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96) 왜 유대인들은 바울의 전도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을까?(행22:1~23)_2023-01-17(화)

https://youtu.be/N7QhkUad_mM [또는 https://tv.naver.com/v/32508627]

 

1. A.D.58년경 유대인들은 왜 바울을 죽이려 했는가?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왔을 때에,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것은 바울이 3가지를 무시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3가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생각하는 것으로서 유대인 선민사상과 율법과 성전이었다. 그것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3차 전도사역을 행하고 있었을 때, 그 모습을 지켜보았던 에베소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와 있는 바울을 보고서 그렇게 고소한 것이다. 

행21: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바울)은 각 처에서 우리 백성(유대인)과 율법과 이 곳(성전)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생각하는 3가지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가리키는가?

  유대인들은 지금도 여전히 3가지 것을 목숨처럼 귀중하게 여긴다. 그것은 자신들(유대인들)의 선민사상과 율법과 성전에 관한 그들의 믿음이다. 첫째, 그들은 선민사상이 대단하였다.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만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언약백성이 된 것은 그가 할례를 받음으로 시작되었다고 믿고는, 할례를 받으면 언약백성이 되는 것이요 그런 자만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만이 선민이라고 하는 자긍심이 아주 대단했던 것이다. 둘째, 그들은 이 세상 모든 민족 가운데 율법을 받은 백성이라고 하는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세상 어떤 민족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자기 민족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들을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던 것이다. 셋째, 그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을 모신 성전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그러므로 성전도 그들 나름대로 구획을 정해놓고는 그것을 철저히 지켰다. 그들은 성전을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영역(제사장의 뜰)과 이스라엘 성인 남자들이 들어가는 영역(이스라엘의 뜰)과 여인들이 들어가는 영역(여인의 뜰)으로 나눠 놓았다. 그리고 그 너머 바깥쪽을 '바깥 마당'이라고 하였다. 바깥 마당에는 이방인들도 허용해 주었다. 그러므로 성전 안에 들어오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아주 더 선명해진다. 

 

3. 바울이 나중에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바울은 자기도 처음에는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목숨처럼 여겼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목표에 따른 과정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 그럼, 그때가 언제였는가? 그것은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부터다. 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목숨처럼 생각하고는 그것을 위해 살았다. 하지만 그렇게 소중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궁극적인 구원 곧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는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궁극적인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씨로서 오신 분으로서, 율법과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결국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으며, 천국에도 못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랬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신 궁극적인 목적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있었던 것이다. 

 

4.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주신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럼,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첫째,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지상의 만민 중에서 구별하여 세우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를 낳아 줄 민족이 필요했기 때문이며, 메시야를 통해 자기 민족이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사실 아브라함의 42대손으로 예수님을 낳는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자기 민족을 구별하여 세운 목적도 상실했다. 결국은 세상 모든 민족(만민)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어 구원얻도록 도와주고 가르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기 민족만 선민으로 여기고 자기 민족만 구원받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왜 율법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셨는가?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보고서 깨달으라고 주신 법이다. 즉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이렇게 죄를 지었는데, 그러면 어찌할꼬?'라는 생각을 갖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메시야를 붙잡고 그분을 믿어서 죄사함을 얻고 구원을 받으라고 주신 법이 율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의 역할로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그 율법을 다 지켜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아니다. 율법은 죄를 깨달으라고 주신 법이며,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초등교사였던 것이다. 

  셋째, 성전의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성전이란 원래 건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모시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토록 목숨처럼 여기는 성전은 원래는 성막에서 시작된 것이다. 성막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지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솔로몬이 성전을 지음으로 건물로서의 개념이 생겨났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성전 건물 자체를 신성시하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로 물들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에게 넘겨버린다. 그리고 그때에 성전도 함께 파괴된다. 다시 포로 귀환 후 성전을 짓게 되는데, 유대인들은 여전히 그 성전에만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인 법궤가 제 2성전 안에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오셔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예수께서 죽고 오순절에 성령 하나님을 믿는 이들 속에 보내 주셨으니, 성령이 오신 다음부터 하나님이 계신 장소는 이제 믿는 이들 곧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여전히 껍데기에 불과한 성전을 목숨처럼 붙들고 있었다. 

