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구원과 멸망은 어느 누가 말한대로 만세전에 예정된 대로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자유의지의 선택의 여지가 거기에도 들어가는가? 왜 우리는 구원을 전적으로 은혜라고 말하는가? 그러면서도 왜 우리는 "믿으라, 회개하라"고도 말해야 하는가? 우리에게 알려진 이중예정론은 과연 성경적인가? 여기, 이중예정론은 마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심판에서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를 주목해보자.

2021-09-12(주일) 오후찬양예배
제목: 양과 염소의 심판에 [이중]예정론은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마25:34,4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AhcVYmhVpkA  [혹은 https://tv.naver.com/v/22428086  ]

 

1. 들어가며

  예정론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려는 노력의 결과의 하나다. 그러므로 참으로 소중한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정론이 어느새부턴가 만세전 개인구원 예정론으로 흘러가 버렸다. 그리하여 그것은 이제는 운명론처럼 변해버렸다. 그렇다면 진정 과연 개인구원이 만세전에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서 살 천국집이 이미 만세전에 준비된 상태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 보내어진 것인가? 만약 하나님께서 한 사람은 '구원'으로 예정해놓으시고, 만약 한 사람은 '멸망'으로 예정해 놓으셨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판을 집행하실 수가 있으실까? 심판이란 우리에게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나와있는 예정론과 우리가 실제 믿고 있는 예정론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심판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과연 무엇을 예정하셨으며, 우리가 그 예정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만세전에 나 자신인 아무개를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작정하고 예정해놓으셨다고 믿는 분들은 꼭 이 메시지를 끝까지 들어보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2. 사람이 받는 '구원(salvation)'은 '구속(redemption)'과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사람이 구원을 받는 데에는 2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우리를 위한 구속의 과정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온 인류의 죄값을 속량하시기 위해 죄없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피흘려 죽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피흘림이 없다면 사람이 죄사함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롬6:23, 히9:22).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속은 인간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로 이러한 구속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된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들이든 예수께서 흘리신 보혈은 모든 인류의 속죄를 위한 피흘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대신하여) 자기[자신]을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이니라(딤전2:6)' 그러나 구원에는 또 하나의 과정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께서 이미 2천년전에 골고다 언덕에서 흘리신 속죄의 제사를 믿는 믿음과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의 과정이 필요하다. 아무리 예수께서 속죄제사를 치렀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믿지 않는 자에게 속죄의 효력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천년전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사 치르신 속죄제사를 나를 비롯한 모든 인류의 죄들을 없애기 위한 속죄제사였다고 믿고 동시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면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요일1:9).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라고 했다. 그렇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죄는 사함 받을 수가 없으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될 수도 없다. 하지만 문제는 예수님의 구속의 사건을 자신의 구원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데에 있다. 예수님의 속죄제사를 믿기만 하면 자신이 구원받은 줄로 아는 것이다. 만야 그것이 옳은 것이라면 모든 인류는 다 구원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의 속죄제사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께서 속죄제사를 치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러한 효력을 지닌 속죄제사였음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속죄의 은총이 베풀어지지 않으며, 자기의 죄를 자백하지 않는 한 사람의 죄는 씻겨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만세전에 예정된 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로 이 땅에 보내어진 것을 믿고 그분의 골로다 언덕의 희생이 나의 죄를 위한 속죄제사였음을 믿고 회개할 때에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일종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사실을 믿음으로 구원의 노정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고, 회개를 다 했을 때 그 노정을 마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 자는 구원의 노정에서 결국 탈락하게 되는 것이다. 

 

3.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예정론은 어떤 것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마련해두신 인류 구원의 예정이란 어떤 것인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인류 구원에 관한 예정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엡1:3-6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로 인하여 인류를 자기의 아들들이자 상속자가 되게 하시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예정론'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예정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고 불멸하는 존재로 지어진 존재는 오직 천사와 인간 단 둘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하나님의 아들들로 예정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예정해 놓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닌 천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결단코 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서 3장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구원 예정은 인류를 종족으로 나눌 때에 유대인들만을 그위하여 렇게 작정하신 것이 아니다(엡3:6). 그들이 유대인들이 되었든지 이방인들이 되었든지 상관없이 누구나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자를 구원하기로 예정해 놓으신 것이다(요3:16, 계22:17). 

