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10(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0) 예수님의 12가지 신앙고백에 대한 영적인 의미(03)(요1:35~5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hNIUSyIdnaM  [혹은 https://tv.naver.com/v/28492123 ]

 

1. 들어가며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주제는 성경에서도 매우 중요한 주제이며 또한 우리들이 가진 신앙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주제다. 예수님이 누군지를 아는 일은 곧 우리의 영생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기도하실 때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사실 구약시대에도 호세아 선지자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이라고 촉구했는데,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장가들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호2:19~20).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분량만큼 우리의 영생의 분량도 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두 시간을 통하여, 요한복음 1장에 있는 세례 요한의 신앙고백에 나타나있는 예수님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오늘은 다섯 명의 첫 제자들에 의한 예수님의 신앙고백을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는 일곱 가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공부하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분량을 한층 더 깊어지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2. 요한복음 1장에 있는 세례 요한과 첫 제자 5명이 고백했던 신앙고백 12가지는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지난 두 시간을 통해,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신앙을 고백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총 5가지였다. 세례 요한은 첫째로,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고백했다(요1:29). 그리고 둘째로, 그는 그분을 '먼저 계신 이'이라고 했다(요1:30,15). 셋째와 넷째로 그분을 '성령이 머물러 계신 이(요1:33a)'이자 '성령으로 세례주는 이(요1:33b)'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다섯째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요1:34)'이라고 했다. 그렇다. 이러한 세례 요한의 신앙고백을 분석해 보면 먼저 예수님의 본질적 특성을 말한 것이다. 그것은 그분이 '먼저 계신 이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이어서는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적 특성으로서 그분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으며, '성령이 머물러 계신 이'이자 '성령으로 세례주는 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첫 다섯 명의 제자들의 고백을 통해 일곱 가지 신앙고백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그분이 '랍비'이자(요1:38,49), '메시야(그리스도)이며'(요1:40), '모세가 율법에 기록한 이'이자(요1:45a),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한 이'이며(요1:45b),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이자'(요1:45c), '이스라엘의 왕'이며(요1:49), 그리고 제자들이 고백한 것은 아니었지만 제자들과의 대화 속에서 예수님께서 자기자신이 누구라고 언급했던 명칭으로서 '인자'(요1:51)가 있다. 

 

3. 예수께서는 어떻게 '랍비'라 칭함을 받았을까?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의해 다섯 가지로 증언된 바 있다. 그리고 세례 요한에 의해 소개를 받은 자로서, 예수님을 따라갔던 세례 요한의 두 명의 제자도 예수님을 증언했다. 이때 그들 중의 한 사람은 '안드레'였고 또 한 사람은 사도 '요한'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갔을 때 주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찾는지를 물어보셨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랍비여'라고 칭한다(요1:38).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어서 처음 만난 예수님을 향하여 '랍비'라고 칭했던 것일까? 이러한 칭호는 요한복음에서 8차례나 등장하고 있는데, 첫번째는 안드레와 요한이 그리고 두번째는 나다나엘이 그렇게 칭한 것이고(요1:49), 이어서 산헤드린 공회원인 니고데모가 그렇게 칭했다(요3:2). 그리고 나머지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칭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 혹은 "다윗의 자손"이나 "만물의 주재"라고 호칭하지 않고 '랍비'라고 칭했던 것일까? 먼저 그 뜻부터 알아보면, '랍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나의 선생님(스승,교사)'이라는 뜻이다. 이는 그분을 존경한다는 의미이자 존중한다는 의미로 부르는 칭호다. 그러다가 '랍비'라는 용어는 율법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굳어져갔다. 왜냐하면 이러한 칭호는 적어도 율법 말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랍비'라는 용어는 정식으로 율법교육을 받은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이 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당시 안드레나 요한 그리고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향하여 '랍비'라고 칭했다는 것은 이들 자신들도 율법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았음을 알려주며, 그들이 예수님을 적어도 율법말씀을 증언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율법교사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백성들로부터 이러한 칭호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에게는 서로에게 랍비라고 칭함을 받지 말 것을 권하셨다(마23:8). 왜냐하면 제자들은 다같은 형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읔 13장에 보면, 예수께서 '주'와 '선생'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가리켜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고 말씀하셨다(요13:13). 그분은 '주님'이자 '선생님'으로서 그들에게 섬김의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에게 참된 영적인 스승은 예수님이시요, 또한 예수께서 보내신 보혜사 성령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4. 예수님에 대한 일곱 번째 신앙고백으로서 '메시야' 혹은 '그리스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의 첫 제자들에 의해 고백되어진 메시야 혹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은 어떤 고백을 가리키는가? 이것은 안드레가 고백한 용어이다(요1:41).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께서 계신 곳을 찾아가 그분을 만나 본 후 안드레는 자기의 형인 베드로를 찾아가서 말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라고 말이다. 이때 '메시야'라는 용어는 히브리어로 '마쉬아흐'에 대한 한글음차로서,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메시야'라는 말은 '그리스도'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용어는 예수님에 대한 어떤 신앙고백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구원자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바로 그분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용어는 처음에는 왕으로서 공적 사역을 시작하는 이에게 붙여진 용어로 쓰였기에, 예수님이야말로 이 땅에 이스라엘의 왕이자 유대인의 왕이며 더 나아가서는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로서 공적사역을 수행하신 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마쉬아흐'라는 용어는 대체 누가 제일 처음 사용했던 것일까? 그것은 구약시대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제2대 왕이었던 다윗이 자신의 선왕이었던 사울에 대해 사용했던 단어였다(삼상24:6).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마쉬아흐)'를 죽일 수 없다고 자기의 사람들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서 사울을 지정하여 그에게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삼상9:16).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았다. 그후로 이스라엘에게서 왕이 될 자들은 늘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되었다. 다윗도 그랬고 솔로몬도 그랬다. 다윗은 어렸을 때(약 15세쯤)에 베들레헴에서 사무엘선지자로부터 1차로 기름부음을 받았고(삼상16:13), 2차로는 헤브론에서 유다 사람들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아서 유다지파의 왕이 되었다(삼하2:3~4). 그리고 또다시 헤브론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로부터 세번째로 기름부음을 받고 그는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두번째 왕으로 등극한다(삼하5:3). 한편 시편 기자도 역시 다윗을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기록하였다(시2:2). 이것은 다윗이 장차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왕으로 사역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이 땅에 유대인의 왕이자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으며, 훗날에는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로서 철장권세를 가지고 재림하실 분이기 때문이다(시2:9, 계2:27, 19:15~16). 고로 처음에는 감람유로 왕들이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이것은 예표이자 모형이고, 실제로는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아야 그가 메시야가 될 수 있는 것이다(사61:1,슥4:1~6). 사실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셨지만, 그분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셨다(마3:16).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훗날 예수님의 사역을 가리켜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에게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그의 공적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다. 곧 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받으실 때에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내려오신 성령을 받아서 기름부음을 받고 그의 공적 생애를 시작하신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메시야'라는 칭호가 붙여지게 된다. 그리하여 오늘날 '그리스도'라는 말은 오직 예수님을 지칭하는 공적인 칭호가 된 것이다. 

