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47) 죄사함과 구원은 실제적으로 어떻게 이뤄지는가?(행11:12~18)_2022-09-28(수)

https://youtu.be/E2yBz1AKQQg  [혹은 https://tv.naver.com/v/29537939 ]

 

1. 고넬료 가정의 구원역사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실제적인 구원의 척도는 무엇인가?

  이방인 고넬료 가정을 찾아갔던 베드로에 의해 고넬료 집에 있는 사람들은 진정한 복음을 듣게 된다. 그리고 베드로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에 성령께서 그들 위에 내려오셨다(행11:44, 12:15). 그러자 그들은 성령이 주시는 선물을 받아서 방언을 말하게 되고 방언찬양을 하게 된다(행11:46).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성령강림 과정을 통해서 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 데에는 결정적으로 '성령의 내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 구원의 척도는 그 사람 안에 성령이 들어오시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일 구원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의 기준은 곧 성령께서 그 사람 속에 들어오셨느냐 아니면 아니면 아직 들어오지 않았느냐로 판가름할 수가 있는 것이다. 

 

2. 성령은 언제 어떻게 사람 속에 들어오시는가?

  그렇다면 성령은 언제 어떻게 사람 속에 들어오게 되는가? 그것은 복음을 들어서 믿게 되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할 때에 들어오신다(행11:43~44, 12:14~17). 그것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에 고넬료 가정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베드로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성령을 받은 일로 증명이 된다. 그렇다면 고넬료 가정에 있던 사람들은 대체 베드로로부터 무엇을 들었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우리 죄인을 위해 그분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들었다(행11:36~42). 그리고 그분을 믿는 자는 그분의 이름 안에서 죄들의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들었다(행11:43).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진정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때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 속에 들어오시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믿고 회개할 때에 들어오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처음 구원을 받을 때에 사람은 어떤 회개를 하게 되는가?

  사람은 사실 2가지 종류의 회개를 하게 된다. 하나는 복음을 듣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회개를 하게 된다. 이것을 가리켜 '회심의 회개'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베드로가 고기잡이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후에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한 것과 같은 회개(눅5:8)가 바로 '회심의 회개'이며,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가 아버지의 곁을 떠나갔다가 다시 돌이키는 회개를 할 때 했던 그 회개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기" 때문이다(눅5:32).  그리고 또 하나의 회개가 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 자신이 지은 낱낱의 죄를 하나씩 자백하는 회개가 있다. 이것은 '자백의 회개'라고 할 수 있다(요일1:9). 그러니까 사람은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을 때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회개하는 '회심의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는 자신이 지은 죄들을 자백하는 '자백의 회개'를 하는 것이다. 한편 '회심의 회개'는 우리가 한 번 하는 회개라고 한다면, 자백하는 회개는 일평생 지속하는 회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은 회심의 회개를 통해 비로소 성령을 받고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영적으로 보면, 거듭난 그 사람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다. 이때 그는 구원을 받은 것이요, 구원의 여정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완성은 죽을 때에 가서야 비로소 이뤄진다. 

 

4.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한 번 회심의 회개와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았으면 그 사람의 구원은 영원한 것이며 안전한 것인가? 아니다.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 번 사람 안에 성령께서 들어오셨다고 할지라도 성령께서 영원히 그를 떠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요14:16에서 주님께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말씀했으니, 한 번 사람 안에 들어오신 성령께서는 영원토록 떠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헬라어원문으로 보지 않고 한글성경으로만 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 문장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이렇다. "그리고 나도 역시 아버지께 [장차] 요청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같은 종류의] 다른 보혜사(돕는 자)를 여러분에게 [장차] 주실 것입니다. 이는 그분이 여러분들과 함께 그 시대까지 [계속] 있게 하시기 위함입니다(요14:16 헬라어 직역)". 그렇다. 예수께서 보혜사를 제자들에게 주신 목적은 '그 시대(세상)까지' 곧 오는 다음 시대(세상)까지 성령께서 제자들과 계속해서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한 번 들어오신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계속해서 함께 있지는 아니한다. 왜냐하면 '그 시대까지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하여'라는 보내어지기는 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문장은 가정법문장이기 때문이다. '가정법'이란 실제가 아닌 것을 추측하거나 있음직한 가능성이나 가상을 나타내는 문장 표현이다. 성령이 그 시대까지 함께 있겠다는 것은 그랬으면 좋겠다는 표현인 것이지 꼭 그렇게 된다는 표현은 아닌 것이다. 이는 마치 요3:16의 말씀에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와 같은 이치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도 '멸망하지 않고' 그리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문장이 다 가정법 문장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독생자를 믿는 것은 그로 하여금 계속해서 멸망하지 않고 또한 계속해서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지, 중간에 멸망을 당하거나 영생을 잃어버리도록 하기 위함은 결단코 아니다. 하지만 이것도 역시 가정법 문장으로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지 꼭 그렇게 된다는 문장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자들 중에서도 실제로 멸망을 당하거나 영생을 잃어버리는 자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5. 어떤 자가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는가?

