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1(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예수님께서 가르쳐준 올바른 기도방법은 어떠한 것인가?(마6:9~10)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cer8OkQV-PI  [혹은 https://tv.naver.com/v/28776794]

 

1. 들어가며

  기도란 무엇인가? 우리는 자주 이런 질문을 던진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것이 그리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도를 했을 때 과연 내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가 되었는지도 늘 기도생활의 관건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더불어 과연 내가 드린 기도가 하나님께 기뻐하시고 열납하시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도 역시 기도생활의 핵심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몇 주간 동안 기도의 원형이자 원리인 성막의 분향단에서 향을 사르는 법과 향을 제조하는 법을 깊이 살펴보았다. 그래서 그동안 잊고 살았던 기도의 원리들을 살펴볼 수 있는 놀라운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오늘은 구약시대 분향의 원리와 더불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올바른 방법과 내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지난 주에는 분향단에서 다른 향을 살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면 오늘은 기도할 때에는 왜 하나님을 위해서 향을 사르라고 했는지를 주기도문과 관련하여 살펴볼 것이다.  

 

 2.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에 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를 먼저 하라고 하셨을까?

  구약시대의 성막의 분향단을 공부해 보니 그것은 우리가 과연 어떤 기도를 드려야 올바른 기도를 올리는 것인가에 그 촛점이 맞춰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구약의 분향단이 주기도를 향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주기도문은 그것의 구조가 구약의 향제조법과 매우 닮아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기도는 인간의 필요를 중심으로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그것은 당시 사람들이 잘못된 기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대인들은 외식하는 기도에 익숙해져 있었고, 이방인들은 중언부언하는 기도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당시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회당이나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이 되어서 이미 자기의 보상을 받은 채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자기들이 믿는 신이 말을 많이 해야 들을 줄을 생각하고는 같은 말을 반복해서 기도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된 제자들은 그렇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기도할 것을 가르쳐주셨다.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는 잘못된 기도의 방식들과 내용드을 바로잡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였던 것이다.

 

3. 주기도문의 3대 특징은 무엇인가?

  우리가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를 대할 때에는 보통 그 기도가 예수께서 말씀해주신 기도의 완전한 모범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주기도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주기도문의 구조가 구약의 십계명의 구조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구약의 십계명이 주기도처럼 하나님을 위한 것과 인간을 위한 것으로 나누어 있기 때문이다. 즉 1계명에서 4계명이 하나님을 위한 계명이듯이 주기도의 앞의 3가지 기도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5계명에서 10계명이 인간을 위한 계명이듯이 주기도의 뒤의 3가지 기도도 역시 인간의 필요를 간구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십계명의 앞의 4가지 기도가 주기도문의 처음 순서와 그대로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십계명의 1~2계명 곧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고, 우상을 만들거나 절하거나 섬기지 말아야 한다는 계명은 주기도문에서 기도의 대상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기도에서는 오직 하늘들 안에 계신 이이신 아버지에게만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3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는 계명인데, 주기도의 앞의 첫번째 기도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인데, 주기도의 앞의 두번째와 세번째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뜻이 이뤄지기를 기도하라는 것으로서, 안식일을 지켜 행할 때에 안식과 질서가 바로 잡히는데, 주기도의 두번째와 세번째의 기도가 이뤄지면 이 우주에 안식과 질서로 바로 잡히기 때문이다.

  둘째, 주기도의 앞의 3가지 기도가 수동태 능동태 수동태 구문인데,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기도하는 과정과 이와 똑같다는 것이다. 그렇다. 주기도의 앞의 세 가지 기도 중에 첫 번째 기도는 사실 수동태 구문으로 시작한다. 즉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간구하라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에는 어떤 다른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도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그리고 두 번째 기도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능동태 구문이다. 이것은 어떠한 다른 어떤 요인일지라도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하는 것을 방해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버지의 능동적인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번째의 기도는 다시 수동태 구문이다. 이는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게 되기를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는 이 기도가 어떤 다른 요인에 의해 방해받을 수도 있음을 뜻한다. 그렇다. 조금 있다가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일과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데에는 아버지의 의지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의 기쁜 순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도가 둘 다 수동태 구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자유의지를 가진 천사와 인간의 자발적인 순종이 있어야 함을 매우 강하게 암시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와 인간 중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일에 대해 거역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와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과 뜻을 거역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능동적으로 그 일에 간섭하여 강제로라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실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구조가 영락없이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기도의 구조와 똑같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도의 응답이 역시 수동태, 능동태, 수동태 구문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나 문을 두드렸을 때에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가 같이 반영되는 것이어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받는다거나 문이 열려지게 하는 것은 우리의 기도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닐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찾아서 발견하는 문제는 능동태 구문인다면 전적으로 우리 책임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우리가 무엇인가를 요청했다면 찾는 것은 우리가 오롯이 해야 할 몫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문이 열려지는 것은 역시 우리 힘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다는 것이다. 

