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바울의 동역자였던 데마는 왜  감옥에 갇혀있던 바울을 버리고 떠나갔을까?(몬1:23~25)_2020-01-07(화)

https://youtu.be/fUrtZFsvAZU

 

1. 사도바울은 골로새교회의 지도자였던 빌레몬에게 편지를 쓸 때에 누구와 함께 문안인사를 했나요?(몬1:23~24)

  사도바울은 골로새교회의 지도자였던 빌레몬에게 편지하면서, 자신과 함께 갇혀있는 에바브라와 또한 자신의 동역자 마가(요한),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와 함께 문안인사를 했습니다. 특별히 여기에 나오는 "에바브라"는 사도바울로부터 파송을 받아 골로새교회를 세웠던 인물입니다(골1:7~8).

 

2. 사도바울이 골로새교회에게 직접 보냈던 편지 가운데에는 누가 같이 문안인사를 하고 있나요?(골4:10~14)

  사도바울이 골로새교회에 직접 보냈던 골로새서를 보면, 바울은 아리스다고, 바나바의 생질 마가, 유스도라하는 예수, 에바브라,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 데마가 문안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빌레몬서와 골로새서의 인사에 등장하고 있는 데마는 대체 누구인가요?(몬1:24, 골4:14. 딤후4:10)

  데마가 어떤 인물인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2가지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을 때에 바울의 선교사역을 힘써 와주었던 동역자였다는 사실입니다(몬1:24). 둘째, A.D.62년경 바울이 빌레몬서와 골로새서를 쓸 때만 해도 바울의 동역자라고 불리던 데마였지만 그 그만 4~5년이 지난 후에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떠나갔다는 사실입니다(딤후4:9~10). 그런데 그가 데살로니가로 갔다는 말이 덧붙혀진 것을 보면 그의 고향이나 그가 가고자 했던 장소가 데살로니가였음을 가히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4. 데마는 왜 바울을 버렸나요?

  데마는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을 때에, 선교사역에 동참했던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4~5년 정도 지나자 그는 이 세상(현 세대)를 사랑한 나머지 그만 바울을 버리고 떠나 버리게 되었습니다. 빌4:2~3에 의하면, 빌립보교회가 세워질 때에 분투했던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일컬어 사도바울아 자신의 동역자라고 말했고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선교사역에 동참하여 헌신하였던 데마의 이름도 하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한 데마가 그만 바울을 버리고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의 곁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가 바울의 곁을 떠났다는 것은 바울의 선교사역에 더이상 동참하지 않고 현 세대가 좋아서 세상을 향해 가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5. 데마가 바울을 버린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영적 비밀은 무엇인가요?

  데마가 바울을 버리고 간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첫째는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이라도 결국 세상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에 선교사역을 버리고 세상으로 떠나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번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이라도 그의 이름이 지워질 수도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계3:5). 둘째, 사람이 영원한 구원을 받았어도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에베소교회에 믿음이 파선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디모데전후서는 A.D.62년경 에베소에서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인데, 여기에 보면, 성경교사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후메내오와 밀레도(딤전1:19~20, 딤후2:17~18) 그리고 부자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알렉산더(딤전1:18~19, 딤후4:14)가 믿음에 파선하였다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도 어떤 사람들이 후일(뒤의 결정적인 시기)에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라갈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러한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딤전4:1). 그렇습니다. 이미 구원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도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하여 주님의 곁을 떠나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단의 가르침을 따라 믿음에서 떠나갈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과 소망으로 이미 영원한 구원을 받은 상태에 있지만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세상의 유혹이 온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유혹을 과감히 뿌리치며 이단적인 가르침에 동조하거나 그러한 가르침을 절대 따라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020년 1월 7일(화)

정병진목사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라는 질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질문이며 구원론에 있어서 첨예하게 서로 대립하고 있는 질문이다. 이에 그렇다고 말씀하는 분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다. 그럼, 둘 중의 하나는 분명 잘못하고 있는 것인데, 어느 누구도 양보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상충되는 말씀이 있는 것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과거에는 필자도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문구만을 따지고 보면, 문장에 약간 문제가 있어 보였다. 왜냐하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데, 그렇게 해서 받은 구원이라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부로 새롭게 다시 정의해본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영원한 구원으로서 아무 문제가 없지만, 우리의 부주의로 인하여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라고 말이다. 이렇게 구원을 다시 정의하는 그 이유를 오늘 말씀으로 함께 나눠보았다.