  그렇다면 한 번 구원을 얻었으나 영생을 잃어버리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것은 오늘 고넬료의 집의 경우에서 살펴보았듯이, 성령의 내주가 그것의 핵심이다. 한 번 들어오신 성령께서 그 사람 속에 계속 머물러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영생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믿다가 주님을 부인한다든지 아니면 믿은 자라 할지라도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결국 구원을 잃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 사람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그 사람을 떠나지 않고 그 사람과 함께 하겠지만 만약 그가 죽는 그날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죽는 그날에 성령께서 그 사람을 떠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지옥에까지 동행하는 분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 바울도 엡4:30에서 "너희는 하나님의 성령을 계속해서 근심하게(슬퍼하게) 하지 말고 있어라. 그분 안에서 너희가 구원(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는 성령께서는 구원의 날 곧 우리가 죽는 그날까지 우리를 인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성령을 받았던 자라 할지라도 그가 성령의 계속적인 권면을 거부하고 성령을 근심하게 하거나 성령을 소멸시킨다면(꺼 버린다면), 그가 죽는 그날에 성령께서도 그를 떠나가신다는 뜻이다. 성령께서는 분명 이 다음 시대(세상)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도록 보내어진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이 시대(세상)에 있을 때에 그분을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따라 성령께서도 계속적으로 그 사람과 함께 있을 것인지 아니면 그 사람을 떠나가실 것인지가 결정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이라면 그는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한다. 그러지만 만약 죄를 짓고도 성령의 책망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회개하지 않으면, 그는 결국 성령을 잃고 말 것이다. 그리고 성령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그가 구원에서 탈락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받은 구원이지라도 잃어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잘 모르겠다면, 이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죽어보면 금방 알게 될 것이다. 

 

2022년 09월 28일(수)

정병진목사

 

 

회개하다보면 걱정되는 일이 좀 생긴다. 그것은 내가 회개한다고 회개하고 있지만 혹시 내가 회개하지 못한 죄가 남아있어서 그것 때문에 나의 구원에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차피 다 회개하지 못할 죄인데 굳이 회개하려고 그렇게까지 힘써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 것이다. 우리가 고백하지 못해 남아있는 죄, 과연 어떻게 처리되는 것인지, 이 메시지에 안으로 들어오라. 히브리서의 말씀이 다시 보일 것이다. 오 주여, 우리에게 성경을 보는 눈을 열어주소서!!!

2021-12-05(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미처 회개하지 못한 죄가 남아 있다면 그 죄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가?(히9:6~1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U81s29EfZMU [ 혹은 https://tv.naver.com/v/23929679 ]

 

1. 들어가며

  예수께서는 왜 이 땅에 오셔야 했는가? 이 땅에 살았던 위대한 선각자들이나 성인들이라도 그들은 결코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있었다는 것인가? 그렇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 아니시라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어서 예수께서 오신 것이다. 그것은 크게 3가지다. 하나는 죄[사함]의 문제요, 또 하나는 사망(죽음)의 문제요, 마지막 하나는 이 세상임금인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퇴치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의 해결의 실마리는 바로 예수님의 성육신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대강절을 맞이하여 예수께서 베풀어주실 죄사함의 은총과 관련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조금 들여다 보고자 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것을 믿기만하면, 모든 죄를 다 용서받을 수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예수께서 그때 완전한 속죄제사를 드리셨으니,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과거의 죄와 현재의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은 채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이러한 진술은 합당한 것인가? 그래서 오늘은 사람의 모든 죄가 어떻게 용서함 받게 되는지를 살펴보되 구약의 제사법을 가지고 살펴보고, 우리가 지은 죄들 중에 하나라도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구원에 영향을 미치는지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죄사함과 관련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은 무엇이며 무엇이 문제인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죄사함과 관련하여 알고 있는 사실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2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진술은 원칙론에서는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죄사함을 받고 천국에까지 들어가려면 '믿음'에다가 반드시 '회개'가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믿음과 더불어 우리의 회개가 함께 동반될 때 이 모든 혜택들이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한 번 얻은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며(그래서 안전하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셨을 때에 우리들의 저주까지 다 끝냈으니 우리에게는 더이상 받을 저주가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번째 진술은 성경과 위배가 되는 부분이 많이 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영원한 구원으로서 주신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구원을 받지 못한 채 탈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신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서 모든 저주가 완전히 다 사라져서 더이상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회개하지도 않았는데도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정말 물질의 축복을 받고 있는가? 그리고 예수님을 믿었기에 모든 병에서 다 치유받고 건강하고 살고 있는가? 그리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건사고로부터 자유함을 입고 있는가? 그리고 자녀들은 형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마도 이 모든 것이 다 사실이라면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믿겠다고 달려들고 말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아니다. 병원에 가보라.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지 아는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 자라도 얼마나 가난에 허덕이는 자가 많은지 아는가? 또 자녀들의 문제 때문에 밤을 지새우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두번째 진술은 선언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중간의 과정을 생략한 채 이것만 주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회개를 하는데, 회개와 관련되어 궁금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 교회는 우리나라에 약 1%에 속하는 교회로서 한 번 받은 구원이지만 그것이 영원한 구원이 되게 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회개하고 있는 교회들 중의 하나이다. 회개 없이는 구원이 완성될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개할 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이 무슨 죄를 짓고 있는 지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회개기도문"이라는 책자를 사용한다. 그것을 보고 회개한다. 그러면 자신이 무슨 무슨 죄를 지으면서 살아왔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에 진정 회개를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회개를 하다보면 하나의 궁금한 점이 생긴다. 과연 이 회개를 언제까지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해도 해도 끝이 안 보이는 회개를 언제까지 해야 하느냐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또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면, 어차피 죽을 때까지 회개를 해야 하는데 혹시 회개하지 못한 채 넘겨버린 죄가 있다거나, 그것이 죄인지 모른 채 죄를 지은 죄가 하나라도 있다면 그 죄 때문에 구원에서 탈락하는가 하는 생각도 들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생각도 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다 회개하지 못하는데, 그렇다면 적당히 회개할 일이지, 뭘 그리 열심히 회개할 필요가 있겠는가"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큰 오산이다. 왜냐하면 이 메시지를 끝까지 들어보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4. 오늘날 사람이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날 사람이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에는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예수께서 우리 대신 속죄제물로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고, 그때 그분이 우리 사망의 값과 저주의 값을 치르셨다는 것을 믿으면서,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우리 대신 속죄제물로 죽으셨다는 것을 믿고 회개하는 것으로 인하여 자신의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용서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께서 골고다에서 우리 대신 속죄제물로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기에 더 이상 회개할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때 예수께서는 이미 우리가 지었던 죄와 앞으로 우리가 지을 죄까지도 다 담당했으니 우리는 다 죄사함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 주장이 합당한 것인가? 만약 이 질문이 옳다고 동의해주지 않으면, 요즘에는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취급한다. 그러므로 대부분은 그때 자신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함을 받았다고 믿어버린다. 하지만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믿음이 얼마나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구약시대에 속죄제사법이 그렇지 않다고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뭐든지 이것이 옳은지 저것이 옳은지를 확인하려면, 우리는 언제나 처음 원형으로 돌아가야 한다. 처음에 사람이 어떻게 죄사함을 받았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를 예표론적으로 보여준 예표적인 사건이자 말씀이기 때문이다. 