  그러나 기름부음을 받아 공적으로 사역하였던 구약의 직분은 왕이라는 직책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제사장인 아론도 기름부음을 받아 대제사장으로서 사역을 시작하였고(출29:7), 한 번의 예만 나오는 것이지만, 엘리사도 선지자 엘리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선지자로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왕상19:16). 고로 오늘날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라는 말이 통용되기에 이른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면 그분은 역시 왕이자 선지자요 제사장으로 사역하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첫째로, 그분은 왕으로 칭함을 받았으니, 나다나엘에 의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칭해졌고(요1:49), 예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하던 날에는 군중들로부터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 왕이시여(요12:13)'이라고 칭함을 받았다. 그리고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영적 세계의] 왕인 것을 말씀하셨으며(요18:37), 그분의 죄패에도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붙여졌다(요19:19). 또한 둘째로, 예수님은 선지자로도 칭함을 받았으니, 요한복음 4장에 가면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고백했으며(요4:19), 누가복음 24장에 가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역시 예수님을 가리켜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였다고 고백하였다(눅24:19). 그리고 셋째로,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도 사역하셨으니, 그분은 영원히 살아서 역사하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으로 오셨으며(시110:4, 히5:5~16), 마지막 만찬 후 예수께서는 다락방에서 대제상적인 기도를 드리셨다(요17장).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대제사장적인 기도를 드리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대제사장으로서 골고다 언덕에서 대속죄일 제사를 드리시고 기도의 분향단에 향을 사르는 일을 하셨기 때문이다. 

 

5. 예수님에 대한 여덟번째 신앙고백으로 '율법에 기록된 이'란 어떤 뜻인가?

  안드레와 베드로의 한 동네 사람이었던 빌립이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되었을 때 그는 자기의 친구였던 갈릴리 가나사람 나다나엘(바돌로매)를 찾아가 그에게 예수님을 소개해주었다. 그때 그가 나다나엘에게 알려준 것은 예수님이야말로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했던 그이'로서 그분을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소개하였다. 이것이 그의 신앙고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그만큼 나다나엘이 율법과 선지자들의 말씀에 심취해 있었으니, 그렇게 소개하면 그가 금방 알아들을  것 것 같아서 그렇게 소개한 것이다. 또한 그가 나다나엘을 찾아갔을 때에도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율법을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그분을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소개한다. 그러자 나다다엘은 빌립이 제대로 자기에게 이야기해준 것인가 하고 의구심을 갖는다. 왜냐하면 메시야는 베들레헴 출신이어야 하는데 그분을 나사렛 출신이라고 이야기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나다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요1:46). 그러나 실은 율법을 제대로 공부를 못해서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이지, 율법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익라면 그것은 대단히 충격적인 신앙고백이 아닐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일 먼저 '율법에 기록된 이'라는 신앙고백의 의미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사실 예수님은 그냥 메시야가 되신 것이 아니다. 자신이 그렇다고 선언하여서 그렇게 되신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를 그대로 이루셔셔 그렇게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메시야는 이미 구약성경의 율법에 예표로서 등장하고 기록되어 있으며,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을 그대로 이루는 자라야 메시야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어떻게 율법에서 증언되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율법'이라 함은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모세가 쓴 모세 오경의 책들에 나오는 메시야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창세기와 출애굽기, 레위기와 민수기 그리고 신명기에서 메시야는 어떤 예표로 그려져 있을까? 그것은 적어도 10가지 이상 된다. 첫째로, 메시야는 '여자의 씨'로 오셔야 한다고 했다(창3:15). 여자의 씨가 뱀의 씨를의 머리를 박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태를 빌려 오신 것이다. 둘째로, 메시야는 '아브라함의 씨'로 와서, 대적의 성문들을 차지하고 천하만민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창22:17~18). 그래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셔서 원수의 성물들을 차지하고 천하만민으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고 있다. 셋째로, 메시야는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다고 했다(창18:10,14). 요한복음 8:24,28,53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던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넷째로, 그분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다고 했다(출12:5~6). 그래서 그분은 죄없는 곧 흠없는 유월절양이 되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모든 사망권세를 이기게 하셨다(고전5:7). 다섯째로, 그분은 광야의 만나로 오신다고 했다(출16:13~13,31).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무리들에게 당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6:48~50). 여섯째로, 그분은 성막의 대제사장으로 오신다고 했다(출애굽기). 그리하여 예수께서 직접 이 땅에 당신의 육신으로 성막을 치시고 우리 안에 거주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셨던 것이다. 일곱째로, 그분은 인류의 구속을 위한 속죄제물로 오실 것이라고 했다(레위기). 그래서 그분은 대속제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다. 여덟째로 그분은 대속죄일제사의 아사셀 양으로 오신다고 했다(레16장).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안수받아 십자가를 지고 성문밖인 골고다 언덕으로 가셔서 버림을 받으신다. 아홉째로, 예수님은 민수기의 21장에 나오는 놋뱀이 되시어 그를 쳐다본즉 살게 하시신다(민21:9, 요3:14~15). 이는 그분을 놋뱀 곧 인류의 죄를 전가받아 죄있는 육신의 모양만 갖추었을 뿐 그분 자체는 독이 없는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돌아가신다. 마지막 열째로, 그분은 신명기에서 모세가 약속한 바 대로 '나와 같은 선지자'로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인류에게 전달하시고, 회개를 외치셨으며, 종말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주셨다. 

