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서는 신약성경 중 공동서신의 책들 가운데 맨 마지막 번째에 해당하는 책이다. 그리고 내용도 비교적 짧다. 25절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짧은 편지를 통하여 상당히 많은 영적인 진리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특히 조직신학적인 입장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너무나 귀중한 진리들을 소개해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왜 이 책이 그럴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이 책이 들려주는 예수님은 대체 누군지를 오늘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2022-02-09(수) 수요기도회

제목: 유다서강해(01) 유다서 어떤 책이며 무엇 때문에 기록했는가?(유1:1~7)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WC8_XIAWeN4 [혹은 https://tv.naver.com/v/25059062 ]

 

1. 들어가며

  유다서는 25절의 아주 짧은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은 우리의 신앙에 관한 상식적인 생각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를 많이 묻는다. 구원론에 있어서,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그리고 성령론에 있어서, 정경론에 있어서 기존의 신학적인 개념을 뛰어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책의 배경이 헬라적인 문화가 아니라 히브리적인 문화이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은 더더욱 증폭된다. 그리고 신약성경 중에서 공동서신을 읽어보았던 독자라면 그는 이 책을 읽을 때에 자신의 눈을 다시 한 번 깜빡일 것이다. 왜냐하면 유다서의 내용이 베드로후서와 너무나 유사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책을 썼을까? 베드로인가 아니면 유다인가? 이 모든 질문을 오늘 하루에 다 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몇 번의 강해시간을 통하여 이 모든 것을 다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책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 들려주는 교훈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중에서 오늘은 유다서 강해의 첫 번째 시간으로서 ,이 책의 개론적인 부분을 살펴보려고 한다. 과연 누가 이 책을 썼으며 그리고 누구에게 쓴 것인지 그리고 왜 유다는 이 책을 써야만 했는지를 중심으로 유다서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맨 나중에 그리스도론에 관하여도 조금 터치하고자 한다.

 

2. 이 책은 누가 썼는가?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2가지로 소개한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유대교적인 배경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인 것이 이 책 곳곳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하고 있는가? 그것은 2가지다. 첫째로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로는 그는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소개하고 있다(유1:1). 먼저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한다. 편지를 쓸 때에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로 표현한 사람은 이 책의 저자만 아니다. 특히 사도바울도 역시 자신을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다(롬1:1). 여기서 '종'이라고 함은 단순히 일꾼이나 심부름꾼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 '종'이라는 개념은 '노예(둘로스)'라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사여탈권이 주인에게 있음을 철저히 아는 자가 주인의 분부만을 기다릴 때에 이 표현을 쓰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죽을 준비가 되어있으며, 오직 주님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겠다는 굳은 의지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의 저자가 아주 겸손한 자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둘째로 이 책의 저자인 유다는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소개한다.

 

3. 야고보의 형제 유다는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유다의 형제로 소개되고 있는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한 세 명 정도 만날 수 있다. 하나는 세배대의 아들로서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라는 예수님의 제자가 있다(마4:21, 10:2) 그는 예수님의 12제자들 중에 최초로 순교한 사도였다(행12:2).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세배대의 아들인 야고보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저자 야고보의 형제는 유다인 것인지 요한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그의 활동이 두드러지지 않았던 예수님의 제자로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도 있다(마10:3, 막3:18, 눅6:15, 행1:13). '작은 야고보'라고도 불렸던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그의 형제가 '요세'였다(막15:40). 그러므로 이 책의 저자 유다는 알패와의 아들인 야고보의 형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상정할 수 있는 인물은 예수님의 친동생인 야고보가 남아 있다. 예수께서는 친동생들로 적어도 4명의 남동생들과 2명이상의 여동생들을 두었다. 남동생들의 이름으로는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있으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여동생들도 있다(마13:55, 막6:3). 마태복음에 따르면 유다는 야고보의 막내동생으로 보이지만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유다는 야고보의 둘째 동생으로 나온다. 그러나 적어도 야고보를 형제로 둔 유다는 예수님의 친동생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초대교회의 모든 전승들은 이 책의 저자인 유다를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로 본다. 그런데 그가 자신을 소개할 때에 "야고보의 형제"라고 말한 것은 당시 이 편지를 쓰고 있던 시기에 '야고보'는 너무나 잘 알려진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자신을 예수님의 친동생이라고 직접적으로 소개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소개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4. 이 책은 누구에게 쓴 것인가?

  이 책의 저자는 어느 지역에 살고 있는 성도인지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바울은 수신자를 대부분 지역에 관련하여 명기를 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고린도에 있는 교회(고전1:2)" 혹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엡1:1)"이라고 수신자를 명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서에는 어떤 특정 지역이 나오지 않도 다만 어떤 성도들에게 편지하고 있음을 밝히는데, 그 대상이 누군지를 3가지로 쓰고 있다(유1:1). 첫째,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요, 둘째,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이미 사랑을 받은 있는 자들이자, 셋째, 그리스도에게 지켜주심을 받은 채 있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란 그 공동체가 곧 교회라는 것을 말해주며,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채 있는 이들이요 그리스도에게로부터 지켜주심을 받고 있으니, 상당히 구원에 가까운 성도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편지와 아주 유사한 편지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25절 가운데 19절이나 일치하는 또 하나의 편지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베드로후서'다. 그런데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베드로후서의 기록목적과 유다서의 기록목적이 아주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나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와 '유다'는 매우 친유대적인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편지의 수신자는 아무래도 바울적인 복음이 아니라 베드로적인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베드로가 편지를 보냈던 수신자들을 살펴보면,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이니만큼 유다서의 수신자들도 친유대적인 사람들에 의해 복음을 전달받은 자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5. 이 책은 왜 쓴 것인가?