 

5. 구약시대에 지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이 지은 죄를 어떻게 해서 용서함 받았는가? 그것은 속죄제사법을 통해서 용서를 받았다. 다시 말해서 죄를 지은 자가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을 깨닫고 용서받기를 바라면 그 죄를 어떻게 용서받는지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셨기 때문이다. 그 법을 일컬어 '속죄제사법'이라고 한다. 이러한 속죄제사법은 구약성경 레위기 4장과 16장에 나오는데, 레위기 4장에서는 개인이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한 속죄제사법이 나온다. 그리고 레위기 16장에서는 이스라엘 온 회중이 지은 죄를 용서받는 대속죄일 속죄제사법이 나온다.

  먼저, 개인이 죄를 짓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 속죄함(용서)받는 방법부터 살펴보자. 레위기 4장에 보면, 이때에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제물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방법은 똑같다. 먼저 자기가 지은 죄를 깨달은 자가 자신이 지은 죄값을 치를 흠없는 대속제물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나아간다. 그때에는 신분에 따라 송아지, 양과 염소 등을 가지고 간다. 그리고 본인이 흠없는 속죄제물에 안수하여 자신의 죄를 넘긴다. 그 다음 그것을 자신이 칼로 찔러서 죽인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 제물의 피를 양푼에 담아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제물의 고기는 불살라 하나님께 바치면 된다. 그러면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엄청난 많은 양의 돈이 필요한 것이었다.

  이제는, 이스라엘 온 회중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대속죄일 제사법에 대해 살펴보자. 레위기 16장에 보면, 온 이스라엘이 죄를 용서받는 제사법이 하나 나오는데 그것을 일컬어 '대속죄일 제사법'이라고 부른다. 이 제사는 제사장이 드리는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이 드리는 것이며, 매일 드리는 것도 아니다. 일 년에 한 번 차례만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제물의 피를 바르고 뿌리는 장소가 속죄제사법과 각각 다르다. 여기에서는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에 들어가서 피를 바르고 뿌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에는 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마저도 처리하지 못한 죄가 있으므로, 먼저 자기를 위한 속죄제사와 번제를 드린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위한 속죄제사와 번제를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온 회중의 속죄제사에 있다. 그런데 이때 드리는 대속죄일 제사는 양을 한 마리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두 마리나 드린다. 이 때 사용하는 양은 '숫염소'를 사용하는데, 두 마리를 가져다가 제비뽑기를 하여 하나는 여호와를 위한 양으로 잡고, 또 하나는 아사셀을 위한 양으로 삼아 무인지경에 버리고 온다. 먼저, 여호와를 위한 양은 대제사장이 잡아 그 피를 담아서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 위에 앞에 뿌린다. 그리고 성소로 나와서는 그 피를 향단의 뿔에 바르고 일곱 번을 뿌린다. 그리고 나와서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온 회중의 죄를 아사셀양에게 안수하여 넘긴 다음, 정한 사람에 맡겨 사람이 살지 않는 불모지에 버려둔 채 오게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도착하면, 대제사장은 "너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로 선포를 한다. 그러면 온 회중은 그날에 금식을 끝내고 환호성을 지르면서 기뻐한다. 

 

6. 대속죄일에 제사법이 알려주는 이 제사법에 대한 주님의 의도는 대체 무엇인가?

