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22(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05)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에 대한 사도 요한의 위대한 선언(요1:1~18)_2022-06-22(수) https://youtu.be/eeJmrAZF9BA [혹은 https://tv.naver.com/v/27593552 ]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이 책의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을 믿어서 영생을 얻도록 특별히 기록한 네 번째 복음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 자신인 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특별히 이 책은 유대인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는 유대계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헬라인들로부터 미혹을 받고 있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쓴 책이다. 그러기에 누군가 이 책을 조심스럽게 읽는다면 그는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며,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이 땅에 성육신하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됨으로서, 그 삶을 유대인들의 핍박과 헬라적 영지주의의 이단의 미혹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것이다. 오늘은 우리가 다룰 본문은 지난 번에 이어 요한복음의 서론 부분이다. 특히 요한복음 1:1~18의 말씀을 시간 되는대로 하나씩 하나씩 다루려고 한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아예 처음부터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실상에 대해서 선언하고 있는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2. 요한복음의 서론은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요한복음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첫 부분은 서론(1:1~18)이고 마지막 부분은 결론부(21:1~25)이다. 그리고 중간에 본론부(1:19~20:31)가 있다. 본론부는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부분(1:19~12:50)은 7가지 표적을 중심으로 기록된 예수님의 3년간의 공생애를 다루고 있고, 뒷부분(13:1~20:31)은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밤에 있었던 일들(세족식, 고별 연설, 대제사장적 기도)과 그분의 붙잡힘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읽어 보면 아시겠지만 서론 부분(1:1~18)은 매우 신학적인 주제들로 가득 차 있다. 그만큼 이 편지를 읽을 독자들에게 상당한 어려움이 발생하였던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귀납법적인 구조가 아니라 연역적인 구조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말씀이 아주 잘 정리되어 쓰여 있기 때문이다. 고로 요한복음 서론에서는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당하고 있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신성을 공유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며, 헬라인들에게 영지주의의 미혹을 당하고 있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육체를 가지신 분이신 것을 알 수 있게 도와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의 서론 부분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발견할 수 있으며 그분을 영접하는 자가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문제는 과연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어야 하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이 누구시며, 어떻게 영생을 얻는지에 대한 대답이 이 요한복음 서론에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서론 부분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군지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리고 이 서론에 기록된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3. 요한복음의 서론에서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요한복음의 서론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가? 그것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그분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라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즉 예수님의 신성과 더불어 예수님의 인성을 신학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첫째로, 예수님의 신성은 여기서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 그것은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 나온다. 이 첫 번째 신학적 선포의 핵심은 예수께서는 모든 만물이 있기 전에 말씀으로 선재하고 있었으며, 그 말씀은 하나님으로 있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세례 요한보다 먼저 계신 분이자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은 이 세상에 들어와서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참 빛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생명이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을 것이며, 은혜와 진리의 풍성함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 이러한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말씀은 어떤 의도로 기록된 것일까? 그것은 오직 여호와만 유일한 하나님이고, 예수님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헬라파 유대인이었다가 예수님을 믿었다는 이유로 유대인들로부터 출교당하는 등의 강경 조치를 당해 흔들리고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핍박을 이겨내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둘째로, 예수님의 인성은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 그것은 9절부터 18절에 나온다. 여기에서 두 번째 신학적 선포의 핵심은 예수께서 육체를 입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들처럼 흙이 육신이 되신 것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어떤 의도로 이러한 두 번째 신학적인 정의를 내린 것일까? 그것은 헬라 철학에서 기원한 영지주의자들이 예수께서는 절대로 육체를 입으신 적이 없다고 하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함이다. 헬라주의적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신성은 인정하나 인성을 부인하고 있었다. 즉 예수님은 절대로 사람이신 적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께서 육체를 입지 않으셨기에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그분이 죽으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대신 달려 죽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어떤 이들은 예수라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라는 신성한 분이 들어갔다가 십자가를 지기 전에 떠났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면 어떤 결론이 나오게 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그분의 피흘림의 속죄 사역이 아무 쓸모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굳이 사람이 되셔야 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의 결론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값을 대신하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게 된다면 그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속죄의 죽음을 무효화시키는 격이 된다. 그러면 아담의 후손으로서 죄 가운데 태어나는 어느 누구도 죄사함을 받을 수 없을 것이며, 예수께서 하늘에 준비하고 있는 새 집 곧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는 틀림없이 사람으로 오신 것이 맞고 사람으로 사셨다는 것을 요한복음 서론에서 언급한 것이다. 