2019-08-11(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한 번 얻은 구원은 정말 영원한 구원인가?(히5:9)
https://youtu.be/dJopsXFZeOM


1. 들어가며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 정말 말도 많고 탈고 많은 영원한 주제다. 하지만 이 문제를 반드시 풀고 지나가야 한다.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일평생 신앙생활한 것이 헛될 수도 있으며, 그날 가슴을 치며 통곡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주제를 다시 꺼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동안 증거해 온 말씀과는 좀 다르게 표현하려고 한다. 그것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고 시작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대체 어찌 된 것인가? 그동안 선포해온 명제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다"라고 말해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제 이 주제를 설명해 가면서 그 의문은 자연히 풀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지만 그 구원은 우리의 부주의로 인해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증거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 그럼 케케묵은 물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를 좀더 확실하게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 보자.

 

2.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은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 그렇다. 사실 이 두 개의 질문이 비슷한 것 같지만 비슷하지 않다. 그러니 정 반대의 답이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둘을 어떻게 정확히 연결하여 한 개의 문장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하지만 우리의 부주의로 인하여 구원은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언제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는가?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이 세상에서 늘상 그러는 것은 아니다. 우리 믿는 이들 중에 만약 구원을 잃어버리는 자가 있으면 그는 죽고나서다. 죽은 후에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이지 맨날 구원을 얻었다가 잃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가 거듭나게 되면 거듭나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번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그가 죽는 날까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가 안 되었다가를 반복하지 않는다. 우리 믿는 이들 속에 들어오신 성령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 결코 떠나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3.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구원이라도 잃어버릴 수 있는가?

  그렇다면 위와같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구원이라고 잃어버릴 수 있다는 성경구절이 있는 것인가? 있다.

  첫째,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구절이 성경에 있는지 찾아보자. 그것은 히브리서 5:8~9에 나온다.

히5:8-9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그렇다. 분명히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는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이 근원이 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왜냐하면 구원은 전능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요, 그분이 주시는 구원은 어딘가가 부족하지 않은 완전한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영원하고 완전한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설명해 보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매일 주었다가도 다시 빼았다 하는 구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데 그것을 주셨다가 그 다음날에 또 다시 빼앗아가는 그러한 분이 결코 아니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때에는 완전히 주시려고 주신 구원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으며, 그분이 주시는 구원은 완벽하다. 그리고 그 구원은 우리를 영원히 구원할 수 있는 효력과 능력을 충분하게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러나 영원한 구원을 받았아도 우리의 부주의로 인하여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구절도 있다(요14:16).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쪽에서 주시는 구원만을 생각하고는,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기 때문에 우리가 장차 받을 구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대속사역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그분이 완벽한 구속을 성취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서 이루어놓으신 완전한 구원 자체가 우리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사역은 사실 완전하다. 하나도 흠이 없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 인간편에서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이 상실될 수도 있다. 즉 우리에게 죽은 다음에도 우리가 받은 영원한 구원이 영원히 지속되기도 하고, 죽을 때에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우리가 믿음으로 얻은 구원, 그리하여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떠나가지 아니하는 구원은 시간에 제한이 있다는 것이다. 영원무궁토록 계속해서 지속되는 구원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날까지 유효한 구원인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와같은 사실을 잘 모른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영원한 구원이 믿을 때에 이미 받았기 때문에 그러한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절반을 맞고 절반은 틀린 것이다. 즉 우리가 믿을 때에 받았던 구원은 분명히 영원한 구원인 것은 맞다. 하지만 영원한 구원을 받은 자라도 우리의 부주의로 인하여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는 것이 성경적인 견해다.

  그럼, 언제 우리가 구원을 잃어버리는 일이 발생하게 되는가? 그것은 우리가 죽을 때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갈 때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요한복음 14장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고스란히 나와 있다.