  셋째, 주기도의 도입과 본론이 구약의 성막법의 분향단 및 항제조법의 주의사항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구약의 분향단법에서 주의사항이 분향단에서는 절대 다른 향을 사르지 말라고 하셨는데, 우리 주님께서도 기도할 때에는 이방인처럼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약의 향제조법에서는 대제사장 자신이 냄새를 맡기 위해서 절대 향을 만들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올려드리기 위해서 향을 만들라고 하셨는데, 주기도 역시 자기자랑을 위해서 결코 기도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실제로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사역할 때에 향을 사르게 되면 지성소의 피비린내가 사라지고 머리가 상쾌해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지만 실제 은혜는 우리 인간이 받기 때문이다.

 

4. 주기도문의 앞의 3가지 기도는 과연 우리가 어떤 기도를 하라는 의미인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주기도문의 앞의 3가지 기도를 하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첫째,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하라는 말은 아버지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기를 기도하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동안에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에 의해서 그리고 그분이 선택했던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서 더럽혀져 왔기 때문이다. 먼저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하나님이 맨 처음에 창조하신 영물인 일부 천사들에 의해 더럽혀졌기 때문이다. 이는 타락한 천사들인 귀신들 때문이다. 이들은 지금도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하나님의 뜻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을 버젓히 행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보이지 않을 뿐더러 인간보다 훨씬 더 큰 능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 곧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서도 하나님의 이름은 욕되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애굽에서 구원받고 가나안 땅을 선물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애굽의 신들과 가나안의 우상들을 섬기고,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에는 저는 것과 병든 것과 눈 먼 것을 드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버려 이방민족에게 포로로 끌려가게 했으니 그들이 이방나라의 피지배 민족이 되어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다(겔20:30). 특히 하나님의 이름을 업신여기는 일은 일반 백성들보다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이 더 하였으니, 제사장들의 파렴치한 모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말1:6).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제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제자들은 이전의 천사들이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을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성령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그분의 이름이 하나님의 자녀들로 인하여 더럽혀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들의 말과 행동으로 인하여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아버지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왕국)가 오게 하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그분의 통치가 이 땅 위에 그리고 우리 성도들의 몸과 마음에도 임하기를 기도하라는 뜻이다. 사실 하나님의 왕국과 그리고 천국은 그 개념이 조금 다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왕국이 상태적인 개념이 강한 용어라면 천국은 장소적인 개념이 강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주기도문에서 말씀하신 것은 상태적인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왕국을 사용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를 기도하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이 땅 위에는 여전히 사탄의 왕국이 존재하며 그들이 통치하고 있는 영역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가 악한 영들의 통치를 받지 않도록 악한 영들의 우두머리인 사탄과 싸워서 3대0 판정승으로 승리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에게귀신쫓는 권세와 능력을 주시고 이제는 믿는 자들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귀신을 쫓아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기도하는 것이 좋다. "아버지, 저에게도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내 몸이 이제 주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주님께서 나타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내 몸과 마음이 온전히 주님의 통치 아래에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 몸과 마음이 주님의 통치 이외에 그 어떤 세력도 통치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이제는 주님만이 나의 왕이요 주인이라는 것을 드러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셋째, 아버지의 뜻이 하늘들 안에서 나타나게 되고 있듯이 이 땅 위에서도 나타나게 되기를 기도하라는 것은 천국에서 이미 악한 영들이 쫓겨나서 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쫓겨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천국에서 하늘의 상속자로 입성하고 있듯이 이 땅 위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탄생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은 생활의 하나님의 뜻이나 단순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뜻이 하늘 안에서처럼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즉 이 땅에서 필요하거나 이 땅 위에서 있게 되어야 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늘에서 필요하거나 하늘 위에서 있어야 할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가리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살전5:16~18)이나 '선을 행함으로 인하여 고난받는 것'(벧전3:17),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사역자가 되는 것'(고전1:1), '거룩함'(살전4:3~4)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하늘에서는 더이상 필요없건 이미 이루어진 상태에 있기 때문에 주기도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있다. 다시 말해 하늘 안에서 이미 일어난 일이거나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이 여기서의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크게 2가지다. 한 가지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창조된 천사들은 언제나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천국에서 쫓겨나 불못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회개하고 충성하여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상속자들이 되어 천국에 입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만세 전에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엡1:4~5,3:6). 