 

4. 만세전 개인 구원 예정론은 과연 성경에 나오는가?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확실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예정은 인류의 개인을 위한 구원 예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개인이 아니라 인류(사람)를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는 일종의 공동체 예정인 것이다. 즉 천사가 아니라 인간을 그렇게 하시겠다는 인류 구원 예정인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예정을 잘못 해석한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예정을 어떤 개인을 위한 구원 예정으로 바꾸어 놓았고, 동시에 이중 예정으로까지 만들어 놓았다. 왜냐하면 이중 예정론은 이런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어떤 개인은 구원으로 예정하시고, 어떤 개인은 멸망으로 예정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어떤 특정한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해 놓으셨다는 말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오직 인류를 그렇게 하시겠다고 작정하셨을 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롬9~11장에서, 야곱을 구원하기로, 에서는 버리기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냐고 주장할른지 모르겠지만, 성경에는 그러한 말씀이 없다. 오직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두 사람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예지예정일 뿐이다. 그것은 구원 예정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개인 예정이 있다면 그것은 개인에 대한 사역 예정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특별한 부르심과 사명이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천국에서 이미 그에게 명을 주어서 이 땅에 보내시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우는 많지는 않다. 그러나 이것은 다 개인에 대한 사역 예정인 것이지 개인 구원 예정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한다. 성경적인 예정만을 믿어야 한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예정'은 어떤 개인을 구원이나 멸망으로 예정해 놓으신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정이란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로 보내셨다는 것을 믿고, 그분이 치르신 골고다의 희생이 인류의 속죄를 위한 희생제사였음을 믿으며, 자신의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날마자 자범죄들을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구원 예정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예정이란 개인 구원 예정 혹은 개인 멸망 예언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대한 구원 예정이요, 믿고 회개하는 자로 하여금 구원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예정인 것이다. 

 

5. 만세전 개인 구원 예정 및 개인 멸망 예정이 옳은 것이라고 한다면 발생하는 일은 무엇인가?

  만약에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구원으로 예정해 놓으시고, 어떤 사람은 멸망으로 예정해 놓으셨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아주 잔인하고 편협스럽고 나쁜 하나님으로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어떤 사람은 구원으로 예정해 놓으시고 어떤 사람은 멸망으로 예정해 놓으셨다면, 그러한 하나님은 폭군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구원을 당신이 이미 정해놓고는 그렇게 끌고 가시며 그것을 절대 변동이 없게 만드시는 분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맞다면, 우리 중 누군가가 아무리 믿고 회개하여 구원받고 싶다고 주님께 구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만세전에 구원으로 예정해 놓지 않았다면 그의 모든 수고와 눈물 곧 그렇게 믿으려 하고 회개하는 모든 일이 소용이 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누구는 구원으로 예정하시고 누구는 멸망으로 예정해 놓으셨다면 그것은 매우 공의롭지 못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을 심판하시겠다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의지가 있기에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어찌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하나도 없는데 우리를 불러다놓고 심판을 하시겠다고 하시겠는가? 마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심판을 보라. 당신이 이미 결정해놓은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인가 아니면 그들이 행한 것에 대한 심판인가? 또한 만약 정말로 이중 예정론이 맞는 것이라고 한다면 누구든지 구원받으라고 초청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사람이 구원이 예정된 대로 될 터인데, 만약 그렇게 했다가 예정에는 없는데 덜컥 예수님을 믿기라도 하겠다고 하는 날에는 큰 일 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망으로 예정해 놓았는데, 그가 믿겠다고 하면 하나님의 예정이 허물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누구나 구원으로 초청해서도 아니 된다. 아니 전도해서도 아니 된다. 또한 만약 이중예정론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굳이 믿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말씀을 들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그리고 회개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믿게 하실 것이고 회개시킬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그러면 "주 예수를 믿으라"고 권먼해서도 아니 될 것이며, 또한 "회개하라"고 외쳐서도 아니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원 예정이 존재하려면 타락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죄없는 첫 아담이 죄를 지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어서 죄를 짓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과연 그때 하나님께서 "아담아, 어서 죄를 지어라. 그래야 내가 너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 수 있지 않겠니?"라고 하셨겠는가? 그렇다면 마귀에게 상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죄의 조성자라고 하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권한을 남용하여 사람이 일찍이 구원과 멸망으로 정해놓고 강요하시는 그러한 분이 결코 아니시다. 그분은 모든 인류를 위해 피를 흘려 죽으셨으며, 모두가 구원을 얻도록 초청하고 계신다. 다만 인간이 그것을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아서 구원을 받지 못할 뿐이다. 

 

6.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심판이 말해주는 예정론은 어떤 것인가?

  그렇다면, 성도를 먼저 불러 심판하는 양과 염소의 심판의 비유에서 우리는 어떤 예정론을 발견할 수 있는가? 마태복음 25:31~46에는 인자가 모든 민족을 불러놓고 심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모든 민족은 세상 모든 민족의 사람들 중에(유대인도 포함된) 모든 믿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이 심판은 불신자를 심판하는 백보좌 심판이 아니라 먼저 믿는 자들을 심판하는 심판이기 때문이다(마25:37,44, 벧전4:17~18, 고후5:10, 고전3:12~15). 그때에 왕은 자신의 보좌에 앉아서 사람들을 둘로 가르는데, 양은 주님의 오른편에서부터 서게 하고, 염소[새끼]는 주님의 왼편에서부터 서게 하신다. 그리고 오른편에 있는 양들에게는 "내 아버지에게 이미 복을 받은 채 있는 자들이여, 너희는 창세(세상의 창설)로부터(아포)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채 있는 왕국을 단번에 상속받으라"고 말씀하신다(마25:34). 그리고 왼편에 있는 염소[새끼]들에게는 "이미 저주를 받은 채 있는 자들이여, 너희는 나로부터(아포)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채 있는 영원한 불속으로 계속 들어가고 있어라."라고 말씀하신다(마25:41). 그런데 이때 이들이 양쪽으로 서게 된 이유는 믿음과 회개에 따른 열매들이 그들에게 있었나 없었나를 가지고 판단하신다. 

