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는 섬기는 자도 있고 왕노릇하는 자도 있다. 또한 천국에서 예배드릴 때에 보다 더 앞쪽에서 예배드릴 자가 있고 보다 더 뒤에서 예배드릴 자도 있다. 특히 천국에서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에서 예배드릴 자를 성경은 "이기는 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들 중에는 여러 고을들과 민족들 위에 "왕노릇하는 자"도 있다. 그 예표가 바로 창세기 46장에 나오고 있다. 그럼, 대체 어떤 자가 천국에서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고 왕노릇하는 자가 되는 것인가? 오 놀라운 비밀이 이 말씀 안에 담겨 있다.

 

2021-07-25(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창세기강해(160) 천국에서 이기는 자가 되고 왕노릇하는 자가 되려면(창46:5~15)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HQBfVTytm4s [혹은 https://tv.naver.com/v/21524557 ]

 

 

1. 들어가며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구일까? 세상 사람들은 단연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먹을 것 마실 것 즐길 것 많은 세상에 그런 것을 누리지도 아니한 채 오늘도 묵묵히 주님께 헌신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일요일이 되어도 예배드려야 한다면서 어디 놀러도 가지 아니하고, 집안 형편이 쪼들려도 십일조를 내고 각종 헌금을 드리며, 일주일에 한 번은 교회에 와서 청소하고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하지 않지만 식사 준비하고, 주일찬양 준비하고, 아이들 교회학교 준비하고, 매일 새벽에 나와서 자녀와 교회와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우리의 삶이 이생 뿐이라면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일 것이다(고전15:19).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것, 없어질 것을 주목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 영원한 것, 하늘의 것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고후4:18).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비록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하늘의 영원한 것을 바라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소망을 주는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그것은 우리가 장차 들어갈 천국에서 과연 무엇을 받게 될 것인지를 살펴보면서, 그때 하나님 가까이에 놓이게 되는 보좌 자리는 과연 누가 차지하게 될 것인지를 나누고자 하는 것이다. 오, 이러한 말씀을 나눌 수 있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린다. 

 

2. 야곱이 자신의 70명의 식구들을 데리고 들어간 애굽의 고센 땅은 어떤 곳을 상징하는가?

  야곱은 자신의 나이가 130세가 되던 해에, 자기의 허리로부터 태어난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들어간다. 자신의 아들 요셉이 기근 때문에 힘들어하는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과 조카들을 애굽으로 초청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야곱은 처음에는 머뭇거렸지만 환상으로 주님의 명령이  떨어지자 곧장 브엘세바를 떠나 애굽의 고센 땅으로 이주해 들어간다.

  그렇다면, 애굽의 고센 땅이라는 어떤 장소인가? 요셉은 이때로부터 20년 전에 자신의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 애굽에 들어왔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이제는 자신의 부모와 형제와 조카들을 기근으로부터 살리기 위하여 그들을 애굽으로 초청한다. 그런데 요셉이 자기 가족들이 살도록 초청한 그 장소는 아주 비옥한 장소였다. 그곳을 사람들은 고센 땅이라고도 불렀고, 라암셋이라고도 불렀으며, 소안 뜰이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그 땅은 나일강 삼각주에 위치해 있어서 아주 비옥했고 아주 기름진 땅이었다. 아무리 기근이 찾아와도 나일강은 결코 마르지 않았기에, 물레방아와 같은 기구를 사용해 물을 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장소고 고센 땅이었고, 그래서 가축에게 언제든지 물과 풀을 먹일 수 있는 아주 풍요로운 땅이었다. 뿐만 아니라 애굽인들은 기본적으로 목축을 가증하게 여겼으므로, 애굽인이라면 그 누구도 접근하지 않는 땅이 바로 그 땅이었다. 그러므로 고센 땅은 이스라엘 민족이 혈통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구별되어 성장할 수 있는 아주 적합한 장소였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볼 때 고센 땅은 살기좋고 풍요롭고 생명수가 가득한 천국의 새 예루살렘성과 같은 장소이자, 구별되언 땅으로서 천국을 예표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고로 창세기에서 천국의 예표는 다름 아닌 고센 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왜 모세는 야곱이 데리고 간 식구들의 숫자를 70명이라고 기록했을까?