  구약시대로 다시 한 번 가보자. 어떤 사람이 십계명을 어겨서 도둑질을 했다고 해보자. 그런데 그 사람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양이나 염소를 가져다가 속죄제사를 드려야 한다. 이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돈도 들어가고, 시간도 들어가고 자신에게 번거롭기 때문에, 분명 자신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제사를 드리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 년에 한 번 모든 죄를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제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대속죄일 제사'다. 그러므로 그는 평상시 개인적으로 속죄제사는 드리지 아니한 채, 대속죄일 제사에만 참여한다. 그리고 그날 대제사장의 선포를 통해 일년 동안 지은 모든 죄를 다 용서받았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진정 이 때에 이 사람이 일 년 동안 지은 죄가 다 용서된 것일까?우리가 하나님이라고 가정해보자. 과연 그렇게 해서 죄사함을 받으려고 한 자를 지켜보호해 주겠는가?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제사를 받아주신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그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예수께서 인류를 위한 대속죄일 제사를 치렀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믿기만 하면 자신은 완전한 속죄를 이룬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들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그러한 사람들로서, 대속죄일 제사에만 참석하여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받으려고 시도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평소 때 자신이 지었던 개인 죄를 용서받는 제사는 한 번도 드리지 아니하고, 대속죄일 제사에 참여하여 모든 것을 떼우려는 자들을 위하여 히브리서 기자로 하여금 성경을 쓰게 하신 것이다.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분명하게 알려주시기 위함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에 나와있다. 

 

7. 대속죄일에 제사 한 방으로 일년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함받을 수 있는가?

  만약 하나님의 백성인 한 사람이 일 년에 한 번씩 대속죄일 제사에 참여한다면, 그는 일 년 동안 지은 죄를 다 사함받을 수 있는 것인가? 만약 그때 진짜 자신의 죄들을 용서함받는다면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죄사함받고 천국에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구약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당하고 말았다. 그들도 분명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그리고 대속죄일 제사에 참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러한 일이 발생하게 되는 것인가? 그들은 개인적으로 지은 죄를 용서받는 방법과 대속죄일에 지은 죄를 용서받는 방법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 기자를 통하여, 대속죄일 제사 때에 용서받을 수 있는 죄목이 다르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다. 자, 이제는 히브리서 9:6~7을 보자. 

히9:6-7 6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 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개인이 지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제사장은 개인용 속죄제사를 드려야 한다. 하지만 한꺼번에 이스라엘 온 회중의 죄를 사해주는 속죄제사법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대속죄일 제사 때에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죄목은 자신이 지은 모든 죄들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그것은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해서 드리는 제사라고 말이다. 이 때 '허물'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아그노에마'이다. '아'는 부정접두어이며, '그노에마'는 '앎,이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그노에마'는 무지하여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를 뜻한다. 그러므로 대속죄일 제사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는 자기가 죄인지도 모른 채 지었던 죄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속죄일 제사법은 평소 때 개인이 자신이 지은 죄를 깨닫고 드리는 속죄제사와 다른 것이다. 이때에는 그것이 미처 죄인 줄을 모르고 있다가 지은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 대제사장이 대신 드려주는 대속죄일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대속죄일 제사를 통해 자신은 완전한 속죄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평소 때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를 하여 예수님의 피를 통해 속죄를 받은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지은 죄들을 용서받도록 하기 위해 대속죄일 제사법을 주신 것이지, 대속죄일 제사에 참여했다고 해서 자신의 모든 죄가 다 사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8. 그리스도인은 대속죄일 제사를 드리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자신의 모든 죄가 다 사해지는가?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말한다. 예수께서 대제사장이 되어 골고다 언덕에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삼고 자신의 피로 대속죄일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한 번의 제사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은 더 이상 제사드릴 것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하여, 우리가 지은 죄들을 계속해서 자백할 때에 용서해주시겠다고 분명하게 말씀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요일1:9). 그렇다. 개인이 지은 죄는 날마다 개인용 속죄제사 곧 그 죄를 개인적으로 자백해서 용서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백하여 죄를 고백했다 할지라도 어떤 것은 미처 회개하지 못한 채 넘어가버린 죄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것은 그것이 죄인 줄로 몰라서 그 죄를 회개하지 않고 남아있는 죄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바로 그러한 죄들을 용서하시기 위해 대속죄일제사를 골고다 언덕에서 드리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그분은 우리의 모든 죄들을 다 사해주실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분에 의해 온전한 속죄가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대속죄일 제사를 믿기만 하면 자신의 모든 죄가 다 사함을 받았다고 주장하려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아니다. 그렇게 해서 아니 된다. 그래도 고집스럽게 그렇게 믿겠노라고 할지라도, 과연 자기와 자기의 가문에 드리워진 저주가 떠나가게 되는지를 살펴보라. 자신의 죄를 낱낱이 구체적으로 회개하지 않았는데도, 저주가 떠나가는지 지켜보라. 그렇다. 회개하지 않으면 저주는 계속해서 남아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그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주도 한 번에 다 날아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죄목을 꺼내어 놓고 기도할 때에 하나씩 하나씩 저주도 나가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회개할 때에 이미 죄 때문에 내 속에 들어와 있던 영이 하나씩 하나씩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얼마나 어리석은 자가 많은지, 구약시대로 치자면 대속죄일 제사에 한 번 참여하는 것만으로 일년 동안 자신이 지은 모든 죄를 다 용서받겠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죄용서를 받으려고 시도하는 자의 죄를 과연 다 용서해주시겠는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은 죄를 철저히 깨닫고 대신 죽어가는 속죄양을 보면서 자신이 지은 죄를 애통해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마음으로 고백하는 속죄제사를 보실 때에, 그들이 미처 다 회개하지 못한 죄를 그때에 용서해 주시는 것이다. 아무나 한 번 믿었다고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은 아닌 것이다. 또한 그런 식으로 해서 한꺼번에 죄가 다 용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도록, 저주도 역시 한꺼번에 싹 나가지 않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개인적으로 죄를 회개할수록 저주도 사라지게 해 놓았다. 개인적으로 죄를 회개할수록 귀신도 역시 떠나가게 해 놓은 것이다. 그것이 회개하는 자에게 주신 축복이다. 자신이 지은 개인적인 죄마저도 회개하지 않으면서, 한 번 믿고 회개한 것으로 자신의 모든 죄를 다 용서받았다고 말하지 말라. 진짜 그렇게 죄가 용서 되는지 보았는가? 하나님은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라. 회개하라. 특별히 자신이 지은 개인적인 죄를 보다 더 철저하게 회개하라. 그래야 혹시 내가 미처 회개하지 못한 죄도 용서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2021년 12월 05일(주일)

