, 시작으로서의 칭의를 마치 구원인량 받아들인채, 자신은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구원받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위로하고 있다. 그러나 아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했던 야고보서의 말씀을 상기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 믿음에 있는가 우리의 믿음도 날마다 점검되어져야 한다다. 사실 우리는 예수께서 믿음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고 예수께서 칭의를 어떻게 말씀하셨는가를 더 주목했어야 했다. 하지만 쉽게 믿고 쉽게 천국가고 싶어서, 예수님의 말씀은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주의 종들도 교인들을 많이 확보하기 위해 오직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값싼 복음을 전파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 그 결과들이 나타나고 있다. 입술로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는 주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코로나로 인하여 교회마다 비대면 예배로 전환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과연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아니 두렵기도 하다. 앞으로는 믿음없는 자는 점점 더 주님으로부터 멀어져갈 것이다. 없는 자는 있는 것 까지 빼앗기고 말 것이다. 오, 그날이 이렇게 쉬이 찾아올 줄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는 지금 시험대에 놓여있다. 이 시기에 어떻게 자신의 신앙을 지켜나갈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한 채 미적미적거리다가는 세상사람으로 전락하기 딱 쉬워졌다. 큰 일이다. 정신차려야 한다. 그라기 위해서는 지금 나의 상태를 점검하고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의 상태를 정상적으로 회복시켜야 한다. 그래서 언제라도 죽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주님이 오실 날이 머지 않은 것 같다. 

 

2020년 08월 26일(수)

정병진목사

오늘날 우리는 늘 바울을 "사도바울"이라고 부른다. "사도베드로"라는 말은 잘 사용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제 늦깎이로 들어온 바울이 어떻게 감히 수석사도인 베드로를 면전에서 책망할 수 있었던 것일까? 현재 생각해보아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바울이 교만해서 그렇게 한 것일까? 그는 자신이 너무나도 작은 자요 늦깎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복음의 진리를 지켜내기 위한 그의 단호하고도 목숨건 투지와 각오를 보라. 그는 왜 그러한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인가?

2020-08-19(수) 수요기도회
제목: 갈라디아서강해(03) 예루살렘 총회 참석과 베드로의 책망사건을 통해 인정받게 된 바울의 사도직(갈2:1~21)
https://youtu.be/lnmBHbrY8tU [혹은 https://tv.naver.com/v/15339315 ]


 

1. 들어가며

  바울에게 있어서 아킬레스건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그가 어린양의 12사도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그를 대적하는 모든 자들은 끊임없이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가 전한 복음까지도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호도하였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얼마나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의 사도직이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를 변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야만이 자신이 전한 복음을 믿고 성령받아 구원받은 이들을 지켜낼 수 있었고, 미혹받은 성도들을 건져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은 지난 시간에 이어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변호에 대해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더불어 그가 받았던 복음진리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갈라디아서 2장은 대체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가?

  갈라디아서 2장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첫 부분(갈2:1~10)에는 바울의 예루살렘 총회 참석과 디도에 대한 할례요구 거부 및 바울의 이방인 사도직에 대한 공식입장이 들어 있다. 그리고 둘째 부분(갈2:11~14)에서 베드로의 책망사건을 통한 율법주의적 잔재에 대한 지적을 다루며, 셋째 부분에서는 이신득의의 절대성과 확실성 및 율법회귀로의 부당성(갈2:15~21)에 대해 언급한다. 

 

3. 바울은 왜 예루살렘총회에 왜 가야만 했는가?