요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이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해야 할 일을 완성하실 때가 되신 것을 아셨다. 그리고 그것을 다 이루시게 되면 주님도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떠나가신다는 말에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이 떠나가는 것이 오히려 제자들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가면 보혜사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요16:5~7). 사실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없을 때에 제자들이 위험이 빠지기도 하였다. 오죽 했으면 바다 위를 건너서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을까? 그것은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는 당신도 육신의 제한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육신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영역을 떠나가는 것이 더 제자들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떠나가시면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터인데, 보혜사 성령은 육체를 지니지 아니한 하나님의 영이시므로, 동시존재하여 제자들과 언제 어디서든 임마누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때 예수께서는 죽고나서 제자들에게 보내주실 성령이 어떻게 그리고 언제까지 제자들과 함께 하실 것인지를 말씀해주셨다. 그것은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그분은 제자들의 영 속으로 들어가 거주하시며,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14:16).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이 사람의 심령 속에 들어오실 때에 거듭 태어나게 되고, 성령은 거듭 태어난 자와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고 했으니, 한 번 얻은 구원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계산법이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에 보면, "영원토록" 혹은 "영원히"라는 문구가, "에이스 톤 아이오나(eis ton aiona)"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영어성경에서도 한글성경의 번역처럼 "forever(영원히)"라고 번역해 놓고 있지만, 실은 그러한 뜻이 아니다. 헬라어에서는 그 문구가 "영원히"라는 문구가 아닌 것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고 있는 "영원무궁하게(forever)"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세세토록(계1:6,18,4:9,10,5:15,7:12,10:6,11:15,14:11,19:3,22:5)"이라는 문구와 "세세무궁토록(롬16:27,딤후4:18,히13:21,벧전5:11)"이라는 문구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세세토록"이라는 문구는 "영원무궁히"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세세토록"이라는 문구는 "영원토록(요14:16)" 혹은 "영원히(요4:14;6:35,58;8:35,51,52,;10:28;12:34)"이라는 문구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세세토록"이나 "세세무궁토록"은 "시대들의 시대들까지"라고 되어있고, "영원히" 혹은 "영원토록"이라는 문구는 "시대들까지"라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4. "영원히" 혹은 "영원토록"이라는 문구(전치사구)는 헬라어로 보았을때, 정확히 어떤 뜻이었는가?

  그럼, "영원히" 혹은 "영원토록'이라는 문구가 헬라어로 어떻게 되어있는지 살펴보자. 그것은 "에이스 톤 아이오나"라는 전치사다. "에이스(eis)"라는 단어는 영어로는 "~안으로(into)"라는 전치사다. 이것이 시간과 관련된 단어와 함께 묶어지면 "~하는 동안(for)", ~할 때까지(during)"라는 뜻으로 쓰인다. 지금 "에이스"라는 전치사가 바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럼, 그 다음의 단어를 보자. "톤 아이오나(ton aiona)"에서 "톤(ton)"은 정관사(the)요, "아이오나(aiona)"는 명사다. 여기서 "아이오나"의 원형은 "아이온(aion)"이다. 이 단어는 "세대(generation)", 혹은 "시대(age)"라고 번역되는 단어다. 그러므로 "에이스 톤 아이오나(eis ton aiona)"라는 전치사구는 "그 시대까지", 혹은 "그 시대동안"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러므로 이것을 영어로 표현하면, "for the genaration(그 세대까지, 그 세대동안)"이나 "for the age(그 시대까지, 그 시대동안)"라고 번역해야 한다.

  고로, 우리가 믿고 회개하여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그분이 우리와 함께 있는 기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까지(이 시대동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다음 시대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거듭난 이후 죽기 전까지 어떻게 살아왔느냐가 결정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믿는 자들 안에 들어오시어 그때부터 거주하시기 시작하시는데, 그분이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고 거주하는 그 기간은 "이 시대까지(이 시대동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혹시 우리가 부주의하여 주님이 주신 영원한 구원을 경홀히 여기고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죽는 그날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얻었던 영원한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날 성령께서 떠나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생명책에 기록된 우리의 이름도 그 날이 지워질 것이다(계3:5).

 

5. 사람이 받게 되는 영원한 구원은 어떻게 얻게 되는가?

  사람이 받게 되는 영원한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그것은 크게 2가지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믿고 회개하여서 죄사함을 받는 과정이 있고, 또 하나는 거듭나서 생명을 얻는 과정이 있다.