  이때 아곱이 애굽으로 데리고 간 식구들의 숫자는 몇 명이었는가? 최소 70명은 넘는다. 왜냐하면 야곱의 허리에서 난 자가 66명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창46:26). 즉 자신의 아들들과 딸들 그리고 손자들과 손녀들의 숫자가 모두 66명이었던 것이다(창46:26). 그런데 그때 며느리도 함께 애굽으로 건너갔다고 나와 있다. 그렇다면, 그때 애굽에 들어간 자들의 숫자는 78명이어야 한다. 자부가 12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세는 그때 애굽에 건너간 야곱 식구들의 숫자를 "70"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창46:27). 왜그랬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70이라는 숫자가 산술적인 숫자라기 보다는 상징적인 숫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는 일부러 그렇게 기록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럼, 왜 모세는 적어도 78명이나 되는 숫자를 70명이라고 기록한 것인가? 그것은 야곱의 식구 70명이야말로 장차 들어갈 천국에서 이긴 자들의 예표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장차 천국에 들어가면 바로 알겠지만, 천국에서는 예배드릴 때에는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모인다. 그들의 숫자는 수 천 만 수 억 명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예배드릴 때에 겹쳐서 모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 가까운 곳으로부터 차근차근 사람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의 보좌 앞에는 우선적으로 70줄의 보좌들이 놓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허다한 무리들이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70줄에는 다시 옆으로 많은 수의 보좌들이 놓여있을 것인데, 그 숫자를 요한계시록에서는 144,000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천국에서 144,000명은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 중에서, 보좌 위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자들 곧 이기는 자들의 숫자인 것이다. 고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44,000명은 결국 이긴 자들의 숫자인 것이다(이러한 사실은 창세기강해 158번과 159번을 검색하여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70이라는 숫자와 144,000이라는 숫자는 실제 숫자이지만 동시에 매우 영적인 숫자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70"이라는 숫자는 "7 곱하기 10"이라는 숫자로서, 이 땅의 완전수를 뜻하는 '7'에다가, 작은 충분한 수를 가리키는 '10'이라는 숫자를 곱한 값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144,000"이라는 숫자는 "12 곱하기 12 곱하기 1,000"이라는 숫자로서, 하늘의 완전수인 '12'에다가 다시 '12'를 곱한 것에, 많은 충분한 수를 가리키는 '1,000'이라는 숫자를 곱한 값이기 때문이다. 고로 "70"이라는 숫자값이나, "144,000"이라는 숫자값은 둘 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셔서 계획하신 이긴 자들의 충분한 숫자값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4. 왜 야곱의 가족들 70명과 하늘의 144,00명은 이기는 자들인가?

  그렇다면, 야곱의 70명의 가족들은 왜 "이긴 자"라고 불리는 것이며, 천국에서 144,000명의 사람들에 대해 사도요한은 왜 그들을 "이긴 자"라고 부르는가? 그것은 둘 다 천국에서 이긴 자들의 무리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야곱의 가족들 70명에 대한 영적 의미부터 살펴보자. 창세기의 기자였던 모세는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의 70명의 가족들을 야곱의 가족들이라고 소개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가족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창46:8). 그리고 야곱의 12아들들을 기록할 때에도 그들을 야곱의 아들들이라고 기록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창46:5). 여기서 "야곱"이라는 말은 "뒷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이며, "이스라엘"이라는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이다. 곧 야곱의 새 이름인 "이스라엘"은 한 마디로 "이긴 자"라는 뜻이다. 고로 모세가 야곱의 가족들을 이스라엘의 가족들이라고 기록한 것은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바로 이긴 자의 표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라는 용어를 우리는 "이긴 자의 아들들"이라고 고쳐불러도 되는 것이다.