 

5. 왜 유대인들은 바울의 전도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바울의 호소는 간단한 것이었다. 유대인의 존재 목적을 제대로 알고, 이제는 율법과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 누구도 바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도 역시 그토록 목숨처럼 여겨온 것들을 하루 아침에 포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목적이 아니라 과정을 목숨처럼 붙들고 있는 그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아니 말할 수 없다. 그렇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잠시 사용한 민족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민족 자체를 우상시하였다. 그리고 율법이나 성전은 실체이신 예수님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실체인 것처럼 붙들었다(히10:1, 골2:16~17). 그래도 그것을 통해 자기들이 얻고 누리고 있는 특권이 매우 컸기에 그들은 여전히 그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종교개혁 이후의 세대인 우리들에게 '오직 믿음'은 매우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오직 믿음'이라는 슬로건은 어느새 값싼 구원론으로 전락해 버렸으며, 쉽게 구원받고 쉽게 천국가는 티켓 정도로 여기게 되어 버렸다. 아니다. 바울이 '오직 믿음'을 말한 것은 율법의 의식적인 행위(안식일 준수, 할례, 정결법 등)를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얻는 것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와전된 믿음 지상주의는 이제는 믿고 회개하는 것조차 행위 구원론을 따라가는 것이라면서 매도하고 있으며, 행함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고 하면 율법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정죄하기까지 한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믿음 지상주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믿고 회개함으로 얻는 것이요, 우리의 충성과 헌신을 통해서는 천국에서 우리가 누릴 영원한 지위(신분)와 상급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2023년 01월 17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95) 자신을 죽이려한 예루살렘 시민들 앞에서 바울은 어떻게 자신을 변호했는가?(행21:37~22:21)_2023-01-06(금)

https://youtu.be/P21_asblAXw  [혹은 https://tv.naver.com/v/32238524]

 

1.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대인들에게 붙들렸을 때에 어떻게 했는가?

  바울이 예루살렘에 구제헌금을 전달하고 그리고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건 방문을 시도한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당도했을 때, 그는 2가지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그것은 첫째, 믿는 유대인들의 불신과 오해에 부딪힌다. 하지만 그 문제는 야고보 장로의 주선으로 어느 정도 극복하게 된다. 문제는 두 번째 난관이었다. 둘째, 오리지널 유대인들의 불신과 오해와 더불어 잘못된 추측으로 인한 살해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통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바울을 보고 가만 두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 바울은 유대인과 율법과 예루살렘을 멸시하는 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이 예루살렘 성안에서 이방인인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함께 다니는 것을 보았을 때에, 바울이 드로비모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 성전을 더럽힌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더 이상 바울을 그냥 놔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결국 바울을 죽이려고 시도하였다. 

 

2.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했을 때 누가 바울을 보호해 주었는가?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그를 붙들었을 때, 성전 문이 닫히면서 거기에서 엄청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사실은 즉각 로마 군대의 천부장의 귀에 들어갔고 천부장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바울을 붙잡아 쇠사슬로 결박한다. 그리고 우선 로마 군대 주둔지인 진영 안으로 데리고 가도록 명령한다. 그런데 사실 바울에게는 전혀 예상치 않은 보호 조치였다. 그때 진짜로 바울을 구할 사람이 있었다고 하면 그들은 수만 명이나 되는 믿는 유대인들(행21:20)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 중에 단 한 사람도 바울을 살려내기 위해 쫓아온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로마 군대의 천부장을 통해 바울이 죽지 않도록 보호하신 것이다. 

 

3. 바울은 어떻게 천부장을 설득하여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얻었는가?

  그때였다. 바울이 진영으로 붙들려 가고 있었을 때, 바울은 천부장에게 청원을 한 것이다. 그런데 천부장이 그의 청원을 들어주게 된다. 그렇다면 바울은 대체 천부장에게 무엇을 청원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그를 죽이려고 몰려온 군중들(유대인들)에게 변명할 기회를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바울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도 정확하지도 않은 상태였고, 또한 그렇게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같이 바울을 죽이려 하는 상황에서 천부장이 바울에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준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부장은 바울의 말을 듣고 그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준다. 그럼 그때 천부장은 왜 바울에게 변명할 기회를 준 것일까? 그것은 첫째, 바울이 천부장에게 유창한 헬라어로 부탁을 하였기 때문이다(37절). 그때였다. 천부장은 아마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가 유식한 사람들이 쓰는 헬라말로 자신에게 부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부장은 헬라말을 그렇게 잘하는 사람이 무슨 이유 때문에 붙잡혔는지도 궁금하게 되었을 것이다. 처음에 천부장은 예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4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에 잠적한 애굽인 정도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바울은 점잖은 사람이었고 정중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둘째, 바울이 천부장에게 자신은 유대인이지만 작은 마을이 아닌 길리기아의 다소 시의 시민이라고 소개했기 때문이다(39절). 이는 바울이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어느 정도 배운 사람으로서, 교육 수준이 높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소 시민은 대부분 잘 살았기 때문에, 바울이 돈이 없어 가난한 사람들을 선동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자 곧바로 천부장은 그에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허락해 준다. 