 

4.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어떻게 말씀(로고스)으로 선포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장막을 치신 것으로 정의한다(요1:1,14).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이 세상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선재하고 계셨던 하나님이신 것을 증언한다. 그것은 첫째로, 태초에 말씀이 있어 왔는데, 그 말씀은 하나님에게서 있어 온 것이며, 그 말씀은 하나님으로 있어 온 것이라고 언급한다(요1:1~2). 즉 예수께서 육신을 입기 전에 곧 모든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그분은 말씀으로서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하나님과 함께 말씀으로 있어 왔다고 증거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둘째로 모든 만물이 그 말씀을 통하여 있게 되었다고 증언한다(요1:3). 그러므로 모든 만물은 그 어느 것 하나라도 그 말씀이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했다. 다시 말해 모든 만물의 창조자가 곧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14절에 가서 그 말씀이 육신을 입었고 그분이 이 세상에 장막을 치셨는데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정의한다(요1:14,17). 그러므로 예수님은 결코 피조물이 아니며 만물의 창조자로서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을 증언한다. 한편, 이러한 영적 비밀을 알고 있었던 사도 바울도 그의 말년에 기록한 골로새서를 통하여,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자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만물의 으뜸이자 원형)이시다는 것과 모든 만물 곧 하늘들과 땅에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천사들)이 다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고, 그분을 통하여 창조되었으며,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증거하였다(골1:1~15~16).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세상 어떤 철학에서도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인격체가 되었다는 표현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헬라 철학에서는 만물의 기원을 '말씀(로고스)'에서 찾고 있지만 이러한 로고스가 육신을 입고 인격체가 되었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헬라 철학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이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말씀이 육신을 입어 예수님이 되셨다는 것은 오직 여호와만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야말로 나타난 하나님이신 것을 증언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5. 나오며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한 분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육신을 입으시기 전에 그분은 말씀으로 계셔 왔다. 모든 만물은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그리고 그 창조물의 최고의 아담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담에게 영원히 사는 생명이요 죽음도 이기는 생명을 주려고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를 가져다가 심어 놓으셨다. 하지만 거짓과 어둠의 아버지인 마귀의 말을 듣고 아담은 타락하였다. 그때부터 이 세상은 마귀가 세상 임금이 되어 죄를 지은 인간들에게 사망 권세를 휘두르며 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거짓과 어둠에 휩싸여 사망에 빠져서 허우적대며, 하나님의 실제를 보지 못하고 있는 인류를 딱하게 여기시고는 직접 사람이 되는 절차를 밟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에게서 나와 말씀으로 계셨던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들어오신다. 그리고 인류의 죄값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다. 그래서 어둠과 사망에 둘러싸인 인류에게 빛이 어둠을 이길 수 있으며, 생명이 사망을 이긴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주님께서 치르신 속죄를 믿고 주님을 영접하는 자에게 영생을 허락하신다.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는 날에는 그 영혼을 천국에 마련된 새로운 처소로 들이신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실제로 누리게 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생명이자 빛이며, 은혜를 주시는 분이자 진리와 실제를 보여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2022년 06월 22일(수)

정병진목사

 

 
 

2022-05-08(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10)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계2:26~27)_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이시다(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BDPGQ8Ikblc [혹은 https://tv.naver.com/v/26808386 ]

 

1. 들어가며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그분은 저 하늘에 계신 분을 가리켜 당신의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이 땅에 보냄을 받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때 보내신 분은 아버지가 되는 것이고, 보내심을 받은 분은 아들이 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아들은 두 분인가 한 분인가? 두 분이라고 하면 다신론이 되는 것이고, 한 분이라고 하면 양태론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도 말하기도 곤란하고 저렇게 말하기도 곤란하다. 그래서 이것을 만들어낸 교리가 바로 먼저는 '이위일체'하나님이었고 나중에는 성령까지 포함시켜 '삼위일체'라는 교리가 되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은 아버지와 아들이 정녕 다르다고만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봐야 하는지를 통하여,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것을 살펴보려고 한다. 

 

2. '아버지'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어떤 칭호를 가리키는가?