  먼저, 죄사함의 과정을 살펴보자. 사람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믿을 때에 죄사함을 얻는 자격을 취득하게 되며,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회개할 때 자신의 죄들의 씻음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사람은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예수님의 구속사역으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취득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예수님을 믿을 때에 동시에 또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게 되고 죄용서를 구하게 된다. 그러면 그때에 죄씻음도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회개 했다면, 그날 그가 죽어도 그는 분명 구원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대부분 구원받는 그 날에 죽지 아니한다. 20년에서 50년, 90년까지도 더 살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을 때에 회개한 것으로 구원받기는 쉽지 않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한 것이고, 그때부터 자신이 지은 죄를 자백함으로 죄씻음을 받기 때문이다. 이것은 꼭 자동차면허를 딴 것과 직접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과 비슷하다. 즉 어떤 사람이 자동차면허를 땄다고 치자. 그때는 면허증도 있고 운전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 그가 운전을 하지 않다가 10년, 20년이 지나버렸다고 치다. 그러면 그는 운전을 하지 못한다. 면허증은 가지고 있으나 실제는 운전을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운전면허증이 있다고 해서 자신은 언제나 운전할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운전면허증을 땄으면 그때부터 쭉 운전을 해야, 어느 때든지 운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자신이 예수를 믿은 것으로 자신의 죄가 다 용서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니다. 예수님을 믿어 그분을 영접했으면 면허증을 딴 것이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회개함으로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직접 입술을 벌려 마음으로 진정 회개할 때에 우리의 죄가 사해지기 때문이다(요일1:9). 운전면허증을 땄어도 직접 운전을 해야 다른 곳으로 이동해 갈 수 있는 것이지, 운전면허증을 가지고 있으니 언제라도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둘째, 이제는 거듭남의 과정을 살펴보자.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고 회개함으로 죄용서를 받는다. 그러면 그때에 거룩한 영이신 보혜사 성령께서 믿는 자들 속으로(영 안으로) 들어오신다. 이때에 내 영과 성령이 하나가 된다. 그러나 이때 들어오시는 영은 성령의 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시다(계3:20). 예수께서 성령으로 믿는 자들의 영 안으로 들어가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이제] 주는 [그] 영이시니(고후3:17)"라는 말씀과 아울러, "첫사람 아담은 생령(사는 혼)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예수님)은 살려주는(생명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15:45)"이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리스도가 부활승천 후에는 곧바로 생명주는 영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롬8:1에서도 버울이 성령을 소개할 때, '생명의 성령'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 성령께서 믿는 자들 속에 들어오실 때에, 그때에 예수님이 들어오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에 동시에 생명(조에)도 가지고 들어오신다. 이러한 생명은 헬라어로 "조에"라는 생명으로서,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생명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생명은 한동안 오직 한 사람만 갖고 있을 때가 있었다. 그때는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있을 때였다. 그래서 그분은 아버지의 생명을 가진 유일한 아들이라는 의미로 "독생자"라고 불리셨다(요3:16). 왜냐하면 예수께서 육신을 입으실 때에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아버지의 생명을 나눠주셨기 때문이다(요5:26). 하지만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그분은 다시 영이 되셨으므로, 이제는 믿는 자들에게 당신의 영과 함께 생명도 나눠주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아버지의 생명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 거듭 태어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부터 예수님은 아들들 중에 맏아들로 승격하시게 되셨고, 우리들은 그분의 동생들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이 가지고 있던 생명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도 주입되는 것이다.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거듭 태어난 자는 자기 안에 아버지의 생명이 있는 것이다. 그런 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고, 그런 자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천국은 아버지의 생명을 가진 자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6.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한 번 구원은 영원히 구원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어떤 분(목회자)이 책을 썼다. "구원은 영원한가?"라는 책이다. 읽어보니,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받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지은 자를 징계하셨으면 하셨지 그를 버리지는 않으신다"는 것이다. 만약 "주여 주여"라고 외쳤는데 버림을 받았다면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사람이요, 유대인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만약 성도가 죄를 지어서 구원이 취소된다고 하면 아무도 구원받을 자가 없을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왜냐하면 예수믿고도 죄짓지 않고 살아갈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얼핏 맞는 주장 같이도 보인다.