  바울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의 방문은 총 5차례 있었다. 그중에 첫번째 방문은 지난 번에 살펴 보았듯이 그가 회심한 후 3년만에 있었다. 그는 아라비아로 갔다가 예루살렘을 다시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는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를 만나 자신의 회심과정을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예루살렘의 성도들과 장로들과 사도들이 바울을 접촉하기를 꺼렸지만, 이내 바나바의 중재로 인하여 베드로와 야고보가 바울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15일간 함께 있으면서 자초지종을 함께 나누게 된다. 그리고 그의 두번째 방문은 구제헌금 전달 이유 때문이었다. 사도행전 11장에 보면, 제1차로 예루살렘을 방문한 후 바울은 자기의 고향 길리기아 다소로 간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대한 핍박으로 인하여 흩어진 유대인들이 안디옥에 가서도 복음을 전하는데, 그들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헬라인(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한다(행11:19~20). 그런데 구브로와 구레네의 몇몇 사람들이 안디옥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개종하고 주님을 믿게 되는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그러자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구브로 출신의 레위족이었던 요셉이라는 사람 그리고 자기의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바쳤던 바나바(행4:36~37)를 그곳의 교역자로 파송한다. 그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행11:24). 그런데 더욱 사람이 많이 몰려오자 과거에 바울을 만난 적이 있던 바나바는 안디옥에 가서 바울을 데려다가 같이 사역을 한다. 그러던 중 로마황제 글라우디오 때에 선지자 아가보의 예언대로 천하가 큰 흉년이 들었는데, 그 때 예루살렘교회에도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그러자 바울과 바나바는 구제헌금을 마련하여, A.D.46년경  그것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기 위해 두번째로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세번째 방문은 복음의 진리를 파괴하고 있는 "거짓형제들" 때문이었다(갈2:4). 안디옥교회와 그리고 바울이 개척한 갈라디아의 교회들에 가만히 몰래 들어온 거짓 형제들(유대율법주의자들이면서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라도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 한 분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유대인들처럼 할례도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했다. 그때 바울은 충분히 복음의 진리로 그들을 훈계할 수도 있었겠지만, 사도권까지 문제삼고 있는 그들에게 바울의 사도직과 바울이 전한 복음이 합당하다는 것을 알게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자 바울은 그 문제를 예루살렘 교회로 가지고 가서 논의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된다. 그때 바울은 바나바와 헬라인 디도 및 몇몇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 안에 있는 이들 중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방인에게도 자기들처럼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도들의 대표자였던 베드로가 일어나, 자기가 일전에 보았던 보자기환상과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고넬료가정에 말씀을 전했을 때, 말씀듣는 중에 이방인들도 성령을 받는 것을 보면서,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나 상관없이 주 예수님을 믿을 때에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행15:7~11). 그러자 예루살렘회의 장로들의 대표이며, 예루살렘 총회의 대표격이었던 예수님의 친동생 야보고가 일어나 말하기를, 이방인이 주께 돌아온다면, 그들에게 자기들처럼 율법의 멍에를 두어 그들을 괴롭게 하지는 말고, 다만 그들이 사는 지역에도 율법을 전하는 자가 있고 율법말씀을 아는 자가 있으니, 이방인들에게는 4가지 정도만 주의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것은 우상의 제물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는 것었다. 결국 온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 모두는 야고보 안을 채택하고는, 그 소식을 예루살렘교회의 선지자였던 유다와 실라를 바울 편에 딸려보내 안디옥교회에 파송한다. 이것이 바울의 3차 예루살렘 방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마친 후에 잠깐 예루살렘에 들렀으며(4차방문), 그리고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는 일부러 예루살렘에 들르게 되는데(5차방문), 이것이 바울의 4차방문(A.D.52년)(행18:22)이며, 5차방문(A.D.58년)(행21:17~26)이다. 

 

4. 바울은 왜 예루살렘 총회 때에 헬라인이었던 디도를 굳이 대동하려 했는가?

