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9(금) 금요기도회

제목: 죄를 이기는 2가지 방법은 무엇인가?(롬7:15~8:17)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B2nIGItIqTo  [혹은 https://tv.naver.com/v/28261087 ]

 

1. 들어가며

  죄를 안 짓고 살 수는 없을까?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민이자 바램일 것이다. 그런데 이미 죄된 본성이 우리 속에 들어 있어서 혈기와 분노, 시기와 질투, 거짓과 불평 등이 샘솟듯 솟아 올라오고 있고, 악한 영들이 밖에서 우리들을 유혹하고 있으며, 세상을 보게 되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 모든 것을 다 뿌리치고 죄를 안 짓고 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죄를 계속 짓고 있다가 지옥에 떨어질 수는 없지 아니한가? 그렇게 해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고로, 죄를 지었으면 우리는 회개라도 해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천국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좋은 길은 역시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그럼 죄를 짓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죄의 소원의 싹부터 잘라 버리면 될 것이다. 죄된 본성 즉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는 죄를 덜 짓게 되거나 안 짓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어떻게 하면 죄를 덜 짓거나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왜 사람이 죄를 짓게 되는지 그 원인을 살펴보고, 그러한 죄를 이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2가지에 대해서 배워 보고자 한다. 

 

2. 사람이 죄를 짓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사람이 왜 죄를 짓게 되는지를 그 근본적인 이유부터 살펴보자. 사람이 죄를 짓게 되는 것은 마치 풀이 왜 자라는지를 살펴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풀은 왜 자라는가? 지난 주에 가서 풀을 베고 왔는데 왜 또 풀이 자라 있는가? 그것은 풀이 땅에 뿌리를 박고 있어서, 땅 위로 올라온 순을 아무리 잘라낸다 할지라도 또 자라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람이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 즉 인간의 부패한 본성이 사람 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죄된 본성이 마치 식물의 뿌리처럼 몸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일까? 그건 아니다. 첫 사람 아담에게는 죄된 본성이 있지 않았었다. 처음엔 그렇게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던 것이다. 아담 속에 죄된 본성까지 함께 창조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람 안의 죄된 본성은 아담이 뱀의 꾀임을 받아 죄를 짓게 된 후에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후손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죄를 지을 가능성을 가진 채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간인 이상 죄를 안 짓고 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를 짓지 아니하려면 죄된 본성을 뿌리째 뽑아내든지 아니면 죄의 뿌리가 싹을 전혀 내지 못하도록 다른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3. 원죄란 무엇이며, 사도 바울이 그것을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원죄'라는 말은 성경에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원죄'라는 개념을 로마서 7장에서 어렴풋하게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죄'라고 묘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롬7:18~20).

롬7:18~20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렇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자신은 원하지 않지만 그만 악을 행해 버리고 마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자기 자신의 육체 속에 거주하고 있는 죄된 본성을 '죄'라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이것을 굳이 말하자면 우리가 '원죄'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원래는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물려받은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말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 말했다. 

롬5:12~13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렇다. 여기서 '한 사람'이란 본문의 문맥에 따르면 첫째 사람이었던 '아담'을 가리킨다. 아담이 죄를 지었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죄와 사망이 이 세상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러한 범죄를 첫 아담의 범죄만으로 보지 않고, 모든 사람이 함께 범죄한 것으로 보았다. 물론 아담의 허리에 씨앗처럼 모든 인류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래서 내가 범죄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아담의 범죄에 같이 동참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아담이 받아야 했던 징계를 모든 인류가 지금도 똑같이 받고 있는 것이다. 

