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는 참으로 특별한 사람이다. 그는 500세가 되도록 자녀를 낳지 않고 지냈다. 그리고 500세 이후에 세 명의 아들들만을 낳았는데, 그 후로 또한 자식을 낳지 않았다. 이런 일은 그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는 일이었다.
노아는 약 7-80년동안 방주를 지었고 홍수 이후에 땅으로 내려올 때까지 그는 세상에 아주 없는 의인으로 살았으며 당대에 완전한 자로 살았다. 하지만 방주에서 땅으로 내려와 땅을 개간하고 살던 어느 시기에 그는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을 자식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포도주를 먹고 그만 하체를 다 드러낸 채 잠을 자다가 둘째아들 함에게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함은 그때 어떻게 했을까? 그가 본 것을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도록 막고 다른 조치를 취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는 아버지의 행위를 유심히 지켜보고는 그의 형제들에게 고발하고 말았다.
하지만 셈과 야벳은 어떻게 했는가? 그들은 그 소식을 듣고는 뒷걸음쳐서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드리고 나온다.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가리어주었던 것이다.
잠에게 깨어난 노아는 자식들이 한 일을 듣고는 함에게 다른 두 형제의 종이 될 것을 선포했고, 셈에게는 영적인 축복을, 야벳에는 땅에서 지경이 넓혀지고 잘 되는 땅의 축복을 선포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라. 함이 그렇게 말한 것은 거짓말이었는가? 아니면 모함이었다고 보는가? 아니다. 함은 있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함은 자신의 아들 가나안과 더불어 저주를 받았다. 당시 함의 넷째아들 가나안도 직간접으로 그 일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고 노아가 술에 취하여 벗거벗은 행동은 잘 한 행동이라고 보는가? 이제 자신의 사명이 끝났으니 맘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인가? 이제는 절대로 물로 심판받을 일이 없어졌으니 적당히 세상 것을 즐기며 살아도 된다는 이야기인가? 육체의 쾌락을 위해 살아도 된다는 말인가? 포도주를 마시되 대낮부터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셔도 된다는 말인가? 자식들 앞에 수치를 다 드러내어도 된다는 말인가? 결코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서 노아의 입술을 통해 예언적으로 말씀을 선포케 하셨다. 그런데 그 선포된 말씀은 지금까지 그대로 응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자녀가 어떻게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버이 공경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은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자녀는 과연 어떻게 부모를 공경해야 옳은가? 사실 부모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존재요, 나 자신의 존재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존중해드려야 할 대상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 어떤 조건도 없이 오직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고 있다(신5:16).
문제는 부모가 자녀의 보기에도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때에 어떻게 하느냐이다. 자신의 부모가 공경받을만한 분이라면 자신의 부모를 공경하지 않을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노아처럼 자식앞에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때에 자식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부모가 자식 앞에 보이지 말아야 할 추태를 보일 때에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부모의 수치를 가리워주고 덮어주는 데까지 해야 한다(잠17:9). 둘째아들 함처럼 부모의 부끄러운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떠벌리는 것은 결코 부모를 공경하는 모습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하면 부모의 인격과 권위는 엄청나게 손상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함의 실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왜 함이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2가지 잘못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는 먼저 아비의 권위를 존중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를 늘 눈여겨 보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실수하자마자 그것을 빌미로 형제들에게 아비의 행위를 고발함으로써 아버지는 더 이상 아버지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발설했다. 이제는 자신의 아비가 그 집안의 주도권을 쥐어서는 아니되며 이제는 아들들이 그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비의 실수가 나오자마자 그것을 고자질하여 부모를 떠밀어내고자 했다. 둘째, 함은 자신은 아비보다 더 의롭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나같으면 저런 볼썽 사나운 짓을 하지는 않았을텐데..." 그러나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떼어내어라고 한다. 누구든지 선 줄로 생각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한다.
공경이란 아비의 허물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덮어주는 것이다. 그것을 누설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 일을 자기를 돌아보아 자신의 더 큰 잘못을 행하고 있음을 회개하고, 아버지의 권위를 끝까지 인정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공경이요 믿음의 태도이다.http://youtu.be/o2fUcWfELUQ

  악한 자들은 과연 어떤 자들을 악한 자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것을 주님께서는 어떻게 받으실까? 오늘 요한복음 11장 45부터 12장 11절까지의 말씀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함께 제공한다.
  오늘 본문(요11:45-12;11)은 예수께서 공생애 말기에, 이제 마지막 유월절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어떻게 되어서 예수님에게 체포령이 내려졌는지와 아울러 향유를 허비한 마리아의 도유를 예수님은 왜 칭찬해주셨는지에 대한 말씀이다.
  먼저, 예수께서는 분명히 죄가 없으신 분이셨고 또한 산헤드린공회로부터 어떤 정죄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되어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는지부터 살펴보자.
  예수님의 표적행하심은 사실 수많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자 보라. 38년된 중풍병자를 치유한 것도 엄청난 기적인데 그분은 나면서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였으며, 심지어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까지 살리셨다.
  하지만 그러한 표적행하심은 그때까지 자신들의 말 한 마디로 천국도 보낼 수 있고, 지옥에도 보낼 수 있었던 무소불위의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분노와 시기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찌하든지 예수님을 책잡아 죽이려 모의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때 산헤드린 공회의 회장인 가야바가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을 죽이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겠는가! 생각해보라. 한 사람이 죽어 모든 민족을 죽게 하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죄는 없지만 예수께서 죽어 주어야만 자신의 민족이 평안해질 것이기 때문에 그분을 죽여야 한다는 말했다. 어찌 유대의 최고사법기구 산헤드린공회가 이러한 불법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악한 자 가아뱌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렇다. 뱀의 혀를 지녔던 가아바는 산헤드린의 욕심을 시행하도록 합당한 명분을 제시한 것이다. 그렇다. 악한 자들이란 오직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어떤 방법이든지 다 동원하는 자들을 일컫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집단의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가아바의 방향 제시는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가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일로 인해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당했으며 대대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악한 자들을 사용해서 오히려 당신의 섭리를 이뤄가시기도 하신다. 왜 그런가? 가아바의 예언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죽으실 수 있는 길이 열려졌기 때문이다.