  그렇다면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는 왜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일까? 그것은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유1:4). 그렇지만 유다는 먼저 이 편지의 서두에서 원래 자기가 편지를 쓰려고 했던 다른 목적이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기본적인 구원론에 관하여 그들에게 써보내기를 원했다는 것이다(유1:3). 왜냐하면 유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아들의 지키심을 받은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써 보내려고 하였는데, 그들이 받은 "일반으로 얻은 구원" 곧 모든 성도들이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구원에 관하여 쓰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갑자기 심각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것은 가만히(몰래) 들러온 어떤 사람들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보면 이들은 이단세력을 가리킨다. 이들이 누군지를 보다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이들은 영지주의 이단 세력으로서 은밀하게 믿음의 공동체에 침투해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이들은 옛적부터 심판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들이라고 말하였다(유1:4).

 

6. 유다서의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가만히 침투해 들어온 이단세력이란 대체 누구인가?

  당시 교회 공동체에 침투해 들어온 이단세력은 대체 누구인가? 그들이 누구인지에 관하여 유다는 3가지로 언급을 한다(유1:4). 첫째는 이들은 경건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둘째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색욕거리,호색,성적인 방종)으로 바꾸고 있는 자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로, 그들은 유일한(단 하나의 홀로) 대주재(세상의 소유자와 주인, '데스포테스')이자 그리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 세력이 바로 A.D.1세기 후반부에 활동한 "초기 영지주의자"라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자들은 영(靈)은 선하고 육(肉)은 악하다는 이원론에 따라 영과 육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쾌락주의자와 금욕주의자, 이렇게 둘로 갈라지게 되는데, 유다서에 등장하는 영지주의자는 바로 전자인 쾌락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영지주의자들은 영과 육은 서로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보고 육으로는 어떤 죄를 지어도 영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만들어 음란을 죄악시하지 않았기에 교회를 야금야금 도덕적으로 부패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을 지고지신의 하나님 곧 육체를 가지지 않는 최고의 하나님으로 보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예수님의 성육신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었기에 때문에 문제가 아주 심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성도들에 있어서 예수님의 성육과 죽음을 부인하는 것은 인류의 구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기존 성도들에게 영지주의자들의 침투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급히 서둘러 유다가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한 번 얻은 믿음의 도를 허물어 뜨리려는 이단들의 세력과 맞써서 힘써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유1:3). 그렇지 않으면 결국 그들의 영향을 받아 색욕거리를 좇다가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믿음으로 죄용서를 받지 못한채 멸망으로 치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7. 이 책의 내용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유다는 어떤 내용을 이 책에 담은 것인가? 이 책의 내용은 비록 이 편지가 짧은 글이라 할지라도 서신서의 형식을 잘 갖춘 책인 것인 만큼 서론부과 본론부와 결론부를 가지고 있다. 먼저 서론부(유1:1~4)에는 송신자와 수신자 그리고 인삿말이 나오고(유1:1~2) 이어 이 편지를 쓴 목적이 나온다(유1:3~4). 그리고 본론부가 나온다(유1:5~23). 이러한 본론부의 내용은 이단자들의 죄악상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단에 대한 경계와 성도들의 바른 신앙 자세를 언급하고 있다. 즉 바른 믿음의 터 위에 자신을 건축하고 성령으로 기도하며 주 예수의 재림을 소망하는 가운데 하나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론부(유1:24~25)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송영으로 끝을 맺는다

 

8. 이 책의 저자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소개하고 있는가?

  그런데 이 책의 특징은 이단에 대한 경계에 관한 말씀 가운데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정의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몇 번에 걸쳐 외경들의 기록이 등장하는데 저자인 유다는 이러한 외경의 기록을 인용하여 심판의 확실성을 증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외경들에 대한 기록에 관하여는 다음 번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고, 오늘은 유다가 언급하는 예수님이 과연 누구신가 하는 것을 우선 살펴보도록 한다. 유다는 이때 이단세력에 대항하여 성도들이 그들과 제대로 싸우도록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정의인데, 그 정의는 실로 놀랍기만 하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저자인 유다는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자로서, 히브리파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소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유다는 히브리파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을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고 소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다음의 2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첫째, 유다는 예수님을 홀로하나이신 유일한 '대주재'라고 소개한다(유1:4). 그는 예수님을 "홀로 하나이신(유일한) 주재"라고 소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재'라는 용어는 헬라어로 '데스포테스'라는 용어로서, 세상의 소유자요 절대 주권자 곧 세상의 주인이라는 뜻으로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표현은 오직 홀로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칭호로만 사용되었던 용어다. 고로 누가복음 2장에서 선지자 시므온도 자신의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재여(데스포타),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라고 하였던 것이다(눅2:29). 뿐만 아니라 유대인으로 구성된 초기 예루살렘 성도들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대주재여(에스포타), 천지와 바다와 그것들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행4:24)"이라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에게서 사용할 수 있는 이 칭호를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는 예수님에게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두 분일 수는 없다. 그들에게는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있으며, 그분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다. 그런데 예수님을 한 분 하나님이신 여호와에게만 칭할 수 있는 용어로 칭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용어를 유다가 예수님의 칭호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도 사용하고 있고(벧후2:1), 이미 천국에 들어간 순교자들도 예수님을 칭할 때에 사용하는 칭호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계6:10)"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이시지만 그분은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 자신이신 것이다(사9:6).