  그런데, 이때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언제 하나님의 왕국이 누구를 위해 그리고 언제 준비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마25:34). 만약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을 이미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면, 이미 만세전에 준비된 그 천국집에 들어갈 사람에게 그 집을 주시는 것이 맞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천국의 공간은 이미 예비되어 있지만 그 사람이 구원받은 후에 점차로 그 집이 준비된다면, 그것은 만세전 개인 구원 예정이 틀린 것이다. 그러면, 마25:34의 말씀은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그것은 구원받을 사람이 들어갈 집이 만세전에 이미 예비되어 있다고 말씀하지 않고, 창세로부터 예비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도 창세의 시기 곧 세상의 창설은 그 시기 아네에 포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창세(세상의 창설)로부터"에 나오는 전치사가 "에크"가 아니라 "아포"가 쓰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쓰이고 있는 전치사가 자기를 포함하고 있는 출발이라면 "에크"이겠지만, 자기를 포함하지 않는 출발로서 "아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과연 멸망받을 자를 미리 만세전에 예정해 놓으셨는가 하는 것이다. 양과 염소의 심판의 비유에서 우리는 우리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원한 불못이 비록 외식하는 자들로서 형식적인 믿음과 가졌던 염소들이 들어갈 장소라 할지라도 그 장소는 처음부터 이들을 처벌하기 위한 장소로서 준비된 것이기 아니기 때문이다. 염소들이 들어갈 그 영원한 불은 결코 사람들을 위해 만드신 것이 아니고, 다만 타락한 마귀와 그의 천사들(귀신들)을 위한 형벌의 장소로서 준비해 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멸망받을 인간를 정해놓으시고 또한 그들에게 형벌을 주실 장소를 불못을 만드신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기를 바라시며 진리의 온전한 지식에 이르기를 바라고 계심을 알라(딤전2:4).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세상 길로 가며 죄악의 길로 가고 마귀를 따라가기 때문에,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불못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지옥보내기 위해 지옥을 만들어놓고 계신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만세전 개인 구원 예정이나 만세전 개인 멸망 예정은 하나님을 나쁘고 포악하고 불공정한 하나님으로 만들어 간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만세전부터 불못을 만들어 놓고는, 그곳에 갈 자도 당신이 미리 정하시고, 그래서 사람들의 일부를 그리고 몰고가시려 하시는 분이 되기 때문이다. 아니다. 우리 하나님은 결코 그러한 잔인한 하나님이 아니시다. 

 

7. 나오며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파트가 바로 예정론 파트다. 만세전 개인 예정론이 마치 성경에 있는 것인량 믿고는, 자신이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고 또한 교회에 다니고 있으니 자신은 이미 만세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예정론을 믿고 따르게 되면 과연 그 사람이 정신차리고 신앙생활 하겠는가? 이러한 자가 날마다 죄와 싸우겠으며, 죄를 지은들 즉시 즉시 회개하겠는가? 그는 "하나님께서 만일 나를 구원하기로 예정해 놓으셨다면 언젠가는 내가 지은 죄들을 회개시키겠지" 하면서 기다리거나 회개를 뒤로 미뤄 안일하게 대처할 것이 뻔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자신을 멸망으로 들어가게 하는 줄도 모른 채 말이다.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교리에 철저하게 속는 것이다. 왜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재림을 연기하고 계시겠는가? 그것은 한 사람이라고 더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그렇게 하고 계신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말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한 번만 진실로 그렇게 하면 되는 일이겠지만, 지은 죄들을 회개하는 일은 우리가 일평생 지속되어야 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모두가 넋놓고 회개하지 않고 있으니 그분이 지금도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는가? 구원은 믿고 회개할 때부터 이미 시작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구원은 그 순간에 완성된 것이 아니다. 일종의 여정과도 같은 것이다. 100m달리기와 같다고 보시기 바란다. 끝까지 경주를 마쳐야 하는 것이다. 끝날까지 믿음을 잃지 않아야 하고, 자신을 죽인다고 해도 믿음의 지조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은 죄들을 깨끗히 용서받아야 하는 것이다. 자기의 두루마기를 빨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는 더러운 신부를 자신의 신부로 받아주지 않을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미 믿음을 갖고 있으나 중간에 바람이 나서 다른 외간 남자를 만나고 있는 자를 곧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에 눈이 돌아간 자를 주님은 결코 신부로 맞이들이지 않을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1장 8절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비겁한)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불신)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그렇다. 핍박이 두려워 비겁하게 주님을 부인하는 자들이나 믿지 않는 불신자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도 우상숭배하거나 음행하거나 거짓말하는 등의 범죄자들은 결코 새 예루살렘 성 안에 거룩한 신부로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결국 불못에서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 지금이라도 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자는 점차 하나님의 구원 안으로 예정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는 자는 버려져서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나거나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서 거기서 슬피 울며 자기를 한탄하면서 이를 갈게 될 것이다. 왜 그때 성령의 음성을 따르지 않았을까, 왜 그때 그 목회자의 말을 듣고 돌이키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2021년 09월 12일(주일)

