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인가? 여호와이시다(출3:14~15). 그렇다면,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적으로 볼 때 3가지 의미가 있으며(출3:14~15,6:3~5), 과정론적으로 볼 때 2가지 의미가 있다(출6:6~8).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자신을 존재론적으로 그리고 과정론적으로 소개하시려 하신 것일까? 그것은 우선적으로 모세가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잘 알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이 애굽왕 바로나 애굽인들도 하나님이 누군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타나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누군지를 소개해 주신다. 그리고 자신을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말씀하신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려주신다. 그것이 바로 출6:2~8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출6:2~8은 구약성경 가운데 하나님이 누군지를 가장 설명해주는 성경본문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자신을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소개했으며, 그렇게 말씀하신 근본적인 의도는 무엇인가?

 

1. 들어가며

  B.C.1446년경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이제 바로에게 다시 서기 전에 모세에게 자신을 "나는 여호와니라"라고 뚜렷히 말씀하신다(출6:2~8). 모세는 처음에 이 말씀의 의미가 무슨 뜻인지를 잘 몰랐다. 그는 아직 여호와를 잘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을 "여호와"라고 소개하기 전까지,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대체로 2가지 정도로만 소개해 주셨다. 그것의 하나는 전능의 하나님, 전능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 자신을 전능의 하나님(엘샤다이)라고 소개하신 것이다(창17:1, 창28:3, 창35:11). 그리고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아주 놀라운 약속을 해 주셨다. 그 약속은 인간이 하는 것과는 달라서 결코 변치 않을 약속이었으며 반드시 지켜져야 할 약속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그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족장들에게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전능자요 약속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는 이라고 소개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더 자세하고도 확실히 소개하신다. 그것은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을 알고 있기는 하였으나(창15:7,28:13) 그들은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타나 자신을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누군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셨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는 여호와니라"라고 말씀하신 의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던 근본적인 취지와 목적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나님께서 자신을 여호와라고 소개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자신의 민족을 애굽으로부터 탈출시키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이 누군지를 알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어서 애굽왕 바로와 애굽인들도 여호와 하나님이 누군지를 알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단숨에 애굽에서 탈출시킨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경고와 그리고 그것의 실행과 기적으로 하나님이 누군지를 그들에게 알리시 시작하셨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여호와 하나님이 누군지를 잘 알아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모세였다. 그가 여호와가 누군지를 알아야 여호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확히 소개하고 또한 바로에게도 소개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을 믿고 어떤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아랑곳 하지 않고 꿋꿋이 출애굽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2차례에 걸쳐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누군지를 소개하셨다. 한 번은 모세가 미디안 땅의 시내산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였고(출3:6~23) 또 한 번은 모세가 바로에게 찾아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광야로 가서 절기를 지키게 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바로 자신은 여호와를 모르니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고된 노역을 더 가중시키자 실망하여 돌아나올 때였다(출6:1~9).

  먼저 첫번째로, 출3장의 시내산에서 모세가 양떼를 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타나 자신을 여호와라고 소개하셨다(출3:14). 그것은 히브리어로 "예흐에 아쉐르 예흐에(I am that I ma)"라는 말이었다. 여기서 "예흐에"라는 말은 "하야(be)"동사에서 나온 단어로서, "나는 있는 나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크게 2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곧 자존자라는 뜻이며, 또 하나는 "나는 있게 하는 나다" 곧 전능자 내지는 창조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속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소개하셨다(출3:15).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분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고로 출애굽기 3장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는 여호와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분은 자존자요 전능자(혹은 창조자)이시며, 약속하시며 약속하신 것을 지키는 신실하신 분이라는 뜻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세번째로 출6장의 애굽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여호와라는이름의 다른 뜻을 2가지나 더 가르쳐주셨다. 그것은 첫째, 그분이 구원자(구속자)라는 것이다(출6:6).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서 너희를 속량하여(출6:6)" 그렇다. 그분의 이름에는 이미 "구원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여호와께서 구원자이시라는 뜻이 바로 예수라는 신약의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사실이다(마1:21). 그리고 이어서 둘째, 그것은 그분이 심판자라는 것이다(출6:6). 만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분이 구원자가 되신다면, 애굽사람에게 그분은 심판자가 되실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편 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셨지만, 애굽과 바로왕과 애굽사람들 그리고 애굽신들은 심판하신 것이다.(출6:6, 12:12, 겔7:27).

