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08) 하나님의 진짜 이름은 무엇인가(출3:13~15)_2021-02-03(수)

https://youtu.be/qvFFH9TdGos [혹은 아침묵상입니다.정병진목사 ] [혹은 https://tv.naver.com/v/18302305 ]

 

1. 하나님(엘로힘)은 이름은 무엇인가요?

  일반적으로 알려진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우리말 개역성경은 영어의 발음에 따라서 그렇게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와서는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가 아니라 "야훼(야웨)"라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둘 다 어느 것이 맞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의 제2계명(출20:7) 곧 하나님을 이름을 망녕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씀을 준수하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글로 기록할 때에는 분명 "요오드 헤 와오 헤"라고 기록했지만, 그것을 음성으로 부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법적으로 볼 때에는 그 음가가 "여호와"보다는 "야훼"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KakaoTalk_20210202_215257629.png

 

2. 하나님께서 직접 밝히신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그런데 B.C.1406년경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도록 선택받은 모세가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엘로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20:13)"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라고 당신의 이름을 일러주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는 ~이니라"라고 당신의 이름을 소개하신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의 이름은 분명히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말하라"고 모세에게 한 번 더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출3:14). 그렇다면, 히브리어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I am that I am)"라는 말은 어떤 것인가요? 그것은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냐는 에흐헤이니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에흐예(I am)"입니다. 여기서 "에흐예"라는 단어는 "나는~이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고, "스스로 있는 자"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명칭입니다.

2021-02-03 1.jpg20210203_005338.jpg

 

3. 하나님의 이름은 "에흐예"인가요 "여호와"인가요?

  사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혹은 야훼)"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14에서 알려주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은 "에흐예"라고도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표현이 하나님의 정확한 이름일까요? 그것은 "에흐예"가 더 옳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여호와"가 틀린 표현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에흐예"는 1인칭 미완료형이며, "여호와"는 3인칭 미완료형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는 1인칭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전할 때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1인칭으로 말하지 않고 3인칭으로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흐예"와 "여호와"는 같은 뜻을 가진 두 단어가 아닌가 추측이 됩니다. 그렇지만 출애굽기 3:14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잘 모르고 있었을지라도 "에흐예"라는 명칭은 확실히 하나님의 이름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15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이름을 다시 소개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는 여호와이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로, "에흐예"는 이 두 개념을 모두 합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출3:14-15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에흐예)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에흐예)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야훼)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image.png

 

4. 하나님의 이름은 "에흐예"라는 명칭의 정확한 뜻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이름 "에흐예"는 학자들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모음을 붙여서 발음한 것이고, 모음없이 부르면 이 단어는 "아하야[흐]"입니다. "아하야[흐]"라는 명칭은 사실 히브리어 "하야(be)"동사에서 나온 말로서, 하야동사의 1인칭 미완료형태의 단어입니다. 그리고 "아하야[흐]"는 글자를 분석해보면, 히브리어의 첫글자인 "알렙"이라는 알파벳에다가 "하야(be)"라는 동사가 붙어서 만들어진 단어이므로, 그 원초적인 뜻은 "[나는] 알렙이니라"는 뜻입니다. 잘 알다시피 "알렙"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글자인데, 이것을 헬라어로 보면 "알파"입니다. 그러니까 "아하야[흐]"라는 이름은 "나는 알파이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히브리어구약성경을 헬라어구약성경으로 번역한 70인역을 보니, "에흐예"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에 "호 온"이라고 번역해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정관사 "호"에다가 "be동사"의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남성 1인칭 단수"인 "온"이 붙어서 생긴 명칭으로서, 그 뜻은 "지금도(이제도) 계시는(있는)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에흐예'라는 이름은 "나는 알파이니라" 그리고 "지금도 계시는 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결론의 책인 요한계시록을 보면 "주 하나님"께서 당신을 소개하실 때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계1:8)"라고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을 헬라어 원문으로 직역하면, "나는 알파이니라 그리고 오메가이니라. 지금도 계시는 이 그리고 아직도 계시는 이 그리고 지금도 오고계시는 이[이니라], 전능자[이니라]" 곧 출애굽기 3:14에서 말씀하신 그분이 바로 요한계시록 1:8에서도 동일하게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20210203_005943.jpg20210203_010239.jpg

 

5. "에흐예"는 오직 여호와만을 지칭하는 것일까요?