정병진목사

 

하나님께서는 만세전에 어떤 뜻을 품고 계셨을까? 에베소서는 우리의 시간을 천지창조 이전으로 돌려놓는다. 그리고 한 분 하나님께서 장차 행하시고 하시는 일을 그때에 이미 정하셨음을 알려준다. 그것이 바로 에베소서 1장이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이다. 그것은 사람이 창조되거나 타락한 후에 나온 것 아니기에,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만세전 예정론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정론은 에베소서의 사상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그것은 무엇이 문제인가? 이것을 우리가 잘 모르면 이미 얻은 구원이라도 잃어버릴 수가 있다.
20201-11-11(수) 수요기도회
제목: 에베소서강해(04) 성경적인 참된 예정론은 어떤 것인가?(04)(엡1:3~14)
https://youtu.be/bGczvYuP6MI [혹은 https://tv.naver.com/v/16703087 ]

 

1. 들어가며

  에베소서는 회람서신으로서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책일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를 위한 책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에베소서는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다. 말씀이 창세전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교회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베소서를 통하여 교회가 무엇인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가 어떻게 탄생하였으며,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의 위대한 걸작품이고, 관심의 대상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교회는 천사들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던 놀라운 비밀이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에베소서 1장에서는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에 관한 창세전의 계획과 그 목적을 밝히는 위대한 찬양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지난 3시간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살펴보았는데, 특별히 예정론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계획을 따라 교회를 산출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결국 만세전의 예정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이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칼빈의 2중예정과는 어떻게 다르며, 하나님께서 진정 말씀하려고 하는 예정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오늘은 네번째 시간으로서, 하나님의 예정 부분에서 "견인교리"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구원은 영원한 것이며 안전한 것인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2. 하나님의 구원예정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엡1:3~14의 말씀에 따라, 지난 3번의 시간을 통하여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예정이 창세전에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예정은 결코 개인구원예정이 아니었다는 것도 살펴보았다. 즉 하나님께서는 많은 피조물 가운데 특별히 인간을 선택하시어 그들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고 그들을 하늘나라의 기업을 잇게 할 상속자로서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에 보편적으로 알려진 예정론은  에베소서가 말하는 예정론과 다르다. 사실 우리나라에 보편적으로 소개된 예정론은 칼빈의 예정론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개인에 관한 이중구원예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칼빈의 예정론"이란 성부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사람들 중에서 어떤 개인을 각각 예정하셨는데, 어떤 이는 영원한 생명으로 예정하시고, 어떤 이는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하셨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우리(사람들) 중에 어떤 특정한 개인을 구원하기로 창세전에 예정하셨다는 말씀은 단 하나도 없다. 그럼, 어떻게 개인구원예정이 나왔을까? 그것은 구원이 신적 작정으로 시작된다는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칼빈이 이어받아 나온 결과물로서, 그것은 결코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시되 어떤 개인을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하시지 않았으며, 어떤 개인을 만세전에 멸망에 처하기로 예정하지도 않으셨기 때문이다. 에베소서가 말하는 예정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 중에 주님의 구원의 초청을 받아들임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는 자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예정의 대상은 어떤 특정개인이 아니라 사람들 중에 "불특성 다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예정론을 가장 대변해주는 가장 좋은 예가 마태복음 22장에 나온다. 그것은 어떤 왕이 자기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푼 것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말씀이다. 왕은 자신의 아들의 잔칫날이 다가왔을 때에 혼인잔치에 약속된 사람들을 데려오도록 자신의 종드을 보낸다. 하지만 약속했던 사람들은 한사코 사양하고 잔치자리에 오지 않았다. 어떤 한 사람은 밭에 일하러 간다고 가버렸고, 또 한 사람은 사업하러 간다고 가버렸다. 그러자 왕이 대노하였다. 그리고는 혼인잔치는 준비되었지만 초청받은 자는 합당하지 않으니, 사거리 길로 가서 만나는 대로 사람을 혼인잔치에 데려오라고 시킨다. 그러자 그의 종들이 나가 자초지종을 아뢰고 잔치자릿수만큼 사람을 채추게 된다. 이것이 이 비유의 대강스토리다. 그리고 이 비유를 들려주셨던 주님께서 최종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초청함을 받은 자는 많지만, 선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그렇다.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초청하는데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이 있었기에 이스라엘 민족을 우선 초청대상으로 삼으셨다. 하지만 막상 그들에게 초청장을 보냈을 때 그들은 아들의 혼인잔치에 오기를 거부하고 말았다. 그러자 주님은 자리를 이방인들로 하여금 채울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그렇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경륜인 것이다. 이미 초청대상자에 예정되었어도 거부한 자들은 잔치자리를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선 초청 대상은 아니었지만 그 다음으로 이방인들에게 구원받을 기회가 넓게 열려지게 되었다. 구원받을 기회를 유대인이 발로 걷어차버렸기 때문이요, 모든 민족으로 확대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에 따라 이방인에게도 그 기회가 돌아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에 기쁘게 응답하게 된다. 그러자 혼인잔치에 손님이 가득차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예정이란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한 것이 아니라 구원 안으로 초청받았을 때에 그것에 반응하는 자가 예정되어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구원받을 자는 이미 개인별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잔치자리 숫자만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누가 그 자리에 채워질른지에 대하여는 정해진 불변의 작정이 없었던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초청하실 때에 그 초청에 감사함으로 응하는 자가 예정안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개인구원예정과 개인멸망예정을 만세전 예정을 언급하면서, 에서와 야곱의 경우를 들어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에서와 야곱의 경우는 만세전에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한 사건이 결코 아니다. 두 민족이 어떻게 쓰임받을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사라의 입을 통하여, "큰 자(형=에서)가 어린 자(동생=야곱)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신 것 뿐이다. 그러므로 야곱과 에서의 예정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구원예정이 아니라 그들에 관한 사역예정이며, 개인예정이 아니라 두 민족의 쓰임에 관한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세전예정론에 한 번 빠진 자들은 도무지 칼빈의 이중예정론의 영향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한다. 하지만 오늘날 진리를 따라가고자 하는 성도들은 교단교리나 신학자의 말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 일점일획도 빼버리거나 더하지 않는 말씀을 따라가고자 한다. 그것은 유대인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한 구원계획이다. 지금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다 회개하고 믿어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초청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초청에 응하는 자는 구원을 받겠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자는 전능한 하나님일지라도 그들을 구원하시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누구든지 구원으로 초대를 받았다면 그는 즉시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여 구원받는 사람이 되어야할 것이다. 