  그런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는 여호와니라"라고 소개하신 것을 분류하면, 크게 다음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자존자요, 전능자(혹은 창조주)이며, 신실하신 이이다. 그러나 과정론적으로 볼 때에 그분은 "구원자요, 심판자"라는 것이다.

 

3.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여호와로 소개하신 근본적인 목적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자신이 누구며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를 모세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떤 의도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민족은 자기들을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건져내신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애굽에서 탈출했으나, 그들에게 출애굽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출해내신 목적을 그들이 상실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셨으며, 애굽을 심판하셨는가? 그것은 다음의 2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그분이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요(출6:7), 또 하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했듯이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들어가서 살게 하기 위함이었다(출6:7).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이 자신을 여호와로 말씀하시는 근본적인 두 가지 목적이 한 구절에 나와있는 말씀이 레위기에 나온다는 사실이다. 그 말씀은 레위기 25:38이다.

레25:38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며 또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민족의 하나님의 되고자 하신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의 첫째는 여호와 아닌 것이 다른 존재가 이스라엘민족의 하나님이 될 수 없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레26:1, 사42:8, 45:5~7, 욜2:27).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한 것으로서, 산천초목이거나 해와 달과 별들이거나 아니면 하늘에서 내려온 타락한 천사들인 사탄마귀와 귀신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하나님으로 알고 섬겨서는 결코 죄를 용서받을 수도 없고, 죽은 다음 천국에도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어떤 죄를 짓고 살았으며 이제부터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려고, 십계명을 알려주셨으며, 그들이 죄를 지었으나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은 제사와 회개와 같은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레26:1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사42:8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사45:5-7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6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7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욜2:27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그리고 그것의 둘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가나안땅으로 상징되는 천국에 들어가서 살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천국에 들어가서 살기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하나님께서는 여러가지를 분부하시고 명령하셨다. "너희는 거룩하라. 너희는 죄를 지어 너희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 너희는 내가 준 계명들을 지켜라. 너희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하지 말라."라는 등의 말씀으로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도들의 순례의 최종목적지는 천국이 되어야 한다. 천국이 최종목적지가 아닌 자들의 삶과 열매들은 죽음과 동시에 다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게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갈대아우르에게 이끌어낸 이유가 가나안땅을 주려고 하는 것이었다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셨으며(창15:7), 또한 야곱에게도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처럼 똑같이 말씀하셨다(창28:13). 이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우르에서 불러내신 이유는 오직 그에게 천국을 주시려고 계획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천국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창15:7 또 그(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창28: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4. 나오며

  하나님은 누구신가?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여러 가지로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말씀하신 경우가 가장 많다. 무려 155회나 그 표현을 사용하셨다. 그중에서 창세기에서는 2번, 출애굽기에서는 16번, 그리고 레위기에서는 39번, 민수기 5번, 신명기에서 2번 사용되었다. 모세오경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서부터 스가랴서까지 "나는 여호와이니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다. 그렇다면 당신에 대한 많은 설명 중에 굳이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종합해보면,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볼 때, 당신이 자존자요 전능자(창조주)이시며, 약속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이라는 뜻이며, 과정상으로 볼 때, 그분은 구원자요 심판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처럼 존재론적으로 그리고 과정론적으로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소개하신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분이 이스라엘을 구원해내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려고 하심이며, 당신을 하나님으로 믿고 따라오는 자들에게 천국을 선물로 주시려 함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광야같은 교회생활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 되지 못한다면 그는 헛되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는 긍극적인 목적이 천국가기 위함이 아니라면 그것도 지금 신앙생활의 노정에서 지금 이탈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저와 여러분은 꼭 구원자로 오신 여호와 곧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이자 구주로 믿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감으로, 천국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2018년 10월 5일(금)

정병진목사

 