  사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자신을 아버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물론 비유적으로 모든 만물의 창조주라는 의미로 사용한 적이 있으시다). 즉 출생에 따라 아들을 두신 아버지로 자신을 표현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아들로 이 땅에 오심에 따라 하늘에 계신 분은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분으로서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은 보내심을 받은 분이라는 의미로 '아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아들에게도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에, 예수님은 아버지의 생명을 받은 아들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 안에 아버지의 생명을 가지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천사는 아버지의 생명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무리 지혜가 출중하고 능력이 뛰어난 존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다. 우리는 주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로 이 땅에 사는 어떤 사람도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아 '아들'이라는 칭호로 불리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도 역시 '아버지'라고 하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고로 아들이 없는 아버지가 없으며, 아버지가 없는 아들은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3. 예수께서는 언제까지 하나님에게 아버지라는 칭호를 사용하시는가?

  예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았을 때에 하나님의 품 속에 있다가 이 땅으로 들어오셨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아들로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품 속에 계셨던 것이다(요1:18). 그때 아들은 육신을 입으셨다. 고로 신성 뿐만 아니라 인성을 직접 취하신 분은 오직 주 예수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들어오셨는데 그 이유는 한 가지다. 그것은 죄인들을 위해 구속사역을 완성하려고 오신 것이다. 즉 죄인들의 죄값을 대신하여 죽기 위하여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우리 인간을 구원할 목적이 아니었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실 필요가 없었언 것이다. 그래서 인류구속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시고는 "다 이루었다"(요19:30=그것이 완성된 채 있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인류구속사역을 위하여 당신이 해야 할 일을 다 완성하셨다는 것을 뜻한다. 그후 예수께서는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지상에서 약 40일동안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보여주셨따. 그리고 승천하셨다. 그런데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 아들로서 그분이 해야 할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께서 [상징적이지만]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해야 할 사역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첫째로, 기도의 중보자로서의 기능이 있고, 둘째로, 대제사장으로서 회개할 때에 죄를 속죄해주시는 기능이 있으며, 셋째로, 그분이 마지막 날에는 재림하시어 악의 무리를 처단하시고 주님을 믿고 따랐던 자들에게 상주시는 심판주로서의 기능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때까지는 적어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실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재림하시어 심판주로서 그 일을 마치신 다음에는 더이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4. 아들로 오신 예수님은 아버지는 아니신가?

  그렇다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던 예수님은 아들인가 아니면 아버지인가?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다는 측면에서 보면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나왔으니 '아들'이라는 칭호가 어울린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영원히 '아들'이신가 하고 물어본다면 우리는 어떤 대답을 들려주어야 하는가?

 

 

5. 구약성경에 나타난 아들의 하나님되심과 아버지되심은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가?

 

 

 

6. 예수님께서 마지막 고별설교를 통해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어떠한가?

 

 

 

7. 아버지의 아들과 성령의 이름은 무엇인가?

 

 

 

8. 예수께서는 누구의 이름으로 오신 것인가?

 

 

 

9.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정의는 어떤 것인가?

 

 

 

10. 나오며

 

 

[글 전체보기] https://dongtanms.kr/94990

 

2022년 05월 08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03)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02)(계1:4~8)_2022-04-28(목)

https://youtu.be/0AtNjqrKXSs  [혹은 https://tv.naver.com/v/26519059 ]

 

1. 요한계시록에 1장 4절에서는 주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요한계시록 1장 4절에는 주 하나님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소개되고 있는 분이 8절에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전능한 자'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렇다. 주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이시며, 그분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전능한 자이신 것이다. 

 

2.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을 소개할 때에 지상에 계실 때에 비로소 제자들에게 계시된 예수님의 칭호 이상으로 소개되어 있다. 사실 지상에 계실 때에 그분에 대한 최고의 칭호는 그분이 그리스도이시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마16:16).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이상으로 소개된다. 다시 말해, 그분은 지상에 계실 때에 불려졌던 바로 그 칭호 외에도 한층 고양된 칭호가 소개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분이 '주 하나님'이라는 표현인데, 주 하나님이신 그분은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분은 "전능자이시며,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줄곧 '주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쓰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그분이 '주 예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다(계22:20,21). 주 하나님이 곧 주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보좌에 앉으신 이 곧 주 하나님이라고 소개되어 있다(계21:5~6, 19:4). 그런데 요한계시록 맨 마지막에 가면, 주 예수께서는 자기 스스로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마침이다"고 말씀하고 있다(계22:13). 고로 우리는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참고로, 요한복음에서도 주 예수님에 대한 칭호가 한층 더 고양된 형태로 소개되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12제자들 중의 하나였던 사도 도마의 신앙 고백에 나타나 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본 후에 그분에게 '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다(요20:28).