 

3. 칼빈의 예정론의 5대 교리와 그 핵심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칼빈의 예정론의 핵심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그것은 그가 1559년에 썼던 기독교강요(최종판)를 보면 잘 살펴볼 수 있다. 특별히 기독교강요(최종판) 제3권의 21장부터 24장에 예정론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자 후대의 칼빈의 후예들은 거기에 나온 칼빈의 구원사상을 5가지 교리로 정리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들 그것을 "칼빈의 5대교리"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내 칼빈의 제자였다가 돌아섰던 알미니우스에 의해 칼빈의 예정론이 틀렸다는 것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칼빈의 5대교리를 제대로 한 번 이해하려면, 이것이 생성되었던 과정을 좀 이해하고, 왜 오늘날 칼빈주의가 장로교의 근간이 되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자세한 사항은 전의 에베소서 강해시간(1, 2, 3)에 나와 있으니 그것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오늘은 간략하지만 에베소서 1:3~14에 나오는 말씀을 중심으로, 칼빈의 5대교리를 설명하려고 하는데, 특별히 성경의 견해와 칼빈의 5대교리를 비교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과연 칼빈의 주장이 성경적인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칼빈의 5대교리가 에베소서에서는 순서가 약간 다를 것이이다. 하지만 5대교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떤 것이 먼저 앞선 것이다고 말하기는 조금 곤란하다. 그럼, 칼빈의 후예들은 칼빈의 예정론의 5대교리를 이렇게 정리해서 말했을까? 그것은 "1)전적타락(전적무능력), 2)무조건적인 선택, 3)제한속죄, 4)불가항력적인 은총, 5)성도의 견인"이 그것이다. 그러나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 말씀으로 예정론의 교리를 정리해 간다면,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사..."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것을 가지고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을 하나님의 선택은 "무조건적인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어떤 개인을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무조건적으로 예정하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렇게 개인을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셨다는 말씀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어떤 대상을 정할 때에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그 대상은 어떤 개인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로서, 누구든지 초청하는 구원의 소식을 듣고 반응하여 주님 앞으로 나온 자를 선택하신다는 것이다. 만세전에 구원받기로 선택함을 입은 어떤 개인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피조물인 천사들과 인간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천사가 아닌, 인간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내용은 교회가 탄생할 때까지 비밀로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천사들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것었으며, 그 비밀의 핵심은 결국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하늘의 상속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둘째, 에베소서 1:7절에 의하면, 이번에는 칼빈의 5대교리 중에서 2 가지가 나온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라는 말씀을 통해서는 "불가항력적인 은총"의 교리가 나왔고,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에서는 "제한속죄'라는 교리가 나왔다. 그렇다면, 과연 "불가항력적인 은총"과 "제한속죄"라는 칼빈의 교리는 진정으로 성경에서 나온 것인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아니올시다"이다. "불가항력적인 은총"이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선택된 자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도록 은혜를 베푸시면 그 은혜에 아무도 저항할 수 없다는 교리다. 하지만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파괴되었지만 남아있는 자유로 하나님의 역사를 지금도 거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예수믿어 성령을 받은 자라 할지라도 성령의 소욕을 따라가지 않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판국에 믿지 않는 자들은 어떠하겠는가? 그러므로 주님께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 나아오지 않는 유대인들을 보고 얼마나 안타까워하셨는지 모른다(요5:40,계3:20). 그리고 "제한속죄"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은 성부께서 택한 자들만을 위한 것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누가 구원받을 것인지를 예지예정하셨음으로, 구원받을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한다. 하지만 둘 다 성경적인 견해는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한 속죄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이다(딤전2:4,요일2:2). 다만 사람들이 이것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속죄의 피의 효능을 맛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불가능항력적인 은총을 베풀어주셔야 하는 이유를 인간의 "전적인 타락"에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자신을 구원하는 데에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타락하여 죄인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나,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초청할 때에 그것에 아무것도 반응할 수 없을만큼 타락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을 죄인취급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을 악하다고 정의하며, 선을 전혀 행할 수 없는 무능력한 인간이라고 몰아간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인간이 비록 아담의 범죄로 타락했으나, 선을 전혀 행할 수 없는 것도 아니며, 모든 것이 다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능력으로 죄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시지 않으면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 그래서 인간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시려고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셨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은 예수님의 속죄사역에 절대적으로 기인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전적인 무능력자요 악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인간의 상태를 마12:20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이라고 말이다. 