  더욱 놀라운 사실은 구약의 하나님이셨던 "에흐예"께서 신약시대에 자신을 "나는 알파요 오메가이며,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라고 소개하셨는데, 예수께서도 자신을 "나는 에흐예이니라(=에고 에이미)"고 말씀하셨으며(요8:24, 28, 58), 또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마침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계22:13). 결국 구약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엘로힘)이 신약의 예수님이라는 것을 예수께서 직접 언급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구약시대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던 엘로힘이 바로 "에흐예"이셨고, 그분이 육신을 입고 아들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엘로힘에 해당하는 일반대명사 "하나님(데오스)"라는 말만 나오며,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으로서 "예수"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이는 구약시대에는 자신을 "나는 알파이며, 이제도 있는 이"라고 말씀하셨던 분이 이제는 "나는 오메가이며, 이제도 있는 이이자, 아직도 계속 있으며, 장차 오실 이"라고 자신을 표현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의 여호와와 신약의 예수께서 한 분의 창조의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신약의 "에흐예"는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아들로 오신 엘로힘이신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내일 더 보충하겠습니다. 

20210203_005222.jpg

 

2021년 02월 03일(수)

정병진목사

 

20210203_005200.jpg

 

20210203_005138.jpg

​우리가 따라야 할 기도의 모범은 역시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다. 그런데 이 기도에서 첫번째 기도제목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케 된다는 뜻은 대체 무엇인가? 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왕국이나 하나님의 뜻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 앞세운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은 분명히 "여호와"인데도 왜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이 이름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아니하는가? 오늘날 우리가 영광스럽게 해야 할 하나님의 이름은 대체 누구인가? 주기도문의 놀라운 비밀이 여기에 들어있다.


2019-09-02(월) 2019년도 9월 특별새벽집회 첫째날 

제목: 주기도문강해(0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 

https://youtu.be/qnpAaKawK8E


1. 들어가며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자기들에게도 세례요한처럼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함에 따라 기도를 가르쳐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이라는 것이다(눅11:1~4). 그런데 주기도문은 유대인들의 “외식적인 기도”와 이방인들의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잘못된 것임을 경계하면서, 제자들에게 진정한 기도의 모범을 보여준 것이다(마6:5~8). 또한 이것은 초대교회로부터 오늘날까지 가장 많이 성도들에 의해 반복되고 있고 암송되고 있는 이상적인 기도의 모델이기도 하다.

주기도문은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로는 “기도의 대상”이 나오고(마6:9a), 둘째로는 “기도할 내용”이 나오며(마6:9b~13a), 셋째로는 “송영”이 나온다(마6:13b). 먼저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장차 기도드릴 대상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는데, 그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불러야할 호칭이 “하나님”도 아니었고, “만군의 여호와”도 아니었으며, “주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것도 “하늘들 안에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였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로서 우리가 올리는 기도에 매우 관심이 많으시고 또한 늘 좋은 것들을 채워주시려는 분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정욕적으로 기도하기보다는 믿음의 공동체의 필요를 간구하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분은 하늘들 안에 편재해 계시고 우주를 통치하시는 분이시며, 언제 어디서라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실 수 있는 전능자라는 사실도 배웠다. 그리하여 기도라는 것은 곧 믿는 이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을 확인하는 놀라운 경험이라는 것을 배웠다. 이제 오늘은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기도의 내용 가운데 첫 번째 기도제목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2. 주기도문의 첫 번째 기도제목은 무엇인가? 

주기도문에는 총 6가지 기도제목(기원)이 나온다. 하나님에 대한 것이 3가지요, 우리 인간에 대한 것이 3가지다. 전반부 3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기원으로서 “당신”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고, 후반부 3가지는 “우리”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것은 전반부의 기도가 하나님의 필요를 간구하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이다. 그런데 이것을 헬라어로 직역해보면, 여기에 한 가지 수식어가 빠져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당신의”라는 수식어다. 고로 이 문장은 “당신의 이름이 [단번에] 거룩하게 되시오며(Hallowed be your name)”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 기도제목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이름”이라는 단어와 “거룩하게 하다”라는 단어인 것을 알 수 있다. 


3.“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무슨 뜻인가? 

이제는 “거룩하게 하다”는 동사부터 살펴보자. 본문의 “거룩하게 되시오며”는 “하기아조”라는 동사의 명령법, 과거, 수동태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단번에 단호하게 거룩해지도록 기도하라는 말이다. 이것은 이미 거룩한 상태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이 결코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분의 이름은 처음부터 영광스러웠었는데 어떤 경우에서도 그분의 이름이 추하게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는 주체도 신적 수동태로서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뜻이다. 


