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93) 예루살렘 도착한 바울이 결례를 행한 것은 과연 옳은 선택이었나?(행21:17~26)_2023-01-04(수)

https://youtu.be/29lVqbp5qWk  [혹은 https://tv.naver.com/v/32116473 ]

1. 다메섹 체험 이후 바울의 생애 가운데 최대의 흠이라고 여겨지는 부분은 무엇인가?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 전파에 힘쓰게 된다. 그런데 그의 생애에 흠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두 번은 흠이 보인다. 첫 번째는 2차 전도여행을 출발하기 직전 마가 요한을 동행자로 데려가는 문제로 바나바와 피차 싸웠다는 것이다(행15:39). 양보해 줄 수도 있었을텐데, 그는 끝내 바나바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혈기 분노의 영이 아직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3차 전도여행 후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유대인들 앞에서 결례를 행했다는 것이다(행21:26). 이것은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바울이 다시 정결법을 지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 바울은 왜 결례(정결예식)를 행한 것인가?

  바울은 왜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이요 예수님의 친동생인 야고보를 만나 선교 보고를 한 후에 왜 결례를 행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야고보의 제안이 있었기 때문이다(행21:23~24). 왜냐하면 바울에 대해서 유대인들에게는 좋지 않은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울이 이방 지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첫째, 모세의 율법을 반대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둘째, 그들의 자식들에게 할례를 받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셋째, 유대인의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행21:21).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는 약간 다르다. 첫째, 바울은 율법을 배반(배교, 변절)하라고 하지 않았다. 다만 바울은 율법의 한계를 지적했고 율법의 기능을 지적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율법이 가리키고 있는 그리스도께로 모두 나오라고 한 것이다. 둘째, 디아스포라 헬라파 유대인들의 자식에게 할례를 받지 말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알려진 기록에 의하면,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편지만 남겼을 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편지를 남긴 것 같지는 않기 때문에, 과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지침을 내렸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유대인의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했는지도 사실 정확히 알 수 없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들은 소문을 가지고 바울을 우려하여 바울로 하여금 율법 폐기론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달라고 한 것이다. 

 

3. 바울이 결례를 행한 것은 그동안 바울이 전했던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베드로가 할례자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것처럼,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그런데 그렇게 복음을 전할 때에도 먼저는 디아스포라(흩어진)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먼저 전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가 오셨고 그분이 예수님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율법을 더 이상 지키지 말라고 했는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가 이방인들에게는 율법 가운데 도덕법은 폐기되지 않았어도 의식법들(할례법, 안식일법, 절기법, 제사법, 음식법, 정결법)은 폐기된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방인들은 더 이상 의식법들을 준수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는 야고보의 말을 듣고 정결법을 시행한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그가 전해 온 것과는 다른 방향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다시 의식법을 준수하고 있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4. 바울이 정결례를 행한 것은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 

  그렇다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야고보의 제안을 따라 정결례를 행하고 그것도 다른 네 명의 사람들 정결례 비용도 대주면서 정결의식을 행한 것은 과연 옳은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는가? 얼핏 보기에는 율법과 복음의 경륜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미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복음 안으로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정결례를 행한 것은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정결례를 행한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왜 정결예식을 행한 것인가? 그 이유를 다 들여다볼 수는 없겠지만 그의 복음 전파의 원칙에 따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3가지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는 교회의 권위를 존중하기 위해 정결예식을 행한 것이다. 사실 예루살렘교회에는 이방인 그리스도들인이 없었다. 전부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뿐이었다. 그런데 이들도 또한 주님의 백성이요 구원받은 자들이 아닌가?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복음 전파 노선과는 약간 달랐지만 그들을 형제로 생각하고 그들의 제안을 수용했던 것이다. 이는 예루살렘교회의 대표자들이었던 70명의 장로들의 결의를 겸손히 수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그는 최소한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오해와 의심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정결예식을 행한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진짜 문제는 오리지널 유대인들이다. 그런데 유대인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예루살렘에 수만 명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이 율법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오해와 의심을 종식시키기 위해 바울은 기꺼이 정결예식을 행한 것이다. 