 

4. 원죄에 대해서 기독교에서는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사실 '원죄'(Original Sin)라는 말은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의미는 성경에 유사한 표현으로 나온다. 이것을 보고 초기 교부 어거스틴(A.D.354~430)은 이렇게 말했다. "아담이 지은 범죄로 인하여 그의 후손에게 전가되고 있는 죄된 본성이 바로 원죄인 것이다"라고 말이다. 즉 그는 이미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물려받은 죄된 본성을 가리켜 '원죄'라고 정의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리는 서방 기독교 즉 로마가톨릭의 전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종교 개혁자 루터와 칼빈에 의해 수용되어 개혁 교회에서도 역시 원죄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동방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죄를 '원죄'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들은 원죄를 다른 용어로 부르는데 그것은 '조상들의 죄'라는 것이다. 서방 기독교에서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그의 후손들에게 전가되고 있는 죄된 본성을 '원죄'라 말하지만, 동방 기독교에서는 조상들로부터 내려오고 있는 죄된 본성을 '조상들의 죄'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죄라는 개념은 일종의 교리적인 개념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바로 그것이 모든 사람의 육체 속에 들어 있다고 분명하게 말하였다는 사실이다(롬7:18~20). 

 

5. 원죄의 실체는 무엇인가?

  우리 교회에서는 지난 2년 동안 열심히 회개를 실천하였다. "회개기도문'(회개와천국복음연구소 발행)을 가지고 열심히 회개를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는 이전과는 다른 회개가 하나 더 들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지은 자범죄 뿐만 아니라 조상들이 지은 죄까지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였고 또 조상들이 지은 죄를 왜 내가 회개해야 하느냐며 따지는 분들까지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원죄의 개념을 이해하고 나니, 우리는 그동안 죄된 본성 곧 죄의 뿌리를 제거하는 회개를 잘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조상들이 지은 죄를 나의 죄로 인식하고 그 죄를 회개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조상들이 지은 죄를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범한 죄들 가운데에서도 출애굽기 20:5의 말씀에 따르면, 우상 숭배의 죄는 자기의 후손들 3~4대까지 내려간다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끊어내기 위해서 우리는 회개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죄의 실상을 살펴보니 사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의 육체 속에 이미 조상들의 죄의 결과가 들어와 있고 그의 후손들에게 계속해서 전가되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 뿌리를 제거해야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회개하면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죄를 짓게 되는 죄된 본성이 사실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우리 몸속에 침투해 있는 뱀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원죄는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없었던 것이고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생겨난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세기의 아담의 범죄와 그 결과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한 이후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는 선고의 말씀이 있다. 그것은 창세기 3:14의 말씀이다.

창3: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뱀이 아담 부부를 꾀여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게 되자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셨는데, 그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뱀이 살아 있는 동안(원문: 네 생명의 모든 날에) 흙을 먹을 것이라고 하셨다는 말씀이다(창3:14). 그런데 이때 흙은 땅(에레츠)의 토양(아다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티끌, 먼지'를 의미하는 '아파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창2:7의 말씀에서, 땅의 흙(아파르)를 취하여 인간의 육체를 만드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고로 우리는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의 육체 속에 뱀이 들어가서 그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말해 범죄한 인간의 육체는 뱀들의 처소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뱀들의 먹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뱀들이 육체 안에 들어와서 거주하면서 살다가 육체를 죽여서 그의 영혼까지 지옥에 데려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사실들이다. 그러나 영안이 열려서 보면 사람의 육체 속에는 수백에서 수천수만 마리의 뱀들이 들어와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뱀들을 몰아내지 않는 한, 우리는 죄된 본성으로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상들이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럴 때에 아담의 범죄 이후 계속해서 사람 몸속에 들어와 있는 뱀들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원죄의 실체는 우리 육체 속에 들어와 있는 뱀들의 욕망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뱀들은 사탄 마귀에게 속한 것으로서 거짓말하고 속이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요10:10). 그런데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영안을 열어서 보니, 언제 이러한 뱀들이 들어오는가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엄마의 태중에 씨가 잉태될 때부터 악한 영이 엄마에게서 자녀에게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아직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는 영이 사람의 태아 속에 들어가기도 전에 악한 영들인 뱀들이 태아 속에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6. 죄된 본성인 원죄이자 조상의 죄를 이길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죄된 본성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 첫 번째 방법은 조상들이 지은 죄, 나로부터 따지자면 조상 1대로부터 수십 대 조상에 이르는 죄를 회개해야 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아담의 죄까지도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아담 때부터 아담의 육체 속에 들어와서 내려오고 있는 악한 뱀들을 내보낼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떠한 죄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요일1:9).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지은 죄만을 회개할 것이 아니라, 죄된 본성 곧 조상들의 죄까지도 회개하는 것이 정말 필요하다. 특히 조상들의 범죄로 인하여 이미 자신이 큰 타격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필수적으로 이러한 죄를 회개해야 한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에게 뱀들로 인하여 나타나게 되는 4가지 증상이 나오는데 그것은 "노동, 고통, 수고, 죽음"이다(창3:17~19). 그것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일한 만큼 우리가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저주를 가리키는 것이요, 육체에 질병이 있어 고통받는 저주를 가리키며,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는 저주를 가리킨다. 그러나 우리가 최소 자신의 1~4대까지의 조상들의 죄를 회개할 수 있다면, 그는 이러한 굵직한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원죄에서 해방되고 원죄를 이기는 첫 번째 방법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는 평생 회개해도 우리 조상들이 지었던 모든 죄를 다 회개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어찌 내 아버지부터 시작하여 할아버지 그리고 계속해서 그 윗대의 할아버지 그리고 그 윗대의 할아버지의 죄를 회개하여, 아담의 죄까지 다 회개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죽을 때까지 회개한다는 각오로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회개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최소 내게 나타난 저주들 곧 가난과 질병과 망하는 것에서부터 벗어나는 그 순간까지는 조상들의 죄를 계속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7. 사도 바울이 가르쳐 준 죄를 이기게 해 주는 두 번째 방법은 무엇인가?