  둘째, 유다는 예수님을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난 '여호와'라고 소개한다(유1:5). 유다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셨지만 두번째로 믿지 아니했던 자들을 멸망시키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소개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말 성경에서는 헬라어원문에 따라 번역하지 않고 "주님'이라고 번역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은 구약의 여호와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만 거의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다는 분명하게 말한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시고 그들 중에서 당신을 불신하고 당신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자들을 광야에 엎드려뜨리신 분은 예수님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마1:23). 그러므로 삼신론적 삼위일체 신앙을 가진 자들은 이 부분을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천국에 가보라.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에 누가 앉아계시지를 보라. 요한계시록에서는 천상에 계시어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시는 이를 예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다(계21:5~6, 22:12~16).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비로소 하늘에 계신 분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고, 이 땅에 계시는 분은 자신을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존재가 가능하시니 하늘에는 아버지가, 이 땅에서는 아들이 동시에 존재가 가능하게 되신 것이다. 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 볼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이다. 

 

9. 나오며

  유다서는 히브리적인 신앙의 사고를 가진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가 기록한 독특한 신약성경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의 서신들 속에서는 발견하기 쉽지 않은 부분들도 더러 발견할 수가 있다. 그중에서 예수님의 한 분 하나님 되심과 여러 외경들에 대한 자유로운 인용은 상당히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만 굳어져 있는 자들에게,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이라는 칭호는 다소 생소하기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성경의 원저자이신 성령님께서 쓰신 신약 27권의 신약성경을 선물로 받았다. 그중에 우리는 유다서라는 독특한 편지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루터는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이 예수님의 친동생이었던 야고보가 쓴 '야고보서'가 말씀하고 있는 칭의관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고 정의하고 있는 야고보서를 사도의 저작으로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보면 루터가 야고보서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그는 그 시대의 안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거의 다 공개된 상태에 있다. 그래서 지금의 성도들은 종교개혁시대와는 차원이 다른 영적의 실제와 신학의 공간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온전하지 못했던 것들이라도 이제는 온전히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유다서가 삼위일체적인 접근방식이 아니라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의 접근방식에서 예수님이 누군지를 소개해주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랍고 새롭기만 하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거나 축소된 예수님에 대한 실체를 보다 더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다음 번에는 영지주의 이단의 실체가 무엇이며, 더불어 천사의 창조와 타락 그리스도의 재림의 모습을 소개해주고 있는 외경들의 기록을 통하여 성도들이 영적인 선한 싸움을 싸울 때에는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022년 02월 09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28) 구원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16) 예수님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다(2)(마18:18~20)_2020-08-18(화)

https://youtu.be/dEsCY_IGCt4 [혹은 https://tv.naver.com/v/15308722 ]

 

 

1.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은 예수님에게도 있었나요?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도 신성한 본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일한 분이셨으므로, 그분에게는 자존성과 무소부재성, 전지전능성, 영원불변성 등이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다만 육신을 취하고 있는 관계로 육신 자체만으로 볼 때에 예수께서는 무소부재성에 있어서 제한을 받으셨습니다. 

 

2. 예수께서 육체로 계실 때에도 여전히 신성한 본성에 있어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요?

  예수께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셨다는 증거는 그분의 말씀과 행동 속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두 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예수께서도 그들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18:20). 그런데 두 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이유는 사실 기도하기 위해 모든 모였음을 문맥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현장에 항상 예수께서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육체를 지니셨기에 비록 육체적으로는 무소부재하지 않으셨지만, 영으로는 모든 성도들이 기도하고 있는 현장에 계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3. 육체를 가지셨지만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무소부재하시다는 실례가 있나요?

  네.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요한복음1장 43절 이하에 보면, 빌립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하면서 자신의 친구 나다나엘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면서 부정적인  태로를 취합니다. 왜냐하면 빌립이 예수님의 출신을 나사렛이라고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나사렛"은 "네째르"라는 말에서 유래한 단어로써, 뿌리에서 올라오는 감람나무의 새로운 가지를 가리키는 것이기에, 예수께서 다윗의 뿌리요 모든 인류의 근원이 되심을 가르쳐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오직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으나, 사신 곳이 나사렛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도 간곡히 권면하자, 빌립을 따라나서게 된 나다나엘은 주님과 마주쳤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에게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예수께 어떻게 자신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현재의 시간에 계신 예수께서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현장을 보시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때 과거의 그 현장에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비록 육신적으로는 시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었으나, 그의 영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으로서 모든 현장에 현존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4. 거슬리는 풍랑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오셨나요?

  예수께서 육신을 입으셨을 때에는 육체만큼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으셨습니다. 어느날 예수께서는 기도할 일이 있어서 남으셨고 산 위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시고 있는데, 제자들이 먼저 배타고 가다가 거센 풍랑과 마주치므로 위험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 장면을 보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을 건져내기 위해 육체를 지니셨던 예수께서는 빨리 제자들에게 가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육신을 입은 상태라, 갑자기 밤에 배를 빌릴 수는 없으니, 그냥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있는 배로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도 육신을 입으셨을 때에는 육신적으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속성에 제한을 받으셨음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그의 영은 신성한 본성 안에 있었으니 제자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다 보실 수가 있었고 또한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영적인 세력을 제압하시고자, 예수께서는 걸어서 배에까지 가신 것입니다. 이는 언제고 당신의 백성들이 위험한 현장에 있을 때에 주님은 거기에 아니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도와주신다는 점을 우리에게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5. 지금 하늘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를 도우시나요?

  지금 하늘에서 예수님은 무소부재하신 상태로서 세상 끝날 까지 주님의 백성들과 항상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마28:20). 그리고 성도들의 기도를 현장에서 드고 계십니다(마18:20). 그리고 즉시 위험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기도 하십니다(막6:48). 그러므로 지금도 하늘에서는 천상에 계시는 무소부재하신 예수님 앞에, 모든 피조물의 대표인 네 생물들과 구원받은 신구약성도들의 대표인 24장로들이 엎드려 경배를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24장로들의 손에는 2가지가 들려있습니다. 하나는 거문고요 또 하나는 금대접입니다. 거문고는 어린양되신 예수님을 찬양하기 위함이고, 금대접은 예수님에게 성도들의 기도를 바치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천국에서 예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받고 계십니다. 그래서 언제라도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하는 과정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사건에 개입하시면 마귀가 참소하기 때문입니다. 고로 우리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기도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무소부재히신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께서는 즉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응답해주실 것입니다(요14:14).