  하지만 그건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도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그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아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은 자는 이미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이미 영원한 구원을 받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주의하지 않는다면, 죽을 때에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것은 단 한 가지 이유에서다. 그것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아서다. 고로, 사람이 죄를 지어서 구원을 못받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아서라는 것을 꼭 알아두어야 한다.

  또한 그분은 "성도가 회개를 한다고 해도 완벽하게 회개할 자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회개로 구원받을 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이 말도 맞는 것같이도 들린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벽한 회개가 아니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일이 없다. 단지 회개를 하지 않아서 죄용서를 못받는다고 말씀하셨을 뿐이다(요일1:9). 그리고 사도요한은 요일1:7에서도, 우리가 진정 빛 가운데 행하기만 해도 그분과 우리 사이에 교제가 일어나게 되면, 그러한 교제가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했다(요일1:7).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진정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지은 죄를 통회자복하면 그리고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설령 우리가 고백하지 않은 죄가 남아있더라도 그 죄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못받을 리는 없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때에 우리가 미처 다 자백하지 못했다면 죄도 함께 다 용서함을 받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회개하지 않는 데에 있다. 그런 자는 점점 더 죄를 더 많이 짓게 될 것이고 그러면 마귀에게 뻔히 붙들리게 된다. 그러면 점점 더 죄의 늪에 빠져버리는데, 그러다가 회개하지 못하고 죽으면 지옥행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짓는 즉시 회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생각나는 죄를 남겨두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깨우쳐주시는 대로 즉시 즉시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자신에게 고백하지 않는 죄가 있다는 것이 조금 꺼림찍하다면, 그는 오늘부터라도 당장 십계명(출20장)과 산상수훈(마5~7장) 공부를 해 보시기를 추천드린다. 율법의 십계명은 죄를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요, 예수께서 율법중 십계명은 한층 더 강화시켜 놓았기 때문에, 십계명을 공부를 하고 산상수훈을 공부하게 되면 좀 더 많이 죄가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십계명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면 알수록 성령께서는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를 더 잘 깨닫게 하신다는 기억하라. 고로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고 무엇을 회개해야 할지 잘 생각나지 않거들랑 즉시 십계명 강해(https://dongtanms.kr/board_CpCD51/47286)를 들어 공부하시고, 산상수훈의 강해를 들어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이시기를 강력하게 추천해본다.

  또한 그분은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다 기억해낼 수 없으므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구원이 영원히 유지된다"고 하였다. 또한 "성령께서 한 번 얻은 구원을 취소되지 않도록 보증해주시기 때문"이란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성령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여 책망하심으로, 우리가 회개하도록 도와주시는 분이시지, 우리의 구원을 책임져 주시는 분이 결코 아니시다.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보증해주시고 인치시는 분이신 것이지 우리가 얻을 구원을 우리가 잃어버리지 않도록 책임져주시는 분은 아니시다. 물론 성령께서는 우리가 죽는 그날까지 우리를 책망하겨 회개하도록 돕는 일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끝내 성령의 책망을 거절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성령께서도 우리가 죽을 때 우리를 떠나가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 성령께서는 좋으신 분이요, 우리를 도우라고 보내어진 분이시지만, 그분은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까지 구원을 베푸시는 분은 아니시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회개할 수 있도록 책망해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이 결코 우리 대신 회개를 대신해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다시 말해,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회개해주지도 않으시는 분이지만, 그분의 책망 자체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책망을 듣고 회개할 때에 비로소 우리의 구원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7. 나오며

  참으로 구원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구원에 관해 어쩌면 말 장난 하는 것도 같다. 하지만 복잡할 것은 없다. 오직 다음의 사실만 기억하면 된다. 즉 우리가 믿고 회개할 때에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하지만 그 구원이라도 영원히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주의로 우리가 얻은 영원한 구원을 우리가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과 회개로 얻을 구원을 죽는 날에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우리는 날마다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책망하실 때에 회개해야 한다. 회개만이 우리가 지은 죄를 씻어주는 유일한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죄용서를 받지 못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사람이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사람이 죄를 지었어도 죄용서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믿지 않아서요, 또한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아서다. 죄를 지어서 지옥가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어놓고도 회개하지 않아도 지옥가는 것이다. 아무쪼록 우리가 믿는 자라면 우리는 죽는 그 순간까지 죄를 회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우리에게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니 말이다.