 

5. 나오며

  오늘날의 하나님의 자녀들치고 기도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도를 잘 하지 않는다. 어느새부턴가 기도해도 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둘 중의 하나의 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사람에게 보이려는 외식하는 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방인처럼 중언부언의 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들과는 달라서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에게 어떤 필요가 있는지를 다 아시고 있다는 것이다(마6:8).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이방인처럼 기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럼, 이방인들은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가? 그들은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만 쭉 주섬주섬 되뇌이다가 그만 기도를 끝내버린다. 때론 정성을 다해 많이 기도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신의 기쁘시고 온전한 뜻이 자기를 통해 이뤄지기를 기도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의 뜻이 성취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너희들은 그렇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어지고, 하나님의 통치가 오게 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되 하늘 안에서처럼 이 땅 위에서도 이뤄지기를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자기의 질병을 고쳐달라고 하는 기도를 드린다고 치자. 그때에는 어떻게 기도하면 좋겠는가? 여기, 그 예를 하나 들므로 오늘의 말씀을 마치려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제가 악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 몸과 마음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를 소망합니다. 제가 악한 영에 시달려서 주 예수님을 믿는 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하지 않게 행동한 악한 영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패배하게 하여주시고, 그 악한 영들이 떠나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아닌 그 어떤 영들에게도 내가 휘둘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주님만이 나의 주인이시며 나를 다스리는 왕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 주님, 이제는 주님만이 나를 다스려 주옵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통치가 온전히 임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악한 영들은 패배하게 하시고, 내가 주님의 자녀인 것이 드러나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제가 건강을 되찾게 됨으로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온전히 주님의 이름만 높여드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2년 08월 21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28) 예수님은 구원자로 오신 한 분 하나님이시다(계22:20~21)_2022-06-02(목)

https://youtu.be/0CNJTL8V-Vw  [혹은 https://tv.naver.com/v/27141976 ]

 

1. 구약의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이며, 신약의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인가?

  구약의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혹은 '야훼')이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께 여쭤봄으로 인하여 비로소 알려지게 된 이름이다(출3:13~15). 그렇다면 신약의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라는 이름이다(마1:21, 눅1:31). 그렇다면 '여호와'와 '예수'라는 이름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2. '여호와'와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

  구약의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다(출3:14~15). 그럼 그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이거나 아니면 "나는 '나는 ~이다'이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호와 호쉬아[흐]'라는 말을 줄인 것으로서, '여호와가 구원하신다' 혹은 '구원하러 오신 여호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 속에 이미 '여호와'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 39권 가운데 단 한 군데에도 '여호와'라는 이름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신약 시대의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은 이렇게 이제는 '예수'라고 계시되었기 때문이요, '예수'라는 이름 속에 이미 '여호와'라는 이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의 꿈속에 나타난 천사가 장차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일러주었을 때, 그 이름의 뜻은 이미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할 자'였음을 요셉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마1:21). 그러므로 '여호와'라는 이름이 "스스로 있는 자, 나는 ~이다"라는 뜻을 지녔다면, '예수'라는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가 구원하러 왔다"라는 뜻인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어 아들이 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예수'라는 이름을 히브리어로 읽으면 '예슈아[흐]'이다. 이는 '여호와 호쉬아[흐]'의 축약형이다. 여기서 '호쉬아[흐]'라는 단어는 '야솨'라는 동사에서 온 것으로, '구원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에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며 환영하던 군중들의 외침 소리에 나오기 때문이다. 그때 군중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쳤다(요12:12). 또한 여기에 나오는 '호산나'는 히브리어로 '여호와 호쉬아나'이다. 그리고 여기서 '호쉬아[흐]'는 구원하다는 뜻이며, '나(NA)'라는 뜻은 '지금(NOW)'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호쉬안나(=호산나)라는 단어의 뜻은 '여호와여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3. 구약 시대 하나님의 진짜 이름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던 하나님의 이름을 모두들 '여호와'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맞다. 그때에는 '여호와'가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음가가 '여호와'인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늘날 히브리어는 모음이 붙여진 상태이지만 원래 히브리어는 자음만 있을 뿐 모음이 없는 글자였다. 그러므로 원래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록된 신명사문자 곧 "요오드 헤 와우 헤"라는 자음도 사실은 '나의 주님'을 뜻하는 '아도나이'의 모음을 가져다 거기에 붙여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학자들이 연구해 본 결과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라는 발음보다는 '야훼'가 훨씬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구약 시대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혹은 '야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이름을 '3인칭 미완료'로서 말씀하신 것이요, 하나님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는 1인칭 시점으로 말씀하셨기에 그 음가가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하여 학자들이 찾아낸 하나님의 이름은 '아하야[흐]'라는 이름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축약형이 '야[흐]'이기 때문이다(예: 이사야, 예레미야, 할렐루야 ...). 그러니까 원래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혹은 '야훼')가 아니라 '아하야[흐]'였던 것이다.