 

2020년 08월 18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귀신을 내게서 완전히 쫓아버리기 위한 두번째 조건의 요체는 무엇인가?(2)(요20:27~29)_2020-02-14(금)

https://youtu.be/abTHWK_1E3k

 

1. 귀신을 내게서 완전히 쫓아버리기 위한 두번째 조건은 무엇인가요?

  귀신을 내게서 완전히 쫓아버리기 위해서는 2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귀신은 죄를 빌미로 우리 안에 침투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귀신이 우리 안에 머물러 있는 환경을 제거해서 없애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구더기라도 깨끗한 장소에서는 슬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또 하나는 믿음을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마17장에 나오는 간질병 걸린 아들을 둔 아버지에게 배우는 교훈은 귀신은 믿음이 없거나 약한 자들에게서는 더 기세를 부리고 안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믿음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2. 귀신을 쫓아버리게 하는 믿음을 키우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그럼, 귀신을 쫓아버리기 위한 두번째 방법으로서 "믿음"은 어떻게 키워나갈 수가 있는 것인가요? 그것은 롬10;17의 말씀에 따라,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으니,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제대로 들어서 믿음을 키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성경 말씀을 듣고 있느냐에 따라, 귀신도 거기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경험상 놀랍게도 귀신들려 고통받는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발견하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안에 있어도 자기는 귀신을 못 해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귀신이 얼나나 세고 끈질긴지 이루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귀신이 힘이 세고 끈질겨서 안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아서 합법적으로 들어온 귀신이 안 나가는 것 뿐이며, 예수께서 얼마나 크신 존재인지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일4:4에 의하면, 사도요한은 "너희 안에 계신 이(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있는 자(사탄마귀)보다 크심이라"고 분명하고 언급하였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그럼 대체 예수님은 귀신에 비채 얼마나 더 큰 것인가요?

 

3.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던 예수님은 대체 얼마나 크신 존재인가요?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측면에서(요13:16) 그리고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태어나셨다는 측면에서(마1:16) 자신을 첫째로는 "하나님의 아들(요10:36)"이라고 칭하셨습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아버지는 자기보다 더 크심이라(요14:2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으로서 자격 곧 능력이나 권세나 힘이나 지혜가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께서 인간이 되어 오셨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기에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서 그렇게 부르신 것입니다(빌2:6~8). 그리고 예수께서 실제로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는 자신의 전능성을 스스로 제한하셨습니다. 하지만 죽고 부활승천하여 하늘에 오르신 예수는 이제 더이상 한계가 있는 육신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원래 속성대로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상태로 되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어야 하고, 이제는 그분을 하나님으로서 알고 경배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분은 원래 전능한 하나님이요 창조주이셨다가 사람이 되신 분이기 때무입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의 대속물이 되어 죽어서 우리를 해방시며주시려고 스스로 자신을 낮추셨던 것입니다. 이제 그분은 마땅히 하나님으로서 존중받아야 하고 경배를 받아야 합니다.

 

4. 예수의 자기선언을 통해서 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증거는 무엇인가요?

  예수께서 하나님이신 증거들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분이 하신 말씀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고, 그분이 하신 일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특히 그분이 하신 말씀 가운데에도 그것을 살펴볼 수 있는데 그중에서 예수님의 자기선언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분이 스스로가 "나는 누구다"라는 말씀하신 것에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자기선언은 요한복음에서만 무려 7가지 이상 나옵니다. 한편 예수님부터 가장 지근거리에서 지켜보았고 들어보았던 사도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의 놀라운 자기선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2가지입니다. 첫째, 요한복음에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나는 ~라고 하는 나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요8:24,28,53의 헬라어원문직역). 그것도 세번씩이나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둘째, 요한계시록에서는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계1:17, 2:8, 22:13). 그런데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구약시대에 오직 홀로 한 분이셨던 하나님(여호와)께서 당신을 소개하실 때에도 예수님과 똑같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첫째, 여호와께서도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3:14)"라고 말씀하셨고, 둘째, 이사야선지자를 통하여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사41:4, 44:6, 48:12)"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특히 이사야서에서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엘로힘)이 없느니라(사44:6)", "[어찌]나 외에 다른 신이 있겠느냐... 다른 신이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사44:8b)",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이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이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구약의 여호와께서는 당신 자신만이 한 분 하나님이시요 구원자이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신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나 여호와가 이와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만든) 여호와라. 홀로(혼자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땅을 펼쳤고(사44:24)"라고 말씀하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홀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통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는 천지만물은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과 협의하여 만드셨다는 것은 잘못된 정보입니다. 그러므로 창1:26의 말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a)"라는 말씀에 나오는 1인칭복수 "우리"라는 단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과 그 옆에서 시위하고 있던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이것은 전 총신대 구약학 김정우 교수님께서 "삼위일체에 관한 구약적 증거"라는 논문에서 밝히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에 계셨던 예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셨고, 부활하신 후에는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리는 이때 두 가지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희대의 사깃꾼으로 보고 배척하든지, 또 하나는 예수님이 한 분 하나님 자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후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바로 이 예수님 곧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을 베드로의 신앙고백처럼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마16:16)" 정도로만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는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예수님은 하나님보다는 한참 모자라는 분으로 생각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귀신이 자기 속에 들어와서 역사해도, 그것을 보고만 있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예수님을 귀신보다 못한 존재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성도의 삶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5.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는 숨겨둔 죄와 덜 회개한 죄 그리고 조상들이 지은 죄까지 회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정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계신 분(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분이 지상에서 육신을 입고 계셨을 때에는 그리스도이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습니다. 하지만 부활승천하사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신(계3:21, 7:17, 20:11, 21:5~6, 22:13) 예수님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가 아닙니다. 그분은 이제 무소부재하신 상태에 있습니다. 언제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육체를 가지셨을 때에 조금이나마 내려놓으셨던 전지전능의 모든 제한을 다 푸시고 완전한 하나님의 속성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도마의 신앙고백을 우리도 해야 합니다. "당신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20:28)" 그렇습니다. 이 고백에서 앞의 수식어만 빼버리면, "당신은 주 하나님이십니다"가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전능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전능하신 주 예수님으로 이름으로 담대히 귀신을 꾸짖기를 바랍니다. "감히 어디와서 둥지를 틀고 있어, 이것아!!!"하고 꾸짖기를 바랍니다. 맨 마지막에 필요한 것은 우리의 담대함입니다. 담대히 꾸짖으십시오. 우리가 꾸짖을수록 그들은 힘이 약해집니다. 그들에게 고통이 가해집니다. 그러다가 참다참다 못참으면 "이제 간다~"하면서 떠나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2020년 02월 14일(금)