정병진목사

 

오늘 누군가 이 영상이나 글을 처음 접하는 분이 있다면 이 글을 꼭 끝까지 정독하기를 강력히 권해드린다. 이 글은 우리의 구원에 관한 모든 혼란과 논쟁을 정리하고 종식시키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끝까지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얻은 구원은 과연 완전한 것인가? 그렇게 해서 얻은 영생은 과연 영원히 잃어버리지 아니하는가? 여기 교리나 신학자의 주장 뿐 아니라 정확한 성경적인 가르침이 들어있다.

2020-07-31(금) 금요기도회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11) 믿음으로 얻은 영생,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는가?(요10:27~29)
https://youtu.be/PNq82hFnLuE [혹은 https://tv.naver.com/v/15073120 ]

 

 

1. 들어가며

  사람은 믿음과 회개로 영생도 얻고 구원도 얻는다(막1:15,마4:17,요5:24). 그렇다면 한 번 얻은 구원은 영원한 것인가 아니면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인가? 저마다 나름대로의 성경말씀을 가지고 설명한다. 이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이 사람의 말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저 사람의 말이 옳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더 많은 사람이 옳다고 하는 것을 따라가면 되는가? 아니면 더 많이 배웠거나 위대한 신학자들나 설교자들의 주장을 따라가면 되는가? 아니다. 사람의 해석은 저마다 다양할 수 있고 심지어는 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를 살펴보아야 하고, 사도들은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믿음으로 얻은 영생,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2가지 축복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사실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그것을 크게 정리해 보면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자기가 지은 죄들을 용서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이요(요일1:7,9),  또 하나는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에게 분배된다는 것이다(요:24,10:28,롬8:1,고전15:45). 앞의 일은 우리의 "회개"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며, 뒤의 것은 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앞의 것이 성취되려면 "예수님의 피"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뒤의 것은 성령의 내주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3. 믿음으로 모든 죄를 영원히 용서받을 수 있는가?

  어떤 이는 한 번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 순간에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받아 자신의 죄가 다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 순간에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영원히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19세기 신학자이자 설교가로서 스펄전 목사님이 그렇다. 찰스 해돈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년 6월 19일 ~ 1892년 1월 31일)목사는 영국의 침례교 목사 가운에 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구원론에 관하여 설교한 것을 들어보면, 그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는 순간에 모든 죄를 다 용서받는다는 가르침을 쏟아내고 있다. 그의 설교의 내용을 잠깐 인용해본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단순히 믿으시고 여러분을 위하여 창에 찔리신 그 사랑의 마음에 여러분 자신을 맡기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의 복스러운 손에 맡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여러분의 모든 죄는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 안에는 한 결속체가 있으며, 그것은 하나의 큰 덩어리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그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영원히 사라집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스펄전목사의 설교는 그가 무엇을 강조하려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이 되지만 그분의 주장 가운데 사실이 아닌 것이 있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우리의 모든 죄가 사라진다"는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자신의 과거의 죄와 현재와 죄와 미래의 죄가 영원히 용서된다"는 말씀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의적인 해석이지 성경의 말씀은 아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해서 사람이 구원얻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하는 말이지만 실은 성경에는 그러한 말씀이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다는 것(히9:12,10:14)은 그분의 속죄가 완전하다는 뜻인 것이지 "그분의 속죄가 곧 우리의 죄사함"이라고 하는 등식은 잘못된 것이다. 만약 그분의 속죄가 우리의 죄사함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분의 속죄는 모든 인류를 위한 속죄였으므로(딤전2:6, 요일2:2), 모든 인류가 다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그중에 믿고 회개하는 사람에게만 속죄가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4. 사람의 죄는 어떻게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사람의 죄는 어떻게 용서되는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가 그냥 무조건 다 용서되는가? 아니다. 사실 이 세상과 우주에 있는 그 무엇으로도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은 오직 대속의 죽음을 치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속죄를 받고 구원을 받는 것을 두고 "은혜"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시 물어본다. 예수님을 믿기만하면 자동적으로 자신이 지었던 과거의 죄가 용서받고 그것을 시작으로 현재 짓고 있는 죄들이나 앞으로 미래에 짓게 될 죄들까지 다 용서가 되는가? 아니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주장이다. 성경에는 그러한 말씀이 결코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명확한 사실을 전달해준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믿을 때에 그분에 피에 의하여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하게 되는 것이며, 우리가 직접 회개(자백)할 때 우리가 지었던 죄들이 용서를 받게 되는 것이다(요일1:9). 그러므로 자신이 지었던 죄를 자백하지도 않았음에 불구하고 자신의 죄가 자동적으로 다 용서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성도들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예수님의 피로만 자신의 죄를 사함받을 수 있음을 믿고 그분을 영접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 죽는 그날까지 자신이 지은 죄들을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없이는 결코 죄사함이 일어나지 않으며, 죄사함을 받지 못하면 결국 남아 있는 죄들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고로, 사람의 죄를 용서받으라면 죄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흠없는 속죄제물의 피만이 자신의 죄를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을 믿어야 하고, 자신의 죄를 철저히 자백해야 한다. 여기서 "자백(호몰로게오)"이란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과거의 죄악을 고백하는 것이다. 죄를 인정하고 입으로 말해내는 것이다. 이때는 "하나님, 제가 무슨 무슨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주옵소서"라고 해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해주시는 것이다. 