 

6. 예수님은 어떻게 '선지자들이 기록된 그이'이신가?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소개하는데 그것은 율법에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이'라고 소개했다.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했던 그분은 대체 누구신가? 구약시대 중에서 사무엘(B.C.1102~1018)으로부터 시작된 선지자의 활동은 말라기 선지자(B.C.516년경 활동)를 끝으로 구약시대를 마감한다. 이때는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만 무려 16명인데, 그중에 메시야에 관하여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예언을 하였다. 그것을 종합해보면 크게는 그분의 본질적인 부분과 그분의 사역으로 구분해볼 수 있는데, 그중에서 그분의 사역은 또 다시 예수님의 잉태와 출생, 공생애 그리고 그분의 고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까지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 그분의 본질(신격)에 관하여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으니, 그것은 한 분이신 하나님이 "처음이요 마지막'이며(사41:4,44:8,48:12),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사9:6, 계1:8).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하나님 보좌에 앉아계신 예수께서 당신자신을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소개함으로써(계1:17,22:13), 구약의 여호와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로 오셨다는 것을 확인해 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분의 사역에 관하여 낱낱이 살펴볼 수 있는데, 먼저 그분의 잉태와 출생부터 살펴보자.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께서 처녀에게서 잉태되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임을 예언하였다(사7:14). 그리고 이사야는 장차 태어날 메시야는 한 아기이자 아들로서 태어나실 것이지만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자 기묘자인 모사(보혜사)라고 예언하였다(사9:6). 그리고 미가 선지자는 예수께서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태어나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미5:2).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사실 것이 예언하였으며(사11:1), 그분의 공생애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사40:3~5, 눅3:4~6))인 선구자부터 천거를 받게 될 것이고, 선구자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와서(말4:5~6,눅1:17) 그분을 주님의 사자(말3:1)로서 소개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분은 하늘로부터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실 것이라고 했다(사61:1~3, 눅4:18~19). 그리고 그분은 긍휼이 많으셔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했다(사32:3, 마12:20). 그리고 그분은 공적 사역을 주로 갈릴리에서 진행하실 것이며(사9:1~2, 마4:14~16),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고, 포로된 자에게는 자유를, 갇힌 자에게는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 곧 희년의 자유의 해방을 선포하실 것이라고 했는데 그대로 되었다(사61:1~3). 그리고 에스겔 선지자는 그분은 지상에서 인자라고 불릴 것이며, 선한 목자로서 일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겔34:15). 또한 그분은 인류를 대신하여 고난받으실 것도 예언되어 있었다. 곧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며,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가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사53:5, 벧전2:24). 그리고 그분이 죽고 무덤에 묻히실 때에는 부자의 묘실에 묻힐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는데(사53:9), 진짜로 그분은 부자였던 아리마대 요셉이 준비해둔 부자의 묘실에 묻히게 된다(요19:38~42). 그리고 요나 선지자는 예수께서 죽으신 후에 무덤 속에 삼일삼야를 있다가 부활할 것이라고 했는데(욘1:17, 마12:40), 예수께서는 죽은지 3일 만에 부활하신다. 그리고 요나의 표적처럼 40일 동안 지상에 계시다가 승천하신다(욘3:4). 그리고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처럼 그가 승천하셨던 장소인 감람산으로 다시 오시게 될 것이다(슥14:4~5). 정말 놀랍지 아니한가?

 

7. 예수님은 어떻게 되어서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셨는가?

  한편 우라는 예수님의 혈통에 대하여 그리고 그분이 사셨던 곳에 대하여 빌립으로부터 좋은 소식을 듣게 된다. 그것은 그의 친구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기를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나다나엘로 하여금 과연 예수님이 메시이신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왜냐하면 나다나엘이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갈릴리 나사렛에서는 무슨 좋은 일이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요1:46). 하지만 그것은 그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히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사심으로 인하여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라고 예언자가 말했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마2:23). 먼저, 그분의 혈통과 관련하여 그분은 '요셉의 아들'이라고 불리셨다. 누가복음의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눅3:23). 그랬다. 누가는 정확히 기록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아는 바에 의하면 요셉의 아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분에게 족보상의 부친은 요셉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요셉은 그의 아내 마리아의 아버지 헬리가 두 딸들(마리라와 살로메)만 두었기 때문에 같은 유다지파사람으로서 두 집안을 하나로 이어받은 자였다. 요셉은 마리아의 아버지(헬리)의 조상을 이어받았고, 자기 친가의 조상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마리아와 결혼했다. 그런데 마리아는 다윗의 아들 나단으로부터 갈라져내려온 다윗의 후손이었고(눅3:23~31), 요셉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으로부터 갈려져 내려온 다윗의 후손이었기 때문에(마1:1~16), 예수님은 마리아의 태에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지만, 족보상으로는 솔로몬의 대를 잇는 왕의 후손이자, 나단의 대를 잇는 선지자의 후손이 되실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이었다. 이는 사실 그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대단히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나사렛 사람이라고 하는 어떤 예언자의 예언을 성취하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마2:23). 그럼, 예수님은 구약시대의 어떤 예언을 따라 나사렛 사람이라고 칭하게 되셨을까? 우선 구약성경에서 2가지 예언들을 살펴볼 수 있는데, 그것은 첫째, 그분이 나실인으로 구별되어 바쳐진 자라는 뜻일 수 있다(삿13:5).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나실인처럼 구별되어 바쳐진 자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둘째, 이것은 더욱 더 개연성이 있는 주장인데, 그것은 그분이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룬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이사야 11:1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히브리어에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가지가 나오고 그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다. 그런데 이새의 줄기에서 한 가지가 나올 것인데 그분이 예수님이고, 그리고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와 열매를 맺게 될 것인데 그분도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새의 자손이자 이새의 뿌리가 되신다. 이것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요 다윗의 뿌리가 된다는 요한계시록의 예언과도 일치한다(계22:16). 그런데 히브리어가 알려주는 귀중한 정보가 있다. 그것은 줄기에서 나오는 가지를 '호테르'라고 부르고, 뿌리에서 올라오는 싹을 '네째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호테르'와 '네째르'는 목자가 가지고 있는 '막대기'와 '지팡이'를 가리키는 것인데, 막대기는 양을 헤치려는 동물들을 후려치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며, 지팡이는 양떼를 푸른 초장과 맑은 물가로 인도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을 둘 다로 예언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뿌리에서 올라오는 '싹'은 히브리어로 '네째르'라고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정보인데, 왜냐하면 여기에서 '나사렛'이라는 용어가 나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 인류를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가로 인도할 선한 목자로서 예수님이 네째르라고 불리는 동네에서 나올 것이 예언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네째르는 뿌리에서 올라오는 싹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새와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지만, 실제 그분은 이새와 다윗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분은 인류의 후손으로 오신 분이지만 동시에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8. '이스라엘의 왕'은 누구를 지칭하는가?