정병진목사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이며,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던 예수께서 과연 누구신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설명하라고 하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단답형으로는 말하지만, 그것은 신비에 속한 영역이라고 말해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무책임한 말이다. 자신도 알지도 못하고 또한 알 수도 없는 분을 어떻게 믿으라고 말할 수 있으며 가르쳐줄 수 있겠는가? 그러다보니 이단이 횡횡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버지 하나님이 있고, 아들 하나님이 있다고 하니, 어머니 하나님이 있다고 가르치는 이단이 생기고, 하나님의 어머니(마리아)가 있다고 주장하는 얼설프기 짝이 없는 것이 정통교리로 둔갑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나와있는대로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로 알고 바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가장 확실하게 알려주는 성경책이 한 권 있다. 그것은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요한계시록을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승천하신 예수께서 천국에서 어떤 존재이신지 그곳에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를 정확히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교회사적으로 예수님이 누군지 어떻게 정의되어 왔으며, 요한계시록이 들려주는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1. 들어가며

  예수님은 누구신가? 대체적으로 성도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구약에 예언된 바로 그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으며 또 그렇게 고백한다. 사도베드로가 그렇게 고백했고(마16:16), 사도요한도 그렇게 고백했다(요20:31). 이러한 신앙고백을 통하여 믿는 자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세우며, 죄사함을 받고 생명을 소유할 수가 있다. 하지만 천국에서는 구원받은 성도들과 천사들은 예수님을 그 정도로만 고백하지 않는다. 훨씬 더 엄청난 고백을 하고 있다. 물론 천국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라고도 고백되어진다. 하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서, 그분은 주 하나님이요 전능하신 자로 소개되고 있다(계1:8, 4:8, 11:17, 15:3, 16:7,14, 21:22). 그렇다면, 천국에서 예수님은 성부와는 어떤 관계인가? 그리고 또한 성령과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성부와 성자  혹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는 천국에서 과연 어떤 것일까? 그리고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뵙게 될 때, 우리는 과연 세 분 하나님을 만나게 될까 아니면 한 분 하나님만을 만나뵙게 될까?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천국에서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시며, 성부와 성령은 천국에서 어떤 식으로 존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더불어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세 분의 하나님이신지, 아니면 삼위일체론적인 하나님이신지 혹은 한 분 하나님이신지에 대해서도 심도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지난주부터 실시되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종합적인 강해를 통해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을 과연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살펴고보고 한다. 이것을 위하여 먼저는 역사적으로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고백되어져왔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천국에서 하나님을 보게 되었을 때에 "어, 하나님께서 이런 분이었어?"라는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있도록, 성경에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오늘은 첫번째 시간으로서 역사적으로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고백되어졌는지, 성경 특히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하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교리로 정하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는가?

  예수께서 누구신지에 대해서 사도들이 살아있던 초대교회 당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모르면 그냥 사도들에게 가서 물어보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도들이 죽고 그 다음 세대 또 그 다음 세대가 바톤을 이어받으면서 예수님은 과연 어떤 존재이신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예수님이 하나님이신가의 문제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성부와는 어떤 관계인가에 대한 물음이 집중되어 나타났다. 그러다가 드디어 A.D.325년경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방교회의 하나였던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장로였던 아리우스(A.D.280~325)가 예수님은 이름 뿐인 하나님으로서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여호와)에 의해 창조된 최초의 피조물이며, 그러니 그분은 안 계실 때가 있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은 홀로 한 분이라는 믿음이 너무 충만했던 모양이다. 그러므로 성부가 성자를 낳았다고 했으니(골1:15), 성자는 존재의 시작이 있었으며, 그분은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특히 성자는 아버지로부터 태어났다는 측면에서 그는 피조물이며, 피조물인 이상 타락할 가능성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유사한 본질을 가진 분이지 결코 하나님과 동일본질을 가진 분이 아니라고 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아리우스 장로는 오직 하나님만이 홀로 유일하게 비출생적이고, 홀로 영원하시며, 홀로 시작이 없고, 홀로 주님이시며, 홀로 만물의 심판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여기서 하나님은 하나님 아버지만을 의미한다). 그러니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 이외에 다른 모든 존재는 다 창조된 것이고, 아들도 낳아지셨기 때문에, 아버지와는 같지 않은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은 무로부터 창조된 것이라고 했고, 이름만 하나님인 것이지 하나님과 똑같지는 않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자 그 교회의 감독이었던 알렉산더(재위, A.D.312~328)는 아들(성자)는 결코 피조물이 아니며 아버지와 유사한 분도 아니며 아버지와 동일본질(호모우시오스)을 가지신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성자는 성부의 본질로부터 영원히 발생한 동일본질의 하나님이며, 성부와는 영원히 동등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단지 성자는 위격으로서 아버지와 구별될 뿐이지 아버지와 동등하다는 것이다. 또한 아들은 결코 무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며, 아버지로부터 직접적으로 나오신 분이니, 예수님은 영원한 불변하고 완전한 분이라고 했다(여기까지는 거의 맞는 주장을 한 것이다).

