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예수님 시대 이후부터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된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장소는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못 들어가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대표는 '죄'다. 왜 그런가? 그 죄를 없이하려고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게 해 주는 최소조건은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충분조건은 왜 필요한 것인가? 이 한 편의 설교가 우리의 미래를 엄청나게 바꿔놓을 것이다.

 

2022-02-27(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천국복음(07)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3가지 조건은 무엇인가?(마21:31~3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1OX0pPhFbHo [혹은 https://tv.naver.com/v/25403493

 

 

1. 들어가며

  이 세상 사람들 중에서 누가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구제를 많이 하고 고아를 돌보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돌아보며, 사회사업에 힘쓴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가? 아니면 이 세상 이웃에게 전혀 사랑의 손길도 베풀지 않고 인색하게 살았지만 그가 예수님을 믿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인가? 이제 와 돌아보니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한지도 벌써 8년 4개월이 다 되었다. 그동안 오직 한 길을 달려왔다.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성경에 나온 대로 전하고 또 전했다. 그러다 보니 성경에 나오는 '천국'(하늘들의 왕국)과 또한 셋째 하늘에 실재하고 있는 천국에 관한 영적인 비밀들을 많이 깨닫게 되었다(아니 정확히 하나님께서 알려 주셨다고 해야 옳다). 그러니 오직 주님의 은혜로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지금까지 전했던 천국입성 조건에 관한 모든 사실들을 종합적으로 나눠 보려고 한다. 이 말씀 하나로서 우리는 내가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며, 내가 과연 천국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어떤 신분으로 그곳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메시지를 영원히 기억하길 바란다. 

 

2. 천국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천국'이란 사실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용어다. 헬라어로 보면, '하늘들의 왕국'을 줄여서 '천국'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늘들'이라는 말은 하늘이 셋이 있다는 뜻일 수도 있고, 구약시대에 하늘을 '샤마임'이라는 복수 용어로 사용하고 있어서 그것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천국은 상태적인 천국만을 가키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장소적인 천국'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은 후에 부활체가 들어가는 장소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구원이 완성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마귀가 없다. 귀신도 없고 죄도 죽음도 없다. 거기는 슬픔도 없고, 아픔도 없고, 어둠도 없다. 그곳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통치만이 실현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으며, 그 보좌 위에 이기고 승천하신 예수께서 앉아 계신다(계3:21). 그러므로 천국이라는 개념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잠시 실현될 때도 상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것이다. 

 

3.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최소 조건과 충분조건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장소적인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최소 조건은 무엇이며, 충분조건은 무엇인가? 여기서 최소 조건이라는 말은 이것만 갖추면 천국에는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뜻하며, 충분조건은 천국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영원토록 누릴 영광과 신분과 지위까지 얻을 수 있는 조건을 가리킨다. 어떤 이는 천국에 들어가려면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믿음만 있으면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은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은 믿음이 있기에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은 그날에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한 채 밖으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떤 이는 행함으로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이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행함이 없이 믿음과 회개로 천국에 들어간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한 편(아마 오른편) 강도의 경우인데, 그 강도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였고 예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했으며, 죽으면 낙원(천국)에 들어간다는 것까지 알았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위해 행한 일은 없었다. 그래도 그는 그날 주님과 함께 낙원(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그것은 한 마디로 '믿고 회개하는 것'이다(막1:15, 마4:17, 계22:14). 믿고 회개하는 자가 구원을 받아 궁극적인 장소인 천국 안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4.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성경 전체를 살펴보았을 때,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최소 조건에 속한 것으로서 2가지이며, 충분조건으로 보면 다 합쳐서 3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럼, 먼저 최소 조건은 무엇인가? 첫째 조건은 그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그렇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물'이란 죄를 씻는 물 세례와 같은 것을 의미하며, 성령은 성령을 받는 성령 세례를 가리키는 것이다. 즉 죄사함과 성령을 받는 것이다. 그런 자가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것이고, 이렇게 거듭 태어난 자가 결국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죄사함'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에 회심의 회개를 통하여 과거의 지은 죄를 용서받는 것을 가리키며,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의 내주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는 하나님의 생명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었다(요5:26). 그러다가 그분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당신 대신 보내 주셨다. 생명이신 예수께서 생명의 영으로 성령을 대신 보내 주신 것이다(고전15:45). 그러므로 오순절 이후에 오신 성령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들어와 하나님의 생명을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사람에게 들어간 것을 두고 거듭났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사자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사자의 생명이 있어야 하고, 독수리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독수리의 생명을 지녀야 하듯이, 사람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생명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생명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사함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대부분 은혜와 선물로서 주어진다. 

 

5.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백하는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 예수믿을 때에는 회심으로서의 회개를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자백하는 회개를 해야 하는 것이다(요일1:9). 왜 그런가? 예수님을 믿었다고 할지라도 죄된 본성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귀신들이 우리를 미혹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라도 죄를 짓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살다 보면 죄를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에는 반드시 자백하는 회개를 하라고 말씀하셨다(요일1:9). 그래야만 죄사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예수님의 피로 깨끗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반드시 자백하는 회개를 해야 한다. 죽는 그날까지 말이다. 만일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죄를 지었는데도 자백하지 않고 남겨두었거나 숨겨 두거나 회개를 뒤로 미룬 것이 있다면, 그는 그 죄로 인하여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21:8에 의하면, 믿는 자라도 비겁하여 주님을 부인한다거나 우상 숭배한다거나 음행하는 자는 반드시 불과 유황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하셨다. 거듭나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라도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어린양의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진다고 하셨다(계3:5, 21:27). 그러면 어떤 자는 새 예루살렘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밖에 남겨질 자도 있을 것이며(계22:15), 어떤 자는 성밖의 더 바깥쪽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자도 있을 것이다(마25:30). 그리고 지옥 곧 불못에 떨어질 자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지옥도 3가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그 후에는 자백하는 회개를 해야 천국에 들어간다. 예수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는데, 그것은 성만찬 후에 세족식 때에 하셨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이다(요13:10). 이미 예수믿을 때에 죄사함을 받은 자라도 살다 보면 짓는 죄로 인하여 더럽혀지기 때문에 그 더럽혀진 것을 씻어서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라도 회개는 필수적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국에 들어가는 최소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은혜로 주어진다기보다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해야 하는 쪽에 훨씬 가깝다. 