  빌립의 소개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던 나다나엘은 빌립의 강권적인 인도로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말씀하신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의 속에 간사(간계,교활함)이 없도다(요1:47)" 그러자 깜짝 놀란 나다나엘이 묻는다. "당신은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를 향하여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노라(요1:48)"고 대답하신다. 그러자 그는 말하기를 "랍비여(율법 선생님이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왕)이로소이다(요1:49)"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다나엘은 단지 자신의 과거를 맞추었다고 예수님을 과대포장하여 언급한 것인가? 아닌 것이다. 그는 즉각적으로 그분을 알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가 이 땅에 오기 전에 그의 영이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비밀스럽고 영적인 것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나다나엘이 헬라어로 '오이다(직감으로 알다)'를 한 것이다. 그냥 알아지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배워서 그리고 경험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영의 감각으로 그냥 알아버렸던 것이다. 성숙한 인간의 영이 자신을 창조하고 보내신 분을 몰라보겠는가? 그러자 곧 나다나엘은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로 오신 분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분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특히그가 언급한 '이스라엘 왕'이라는 말은 구약시대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로서 다윗과 같은 왕과 같은 분이라는 뜻이다. 그렇다. 에수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으며, 나사렛에서 자라나신 분으로 다윗와 같은 왕적 능력을 소유한 메시야이셨던 것이다. 

 

9.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뜻인가?

  마지막으로 이것은 제자들의 고백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관하여 꼭 알아야 할 사항이므로 함께 살펴보려고 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나'라고 칭하는 호칭 대신에 가장 잘 사용하는 호칭으로서, '인자'라는 칭호에 대해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를 무화과 마누 아래에서 보았다고 말했던 것 때문에 네가 나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이스라엘의 왕'으로 믿느냐? 이것들보다 더 큰 일들을 네가 장차 보게 될 것이다(요1:50)" 그리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항하여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하늘이 열려진 채 있는 것과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올라가고 있는 것과 내려오고 있는 것을 장차 볼 것이다(요1:51)" 그렇다. 나다나엘이나 과거의 야곱처럼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들은 영적인 실체를 진짜로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늘과 땅 사이의 중보자라는 것도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라고 칭했다. 왜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나'라고 말씀하지 않고, 굳이 '인자'라고 표현한 것일까? 그것은 그분이 원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이지만 그분이 이 땅에 왜 육신을 입고 왔는지 곧 왜 사람으로 존재해야 하는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싶으셔서 하신 칭호인 것 같다. 그것은 예수님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진 자  곧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자로 오셨음을 잊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수행하시고자 하는 뜻에서 그렇게 표현하신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라고 표현하신 것을 통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그분은 '인자'라는 표현을 통하여 그분이 사람이기에 핍박받고 고난받고(마17:12) 죽으실 것(마12:40)을 은연 중에 드러내셨다 라는 점이다. 그것이 그분이 사람이 되신 본래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렇듯 예수께서 인자가 되셔서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심으로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지극히 높은 이름을 주셨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부활할 것이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이며, 능력으로 천사들과 함께 재림하실 것을 말씀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어떤 혜택을 받게 될 것인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그렇게 하심으로 최소한 3가지 권세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첫째는 그분은 사람이 되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셨기 때문이다(마9:6). 그리고 둘째는 그분이 사람이 되심으로 인하여 그분이 장차심판하는 권세를 받으셨기 때문이다(요5:27). 그리고 셋째는 그분이 사람되심으로 순종하여서 왕위에 오르시는 권세를 취득하셨기 때문이다(마19:28). 그러므로 우리들도 자신을 낮추어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10. 나오며

  오늘은 조금 많은 분량을 다루었다. 그래서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다시 보고 또 보는 방법이 아주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은 우리가 얻는 영생의 분량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분량만큼 저 천국에서도 영생의 분량을 더 많이 그리고 크게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되 힘써 예수님을 알기를 사모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을 믿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견고히 가지며, 그분의 발자취를 우리도 따라가야 할 것이다. 그분이 가신 길이 우리들이 걸어가야 할 완전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율법교사로서 랍비이셨다. 그리고 온 인류를 구원할 자로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로서, 왕과 같은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율법에서는 예표로 기록되어 있었으며 그리고 선지자들의 책에서는 장차 오실 분으로 예언되어 있으셨다. 그리고 그것을 고스란히 그대로 성취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나사렛 사람으로 사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이셨다. 그리고 그분은 스스로를 낮추시어 사람이 되신 분으로서 겸손과 순종으로 인하여 그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갖게 되셨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우리도 과연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시금석일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완전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찬양드리며, 우리를 위해 기꺼이 사람되신 우리 주 예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린다. 

 

2022년 08월 10일(수)

정병진목사

 

야고보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친동생이다. 그런데 야고보서의 저작 시기는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알려준다. 왜냐하면 이 책의 기록 시기가 A.D.45~49년경이라고 보면 말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는 유대인들의 유일신앙과 예수님에 대한 높여진 신앙고백이 동시에 등장하고 있으며, 회당과 교회라는 공간이 동시에 등장한다. 어떻게 된 일인가? 그리고 야고보는 왜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시험과 은사 그리고 참된 경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인가?

2022-03-30(수) 수요기도회

제목: 야고보서강해(02) 야고보가 말하는 시험과 은사 및 참된 경건이란 대체 무엇인가?(약1:13~27)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VEdhicFSo6Y [혹은 https://tv.naver.com/v/25953907 ]

 

1. 들어가며

  야고보서는 언제 쓰였을까?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신약성경 중에서 제일 먼저 쓴 책은 사도 바울이 쓴 '데살로니가전서'라는 책이며, 복음서 중에 제일 먼저 쓴 책은 '마가복음'이라고 알려져 있다. 학자마다 저술 시기를 다르게 보기는 하지만 데살로니가전서는 A.D.53년경에 쓰여졌던 것 같고, 마가복음은 70년경에 쓰여진 것 같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야고보서는 언제쯤 쓰였을까? 우리는 지난 시간에 야고보서 1:1~12절의 말씀을 통하여 야고보서의 저자와 수신자 그리고 기록 목적을 살펴보았고, 시험을 당할 때에 성도의 신앙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함께 살펴보었다. 오늘은 야고보서 강해 두 번째 시간으로서 지난번에 다 나누지 못했던 야고보서의 개요 부분과 아울러, 야고보서 1:13~27에 나오는 말씀 곧 '시험'으로 이끄는 유혹의 원천인 인간 내부의 욕심에 대한 경계(1:13~16) 및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은사'와 '선물'(1:17~18) 그리고 말씀의 들음과 실천 및 오직 실천으로만 입증되는 참된 '경건'(1:19~27)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야고보서는 언제 쓰였는가?