  결국 이 두 사람의 주장을 요약해본다면, 알렉산더는 예수님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하기를 원했다고 했다면, 아리우스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아리우스는 알렉산더가 유일신을 부정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알렉산더는 예수님의 하나님되심을 부인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자 당시 로마황제였던 콘스탄틴 대제(A.D.288~337)는 318명의 동방교회의 감독들을 중심으로 회의를 소집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니케아종교회의"라는 것이다. 이 회의는 A.D.325년 6월 19일부터 4주동안 개최되었는데, 아리안주의가 과연 적법한 것인가를 논의하게 된 회의다. 결론적으로 이때 아리우스는 정죄받아 파문되었으며, 그때 정리되어 나온 신앙고백이 바로 "니케아신조"라는 것이다. 다음은 그때 결의했던 니케아신조다.

 

[니케아신조(A.D.325년)]

우리는 한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 보이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을 믿는다.

또한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 아버지로부터, 아버지의 본질로부터(ek tes ousias tou  patros) 나신 홀로 나신 분(독생자),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하나님, 빛으로부터 비롯된 빛, 참 하나님으로 부터 비롯된 참 하나님이시며, 지어지지 않고(poiethenta) 나셨으며(gennethenta)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며 (homoousion to patri),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이 지어졌다.

그분은 우리 인간을 위해, 우리 구원을 위해, 내려오셔서 성육하여 인간이 되셨으며, 고난 받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여 하늘로 오르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또한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하지만 '그분이 없었던 적이 있었다', '그분은 나시기 전에는 없었다', '그분은 무로부터 생겼다'라고 말하는 자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은 상이한 실체 혹은 본질로 이루어졌거나, 피조물이고  변할 수 있고 변화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을 보편적이고 사도적 교회는 파문하노라.

 

  결국 A.D.325년 니케아신조는 성부 하나님 이외에 성자 예수님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교리적으로 선포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어져서 A.D.381년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에서는 성령님도 하나님이라고 교리적으로 확정하였다. 그리하여 4세기경에 하나님은 세 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 분은 이 세상의 신들처럼 서로 치고박고 싸우는 신들로 고백되어진 것은 아니었으니, 조화롭게 서로 하나를 유지하는 독특한 신이라는 교리를 확정하게 된 것이다. 결국 니케아종교회는 예수님의 하나님되심을 확정한 것이고, 콘스탄티노플종교회의는 성령님의 하나님되심을 선포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부터 좀 이상한 교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만세전부터 영원후까지 세 분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세 분 하나님은 통일성을 일치않고 서로 존중하시는 하나님으로 선포된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을 일컬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아래는 콘스탄티노플신조로서, 니케아신조에서 추가된 부분만 밑줄쳐보면 다음과 같다(오늘날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조와 거의 비슷하다).

 

[콘스탄티노플신조(A.D.381년)]

우리는 한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보이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을 믿는다.

또한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홀로 나신 분, 모든 시간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신 분, 빛으로부터 비롯된 빛, 참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참 하나님이시며, 지어지지 않고 나셨으며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어졌다

그분은 우리 인간을 위해, 우리 구원을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성령과 처녀 마리아로부터 성육하여 인간이 되셨으며, 우리를 위해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달리시고, 고난 받으시고 묻히시고 성경대로 3일만에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가, 다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영광으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다

또한 우리는 성령, 주님이시며 살리시는 분, 아버지로부터 나오신 (ekporeyomenon),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를 받고 영광을 받으시는 분,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공변되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으며, 죄를 용서하는 하나의 세례를 고백하며, 죽은 자의 부활과 올 세계의 삶(영생)을 고대한다. 아멘

 

3.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장로 아리우스는 무엇을 잘못 말했는가?