오순절성령강림으로 생겨난 초대교회는 산헤드린공회의 무소불휘의 권력에 의해 제자들의 생명까지 위협받았으나 어떻게 해서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을까? 오늘날 우리들도 초대교회와 같이 담대하게 전도하기 위해서는 실제적으로 무엇이 필요할까? 그 해답은 사도행전에 있다. 사도행전 3~5장을 읽어가다보면, 거기에 2가지 방법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도 그것을 실천할 수 있다면, 담대한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 들어가며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영적 유기체이므로 성장해야 한다. 성장하되 질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양적인 성장도 같이 해야 한다. 그렇다면 만약 어떤 교회가 양적인 성장을 하고 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그것은 그 교회가 복음을 증거하여 영혼을 추수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 교회는 내적으로 바른 신앙관을 확립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을 산출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날마다 복음을 증거하여 믿는 자들을 산출해 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도 복음을 증거하여 믿는 자들을 얻을 수가 있을까? 오늘 이 시간에는 교회가 복음전파를 통해 수많은 성도들을 얻어 양적인 성장을 이룩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산헤드린공회로부터 생명을 위협받았던 초대교회는 어떻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먼저, 초대교회는 산헤드린공회로부터 온갖 위협을 받으면서도 어떻게 해서 부흥성장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초대교회는 오순절 마가다락방의 성령강림으로 인하여 탄생된 예루살렘 교회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교회는 당시 무소불휘의 권력을 가진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강한 위협을 받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계속해서 복음을 증거하게 되면 산헤드린은 그들을 감옥에 쳐넣을 것이고 죽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나가서 자기에게 일어난 변화를 담대히 전했고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르쳤던 것이다. 그렇다. 초대교회가 부흥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자기에게 일어난 놀라운 변화를 담대하게 증거하였기 때문이다.

 