 

4.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알려 준 진짜 하나님의 이름의 이름은 무엇이었는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혹은 '야훼')정도로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정확한 하나님의 이름은 '아하야[흐]'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처음에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계시할 때에는 어떤 발음이었는가? 그것은 출애굽기 3장 14절을 맛소라 텍스트로 보면 나온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이름은 '에흐예'이다. 그러니까 출3:14에 나오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문구는 히브리어로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로 되어 있다. 이를 번역하면, "나는 에흐예이다"이다. 그러니까 출3:14에 처음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에흐예'였던 것이다. 하지만 신학자들이 과연 '에흐예'라는 발음이 정말 적합한 것인지를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에흐예'라고 읽을 것이 아니라, '아하야[흐]'라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보다 더 정확한 진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발음은 '아하야[흐]'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하야[흐]'란 '아'(히브리어로 '나'라는 뜻)에다가 '하야'라는 동사가 합쳐진 단어이다. 여기서 '하야'라는 동사는 영어로 be동사로서 그 뜻은 "있다" 혹은 "~이다"이다. 그러니까 '아하야[흐]'라는 하나님의 이름의 뜻은 "나는 '나는 ~이다'이다" 혹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아하야[흐]'는 히브리어 알파벳 첫 글자인 '알렢' 더하기 '야하[흐]'로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원래는 '아하야[흐] 아쉐르 아하야[흐]'여야 함)라는 뜻은 "나는 '나는 알파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일 수도 있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것은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가 무슨 뜻인지를 헬라어 구약 성경(70인역, LXX)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에고 에이미 호 온'이다. '에고'는 1인칭 '나'라는 뜻이요, '에이미'는 be동사로서 '있다' 혹은 '~이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호 온'은 '하야'동사(be동사)의 동사 분사 현재 능동태 구문으로서, '호 온'만을 따로 해석한다면, "이제도 계시는 이"인 것이다. 요한계시록 1:8에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문구에서 맨 앞에 나오는 문구(호 온)를 그대로 옮겨서 쓰고 있는 것이다. 결국 '여호와'(혹은 '야훼')나 '아하야[흐]'의 이름의 뜻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이거나 "나는 나는 ~이다고 하는 이다"의 뜻인 것을 알 수 있다. 

 

5.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수'라는 이름의 용례가 가르쳐 주는 사실은 무엇인가? 