 

6. 우리는 왜 내가 짓지도 않은 조상들의 우상 숭배의 죄들을 회개해야 하는가?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는 조상들의 죄들도 회개하라고 권면하고 또한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짓지도 아니한 조상들이 지은 죄들을 왜 내가 회개해야 하는가?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되는데,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회개할 것은 우리 자신이 지은 죄인 것이지 자기 조상들이 지은 죄는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조상들이 지은 죄를 회개한다고 해서 그들의 죄가 용서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자기 죄 때문에 지옥에 던져진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상들의 죄를 내가 대신 회개하는 것은 사실 죽은 조상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조상들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그 결과들이 오늘 나와 내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 조상들이 우상 숭배의 죄를 지으면 그 죄값을 3~4대까지 물린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출20:5). 그런데 영적으로 보니,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뱀들이 들어오게 되어 있다(창3:14, 마12:43~45). 그런데 이러한 뱀들은 더러운 영들이고 독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그 결과들이 나와 내 후손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누군가가 회개하여 그 죄를 씻어내지 않는다면 그 죄값으로 인하여 역사하고 있는 악한 영들 곧 뱀들이 우리와 우리의 후손의 몸과 환경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대신 회개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무 사람의 죄를 회개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꼭 자기의 조상들의 죄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조상들이 범죄했을 때에 우리도 씨[앗으]로서 함께 참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조상들의 허리에서 나온 또 하나의 조상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상들의 죄를 회개할수록 내게는 더욱 좋은 것이다. 사실 우리 한국 사람은 2~3대만 올라가면 완전 우상 숭배자였다. 그것도 수천 년 동안 수십 대를 그렇게 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더러운 영들이 뭉쳐지고 뭉쳐져서 내려오고 그리고 또 내려오고 있었기에, 누군가는 이 악한 영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어려움은 지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여 그것을 내 몸과 내 환경에서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조상들의 죄를 내가 회개해야 하는 이유이다. 

 

7.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세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세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요 맡겨 주신 일에 충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 번째 조건은 천국 입성의 필수적인 조건은 아니다. 믿음과 회개로 거듭나서 지은 죄를 지금도 자백하여 회개하고 있다면 그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에 충분히 들어가려면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천국에서 영광스러운 지위와 신분을 얻기 위함인데, 우리가 천국에서 얻을 이 지위와 신분은 영원무궁토록 우리가 누릴 것이기 때문에, 기왕이면 천국에 들어갈 때에 천국에서 누릴 영광스러운 신분과 지위를 이 땅에서 준비해 가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요, 나에게 죄지은 자라도 용서해 주는 것이요, 상처입고 고통받고 힘들어하는 우리의 이웃을 하나님의 친구로 여기고 돌보아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자기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다.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게 하기 위하여, 그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그렇게 행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구약의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요 신약의 새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길수록 우리는 천국에서 더 높은 신분과 지위를 얻게 될 것이다.