  이제는 하늘에 있는 144,000명의 사람들을 일컬어 왜 요한계시록에서는 "이긴 자"라고 했는지를 살펴보자. 그것은 예수께서 보좌자리에 앉아있는 144,000명의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 그들을 "이긴 자들"이라고 공식적으로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도 이 세상에 사람으로 왔다가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가셨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때에 예수께서는 이긴 자가 되셨다. 고로 예수께서도 이긴 자가 되셨기에, 아버지의 보좌자리에 앉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계3:21).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기는 자들에게 그 보좌자리에 앉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성경은 그들이 바로 144,000명이라고 언급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서 예배드릴 때에 70줄에 걸쳐서 순서대로 하나님의 보좌 앞쪽에 앉아있는 144,000명의 사람들을 가리켜 "이긴 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5. 야곱의 가족 70명의 명단을 통해서 살펴보는 이기는 자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야곱이 애굽에 데리고 들어간 70명의 가족 명단은 우리에게 놀라운 사실을 가르쳐 주는데, 그것은 과연 어떤 자들이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자들이 탈락하는지까지도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특징들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4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마땅히 이기는 자로서 애굽 땅으로 들어갈 자격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끝내 못 들어가는 자들도 있다는 것이다(창46:12). 그것은 유다의 장남과 차남과 같은 경우이 일이다. 유다는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이기는 자들 중에서도 주요한 왕으로 다스릴 자의 하나의 표상인데, 그의 아들들 중에 장남이었던 '엘'과 차남이었던 '오난'은 당연히 이긴 자의 손자들이 때문에 그 땅에 들어간 멤버가 되었지만, 그만 죄를 범하는 바람에 그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둘 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긴 자가 되어 보좌자리에 들어갈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는 자가 결국 그 보좌리에 못 들어가는 자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둘째, 이기는 자들 중에 약간의 구별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여자들도 왕의 보좌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창46:7,15). 훗날 모세는 애굽에 들어갔던 이긴 자들의 명단을 기록으로 남겨두었는데 거기에 보니, 여자의 이름과 여자들이 들어갔다고 쓰고 있다. 그들은 야곱의 딸들이자 야곱의 손녀들이었다. 야곱의 딸로서 레아의 소생 '디나'는 그 이름이 아예 70명의 명단에 기록되어 있으며, 다른 딸들과 그리고 손녀들도 이름은 밝히지 않고 있다면 거기에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실 인류의 죄가 하와에 의해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여자는 실로 남자의 머리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데에 여자도 들어갈 수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천국에서 이기는 자가 될 수 없다고 좌절하거나, 보좌에 앉아 왕노릇하는 자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갖지 말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약간의 제약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144,000명의 명단에 여자들도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 

  셋째, 이기는 자들로서 자격을 갖춘 자는 일찌감치 먼저 그곳에 들어가는 영예를 안을 수 있다는 것이다(창46:20). 조금 있다가 더 살펴보겠지만 144,000명의 명단에는 요셉이 들어 있다. 하지만 요셉이 그 명단에 있기는 하지만, 그는 이기는 자들 중에 이기는 자이었기에, 왕으로 여러 도시들을 다스릴 자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브라함의 4대후손으로 태어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한 사명을 잘 완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먼저 애굽으로 건너가서 자기의 부모와 형제들과 조카들이 들어와서 살 수 있는 모든 준비를 완료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서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라는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러므로 야곱의 아들들과 손자들 중에는 요셉과 그리고 므낫세와 에브라임처럼 그곳에 들어갈 준비가 먼저 된 자들은 그 자리를 선점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렇다. 부모나 조상이 심어놓은 것이 있는 자식이나 자손은 천국에서 보좌자리를 차지하는 데에 많은 좋은 영향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기는 자들의 특징 중 하나다.