  요한계시록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총 12번 나온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라는 이름도 이 땅에 속한 이름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이름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7'은 이 땅의 완전수를 뜻하고, '12'는 하늘의 완전수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2번의 예수의 이름 가운데, '예수'라는 이름이 '그리스도'라는 직책과 더불어 쓰인 것은 3번이다(계1:1,2,5). 이 때 '예수'라는 말은 특별히 그분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리스도'라는 것은 그분의 직책을 가리키는 것이다. 고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한 것은 곧 그분의 이름과 그분의 직책을 함께 명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아홉 차례 더 '예수'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것들 중에서 여섯 개는 예수님을 믿게 되는 자가 환난을 받을 수도 있고 왕국에 참여할 수도 있으며, 참음(인내)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차례는 그것이 주 하나님과 관련되어져서 표현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한 용례는 "나 예수는...(계22:16)"이라는 표현이 한 번, 그리고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의 문구 속에서 두 번 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가서 불려지는 예수님의 명칭들 셋의 경우를 보면, 이 세 가지의 것들은 예수께서 스스로 계시는 한 분 하나님이심과 더불어 그분에게는 못할 것이 없는 '전능한 분'이신 것을 드러내 주는 표현들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불려지던 '예수'라는 이름이 천국에서도 동일하게 계속 사용된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한 번 쓰인 이름은 영원히 기억되는 이름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 이름이 '정병진'이라고 치자, 그러면 그때 구원을 받았으면 천국 집의 문패에도 역시 한글로 '정병진'이라고 쓰여진다는 것이다. 그렇다. 결국 '예수'라는 이름은 예수께서 누군지를 계시하는 이름으로 이 땅에서 쓰였지만, 예수께서 그 이름으로 충성함으로서 천국에서도 그대로 그 이름이 사용되는 것이다. 우리의 이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름이 천국에서도 불려질 이름답게 이 땅에서 부합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1] 창세기강해(08) 하나님의 진짜 이름은 무엇인가(출3:13~15)_2021-02-03(수) https://youtu.be/qvFFH9TdGos

[참고2] 창세기강해(12) 아하야흐(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요5:43)_2021-02-07(주일) https://youtu.be/09LHNpumiHM

 

2022년 06월 02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28) 왜 창세기 2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주어가 바뀌었는가?(창2:4~7)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xykIABU3ZW0  [혹은 https://tv.naver.com/v/18690069  ]

 

1.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창1:1~2:3)의 주어는 누구며, 창2:4~3장의 주어는 누구인가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기사(창1:1~2:3)의 주어는 "하나님(엘로힘)"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천지만물의 창조기사는 2장 3절까지 이어집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 4절에 가면 3장 24절까지 주어가 바뀝니다. 주어가 "엘로힘"에서 "여호와 엘로힘"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2. 창세기 2장에서 주어가 바뀌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요? 

  사실 창세기 2:4부터 주어가 바뀌었다면 그럴만한 어떤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옛날 구약학자들은 주어가 바뀐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해결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즉 그것은 창세기의 저자(기록자)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했고, 아니면 인간의 이중창조라는 괴상한 교리를 만들어 주장함으로서 해결하려고 시도했습니다. 먼저 창세기의 저자가 다르다는 주장은 신명기에 나오는 기사 즉 "모세가 죽었다"는 기사를 모세를 쓸 수 없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창세기의 기사도 누군가가 여러 사람이 편집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주어가 다르고 뉘앙스가 다르다보니, 창세기 1장의 기록자와 창세기 2장의 기록자는 같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이중창조를 주장하시는 분은 이렇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엘로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는데 이때 하나님께서는 영이 없는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고, 창세기 2장의 아담과 하와의 창조는 영이 있는 사람을 창조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일리가 있어보이나, 그것은 성경 전체에 나오는 말씀과는 위배되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고로 우리는 창세기 2:4~3장까지 주어가 바뀌었다는 것을 창세기의 기록자의 문제나 인간의 이중창조 같은 주장으로 몰아갈 것이 아니라, 성경본문에서 그 말씀하고 있는 이유를 찾아보야 합니다. 

 

3.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의 주어가 "여호와 하나님"으로 바뀐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럼. 창세기 2장 4절부터 하나님에 대한 주어가 "엘로힘'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바뀐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요? 먼저 알 것은 "여호와"라는 명칭은 고유명사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고, "엘로힘'이라는 명칭은 일반명사로서 신적인 존재 곧 신을 지칭하는 명사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인 "여호와"라는 명칭을 굳이 쓰게 하셨는지에 주안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것은 출애굽기 3장에 가서 비로소 확인할 수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알려주시면서, 적어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도 알려주지 아니한 이름이라고 했기 때문이요, 그때부터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되고 있는 성경기록들을 전부 다 살펴보면, 거기에는 어떤 특별한 점들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왜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계시하신 것인가요?

