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그는 예수님의 첫 제자이면서 수제자가 된 사람이다. 그는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까? 베드로는 과연 어떤 사건을 계기로 주님을 알게 되었고 사람의 영혼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었을까? 오늘 우리는 베드로가 부르심받는 장면에서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베드로는 어부였다. 그래도 그쪽 방면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던졌을 때 그가 체험한 고기의 어획량은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그때 예수님께 어떻게 말했어야 했을까? "선생님, 너무 너무 고맙습니다. 이제 이렇게 많이 잡았으니 일주일 정도는 고기잡으러 나오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어떻게 선생님은 고기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대해서 그리 잘 알고 있는지요,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정말 고개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날 예수님에게 감사하지 않았다. 그는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자신은 죄인이니 제발 자기를 떠나달라고 요청했다. 그렇다면 정말 베드로는 큰 죄인이었던 것일까? 아니, 그동안 발각되지 않고 있었던 죄가 발각이라도 된 것일까? 사실 베드로는 평생 고기를 잡고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던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동안 장모님과 아내 그리고 남동생 안드레의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날마다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날 그는 예수님 앞에 무슨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엎드렸다. 그리고 고개도 쳐들지 못했다. 대체 베드로는 왜 그렇게 행동해야 했던 것일까?

  사실 사람이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는 3가지 경우가 있다. 베드로는 과연 어떤 경우에 해당하지 유심히 살펴보자.

  첫째, 사람은 아담의 범죄가 곧 자신의 범죄였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한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아담의 범죄한 것 가지고 왜 자신까지 끌어들이느냐고 말이다. 아담이 범죄했으니 아담이 형벌을 받으면 되었지 왜 나에게도 그 형벌을 전가시키느냐며 불평해 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단순하게 끝낼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날 우리도 아담과 함께 범죄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히7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출하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던 날, 그는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 그런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증손자였던 레위도 아브라함을 통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이라는 말 속에 해답이 들어있다(히7:9~10). 사실 그때는 아직 레위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레위는 그때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기에 그날 레위도 아브라함과 함께 십입조를 바쳤던 것이다. 이와같은 원리에 따라 우리도 그날 아담과 함께 범죄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도 그날 아브라함의 허리에 씨로써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담이 낳고 낳고 낳고해서 태어난 그의 후손들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우리도 그날 아담의 허리에 있었서 그 범죄에 함께 동참한 것이다. 그렇다. 왜 우리가 죄인인가? 그것은 아담이 범죄할 때에 우리도 아담의 허리에 있어서 그와 함께 범죄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로마서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그렇다. 그날 아담의 불순종이 곧 나의 불순종이었고 아담의 죄가 곧 나의 죄였던 것이다.

  둘째,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어도 여전히 자기의 육체 안에 있는 죄의 본성에 이끌려갈 때가 있고 그래서 죄를 짓는 자신을 볼 때에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한다. 사실 모든 인류는 아담의 허리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징계와 저주를 우리도 계속해서 이어받고 있다. 가인이 그랬고, 모든 인류가 그랬다. 이것은 내가 예수님을 믿든지 아니 믿는지 상관없이 나타나는 증상이다. 왜냐하면 아담의 범죄의 결과가 사람의 육체 안에 주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자신의 육신 속에 있는 죄된 본성에 이끌릴 때에 그렇게 된다고 고백했다(롬7:18~20). 아담이후 사람은 본시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육신 안에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인이 되는 것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다만 어떤 사람이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의 차이는 다만 환경의 차이에서 올 뿐이다. 어떤 환경이 주어진다면 모든 사람은 다 죄된 본성에 이끌리어 죄를 짓게 마련이기 때문다. 다윗왕을 보라.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칭찬받았던 왕이다. 하지만 어느날 왕궁의 옥상에서 거닐다가 남의 집의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았을 때, 죄된 본성의 하나인 음심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것을 이기지 못한채 그만 간음죄를 범하고 말았다. 누구보다도 그에게는 왕권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여자든지 자기의 여자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에게는 왕의 권력이 쥐어져 있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권력이 쥐어진다면 여러분도 틀림없이 범죄할 것이다. 반대로 우리의 형편이 너무나 나쁜 상태에 처해도 우리는 범죄한다. 예를 들어 돈도 없는데 열흘만 굶어보라. 그러면 도둑질을 안 할 수 있을까? 그랬다. 죄된 본성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어느날 고백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나의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그렇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죄된 본성은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아니하며,  어떤 환경이 주어지게 되면 또 스물스물 올라와 자신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인 것이다.