  둘째, 나에게 맡겨 주신 사명에 충성해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몸된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이며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믿는 이들 중에는 이미 천국에서부터 어떤 사명을 부여받아 이 땅에 들어온 사람들도 있다. 주님께서 그 사람을 그러한 그릇으로 쓰시려고 그렇게 결정하시고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토기장이가 흙으로 하나의 그릇을 만들되 자기가 필요한 그릇을 만들듯이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만들어 보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어 보내고,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어 보내신다. 그렇지만 무턱대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보시고 안배하여 그렇게 해 주신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명을 가지고 온 자들은 맡겨 주신 일에 충성해야 한다. 만약 사명을 맡은 자가 있는데 그가 사명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는 반드시 천국에 못 들어간다. 그는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지 못한 채, 바깥 더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마25:13~30). 그러므로 맡은 자는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충성의 마지막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사명을 위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그분을 위하여 나의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계2:10). 죽기까지 충성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그런 자에게 저 하늘에서 놀라운 신분을 주실 것이다. 사명을 맡은 자는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8. 천국에 들어가서 우리가 누리게 될 4가지 축복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말씀대로 순종하고 맡겨 주신 일에 충성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어떤 축복을 누리게 되는가? 그것은 총 4가지다. 첫째는 더 높은 신분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제일 높은 신분이란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것이다. 그리고 섬기는 자가 아니라 섬김을 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만약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적고 충성하는 것도 적었다면 그는 천국에 들어가서 섬기는 자로 살 것이다(마20:26~27). 이것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겠지만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렇게 말씀해 주셨고, 천국에 가 보면 또한 금방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천국에서 섬기는 자로 산다고 해서 그것이 비참하게 느껴지거나 슬프게 느껴지거나 자존심 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너무 염려하지는 말라. 기쁨과 감사함으로 섬기는 곳이 천국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더 앞쪽의 보좌 자리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천국에서는 마냥 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예배를 드린다. 또한 천국에 들어오는 성도들을 환영하기도 한다. 그때에 천국 성도들은 자기의 보좌에 앉게 되는데, 천국의 무수한 성도들 가운데 144,000명만이 자기의 보좌에 앉게 된다. 하나님의 보좌에 가까울수록 높은 신분을 가진 자가 앉는다. 그런데 이 보좌 자리는 영구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은 오직 이 세상에 우리가 살면서 준비해 갈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순종하고 충성함으로 말이다. 셋째는 여러 종류의 면류관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천국에 가면 다양한 종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 면류관의 종류와 크기와 모양이 다르며, 거기에 박혀 있는 보석의 종류와 크기와 모양도 다르다. 천국에서는 이 세상에서 그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섬김의 면류관, 사랑의 면류관, 충성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등 다양한 면류관이 주어진다. 어떤 이는 20개 이상의 면류관을 받는 자도 있다. 그렇다고 고개가 아파서 어떻게 그것을 쓰겠느냐고 말하지 말라. 무게는 이 세상의 무게가 아니기 때문이다. 넷째는 멋지게 지어진 천국집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천국에 있는 집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면서 헌신할 때에 지어진다. 그때마다 천사가 그러한 사실을 보고하면, 그것이 행위책에 기록되고, 행위책에 기록된 대로 집이 지어지는 것이다. 집은 우리가 올리는 충성에 따라 연건평이 정해지고, 집의 크기가 정해지며 그 안에 들어갈 인테리어가 정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이 세상에서 바라고 소망하는 것이 천국에서도 나에게 주어진다. 장미꽃을 좋아한다면 아마 화단에 장미꽃이 심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새를 좋아하는 자들은 새들도 정원에서 노래할 터인데, 새들의 숫자도 이미 정해져 있다. 

 

9. 나오며

  그렇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회개하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만이 하나님의 왕국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지은 자범죄들을 날마다 회개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과 우리의 주변에는, 우리 조상들이 지은 죄 때문에 우리에게 내려온 악한 영들이 내 몸속에 침투해 있거나 내 주변에 진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는 날까지 회개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진실로 예수믿는 자가 되었다면, 그때부터는 자기의 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조상들이 지은 죄들까지 회개를 지속할 필요가 있다. 그럴수록 악한 영들이 우리 몸에서 제거되고 우리의 환경에서 떠나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귀신들이 떠나간다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부터는 주님의 말씀에 더욱 순종하고, 뿐만 아니라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한다.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늘에서 우리가 받을 영광이 더 크게 준비되기 때문이다. 그날 이렇게 충성한 자는 더 영광스러운 신분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 영광스러운 보좌 자리와 면류관과 천국집을 하사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잠시만 누리다가 반납하는 것이 아니다. 영원토록 우리가 누릴 영광스러운 것이다. 해와 달과 별들이 그 빛의 강도가 다르듯, 천국에서 우리가 받을 영광도 각자 다른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다 이 땅에서 우리가 행한대로 받는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행한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염려하지는 말라. 오후 5시에 들어와서 한 시간만 일했던 자라도 주님은 하루의 품삯을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라. 충성하라. 그러면 영광스러운 우리의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2022년 02월 27일(주일)

정병진목사

 

 

하나님께서 함께했던 요셉은 왜 형통의 축복을 받은 것인가? 그도 하나님의 사람이고 나도 하나님의 사람이며, 그도 성실하게 살았던 것처럼 나도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왜 그는 형통의 축복을 받았지만 나는 그러한 축복이 뒤따라오지 않는가? 여기 2가지 다른 조건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삶 뿐만 아니라 신앙에 있어서도 성공과 실패의 중요한 잣대가 될 것이다.

2021-07-11(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창세기강해(146) 이긴 자의 예표인 요셉의 삶에서 배우는 소중한 교훈(창39:1~6)
https://youtu.be/Rb_vli5nzdA  [혹은  https://tv.naver.com/v/21275980 ]

 

1. 들어가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이야기를 읽을 때에 2가지 반응을 보인다. 하나는 "참으로 요셉은 좋겠다"고 하면서 그를 부러워하는 것이다. 즉 요셉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길래 하나님께서 요셉을 사랑하셔서 그와 함께 계시고 그로 하여금 형통의 축복이 따라다니게 했는지 요셉은 참으로 좋겠다고 부러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는 이것의 반대적인 것으로서, 왜 하나님께서는 요셉과는 함께 해주시고 나와는 함께 안 해주셔서 내게는 요셉과 같은 형통한 축복이 따라오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한데서 오는 오해 중의 오해다. 왜냐하면 요셉은 그가 손대는 모든 일이 형통할 수밖에 없던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을 때에 요셉에게는 곧바로 어떤 결과물이 도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을 때에 왜 그에게 형통함의 축복이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통전적으로 살펴보고, 또한 오늘 나도 요셉처럼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요셉이 누린 바 그러한 형통의 축복을 함께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 하나님께서는 요셉만 편애하신 것인가?

  얼핏 보기에 하나님은 요셉만 편애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창세기 39:2~3의 말씀만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에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만 냉정을 찾고 성경을 보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잘못 오해하고 성경을 읽고 있음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신약시대 이후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같은 사람에게만 함께 하시고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그것은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디 그뿐인가? 예수께서는 당신이 제자들의 곁을 떠나가시려 하자 걱정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다. 내가 떠나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 줄 것이다. 그러면 그분이 내 대신 와서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순절 성령강림이후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성도들은 없다. 다 함께 하신다. 문제는 왜 요셉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을 때 형통함이 찾아왔는데, 우리도 똑같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데에도 우리에게서는 형통함의 축복이 나타나지 않느냐는 것이다. 