 

4.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유대인들에게 어떻게 변호했으며 설득했는가?

  그러자 바울은 로마 군대의 진영에서 성전쪽으로 내려오는 층대(계단)에 멈춰 선 후 손짓을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사실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도 바울에게 어떤 죄목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그가 무슨 말을 할른지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자 정말 갑자기 장내가 조용해졌다. 하지만 바울은 곧바로 말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군중들의 외치는 소리가 없어질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많은 침묵이 흐르자 그때에 바울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놀라운 사실은 그때 바울은 자신이 억울하다는 말부터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거기에 모여든 유대인들에게 깎듯이 예의를 갖추어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히브리어 곧 아람어로 말을 시작했다. "남자들인 형제들과 아버지들이여"라고 말이다(행22:1). 사실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그 군중들을 선동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그것은 2가지다. 하나는 바울이 유대인과 성전과 예루살렘을 무시한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이방인을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의 변명은 유대인들을 존중하는 말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군중들은 더 조용해졌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방인 지역에서 살았다는데 그가 오리지널 아람어를 유창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예루살렘에서도 복음을 증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5. 바울은 그때 그들에게 무엇을 말했을까?

  그렇다면 바울은 로마 진영의 층계에서 유대인들을 향해 과연 무슨 말을 했던 것일까? 우선 알아야 할 것은 그가 자신은 죄가 없다는 것부터 변명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많이 억울했을텐데 바울은 그런 말을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그때 그가 말한 것은 첫째, 자신도 저들과 같이 율법에 열성을 가진 사람의 하나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행22:3). 그리고 둘째, 자신이 유대인이지만 왜 이방인 지역에 가서 예수님을 증언하는 삶을 살게 되었는지를 말했다. 그것은 그가 다메섹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으며, 또한 그분으로부터 어떻게 이방인 지역으로 파송을 받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여전히 싸늘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25년 전에 자신들이 죽였던 예수님을 아직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분은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셔서 몇 년 뒤에 바울을 찾아오셨고 바울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주셨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그들에게 바울은 자신들을 예수믿는 자가 되게 하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들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저런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해 달라고 천부장에게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 누구든지 처음부터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주님을 믿으려 하지 않는 자는 누가 그들에게 무슨 간증을 하고 또한 그들에게 그 무슨 말을 들려준다고 할지라도 믿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진실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럴려면 이전에 가지고 있던 선입관을 버리고 냉정하게 말씀을 들으면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를 귀담아 들으려는 마음을 소유해야 한다. 

 

2023년 01월 06일(금)

정병진목사

2023-01-04(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24) 양의 문이자 목자이며 하나님과 한 분이신 하나님(요10:1~4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lMVr-2CxIa4  [혹은 https://tv.naver.com/v/32159167 ]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과연 어떤 책인가? 요한복음은 사실 기독론의 책이다.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알려면 우리는 요한복음을 공부하면 되는 것이다. 그만큼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것들이 풍성하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누구신지를 예수님의 7가지의 표적으로도 말씀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7가지 자기 선언을 통해서도 말씀하고 있다. 그중에서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예수님의 2가지 자기 선언이 나온다. 그것은 예수께서 '양의 문'이라고 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께서 '선한 목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2가지 자기 선언을 하신 것일까? 그리고 수전절 때 설교하실 때에는 왜 자신을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그래서 오늘은 요한복음 10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2가지 자기 선언과 아울러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일체성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더불어 만세 전 예정론과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교리가 과연 요한복음에 나오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예수께서는 초막절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어떠한 자기 선언을 하셨는가?