  사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엘로힘)이라는 명칭은 복수형태를 가진 신적 존재에 대한 일반명사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명칭이 "엘로힘"이라고 해서 이 주어를 받는 동사가 복수동사일 것 같지만 아닙니다. 전부다 "단수"로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신 말씀을 해석할 때,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다 공히 천지만물의 창조에 관여하신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해석입니다(사44:24). 그러한 해석이 틀렸다는 것은 구약학자들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 옆에 있는 천사들을 지칭하기 때문입니다(이에 관한 증거는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한 자 없이 홀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44:24).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엘로힘"이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그분이 주로 피조물과는 구별되시는 분 곧 전능하신 창조주라는 관점에서 자신을 말씀하실 때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굳이 "여호와"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어떤 점을 강조하려고 그런 것인가요? 그것은 첫째,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통하여 당신만이 스스로 계신 자존자요, 모든 것을 있게 만드시는 분이요, 그분만이 시작이시며 완성자이신 것을 강조하실 때에 그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출3:14~16). 둘째,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어떤 약속을 하시고 또한 그렇게 한 번 말씀하신 약속(언약)은 반드시 지키신다는 관점에서 당신자신을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최초언약체결식이 나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과의 사이에 선악과 취식금지명령을 체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2:16~17). 그러니까 창세기 2장의 기사는 창세기 1장의 기사들 중에서 중요한 부분만을 끄집어 내어 확대한 것이요, 그중에서 몇 가지만을 모아놓은(콜렉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고로, 창세기 2장의 기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계시하시면서 오직 당신만이 모든 것을 시작하시고 당신이 끝내신다는 것 곧 그분만이 알파와 오메가 되시며,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것을 드러내기 위해 주어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다른 분이 아니라, 아담에게 직접 나타나 찾아가 그와 언약을 체결하셨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주어가 바뀌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셋째, 창세기 2장의 주어가 바뀐 이유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주 하나님은 다른 신적 존재가 아니라, 바로 "나 여호와"라는 것을 분명히 해두기 위함이라도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기사를 보면, 창세기의 1장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던 하나님이 곧 "나 여호와"라고 계속해서 일부러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보십시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11)",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출31:17). 

 

5. 왜 우리는 홀로 한 분이셨던 하나님께서 홀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하나요?

   오늘날 우리가 창세기를 포함하여 구약성경을 읽을 때에 주의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성경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이 등장하고 있지 아니하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구약시대에는 홀로 한 분이신 여호와께서 나타나 활동하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잘못 보고 잘못 해석했다가는 자칫 이단에 빠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굳이 하나님을 세 분으로 나누려하다보면,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믿는 종교가 나올 수 있고, 하나님은 아버지도 계시고 아들도 있는데 왜 하나님 어머니는 없겠느냐면서 "어머니 하나님"을 주장하는 이단도 덩달아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여호와"와 "알라"는 하나님에 대한 동일한 이름이며, 단지 표현만 다를 뿐이라고 하면서 기독교와 타종교를 연합시키려는 종교다원주의가 여기에서 나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홀로 한 분이신 여호와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혜로", 그리고 "하나님의 영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란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이분은 한 분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실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창세 이전부터 이미 하나님의 마음 속에는 그리스도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시간 밖에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시간 안에 통제 받지 아니하시며, 언제나 현재로서 그리스도를 하나님 자신 안에 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비로소 밖으로 나오실 때가 있었으니, 그때는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동정녀 마리아를 태를 빌려 태어나신 바로 그때입니다. 그때부터는 하나님께서도 성부와 성자와 동시에 존재하시면서 일하셨습니다. 물론 성령은 이미 이 세상에 보내어진 하나님의 영으로서 계속해서 존재하고 계셨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늘 저녁(금요기도회)에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2021년 02월 26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09) 왜 신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일까?(요8:24~28)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qtSi0PRDiEg  [혹은  https://tv.naver.com/v/18302497 ]

 