 

3. 요셉이 형통함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첫번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함께 했을 때에 그에게는 형통함의 축복이 나타났는데, 우리에게는 그것이 잘 나타나지 않는지 그 이유를 확실이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선 알 것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듯이, 심지 않았는데 거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가 요셉을 위해 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던 것은 요셉이 잘 해서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그가 성실한 사람이었고 또한 충성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한편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다는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정말 요셉처럼 성실하고 충성된 성도가 많지만 형통한 삶을 살지 못하는 성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성도들 중에 성실히 살았지만 요셉처럼 모두가 다 형통함의 축복을 누리고 사는 것은 아닌 것이다. 뭔가 다른 문제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요셉 이전 세대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찾아보아야 한다

  그런데 놀라지 말라. 하나님께서 누구누구와 함께 있을 것이다는 표현이 특정한 사람에게만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는 장차 그에게 아들을 주겠다고도 하시고 땅을 주시겠다고도 몇 번 씩이고 말씀하셨지만 단 한 번도 아브라함과는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었던 이삭과 그리고 그의 손자였던 야곱에게는 그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을 처음부터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는 당신이 그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던 것일까? 그것은 사실 알고 보면 쉽고 간단한데 모를 때에는 어렵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아직 저주가 남아 있었기에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시겠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가 회개하여 진정 저주로부터 벗어나자 하나님께서는 그 후손들부터 그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은 결코 하지 않으셨다. 그를 복이 되게 하시겠다고만 약속하셨고, 땅의 모든 사람들이 장차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만 말씀하셨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장차 자손도 줄 것이고, 땅(기업)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너와 함께 할 것이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서 저주가 완전히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브라함에게는 가문의 저주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가문은 일찍 사람이 죽거나 임신을 못하는 저주가 있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조상들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할아버지도 일찍 죽었고 친 형도 일찍 죽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마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임의 저주 가운데 놓여있었다. 그 집안이 우상숭배의 저주 가운데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역사는 저주에서 빠져나오는 사람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비로소 할례언약을 받으면서 회개하자, 그에게서 저주는 완전히 떠나가게 된다. 불임이었던 아내 사라가 곧바로 임신을 하게 되었고 1년 뒤에 이삭을 출산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아들과 손자는 달랐다. 아브라함의 아들이었던 이삭이나 아브라함의 손자였던 야곱에게는 처음부터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이삭과 야곱에게나 둘 다 이미 가문의 저주에서 벗어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나타나실 때부터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고 말씀하셨다(창26:2~3). 이는 이삭이 이미 저주에서 벗어난 상태에 있었으니,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이삭과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이삭에게는 곧바로 형통함의 축복이 뒤따라온 것이다. 다시 말해 저주를 벗어난 상태에서 이삭이 열심히 살았기에 그가 손대는 모든 일에 복이 임한 것이다. 성경은 그때에 이삭이 그랄 땅에서 농사를 지었더니 100배의 소출을 거두게 되었고,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가 되었으며, 양과 소는 떼를 이루고 노비도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랄 목자들이 우물을 빼앗아 가면 그냥 넘겨주고 또 다시 우물을 팠는데 놀랍게도 판 곳마다 우물이 나왔던 것이다. 이삭은 이미 저주가 끝난 상태에서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또 어떠했는가? 야곱도 이삭과 마찬가지였다. 그의 할아버지가 이미 저주를 끝낸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야곱도 그가 손대는 모든 일에 형통의 축복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랬다. 야곱이 외삼촌의 양떼를 돌보니 외삼촌의 양떼는 금새 불어나 번성하여 떼를 이루게 되었다(창30:30). 그리고 자신도 외삼촌과 재계약을 맺은 후부터는 양떼와 가족들을 두 떼를 이루어 귀향할 수 있었던 것이다(창32:10). 왜 그럴 수 있었는가? 이는 그의 할아버지였던 아브라함이 이미 회개하여 저주를 끝낸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셉도 그 가문에서 태어났으니 요셉은 기본적으로 저주를 벗어난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요셉도 역시 이삭과 야곱처럼 손대는 모든 일에 복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 요셉이 형통함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두번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요셉이 형통함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유 뿐이었을까? 아니었다. 다른 이유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요셉은 항상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므로 요셉은 그토록 어려운 시련과 고통과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그의 생애 가운데 단 한 번도 절망했다든지, 아니면 원망했다든지, 아니면 비관했다든지 하는 대목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그가 붙든 것이다. 사실 요셉의 삶에 있어서 또 특별한 점 하나는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이 한 번도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요셉의 시대에는 요셉에게 단 한 번도 나타나서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던 것이다. 다만 꿈으로 환상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르쳐 주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요셉에게 하나님은 그분이 보여준 것들이었다. 그래서 요셉은 하나님께서 보여주고 들려준 것을 항상 가슴에 새겼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신 꿈이요 비전(환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꿈을 붙잡으면서 일평생 고난을 이겨냈던 것이다. 역경을 돌파하며 간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이 형통함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두 번째 요소는 그가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끝까지 붙들었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내가 여러가지 환경속에서 마음이 흔들리게 되는 이유는 자신에게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이 없어서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꿈과 비전 다른 말로 사명과 소명이 있는 자는 결코 중간에 좌절하거나 낙망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게 하실 줄로 믿기 때문이다. 요셉에게는 이렇듯 주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5. 요셉이 이긴 자로 보여주었던 5가지의 삶의 모범적인 모습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요셉이 형통함을 입을 수 있었던 이유는 위에서 말한 2가지 뿐인가? 아니다. 요셉은 이긴 자의 전형적인 표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생애 가운데 그가 이긴 자로 살아갔던 것들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것들이 요셉이 형통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겠지만 이런 것들은 얼마나 요셉이 이긴 자로서 이 세상을 살았는지를 알게 해주고, 우리 또한 어떤 부분에서 이긴 자로서의 삶이 부족한 것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요셉이 이긴 자로서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모습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그것은 약 5가지 정도가 있는데, 찬찬히 이것들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요한계시록 2~3장에 기록된 이긴 자들의 삶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여기에 소개되는 5가지 것들은 나중에 한 편의 설교도 다시 등장할 수 있지만 여기서 간략하게나마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다. 