 

2019년 8월 11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한 번 얻은 구원은 정말로 결코 잃어버리지 아니하는가?(엡2:8~9)

https://youtu.be/4a-jTjxs88I

 

1. 오늘날 우리들에게 알려져있는 구원론 중에 잘못 알려진 가르침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2. 오늘날 우리들에게 알려져있는 구원론 중에는 잘못된 가르침들이 숨겨져 있어 그것의 폐해가 얼마나 큰 것인지 잘 모른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에는 약 8가지 정도가 있습니다. 1)예수님만 믿으면 어떻게 살든지 상관없이 구원받는다. 2)한 번 얻은 구원은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3)십계명은 율법으로서 십자가에서 이미 폐해졌기 때문에 더이상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구원받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4)모든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칭의를 얻으며, 칭의를 얻었다면 그는 구원받을 것이다. 5)하나님은 만세 전에 천국 갈 자와 지옥 갈 자를 이미 정해놓으셨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으면 이미 만세전에 구원받을 자로 예정된 것을 확증해 준다. 6)예수님을 믿어도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구원받는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믿어도 베리칩을 받지 말아야 구원받는다. 예수님을 믿어도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받는다. 예수님을 믿어도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께로 가야 한다. 7)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가르치는 자들은 행위구원론자이다. 그들은 지옥갈 자들이다. 8)회개없이도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얻는다. 등등입니다. 오늘은 이것들 중에서 두번째 폐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도들은 "한 번 자신이 얻은 구원은 왜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요?

 

3. 한 번 얻은 구원은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3가지 가르침들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구원은 하나님이 전적인 은혜로 그리고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가르침입니다(엡2:8~9). 여기서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전적인"이라는 말에 속는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다 알아서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것이라로 이해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엡2:8~9의 말씀은 그러한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에 우리들의 행위에 근거하여 그것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사람치고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아담 아래에서 죄인으로 태어난 죄를 짓기 대문에, 인간 스스로는 죄를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속죄의 은총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전적인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만 "믿음"은 은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믿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게 하는 것이지, 어떤 예정된 특정한 사람만이 그 대상이 아닙니다(딤전2:4).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대신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딤전2:6,요일2;2). 둘째, 구원은 우리의 공로로 받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가르침 때문입니다(롬5:8). 그러나 이 말은 절대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말을 설명하고 가르칠 때에 구원은 내가 어떤 선한 일을 행한 것이 없거나 혹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분의 공로 자체로 인하여 받는 것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공로 자체가 곧 구원은 아닙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이 곧 우리의 구원이 된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공로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주는 것이지 그분의 공로가 곧 우리의 구원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비록 그분의 공로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일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의 공로를 믿지 않는 이기 있기 때문이요, 그분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은 일차적인 구원을 끝까지 붙들지 않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때 가져야할 믿음이란 우리에게 속한 것이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셋째,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베풀어주셨던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어떤 것이라도 절대 끊어질 수 없다는 가르침입니다(롬8:35,38~39).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오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는 요소들은 다 외부적인 요소들(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사망과 생명, 천사들과 권세자들,현재 일과 장래 일, 능력,높음과 깊음, 그어떤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 스스로가 그분의 사랑을 외면하고 뿌리친다면 그리스도의 사랑도 결국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임을 말해준다고 하겠습니다. 즉 내부적인 요소로서 우리 스스로가 그분의 손길을 놓아버리면 그리스도의 사랑도라도 끊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고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가르침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라도 구원을 잃어버린 사례가 있습니까?