3. 초대교회가 담대한 사람들로 변화될 수 있었던 3가지 이유

  그렇다면 대체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디로부터 이런 담력이 생긴 것일까? 그들은 대체 무슨 백이 있어서 산헤드린공회 앞에 가서도 당당하게 자신을 변호하였으며, 그들에게 앞으로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겠다고 주장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제자들 중에서는 산헤드린공회의 상층부에 어떤 사람을 알고 있어서, 그들이 무슨 일을 저질러도 무죄언도를 받을 수 있는 어떤 루트가 있었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들을 감옥에 가두어놓는다해고 어떻게든지 감옥문을 열고 나올 수 있는 특별한 기술들을 다 소유하고 있어서였을까? 아니다. 둘 다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감옥에 갇히게 되거나 심지어 죽는 데에 넘겨진다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은 어떤 믿음들이 있었던 것이다. 대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죽음도 그들을 제어할 수 없는 어떤 무엇인가임에 분명하다. 사람의 권력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는 어떤 특별한 것을 초대교회 성도들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행전 3장부터 5장까지 읽어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이유가 나온다. 그것은 대체로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로,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았다는 것이다(행2:36). 그리고 둘째로, 예수께서 자기를 대신하여 보내주시는 성령을 받았고 성령의 선물 곧 방언까지 받았다는 것이다(행2:4). 즉 그들은 예수께서 이제는 성령으로 자기 안에 계시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든 잡혀간다도 그시에 말씀해주시는 성령이 있었기에 산헤드린 공회에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고 자신을 변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 이들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들도 예수님처럼 초자연적인 기적과 표적을 행할 수 있는 전능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사용할 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서 사도들이 산헤드린공회에 붙들려 심문을 받을 때에는 그 옆에서는 성전미문의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증인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러니 뭐가 두렵겠는가? 부활하신 예수께서 성령으로 자기들과 함께 있었으며, 예수님 대신 오신 성령을 받았고 동시에 선물까지 받았으니 그들은 무서울 것이 없었다. 더욱이 자기들도 공생애 기간의 예수님처럼 나사렛예수의 이름을 사용했더니, 진짜 병든 자가 벌떡 일어난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여러 귀신들을 내어쫓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었으니,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오늘날 우리들도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도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특별히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자신을 무장하려면 과연 무엇이 필요한가? 그것은 크게 2가지다. 그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사용했던 것이다. 만약 우리들도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그 방법들을 사용할 수 있다면, 우리들도 놀라운 변화를 경험할 것이고, 표적과 기사까지 얻어 그것으로 담대히 복음을 증거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럼, 우리가 나만의 간증을 가지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첫째로, 나의 주인을 바꾸는 것이다(갈2:20). 다시 말해 내 인생의 주인을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바꾸는 것이다(롬10:9, 고전12:3, 골2:6~7), 그래서 나만의 간증을 나도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을 믿기 전까지 주인이자 내 인생의 주인은 누구였던가? 그것은 다름 아닌 내 자신이었을 것이다. 내가 주인으로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마귀와 귀신이었으며, 내 안에 들어있는 죄된 본성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정작 나를 지배해왔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사도바울도 이것을 말해준다. 우리가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기 전까지, 우리의 아버지는 마귀였다고 말이다(요8:44). 그리고 죄된 본성이었다고 말이다(롬7:20). 그렇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사실은 사탄마귀였고 내 안의 죄된 본성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뒤돌아서 생각해보라. 내 인생을 마귀와 죄된 본성에게 맡겼을 때, 우리가 맺었던 열매들은 대체 무엇이었나? 그것은 온통 아픔과 패배와 낙망과 좌절, 슬픔과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억압과 괴로움이었고, 죽음 앞의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기자신의 주인으로 모셔들임으로 그들의 삶이 달라지게 되었다(계3:20). 그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들을 지배하고 있던 각종 억압요소들이 하나둘씩 다 그들에게서 떠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들어와서도 자기의 주인을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바꾸자, 놀라운 변화를 나타나는 사례가 있다. 그것은 춘천 한마음교회의 경우다. 그 교회는 2001년부터 자기의 주인을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바꾸는 것을 시작했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정말 기적같은 간증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다. 그들이 오직 한 가지 자기 인생의 주인을 자기에게서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그랬더니 그들이 각종 중독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정신적인 장애나 컴플렉스에서 탈출하게 되었으며, 귀신의 억압과 눌림에서 자유케 되었고 간증하고 또 간증하고 있다. 이러한 간증의 사례들은 그 교회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렇다면 그 교회는 언제부터 간증을 공개했을까? 그것은 지난 2013년 10월 24일부터다. 그때부터 지난주까지 약 3년 6개월동안 간증을 쏟아내고 있는데 지금은 무려 688차례나 되었다. 대체 그들은 어떻게 되어서 이러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 것일까?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에서다. 자신의 주인을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주인을 나 자신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바꾸게 되면 내게서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 우선, 1차적으로 부활하신 예수께서 내 안으로 들어오시게 된다(계3:20). 그리고 그분이 성령으로 내 안에 들어오셔서, 이 세상 끝날까지 나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마28:20). 세상 끝날까지 나의 보호자가 되어주시며, 나를 지켜주시며, 나를 위험으로부터 건져주신다. 그리고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억압과 공포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신다. 그래서 나에게 하늘에 속한 평강을 가져다주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순간부터 이제 나의 주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만의 간증을 얻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려면, 둘째로, 내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부활승천하신 후의 예수님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까지 예수믿는 사람들은 보통 예수님을 누구라고 믿고 있을까? 그것은 아마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같을 것이다. 그분이야말로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마16:16). 하지만 이러한 신앙고백은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계실 때의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는가?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예수님은 이내 죽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원 위치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후 무소부재하신 분으로,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복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님을 이제는 전능자, 하나님으로 고백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원래 처음부터 전능자이셨고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사9:6). 우리 죄를 담당하시려고 잠깐 사람이 되신 것 뿐이다. 구약성경 사9:6을 보라. 그는 아기이자 아들로 오실 분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 이제는 우리도 생각을 바꿔야 한다.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은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요 전능자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왔다 가셨다고 생각하지 말고, 전능자가 왔다 가셨다고 생각하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가 죽고 다시 하늘로 가셨다고 생각하라. 예를 들어보자. 세종대왕은 누군가? 그는 처음부터 세종대왕이 아니었다. 