  그렇다. 요셉이 이긴 자였다는 것은 첫째, 그가 항상 부모나 권위를 가진 자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들을 공경하였다는 것이다(창37:12~13). 그랬다. 아버지가 형들의 안부를 물으려고 세겜으로 보내고자 할 때  요셉이 하는 말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가 그랬다. 에베소 교회는 자기를 가르쳤던 사도들을 주님처럼 여기고 섬겼다. 먹을 것도 안 먹고 마실 것도 안 마시면서 사도들을 섬겼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가짜 사도가 찾아왔다. 그때부터 그들은 목회자를 대접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첫사랑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자신은 못먹으면서도 사도들을 대접했던 이기는 자들에게는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계2:2~4). 둘째, 요셉은 언제나 맡겨진 일에 충성했다는 것이다(창39:4, 21~22). 그런데 요한계시록 2장에서도 서머나교회 성도들을 충성스러운 교회의 성도들로 묘사한다. 주님을 위해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자로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요셉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음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지위나 신분을 이용하여 세상의 즐거움이나 향락에 취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버가모교회와 두아디라교회에 주신 말씀을 보면, 이기는 자가 되려면 세상 향락에 취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넷째, 요셉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떤 신들도 자기의 마음에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계2:13., 3:8). 언제 어디에 있든지 요셉은 항상 주님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것이다. 다섯째, 자기를 죽이려고 했으며 결국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렸던 형들이었지만 그들의 죄를 다 용서해주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그들의 가족들도 다 잘 돌보아주겠다고 위로하는 말을 하였다(창50:19~21). 

 

6. 나오며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를 돌아볼 차례가 되었다. 나는 과연 이긴 자의 예표였던 요셉처럼 살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긴 자였던 요셉의 삶의 조건들 7가지 가운데 과연 내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첫째, 나도 과연 조상의 저주를 끊어냈는가? 둘째, 나도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 그리고 소명을 붙들고 있는가? 셋째, 나의 부모나 권위를 가진 자를 공경하고 그들의 말에 순종하고 있는가? 넷째, 맡겨진 일에 충성하고 있는가? 다섯째, 세상 즐거움과 향략을 즐기지 않고 있는가? 여섯째,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들을 혹시 마음에 두고 있지 아니한가? 일곱째,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혔거나 힘들게 했던 사람마저 다 용서해주었는가? 그렇다. 믿음이란 자신의 삶에서 요셉처럼 이긴 자의 삶 중에서 내게 무엇이 부족했는지 그리고 내게는 무엇이 없었는지를 살펴보고, 그것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이제 시작이다. 아직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았다면 그것부터 시작하라. 그 저주 때문에 축복의 첫 단추부터 꿰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주를 끊어낸 다음에 꿈과 비전과 소명을 붙잡고 낙심치 말고 앞으로 나아가자. 그리고 웃어른을 공경하고 맡겨진 일에 충성하며, 세상 즐거움과 향락을 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마저 용서해주면서 앞으로 나아가자.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도 요셉처럼 형통의 축복으로 안내해 주실 것이다. 

 

2021년 07월 11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주께서 도둑같이 오신다는 말씀의 의도는 무엇인가?(벧후3:8~13)_2019-12-30(월)

https://youtu.be/MP8EEEAvzs4

 

1. 예수께서 도둑같이 오신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게서 도둑같이 오신다는 말씀의 뜻은 재림의 은밀성("몰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재림의 돌발성("갑자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남의 물건을 몰래 훔쳐가는 도적같은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도적같이 몰래 오셔서 남의 보물을 훔쳐가는 것이 아니라, 도둑이 기별없이 오는 것처럼 예수께서도 갑자기 오신다는 의미로서 "도적같이"라는 비유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께서 은밀하게 공중에 오신다고 주장하는 환난전휴거론자들 혹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자들의 주장은 크게 빗나간 것입니다. 주님은 은밀하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께서 도둑같이 오신다는 말씀은 누가 말씀한 것인가요?

  예수께서 도둑같이 오신다는 말씀은 예수께서 공생애기간에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으며(마24:43), 부활승천후에 하늘에 계실 때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계16:15). 그리고 사도 바울도 그렇게 말했고(살전5:2), 사도 베드로도 그렇게 말했습니다(벧후3:10). 아래의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마24: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계16:15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살전5: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벧후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3. 예수께서 "도둑같이"오신다는 말씀의 의도는 무엇인가요?