 

4. 예, 있습니다.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지만 구원을 잃어버린 사례가 성경에 나오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사례는 제외하고 신약의 경우만을 본다고 하더라도, 구원을 잃어버린 사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도행전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예입니다(행5:1~11). 이들은 분명 예루살렘교회에 속한 유대인인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하나님께 거짓말을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순간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징계로 죽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은 천국에 들어갔을까요? 둘째는 디모데가 목회하고 있었던 에베소교회의 성도들 중에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의 경우입니다(딤전1:19~20). 이들은 양심을 참소하는 성령의 음성을 외면하였으며, 결국 믿음에서 난파당함으로 사단의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이와 더불어 수많은 신구약성경의 말씀들이 구원은 잃어버릴 수도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 그러한 말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5. 사도바울은 딤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뒤의 결정적인 시간이 되면 어떤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날 것이다. 그들이 미혹하는 영들과 귀신들의 가르침들(교설들)에 마음을 쏟아 자기의 양심에 화인을 맞게 되고 결국 거짓말의 위선 안에 들어갈 것이다(딤전4:1~2/직역)". 또한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사데교회에 들려주신 말씀에 따르면, "[현재] 이기고 있는 자들은 내가 그의 이름을 생명책으로부터(안에서 밖으로) 결코 지우지 아니할 것이다(계3:5/직역)"고 했습니다. 이는 영적 싸움에서 지고 있는 자는 주님 앞에 서는 날 이미 기록된 생명책으로부터 이름이 지워질 것임을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버가모교회에 주신 말씀에 의하면, 버가모교회의 감독 안디바가 순교를 당하였지만 그가 끝까지 주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갖는 것보다는 그것을 지키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사탄마귀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거듭나서 하나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는 그 순간부터, 우리로 하여금 시험들게 하여 믿음의 노선에서 이탈되도록 시도하고 있습니다. 천국 가라고 가만 놔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사도요한은 계13장에서 말세가 될수록 어떤 어려움과 환난이 찾아올텐데, 그렇더라도 끝까지 믿음으로 지켜야 한다고 권면했으며(계13:10),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실 때에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지만 끝까지 견뎌낼 때에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0:22).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믿음으로 얻은 일차적인 구원이라도 얼마든지 잃어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고전9:27).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늘 지은 죄들을 회개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 이미 얻은 구원을 이뤄가야 하겠습니다(빌2:12).

 

2019년 01월 10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정이철목사, 한 번 구원은 영원하다고 하는데 진짜 그럴까?(요10:25~30)

https://youtu.be/fJjjw6xr8iI

1. "바른 믿음"을 추구한다고 하는 정이철목사는 진리를 수호한다고 하면서, 한 번 믿음으로 얻은 구원은 절대 잃어버릴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야 한다고 하는 자는 기독교의 복음을 허무는 자라고 주장합니다. 정이철목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리고 성경대로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않고 왜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을 신앙의 표본으로 삼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의 말씀(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느냐고 추궁해야 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신앙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사상에서 벗어났으니, 거짓복음이요 진리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게 맞는 주장입니까? 정말 구원은 칼빈이 이야기한 것처럼 절대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인가요? 그리고 그렇게 주장게 되면 정말 기독교의 신앙을 허무는 것이 되는 것인가요?

 

2. 왜 종교개혁자들의 신앙 곧 루터처럼 오직 믿을 통한 칭의를 강조하고, 칼빈처럼 만세전개인예정을 강조하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을 수호하는 것이 되는 것이지 그 근거는 어디에 있나요? 왜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 되는 것인가요?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돌아가자고 말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요? 예를 들어 "칭의"라는 개념도 오직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눅18:13~14)과 사도바울의 말씀(롬4:14)에 나온 바와 같이 회개가 들어가야 온전한 칭의라고 말해야 옳지 않은 것인가요? 왜 예수님의 말씀이나 사도바울의 말씀은 제쳐놓은채, 루터나 칼빈의 주장을 따라가야 기독교의 복음을 수호한다고 억지 주장을 하는 것인가요?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인가요?
 

3. 종교개혁자들은 칭의를 얻는 것이 믿는 그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칭의는 하나의 서정(여정)이라고 말하면서, 칭의의 시작(창15:6, 롬4:3)과 인침(창17:10~11, 롬4:14)과 완성(창22:12,6~18, 약2:21~25)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생애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 생애에 나타난 칭의의 과정(여정)에 대해 말해보시오.

 

 

4. 아브라함은 맨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해주신다고 하신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그에게 처음으로 의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그의 믿음을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아내의 말을 듣고 첩 하갈을 들여 자식을 얻었기 때문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13년동안이나 외면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할례입니다. 그래서 그가 받은 할례에 대해 사도바울은 그것이 죄를 씻어내는 세례와 같다고 해석했습니다(롬2:11~12). 그리고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침으로 칭의가 성취되었다고 분명하게 언급했습니다(약2:23).