  그런데 바울은 왜 예루살렘 총회에 방문할 때에, 굳이 헬라인이었던 디도를 데리고 간 것일까? 그런데 "디도"는 바울이 자신의 아들같이 여긴던 동역자였다. 바울은 훗날 디모데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했지만, 그 이전에는 디도를 자신의 참 아들이라고 불렀다(딛1:4). 이때 바울이 예루살렘에 데리고 간 디도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디도서"의 저자다. 그는 헬라인 곧 이방인으로서 안디옥교회에서 사역자가 된 사람인데, 먼저는 고린도교회에 파송을 받고 사역한 자였으며, 그후에는 그레데 교회에서 사역하였고(딛1:5), 마지막으로 달마디아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파한 사역자다(딤후4:10). 이때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디도를 고린도교회의 훌륭한 사역자로서 소개하는데, 그때 바울은 "그는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고후8:23)"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는 이방 헬라인이었다. 그는 할례받지 아니한 이방인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이다. 고로 바울이 그를 예루살렘총회에 데려간 이유는 할례를 받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바울은 자신이 있는 곳이 비록 예루살렘일지라도 디도로 하여금 억지로 할례를 받지 않게 하였다. 그 이유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할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보게 함이었다. 그때 바울은 예루살렘의 유력한 자들(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같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 은 따로 불러 사정을 이야기했는데, 실은 아무도 디도의 할례문제를 지적하지 않았으며 그를 억지로 할례받게도 하지 않았다. 그 일로 인하여 바울은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아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약속에 참여한 자가 될 수 있음이 확증될 수 있었던 것이다. 

 

5. 유대율법주의자들인 거짓형제들은 왜 이방인 교회들에게 침투하려고 했는가?

  유대율법주의자들이면서 믿는 자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구원받을 수 없고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자들 중에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도 성령을 받고 은혜를 받게 되자, 이방인들이 너무 쉽게 성령을 받는 것에 대해서 미움과 질투심이 일어난다. 이방인들이 너무나 쉽게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되기 때문이었다(갈2:4). 그러자 율법주의자였던 거짓 형제들은 이방인일지라도 자기들처럼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고 싶어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파한 지역의 교회들을 찾아다니면서 "다른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갈1:6~9). 그때 그들이 사람들을 쉽게 속일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과연 사도로서 합당한가 하는 질문이었고, 바울이 전한 복음이 과연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전했던 복음과 일치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으로 속여 바울이 전한 복음은 어린양의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과는 다르며, 바울의 사도직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자 바울은 일부러 믿는 이들의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2가지 문제 곧 할례행함과 모세율법 준수 문제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서 확답을 받아오려고 하였다. 

 

6. 바울이 왜 예루살렘 총회에 가서 바울 자신이 전파한 복음이 합당한 것인지를 검증받으려 했는가?

  사실 바울은 자신이 전했던 복음이나 자신이 받은 사도직은 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므로, 꼭 누구의 동의나 인증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저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전한 복음이 참되고 순수한 진짜 복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2장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한 자들(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같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복음전파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자들이라고 했다(갈2:6a). 하나님은 사람을은 결코 외모로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자신의 뜻에 따라 사람을 불러내어 쓰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루살렘교회의 유력한 자들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서 더 이상 다른 것을 요구한 일이 없었다고 분명하게 말한다(갈2:6b). 그 이유는 양쪽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예루살렘교회의 대표격인 베드로가 할례자의 사도로 부름받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것같이, 안디옥교회의 대표격인 바울 자신도 역시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름받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기 때문이다(갈2:7~8). 그래서 예루살렘교회의 기둥같은 자들인 야고보와 베드로(게바)와 요한도 바울에게 주신 은혜와 사역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에, 서로 따뜻한 친교의 악수를 하면서 바울의 이방선교사역을 인준해 준 것이다(갈2:9). 다만 예루살렘교회의 유력한 자들이 바울에게 부탁했던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힘써달라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바울도 기꺼이 동의해주었고 또한 열심히 그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 갈라디아서에서 써놓았다(갈2:10). 

 

7. 바울의 사도권이 모든 교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무엇이었는가?