 

5.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영접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사람이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때에,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으로 들어오신다(사람마다 시간은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이때 성령께서 또다른(같은 종류의 다른) 보혜사로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 이때 성령은 예수님과 다른 영이 아니다. 예수께서 생명주신 영이 되셔서 성령으로써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다(고전15:45, 요14:16~17).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에는 하나님의 생명(조에)를 가지고 들어오신다사실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직 한 분 독생자이신 예수님에게만 주어졌던 것인데,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는 또다른 자기자신인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공급되어질 때에 모든 신자는 그때에 거듭 태어나게 된다(중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 순간에 하나님의 생명이 분배되어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탄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동시 하늘에 있는 생명책에도 그 사람의 이름이 기록이 된다(계13:8,21:27). 

  사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에도 하나님의 생명책의 존재여부를 알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구약시대에는 지도자로서 모세와 다윗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출3ㄷ2:32, 시69:28), 선지자로서 다니엘과 말라기도 생명책의 존재여부를 알고 있었다(단12:1,말3:16).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육신을 입으신 예수께서도 생명책에 사람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을 언급하셨고(눅10:20), 사도바울이나 사도요한도 생명책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빌4:3,계20:15).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라 할지라도, 이기는 자가 되지 못했을 때에는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음을 경고하셨다(계3:5). 그런데 놀랍게도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 그들은 앞에서 언급한 사람들 중에 있는데, 모세와 다윗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생명책에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지만,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특히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데교회에 주신 말씀을 보라. 예수께서는 이기는 자에게는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럼 거꾸로 해석하면 어떻게 된다는 말가? 그것은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고로 우리는 믿음과 회개로 칭의를 얻고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부인하거나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아서 용서받지 못하면 결국 하늘의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은 자이나 죽는 그 순간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뤄(완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빌2:12).

 

6. 구원받을 때에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우리가 구원에 관해 말할 때에 특별히 신경써야 할 말씀이 있다. 그것은 요10:28의 말씀이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을 보면, "영생을 받게 되면 그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만약 이 말이 한글로 번역한대로 그게 사실이라면 영생을 받은 자는 결코 멸망받을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믿음에서 파선한 자들이 이야기가 나온다(딤후3:8, 딤전:19~20). 그리고 성도의 신앙의 여정의 예표인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음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분명하게 언급한다(히3:12~4:1,11). 그리고 믿고도 타락한 자들이나 고의로 죄를 범하는 자들 중에는 회개가 안 되어 결국 불사름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히6:6~8, 10:26~27). 또한 사도바울은 이미 구원을 얻은 성도들을 향하여 "영생을 취하라(붙들라)"고 명령하였다(딤전6:11~12). 이는 영생을 얻은 자가 영생에 주의하지 않으면 잃어버릴 수 있음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얼핏 보게 되면 예수님의 말씀과 다른 사도들 및 성경기록자의 말씀이 서로 충돌되는 듯히 보인다. 하지만 헬라어성경원문을 보면, "영원히" 멸망받지 아니한다는 말의 뜻을 정확히 알 수가 있다. 
  요10:28의 말씀은 먼저, 누구에게 영생이 주어지는가 하는 것과 더불어 "영원히"라는 의미를 알아야 한다. 먼저 예수께서는 누구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하셨는가? 그 대상은 "그들"이다. 여기서 그들은 바로 앞에 나와 있는 문맥에 따르면 "주님의 양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고, 주님을 따르고 있는 자들이다. 이는 만세전에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된 자들이 아니다. 사실 태어날 때 모든 사람들은 아담의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리하여 마귀의 지배아래 놓여 있다(요8:44, 요일5:18). 그들 중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따르기로 하는 자들이 결국에 주님의 양으로 선택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고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영원히"라는 단어의 뜻에 시선을 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상 "영원히"라는 말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영원무궁토록" 혹은 '세세토록'이라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영원히 혹은 영원토록'이라는 말과 "영원무궁토록, 세세토록, 세세무궁토록"이라는 말은 문구(부사구) 자체가 다르다. "영원히(영원토록)"은 "에이스 톤 아이오나"이고, "세세토록"은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톤 아이오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아이온"은 "세대(age, generation)", "세상(world)"라는 뜻이다. 그러니 "에이스 톤 아이오나(for the age, till the generation, till the world)"는 "그 세대까지, 그 세상까지"라는 뜻이다. 고로, 한 번 예수님을 믿어 그가 영생을 가진 자가 되었다면 그는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영생이 취소되거나 빼앗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성도가 조금 범죄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로부터 생명을 빼앗아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가 죽은 다음은 달라진다. 그가 죽을 때에 성령께서 그를 떠나가심으로 영생도 그에게서 빼앗길 것이기 때문이다.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분은 "영원토록(에이스 톤 아이오나) 너희와 함께 있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여기에 등장하는 "영원토록"이라는 문구(부사구)도 역시 "에이스 톤 아이오나"이다. 이는 믿는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나가기까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한편 "영원히"에 관한 히브리어는 "올람"이라는 단어인데, 이 역시 마찬가지의 뜻이다. 노아홍수 직전에 사람의 타락은 극에 달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년이 되리라(창6:3)" 고로 만약에 이 말씀에 나오는 "영원히"라는 단어의 뜻이 실제로 "영원무궁토록, 세세토록, 세세무궁토록( forever)"라는 의미였다면, 사람 가운데 성령이 함께 할 사람은 그 뒤로 한 사람도 없어야 한다. 그러나 구약시대에 성령이 함께 한 사람이 있었고, 오순절 성령강림이후에는 모든 믿는 이들 속에 성령이 내주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영원히"라는 문구도 마찬가지로, "그 세대까지"라고 해석해야 한다. 곧 "영원히"는 "세상끝날까지"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또한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다시 오실 예수께서도 승천하시면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시대의 끝까지 모든 날들을)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말씀하셨다. 재림시에 주님은 영원히 그들과 함께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때 그분은 심판주로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사도바울은 엡4:30에서도 성령께서 언제까지 믿는 성도들과 함께 하는지 그 시기를 알려주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구속받는 날까지라고 한정해서 말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우리의 몸이 구속받아 부활체를 입는 그날까지, 성령을 근심하게(슬퍼하게) 해서는 결코 아니 된다는 것이다. 그날까지만 성령의 인침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원히"라는 말은 세세토록이라는 뜻으로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만약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영원무궁토록(forever)"의 의미로서 주님께서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을 의미하는 말씀을 하셨다면, "에이스 톤 아이오나(단수)"라는 문구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복수) 톤 아이오논(복수)"이라고 말씀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 뜻은 "세대들의 세대들까지(till the generations of the generations), 혹은 시대들의 시대들까지(till of the ages of the ages)"라는 의미로서, 끝없이 지속되는 기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단지 "에이스 톤 아이오나"라고 말씀하셨다. 참고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2번의 "세세토록'이라는 말은 전부 헬라어 원문으로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톤 아이오논"으로 나온다. 