인간은 상한 갈대이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면 언젠가는 꺾여져서 죽을 것이다. 또한 인간은 꺼져가는 등불이기에 그대로 놔두면 언젠가는 꺼져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는 자는 죽어가는 상태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고 구원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4. 성도의 견인교리는 과연 성경적인가?

  그런데 칼빈의 이중예정론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맨 마지막인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다. 이 교리는 한 번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믿음을 갖게 된 자들은 결코 믿음을 상실하지 않을 것이며 끝까지 보존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사람이 한 번 구원을 받았으면 계속해서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즉 한 번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는 결코 멸망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구원은 끝까지 유효하며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 교리가 성경적이며 사실인가? 정말 사람이 한 번 믿음을 가져 구원을 받았으면 구원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발생하지 않는가? 그건 아니다. 이미 믿고 회개하여 구원의 노정에 들어온 자라도 결국 탈락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마7:21~23, 딤전1:19,4:1, 고전9:27, 히6:4~8,4:1,10:26~29, 약2:14,26, 계3:5) 즉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과 야고보장로와 히브리서기자와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러한 예는 엄청 나다. 한 번 영생을 가졌다고 해서 그 영생을 결코 잃어버리지 아니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주의자들은 한 번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여 믿음을 가졌으면 그는 반드시 구원을 얻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한 증거로서 성경에 아주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련성경구절은 거의 대부분 미래형이거나 소망들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말씀중에서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는 성경구절은 역시 요한복음 6:37,39과 요한복음10:28~29의 말씀이다. 오늘은 시간관계상 앞에 나와있는 요한복음 6:37과 39의 말씀만 우선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글성경이나 영어성경은 거의 다 이 말씀을 왜곡하여 번역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번역본들이 헬라어원문과는 다른 번역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중성단수"로 번역해야 할 단어를 "남성단수" 내지는 "남성복수"로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우선 요6:37,39의 말씀을 한글성경으로서 살펴보자.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위의 두 말씀을 한글성경으로만 보면, 아버지께서 당신이 구원하기로 예정한 사람을 예수께로 보내주면 그들이 모두 예수님께로 나아갈 것이며, 그런 자를 예수께서는 결코 내쫓아내지도 아니할 것이며, 그들 중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 구원할 것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그러나 헬라어원문성경은 그러한 말씀이 전혀 아니다. 그렇다면, 헬라어는 어떻게 되어있을까? 그것을 먼저, 요6:37의 말씀을 헬라어에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요6: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모든 것이 나를 향하여 다다를(도착할, arrive)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향하여 오고(come) 있는 이(사람)을 나는 결코 내쫓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에게 도착하고 있는 것과 예수님에게 오고 있는 것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헬라어원문에 의하면, 아버지께서 예수께 주셔서 예수께 도착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어떤 것"(중성, 단수)이다. 그러나 '모든'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기에, 중성 복수적인 의미다. 그런데 대한민국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약 20여종의 성경들은 이 단어를 "중성 단수(~하는 것)"로 번역하지 않고, "남성 단수(~하는 자/~하는 사람)" 내지는 "남성 복수(~하는 자들/~하는 사람들)"로 번역하고 있다. 즉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보내고 있는 것은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예수께 주시는 것은 "어떤 것"으로, 예수님에게 구원받으려고 나아오는 자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구원할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주시는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에는 "아버지의 능력, 아버지의 권세, 아버지의 지혜,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힘" 등의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오역은 요한복음 6:39도 역시 마찬가지다. 한글성경으로 보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던 분(아버지)의 뜻이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으로 마지막날에 그들을 부활시켜 구원하는 것이라고 읽힌다. 하지만 헬라어원문은 그러한 뜻이 아니다. 여기서도 "중성 단수"를 요6:37의 말씀처럼, "남성 단수"로 바꾸어놓았다. 그럼, 헬라어원문은 어떻게 되어있을까?