  셋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그것은 바울이 한 사람이라도 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같은 모양이 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정결예식을 행한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을 사랑했다. 차라리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을 구원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율법 수호자들로서, 율법을 최고의 권위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자신이 율법 파기론자처럼 보인다면 아무도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라도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자유자였지만 기꺼이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결례를 행한 것이다. 그가 자신의 복음 전파의 원칙을 고린도전서에 기록해 놓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고전9:20~22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바울이 정결의식을 행한 것은 바울이 그것으로 인하여 자기 의를 이루어 자신을 구원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또한 유대교로 회귀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것에 어떤 효험이 있다고 믿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단지 유대인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렇게 행한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증거하여,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행한 것이다. 

 

 

2023년 01월 04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92)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예언과 사명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했는가?(행21:1~16)_2023-01-03(화)

https://youtu.be/sDO6bFyCA0A  [혹은 https://tv.naver.com/v/32116444 ]

1. 사명자는 언제 사명이 주어지는가?

  바울은 주 예수님으로부터 처음부터 복음 전파의 사명을 부여받고 태어난 자였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자신의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택정함을 입었기 때문이다(갈1:15).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낸 자들 중에는 특별히 어떤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것이다. 바울도 처음에는 자신에게 어떤 사명이 있는지를 잘 몰랐다. 적어도 30대 정도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주 예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셨다. 그리고 다메섹에 사는 아나니아를 통하여 그에게 사명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 그것은 그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이 땅에 보내어진 사명자라는 것이었다. 아나니아는 그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파하도록 택한 주님의 그릇이라고 알려 주었다(행9:15). 그랬다. 바울도 처음에는 자신에게 어떤 사명이 있는지를 잘 몰랐으나,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때는 예루살렘교회의 일곱 집사 가운데 하나였던 스데반을 죽이는 데 앞장설 때에, 주 예수께서 그에게 홀연히 나타나셔서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 이 땅에는 사명자가 있다. 사명자에게는 누구나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길이 있고 그 길을 걸어가게 된다. 그 길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고 해도 때가 되면 그 길을 가도록 하나님께서 불러내시고 그 길을 걷게 하시기 때문이다. 

 

2.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 중 밀레도 이후에 어디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갔는가?

  제3차 전도여행 중에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하여 고별설교를 한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된다. 그때 바울은 밀레도에서 고스로 다시 고스에서 로도로, 로도에서 바다라를 거쳐 두로에 상륙하게 된다. '두로'라는 도시는 수리아의 아래쪽에 위치한 세계 최고의 항구도시였다. 그래서 배에 짐을 싣고 내려야 했다. 그러자 바울은 그 시간 동안 약 일주일을 그곳에서 보낸다. 그리고 돌레마이를 지나 가이사랴로 내려간다. 바울은 거기에서 예루살렘교회의 초기 일곱 집사 가운데 하나였던 복음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간 후 거기서 다시 얼마 동안 지내고 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3. 두로와 가이사랴에서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는가?