그의 이름은 원래 '이 도'라는 이름이었는데, 그가 왕족이었기에 그에게는 '충녕군'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하지만 그가 셋째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자로 책봉된 이후에는 그를 '장헌세자'라고 불렸다. 하지만 그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세종'이라고 불렸고, 그가 죽고 난 뒤에 후손들에 의해 그는 '세종대왕'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이 도'사라는 사람은 세종대왕이라로 불려지고 있다. 그를 오늘날에 와서 충녕군이나 장헌세자로 부르는 자는 없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부른다. 이상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부를 때에, 그분이 죽고 부활하시기 전에 사용된 칭호에 그냥 그대로 머물러 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 뿐이신 것이다. 아니다. 그분은 부활승천 후에 원래의 하나님 자리에 되돌아가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제 전능자이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더이상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만 고백하는 차원을 벗어나야 한다. 그분을 전능자와 하나님이라고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한 가지 더 추가적으로 생각할 것은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면서 자기 대신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했으니(요14:18~19), 이제 우리들 속에 들어오시는 이를 '성령'이라고 말하지 말고, '부활하신 예수님'으로서 '전능자'라고 부르라. 그분은 이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한국에 있는 오순절교단은 한 때 약 30년동안 한국교회의 부흥성장의 기수가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오순절교단의 성도들 대부분은 천국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떨어지고 있다는 간증이 수도 없이 나온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자기들 안에 모신 분을 부활하신 예수님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성령님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은 결코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기 안에 계신 분을 성령님이라고 하다보니까, 어느새 귀신들이 성령님을 사칭하여 자신을 성령으로 위장하여 활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도 보이지 않지만 귀신도 보이지 않으며, 성령도 은사와 능력을 주시만, 귀신들도 그런 것들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에 들어와서 오순절교단 성도들도 다 지옥에 떨어지고 있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도 이렇게 말하라. "내 안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들어와 계신다"고.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능자로 믿고 성령으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믿으면, 우리의 신앙에도 놀라운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믿었더니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먼저는 성령이 주시는 선물들을 그들이 받았다는 사실이다. 다 방언으로 말하게 된 것이다(행2:4). 그리고 초자연적인 기적도 경험하게 되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전능자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했더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벌떡 일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정상적으로 걸어다니게 되었다. 그렇다. 예수님을 우리가 전능자요 하나님으로 믿어보라. 그러면 우리에게서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적도 같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것을 그대로 세상 사람들에게 증언해보라. 그러면 세상 사람들도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을 교회로 인도하라. 그러면 그들 중에 믿는 자가 생기게 될 것이다. 그러면 교회도 자동적으로 양적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5. 나오며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되어 무소불휘의 권력을 가진 자들 앞에서도 담대하게 자신의 신앙을 전파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자기만의 간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자기 안에 들어와 계심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 안에 들어오시는 분을 부활하신 예수님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분을 전능자로 믿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성령으로 자기들들 안에 들어오셨다고 믿은 것이다. 그렇다. 전능자가 이 세상에 오셨다 가셨다. 지금 믿는 자들 안에는 누가 계시는가? 성령이신가 아니면 부활하신 예수님이신가? 둘 다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분을 부활하신 예수님이라고 고백해보자. 그리고 또한 그분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만으로 보지 말고, 전능자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라. 그러면 우리에게서도 그때부터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자기가 경험한 나만의 간증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것으로 간증하면서 전도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에 관심을 보이는 자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고 그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오면 된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교회는 예수님을 전능자와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함고 회개함으로 양적인 성장을 이루게 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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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오늘은 정말 우리가 무심코 넘겨버릴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이 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실 여러가지 신분을 가지셨다. 그분의 신분으로는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선지자, 대제사장, 중보자, 구원자, 선생님 등등이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이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그분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것인가?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뜻인가? 아니면 예수님이 사람이라는 뜻인가? 아니면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같은 분인데 단지 하나님보다는 조금 못하는 분이라는 뜻인가? 참으로 헷갈린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으며, 예수님 자신도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대체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2.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았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우선 누가 언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는가를 했을까를 살펴보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실 것이라는 사실은 제일 맨 처음 마리아가 알았다(눅1:35). 왜냐하면 가브리엘 천사가 그녀에게 나타나 그렇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꿈을 통해 요셉도 어느정도 간파하고 있었다. 주의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를 통해서 태어날 아기는 아들로서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시는 분이라 알려주었기 때문이다(마1:21). 그렇다면, 이때에 마리아와 요셉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알고 있었을까? 아마 몰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공생애 때에 예수님이 걱정되어 찾으러 온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야 마리아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누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았고 또한 그렇게 불렀을까? 그것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세례요한이 처음으로 그 사실을 알았음을 살펴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을 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이렇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메시야요, 성령으로 세례주는 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했던 것이다(요1:34). 그리고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던 나다나엘이 알았고(요1:49), 이어서 베드로가 그렇다고 고백하였고(마16:16),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직전에는 베다니의 마르다가 그렇게 고백했다(요11:27).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난 직후에는 로마군대의 백부장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음을 알 수 있다(마27:54).