  감사하게도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상태에 대해서 알려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사람은 누구나 선의 법으로서 '하나님의 법'을 따라 선을 행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육체 속에는 '죄의 법'이 있어서, 자신을 사로잡아 죄를 짓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볼 때 비참한 상태에 있다고 말했으며, 결국 인간은 사망을 향해 가고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롬7:24). 자기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 하지만, 육신은 '죄의 법'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낙심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것은 믿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법이 하나 더 있으니, 그것은 '죄의 법'을 이기고도 남을 수 있는 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했다(롬8:1~2). 다시 말해 우리의 육체를 저 뱀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영 속에 성령이 들어오시게 되면 그보다 더 강력한 법의 통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인 뱀들보다도 창조주이신 성령 하나님이 더 강하시기 때문이다. 영계에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제하며 약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죄요, 죄된 본성이요, 조상들의 죄로 인하여 우리 몸속에 들어와 있는 악한 영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악한 영보다 더 강한 분 곧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는 그리스도 곧 성령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행하게 될 때 우리는 더이상 우리의 육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을 따라 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롬8:4). 육신을 따라 살면 우리는 사망으로 가게 될 것이며(롬8:6),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도 없을 것이다(롬8:7).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다(롬8:8). 또한 육신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롬8:13). 고로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성령을 받지 못한 불신자에게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자기 안에 성령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자들은 최고의 법인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써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기며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방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말씀을 전하게 될 것이다. 

 

8. 나오며

  우리 교회는 그동안 내 죄 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죄까지 회개하느라고 많은 공을 들여왔다. 무려 2년 이상을 그렇게 회개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풀지 못하는 저주들의 원인을 밝힐 수가 있었고 그것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날 수가 있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과 왜 그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는지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핵심은 바로 우리 몸에 있는 죄의 뿌리인 뱀들을 뽑아내는 것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담이 받았던 저주 곧 수고해도 얻지 못하고 누리지 못했던 저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였고, 육체의 질병에서도 벗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다. 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회개하여 죄의 뿌리들을 들어서 던져버릴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만 알고 실행하기에는 너무 벅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이기는 법을 가지고 같이 싸워야 한다. 그것은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이 법이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길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롬8:1~2). 이것은 일종의 법칙과도 같은 것이므로 사도 바울은 그것을 '법'이라고 말했다. 이 세상에 있는 법원도 여럿이 있다. 지방법원이 있고 고등법원이 있고 대법원도 있다. 우리 모두는 대법원의 판정이 최종 결과가 된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지방법원의 결정보다도 고등법원의 결정이 우선하는 것이고, 고등법원보다도 대법원의 결정이 우선하는 것처럼, 내 마음의 법보다는 죄와 사망의 법이 더 우선하는 것이고, 죄와 사망의 법보다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더 우선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성령께 자신을 맡겨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 마침내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니 말이다. 