  넷째, 이기는 자들 중에는 정말 더 크게 왕노릇하는 자들도 있다는 것이다(창46:19, 45:8, 49:8,10). 애굽의 고센 땅에 들어간 사람들 중에 요셉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형제들을 다스리는 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애굽 온 나라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자가 되었고 심지어 애굽왕 바로(파라오)도 그를 아버지처럼 대하였기 때문이다(창45:8). 그러므로 그는 이기는 자들 중에 왕노릇하는 자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천국에서 144,000명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왕노릇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최소한 이들을 섬기는 자들이 따로 그들에게 따로 붙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민족 위에 왕노릇하는 자도 있을 것이고(계2:26~27), 고을들(도시들)을 다스릴 자도 있을 것이다(눅19:16~17). 그러한 사람의 대표가 바로 요셉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요한 왕이 되어 왕노릇할 자로서 요셉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야곱도 있고 유다도 있기 때문이다. 먼저 야곱의 경우를 보자. 그는 아예 이기는 자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창35:10). 그리고 그는 왕이 될 자들을 산출한 자였기에 충분히 중요한 왕노릇 할 자다(창35:11). 또한 야곱과 더불어 그의 아버지 이삭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도 천국에서 보좌에 앉아 왕노릇할 자이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8:11). 그리고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도 중요한 왕노릇하는 자에 해당한다. 이는 유다도  144,000명이 앉아있는 70줄에서 보다 앞쪽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그는 하나님의 사람인 요셉을 죽음에서 구출해 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형 시므온과 자신의 베냐민을 구원하려고 자신의 몸숨을 내던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비록 넷째 아들이었지만 영적으로 장자가 되는 축복을 받았으니, 그의 형제들이 그에게 절하게 될 것이며, 그의 직계 후손으로는 왕들이 나올 것이라고 야곱이 축복하기도 하였다(창49:8~10). 

 

6. 어떤 자들이 천국에서 이기는 자가 되고 왕노릇하는 자가 되는가?

  그렇다면 과연 어떤 자들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이기는 자가 되고 왕노릇하는 자가 되는 것인가? 우리는 이기는 자로서 144,000명 가운데 보다 더 70줄의 앞쪽에 있는 자들 곧 천국의 고을들에서 왕노릇하거나 민족들 위에 왕노릇할 수 있는 자들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창세기의 족장들 가운데 이기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과 유다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사례를 좀 더 들여다보면 그들이 어떻게 왕노릇하는 위치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바로 천국에서 왕노릇할 자의 예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5명의 모든 삶을 통틀어 조사해 보았을 때에, 이들만이 갖고 있는 놀라운 특징이 2가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천국에서 이기는 자로서 보다 더 왕노릇할 자는 깨끗한 자 곧 순결한 자로서, 적어도 회개하여 죄를 용서받고 죄를 짓지도 않을 뿐더러 죄와 싸워서 이기는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과 회개를 통해 가문의 저주를 끝낸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삭은 자기의 것을 빼앗가는 자들을 향하여 저주하지 않고 양보했던 사람이다. 그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미워하거나 분노하거 살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요셉은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갔으며 주인의 처로부터 모함을 받아 죄수가 되었어도만 끝까지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죄를 짓지 않았다. 이렇듯 천국에 왕노릇하는 자는 죄를 끝냈거나 죄를 없는 깨끗한 자들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죄부터 청산해야 한다. 내가 지은 죄 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지은 죄까지 회개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죄를 멀리하고 죄와 싸워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 이기는 자들로서 보다 더 크게 왕노릇할 자가 되기 위해서는 충성된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충성"은 천국에서 면류관을 얻고 좋은 천국집에서 살게 해주는 핵심적인 요소이면서 동시에 보좌자리를 얻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다. 그러므로 충성되지 않은 자가 천국에서 상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주님 가까이서 예배할 수 있는 특권이야말로 매우 영광스러운 지위인데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맡겨준 일에 충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주님께서 명령했던 말씀에 항상 충성했던 인물들이다. 그중에 이삭은 하나님께서 멈추라 하면 멈추었고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드려야 할 상황에서 그는 기꺼이 자신을 하나님께 바쳤던 자였다. 그리고 야곱은 장자계승권 곧 하늘 소망에 대한 열정을 가졌서 그것을 얻었으나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환도뼈가 위골되는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형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 그는 자신이 할 수 없는 모든 일을 다하였으며, 겸손히 자신을 낮추었다. 더욱이 유다는 형제들 중에 넷째아들이었지만 자신의 동생 요셉을 죽음의 위기에서 건져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형 시므온과 동생 베냐민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기꺼이 내어줌으로 장자로서의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했다. 마지막으로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적인 꿈을 하나님의 계획으로 알고 온갖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보면, 이기는 자들 중에서도 더 중요한 왕이 될 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한다. 이것은 부활승천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들]을 지키는(준행하는, 이행하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만국 위에 있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계2;26~27)" 그렇다. 이기는 자들 중에서도 주께서 자신에게 맡겨준 일에 충성하여 그것을 끝까지 준행하는 자는 만국을 다스리는 왕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자신은 충성된 자가 되고 싶다고 하는데,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감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충성'이라는 단어는 그 전제가 자신에게 어떤 직무가 주어졌거나 사명이 주어졌을 때에 적용할 수 있는 말다. 그러므로 맡은 일이 없다면 그는 충성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자기가 일을 맡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자는 천국에서 왕노릇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자신이 수고할 일이 없지만, 정말 충성된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이렇다. 이미 주님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거나 사명을 맡은 자와 함께 충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선지자를 영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게 되고, 의인을 영접하면 의의 상을 받게 되며, 제자의 이름으로 소자 중 한 사람에게라도 냉수 한 그릇 대접한다면 그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10:41~42).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사명을 맡아서 일하는 주의 종과 협력하여 일함으로 충성할 수 있는 것이다. 