  요한복음 10장은 요한복음 7장부터 시작된 초막절 설교의 마지막 부분과 그때로부터 2개월 뒤 수전절 기간에 있었던 예수님의 설교를 함께 수록하고 있다. 그중 초막절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2가지 자기 선언을 하신다. 그것은 예수님의 7가지 자기 선언 가운데 세 번째와 네 번째 선언에 해당한다. 예수께서는 이전 유월절 때도 오병이어의 표적과 함께 첫 번째로 자기 선언을 하신 바 있다. 그때는 당신 자신을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6:35)"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초막절 중간 즈음에도,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용서하시고 나서 두 번째로 자기 선언을 하셨다. 그때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8:12)"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초막절의 끝에 가서도, 나면서 맹인된 자를 고쳐 주신 후 양과 목자의 비유를 들려주시고나서(요10:1~6), 이와 관련하여 2가지 자기 선언을 하셨다. 하나는 "나는 양의 [출입]문이다(요10:7,9)"라고 하신 것이요, 또 하나는 "나는 선한 목자다(요10:11,14)"라고 하신 것이다. 

 

3.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양의 문이자 선한 목자로 표현하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당신 자신을 '양의 문'이자 '선한 목자'라고 표현하신 것인가? 그것은 유대인들의 진짜 실상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 그렇게 표현하신 것이다. 그래서 누가 진짜 양의 문이자, 진짜 양의 목자인지를 알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왜나하면 예수님을 흠잡아 그분을 죽이려 하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실상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려 주시고자 그렇게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과연 누가 진짜 양의 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누가 진짜 양의 목자인지를 알려 주시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것을 말씀하심은 훗날 곧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 비로소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깨닫고 회개하여 한 사람이라도 구원을 얻도록 하시려고 그렇게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4, 예수께서는 왜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셨을까?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양과 목자의 비유를 들려주신 후, 친히 자신을 '양의 [출입]문'이라고 말씀하신다(요10:7,9). 그럼 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그것은 스스로 양의 문임을 자처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누가 진짜 양의 문인지를 가르쳐 주시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스스로를 아주 훌륭한 양의 문이라고 자처하고 있었다. 즉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로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을 가리켜, 양떼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양의 우리에 들어갈 때에, 정식으로 출입문을 이용해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넘어 들어가고 있었다(1절). 다시 말해 그들은 본래 양의 목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양을 도둑질하고 해치는 절도(도둑)요 강도였던 것이다(1절, 8절). 왜 그런가?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천국문을 닫아버리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마23:13). 그리고 오히려 그들을 자기들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마23:15).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 때문에 천국문을 막는 주범이 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자신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들 중에 먼저, 사두개인들의 경우를 보자. 그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부터 충돌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제사에 쓰이는 제물을 판매하고 성전 세겔로 환전하는 자들이었는데, 그 일들을 통하여 엄청나게 많은 돈을 남기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이 있는 성전을 향하여, 더 이상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렇게 그들의 치부를 드러내었던 사람은 예수님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또 한 부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다. 이들은 율법해석자들로 자처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백성들로부터 칭송과 흠숭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율법해석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백성들이 과연 율법을 어겼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을 찾아가서 물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타나시자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님에게로 가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이전까지 백성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시기하고 질투하게 된 것이다. 이에 분이 치밀어 올라왔던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책잡아서 어찌하든지 그분을 제거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리고 벌써 그렇게 보낸 시간이 3년이 되었으니 그들의 시기 질투심은 당시 하늘을 치솟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주님께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6개월 후가 되면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께서도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실상이 어떠한 것인지를 정확히 알려 주어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들은 결코 '양의 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양의 문이 되려면 어떠해야 하는가? 그것은 2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양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할 수 있어야 한다(9~10절). 즉 사람으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하고 그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또 하나는 자기들을 통하여 양들로 하여금 꼴(목초지)을 얻되 들고나오면서 풍성히 얻게 할 수 있게 해야 한다(9~10절). 이것은 양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 풍성한 축복을 얻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은 과연 누가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 곧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친히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5.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이어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선한 목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목자를 자처했지만 그들은 아주 악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사 이 땅에 보내신 예수님을 귀신들렸다고 매도하고 있었고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고 죽이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자란 무엇인가? 목자란 기본적으로 양떼를 돌보고 양육하며 푸른 초장과 맑은 시내로 인도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양떼를 사나운 이리떼 곧 사탄 마귀로부터 지켜내고 보호할 수 있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양떼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고 부려먹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양떼들의 돈을 뜯어먹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목자가 어떤 존재인지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셨다. 그래서 선한 목자상을 그들에게 제시해 주셨다. 그것은 첫째,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양떼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자라야 참된 목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선한 목자는 이리떼가 오면 양들을 내버려두고 달아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리떼로부터 그들을 건져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그렇게 행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삯꾼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럼, 삯꾼은 어떤 사람인가? 그들은 돈을 받고 고용된 품꾼들이다. 그러므로 자신은 실제로 목자들이 아니다. 그리고 양도 자기의 양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그들을 내버려두고 그냥 달아난다. 그리하면 이리가 와서 양떼를 낚아채 가고 또한 흩어버리게 한다. 여기서 '이리'란 양떼인 하나님의 성도들을 해치는 세력으로서 사탄 마귀와 귀신들을 가리키며, 이단 세력 등을 가리킨다. 선한 목자는 이러한 세력으로부터 자신의 양떼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양떼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양떼들을 위해 내어놓으셨던 것이다(막10:45). 