 

3.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는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를 성부 하나님에 대한 소개라고만 알고 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그렇게 해석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목회자들도 다 그것을 그대로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가 성부 하나님에 대한 칭호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바로 그 책에서만 표현되어 있는 독특한 하나님의 칭호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칭호이다. 그런데 이 칭호는 구약 시대 때에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서 그분에게서 들었던 하나님에 대한 칭호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때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계시하셨다(출3:14). 그런데 이 표현은 히브리어로 '아흐예 아쉐르 아흐예'로서, '나는 내가 ~라고 하는 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을 헬라어의 70인역에서는 '나는 지금 있는 이이다.'라고 번역해 놓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조금은 암시가 되었다고 할 수는 있으나, 요한계시록에서 비로소 표현된 독특한 하나님의 칭호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4.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는 대체 누구신가?

  그렇다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는 대체 누구신가? 많은 주석학자들이 해설하고 있듯이 이 칭호는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인가? 아니면 다른 칭호이기도 하는가? 얼핏 보기에는 이 표현이 성부 하나님에 대한 표현처럼 보인다. 아니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만 보아서는 아니된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하나님 칭호는 성부 하나님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칭호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표현이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칭호는 요한계시록에서 딱 3번 나올 뿐이다. 요한계시록 1:4,8과 그리고 4:8이 그것이다. 1:4과 1:8에서는 동일한 표현으로 나오고, 4:8에서는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고 하여서 첫째와 둘째가 순서가 뒤바뀌어서 나오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문구의 순서에 있어서만 차이가 있을 뿐 다 동일한 표현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1장과 16장에서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칭호가 축소되어서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는 이'라고 나온다(계11:17, 16:5). 즉 '장차 오실 이'라는 부분이 삭제되어 나타나 있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된 것인가? 사도 요한이 모른 채 빠뜨리고 기록한 것인가? 아니다. 성경은 함부로 실수한 것을 기록해 놓은 책이 아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표현들에는 의미가 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럼 왜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재림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그때는 언제인가? 그것은 일곱 번째 나팔 소리가 날 때다(계11:15). 이 마지막 나팔 소리와 함께 주님께서 공중으로 강림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일을 위해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표현된 예수께서는 이제 두루마리를 사도 요한에게 넘겨주시고 재림하신 것이다. 즉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으로부터 큰 두루마리를 취했던 예수께서는 일곱 인들 중에서 여섯째 인까지 떼시고 또한 일곱째 인을 떼신 후에 여섯째 나팔까지 주관하셨다. 그리고 이제 그분이 재림하셔야 하니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예언의 말씀인 두루마리(그래서 작은 두루마리가 됨)를 사도 요한에게 넘겨주신 것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10장에 막간 계시로서 나온다. 그렇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은 성부 하나님에 대한 칭호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 모두를 지칭하는 칭호였던 것이다. 정리한다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칭호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칭호인 것이다. 

 