1.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우리 하나님(엘로힘)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이름은 신명사문자(יהוה)인데, 우리말 개역성경에 따르면 "여호와"입니다(출3:15, 사42:8). 그런데 그 이름의 실제 발음이 어떤 것인지를 아무도 알지 못한 채 있습니다(참고로,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읽을 때에는 지금도 "아도나이(나의 주님)"이라고 읽을 뿐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출20:7의 제2계명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다보니, 그만 그 음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고로 신명사문자(יהוה)를 읽을 때에는 "아도나이"라고 읽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은 신명사문자(יהוה)로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신명사문자(יהוה)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이것을 읽는다면, "요오드, 헤, 와우, 헤"입니다. "요오드"는 어떻게 발음하느냐에 따라서 그 음가가 "Y 혹은 J"가 될 수 있고, "와우"는  "W 혹은 V"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명사문자(יהוה)는 읽는 이에 따라 "야훼(YHWH)"라고도 읽을 수도 있고, "여호와(JHVA)"라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16세기에 비로소 사람들은 신명사문자를 "여호와"라고 읽었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야훼"라고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출3:14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이름은 그 뜻으로 치자면, "에흐에" 혹은 "아하야[흐]"라고도 읽을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이름인 "야훼" 혹은 "여호와"는 어떤 뜻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렇다면,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소개하실 때에 "אָﬣיּﬣ"(에흐예 혹은 아하야[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제가 보기에는 아하야[흐]가 더 훨씬 더 원래 글자와 가까울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아하야[흐]"는 어떤 뜻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것은 "아(1인칭단수)+하야[흐](나는~이다)"가 합쳐진 단어로서, "나는 ~이다" 혹은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접두어 "아"는 히브리어의 첫글자로서 "알렙"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אָﬣיּﬣ"(아하야[흐])는 "나는 알렙이다. 나는 알파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요한계시록 22:13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자신을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마침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 자신을 알파라고 소개하시면서 시작하셨던 하나님께서 장차 예수께서 오메가로 재림하심으로 모든 것을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신약성경에서는 왜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혹은 야훼)"라고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구약성경에서 5,321번이 쓰였던 "여호와"라는 이름은 신약성경에 들어와서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손치더라도 신약시대 사람들은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에는 적어도 "여호와"라는 단어를 사용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 어디에도 "여호와"라는 단어가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간단하게, 신약성경의 기록자들이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에 구약성경의 히브리어사본인 맛소라텍스트에서 인용하지 않고, 전부다 구약히브리어성경을 가지고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LXX)를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70인역에서 "여호와"라는 단어는 전부다 "퀴리오스("주")"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시118:25)"라는 말도 신약성경에서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22:32)"라고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이유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실제적인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요? 그것은 다음의 2가지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혹은 야훼)"인지, "에흐에(혹은 아하야[흐])"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아하야[흐]"의 이름은 그 이름의 뜻에서 온 이름 같고, "야훼"의 이름은 그 단어의 음가에서 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둘째, 구약의 자신을 "아하야[흐]"라고 소개하신 분이 신약시대에는 "예수"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4.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께서는유대인들에게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하셨나요?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무려 세 번 씩이나 자신이 누군지를 묻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는 "나는 ~이다" 혹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의 문장인 "에고 에이미"는 문장을 사용하셨습니다(요8:24,28,58).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그때 자신을 "아하야[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말 개역성경에서는 "내가 그인 줄"을 나온 본문이 원래는 히브리어의 "아하야[흐]에 해당하는 "에고 에이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원문에 맞추어 이 문장을 다시 번역해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출3:14~15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하야[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아하야[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요8: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아하야[흐]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아하야[흐]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8: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나는 아하야[흐]이니라 하시니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자신을 "아하야[흐]"라고 소개하신 분께서 이제는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아하야[흐]"라고 소개하셨고, 자신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셨으니,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은 더이상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왜나하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5. 구약의 하나님의 이름이었던 "아하야[흐]"가 신약의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놀랍게도 구약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단어 "아하야[흐]"가 신약의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것은 출3:15의 말씀에 고스란히 암시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하야[흐]"를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3: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다시 말해, 출애굽기 3:14에서 자신을 "아하야흐"라고 소개하신 분이 15절에는 "여호와,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하야[흐]"가 누군지는 "여호와(야훼))"에다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합치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소개하실 때에 굳이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여호와께서 기한에 이르면 사라에게서 아들로 오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창18:10,14).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은 후에 진실로 기뻐했던 이유는 자신이 100세에  아들을 얻어서라기보다는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아들로 오셨음을 보고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 아하야[흐]께서는 비로소 아들로 오셨습니다. 그러면 응당 자기의 백성들이 자신의 옴을 기뻐하고 환영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채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과거 "아브라함은 나에게 이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8:56). 그렇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여호와가 아니라 아들로 오신 아하야[흐]께서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굳이 구약의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야훼)"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미 아하야[흐]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 "예수"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2021년 02월 04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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