  그렇다면 과연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는 성경적인 것인가? 오늘날에 신구약의 66권의 성경책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볼 때, 아리우스는 대단히 잘못된 주장을 한 장로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해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삼신론은 아니지만 삼신론적인 신조이기 때문이며(이 신조들에는 셋이 하나라는 말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또한 이 신조에는 성경이 아닌 내용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은 둘 다 잘못된 주장들인데, 아리우스가 보다 더 잘못된 주장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아리우스의 주장에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아리우스는 예수님을 피조물이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로부터 창조된 피조물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그가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질을 100% 갖춘 분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아리우스의 주장이 거의가 다 틀렸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려준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피조물이라고 말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될 때 창조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은 하늘에 있다가 마리아의 태를 빌려 탄생했을 뿐이다. 또한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모든 본질(본성)을 갖추신 것이 아니라고 해서도 아니 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요1:14, 딤전3:16). 다만 인성을 취하실 때에 하나님의 본성을 스스로 제한하셨던 것 뿐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분으로서,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본성을 다 갖추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이셨다(요1:18). 그렇다. 예수께서는 이미 하나님의 본질(본성)로서 전지전능, 무소부재, 자존, 영원불변 등의 속성을 모두 갖추고 계신 분이셨다. 다만 인간이 되심으로 육신 안에 들어오실 때에 잠깐동안만 이러한 신적인 속성들을 스스로 제한하셨지만, 그분이 죽고 부활하신 후에는 하늘에서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모든 속성을 갖추고 존재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골1:15에 나오는 말씀 곧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프로토토코스)시니"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우선 이 본문은 잘못 번역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한글성경이나 영어성경처럼 이 본문에서 "~보다"라고 비교급을 사용해서 번역하게 되면, 예수님은 그만 피조물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헬라어원문은 그렇지 않다. 직역해보면, "그분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창조물)의 첫것(초태생, 장자, 맏아들, 처음 난 자)이시니"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분은 모든 창조물의 첫것(헬, 프로토토코스)이라는 뜻이다. 그분에 의해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고 나왔기 때문에 그분은 첫것인 것이다. 즉 모든 만물이 그분으로부터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고 그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분은 만물의 첫것(원형)이라고 사도바울이 표현한 것이다. 다만, 그분이 동정녀마리에게서 태어나심으로 이 세상에 출현하게 되었으니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에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피조된 사람)"이라고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리아의 태중에서 빚어질 때에 비로소 존재하셨던 분이 아니라 이미 태초부터 스스로 계셨던 하나님 곧 한 분 하나님의 마음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가 비로소 마리아의 태를 통해서 밖으로 드러나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은 피조물이라고 말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시에 그분이 안 계실 때가 있었다고 표현해도 아니 되는 것이다. 그분은 아직은 나타나지 않았을 뿐 아버지의 품속에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있었기 때문이다(요1:18). 그런데 아리우스가 왜 그러한 주장을 했을지에 대해서는 조금 이해는 간다. 왜냐하면 A.D.325년 때만해도 아직 신약성경이 27권이라고 정해진 시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모든 교회가 오늘날처럼 신약 39권의 성경책을 다 가지고 있고 다 잘 알고 있는 시기도 아니었다. 그러니 당시 자기가 가지고 있었거나 배웠던 지식만으로 예수님이 누군지를 판단할 수 밖에 없었으니, 아리우스와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았겠는가 싶다.

 

4. 그렇다고 삼위일체교리를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가 옳은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우리 인간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은 세 분으로 보여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라고 고백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다신론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 한 분 이외에 모든 것은 결코 신이 아니며 우상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삼하7:22, 대상17:20, 시86:10).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43:10~11).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케아-콘스탄티노플종교회의에서는 하나님을 세 분으로 정의하고 말았다. 물론 훗날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세 분은 세 분이지만 하나 안에서 상호내재하는 세 분이시라고 정의하였다(한 본질에 세 위격들). 그래도 세 분이라고 정의한 것이 바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잘못 표현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들은 무엇을 보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던 것인가?

  이러한 두가지 신조들은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는 여호와로,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으로, 오순절이후에는 성령님으로 활동하셨기에 하나님이 세 분이라고 표현하고 있기는 하다. 그래서 이러한 신조들은 하나님을 확실히 세 분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신조들은 하나님을 셋으로 나눠버릴 가능성이 매우 높은 위험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의 내용 중에서 가장 비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예수께서 만세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존재하고 있었다고 정의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죽고 부활승천하신 이후에 예수님은 실재로 계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다고 교리화시켜 버렸다는 점이다(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표현은 승천후의 그리스도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를 표현해주는 것인데, 콘스탄티노플신조는 실재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시고, 그분의 보좌 옆에 예수님이 계시는 것으로 표현해버렸다). 아니다. 조금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만세전에는 예수께서 아버지와 나와서 독립적으로 따로 존재하고 계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오직 홀로 한 분으로 존재하셨던 것이다(말2:10,슥14:9). 그분이 홀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다(사44:24)"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사44:24)". 그렇지만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 속에는 이미 그리스도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윗도 1,000년 뒤에 일어날 사건을 이미 환상으로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더러 여호와께서 나의 오른편에 앉아있으라고 했다는 환상을 본 것이다(시110:1).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체화시킨 사건이 바로 예수께서 동정녀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된 사건이다. 아니다. 천국에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또 하나의 보좌가 더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거기에 예수께서 앉아계시는 것이 아니다. 이미 승천하신 예수께서 오직 한 개 뿐인 하나님의 그 보좌에 앉아계시기 때문이다(계3:21, 21:5~6, 22:13)

 

5. 성경에 나와있는 하나님과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렇다면, 성경에 나와있는 대로 예수님은 누구시며,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보자. 시간관계상 몇 가지로 정의함으로 그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하나님은 이 우주의 시작에서부터 끝나는 그날까지 오직 한 분 뿐이시다. 온 천지만물도 세 분이 상의해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며,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사44:24, 사37:16). 그러므로 창1장에 나오는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에서 "우리"는 세 분 혹은 삼위일체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던 천사들과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을 지칭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그 다음구절 창1:27에 곧바로 나온다.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창11장 바벨탑에 나오는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자(창11:7)"는 말씀하신 것도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과 천사들의 말이었던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오직 여호와 한 분 하나님과 그 주변에 천사들이 함께 있었다. 그래서 늘 어전회의가 열렸다. 욥기가 1~2장을 읽어보라.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창18~19장에 나오는 여호와의 두 명의 천사들이 내려온 사건이다. 소돔과 고모라성의 상태를 알아보고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에 따라 롯을 구출해주려고, 여호와께서 두 명의 천사들을 데리시고 아브라함에 찾아오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시대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 각기 독립적으로 있었다는 삼위일체론자들의 주장을 배격한다.

  그리고 구약시대에 이미 환상 중에 천국에 올라갔다 온 모든 이들의 간증을 보라. 그들은 오로지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을 뵙고 왔으며,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한 개의 보좌 위에 앉아계신 것을 보고 왔다고 표현했다(왕상18:15,19, 왕상22:19, 사6:1~5, 겔1:26, 단7:9~10, 슥3:1~5). 그리고 신약에 들어와서도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계속해서 나온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라고 말씀하셨고(막11:29, 요17:3), 사도들도 공히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라고 고백하고 또 고백했다(롬3:30, 고전8:4,6, 갈3:20, 엡4:6, 딤전2:5, 약2:19).