  예수께서 도둑같이 오신다는 말씀의 의도는 사실 주께서 언제 오실른지 모르니 깨어있으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도들은 깨어있어야 하는 것인가요? 그것은 주님이 오시는 날은 심판의 날이 될 것이요 결산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날이 오면 그날에 자신이 어떤 또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날에 자신의 일이 끝마쳐지게 되고, 그날에 심판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로 그날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우리가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지 않도록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4. 도둑같이 오시는 예수님 앞에 성도들은 어떤 모습으로 서야 하나요?

  도둑같이 오시는 예수님 앞에 우리 성도들은 어떤 모습으로 서야 합니까? 위에서 말씀드린 4가지 말씀들과 그 문맥을 다 종합해서 살펴보면 그것은 2가지 모습을 갖추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으로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마24:45). 그리고 둘째는 회개하고 있는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벧후3:9).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날에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아니라, 거꾸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어 주님 앞에 서게 된다면 그날은 그가 지옥형벌 안으로 넣어지게 되는 날이 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엄히 채찍질당하고 위선자들의 받는 형벌에 처하여 거기서(바깥 어두운 곳) 슬피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말씀의 뜻은 그가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는 뜻이기 때문입니다(마24:51). 또한 마찬가지로 그날까지 계속해서 회개를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자는 결국에 더럽혀진 자신 때문에 지옥형벌 안으로 떨어지게 되고 말 것입니다. 사실 주님의 재림이 아직까지 지연되고 있는 이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시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벧후3:9).

 

5. 결국 주님이 도둑같이 오신다는 말씀을 하신 의도는 무엇인가요?

  결국 주님이 도둑같이 오신다는 말씀의 이도는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아무도 알 수가 없으니 언제나 깨어있어서, 첫째로는 맡겨진 일에 충성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요, 둘째는 그날에 심판을 받아 지옥형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 회개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 주님께서 도둑같이 온다는 말씀의 의미는 어떻게 잘못 오용되고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은밀하게 오시니까, 그때 주님이 오신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그래서 휴거받지 못하고 남겨지는 일이 없도록, 날마다 주님이 언제 오시는지 때와 징조를 살펴서 그날을 대비하라는 의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충성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주님의 재림은 은밀성이 아니라 돌발성인데, 그것을 잘못 적용하고 해석한 탓입니다. 그러므로 그때 가서 우왕좌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하고 날마다 회개하고 있어야 합니다. 안타까운 일은 오늘날 종말에 관심을 갖고 있는 자는 상당수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종말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하는 자들은 베리칩(666)이 언제 사람의 몸에 이식될 것인가, 제3의 성전은 예루살렘에 언제 세워질 것인가, 세계를 통치할 세계정부는 언제 등장할 것인가, 핵전쟁은 언제 일어날 것인가 등에 관심을 가질 뿐, 자신이 지금 충성되게 살고 있는지, 자신이 지금 회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자에게는 시간은 허송세월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2019년 12월 30일(월)

정병진목사

  


충성한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 어떻게 해야 충성한 것이라고 인정받을 수가 있을까? 또한 충성과 구원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해, 심판날에 우리의 충성도가 과연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가 충성할 때에는 어떤 것에 충성해야 하며, 충성한 결과로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축복에는 대체 어떤 것이 있을까? 오늘 이 시간에는 충성과 관계된 성경말씀과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의 권고의 말씀을 들어보자.

 

1. 들어가며

  예수님께서는 서머나교회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충성하라"라고 말씀하신다(계2:10). 하지만 당시 서머나교회는 신앙적인 고난과 경제적인 고난을 동시에 겪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충성할 것을 명령하신다. 다시 말해, 신앙적인 고난과 경제적인 고난까지 이겨낼 수 있는 처방전으로서 충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충성한다"는 뜻은 대체 어떤 것일까?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충성이 필요하며, 그 의미는 무엇이며, 그 결과가 무엇인지도 함께 알아보자.

 

2.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충성이 필요한가?

  첫째,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왜 충성이 필요한지부터 살펴보자.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충성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도 더러 있다. "충성하지 않는 것이 그리 죄될 것도 아닌데, 굳이 충성할 필요가 있을까?"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다. 충성하지 않는 것이 결국에는 죄로 이어지게 되며, 영혼이 구원을 받는 일에 있어서도 엄청나게 나쁜 영향을 끼칠 수가 있기 때문이다.

 

3. 사람은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여러분은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는다고 생각해 보았는가? 신구약성경이 가르쳐주는 바에 의하면,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다(막1:15).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필수적으로 자신이 지은 죄를 시인하고 통회자복해야 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우리 죄인들을 위해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이다.

 

가. 오직 믿음으로서인가?

  그런데 아직까지도 어떤 믿는 이들은 구원이 "오직 믿음만으로" 얻는 것인 줄 아는 이들도 있다. 안타깝게도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얻는다는 말씀은 거의 없다. 한편 여기에서 언급하는 '구원'은 사람이 죽어서 그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얻어 천국에 들어가려면, 믿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믿음에다가 반드시 회개가 필요하다. 사람은 예수님을 믿어도 여전히 죄를 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라고 말씀하셨다.

 

나. 아니면 믿음과 행함 둘 다가 필요한가?