  우리는 지난 시간에 맨 처음 야고보서의 저자 문제를 다루었다(약1:1). 야고보서의 저자인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이다. 그는 A.D.49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총회에서 의장직을 수행하였던 자로서 초대 교회의 기둥과 같은 자였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둘째로, 이 편지의 수신자가 누군지를 살펴보았다. 그들은 '흩어져 있는 나그네'로서 유대인들이지만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셋째로, 이 야고보서 편지를 쓰게 된 배경과 목적을 살펴보았는데 그것은 2가지였다. 그것은 이 편지의 수신자들 중에 이미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유대교에도 몸 담고 있으면서 부자로 살고 있는 이들이 자신의 가난한 형제들을 보고도 돕고 있지 않는 것을 책망하기 위해서 쓴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더 깊게는 이방인 지역에 이신칭의의 복음이 전파됨에 따라 예수만 믿으면 어떠한 회개의 열매들이 없이도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들에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므로 그들은 결국 구원받지 못할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지난 주 야고보서 개요 부분에서 함께 다뤘어야 했던 부분을 보충하면서 오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야고보서의 저작 시기는 대체 언제였을까? 야고보서의 저작 시기는 보통 이른 시기로서 A.D.45~49년경으로 보는 시각이 있으며, 늦은 시기로서 A.D.60~62년경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야고보가 A.D.62년경에 순교했기 때문에 그 이전에 쓴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야고보서의 내증으로 살펴보면 어떨까? 이 편지는 아무래도 A.D.45~49년경 곧 예루살렘 총회가 있기 전에 쓰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로, 이 편지에는 예루살렘 총회의 결과가 반영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A.D.49년 예루살렘에서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의 대표가 모여서 총회를 개최했다. 이는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이방인들도 역시 할례를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느냐 하는 것을 결정하기 위함이었다(행15:1). 그때는 베드로와 야고보서의 발언권이 매우 중요했는데, 마무리는 의장격인 야고보가 하였다. 그는 주께 돌아온 이방인들에게 율법의 멍에를 씌울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에게는 '우상의 제물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결국 이 총회에서는 야고보 안이 채택되었고 예루살렘 총회가 잘 마무리 되었다. 그러므로 만약 야고보서가 A.D.49년 이후에 쓰였다면, 그 편지에는 당연히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안도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야고보서에는 단 하나의 결정 사항도 들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아무래도 이 편지는 A.D.49년 이전에 쓰인 책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둘째로,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 간의 갈등이 표출되기 전의 상황이 본서에 나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시 이방 지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회당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약2:2). 이는 아직 유대교와 기독교가 많이 충돌하지 않은 시점인 것을 말해 준다. 

  

3. 야고보서가 쓰여질 당시에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어떤 신앙을 갖고 있었는가?

  그렇다면, 야고보서가 쓰여질 당시에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신앙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먼저, 이때 야고보를 비롯한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전통적인 유대교의 신앙관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도 불렀다는 점이다. 이것은 유대인이자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먼저 첫째로, 야고보가 하나님을 '만군의 주(여호와)'라고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신약성경에서 본서에만 나오는 아주 독특한 표현이다. 그런데 사실 '만군의 여호와'라는 표현은 사무엘상에서부터 등장하는 하나님의 칭호로서(삼상1:3,11), 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하나님의 칭호다. 그런데 여기에도 그러한 표현이 나온다(약5:4). 또한 둘째로, 야고보는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점이다(약2: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째로, 야고보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빛들의 아버지'(1:16), '하나님 아버지'(약1:27), '주 아버지'(3:9)라고 표현한다. 이는 유대인들은 절대 사용할 수 없는 칭호로서, 오직 예수님을 통하여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칭호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면서 기독교인들이었던 성도들은 당시 하나님을 '만군의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동시에 그분을 '아버지'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제는 당시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었는지를 살펴보자. 당시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다. '주 예수 그리스도'(1:1), '영광의 주'(2:1),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5:7),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5:8)',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5:14), '주께서 그(병든 자)를 일으키시리라'(5:15)고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로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미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야고보를 비롯한 당시 믿음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이미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들은 예수님을 면류관과 같은 상주시는 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1:12). 또한 그들은 예수님을 장차 오실 '재림주'와 '심판주'로도 믿고 있었다(5:7~8, 9). 또한 그들은 그분을 '치유의 하나님'으로도 고백하고 있었다(5:14~15). 

 

4. 야고보서에서 인용되고 있는 구약성경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것이었는가?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때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지 약 15~20년 정도 될 무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때 당시에 야고보서는 회당 예배를 드리면서 구약성경의 말씀을 늘 들었기에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예수께서 육체로 계실 때에 친히 하신 말씀은 직접 듣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구약성경을 그대로 인용한다. 최소 6군데에서 그가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한 구절로는,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표현(창15:6, 약2:23)이 나오고 있으며,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기록된 십계명의 말씀 중에서 '살인하지 말라'(출20:13, 신5:16,약2:11), '간음하지 말라'(출20:14, 신5:17, 약2:11)는 말씀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19:18)는 레위기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약2:8). 그리고 그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는 표현을 이사야 40:8에서 가져왔으며(약1:11),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는 표현을 잠언에서 가져온 것 같다(잠3:34, 약4:6).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야고보가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마5~7장)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대로 인용한 말씀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야고보서를 읽으면 그것이 산상수훈의 말씀이라고 그냥 생각되어지는 말씀이 무려 21군데나 된다. 이는 당시 야고보가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복음서와 똑같은 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사용하고 있지만, 그대로 인용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떤 이는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또 다른 버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야고보에 등장하는 말씀과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이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다. 