5.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성경 전체의 기록을 통하여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단지 성자 하나님만 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성자 하나님이시다'는 말과 그분이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다'라는 말은 어떻게 차이가 나는가? 만약 우리가 그분을 성자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면, 그분은 더 이상 성부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며 성령 하나님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내용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신앙 고백으로 알려지고 있는 벨직 신앙고백에 고스란히 나온다. 그러나 이것을 두고 100%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겠지만(왜냐하면 아들은 아버지와 서로 구별되시기 때문이다), 100% 맞다고도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라기보다는 그분은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 곧 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창세기와 이사야와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의 놀라운 자기 선언이 나온다. 그분은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무려 3번씩이나 "나는 ~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8:24,28,58). 이는 예수께서 출애굽기 3:14에 나오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표현을 직접 자신에게 적용하신 사례이다. 그러자 난리가 났다. 유대인들이 그만 예수님을 귀신이 들렸다고 몰아붙이면서 네가 아브라함보다도 크냐고 질문을 던진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고 대답하신다(요8:56). 그러자 유대인들은 "네 나이가 아직 50도 아니 되었는데 어떻게 아브라함을 보았느냐"고 말한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8).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예수님은 "나는 ~이다"라고 하는 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심을 의미한다. 즉 예수께서는 이제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주 하나님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실로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진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탄생하실 때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협의를 하여 성자가 아들로 내려오셨다고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교리에만 나올 뿐 실제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표현이다. 성경에서는 단지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당시 여호와 하나님으로 계시되었던 한 분 하나님께서 훗날 인간에게 다시 오실 때에는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다. 그렇다.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예수께서 만세 전부터 아들로 따로 있다가 아버지와 협의를 한 후 스스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될 때에 비로소 아버지에게서 나와서 이 땅에 들어오신 것이다. 그분은 결코 아버지로부터 독립되어 따로 나타나 있다가 아들로 오신 것이 아닌 것이다(요16:27~28).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 곧 주 하나님의 체현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품속에 있다가 드디어 나타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아기이자 아들로 오실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자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말씀한다(사9:6). 고로 만약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28:19)"고 하셨던 예수님의 명령을 제자들이 모두 "예수의 이름으로(행2:38, 8:16, 10:48, 19:5)" 바꾸어서 세례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이름은 한 분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도 되고, 아들의 이름도 되고 성령의 이름도 되는 것이지만 그분이 우리에게는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기에 우리가 예수라는 이름을 아들의 이름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세례를 줄 때 어느 누구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일이 없고, 모두가 다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문구로 세례를 주었다고 나온다. 이는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2022년 04월 28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02)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01)(계1:4~8)_2022-04-27(수)

https://youtu.be/g9j2_mo-Vps  [혹은 https://tv.naver.com/v/26518369 ]

 

1.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 하나님'으로 고백한 자는 누구인가?

  예수님의 12제자의 하나였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보고는 그분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된다(요20:28). 그런데 이것을 두고 어떤 사람은 예수께서 원래는 하나의 인간이었는데 제자들이 그분을 주 하나님으로 고백함으로서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 되셨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 되실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그분을 그렇게 고백함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참으로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고 계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어떤 분이라고 고백할 때에 비로소 그렇게 되는 분인가? 절대 아니다. 그분은 우리가 어떤 칭호로 부르던지 그분은 처음부터 그랬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12제자의 하나였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본 후 비로소 그분을 '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렇지만 도마가 이런 고백을 하기 전에도 이미 예수님은 주 하나님이셨던 것이다(요20:28). 그러나 예수님을 신앙 고백의 대상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계속해서 주님을 고백의 산물로만 보려고 시도한다. 그분을 직접 만나 보면 아마도 자신의 입술을 손으로 피나게 때리고 싶어질 텐데 말이다. 

 

2.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인가?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칭호에 불과한 것인가? 다시 말해, 실제로는 그렇지 아니한데 그렇게 불러 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인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부동산 중개소에 들어가기만 하면 누구나 남자이면 '사장님'이라고 칭하며, 여자이면 '사모님'이라고 칭한다. 그렇다면 부동산 중개업자가 그 사람을 '사장님'이라고 불렀으니 그냥 사장님이 되는 것이고, '사모님'이라고 불렀으니 그냥 사모님이 되는 것인가? 아니다. 고로 예수님을 가리켜 도마가 '주 하나님'이라고 불렀다고 해서, 그때부터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 되시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누가 그렇게 칭하기 전에 이미 '주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라고 불리려면, 어떤 자격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예수께서 존재론적으로 주 하나님이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분은 사역적으로도 주 하나님이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이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이시다는 말은 그분이 자존하시며 무소부재(=동시존재)하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분이 사역적으로 하나님이셔야 한다는 말은 그분은 전지전능하시고 영원불변하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존재론적으로 그리고 사역적으로도 하나님이신 것은 요한계시록에서 게속 발견된다. 

 

3. 초기 교회 시대에 영지주의는 왜 이단이 되었는가?