  한편, 유월절 엿새전 유다의 베다니에서는 뜻밖의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자신의 오빠를 살려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예수님을 대접하려 했던 마르다의 집에서 일어났다. 그때 마리아는 엄청나게 값비싼 향유를 깨뜨려 그것을 전부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렸다. 기름은 예수님의 머리에서부터 몸을 타고 흘러내렸고 나중에는 발까지도 흘러내렸다. 그러자 마리아는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린다.
  갑자기 일어난 광경에 제자들은 어리둥절했다. 정신을 차린 그들은 그것을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여인의 헌신을 기쁘게 받으셨다. 그리고 그것은 낭비가 아니라고 하셨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예비한 행위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죽으신 후에 향유는 더 이상 필요없기 때문이다. 부활은 시신 자체를 없애버렸다. 그러니 향유가 있더라도 무엇이 소용이 있었겠는가? 마리아는 자기를 잘 알지 못했던 사이에 예수님의 육신의 장례를 치러준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외롭고 힘든 길을 걸어가고 있던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부어드림으로 예수님의 슬픔을 대신했던 것이다. 그렇다. 주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헌신이라면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지 그것을 기쁘게 받으시며 칭찬해 주신다. 우리도 주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이 되어 보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 어떤 존재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사랑스러운 존재이다(사43:4). 왜냐하면 그분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에 처음부터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이며(창127~28),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의 목숨의 내놓셨기 때문이다(롬5:8).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위해 자신을 그토록 희생하신 것일까? 그리고 그분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첫번째로 살펴볼 것은 하나님께서는 왜 죄인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요일3:1에 보면 요한사도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히려 감탄사로서 그 답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요일3:1)" 그렇다. 그분은 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던 것일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에게 날마다 물어보아야 한다.
  그런데 제가 찾아낸 답이 하나 있다. 그것은 성령께서 제 마음 가운데서 떠오르게 한 영화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1998년에 나온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에서다. 거기에 보면, 2차세계대전 중 연합군 소속의 밀러라는 대위가 등장한다. 안타깝게도 그는 2차대전을 치르면서 무려 94명의 부하들의 죽음을 자신의 눈으로 목도한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에 그들의 죽음 앞에 자신의 해답을 찾아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부하 94명의 죽음으로 인하여 20배의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으니 나는 지금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어!" 그런데 어느날 그에게 놀라운 특명이 내려진다. 그것은 2차대전 중에 4명의 아들 중에서 3명의 아들들을 잃어버린 어느 과부의 막내아들을 찾아내어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것이었다. 밀러 대위는 죽음 앞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한 상사와 몇몇의 부하들을 데리고 적진의 한 복판으로 이동한다. 목적은 한 가지다. 제임스 라이언 일병을 찾아내어 안전하게 집으로 귀가시키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일병을 찾으러가면서 또 부하들을 잃게 된 대위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되묻는다. "정말, 다른 대원들을 희생시켜서라고 이 라이언 일병을 구출해 내는 것이 과연 가치있는 일인가?" 천신만고 끝에 라이언 일병을 찾아내지만, 그는 도리어 다른 동료들을 놔둔채 그 전쟁터를 떠날 수 없다고 한다. 결국 라이얼 일병과 함께 남게된 밀러대위는 적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는데, 그때 그는 전사하게 된다. 그런데 그가 죽어가면서 라이언 일병에게 남긴 말이 무엇인 줄 아는가? "라이언, 꼭 살아서 돌아가! 그리고 잘 살아야 해! 너를 구하기 위해 나의 생명과 같은 대원들이 희생됐어! 그러니 내 몫과 그들의 몫까지 살아줘!"
  그렇다. 왜 주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그토록 희생하신 것일까? 그것은 오직 한 가지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 목숨을 주고 우리를 구원해 준 만큼 우리가 거기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주기를 바래서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분의 희생에 누가 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낭비해서는 아니 된다. 우리 자신을 죄에 방임해서도 아니된다. 주님께서 어떤 목숨을 주고 바꾼 것인데 함부로 써서 되겠는가? 이제부터는 우리 자신을 결코 함부로 내팽개친 상태로 살자 말라. 자신의 인생을 쓰레기처럼 만들지 말라. 그분의 희생이 헛되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죄에게 함부로 자신을 맡기지 말라. 오히려 우리는 거룩하고 흠없는 삶을 통해 그분의 희생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를 향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희생하신 주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말한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범한 우상수애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4:3)"
  그런데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개가 토한 것을 도로먹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눕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이제는 그렇게 살지 말라. 주님의 목숨을 그렇게 값어치가 없게 만들지 말라. 그분의 희생을 욕되게 하지 말라. 그러라고 주님께서 당신의 고귀한 목숨을 내놓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는 더이상 방탕한 삶에 자신을 내어맡기지 말라.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라. 그분의 목숨에 비례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후 제임스 라이언은 50년이 지난 뒤 밀러 대위의 무덤을 찾아서 이렇게 말한다. "대위님, ㄷ리에서 하신 말씀을 매일 생각했죠? 최대한 잘 살아보려고 노력했고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최소한 대위님의 눈에 대위님의 희생이 헛되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여보, 나 어떻게 살았지? 훌륭히 살아왔다고 말해줘!" "당신은 훌륭해요" 우리도 이런 말을 주님께 다시 되돌려 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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