  사실 바울이 ''사도'인 것과 그가 전한 복음이 진짜라는 것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먼저는 결과물인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즉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었던 자들이 결국에는 성령을 받게 되었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율법준수와 할례문제에 있어서는 예루살렘총회에서, 오직 은혜로서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받는 것이 결정됨으로 인하여 또한 확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의 사도권과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이제 누구든지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바울의 사도권 및 바울이 전한 복음이 하나님의 진리에 속한 것임을 드러내주는 사건이 하나 터진다. 그것은 바울이 베드로를 그의 면전에서 책망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갈2:11~14). 그런데 이러한 일은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일컬어,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사도들 중에서도 가장 작은 자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잔혹하게 핍박하였기 때문이다(고전15:8~9). 그런데도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만 베드로 사도를 책망하는 일이 생겼던 것이다. 그것은 베드로가 복음진리에서 그만 현저히 벗어나는 행동을 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A.D.49년 예루살렘총회 이후, 약 A.D.52년경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출발 직전에 하나 사건 때문에 발생했다. 그것은 베드로가 안디옥교회를 방문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그런데 그때 할례파였던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에게서 온 이들이 안디옥교회에 도착하자,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던 베드로가 슬금슬금 그 자리를 피해서 물러갔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것을 지켜보던 남은 유대인들도 베드로의 외식에 물들어 그 자리를 피해버렸고, 심지어 안디옥교회의 지도자였던 바나바도 역시 베드로의 행동을 따라 함깨 행동하고 말았다. 그러자 바울은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의 면전에서 즉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그를 책망해버린 것이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이방인과 함께 지냈으면서, 이제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이방인들을 떠나 멀리 하려고 하느냐"고 한 것이다. 그것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한 형제와 자매된 것을 깨뜨리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때 베드로는 분명하게 자신의 입장을 취해야 했다. 예루살렘 총회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는 순간적으로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말았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지에 관한 계시를 분명하게 제시하기 시작한다. 

 

8.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바울이 그토록 목숨걸고 전하려 하였고, 위대한 어린양의 수석사도였던 베드로를 책망하면서까지 전하려했던 "복음의 진리"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요약하면 갈2:16의 말씀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도 이 말씀 때문에 중세의 잘못된 구원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그렇다. 사람이 의롭게 되어지는 것은 율법을 지킨 결과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하여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로 따진다면 이 세상 사람 어느 누구도 의롭게 될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율법을 지키다가도 어느 조항 하나만 지키지 못해도 그 사람은 율법을 지키지 못한 자가 되기 때문이다(약2:10~11). 고로 바울은 사람은 어느 누구도 율법의 모든 조항들을 지킬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은 것이라고 했다(갈2:21). 왜냐하면 지킬 수 있는 율법으로 인하여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었다면, 굳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없었으며, 그분이 우리의 죄값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다른 것으로 의롭다함을 받으려 하는 모든 시도는 결국 율법의 저주 가운데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기억할 것은 "믿음"이라는 단어가 단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우리들의 지적인 동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다음주에 더 자세히 공부해보기로 하자.

 

9. 나오며

  우리는 바울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감탄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특히 어린양의 수석 사도였던 베드로 앞에서도 바울이 굽히지 않고 복음의 순수성을 변호하는 장면이야말로 그가 얼마나 성령의 사람이었고 순전한 복음의 사람이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는 사람이 어떻게 되어서 의롭게 되는 것이며, 어떻게 해야 구원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복음에 대해서는 이랬다 혹은 저랬다는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처음에 그리스도로부터 받았던 참된 복음의 계시를 초지일관 그대로 붙들고 살았으며, 그것과 씨름했고 그것을 전하기 위해 몸부림쳤으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았던 위대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할례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예루살렘교회는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없어졌지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안디옥교회는 유럽과 미국을 거쳐 한국에까지 교회를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오로지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고 그것을 사수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사역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것이 한국에까지 복음을 전해주었던 하나님의 뜻이자, 이 시대에 마지막으로 남겨진 사명이 아닐까 한다. 

 

2020년 08월 19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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