 

2022년 07월 29일(금)

정병진목사

 

 

 

 

  베드로, 그는 예수님의 첫 제자이면서 수제자가 된 사람이다. 그는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까? 베드로는 과연 어떤 사건을 계기로 주님을 알게 되었고 사람의 영혼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었을까? 오늘 우리는 베드로가 부르심받는 장면에서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베드로는 어부였다. 그래도 그쪽 방면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던졌을 때 그가 체험한 고기의 어획량은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그때 예수님께 어떻게 말했어야 했을까? "선생님, 너무 너무 고맙습니다. 이제 이렇게 많이 잡았으니 일주일 정도는 고기잡으러 나오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어떻게 선생님은 고기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대해서 그리 잘 알고 있는지요,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정말 고개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날 예수님에게 감사하지 않았다. 그는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자신은 죄인이니 제발 자기를 떠나달라고 요청했다. 그렇다면 정말 베드로는 큰 죄인이었던 것일까? 아니, 그동안 발각되지 않고 있었던 죄가 발각이라도 된 것일까? 사실 베드로는 평생 고기를 잡고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던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동안 장모님과 아내 그리고 남동생 안드레의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날마다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날 그는 예수님 앞에 무슨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엎드렸다. 그리고 고개도 쳐들지 못했다. 대체 베드로는 왜 그렇게 행동해야 했던 것일까?

  사실 사람이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는 3가지 경우가 있다. 베드로는 과연 어떤 경우에 해당하지 유심히 살펴보자.

  첫째, 사람은 아담의 범죄가 곧 자신의 범죄였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한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아담의 범죄한 것 가지고 왜 자신까지 끌어들이느냐고 말이다. 아담이 범죄했으니 아담이 형벌을 받으면 되었지 왜 나에게도 그 형벌을 전가시키느냐며 불평해 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단순하게 끝낼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날 우리도 아담과 함께 범죄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히7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출하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던 날, 그는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 그런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증손자였던 레위도 아브라함을 통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이라는 말 속에 해답이 들어있다(히7:9~10). 사실 그때는 아직 레위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레위는 그때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기에 그날 레위도 아브라함과 함께 십입조를 바쳤던 것이다. 이와같은 원리에 따라 우리도 그날 아담과 함께 범죄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도 그날 아브라함의 허리에 씨로써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담이 낳고 낳고 낳고해서 태어난 그의 후손들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우리도 그날 아담의 허리에 있었서 그 범죄에 함께 동참한 것이다. 그렇다. 왜 우리가 죄인인가? 그것은 아담이 범죄할 때에 우리도 아담의 허리에 있어서 그와 함께 범죄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로마서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그렇다. 그날 아담의 불순종이 곧 나의 불순종이었고 아담의 죄가 곧 나의 죄였던 것이다.

  둘째,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어도 여전히 자기의 육체 안에 있는 죄의 본성에 이끌려갈 때가 있고 그래서 죄를 짓는 자신을 볼 때에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한다. 사실 모든 인류는 아담의 허리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징계와 저주를 우리도 계속해서 이어받고 있다. 가인이 그랬고, 모든 인류가 그랬다. 이것은 내가 예수님을 믿든지 아니 믿는지 상관없이 나타나는 증상이다. 왜냐하면 아담의 범죄의 결과가 사람의 육체 안에 주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자신의 육신 속에 있는 죄된 본성에 이끌릴 때에 그렇게 된다고 고백했다(롬7:18~20). 아담이후 사람은 본시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육신 안에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인이 되는 것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다만 어떤 사람이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의 차이는 다만 환경의 차이에서 올 뿐이다. 어떤 환경이 주어진다면 모든 사람은 다 죄된 본성에 이끌리어 죄를 짓게 마련이기 때문다. 다윗왕을 보라.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칭찬받았던 왕이다. 하지만 어느날 왕궁의 옥상에서 거닐다가 남의 집의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았을 때, 죄된 본성의 하나인 음심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것을 이기지 못한채 그만 간음죄를 범하고 말았다. 누구보다도 그에게는 왕권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여자든지 자기의 여자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에게는 왕의 권력이 쥐어져 있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권력이 쥐어진다면 여러분도 틀림없이 범죄할 것이다. 반대로 우리의 형편이 너무나 나쁜 상태에 처해도 우리는 범죄한다. 예를 들어 돈도 없는데 열흘만 굶어보라. 그러면 도둑질을 안 할 수 있을까? 그랬다. 죄된 본성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어느날 고백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나의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그렇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죄된 본성은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아니하며,  어떤 환경이 주어지게 되면 또 스물스물 올라와 자신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인 것이다.