4. 왜 하나님의 이름이 항상 거룩한 상태에 있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은 더럽혀지거나 추하게 되어서는 아니 되며 항상 영광스럽게 되기를 바라시는가?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을 당신의 나라가 오는 것보다 그리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보고 계시다는 것이다. 대체 하나님께서는 왜 이리도 당신의 이름을 이리도 중요하게 보시는가? 그것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어떻게 생각하셨고 어떻게 그 이름을 사용하셨는지를 살펴보면 도움이 될 수 있다. 특히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선포한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겔20:8-9 그들(이스라엘백성)이 [애굽땅에 있을 때에] 내게 반역하여 내 말을 즐겨 듣지 아니하고 그들의 눈을 끄는 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지 아니하며 애굽의 우상들을 떠나지 아니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애굽 땅에서 그들에게 나의 분노를 쏟으며 그들에게 진노를 이루리라” 하였노라 9 그러나 내가 그들이 거주하는 이방인의 눈 앞에서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이는 내 이름을 위함이라 내 이름을 그 이방인의 눈 앞에서 더럽히지 아니하려고 행하였음이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매우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의 명예를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시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온 우주와 만물의 창조주이자 주인으로서 피조물로부터 존중을 받으시려면,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에 맞게 행동해야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존재들(천사와 사람들)을 장차 심판하시려면, 당신은 당신이 하신 말씀대로 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하셔놓고 그것을 언제 했느냐면서 먹어버리면 아니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출6:7)” 그렇다. 그분은 그분의 이름을 걸고 어떤 일을 행하시겠다고 약속했다면 그분은 꼭 그 일을 이루셔야 당신의 이름의 명예를 지키시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라는 이름 속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셨던 말씀들이 그분의 말씀대로 그대로 성취되어지기를 기도하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은 궁극적으로는 애굽에 들어간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해 내시는 데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사탄마귀에게 포로로 잡혀있는 우리들과 같은 죄인들을 구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인 천국에 데려가는 데에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언제 가장 영광을 받으시는지 아는가? 그것은 죄인들이 구출받아 천국에 들어갈 때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죄인이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가장 슬퍼하시며 치욕스럽게 생각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 제일 첫 번째 기도제목으로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시오며”라는 기도는 겉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기원이지만 실은 우리 인간이 구원받는 것에 관한 기원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가장 영광스럽게 되신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고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것도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도 이와 관련된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응답해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5. 이제는 언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는가? 

그런데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신약성경에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이름 곧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로서, “여호와께서 구원하러 오셨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린 지상최대의 명령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말씀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 “예수”라는 이름 안에 다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셨기 때문이요(요14:26), 또한 사도행전에 제자들이 전부 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예수님이 함께 계시며(마18:20), 예수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을지라도 끝까지 견디게 되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마10:22,24:9, 막13:13, 눅21:17~18). 또한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님께서 시행하신다고 하셨으며(요14:14, 16:23~24), 예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다 받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요15:16).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위해 이 세상의 것을 내려놓는 자는 이 땅에서도 여러 배를 받을 뿐더러 다음 세계에서 영생을 상속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마19:29).

고로 우리는 오늘날 어떤 일에서든지 또는 어떤 고난의 현장에서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끝까지 배반하지 말아야 한다(계2:13, 3:8). 왜냐하면 그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을 위해 고난받는다면 오히려 기뻐하는 성도가 되자.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전파하는 일을 위해 우리의 것을 아낌없이 드리자. 그때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기 때문이다. 아멘. 


2019년 9월 2일(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하나님의 이름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은 무엇인가?(계3:12)

https://youtu.be/OXbu40rnlx4

 

1.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증인회에서는 시대별로 구원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다르다고 하면서 그 근거로서 마28:19을 언급합니다. 여기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제자들더러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상홍증인회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은 성경에 나오지지만, 성령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는데, 성령의 이름도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이름을 "안상홍"이라고 주장합니다. 과연 이 주장은 옳은 것입니까?