  그렇습니다. 칭의를 얻는 것도 어느 순간이 아니라 하나의 여정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얻게되는 이신칭의의 시작지점이 있고, 믿음이 흔들렸을 때에 칭의를 회복하기 위한 회개의 과정 곧 인침의 과정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순종을 통해서 칭의가 완성되는 과정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칭의를 믿는 어느 순간의 시점으로 한정해서는 아니 됩니다. 사도바울과 야고보장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창세기의 실제 아브라함의 사례의 경우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받은 칭의가 흔들렸던 것처럼, 우리가 믿음과 회개로 얻은 채 있는 구원도 다시 흔들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회개가 절실히 요청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신칭의만을 구원의 핵심요소로 주장하는 자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합니다. 아니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얻었으니 이미 얻은 구원을 취소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유인즉 구원은 인간편에서 어떤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며 그것을 성취하실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더욱이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한 것에 대한 성취이기 때문에 그것은 결정은 불변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성경구절이 성경에 무수히 많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혹시 그러한 성경구절을 읽어보셨습니까? 놀라운 사실은 그러한 성경구절을 다 읽어보더라도 거기에는 이미 구원을 믿음으로 얻어버렸으니 완성되었다는 완료형구문은 나오지 않으며(소망으로 구원얻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롬8:24은 예외), 대부분의 말씀들은  다 그랬으면 하고 바라는 미래형구문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의 주장이 참된 진리보수신앙이라고 우기면서 완료형의 문장이 있다고 제시합니다. 그러한 대표구절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니다. 그 예는 요5:24, 요10:28~29, 엡2:8~9의 말씀들입니다. 그렇다면 한글성경말고 헬라어원문성경에서 이 구절의 원뜻은 어떤 것입니까?


5. 구원의 안정성을 주장하는 성경구절로서 요5:24과 요10:28~29과 엡2:8~9의 말씀은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한 구절도 완료형 구문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 현재형 구문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한글성경이나 영어성경에서 오히려 애매하게 번역하거나 잘못 번역한 것입니다. 특히 요10:29의 말씀은 아예 대놓고 오역해놓고 있습니다. 한글성경에서는 어처구니가 없이 보다 더 후반기(11세기이후)에 나옴으로 신빙성을 증명하기 어려운 헬라어소문자사본을 그대로 번역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먼저 나왔으며 원문에 가까운 대문자사본에는 개역개정한글성경처럼 되어있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사상을 참된 신앙으로 우기는 자들은 예수께서 영생을 주시고 아무도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는 자는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은 상태에서 예수님에게 보내어주신 자들, 곧 예정된 자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헬라어대문자사본은 그러한 내용이 전혀 아닙니다(다음 링크를 클릭하시면 그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https://dongtanms.kr/xe/board_ZOLp66/33288). 누군가가 성경을 번역할 때에 이 본문을 왜곡시켜 번역한 것입니다. 아버지게서 아들에게 보내주심으로 절대로 빼앗아 갈 수 없는 대상은 만세전에 아버지께서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은 사람이라고 되어있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이 주신 것은 "그들(사람들)"이 아니라, "어떤 것"(중성 단수)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엡2:8~9에 나오는 본문도 현재형구문입니다. 완료형구문이 아닙니다. 다만 보조동사로서 완료형구문이 들어가 있을 뿐입니다. 본동사는 현재 직설법 능동태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이렇게 번역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그 은혜로 그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채로 [현재] 있으니...(엡2:8)" 그렇습니다. 이 구문은 그들이 그때는 구원을 받은 채로 있기는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구문이지, 그것이 완료형구문으로서 절대 변동사항이 없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혹시 옛날 들었던 고정관념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래도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이 옳은 것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믿든지 그것은 개인의 자유이지만, 우리는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 믿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은 성경에 구원은 영원히 안전하며 성취된 완료형인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아닙니다. 성경은 구원의 탈락을 경고하는 말씀들이 수두룩합니다. 내일은 성경에 그러한 사례가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018년 2월 8일(목)

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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