 

7. 나오며

  그렇다면 날마다 지은 죄를 회개하고 조상들의 저주까지 끊어낼 뿐만 아니라 죄를 이기고 죄와 싸우는 자가 되면 어떤 복을 받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어 시키신 일에 충성하거나 직임과 사명을 받은 자들과 함께 충성하게 되면 그는 어떤 복을 받게 되는 것인가? 그는 천국에서 이기는 자가 되고, 왕노릇하는 자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천국에서 144,000명에 속하는 왕이 되는 것이다. 그런 자는 예배할 때에 제사장으로서 영광스러운 직무를 수행하는 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천국에서 144,000명 안에 들어가게 되면, 그에게는 자기를 돕는 자가 배정될 것이다. 그리고 예배드릴 때마다 지정된 좌석에 앉게 될 것인데, 그런 자는 주님 보좌 가까이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보다 더 앞쪽에 있는 중요한 왕은 여러 고을들을 다스리는 자가 되거나 여러 민족들을 다스리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들이 야곱의 70명의 가족들 중에 있었다. 그들이 바로 '야곱'과 '유다'와 '요셉'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 간신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 정도인가? 아니면 주님께서 특별히 배정해주는 좌석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인가? 기왕이면 보다 더 앞 줄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럴려면 지금부터라도 자신을 깨끗히 하자. 그리고 충성하자. 이것이 바로 천국에서 우리의 신분을 결정해주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7월 25일(주일)

정병진목사

 

 

 

 

예수님은 천국에서 하나님으로 있는가 아들로 계신가? 천국에서 그분은 하나님의 보좌 위에 앉아계시는가 그의 우편에 앉아계시는가? 천국에서 예수님은 주 하나님이신가 어린양이신가? 우리는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던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하늘에 계신 그분에 대해서는 사실 잘 알지 못한다. 그분은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어디에 계셨으며, 지금 하늘에서는 어디에 좌정해 계시는가? 이 놀라운 사실이 계22:1~5에 펼쳐지고 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대체 누구신가?

2020-08-23(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예수님은 주 하나님이신가 어린양이신가?(계22:1~5)
https://youtu.be/UCQtlTls5ho [혹은 https://tv.naver.com/v/15396934  ]


 

1. 들어가며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구원을 주시는 그분을 알아야 한다. 우리 인류에게 구원을 주시는 그분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다(요14:6).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올 여름을 맞이하여 예수님이 누군지를 무려 20차례 이상을 다루어왔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그리고 그분이 주 하나님이신 것을 계속해서 살펴보았다. 그중에서도 예수께서 하나님이신 이유는 그분이 자존하시며 무소부재하시며, 전지전능하시고, 영원불변하시기 때문이라는 것도 살펴보았고 살펴보고 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예수님을 단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분, 곧 하나님의 아들로만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성도는 그분을 자존하시는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러한 말씀을 들어본 적도 없고 가르침을 받아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천국에 가면 우리가 보게 될 광경 곧 천국의 중심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의 중앙에 위치한 하나님의 보좌와 더불어 거기에 앉아계시는 이가 누군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 과연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어린양이신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영국의 리차드 보컴교수는 왜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가?