  둘째, 예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시기 전까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 속에 이미 그리스도가 존재하고 있었다. 죄지은 인간을 위해 사람이 되시어 죽으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 속에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행3:20). 그분을 사도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이라고 표현했다(요1:1). 그래서 요한은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원문: 하나님을 향하여, 혹은 하나님에게서) 계셨다고 말했다. 이미 성육신하실 분이 하나님에게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동정녀마리아의 몸을 빌려 세상에 출현하기 전까지 그분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셨다(구약시대에 그리스도가 미리 이 세상에 오셔서 사역하신 일이 단 한 가지도 없다). 하지만 이미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 속에 그분은 존재하고 있었으니, 그분을 일컬어 "그리스도(메시야)"라고 칭했다.

  셋째, 만세전부터 예정된 그분이 육신을 입고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시기 전부터 존재하신 분인 것이지 마리아의 뱃속에서 비로소 창조된 분이 결코 아니시다(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전부다 엄마 뱃속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다). 그리고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나오시어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다(요16:28,30). 그래서 그분을 일컫기를, 그분이 아버지로부터(혹은 성령으로부터) 그리고 마리아에게서부터 태어나셨다는 측면과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측면에서 "아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셨다. 그리고 그분은 드디어 구약의 350가지의 약속대로 3년반동안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하늘로 돌아가셨다.

  넷째, 죽고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보좌에 앉아계시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한 개밖에 없는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신다. 그분이 보와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이기시고 승리자로서 하늘에서 통치하신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는지 분명히 알려준다. 그분은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시는 한 분 하나님이요,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분은 구약시대에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소개하신 여호와와 같이(사41:4,44:6,48:12)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며,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다"고 말씀하신 분이다(계22:13). 그런데 그분이 하나님의 우편 내지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보좌에 앉아계신다(계21:5~6, 22:13).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좌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단수)"라고 불리워지는 것이다(계22:1,3). 그리고 예수님은 재림하실 분으로 묘사되어 있는데(계1:7),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올 자"라고 하셨으니, 예수님이야말로 "주 하나님이자 전능하신 이"인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는 아무리 찾아봐도 세 분 하나님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오직 한 분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분이 바로 보좌에 앉아계신다. 보좌에 앉아계실 때에 우리가 그분의 얼굴은 바라볼 수 없으나, 그분이 보좌에 내려오시게 되면 그분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런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이다. 이러한 대표적인 사례는 스데반집사가 죽어갈 때의 장면일 것이이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의사 누가는 스데반이 그때 하나님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보았다고 했다(행7:55). 그러자 스데반은 자신의 영혼을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께 부탁하게 된다(행7:59~60).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다섯째, 성령님은 영이신 하나님의 표현이자, 이 땅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예수께서 죽고 부활승천하신 이후에는 예수님 대신에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 자신이요, 예수님의 또다른 표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는 성령님을 하나님의 영으로 표현하고 있고, 신약시대에는 보혜사 성령님을 예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 예수의 영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요한계시록에서 보면 성령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 수 있는데, 그분은 이 세상과 관련된 일을 하고 계시는 분으로 나온다. 첫째로 성령님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들로서(계1:4, 4:5, 5:6), 이 온 땅(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의 일곱 눈들(계5:6)이자 여호와의 눈들(슥4:10)로서 이 세상을 감찰하고 계신다(계2:23). 둘째로 예수께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게 말씀하셨지만, 그것에 대해 예수께서는 성령님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오늘날까지 교회들 가운데에 말씀하고 있는 분은 역시 성령님이시다. 그런데 실은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이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이 땅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의 영이기 때문이다.

 

6. 나오며

  하나님이 누군지를 모르면 하나님이 누군지를 잘못 설명하게 된다. 하나님을 세 분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예수님은 피조물이라고도 말하기도 한다(여호와증인은 지금도 예수님을 피조물로 본다). 그리고 하나님을 설명하기 어려우니, 하나님이 누군지를 말할 때면, 늘 신비에 속한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특히 예수님이 누군지를 잘 알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누군지를 정확히 모르면 대부분 하나님을 세 분이라고 가르치게 된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가 그러한 시초가 되고 말았다. 범세계적인 기독교종교회의가 그랬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시대가 훨씬 지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에 관한 더 많은 분량의 정보들을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도 헬라어로서 직접 신구약 66권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을 정확히 말씀하지 않고,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느니 저런 신학자는 저렇게 말했다느니 하면서 그것이 정통이요 그것이 바른 가르침이라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아니다. 적어도 성경을 제대로 파악하고 읽었다면, 어떤 위대한 신학자가 주장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어디에서는 어떻게 틀리게 말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잘한 것은 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초기교회의 신앙고백이니, 그 신앙고백이 오늘날의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잣대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얼마나 성경을 모르면 남의 이야기만 듣고 그것을 전하려고 하는가? 구원론적으로 볼 때에 중세의 신학자들도 잘못 주장했지만, 루터나 칼빈도 잘못 주장한 것들이 많다는 것을 왜 말하지 못하는가?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도 모든 것들을 성경대로 바로 잡고 성경에 나와있는 대로 말하고 가르쳐야 한다. 성경에 나와있는대로 믿고 성경에 나와있는 대로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더욱 그렇다. 그것이 구원의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요한계시록은 계시와 완성의 책이자 결론의 책이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시며, 아버지와는 어떤 관계인지를 정확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이다. 그리고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이시다. 또한 그분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끝이신 분이시다. 천국에서 예수님은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이제 다음 주에는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에 나와있는 성경적인 증거들 곧 사람으로서 오셨다가 가신 예수님의 신분과 지금 하늘에서 계셔셔 역사하고 계시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또한 재림하실 때까지 어떤 역할을 행할 것인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그럼.

 

2018년 5월 30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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