 

2.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증인회는 3가지를 잘못 알고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은 셋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28:19에 쓰인 "이름"이라는 명사는 복수명사("이름들")가 아니라 단수("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 각각 따로 있다고 했다면, 예수께서는 "이름들"이라고 말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들(복수)로 세례를 베풀라"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단수)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 각각 따로 있다는 안상홍증인회의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원문을 그대로 보지 못해서 착각한 오류입니다. 둘째,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가서 세례를 줄 때에 사도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이라는 말 그대로 세례를 주지 않았고, 전부다 "예수의 이름으로"로 세례를 주었던 것을 그들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 곧 "예수"라는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와 고넬료가정에 가서 사도 베드로가 세례를 주었을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를 세례주거나 주라고 했으며(행2:38, 10:4),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교회에 세례를 줄 때(행8:16)나 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세례를 줄 때(행19:5)에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고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고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은 하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예수"라는 이름이라고 사도행전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셋째, 성경에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영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았는데, 그 이름을 "안상홍"이라고 잘못 적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였고, 신약시대 아들의 이름은 "예수"라고 성경에 나오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둘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3. "여호와"는 구약시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신약시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둘이 아니라 하나의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이름이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마1:21)", "여호와가 구원자이시다(욘2:9).", "여호와가 구원하러 오셨다(딤전1:15,롬10:13)"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라는 이름과 예수라는 이름은 전혀 다른 이름이 아니라, 같은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라는 이름보다는 예수라는 이름이 더 진전된 이름이요 더 확실한 이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 뜻은 원래는 "스스로 계신 자" 혹은 "나는 ~라고 하는 바로 그 분"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은 "자존자" 내지는 "전능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은 "자존자이시며 전능자이신 우리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더라도, 성령의 이름이 무엇인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공개된 적은 없습니다. 만약 있을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적어도  "예수"라는 이름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순절 이후 성도들이 다같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했는데, 모두가 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이름이 확실히 무엇인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령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는 것일까요?

 

4. 성령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은 성령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란 "거룩한 영"이는 말입니다. 사실 "거룩한 영"이라는 표현은 영이신 하나님(요4:24)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굳이 거룩한 영의 이름을 또다시 지어부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구약시대 때의 일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출3:14~15)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성령이란 아버지와 별개의 또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하나님의 바로 그 영)이기 때문에 또 다른 이름을 취하실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들어올 때에는 사람이며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오셨기에 어떤 이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포함한 "예수"란 이름이 붙혀지게 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여호와(구약에 나타난 한 분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증인회에서는 성령의 이름이 따로 있다고 하면서, 그 이름을 "안상홍"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그 근거로서 계3:12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합니다. 과연 계3:12의 말씀은 안상홍이가 성령의 이름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입니까?

 

5. 아닙니다. 안상홍이가 성령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지어낸 거짓말입니다. 성경 어디에 "안상홍"이라는 대한민국 사람의 이름이 "성령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만약 안상홍이 성령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요14~15장에서 보혜사 성령은 모든 사람 속에 들어오신다고 했는데, 죽어서 부산에 묻혀있는 안상홍과 그의 시체가 어찌 무소부재한 상태가 되어서 믿는 이들 속에 들어온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안상홍이라는 이름이 성령 하나님의 이름인 것은 예수님의 새 이름이 안상홍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계3:12). 하지만 계3:12의 말씀은 예수님에게 새 이름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을 뿐 그 이름이 성령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킨다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새 이름이라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예수일까요 아니면 또 다른 이름이 있을까요? 그것은 2가지가 다 맞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구약에 계시된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였는데, 신약에 들어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라고 되어 있으니, 예수라는 이름을 하나님의 새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님의 새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진짜로 예수께서 재림하신 후에 당신의 새로운 이름을 공개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라는 이름이 "안상홍"이라는 이름은 아닙니다. 이 둘의 이름은 결코 단 한 부분에서도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장차 불려질] 예수님의 새 이름이 꼭 성령의 이름이어야 한다는 논리는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냥 갖다 붙히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쳐주는 데까지 알면 됩니다. 구약에 계시된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셨고, 신약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이 둘은 사실상 같은 이름이며, 나중에 불려진 "예수"라는 이름은 한 분 하나님의 새 이름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성경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여호와"라는 이름보다는 "예수"라는 이름(여호와라는 이름을 포함하고 있는 이름)을 늘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라는 이름으로 구원도 받고, 기도도 하고, 죄사함도 받으며, 권세도 얻고, 천국도 가기 때문입니다(참고로, 이단들 때문에 오히려 많이 알게 되고 배우는 것 같습니다.)