  셋째, 사람이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는 세번째의 경우는 사람이 거룩하히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뵈었을 때다. 사실 사람이 하나님을 뵈옵기 전까지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잘 깨닫지 못한다. 자신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큰 죄를 짓지 않고서 살아왔으며 또한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아왔으니까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감옥에 들어갈 죄를 지어야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보면 즉시 자신은 죄인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그것을 성경에서도 증거한다. 예를 들어, 이사야선지자가 그랬다. 그가 어느날 셋째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에 성전을 보게 되었는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게 되었다. 그때 하나님을 시위하던 천사들은 이렇게 찬양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6:3)" 그때 이사야는 자신이 이제 죽게 생겼다고 탄식을 한다. 왜냐하면 부정한 입술을 가진 자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면전에서 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누구든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보라. 자신이 얼마나 추한 죄인인지를 말해주지 않아도 그냥 알게 된다.

  베드로의 경우는 바로 이 세번째의 경우에 해당한다. 고기잡이의 기적을 체험하기 직전까지 베드로는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알고 있었다. "선생님, 내가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은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당신의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5:5)"이라고 했다. 그가 며칠 전 안식일에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을 보았을 때에도 그리고 자기 집에 예수님이 오셔서 열병을 앓고 있는 장모를 치료해 주었을 때에도 그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정확히 몰랐다. 아마도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율법선생이요 병을 치료하는 의사선생님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그것도 대낮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가 그물을 내렸을 때 그는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어부들은 절대 낮에 그물을 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고기들은 그물을 보면 다 밑으로 도망쳐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은 반대였다. 고기들이 몰려와서 그 그물에 걸려 그물이 찢어질만큼 가득찼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베드로는 자신의 배와 동료의 배까지 잡은 고기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난 후에 베드로는 에수님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우리 개역성경에서는 그냥 놀랐다고만 되어 있다. 하지만 원문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베드로는 그때 손이 떨리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물을 깊은 데로 내리라고 명령하신 분이 자기 생각했던 단순한 선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영이 즉각적으로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 앞에 납작 엎드리는 길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분과 계속 있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그만 그분으로 하여금 자기의 곁을 떠나주기를 간청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나면 그렇게 된다. 하나님 앞에 의인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죄성까지 낱낱이 그분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분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사람들이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가? 그것은 첫째로, 성경말씀을 일기는 읽되 대충 읽기 때문이다. 좀 더 세밀하게 읽었더라면 아담이 범죄할 때 자신도 아담의 허리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을 믿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육체 안에 있는 죄된 본성이 크기에 그것을 이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죄와 싸워보지 않았던 것이다. 세번째로 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더러움에서 떠나계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성경말씀을 읽을 때에도 자신이 죄인인 것을 보는 것이다. 또한 죄된 본성과의 싸움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죄된 본성에 오염되어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란 어떤사건을 통해라도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경험하는 것이다.

  예수님 앞에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했던 베드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심판받아 구속받았는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함으로 훗날 예수님의 피로 죄용서를 받게 되었고, 또한 복음을 전하여 자신처럼 죄인인 것을 시인하는 자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자 곧 사람의 영혼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었다. 그렇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아주 좋은 것이다. 그래야 예수님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야 예수님의 보혈이 쓸모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야 죄용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16-01-24 예수님 앞에 엎드린 어부 베드로(눅5;1~11).ts_00001865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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