 

6. 왜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배척한 것일까?

  그렇다면 왜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배척한 것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아직 그들이 주님의 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26절). 즉 그들이 주님께 속한 양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주님의 양이 될 수 없었던 것인가? 그것은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그들이 주님의 음성듣기를 거절하며 싫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7절). 또 하나는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27절).

  그렇다면 주님께 속한 양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인가? 아니면 살면서 주님의 양으로 정해지는 것인가? 사실 이것은 매우 영적인 일로서 그 실상은 이렇다. 사람은 남녀가 만나 사랑함으로써 아내의 자궁 안에서 생명이 수정이 되고 그리고 배 속에서 약 10달을 자라서 출생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의 육체의 출생만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영혼은 언제 어떻게 생성되고 자라게 되는가? 그것은 이렇다. 우선 사람의 영혼은 이 땅에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영혼은 하늘의 낙원에서 창조된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신다. 그리고 아이가 엄마의 태중에서 약 2~3개월 정도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그 아기의 몸속에 집어넣어 준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은 하늘에서 온 것이며, 사람의 육체는 이 땅에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어떤 영혼은 구별하여 주님의 양이 될 영혼으로 미리 정해 놓으시고, 어떤 영혼은 주님의 양이 되지 못하도록 미리 정해 놓으신 것일까? 그건 아니다. 누구든지 이 땅에서 태어나서 자신의 영이 왔던 하늘로 돌아가는 것을 주님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귀신들이다. 자기들은 절대 못 돌아갈 것을 알고 그렇게 막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양이 만세 전부터 정해졌고, 마귀의 자녀가 만세 전부터 정해졌다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이 땅에 태어나서 주님의 양으로 정해져 가기 때문이다.

 

7. 주님께서는 만세 전에 예정한 사람에게만 영생을 주시며, 한 번 얻은 영생은 영원히 보전되는가?

  이제 정리해 보자.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만세 전부터 예정된 것인가 아니면 살면서 구원받을 사람 안으로 예정되어 가는 것인가? 만세 전 예정론자들은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님께서 태초 전에 이미 예정해 놓으셨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렇게 예정된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 반대의 경우도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셨다고 그들은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을 사람으로 예정해 놓으시고 또 어떤 사람은 영원히 멸망받을 사람으로 예정해 놓았다는 것이다(이것을 '이중 예정론'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연 이 말은 합당하며, 성경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만세전 예정론자들은 그걸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말씀이 성경에 나온다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 내세우는 성경 구절로서 요한복음 10:29절의 말씀을 언급한다. 다시 말해, 오늘 우리가 다루는 본문 안에 만세 전 예정론에 관한 확실한 근거 구절이 있다는 것이다. 진짜 그러한지, 개역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부터 살펴보자. 

요10:28~29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만세 전 예정론자들은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준 자들에게만 영생을 주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사람만이 영원히 멸망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예수님에게서 그 사람을 빼앗아 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만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영원히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말씀의 의미는 예정론자들이 해석하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을 보면, 첫째, 예수께서 영생을 주시는 자는 '만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가 아니라, '그들' 곧 '양떼들'에게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27절에 나오는 바로 그 '양들'을 가리킨다. 그러면 이 양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27절에 보면, 주님의 양들로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고, 주님을 계속해서 따라가는 자들이다. 즉 이들은 만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들이 아니라 오늘도 계속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으며, 주님을 계속해서 따라가고 있는 자들에게 주께서 영생을 주시는 것이다. 둘째,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고 있는 자는 만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가 아니라, 그것은 중성 단수명사로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이미 주신 채 있는 '어떤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글 개역성경은 헬라어 원문을 따라 번역하지 않고, 소문자 사본의 말씀을 가지고 번역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한글 개역성경은 대문자 사본을 대본으로 하여 대부분 번역하고 있지만, 여기 요10:29에서 만큼은 후대 사본인 소문자 사본에서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그것은 아마도 처음 한글로 성경을 번역했던 자가 아마도 만세 전 예정론을 교리로 믿고 있는 자였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이 든다. 그렇다면, 원래 성경 원본에 가까운 번역본인 대문자 사본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그것은 다음과 같다. 