 

7. 한 번 믿음으로 성도의 구원의 여정은 시작되었는데, 믿음으로 얻은 그 구원은 어떻게 해야 보존할 수 있는가?

  사실 제대로 된 믿음은 한 번 갖게 되면, 성령께서 그 사람 속에 들어오심으로 그 순간 그 사람의 이름도 역시 하늘에 생명책에 기록된다. 그렇다면 한 번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 지워질 수는 없는 것인가? 그것은 앞부분에서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지워질 가능성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참고로 그것이 지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았던 선지자들이 구약시대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바로 모세와 다윗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데교회에게 직접적으로 들려주신 말씀 가운데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가능성을 언급하셨다는 것이다. 사데교회는 어떤 교회였는가? 살아있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를 가리킨다. 주님은 그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날린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과 회개로 일차적으로 얻은 구원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고 보존케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럴려면, 하나님의 절대주권만을 믿으면 되는 것인가? 혹은 구원에 대해서는 이미 끝난 일이니 신경쓰지 말고 그냥 지내도 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법이 존재하는 것인가? 성경은 말한다. 한 번 가졌던 믿음이라도 그 믿음을 인내함으로 잘 지켜야 한다고 말이다(마24:13,계14:12). 우리는 사실 믿음을 갖는 것보다 지키는 믿음이 더 어렵다는 것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믿는 순간에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의 영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는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일평생 그 믿음을 잘 지켜나가야 한다. 즉 과제들을 잘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고로 내게 시험이 찾아올 때 믿음을 지키고 주님을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더불어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부인하게 되면 심판으로 나아갈 때 주님도 그를 부인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을 믿는 믿음을 인내하지 못하고 부인하게 되면 그날에 그도 버림받을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마10:32~33). 

 

8. 구원은 결국 어떻게 해서 완성해 나가는가?

 구원은 사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시작된다. 믿고 회개하는 자는 그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다. 그러면 그는 달리기 시합에 출전한 선수처럼 구원의 노정의 트랙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부는 힘껏 골인점을 향하여 달려가야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죄를 지어 쓰러질 수도 있다. 계속해서 못달리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곳에서 주저 앉아있으면 안 된다. 그러다가 구원에서 탈락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하고서 다시 일어나 달려야 한다. 믿음의 고백을 다시 견고하고 붙들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들(십계명)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인내로서 지키는 것이다(계14:12). 그리고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 용서를 받는 것이다(요일1:9). 

  사실 구원은 믿을 때에 이미 시작되었다. 그 때에 이미 우리는 완전하고도 온전한 구원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믿음을 얻은 자라도 죄의 유혹을 다 뿌리치고 승리하는 것이 쉽지 않다. 죄를 지어 회개하지 않아 죽는 날에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떤 경우에는 말과 생각으로 죄를 짓을 수 있다. 그러면 즉시 회개하라. 그래서 죽는 순간에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가도록 자신을 준비하라. 고로 구원에 있어서 최종적인 관문은 회개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회개없이는 구원을 완성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오늘날 우리 믿는 성도들의 위치는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온 그날의 이스라엘 백성과도 같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회개함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광야생활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죄된 본성이 여전히 내 속에 들어 있고, 또한 안과 밖에 우리의 영혼을 노리는 귀신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과 성령을 주셨으며, 예수의 이름을 들려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약하여 죄를 짓는다. 그러나 회복할 수 있도록 하나의 장치를 마련해 주셨다. 그것은 "회개"다. 회개하면 귀신도 힘을 잃어버리고 떠나간다. 회개하면 어떠한 죄를 지었더라도도 다 용서를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그가 죽는 그날에 성령이 떠나가심으로 그의 구원도 상실되고 말 것이다. 또한 우리가 핍박 가운데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다면 그날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될 것이다. 구원은 선물로 주신 것이나,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책임이 여전히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대신해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대신 회개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는 날마다 회개하고 날마다 믿음을 잃지 않도록 말씀을 들어야 하고 실천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말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소망으로 얻은 구원이기에(롬8:24),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야 하는 것이다(빌2:12). 