3. 귀신들은 어떻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을까?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귀신들도 금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이다(눅8:28).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 귀신들은 예수님더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눅8:28)"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그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그리고 사탄마귀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예수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받은 직후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을 들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때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을 통해 마귀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사탄마귀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가 과연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히는 몰랐다. 아니 알고 싶어했다. 그래서 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받으신 후에 40일동안 금식기도를 하셨는데 그 기도가 끝나자마자 사탄은 곧장 예수께 갔다. 그리고 시험을 해보았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 사탄마귀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데, 대체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싶어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가 과연 하나님인가 아니면 사람인가가 궁금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생애 내내 예수께서는 당신은 아들이라고 지칭하거나 사람의 아들(인자)라고 표현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할 때에는 간접적으로 그렇게 말씀하셨을 뿐이다(요10:36,11:4). 그리고 예수께서는 언제나 사람으로서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셨고, 한적한 곳으로 가서 열심히 기도하셨다. 그리고 12제자들을 뽑을 때에는 철야기도까지 하셨다. 그리고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 그러니, 사탄마귀는 예수님이 사람이 확실하다고 단정했을 것이다. 만약 사탄마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이 하나님이라는 신분으로 알았다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은 자신이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 귀신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함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을까?

   그렇다면 사탄마귀와 귀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대체 어떤 존재인지를 몰랐었을까를 좀더 살펴보자.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사탄마귀와 귀신들은 원래 하나님을 섬기던 천사들이었다(시103:20~22). 하지만 인간이 창조되기 직전에 그 중의 일부가 타락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때 타락을 주도하던 자가 바로 루시퍼 곧 사탄마귀였다. 그때 사탄마귀를 따르던 천사들도 피조된 천사들 중에 약 1/3가량이나 되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곧바로 하늘에서 쫓겨나지 아니했다. 한참동안 하늘에 같이 있었다. 그때는 그들이 악의 천사로서 사람들을 죄짓게 만들고 미혹하는 존재로 일하고 있었고,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참소하는 자로서 활동하고 있었다(계12:7~10, 욥1:6~12, 2:1~10)). 그러다가 예수께서 탄생하기 직전 어느 시기에 하늘에서 쫓겨났던 것 같다. 왜냐하면 구약에는 천사들이 나오지만 귀신들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에 이미 귀신들이 이 세상에 있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귀신들이 하나도 없었다. 구약시대 성도들을 보라. 어느 누가 귀신들의 존재를 언급한 일이 있었는가? 그리고 귀신을 내쫓은 일이 있었는가? 없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들어와 예수께서 비로소 귀신들의 존재를 언급하셨으며, 그것들을 내어쫓기 시작하셨다.

  여러분은 귀신과 타락한 천사의 차이를 아는가? 다 타락한 천사들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귀신들은 하늘에서 내어쫓겨나서 다시는 하늘로 되돌아갈 수 없는 타락한 천사들을 가리킬 때 사용한다. 귀신들은 자신이 더이상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찌하든지 분풀이를 사람들에게 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있는 사람들 아무에게나 분풀이를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람을 미혹하여 죄를 짓게 만든 후에 그 사람의 몸속에 들어가서 역사한다. 그리고 죽은 다음에는 사람의 영혼을 끌고 음주(지옥)까지 끌고 들어간다.