  그런데 바울은 두로와 가이사랴에서 예언을 듣는다. 그것은 바울 자신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에 관한 것이었다. 먼저, 두로에서는 어떤 제자들이 바울에게 영을 통하여 말하기를, 예루살렘 안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하였다. 아마도 바울의 신변에 어떤 위험한 일어날 것임을 환상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거기에서 약 80Km 떨어진 가이사랴로 내려간다. 그런데 거기에서 바울은 예언이 아니라 어떤 선지자를 만난다. 그는 유대로부터 내려온 선지자로서, 과거 30년 전에 바울이 안디옥교회에 있을 때에 와서 천하가 흉년이 들 것을 예언했던 바로 그 선지자였다(행11:28). 그의 이름은 '아가보'였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서 정말 천하에 큰 흉년이 들었다. 그때는 A.D.46년경이었다. 그런데 다시 30년이 지나 그 아가보 선지자가 가이샤라에 있는 빌립 집사의 집에 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다가 자신의 손들과 발들을 묶었다. 그러고는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라는 말과 더불어 예언을 하였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는 예언이었다(행21:11). 그는 말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보았던 것을 실제로 재현함으로, 예언을 하였다. 그것은 그만큼 바울의 결박과 체포 그리고 환난이 앞으로 확실히 일어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4. 두로와 가이사랴의 예언은 서로 어떻게 다르며, 어떤 것이 잘못된 예언인가?

  바울은 두로에서도 믿음의 형제들을 만났다. 특히 환상을 보고 말할 줄 아는 은사를 받은 형제들을 거기에서 만났다. 그때 그들 형제들은 바울더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 것을 권고했다. 그런데 바울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은 과연 옳은 예언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옳은 예언이었는지를 우리는 바울이 가이샤라에 도착했을 때 아가보 선지자가 했던 예언을 통해 비교해 보자. 아가보는 바울에게 어떻게 예언했는가? 그는 이렇게 예언했다. 그것을 헬라어 원문으로 그대로 직역해 보겠다. "성령께서 이것들을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 안에서 유대인들이 이와 같이 이 띠가 있는 바 그 남자를 결박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방인들의 손들 안으로 넘겨줄 것입니다(행21:11)" 그렇다. 아가보 선지자는 정확하게 예언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언이란 성령께서 보여 주시고 들려주신 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지, 거기에다가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로의 형제들은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어 바울에게 말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미숙한 예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바울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예언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잘못된 예언을 한 것이라고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들이 예언을 은사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미숙하다는 것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예언이란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보여 주시고 들려주신 것을 그대로 전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아가보 선지자는 자신이 보고 들었던 것에 어떤 것도 더하거나 빼지 않고 그대로 전달했던 바른 선지자였음을 알 수 있다. 

 

5. 바울은 형제들의 예언을 받은 후 자신의 사명과 그것을 어떻게 연결했는가?

  그때 바울은 형제들의 예언을 듣고 어떻게 반응했는가?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을 포기하고 말았는가? 아니었다. 바울은 결코 그렇게 행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형제들이 그에게 한 예언은 성령께서 주신 예언이 아니란 말인가? 아니다. 맞다. 그들이 받았던 것도 역시 성령께서 주신 것이다. 하지만 예언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다만 그러한 일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 줄 뿐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의 길을 그대로 걸어갔던 것이다. 예언이란 사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어느 부분에 있을 일을 미리 말해 주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하여 말했던 고별설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행20:22~24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렇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가 걸어갈 길이 사명으로 미리 주어진 채 있는 것이다. 고로 그 길을 걸어가는데 어떤 환난이나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그 길을 가지 않고 다른 길을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란이 사명을 가로막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우리는 예언을 통하여 우리의 미래에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를 미리 알 수 있으므로 그날을 마음으로 잘 준비할 수가 있을 것이다. 

 

2023년 01월 03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디를 가리키며 그곳은 어떤 곳인가?(계21:1~8)_2020-01-09(목)


 

1. 장차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디에 펼쳐지나요?(계21:1)

  장차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계시는 저 천국에서 펼쳐지는 장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처음(먼저의) 하늘과 처음(먼저의) 땅이 떠나가고 질적으로 새로운(변화된)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던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지고(창1:1), 새로운 세셍이 펼쳐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국에 있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이제 새롭게 조성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내려올 것이기 때문입니다(계21:2,10). 그때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으로부터(아포)와 하늘로부터(에크) 내려와 새 땅에 들어설 것입니다.