  영국의 대신학자이신 리차드 보컴(76세) 교수는 신약학자요 역사신학자이다. 그는 이 방면에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자다. 세계신약학회는 그분을 매우 존경한다. 그런데 이분의 전공은 요한신학이며 그중에서도 요한계시록이다. 그럼, 그분은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을까? 그분은 요한계시록이야말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아주 특별한 책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면서 2가지 근거를 제시하는데, 하나는 예수님의 자기선언에서 그것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요한계시록의 처음과 마지막에 하나님과 예수께서 자기자신이 누군지를 선언하고 있는데, 그 선언들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즉 요한계시록 1장에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계1:8)"라 하셨는데, 이어 예수께서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계1:17)"이라고 선언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동일한 문구에 대한 반복이라는 것이다. 또한 요한계시록 마지막 부분에 가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다(계21:6)"이라고 하셨는데, 예수께서도 자신을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22:13)"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에 속한 것이 아니라면 도무지 불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요한계시록 5장에 가면 나오는데, 오직 유일한 분 하나님에게 돌려야할 찬양과 경배를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에게도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계5:12~13).  이것은 오직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오직 하나님 한 분 이외에 다른 신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다른 신을 신으로 인정할 바에야 그들은 기꺼이 죽음을 선택했었기 때문이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그랬고, 다니엘이 그랬으며, 신구약 중간시대의 이야기가 기록된 마카베오상하에도 그러한 내용들이 나온다. 그런데 신약의 성도들이 하나님 이외에 어린양에게 찬양과 경배를 돌리고 있다는 것은 그분을 한 분 하나님 안에 포함시키지 않았다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고로 보컴 교수는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3.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주] 하나님과 어린양"은 두 분인가 한 분인가?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표현 중에 "주 하나님과 어린양"이라는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에도 새 예루살렘 성 중안에 있는 한 개의 보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렇다면 그 한 개의 보좌는 대체 누구의 보좌인가? 하나님의 보좌인가 아니면 어린양의 보좌인가? 성경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라고 나온다(계22:1,3). 그런데 놀랍게도 "보좌"라는 단어는 단수명사다. 만약 하나님과 어린양이 각각 다른 존재였다면 틀림없이 보좌는 "보좌들"로 기록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단수로 나온다. 그리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분을 지칭할 때에 사도요한은 "그들(them)"이라고 하지 않고, 단지 "그(him)"라고 표현한다. 계22:3~4절을 읽어보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이 보좌(단수)가 그[성의]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his) 종들이 그(him)를 섬기며(예배하며), 그의(his)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his) 이름도 그들의 이마[위]에 있으리니(계21:3~4)" 그렇다면, 하나님과 어린양을 왜 사도요한은 한 분처럼 묘사하고 있는가?

  여기서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어린양"은 아들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우선 3~4절의 기록만 보아서는 "하나님과 어린양"은 두 분이 아니라 한 분이라는 것고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얼굴을 뵈온다고 할 때에 그분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이 아니라 볼 수 있는 예수님인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서 한 분 하나님을 뵈올 때에는 한 때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던 예수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 때문이다(계22:4). 즉 천국에서 보게 되는 한 분 하나님의 모습은 예수님이요, 보좌에 앉아계시는 하나님을 볼 때에 도 여전히 우리는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요1:18).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이라는 용어는 총 99회에 걸쳐 나오며, "어린양"이란 용어는 총 30회에 걸쳐 나오는데, 한 문장 안에 "하나님과 어린양"이라는 표현도 있다. 그 표현은 총 총 5회에 나온다(계7:10, 14:4, 21:22, 22:1, 3).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과 어린양"이라는 표현을 받을 때에는 항상 단수로 받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4. 요한계시록에서 "어린양"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요한계시록을 보면, 1~3장에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신 예수께서 등장한다. 그러다가 4장에는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나오고, 5장에 가면, 보좌 위에 앉으신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는 어린양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어서 어린양은 22장 전반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총 30회나 나온다. 그리고 22장 후반부에 가면, 다시 예수님이 등장하고 요한계시록의 편지는 끝난다.