  셋째, 사람이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는 세번째의 경우는 사람이 거룩하히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뵈었을 때다. 사실 사람이 하나님을 뵈옵기 전까지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잘 깨닫지 못한다. 자신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큰 죄를 짓지 않고서 살아왔으며 또한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아왔으니까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감옥에 들어갈 죄를 지어야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보면 즉시 자신은 죄인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그것을 성경에서도 증거한다. 예를 들어, 이사야선지자가 그랬다. 그가 어느날 셋째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에 성전을 보게 되었는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게 되었다. 그때 하나님을 시위하던 천사들은 이렇게 찬양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6:3)" 그때 이사야는 자신이 이제 죽게 생겼다고 탄식을 한다. 왜냐하면 부정한 입술을 가진 자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면전에서 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누구든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보라. 자신이 얼마나 추한 죄인인지를 말해주지 않아도 그냥 알게 된다.

  베드로의 경우는 바로 이 세번째의 경우에 해당한다. 고기잡이의 기적을 체험하기 직전까지 베드로는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알고 있었다. "선생님, 내가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은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당신의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5:5)"이라고 했다. 그가 며칠 전 안식일에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을 보았을 때에도 그리고 자기 집에 예수님이 오셔서 열병을 앓고 있는 장모를 치료해 주었을 때에도 그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정확히 몰랐다. 아마도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율법선생이요 병을 치료하는 의사선생님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그것도 대낮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가 그물을 내렸을 때 그는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어부들은 절대 낮에 그물을 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고기들은 그물을 보면 다 밑으로 도망쳐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은 반대였다. 고기들이 몰려와서 그 그물에 걸려 그물이 찢어질만큼 가득찼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베드로는 자신의 배와 동료의 배까지 잡은 고기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난 후에 베드로는 에수님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우리 개역성경에서는 그냥 놀랐다고만 되어 있다. 하지만 원문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베드로는 그때 손이 떨리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물을 깊은 데로 내리라고 명령하신 분이 자기 생각했던 단순한 선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영이 즉각적으로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 앞에 납작 엎드리는 길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분과 계속 있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그만 그분으로 하여금 자기의 곁을 떠나주기를 간청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나면 그렇게 된다. 하나님 앞에 의인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죄성까지 낱낱이 그분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분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사람들이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가? 그것은 첫째로, 성경말씀을 일기는 읽되 대충 읽기 때문이다. 좀 더 세밀하게 읽었더라면 아담이 범죄할 때 자신도 아담의 허리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을 믿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육체 안에 있는 죄된 본성이 크기에 그것을 이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죄와 싸워보지 않았던 것이다. 세번째로 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더러움에서 떠나계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성경말씀을 읽을 때에도 자신이 죄인인 것을 보는 것이다. 또한 죄된 본성과의 싸움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죄된 본성에 오염되어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란 어떤사건을 통해라도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경험하는 것이다.

  예수님 앞에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했던 베드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심판받아 구속받았는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함으로 훗날 예수님의 피로 죄용서를 받게 되었고, 또한 복음을 전하여 자신처럼 죄인인 것을 시인하는 자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자 곧 사람의 영혼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었다. 그렇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아주 좋은 것이다. 그래야 예수님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야 예수님의 보혈이 쓸모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야 죄용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16-01-24 예수님 앞에 엎드린 어부 베드로(눅5;1~11).ts_00001865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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