 

2018년 12월 11일(화)

정병진목사


1. 들어가며

  빌라델비아교회, 소아시아에 있던 교회들 가운데 칭찬만 들었던 두 교회 가운데 한 교회.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결코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고, 끝까지 함께 하실 것이며, 끝까지 데리고 있겠다고 선언하신 교회가 바로 이 교회다. 대체 이 교회는 어떤 교회였길래 주님께서 이렇게 귀중한 약속을 해 주신 것일까? 오늘 이 시간에는 빌라델비아교회가 과연 어떤 교회인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되어서 칭찬을 받게 되었는지를 정리해보면서, 이러한 교회가 받게 되는 축복에 대해 함께 살펴보기를 바란다.

 

2. 빌라델비아의 지명에 얽인 사연

  빌라델비아교회의 지명에도 그 뜻이 있다. 사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과 지명의 이름들은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여러분은 가인과 아벨이라는 이름을 아는가? 가인은 '얻음'라는 뜻이며, 아벨은 '허무'라는 뜻이다. 아담과 하와가 그렇게 이름을 지어불렀다. 왜 가인은 얻음이라고 이름을 지어불렀을까?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씨)를 통해 뱀의 머리를 박살낸 후에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약속에 따라 태어난 자식이 태어났기에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그에게 그러한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한 마디로 아담과 하와에게 가인은 약속의 씨이자 여자의  씨라고 생각했기 '얻음'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하지만 가인은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의 행동과 태도가 약속의 씨가 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번째 자식을 얻었을 때 그들은 그의 이름을 '허무' 곧 '아벨'이라고 지어불렀다. 기대했지만 기대를 미치지 못한 사람을 얻었이게 언제가 그러한 자식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지어준 이름인 것이다.

  이렇듯 "빌라델비아"라는 이름도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교회의 이름이 빌라델비아인 것은 맞지만, 이 이름이 생겨난 것은 이 교회가 생겨나기 훨씬 이전이었다. 이 도시의 이름이 빌라델비아라고 불려지기 전에, 이 도시에는 왕이었던 형제간의 우애의 전설이 있었다. 형 유메네스가 암살당했다는 것 때문에 동생 아다르스가 왕이 되었지만, 그것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자, 동생 아다르스는 다시 기꺼이 형 유메네스에게 자기의 왕권을 돌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때 로마에서는 형 유메네스를 끌어내리고 동생으로 하여금 왕이 되게 해주겠다고 제안했으나, 동생은 끝내 그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래서 "형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에서 이 도시의 명칭이 '빌라델비아'가 된 것이라 한다. 도시이름의 유래야 어찌되었든간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형제로서 서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도 부탁하신 새 계명으로 바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부탁이었으니, 형제들끼리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고 이해하고 섬겨주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3. 그렇다면 빌라델비아교회는 어떻게 되어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듣는 교회가 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이제는 이 도시에 세워진 빌라델비아 교회가 어떻게 되어서 주님께 칭찬을 듣고 축복을 보장받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먼저, 이 교회가 왜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었는지를 간단히 정리해보자. 그것은 3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이 교회가 작은 능력밖에 가진 것이 없었지만, 그것 때문에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으며, 그것에 낙심하지 않고 자기에게 주신 은혜대로 감사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둘째, 이 교회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천국과 면류관에 관해 주신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지키어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키다'는 말은 보전하다는 뜻이다. 즉 그들이 주님이 주신 말씀을 그대로 보전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끝내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버리지 아니하고 그대로 지키고 그것을 붙들었다는 뜻이다. 셋째, 이 교회는 유대인들과 로마정부로부터 갖은 핍박과 환난을 당했지만 끝까지 주님의 이름으로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머나교회의 경우와 유사하다.

 

4.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의 무엇을 축복으로 받았을까?

가. 이 땅에서 받을 축복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땅에서 받을 축복과 오는 세상에서 받을 축복을 말씀해주셨다.