  그렇다면, 귀신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대체 어떤 존재로 보였을까? 그들이 천국에 있을 때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과연 천국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을까? 그렇다. 그들은 천국에서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아들을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아직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기 전이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보좌에 앉아계셨다. 그분 옆에 보좌가 따로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그곳에 앉아있었던 적이 없다. 천국에는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보좌는 단 한 개 뿐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천국에 있을 때에 하나님을 보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도무지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가 그들 앞에 있다. 이분은 과연 누구인가? 사람인가 하나님인가? 당시 귀신들의 우두머리는 루시퍼 곧 사탄마귀였다. 그런데 광야의 시험에서 사탄은 예수님에게 3대0으로 완패했다. 그러자 사탄마귀의 졸개들인 귀신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쫓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도 알고 싶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이라는 것이다. 분명히 지극히 높은 하나님과 관련이 있으며, 그분의 아들인 것만큼은 분명한데, 대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이 어떤 존재인지 그들도 잘 몰랐던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이 예수께서 본성에 있어서는 하나님인 것을 귀신들이나 사탄마귀가 알았더라면, 아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설령 죽인다고 해도 예수께서 부활생명으로서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 자신의 본성을 숨긴 채 되도록이면 사람으로서 활동하셨다. 그분은 사람처럼 잉태하는 과정을 거치시고, 성장의 과정을 거치셨으며, 밤이 되면 주무셨고 아침이면 일어나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셨다. 낮에는 열심히 일하셨으며 밤이 찾아오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쉬셨다. 그러고보면 예수님은 영락없이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광야에서 금식한 후에 사탄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도 예수께서는 한사코 자신을 사람이라고 말했었다. 돌을 떡덩이로 만들어먹으라는 사탄의 주문에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이라고 대답하셨다. 자신은 지금 사람으로 사탄에게 시험받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5. 세상 사람들도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사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사람들도 잘 몰랐다. 만약 제자들 중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 곧 그분이 하나님인 것을 의미하는 것인 줄 알았더라면 그때당시 아무도 도망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나 혹은 선생님정도로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이 붙잡히시자, 그만 다 도망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분이 죽고 부활하시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은 더이상 그들의 형님이 아니었고, 선생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제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질 수 있는 존재 즉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뒤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단 한 번도 선생님이라고 칭한 적이 없다. 다들, 주님 혹은 하나님이라고 칭했던 것이다(요20:28).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칭하지 않았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6.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의 진짜 의미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대답은 요한계시록 2장에 나온다. 이미 부활하신 후에 약 60년이 지난 뒤, 하나님의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신 예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때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셨고 그 뜻은 자신이 곧 하나님이심을 말씀하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것은 소아시아 일곱교회 가운데 두아디라교회에게 편지할 때에 나온다.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의 눈이 불꽃같고 그의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계2:18)"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그의 눈이 불꽃같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발은 빛난 주석같다고 했다. 이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것을 아시고 감찰하시는 전지하는 분이며, 인간의 모든 행위를 행한대로 심판하실 심판주라는 말씀이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두아디라교회에게 이렇게 자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셨다.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계2:23)" 그렇다.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용어였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확히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예수께서하나님인 것을 사탄마귀가 알아버린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탄마귀에게도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자신을 계시하셨다. 하나님과 같은 어떤 것을 가진 존재이기는 하지만 자신은 분명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본성에 있어서 그분은 처음부터 하나님이셨으니 그분은 전지전능한 분이요,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로서 심판주이셨던 것이다. 육체를 입고 계신 기간동안에서 그분의 속성은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속죄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드러내지 않으신 것이다.