  그런데 믿는 이들 중에 어떤 이들은 사람이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려면 "믿음과 행함"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도 정확한 구원의 조건은 아니다. 왜냐하면 행함이 어느 정도가 있어야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고무줄 행위 구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은총과 행위를 강조하는 천주교에서 신앙생활하는 자는 구원받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천주교인들은 대부분 자신의 영혼이 연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죽은 부모님의 영혼을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기놓기 위해, 자녀들이 통 크게 헌금하는 일이 종종 많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라도, 성인들의 잉여공로를 사서 자신의 부모님을 천국에 보내드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를 희구하기에, 어떤 이는 죽을 때에 자신의 재산을 교회에게 기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듯 선한 행위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직 예수님의 구속의 피로 우리의 죄가 씻겨질 때에 우리가 구원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구원은 절대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자신이 죄인인지도 모르며, 지은 죄를 회개하지도 않는데 단지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죄가 저절로 씻겨지는 것이 아님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죄를 씻기 위해 모든 사람들은 다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다. 행함을 강조할 때에 생기는 폐단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이 믿음과 행위로 이뤄진다고 굳이 믿으려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자는 다음의 내용에 주의하라. 만약 구원의 요소에 행함을 추가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생각해보았는가? 그때에는 2가지 놀라운 폐해가 발생하게 되고 말 것이다. 첫째는 행함을 통해서 자기의 의를 드러내려 하는 사람이 발생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의는 약화될 것이며, 자신의 의를 한층 더 높이게 될 것이다. 그것과 더불어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자는 둘째, 행함을 실천하지 아니한 사람을 볼 때에 그만 이런 것도 행하지 못하느냐며 정죄하는 일도 동시에 발생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안 된다. 우리의 의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의로우신 분은 우리 주 예수님 뿐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달됨으로 가능하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이 필요하고, 회개가 필요하다. 셋째, 행함을 통해서 자신의 부족한 믿음과 부족한 회개를 대신 감당하려 시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간혹 보다 보면, 예수님을 잘 믿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천국과 지옥도 믿지 못하는 성도가 있기도 하다. 회개하면 죄가 씻겨지는지도 잘 모르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라도 구원은 받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런 자들이 착안해 낸 것이 바로 행위를 통해서 믿음과 회개를 대신해보려는 것이다. 행위를 통해서 부족한 믿음을 채워보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또한 회개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행위로 구원얻을 것이라고 믿고 행동으로 보여주려하는 것이다. 아니다. 그러면 큰 일 난다. 행함이 믿음과 행위를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렇듯 우리가 구원얻는 데에는 오직 믿음으로서가 아니며, 믿음과 행함으로서도 아니다. 그것은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인 것이다.

 

라. 회개와 믿음으로서 구원얻는다고 믿는 자에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람이 구원얻어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이 회개와 믿음이라고 하니까, 자신에 있어서 행함은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훗날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우리의 심판의 기준이 우리의 믿음뿐인지 아니면 행함으로 심판받는지를 말이다. 마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라. 거기에 보면, 그 사람의 구원의 당락이 그들의 행위를 따라 결정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행위가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닌 것은 확실하나, 내가 참된 믿음을 가진 자인지 아닌지는 행함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는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그에 따르는 행위가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가짜 믿음일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에 따른 행위가 있는지를 늘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주님께서 천국의 헌법을 말씀하신 산상수훈을 보라. 거기에 보면, 산상수훈의 결론이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인 것을 말씀하고 있다(마7:24~27).

마7:24-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그렇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만 그 믿음이 훗날 심판대 앞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야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집에 부딪힐 때에, 그 집이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집은 그 사람의 믿음을 가리킨다. 곧 말씀을 듣고 행함의 열매가 뒤따르는 자가 심판의 날에 그 믿음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고 회개생활을 잘 감당하고 있으니, 내가 천국에 들어가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겠죠?"라고 생각하지 말라. 믿음에 따른 행위가 따라올 때에라야 우리의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라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인지라 죄를 짓지 아니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된 본성이 안에 죽을 때까지 남아있고, 오늘도 믿는 자들을 미혹하여 죄짓게 만들려고 시도하는 귀신들이 밖에 웅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우리의 구원의 마지막 보루인 셈이다. 행함이 뒤따르는 믿음에다가 회개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주는 것이다.

 

마. 회개와 믿음의 중요성을 아는 자가 꼭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회개와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믿음을 가진 자는 항상 '충성'이라는 글자를 마음에 달고 살아야 한다. '충성'이 우리를 죄짓는 곳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주고,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는 삶으로 나를 안내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간다면, 또한 충성이 자신의 행실에 따른 합당한 보상 곧 하늘의 상급으로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와 믿음을 깨닫고 실천하는 자는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나는 과연 오늘도 충성했는가를 따져보라. 그래서 자신의 구원이 주님의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해보라.

 

4. "충성한다"는 낱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둘째, 이제는 '충성한다'는 낱말의 의미를 살펴보자. 헬라어로 '충성하다'는 단어는 "피스토스"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2가지 의미로 쓰였다. 하나는 믿는다는 뜻이며, 또 하나는 충성하다. 신실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는 그 단어가 쓰인 문맥을 잘 살펴봐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것에 충성한다고 하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가. 충성에도 전제조건이 있다.

  이 단어의 의미를 살피기 전에, 우리는 이 단어에 어떤 전제조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 사도바울의 말을 들어보자.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1-2)" 그렇다. 충성이라는 단어는 일꾼과 항상 맞물려 있다. 다시 말해 어떤 일을 맡은 자에게 필요한 것이 충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충성하기 위해서는 맡은 일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래야 충성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성도가 교회에 등록하여 세례를 받고 직분을 맡게 되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 충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어찌하든지 성도들에게 충성의 중요성을 가르친 다음에 그들에게 충성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기도의 자리, 봉사의 자리, 전도의 자리 등등을 말이다. 만약 충성의 중요성도 가르쳐주지 않으며, 또한 충성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으면, 성도는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멈춰서고 말 것이다. 해야 할 일감이 없는 자는 책임감도 잘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목회자로부터 무엇인가를 맡게 되면, "저에게도 일을 맡겨주십니까? 감사합니다."라고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충성할 수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의 신앙이 성숙해지기를 원한다면 어떤 일감을 맡기를 바란다그래야 자신의 육신을 쳐 복종시킬 수 있고, 그것 때문에 한 번이라도 더 기도의 자리에 나갈 수 있고, 죄짓는 삶보다는 주의 거룩한 사역에 더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어떤 것에 충성할 것인가?