  그럼, 대체 어린양은 누구신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어린양의 용례를 근거로 살펴보면, 어린양이 누군지를 우리는 알 수가 있다. 첫째, "어린양"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 "아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계14:1). 왜냐하면 하늘의 시온산에 구원받은 성도들 144,000명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그들을 보니 그들의 이마 위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둘째, 어린양은 일찍 죽임을 당한 채 있는 존재로서 나온다(계5:6,9,12). 그는 일찍 죽임을 당한 존재로서 자기의 피로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신 분, 그래서 모든 피조물로부터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분으로 등장한다. 또한 예수께서도 요한계시록의 서두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계1:17b~18a)" 그렇다.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세마포옷을 입으시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거니시고 있던 분, 곧 소아시아에 일곱 교회에 편지를 써보내라고 하셨던 바로 그분,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던 것이다. 

 

5. 천상에 있는 "어린양"은 실제 어린양의 모습으로 있는가?

  오늘날에 와서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요한계시록 5장부터 22장에 걸쳐서 나오는 "어린양"을 실제로 양같이 생긴 분이라고 알고 있는 분들이 많다. 그래서 천국에서 아버지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계시며, 아들 예수님은 "어린양"으로 그분의 오른편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비유와 상징에 대해서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어린양"은 "일곱 눈들과 일곱 뿔들을 가진 양"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계5:6). 만약 이것이 실제를 가리키는 표현이라면, 어린양은 괴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일곱 개의 눈들과 일곱 개의 뿔들을 가진 어린양을 한 번 상상해보라. 아니다. 여기에 나오는 "일곱"은 이 땅에서의 완전수를 가리키며, 어린양의 "눈들"은 이 땅에 보내어져 이 세상 모든 사람과 사물을 감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영(성령)을 가리키고(계5:6), "일곱 뿔들"은 예수님의 완전한 권세를 상징하는 것이다. 둘째, 만약 어린양이 실제하는 것이라고 하면,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어린양은 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천국에 올라오는 성도들을 위해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계7:17). 어린양들을 과연 어린양이 인도한다는 표현이 맞는 말인가? 아니다. 고로 우리는 어린양은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비유하기 위한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예수께서 인류의 대표자인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그 다음날 세례요한 앞에 나왔을 때에, 세례요한은 그를 보고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때 예수님의 모양이 어린양이었는가? 아니다. 그것은 이제 인류의 모든 죄를 전가받고 그 죄를 없애기 위해, 죄없고 흠없는 순결한 예수님께서 속죄제물이 되신 것을 비유적이고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결코 실제 예수님의 모습이 어린양이었다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에서 예수님도 그분이 한 때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천국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항상 기억하도록, 그래서 그분 앞에 엎드려 경배하도록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고로 어린양은 죄없으시고 순결하신 예수님, 그렇지만 일찍 죽임을 당해 인류의 속죄제물이 되셨던 예수님의 모습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다. 그러니까 어린양은 예수님의 전체적인 사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때 인간의 모습을 취하셔서 낮아지시고 죽음을 맛보셨던 예수님의 한 면을 지칭하는 것이다. 

 

6. 예수께서는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시기 전 어디에 어떻게 계시다가 오셨는가?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만세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후 아들로 있다가 그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에서 하신 말씀은 거짓말이 되고 말 것이다. 그때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들] 가운데서 [장차] 죽으리라 하였노라 [왜냐하면] [만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나는 스스로 있는 자=하나님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너희[의] 죄[들] 가운데서 [장차] 죽으리라(죽을 것이기 때문이다)(요8:24)" 그렇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기 전에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그렇게 자존하셨던 분이 이제 인류의 속죄를 위해 어린양으로 오셨던 것이다. 그러므모 만약 그러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유대인들은 여전히 죄가운데서 죽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럼, 예수께서는 어디에 있다가 오셨는가? 그분은 사실 한 분 하나님으로 자존하신 분으로 있다가 오셨다. 굳이 그 위치를 말하라고 한다면, 아버지의 품 속에 있다고 오셨다고 해야 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아버지의 품 속에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요1:18). 그때 예수께서는 당신이 어디에 있다가 오셨는지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만일]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안에서 밖으로]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나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8:42)",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안으로) [들어]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요16:28)"라고 하셨다. 그렇다. 예수께서 이 땅에 들어오실 때에,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안에서 밖으로 나오셔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스스로 계신 한 분 하나님께서 보내심을 받아 오신 것이다.