요10:29 내 아버지께서 [이미] 나에게 주신 채 있는 그것은 모든 것들보다 크다. 그러므로 아무도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계속] 낚아채는 것을 할 수 없다

  그렇다. 예수께서 영생을 주시는 사람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따라가며 주님을 믿는 사람들인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 그렇게 자신을 믿고 따라오는 자들을 구원할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보다 더 큰 것을 예수님에게 주셨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셨던 것들에는 능력, 지혜, 권세, 영광 등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것을 아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구원받으려고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예수께서도 구원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자를 절대 사탄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구원 안으로 예정되어 가고 있어도 그가 나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거절하고 주님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그도 결국 영생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으로 요10:28의 말씀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기 때문이다.

요10;28 그리고 내가 그것들(양들)에게 '시대의 생명'을 준다. 그러면 그것들(양들)은 '그 시대까지' 스스로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들(양들)을 내 손으로부터 [장차] 낚아채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 자신의 음성을 듣고 있고 자신을 따르고 있는 자에게 주시는 것은 '시대의 생명'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는 이 시대까지의 유효한 생명을 그분이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영생을 받은 자라도 '그 시대까지'까지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로 우리가 이미 믿음과 회개로 구원을 받아서 구원의 노정에 들어서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도 우상숭배하고 간음을 저지르거나 거짓말하는 등 십계명을 어기고 살면, 그러다가 회개치 못한 채 죽게 된다면, 우리는 반드시 죽을 때에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대의 생명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면 이 시대를 떠나 다른 시대로 들어갈 때 생명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멸망 안으로 들어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영원히 구원받으라고 주님이 주신 것이지만, 그러한 구원이라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한계시록 3:5에서도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라도 그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8. 예수께서는 정말 신성 모독죄를 지은 것인가?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라고 말씀하신다(30절). 왜냐하면 계속해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자신의 정체를 밝히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24절). 그렇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아버지와 하나였다. 고로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있는 중에도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 거하시고 있었으며, 아버지 안에 예수께서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38절). 그러나 유대인들은 곧바로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덤벼들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도리어 말했다. 그것은 예수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선한 일들을 해 왔는데, 어찌하여 돌로 치려 하느냐고 말한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 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예수께서는 당신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 그분이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 결코 신성 모독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구약성경의 말씀을 들어 변호하신다. 즉 구약의 시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재판하는 자들을 가리켜 '너희는 신들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시82: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을 신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거룩히 구별하여 이 땅에 아들로 내려보냈던 자가 자신을 가리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신성 모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만일 예수님을 믿지 못하겠거든 예수께서 행하신 아버지의 일들을 믿으라고 하신다. 이는 그것은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을 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시 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하자 예수께서 그들 사이를 빠져나가시어 베레아 땅으로 피신하신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러 오셨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중심으로 기록된 책이요,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신성을 말해 주는 표적들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성을 많이 접하게 된다. 다른 세 개의 복음서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지만, 요한복음을 통해서는 예수께서 주 하나님으로서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을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여러 말씀과 사건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누구시며 그분이 무슨 일로 아버지로부터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는지를 알 수가 있게 된다. 그렇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목수였던 요셉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분은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이라고 말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천한 선지자로서 메시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는 것은 당신 자신이 행하신 일들로 말미암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곧 아버지로부터 오신 분이시다. 그분은 이 땅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파송받은 이이신 것이다. 고로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또 다른 하나님으로서 아버지와 한 분이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그분은 만물이 있기 전부터 먼저 계셨다. 그리고 만물을 창조하셨던 창조주이시다. 그렇지만 유대인들 중에는 그동안 종교지도자들로서 누려왔던 물질적인 풍요와 백성들로부터의 찬사를 내려놓을 수 없었던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끝까지 예수님의 대적자가 되었고, 결국 예수님을 정죄하고 십자가에 죽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도 그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예수께서 돌아가신지 약 40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상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 나라 자체를 없애버리신다. 회개하지 않은 완악한 자들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고 계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들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양들로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라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얻은 영생(시대의 생명)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죽은 바 된 후에도 계속 영생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생명책에서 내 이름이 지워지지 않게 하는 것이요, 내가 죽을 때에 내 속에 이제까지 줄곧 있어 왔던 성령께서 나를 떠나가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2023년 01월 04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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