 

2.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누가 들어가나요?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더 종류의 성도들이 들어갑니다. 첫째,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천국에서부터 동행했던 성도들이 들어갑니다(살전3:13, 살잔4:14). 이들은 첫째 부활(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후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속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죽은 즉시 부활체를 입고 천국으로 들어가서 천년동안(긴 시간을 의미함) 왕노릇하다가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올 자들입니다(계20:4~6). 이들이 예수님과 더불어 아마겟돈 전쟁인 곡과 마곡의 전쟁에서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게 될 자들입니다(계2:26~27). 둘째,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때에 부활체를 입는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이들은 그때 죽은 성도들이 홀연히 변화되어 부활체를 입은 자들이며 또한 그때까지 살아있고 남아있는 자들도 홀연히 변화되어 부활체를 입을 자들을 가리킵니다(살전4:16~17). 이들 모두는 순식간에 부활체로 갈아입고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공중으로 마중나가서 영접할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곳에서 새롭게 펼쳐지는 새 땅으로 내려와서 새 땅에서 영원히 왕노릇할 것입니다.

 

3. 천국에 있다가 새 땅으로 내려오게 되는 거룩한 도성을 왜 "새 예루살렘"이라고 부를까요?

  우선은 새 예루살렘 성은 이 세상에 있는 예루살렘과 질적으로 다른 성이기 때문에 "새(카이노스) 예루살렘"이라고 불리게 됩니다(계21:2). 그리고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 천국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자들은 이 세상에 있을 때부터 음녀인 바벨론 성에서 살지 않고 정결한 처녀처럼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머물러 살았던 자들입니다. 지상에 있는 예루살렘도 사실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도성인 지상의 예루살렘이 있고,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나님을 마음 속에 모신 성도들 곧 영적인 성도들로서 교회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자들이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서는 영적인 예루살렘 성 안에 살게 되는데, 이것을 본따서 천국에 있는 하나님의 도성도 새 예루살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에 들어갈 자는 오직 정결한 처녀로서, 결코 사탄마귀를 따르지 않고 주님만 따라가는 자들이 들어갑니다. 그들은 구약시대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따르던 자들이요, 신약시대 이후에는 오직 어린양만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4. 이 세상에 있는 예루살렘과 천국에 있는 새 예루살렘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 세상에 있는 예루살렘은 계속해서 공격을 받지만, 천국에 있는 새 예루살렘은 결코 공격을 받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예루살렘(육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유대인과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교회)은 마귀와 귀신들이 공존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방인들의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인 용과 그의 하수인인 짐승(바다짐승)과 거짓선지자(땅짐승)이 이방인들을 배후조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계11:2, 20:9). 그런데 현재는 천국에 있지만, 새롭게 변화될 이 땅(새 땅)으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은 질적으로 다른 세계에 있던 도성입니다. 그러기에 이 성에는 처음 창조되었던 이 세상의 바다도 더이상 있지 않을 것입니다. 즉 성도들을 핍박하고 괴롭힐 짐승이 올라오는 바다가 더이상 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계21:1).  

 

5. 바다가 더이상 있지 않는 새 예루살렘 성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사라지는 도성일까요?(계21:4)

  바다가 없는 새 예루살렘 성 안에는 이제 더이상 사탄의 세력이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이상 아픈 것으로 인한 고통도 없을 것이며,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미 사망과 음부도 같이 불못에 던져넣어버렸기 때문입니다(계20:14). 특별히 새 땅 위로 내려오게 되는 새 예루살렘 성은 부활체를 입고 들어가는 공간이기에, 그곳에서는 사람이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으며, 배고프지 않으니 죽지도 않을 뿐더러,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피곤하지도 않는 놀라운 세계가 될 것입니다. 정말 이 세상과는 완전히 새로운 장소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심으로, 지금 천국에 있는 것과 같은 놀라운 새로운 세계도 같이 펼쳐질 것입니다(계21:5).

 

2020년 01월 09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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