 

7. 천상의 세계에서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러므로 천상에서 그분을 "어린양"이라고 하는 것은 그분이 원래는 스스로 계시는 한 분 하나님으로 계셨으나, 인류의 속죄를 위해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사람이 되시어 인류의 속죄제물을 되신 상태를 일컫는 표현인 것이다. 고로 어린양은 한 때 죽기 위해 사람되신 하나님에 대한 표현인 것이지, 그것이 예수님의 전체적인 면을 다 표현하는 말은 아닌 것이다. 고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주 하나님과 어린양"이라는 표현은 두 분 하나님 곧 아버지와 아들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을 지칭하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다만 그분을 "어린양"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분이 지상에 내려가셔서 하셨던 일을 천국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결코 잊어버리지 말라고 알려주시는 상징적인 표현인 것이다. 고로 어린양은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한 때 사람되신 것을 부각시킨 표현하는 말인 것이지, 아버지와 아들 곧 두 분 하나님을 각각 따로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주 하나님이자 어린양"이신 것이다. 천상의 세계에서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이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인류의 속죄를 위해 어린양이 되셨지만, 그분께서 곧 재림하시어 마귀를 진멸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기까지는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지금도 동시에 아들로서도 사역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로서 동시에 존재하실 수 있으신 분이기 때문이요, 아버지와 아들과 영으로서도 동시에 존재가 가능하시고 동시에 일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8. 하나님과 어린양을 예배하는 "그의 종들"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계22:3~5에 나오는 "그의 종들"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들은 하나님과 어린양 곧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들이다(계22:3). 천국에 가면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존재는 천사들과 구원받은 성도들이 있다. 물론 거기에서는 피조물 전체가 하나님을 예배한다(계5장). 그렇지만 인격적인 존재로서 예배하는 존재는 딱 천사들과 성도들 뿐이다. 그렇다면, 한 개의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과 어린양은 누가 예배하고 있는가? 그것은 5절에 답이 들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세세토록 왕노릇할 자"라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한 마디로 "성도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결코 왕노릇하는 존재(왕으로 다스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원히 종으로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 살게 될 구원받은 성도들을 섬기라고 창조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히1:14), 어떤 이들은 천국에는 종으로 들어가서 살 사람도 있고 왕으로 들어가서 살 사람도 있어서 어떤 사람들 위에 왕노릇하며 살 사람도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천국에서 성도들은 다른 성도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다. 다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상속자로서 제사장과 왕들도 참여하는 자들이다. 다만 천국에서 성도들의 신분이 때로는 "종들"로도 불리기도 하는데(계22:9), 이는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수행하는 존재라는 의미인 것이지, 천국에서 다른 누군가를 섬긴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성도들은 그 위치에 따라, 하나님의 아들들(계21:7)이나 하나님의 백성들(계계21:3)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계22:3)이나 하나님의 상속자들(계21:7)로도 불리며, 대로는 어린양의 신부와 아내(계21:9)라고도 불리는 것이다. 

 

9. 나오며

  구약의 성도들 중에 사실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보았던 성도들이 없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홀로 한 분으로 존재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의 하나님 보좌에 홀로 한 분이신 그분이 좌정해계시다는 것을 몇몇의 소수의 성도들만 보았다. 모세도, 이사야도, 에스겔도, 다니엘도, 미가야도 다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좌정하시고 있는 한 개의 보좌만을 본 것이다. 하지만 인류 구속을 위해 한 분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내려오셨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는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소개하셨지만, 신약시대에는 그분을 "예수"라고 소개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이제 아버지와 아들이 되셨다. 그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던 그분은 "아들"이라고 불리셨고, 그분이 부활승천하신 후에는 "어린양"으로 계시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되신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류를 위해 희생을 치르셨는지, 그 은혜를 영원히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종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셨다. 우리는 그분을 천국에서 영원히 찬양하며 경배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그분이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모른 체하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도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한다. 그것이 그분의 은혜를 받은 우리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사도베드로가, 사도바울이 그렇게 살다가 갔다. 그러나 육체를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으로서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녹록하지마는 않다. 그래도 예수님처럼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런 자가 천국에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게 될 것이고 하늘나라의 상속받게 될 것이며, 더 많은 천사들 위에 왕노릇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영원히 말이다. 그날이 우리에게 머지 않은 것 같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020년 08월 23일(주일)

정병진목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