요6:39 그런데 나를 보내셨던 분의 뜻은 이것입니다. 그가 내게 [이미] 주신 채 있는 모든 것을 내가 그것으로부터 잃지 아니하고 오히려 마지막 날 안에 내가 그것을 단번에 일으켜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렇다.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한 사람을 예수께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것들로서 곧 능력과 권세와 지혜와 사랑 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그것으로 자기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마지막 날에 드러내 보여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가 칼빈주의의 예정론의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번역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성경번역자들의 한계를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구원론의 관점을 흔드는 것이기에, 이것을 그냥 두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시대에 이제는 성경의 원문 그대로 번역하여, 예수님과 사도들이 증언했던 구원론의 관점으로 성경을 다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성경이 그대로 열릴 수가 있는 것이다. 

 

5. 나오며

  칼빈의 예정론은 사실 그의 처음으로 출판했던 기독교강요(초판, 1536년)에는 나오지 않았던 내용이다. 그의 기독교강요 제2판(1539년)부터 들어가기 시작한 예정론은 이제 제4판(최종판, 1559년)에 이르서는 많은 분량(1장에서 4장으로)으로 늘어났고, 그것은 결국 칼빈의 구원론의 핵심을 차지하게 된다. 이는 사람이 믿고 회개하여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만세전의 예정에 따라 구원얻는 것이라고 바꿔치기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나오게 된 배경을 보면 왜 이러한 구원론이 나왔는지 조금은 이해가 간다. 왜냐하면 중세시대가 예수님 말고 다른 것을 구원의 요소로 집어넣어서 잘못 가르쳐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빈은 믿음으로 얻은 구원론을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 예정에 의한 구원론으로 바꾸어놓았다. 그것도 "개인구원예정론"이자, "이중예정론"으로 말이다.  만약 칼빈의 이중개인구원론이 성경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폭군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횡을 우리는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묵인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권리를 인간에게 강요하시는 폭군이 아니시다. 그분처럼 사랑이 많으시고 인애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시다. 그분은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을 행하시는 그러한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분이 스스로 공의를 허물어뜨린다면 하나님은 심판자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의로우셨다. 그러나 사랑도 많으신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과 만세전의 계획을 따라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인간이 모든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로 예정함을 입은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중 어떤 개인이 만세전에 예정함을 입은 것이 아니다. 믿고 회개하는 자의 불특정 다수를 예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라도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 자는 결국 구원에서 탈락될 수도 있다. 구원은 따놓은 당상이 아니라, 두렵고 떨림으로 이뤄가야 하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은 가장 확실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항상 안전하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얼마든지 성령의 음성을 거부하고 회개를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핍박과 죽음 앞에서 얼마든지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과 회개로 일차적인 구원을 이뤘지만 그것을 지키고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내가 믿는 주님을 부인하지 않아야 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무슨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즉시 즉시 회개하여 죄가 나의 구원의 발목을 붙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11월 11일(수)

정병진목사

 

 