7. 나오며

  사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신 것은 참으로 놀라운 칭호임에 분명하다.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셨으나 사람이 되어오신 분을 지칭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속죄를 받을 수 있었음에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사람으로서 피흘려 죽으셨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음에 감사해야 한다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영원한 생명, 아버지의 생명, 사망이 이길 수 없는 생명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나눠줄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요일5:12).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우리가 사탄마귀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하나님이셨기에 사망도 이기고 음부도 이기도 사탄마귀도 이기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하나님의 아들 곧 예수님을 지금 알고 있는 것이다. 오 놀라워라. 그분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한때는 사람이셨던 분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세세토록 살아계신 분이다. 그분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장차 오실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붙잡게 될 때, 죄사함을 받을 수 있고, 생명을 얻을 수도 있으며,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을 탈출하여 천국에 들어갈 수도 있다. 예수님만 붙들라.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하나님이시니까. 그리고 예수님만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우리의 죄를 속죄해 주신 분이니까.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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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진정 사모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사실 인간은 죄된 본성으로 가득한 육신에 둘러쌓여 있다. 그러므로 내 속 깊은 곳에 들어있는 우리의 영혼이 무엇을 갈망하는지를 잘 모르고 살아갈 수 있다. 만약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고 우리 주 예수께서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죄된 본성을 따라 살다가 그만 영원한 불못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자, 오늘은 우리의 영혼이 진정 필요하고 진정 사모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리해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사람은 누구에게나 욕심이 있다. 그런데 욕심이 다 나쁘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영적인 열심은 성도들에게 매우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구약에 등장하는 야곱의 경우를 보라. 그는 영적인 축복을 얼마나 갈망했던 사람이었는가? 하지만 세상적인 욕심은 주의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 세상을 하직할 때 완전히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을 붙들어서는 아니되기 때문이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가져야 할 욕심이 무엇인지 특히 우리의 영혼이 사모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2. 세상적인 욕심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먼저, 세상적인 욕심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사람은 누구나 사람이기에 보면 가지고 싶고 누리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 그런 것에는 돈욕심, 명예욕심, 쾌락욕심 등이 있다. 사도요한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3가지로 분류하였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2:16)" 그렇다. 육신의 정욕 곧 쾌락의 욕심이 있고, 안목의 정욕 곧 본 것을 갖고 싶어하는 물질욕과 소유욕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이생의 자랑 곧 명예욕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하늘의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다 이 세상 곧 이 세상의 임금인 마귀로부터 나온 것이다.


3. 세상적인 욕심과 하늘에서 온 욕심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런데 세상으로 나온 것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의 차이는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이 세상으로 오는 것은 내가 죽을 때에 내가 가져갈 수 없는 것으로서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리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육신이 있을 때에 육신에게만 필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그것은 영혼이 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가질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영원히 내 것이 되는 것이다. 당신은 과연 어떤 것을 선택하고 싶은가? 일시적인 육신의 세상욕심인가 아니면 영원한 영혼의 하늘욕심인가?


4.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고 사모해야 할 3가지 욕심

  그렇다면, 우리가 사모해야 할 욕심은 대체 어떤 것이 있을까? 성경은 크게 3가지를 사모하라고 가르친다. 먼저 첫째로, 성경은 주님 자신을 사모하라고 가르친다(사26:8~9). 즉 주 님을 알기를 사모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아는만큼 우리는 주님을 누리게 되며 주님의 권세와 능력을 맛보며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시적인 것들의 유혹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얼마나 주님을 알기를 사모하고 있는가?

  둘째로, 성경은 영적인 것 곧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사모하라고 가르친다(벧전2:2, 고전14:1,12).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그렇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알기를 사모해야 한다. 사도 베드로는 갓난아기가 젖을 사모하는 만큼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성령충만 얻기를 사모하라고 하신다. 왜 우리는 주일을 기다리는가? 그날 내 영혼에 필요한 하늘의 양식이 공급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 하늘의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 자는 오늘도 주일을 기다린다. 당신은 지금도 얼마나 주일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인가?

  셋째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준비한 나라 곧 천국을 사모하라고 가르친다(히11:16, 벧후3:12). 사람은 사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 그래서 칭찬받고 상얻기를 사모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세상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쳐보자, 그것이 내게서 얼마나 가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준비한 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들이라고 증거한다. 그래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영원한 천국이요 천국에서 우리가 누릴 영원한 상급이요 면류관이다. 당신은 지금 세상에서 받을 상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가? 아니면 천국에서 받을 영원한 상을 얻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가? 모세는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좋은 위치와 권력을 포기했다. 고난받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위해서 그렇게 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그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상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히11:24~26).


5. 나오며

  당신은 지금 무엇을 위해 오늘도 분주히 살아가고 있는가? 그것이 썩어없어질 이 세상의 것인가? 아니면 영원한 것인가? 비록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기에 우리는 세상적인 필요들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영원한 하늘나라를 준비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요 그것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요소인 것을 잊지 말라. 그러므로 이 세상이 주는 것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겨서는 아니 된다. 그것을 얻을망정 그것에 눈이 고정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런 자는 이 세상을 하직함과 동시에 슬피 울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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