 

5. 사람이 시험받는 원천은 무엇이며, 하나님은 과연 사람을 시험하시는 것일까?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야고보는 1:2~12의 말씀을 통하여 시험을 당할 때에 성도가 취해야 할 신앙 자세를 언급한 바 있다. 이어지는 1:13~18절의 말씀에서 야고보는 시험으로 이끄는 유혹의 원천이 인간 내부의 욕심(욕망)에 있음을 경고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결코 악한 것들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면서 동시에 사람을 시험하지도 않으신다고 말한다. 오히려 하나님은 각종 좋은 은사와 선물들을 하늘로부터 내려 주시는 분이며, 성도들을 피조물들 가운데 첫 열매로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정말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시지 않는 것인가?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고 있는 대목을 살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 22:1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고 있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창22:1)" 또한 사무엘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격동시키어 인구조사를 하게 했다는 말씀도 나온다(삼하24:1).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악한 것들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고 또한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시험 중에서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시험을 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그렇다. 시험('페이라스모스')이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세 가지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 중에서 아브라함을 시험한 그 시험은 '테스트(test)'로서의 시험을 가리키며, 야고보서 1:2~3에 나오는 시험은 '시련(trial)으로서의 시험'을 가리킨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이 사람을 유혹하여 죄짓게 하기 위해 시험하는 것 같은 시험(temptation)을 하지는 않으시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 하나님은 좋은 은사와 선물을 주시고 거듭남을 주시는 분이신 것이다. 

 

6. 말씀을 듣는 자의 자세와 성도의 경건 생활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어떤 자세로 들어야 하는가? 야고보는 1:19~25의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신중하게 들어야 함과 들은 바는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여 말한다. 왜냐하면 이 편지의 수신자였던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일부가 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그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을 책망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성도는 듣기는 신속히 해야 하지만 말하기도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권면한다(1:19). 왜냐하면 사람이 분노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1:20). 그러므로 성도는 모름지기 더러운 말과 넘치는 악을 버리고 온유함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1:21).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그것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마치 자기의 얼굴이 더러운지 아니 더러운지를 거울을 보고 알게 되지만 돌아가서는 금방 잊어버리는 사람도 같다는 것이다(1:23~24). 그러므로 진정 복음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가 진정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1:25).

  이어서 야고보는 실천으로 입증되어야 하는 믿음의 한 예로서, 유대인들이 옛날부터 실천해 오고 있는 '경건 생활'의 예를 하나 든다. 만약 어떤 성도가 스스로를 경건하다고 말은 하는데, 자기의 입술을 재갈물리지 않은 채 말만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경건은 헛 것이라는 것이다(1:26).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경건은 고아와 과부들과 같은 가난하고 약하고 소외된 자들을 환난 중에서 돌아보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세속에 물들지 않고 지켜 내는 것이라고 말한다(1:27). 오직 참된 경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에 있는 것이지 말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7. 나오며

  야고보는 초대 교회가 탄생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 되었다. 12사도들은 흩어져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 안에 남아 있어 신앙 지도를 해야 할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삶은 기독교 내에서만 인정받았던 신앙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존경받는 신앙인이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지켜보았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도 그를 '낙타 무릎'을 가진 자라고 표현하였으며, 그를 '의인 야고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얼마나 기도를 열심히 했으면 그러한 별명이 붙었겠는가? 그는 율법을 준수하는 유대인의 눈으로 볼 때에도 역시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진 자였던 것이다. 그는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그러한 자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성도들에게 기도하라고 권면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기도 생활을 철저히 실행에 옮겼던 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삶은 유대인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도 의인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야고보가 염려했던 것처럼, 믿음은 갖고 있지만 열매가 없는 사람은 아닌가? 야고보는 말한다. 믿는 것은 귀신들도 잘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2:17). 그리고 그러한 믿음으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2:14). 우리를 돌아보자.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역시 귀로 듣기만 한 채 아무런 열매가 없는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지는 아니한가? 그러면 우리의 경건은 헛 것이다. 그러한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돌이켜 회개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도 행함으로 온전케 되는 믿음의 삶을 살아 보자. 그것만이 내 영혼이 살 길이요 내 영혼이 천국에 입성할 수 있는 구원의 생명길이기 때문이다. 

 

2022년 03월 30일(수)

정병진목사

 

예수께서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에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고백이나 신조들에는 사실 예수님의 자존성을 언급하는 항목이 들어있지 않다. 다만 그분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의 하나님이라고 나올 뿐이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이 있는데 왜 어머니 하나님은 없느냐고 하는 이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신앙고백을 하니, 마리아가 하늘의 여왕이라는 해괴망측한 교리도 생겨났다. 그래서 오늘은 교리가 지닌 단점들과 아울러 예수님의 하나님되심에 관한 성경적인 견해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2020-08-16(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26) 구원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14)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6)(골1:15~20)
https://youtu.be/iLHiWYqzI_A [혹은 http://tv.naver.com/v/15295786 ]

 

 

 

1. 들어가며

  예수님은 누구신가? 흔한 질문일 수 있다. 보통은 이 질문에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분이 육체로 계실 때에 고백되어진 신앙고백이다. 그렇다면 부활후에 예수님은 어떤 분이라고 믿었을까?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 곧 주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쉽게 나올 수 있는 고백이 아니다.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 곧 여호와에게만 칭할 수 있는 칭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이라고 하는 측면을 그동안 다섯차례에 걸쳐 다루었다. 그것도 예수께서 자존자이심에 관한 말씀을 살피는데 사용하였다. 오늘은 예수께서 자존하신 하나님이심에 대한 여섯번째 시간으로서 그 마지막 시간이라고 하겠다. 

 