 

2020년 07월 31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타락하여  불사름이 될 자는 과연 가짜 그리스도인뿐일까?(히6:4~8)_2020-03-30(월)

https://youtu.be/_J2MVJVRuU0 [ 또는 https://tv.naver.com/v/13122679 ]

 

1. 히브리서 6:4~8의 말씀은 어떤 말씀인가요?

  히브리서6:4~8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히6:4~8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직역] 히6:4~8 왜냐하면 한 번 빛을 받았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고, 성령에 참여한 자들이 되었고, 5 하나님의 선한 입말씀과 장차 오려고 하는 시대의 능력들을 맛보았고, 6 그리고 떨어져 나간 자들은 다시 [계속] 새롭게 하는 것이 회개 안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자기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고 있으면서 공개적으로 수치를 주기 때문이다. 7 왜냐하면 땅이 그것 위에 자주 내리고 있는 비를 흡수한 후에, 경작하는 자들 역시 그들로 인해 합당한 채소를 생산하고 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함께 받기 때문이다. 8 그런데 만일 가시들과 엉겅퀴들을 내고 있으면, 그는 버림을 당하고 저주가 가까이 [있어서] 그 끝은 불태움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2. 히브리서 6:4~8의 말씀은 누구에게 경고하는 말씀인가요?

  히브리서 6:4~8의 말씀은 누구에게 경고하는 말씀인지에 대해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어왔습니다. 그 대상에 대해서는 2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한 번 구원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는 입장(주로 칼빈주의입장)에 있는 분들은 그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혹은 "가짜 그리스도"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을 받은 자는 아주 타락하는 법이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또 하나는 이미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라도 타락하여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입장에 있는 분들 그는 "믿는 성도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옳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3. 타락하여 불사름이 될 자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우리는 누가 이렇게 혹은 저렇게 이야기했다는 것에 대해 참고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을 성경처럼 믿고 따라가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판단의 기준은 성경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자체에서는 누구를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히브리서를 쓰고 있는 "우리"라고 말하는 공동체와 이 편지를 받아야할 수신자로서 "너희"가 다 해당됩니다. 그러나 그를 지목해야 한다면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너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편지의 수신자 모두가 타락하여 불사름이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나 너희나 그러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경고하기 때문입니다.

 

4. 히브리서를 써 보내는 "우리"와 이 편지를 받아야 할 "너희"는 대체 누구인가?

  히브리서의 기자는 "우리"라고 자기를 지칭하고 있는 자로서(히2:1), 그는 과거에 이 편지의 수신자들이었던 "너희"의 공동체의 지도자였던 사람인 듯 보입니다(히13:15). 그런데 어떤 이유로 인해 그 공동체를 떠나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공동체가 2가지 어려움 즉 외부적인 핍박과 죄의 유혹에 빠져 그만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나가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저자가 그들에게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나갔다는 버림을 당할 것이고 저주함으로 가까이 지내다가 결국에 끝에가서는 불사름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타락하여 버림을 받고 떨어져나가 불살라질 수 있는 존재는 결국 히브리서 기자를 포함하여 히브리서 수신자들 중에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자들일까요? 정말 형식적인 그리스도일까요 아니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일까요? 히브리서에는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 "우리"라는 기자가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결코 가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그들은 이미 큰 구원을 받은 자들로 나오기 때문입니다(히2:3). 둘째, 그들은 이미 우리와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나오기 때문입니다(히3:1). 셋째, 구원에 속한 더 좋은 것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히6:8). 넷째,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수고하고 사랑으로 성도를 섬겼으며 그때도 현재 섬기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히6:9). 다섯째,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내었으며, 비방과 환난을 당해 구경거리가 된 적도 있었기 때문입니다(히10:32). 심지어 갇힌 자를 동정하고 자신의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했지만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을 것임을 믿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히10:34). 여섯째, 그들이 도착할 곳으로서 그들은 하늘에 있는 시온산과 새 예루살렘과 예수님이 있는 곳임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히12:2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에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나가려고 하는 자가 있었던 것입니다(히3:12).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는 안식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히4:1). 즉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할 자도 있었던 것입니다(히12:15).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따라서, 믿는 자들 중에도 얼마든지 떨어져나가 구원에서 탈락할 자가 있음을 알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나가야 할 것입니다.

 

5. 구원탈락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히6:4~8의 대상자를 어떤 사람이라고 표현하나요?

  한 번 구원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믿는 분들은 타락하여 불사름이 될 자는 결코 그리스도인이라고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타락한 자가 있다면 그는 믿는 척하고 있었으나 실제는 믿지 않는 가짜 그리스도인들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진짜처럼 위장한 사탄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택함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것인데, 그러한 사람은 결코 아주 타락하는 일이 없으며, 반드시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근거가 성경에 과연 있을까요?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주장하고 바, 이미 얻은 구원을 결코 상실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성경의 근거를 보면, 단 한 개의 합당한 성경구절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내일부터 이 부분을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2020년 03월 30일(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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