  초기 교회 시대에 영지주의는 철학이 기독교내에 침투하여 만들어 낸 이단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에서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예수님의 죽음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고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부정하고 있는 영지주의는 완전 이단인 셈이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사람이 되셨는가? 무엇 때문에 삽자가에서 죽으셨는가? 그리고 어떤 이유로 인해 다시 부활할 수 있었는가? 사실 이 모두는 복음의 핵심 사항이다. 그렇다. 이것은 전부 우리 죄많은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다. 우리 죄인들을 살려 내고 천국에 데려가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직접 행하신 일이 바로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 사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복음 안에 이 3가지 요소가 빠져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다. 그러므로 영지주의는 기독교가 아닌 것이다. 기독교를 가장한 가짜 기독교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이 자기들의 경전처럼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도마복음'이다. 도마복음은 일종의 예수님의 어록이 수록된 책이다. 배경이나 나레이션 없이 그냥 예수님의 말씀이나 예수께서 제자들과 대화하시는 말씀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책에서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은 단 한 구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자들은 자기들이 깨달은 지식 곧 영지를 통하여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람이 지은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서 다시 가는 데에 그리스도의 피흘림이 전혀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그냥 깨달아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지주의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영지주의에서는 예수님을 주 하나님으로 본다는 것이다.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육신을 입은 모습으로 보인 것은 그렇게 보인 것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는 사람의 몸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영지주의 분파에서는 그리스도가 예수라는 육체를 잠시 동안 빌리셨다가 죽기 전에 탈출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고로 영지주의는 신성이 육체 안에 거하신 놀라운 신비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대단히 큰 이단 세력인 것이다. 

 

4. 예수님은 하나님인가 사람인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인가 사람인가? 예수님은 한 마디로 100%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100% 인간이시다. 예수께서는 한 분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과거에나 현재나 미래에나 역시 하나님으로 계신다. 그런데 그분도 한 때는 사람으로 사신 적이 있으셨다. 예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에 유대 땅에서 육체를 입고 갈릴리와 예루살렘에서 걸어다니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공생애를 사셨던 예수님은 '지상을 거니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예수께서 100% 하나님이시며, 100% 인간이셔야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그래야만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선각자들이나 성인들은 단지 사람일 뿐 하나님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이들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할 수는 없다. 이들 누구도 인간의 죄와 죽음과 사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셨던 분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그분이 사람이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속죄 때문이었다. 죄의 값인 사망의 값을 지불하시기 위해 창조주가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으로 인하여 세상 임금인 사탄 마귀를 때려잡을 수가 있었다. 만약 그분이 사람이 아니셨다고 한다면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영원히 열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분은 사람으로 오셔서 죄값을 지불하시고 사망 안으로 걸어 들어가셨으며, 동시에 이때 죄없는 예수님을 사망 권세로 죽임으로 불법을 저지른 사탄 마귀의 사망 권세를 빼앗으실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때 이후 계속해서 예수께서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갖고 계신다. 그래서 그분을 믿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5. 요한계시록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칭호로 보나 혹은 존재론적으로나 보나 그리고 사역적으로 볼 때 가장 잘 표현된 말씀은 무엇인가?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표현해 주고 있는 문구들이 많이 나온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고르라면 우리는 요한계시록 1장 8절 말씀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한 구절에는 한 분 하나님이시자 예수님이신 그분이 누구신지를 아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칭호로서도 하나님이시고 또한 존재론적으로 보나 사역적으로도 보나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언해주고 있다. 

계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잘 대변해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동시에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시라는 것까지 알려 주는 매우 귀중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첫째, 요한계시록의 끝부분으로 가면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직접 말씀하신 분이 나오는데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계22:13). 둘째, '장차 올 자'라는 표현은 분명히 예수님의 재림을 염두에 두고 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1:8에서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예수님이 누군지를 어떻게 표현해 주고 있는가? 그것은 첫째, 예수님이 '주 하나님'이신 것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호칭으로도 '주 하나님'이신 것을 잘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요20:28). 둘째, 예수님이야말로 '알파와 오메가이신' 것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분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 이'인 것을 잘 표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께서 존재론적으로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증명된다. 왜냐하면 존재론적으로 볼 때에 그분은 주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는 자존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여기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표현 속에 다 들어가 있다. 그리고 그분이 존재론적으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은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라는 표현 속에 완전히 녹아 들어가 있다. 또한 그분이 사역적으로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그분은 전지전능하셔야 하고 영원불변하셔야 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그분의 전능성인데, 요한계시록 1:8에서는 그분이 '전능하신 이'로 소개되어 있다. 앞으로 계속 더 살펴보겠지만 예수께서는 호칭면에서나, 존재론적으로 그리고 사역적으로 하나님이신 것이 분명하다. 

 

2022년 04월 27일(수)

정병진목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