2. 예수님은 누구시며, 하나님이신 증거들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하나님이신 증거들에는 그분이 하신 말씀과 그분이 행하신 일들 속에 적나나하게 드러나 있다. 특히 그분이 하나님이심에 관한 증거로서 예수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자존자"이시라고 밝히셨다. 그것이 요한복음 8장에 나온다. 그때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에고 에이미=I am)'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8:24)",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에고 에이미=I am)'인 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행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들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요8:28),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내가 있느니라(에고 에이미=I am)'(요8:58)"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이 세 구절에는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그것은 모두 여호와께서 자신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3:14)"라고 모세에게 알려주었던 히브리어 문장 "예흐예 아쉐르 예흐예"라는 것과 동일한 것들이다. 고로 우리는 예수께서 비록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분은 원래 자존하신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3. 교회의 역사 가운데 신조나 신앙고백에 예수께서 자존자이심을 언급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교회의 역사 가운데 어떤 신조나 신앙고백을 보면 거기에 예수께서 자존자이셨음을 언급하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고대 신조들이나 신앙고백들을 보면, 예수께서 자존자이심을 알려주는 문항은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 다만 고대의 교회 신조들 가운데 니케아 신조(A.D.325년)에 이어 두번째 신조에 해당하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신조(A.D.381년)" 때부터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이 언급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 홀로 나신 분, 모든 시간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신 분, 빛으로부터 오신 빛, 참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참 하나님이시며, 지어지지 않고 나셨으며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어졌다"라고만 나온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분은 하나님이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분은 시간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신 분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아버지로부터 종속된 분처럼 언급하나, 그분이 종속된 분이라고 하면 안 되기에 거기에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고 추가하여 그 미비점을 보완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이 신조와 그 이후에 등장하는 모든 신조와 신앙고백 어디에서도 예수께서 자존하신 분이라는 항목은 들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자존하시는 예수님에 관하여, 성경주석자 칼빈은 무엇이라고 주석했을까? 아쉽게도 칼빈은 요8:28에 대한 자신의 주석을 통하여, "그러나 하나님의 한 선지자가 너희 가운데 거하면서 너희에게 말씀했다는 것을 앞으로 깨달을 때가 올 것이다"라고만 해석했을 뿐이다. 분명히 예수께서는 "내가 그"라고 말씀하심으로 자존성을 언급하고 있지만, 칼빈이라도 그러한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 

 

4. 교리의 위험성은 무엇인가?

  고로 우리는 교리가 가진 위험성과 한계를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교회는 그동안 이단사상에 대항하기 위하여 함께 바른 신앙고백을 애써 만들어왔다. 물론 그들이 사용했던 기본적인 근거는 다 66권의 성경책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이용하여 성경적인 견해를 밝힌다는 것이 오히려 나중에 독이 되는 것이 생겨났다는 것은 정말 아쉬운 대목이다. 이처럼 인간이 모여 결정하는 것은 흠이 있을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며, "마리아에 대한 진술"이다. 

 

가. 예수님에 대한 교리와 신앙고백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 때부터 예수님에 대한 신성항목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그때에 처음 작성된 예수님에 관한 신앙고백 안에는 "시간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신 분"으로 고백되어졌다. 하지만 그 고백은 그 뒤로 그 누구도 손대지 못했다. 하지만 이 고백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시간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신 예수께서는 이미 구약시대에도 활동하고 계셨다"고 해석해 버렸다. 그러므로 하나님(엘로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에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고 해석해버렸다. 하지만 성경에는 성자가 주체적으로 만물을 창조했다는 말씀이 단 한 구절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만물이 그분(아들 혹은 말씀)을 통하여(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 언급될 뿐이다(창1:3, 골1:15). 특히 골로새서의 말씀은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나온다(골1:15). 아들 하나님이 직접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전에 그분은 아직 말씀으로 계셨기 때문이다(요1:1~3). 그렇다. 구약시대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은 오직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다(사44:24). 어느 누구도 그 창조에 개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리가 한 번 정해지자, 만세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와계시던 예수께서 직접 만물을 창조하는 데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셨다고 하는 해석은 쉽게 교회 가운데 수용되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점차 교리로 굳어져갔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께서 구약시대에도 이미 아들 하나님으로 밖으로 나와서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분이 주체적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는 데에 참여하시고 활동하셨다고 ㅁ라한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이는 없다. 그러나 아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수차례 걸쳐 언제 아버지로부터 자신이 나오셨는지를 언급하신다. 특히 당신의 자존성을 언급하셨던 상황에서는 그분은 분명하게 아버지로부터 안에서 밖으로 나오셨고 그리고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음을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8:42)"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유대인들이 정말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약속(말씀)을 따라 이제 오셨으니 예수님을 사랑해야 마땅한데 그렇게 대우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척하고 그분의 말씀을 믿으려하지 않고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요8:40). 아브라함은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에게 그렇게 대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여호와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로 오셨는데도 예수님을 그렇게 함부로 대우하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안에서 밖으로(에크) 나왔고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같은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서 말씀하기를 "나는 스스로(나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요, 저분이 나를 보내셨다"고 말씀하셨다(요8:42b). 즉 예수께서 이미 아들로서 스스로 있다고 육신을 입으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부터 안에서 밖으로 나오셨던 분이 이제 세상에 들어오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파송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하지만 알고보면,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이 땅에 들어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이며,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그분의 일을 행하는 것이다(요14:9~10). 또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예수님을 보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셨던 분을 보는 것이라고 하셨다(요12:44~45). 그러므로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셨던 것이다. 상호내주하신 것이다. 그러나 벨직신앙고백(A.D.1561년)에서는 "성부(아버지)는 성자(아들)가 아니고, 성자(아들)는 성부(아버지)가 아니며, 이와같이 성령은 성부(아버지)와 성자(아들)가 아닌 것이 명백하다"고 진술해버렸다. 그러니 이 말씀을 곡해하는 자는 하나님은 세 분으로 계시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는 같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리와 신앙고백의 맹점인 것이다. 결국 교리에 고백되어진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예수님의 신성과 자존성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나. 마리아에 대한 교리와 신앙고백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마리아에 대한 교리의 발전이다. 천주교는 성경보다도 전통과 교황의 말을 앞세운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교황무오설까지 주장하는 어리석음을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안타까운 것은 마리아에 대한 교리의 발전이다. 마리아는 분명 예수님을 낳았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시다. 그러나 A.D.481년 칼케돈신조에서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에 이러한 부분을 삽입하면서 마리아는 숭배의 되고 말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어머니이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었느니라"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칭해버린 것이다. 마리아는 하나님을 낳은 것이 아니다. 이 진술 하나 때문에 마리아는 예수님보다 더 뛰어난 분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종속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어머니를 낳은 자가 더 위대한가 아니면 하나님이 더 위대한가? 그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래서 결국 교리가 교리를 낳아서, 나중에는 마리아에 대해서 다음의 5가지가 고백되어졌다. 첫째, 마리아는 영원히 동정녀로 살았다. 둘째, 마리아는 어떤 자범죄도 짓지 않았다. 셋째, 마리아는 원죄로부터 오염되지 않았다. 넷째, 마리아는 죽지 않고 승천했다. 다섯째,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요 하늘의 여왕이다. 이것이 바로 교리를 성경보다 더 우위에 둔 신앙고백의 대표적인 탈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교리라도 성경 위에 두면 안 된다. 참고할 뿐이다. 왜냐하면 이단과의 피튀기는 논쟁 가운데 만들어진 고백들이기 때문이다. 

 

5. 삼신론적인 삼위일체의 신앙고백이 미치는 좋지 않은 영향은 무엇인가?