  칼빈의 무조건적인 선택과 이중예정교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한국교회의 작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자신은 이미 구원받은 줄로 알고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아주 많아졌다. 하지만 이 사회의 부정부패와 도적적인 해이는 왜 이리 깊어지고 많아지고 있는가?
  결국 이 사회의 타락의 배후에는 깊숙히 칼빈교회가 자리잡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은 이미 구원받을 것으로 예정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죄를 지어도 큰 걱정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 문제가 될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회개기도를 시키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를 지어도 그들은 태평하다. 죄를 짓고도 아파하지 않는다. 회개하지 않는다. 죄를 지어도 회개하기는커녕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으려니 한다. 요즘 간증자들을 보라. 여러 기독교TV에 출연함으로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고있지만 그들의 간증에는 거짓이 들어있고 침소봉대된 사실도 너무나 많다.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것은 생각지 않고 어찌하면 사람들을 감동시킬 것인가에 초첨을 맞추고 있는 듯 하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칼빈의 교리가 얼마나 잘못된 것이며, 이 교리가 사람들을 지옥보내는 교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은 그 4번째 시간으로써 칼빈의 이중예정교리와 무조건적 선택교리의 병폐와 오류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먼저, 칼빈의 이중예정론과 무조건적인 선택교리에 대해 알아보자.
  "성부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어떤 이들은 구원받도록(천국에 들어가도록) 예정하셨고, 어떤 이들은 버리기로(지옥에 떨어지도록) 예정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러한 예정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며 무조건적이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것은 사람의 행위를 보신 후에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 만세전에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결정하신 것이다"
  이러한 교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때에는 이것처럼 은혜되는 것이 없었다. 나같은 사람까지도 만세전에 예정해놓으셨다는 것에 필이 꽂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중예정교리와 무조건적인 선택교리는 아무 무서운 것이다. 이것만 믿고 넋놓고 있다가는 지옥 떨어지기가 쉽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예정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는 구원하기로 예정하고 누구를 지옥에 보내기로 예정하신 적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모든 길을 예비하신 후에 누구든지 그 구원 안으로 들어오시를 바라신다.

  다음으로, 칼빈의 이중예정교리와 선택교리의 병폐에 대해 알아보자. 만약 칼빈의 이중예정교리와 선택교리가 맞는 것이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에 대해 대답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첫째, 하나님께서 누구는 구원하기로 그리고 누구는 멸망시키기로 예정하셨다면, 하나님은 폭군임에 틀림없다. 자기 마음대로 해놓고 그것은 내가 잘 결정한 것이니 무조건 따르라고 강요하시는 분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데, 누구는 구원하기로 하고 누구는 버리기로 결정하셨다면 하나님은 대단히 편파적인 분이며 편애하시는 분이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공의롭다는 말은 수정되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예정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이라면 아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와서 "누구든지 내게로 와서 구원을 받으라"고 초청하신 것은 큰 잘못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예정하지 않은 사람이 혹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받기라도 하는 날이면 아버지의 뜻을 어긴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넷째, 하나님의 예정으로 모든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면, 우리가 굳이 나가서 전도할 필요가 없게 된다. 작정된 대로 믿거나 작정된 대로 믿지 않을 거니까. 하지만 예수의 유언이 무엇인가? 가서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라 하지 않으셨던가!
  다섯째, 하나님의 이중예정이 고정된 상태라면, 우리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주님 앞에 나가려 하는 시도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손놓고 기다리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나를 꼭 믿게 할 테니까. 그리고 회개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께서 다 회개시키실 테니까. 더욱이 굳이 믿으려고 할 필요도 없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알아서 우리를 믿게금 하실 테니까.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즉 회개할 기회도 놓쳐버리고 예수님을 믿지 못하다가 지옥떨어지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칼빈교리는 모든 사람을 숙명론에 빠지게 만들어 버린다.
  여섯째, 하나님의 이중예정이 절대적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을 아시고 예정하신 것이 되어버림으로 악의 조성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설령 악한 일을 했다 치더라도 그분이 하는 모든 것은 선한 것이라 믿으라고 강요한다. 즉 "인간이 범죄한 것도 하나님의 예정과 뜻대로 되어진 일이며, 누구가 버림받은 것도 그분의 기쁘신 뜻댈 된 것이니 다 잘 된 것이다." 누군가가 지금 지옥에 떨어져서 고통받아야 하는데 그 일도 하나님이 하셨으니 잘 된 것이라고 말해야 할까?
  일곱째, 사람의 구원이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대로만 되어진다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인간을 심판대에 불러내어 재판하실 수가 있을까? 구원받을 기회도 주지 않고 구원받지 못했다고 그를 심판할 것인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의해서 이미 구원이 결정되어버리고 말았는데, 어찌 인간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말인가? 세상 말로 짜고 치고 고스톱치는 것으로 밖에 들리지 않게 된다.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이 아시시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다. 자신의 기분따라 마음대로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얻기를 바라신다. 이를 위해 창조주하나님의 자리까지 버리셨다. 우리대신 죽음까지도 감당하셨다. 그분이 우리 인간들 중에 단 한 명이라도 지옥가는 것을 잘 결정한 것이라 생각하실 분이 아님을 알라. 그분은 오늘도 한 명의 영혼이라도 구원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바라고 계신다. 하나님을 나쁜 하나님으로 폭군하나님으로 만들지 말라.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려고 오늘도 우리더러 나가서 전도하라고 그렇게 명하시고 있지 않은가! 나가서 사랑의 하나님을 전하자. 그게 우리의 할 일이지 결코 칼빈주의에 빠져서 넋놓고 있어서는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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