  먼저 첫째로, 주님께서는 빌라델비아 성도들이 이 땅에서 받을 축복을 말씀해주셨다. 그것은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을 핍박하고 괴롭힌 유대인들이 나중에 빌라델비아 성도들 앞에 무릎꿇고 사죄하게 될 것이며, 주님께서 유대인들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빌라델비아성도들을 사랑했었다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실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에게 참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늘 언제나 가슴 깊이 간직하고 간직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지키어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같은 시대의 사람들로부터 조롱당할 수도 있고,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주님의 신실한 말씀을 모른다고 할 수는 없지 아니한가? 우리도 참 진리의 말씀을 알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척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진리대로 그대로 말하면, 혹시 그것 때문에 핍박이 예상된다고 하더라도, 더 나아가서는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는 몹쓸 소리를 듣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 말씀을 수호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우리에게 손가락질했던 자들이 그때에는 모르고 그런 일을 했었노라고 회개하고 자복하는 일을 할 것이다.

 

나. 오는 세상에서 받을 축복들

  둘째로, 우리 주님께서는 빌라델비아 성도들이 하늘에서 받을 축복도 말씀해주셨다. 그것은 2가지다.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계3:12a).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한편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더라도, 이 땅에서와 같이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성전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계21:22). 왜냐하면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의 성전이심이라(계21:22)"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전에 쓰인 단어를 보면, 헬라어로 영적인 성전을 의미하는 거룩한 장소 곧 '나오스'다. 이는 물질적인 성전을 의미하는 '히에론'이 아닌 것이다. 사실 물질적인 성전인 '히에론'이 제사를 드리는 것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영적인 성전인 '나오스'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에 맞추어져 있다. 그렇다. 천국에 들어가면 우리의 처소가 하나님 자신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을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리라"는 말씀은 곧 하나님과 영적인 한 몸을 이루어 절대 따로 떨어져 나가게 하지 않겠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약속에 따라오는 부가적인 말씀에도 고스란히 나와있다. 다시 계3:12을 보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나가지 아니하리라(계3:12a)" 그렇다.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을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으로 만드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은 곧 주님께서 우리와 하나되어 절대 주님으로부터 따로 떨어지지 않게 하시겠다는 뜻이다. 사실 영적인 성전으로서 교회는 주님의 몸이다(엡1:23). 또한 주님은 교회의 머리이시다(골1:18). 그렇다. 우리가 이 땅에서부터 성령을 받음으로 우리는 주님의 몸이 되었다. 그렇지만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 주님을 부인하는 자는 결국 주님의 몸으로부터 떨어져 분리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이 하늘에 가서 받을 축복으로서 둘째는 그들 위에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예수님의 새 이름을 기록하실 것이라고 하셨다(계3:12b). 이것을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빌라델비아성도들 위에 3가지 이름을 기록하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 새 예루살렘의 이름, 예수님의 새 이름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일 것이요, 새 예루살렘의 이름은 천국의 새예루살렘성의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새 이름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예수님의 새 이름이란 예수라는 이름이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의 이름이었으므로 천국에서는 어떤 새 이름으로 불려질 것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의 어디에 세 가지 이름이 기록될 것인가? 요한계시록 7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종들 곧 이스라엘 12지파 사람들의 이마에 그것이 기록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4장에 의하면, 이미 하늘의 시온산에 성도들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성도들의 이마에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이 기록될 것이고,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기록될 것이다. 이것은 빌라델비아성도들의 영혼에 하나님의 도장이 찍혀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제는 빌라델비아성도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소유가 되었으니 더 이상 그 어떤 존재도 하나님과 어린양의 허락없니는 손댈 수 없어"라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들이 새 예루살렘 성의 시민으로서, 그 성의 주인으로 살아갈 것임을 뜻한다. 한편, 사탄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유된 백성들에게 인치는 것을 본받아, 자기들도 우상숭배하는 자들의 영혼에 도장을 찍는데 그것이 바로 '짐승의 표' 곧 '666'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침과 사탄의 인침은 똑같이 다 영적인 것으로서 각각 그 주인의 소유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 우리의 영혼의 이마에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 새 예루살렘 성의 이름이 찍힌 것은 이제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으며, 하늘의 도성의 주인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5. 나오며

  그렇다. 작은 능력을 가졌지만 그것에 대해 결코 불평하지 않으며, 어떤 어려운 형편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말씀을 지켜내며, 어떤 핍박과 고난 가운데에서도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던 빌라델비아 성도들은 이 땅에서부터 그들의 믿음이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장차 하늘에서는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지 않은 채 그분의 몸이 될 것이며, 그분의 영원한 소유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새 예루살렘 성의 주인이 되어 그곳에서 영원토록 살아갈 것이다. 그날을 우리도 손꼽아 기다리자. 그리고 그것을 위해 말씀을 지키며, 핍박을 이겨내자. 건투를 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