  오늘날의 대부분의 삼위일체 신앙은 벨직신앙고백을 따라간다. 하지만  이 신앙고백의 내용 가운데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나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신앙고백은 오히려 이단이 나오게 하는 토양의 구실이 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교회 이단을 보자. 하나님의 교회는 어머니 하나님을 믿는 이단이다. 그들은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했는데,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지 않았느냐면서, 하나님이 아버지가 계시고 아들이 있다면, 당연히 어머니도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주장한다. 그래서 어머니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의 김주철 총회장은 '장길자'라는 여인을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부르도록 한다. 그럼, 천주교는 어떠한가? 칼케돈 신조(A.D.451년)에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서술하니, 마리아가 예수님보다 더 높은 신이 되어버렸다. 그것이 바로 교리라는 것이다. 또한 중국과 우리나라에는 동방번개(전능신교)라는 이단이 대단히 활동하고 있다. 조유산이라는 교주가 양향빈이라는 여인을 재림주로 받들라고 하는데 그들은 그것을 따라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진 사람이 남자와 여자였으니, 메시야도 초림에는 남자이신 예수께서 오셨으니 재림의 예수는 당연히 여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 분 하나님께서 동시에 아들로도 오셨다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에 이어, 어머니 하나님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6. 나오며

  그렇다. 아버지와 아들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분명 예수께서 인성을 취하심으로 아버지와 인격이 다른 두 분이 존재하시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께서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아들로부터 나오심으로 인하여 성령께서도 아들을 대신하여 지금도 하나님으로서 활동하고 계신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시대다. 하지만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게 되면, 금새 여러 이단들에게 속아 넘어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분 하나님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동시에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이단에 빠지지 않고 성경에 기록된 바로 그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인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는 지금도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실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 오른편에 예수께서 다른 보좌에 앉아계실 것이라고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성령께서도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하니, 결국 천국에서 하나님의 보좌는 3개일 것이라고 상상하게 된다. 그러므로 중세시대 화가들이 그려놓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그림은 어떠한가? 세 개의 보좌 중에 중앙보좌에는 나이 지긋한 아버지 같은 분이 앉아계시고, 그의 오른편에는 젊은 아들 같은 분이 앉아 계시며, 그분의 왼편의 보좌에는 비둘기 모양의 성령을 그려서 넣어두었다. 아니면 세 사람을 각기 다른 보좌에 그려넣어 놓았다. 이것이 바로 중세시대의 삼위일체 신앙관이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교리대로 믿고 따라갈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믿고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이단에 빠지지 않고 제대로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천국에 가서 세 개의 보좌를 보려고 시도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08월 16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20) 구원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8) 예수님은 주님이요 하나님이시다(2)(롬14:4~12)_2020-08-10(월)

https://youtu.be/9fJVdLG3sQQ  [혹은 https://tv.naver.com/v/15196911  ]

 

 

1. 12제자들 중의 하나였던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고백한 신앙고백은 어떤 것이었나요? 

  예수님의 12제자들 중에 하나였던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고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20:28)" 왜냐하면 문이 닫혔는데 방 안에 주께서 갑자기 들어오셨고, 분명히 죽으셨다가 무덤에 묻히셨는데 자기 눈 앞에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못박힌 흔적이 있는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면서, 당신이 자신의 스승이었던 바로 그 분인지를 직접 만져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요20:25,27). 

 

2. 초기교회 가운데 사용되어진 가장 오래된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어떤 것이었나요?

  초기교회 성도들 가운데 예수님에 대한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은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고전12:3, 롬10:9~10). 특히 예수믿는 사람으로서 예배에 참석하거나,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사도신경의 긴 문장으로 하고 있지만, 초기교회 가운데 성도들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은 아주 짧은 한 마디의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더 많은 고백들이 더해져서 오늘날 사도신경의 형태로 굳어진 것입니다. 당시의 교회에 성도들이 모였을 때 부른 찬송이 오늘날까지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빌2:6~11에 기록되어있는 "그리스도의 찬가"입니다.

빌2:6-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런데 이러한 찬양의 형태를 살펴보면, 그들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했음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은 곧 초기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은 처음부터 신적인 대상으로 불려지고 섬겨지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해준다고 하겠습니다. 

 

3. 초기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초기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했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신앙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초기교회 성도들 중에는 처음에는 이방인들이 전혀 없었고 오직 유대인들 뿐이었는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주님!(퀴리에)"이라는 호칭은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의 입술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4. 초기교회 당시의 사람들은 보통 누구를 "주님!(퀴리에)"라고 불렀나요?

  초기교회 당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보통 하인이 자기의 주인을 부를 때에 "퀴리에"라고 불렀으며, 로마제국 내의 백성들이 황제를 부를 때에도 역시 "퀴리에"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스승이나 지도자를 가리켜서도 사람들은 "퀴리에"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헬라파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부를 때에 "퀴리에 무(나의 주님)"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히브리어로 보면, "아도나이(my Lord)"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유대인들 또한 예수님을 일컬어 "퀴리에"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은 처음부터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처럼 신적인 지위를 가진 분으로 섬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5. 구약의 성도들 중에는 누가 하나님을 "아도나이(헬, 퀴리에)"라고 불렀나요?

  구약시대 성도들 중에는 하나님을 "아도아니(나의 주님)"이라고 불렀던 최초의 사람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그분에게 기도할 때에 "나의 주여(아도나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창15:2,8, 18:30,32). 그리고 모세도 여호와께 기도할 때에는 "오 주여(아도나이), 나를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출4:10)",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출4:13)"이라고 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왕도 "주(아도나이)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삼하7:18)"이라고 부름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아도나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스라, 느헤미야와 시편기자들 그리고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아모스, 오바댜, 미가, 하바국, 스바냐, 스가랴, 말라기와 같은 선지자들도 하나님을 칭하거나 또는 그분께 기도할 때에 "아도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오직 유일하게 여호와에게만 "아도나이"라고 불렀던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아도나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스데반 집사도 돌에 맞아서 죽어갈 때에, 영안이 열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7:59)",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이라고 외쳤다는 것입니다. 이때 스데반이 예수님더러 "주님"이라고 외쳤다는 것은 유일한 하나님만 인정하는 유대인들의 신앙관에서 볼 때에, 스데반은 이미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견고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스데반이 그 순간 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으로부터 서신 것"이었습니다.

 

2020년 08월 10일(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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