  그렇다면, 성도들은 어떤 것에 충성해야 하는가? 크게 4가지 것에 충성해야 한다. 첫째로, 작은 것이라도 충성해야 한다는 것이다(눅16:10). 하나님은 작은 것에 충성한 자에게 더 큰 일도 맡기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다른 이보다 더 큰 일을 감당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게 되면 더 큰 상급을 얻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내게 큰 일이 주어지든 아니면 작은 일이 주어지든 맡겨진 일에 충성할 수 있기를 바란다. 둘째로,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해야 한다는 것이다(눅16:10). 불의한 재물이란 여기서 '돈'을 의미한다. 사람들 중에는 회삿돈을 함부로 쓰는 사람이 있다. 자기돈이라고 하면 그렇게 펑펑 쓰지 못할텐데, 회삿돈이라고 하니까 물불을 안 가리고 쓰는 것이다. 아니다. 그러면 그는 불의한 재물에는 충성하지 못한 자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알려지게 되면 그에게 더 큰 일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셋째로, 남의 것에도 충성해야 한다는 것이다(눅16:12). 남의 것에 충성하지 못한 자는 결국 자기의 것도 만들 수 없다. 이 세상 사람치고 처음부터 자기의 것을 갖고 태어난 자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남의 것을 맡아서 충성하여 남기게 된 자는 자기의 것도 채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모든 일에 충성할 수 있는 자라야 한다(딤전3:11).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를 충성된 자라고 말씀하실 것이고, 그런 자에게 더 귀한 직분을 맡겨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다. "충성한다"는 낱말의 3가지 의미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충성한다는 단어의 속뜻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자. 충성한다는 것은 어떤 일을 맡은 자가 그 일에 대해 보이는 신실한 태도를 가리키는 것인데, 그것은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비유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달란트비유를 통해서 충성된 자가 누구며, 게으른 자가 누군지를 말씀해주셨다. 한 주인이 자기의 종들을 불러서 그의 달란트를 그들에게 각각 나눠주었다.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겨주었다. 그것은 그것으로 장사하라는 것이었다. 그때 여기서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 자와 두 달란트를 받았던 자를 통해서 우리는 충성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충성한다는 의미는 첫째, 게으르지 않고 열심을 낸다는 뜻이다(마25:16). 주인으로부터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어떻게 그 돈을 관리했는지 아는가? 즉시 가서 장사했다고 한다. 그는 그 돈을 감추어두지 않았으며, 적당히 어떻게 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주인의 뜻을 알고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주인이 자신에게 맡긴 일을 위해 즉시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주인으로부터 칭찬받기 위해 그는 즉시 게으르지 않고 일을 시작한 것이다. 아니 열심을 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교회처럼 뜨뜻 미지근한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런 자를 하나님께서는 토해내버릴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차겁든지 뜨겁든지 해야 한다. 게을러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맡은 일이 있으면 열심을 품고 주인의 뜻에 따라 혼신을 다해 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오디게아교회에 대한 처방책은 바로 "열심을 내라"였던 것이다(계3;19). 둘째, '충성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 작다고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한다는 뜻이다(마25:17). 이는 두 달란트 받은 자에 해당한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적게 받았다고 불평하기를 즐겨한다. 아니다. 불평할 시간에 나가서 일해야 한다. 나중에 주인으로부터 들었던 칭찬을 보라. 두 달란트를 받아 두 달란트를 더 남긴 자나, 다섯 달란트를 받아 다섯 달란트를 더 남긴 자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 축복이 동일하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25:21,23)" 그렇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눈여겨 보시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 그 런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다(눅16:10). 마지막으로 셋째, 이것은 부수적인 것으로서 '충성한다'는 것은 무슨 일에서든지 지혜롭게 행동한다는 것이다(눅16:8). 충성한다고 하면서 물불을 안가리로 일을 하지만, 그 결과가 참담하게 나오게 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열심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중의 결과를 예상해보며 지금 지혜롭게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을 할 때에, 함께 일하는 다른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도 살펴보면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자들이 교회에 몇 명만이라도 있다면, 교회는 놀라운 발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5. 충성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무엇인가?

  이제는 마지막으로 충성하는 자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보상을 주시는지 즉 충성의 결과는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자. 충성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보상해주신다. 그 보상은 이 세상에서 받는 것도 있을 것이며, 저 세상에서 받는 것도 있다(막10:29~31). 다시 말해 충성에 대한 보상은 영육간에 주어지는 복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충성하라. 잠언기자는 개미에게 가서라도 배우라고 하였다. 그렇다. 충성하는 것은 내게 복이 들어오게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된다. 충성을 다할 때에, 열심을 낼 때에, 최선을 다할 때에 좋은 결과가 뒤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충성할 때에는 언제나 지혜롭게 행동하라. 그래야 손해가 없으며, 나중에 후회할 일이 없을 것이다. 건투를 빈다.

 

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allete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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