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5(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사가랴와 엘리샤벳의 영성,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눅1:39~45과 67~79)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ar2pdB7ufzo  [혹은 https://tv.naver.com/v/31902872 ]

 

1. 들어가며

  우리는 사가랴와 엘리샤벳을 떠올릴 때면 그들이 예수님의 선구자였던 세례요한을 낳은 부모 정도로 생각한다. 특히 사가랴는 주의 천사가 일러준 말을 믿지 아니하여 벙어리가 되었기에, 신앙이 조금 떨어진 사람 정도로 인식한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간단히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영상은 상상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세례요한의 부모 이상의 놀라운 것들을 갖고 있는 분들이다. 이들은 탁월한 예언자였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들은 메시야의 탄생에 있어서도 놀라운 역할을 수행했다. 그렇다면 대체 이들의 영성은 어느정도였을까?

 

2. 사가랴와 엘리샤벳은 어떤 사람들인가?

  사가랴와 엘리샤벳은 신앙이 매우 경건한 인물이었다. 이들 부부는 아론의 자손으로 제사장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 사가랴는 제사장의 24반차 가운데 8번째 반차인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으로서 사독계열의 제사장에 속해 있었다(대상24:10). 그리고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의 목전에 의인으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눅1:6).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모든 계명들과 규례들을 빠짐없이 실천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님이 보시기에도 흠이 없이 행하고 있던 사람이었다(눅1:6). 특히 이들 부부는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다만, 엘리샤벳이 자식을 낳지 못하는 딱한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 알고 보면, 사실 마리아로 하여금 처녀로서 잉태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임신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믿음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특히 이들은 자기들을 찾아온 마리아에게 엄청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것을 통해서도 우리는 이들의 영성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3. 엘리샤벳의 영성은 어떠했는가?

  엘리샤벳은 사가랴의 부인으로서 아론의 가문의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그녀도 제사장의 딸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엘리샤벳은 사실 마리아의 이모다. 성경에서는 친족이라고 나와 있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같은 출생을 가진 골육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마리아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약 110Km이상 떨어진 엘리샤벳의 집을 방문하게 되고, 거기서 무려 3개월이나 머물다 돌아간 것을 보면 엘리샤벳은 먼 친척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장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았을 때, 그녀는 그 말씀을 그대로 믿음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그때였다. 주의 천사가 지금 엘리샤벳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마리아는 곧바로 믿음이 충만해졌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엘리샤벳과 마리아가 매우 가까운 친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엘리샤벳이 나이가 많고 늙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엘리샤벳은 마리아의 이모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또 무엇을 알려주는가? 그것은 마리아의 어머니도 제사장의 딸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즉 마리아의 어머니도 상당히 경건한 가문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사실은 엘리샤벳이 영성에 있어서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자신의 이모인 엘리샤벳의 예언적인 선포 때문이다. 그것은 엘리샤벳이 임신한 지 6개월이 되었을 때에 있었다. 마리아가 엘리샤벳의 집에 찾아왔을 때에, 엘리샤벳이 그녀에게 들려준 소식은 정말 놀라웠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사실들을 엘리샤벳은 알고 있었으며, 장차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된 아이가 또한 어떤 분인지도 알고 있었기때문이다. 

 

4. 엘리샤벳은 마리아에게 어떤 사실을 들려주었는가?

  우리는 엘리샤벳을 보통 세례요한의 어머니 정도로만 알고 있는데, 아니다. 왜냐함녀 그녀는 마리아가 처녀로서 태중에 임신을 하게 되고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게 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엘리샤벳은 마리아가 임신한 지 1달도 안 되었을 때에 가장 먼저 그녀가 임신사실을 알려준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즉 마리아가 자신의 집에 방문했을 때에, 그녀는 마리아가 이전에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알고 있었으며, 뿐만 아니라 마리아의 몸에 잉태된 아이가 어떤 분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엘리샤벳은 마리아에게 일어난 비밀스러운 일을 알고 있었으니, 그녀가 태중에 열매(아이)를 임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렇게 된 것은 마리아가 천사를 통해 일어준 하나님의 말씀을 그녀가 그대로 믿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눅1:42,45). 사실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은 마리아 이외에는 정작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었는데, 1개월 만에 엘리샤벳의 입에서 마리아가 임신하고 있다는 말이 나왔던 것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엘리샤벳이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받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엘리샤벳은 마리아가 임신하고 있는 그 아이가 장차 엘리샤벳의 주님이 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눅1:43). 이는 그녀가 마리아를 '내 주님의 모친'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즉 마리아가 태중에 임신하고 있는 분은 장차 엘리샤벳을 비롯한 모든 인류의 주님이 되실 것이라는 사실을 엘리샤벳은 알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받았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그렇다면, 엘리샤벳은 어떻게 이러한 사실들을 알 수 있었던 것인가? 그것은 그녀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요,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눅1:41). 그렇다. 그녀는 본래부터 의인이었으며, 주의 율법과 규례를 어김없이 실천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기도를 많이 하여 성령의 사로잡힌 바 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마리아가 자신의 집에 도착하여 문안인사를 하자마자, 마리아에게 놀라운 예언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5. 사가랴의 영성은 어떠했는가?

  우리는 사가랴가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뽑아서 성소에 들어가서 향단에 향을 사를 때에 주의 천사를 보았고, 그때 천사가 일러준 사실을 믿지 못해 벙어리도 지냈다는 것에만 익숙해 있다. 하지만 그는 믿음이 없는 불신투성이의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의 천사 가브리엘이 그에게 알려준 말씀에 나와 있다.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눅1:13). 자신의 기도가 공중의 권세잡은 자들을 뚫고 하늘까지 모두 다 올라가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 이 세상에 많지 않다. 그런데 사가랴의 기도는 하늘에 상달되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삶은 깨끗했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정말로 율법으로 흠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공중에 악한 영들이 그의 기도를 막지 못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매우 기도에 깊이가 있는 영성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또다른 증거가 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을 낳은 후 그에게 할례를 행했을 때에 그가 예언적으로 선포했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때 그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자신의 아들 요한이 어떻게 장차 하나님께 쓰임받을 것인지를 예언한 바 있다. 그때 사가랴는 먼저 마리아가 잉태한 메시야에 대해서 예언을 하였다. 그 예언의 시작은 이렇다. 

눅1:68-69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그렇다. 그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제 당신의 백성을 돌아보시어 속량하시는 일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하여 구원의 뿔이신 권세있는 메시야를 그의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는 것도 알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조카 마리아가 다윗에서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가문의 후손인 요셉과 정혼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제 마리아가 다윗에서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왕가의 후손을 잉태했다는 것을 알고는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올렸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마리아의 잉태가 어떤 종류의 기쁜 소식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그것은 눅1:68의 말씀을 헬라어 원문으로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눅1:68[직역]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이는 그분이 자기를 위하여 방문하셨기 때문이며, 그분의 백성에게 대속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가랴는 마리아의 임신이 단지 메시야에 대한 임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임마누엘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방문하시어 인류를 구속하시는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것은 사가랴가 그만큼 경건하였고 기도에 전념하였던 영성가였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다시 말해 그는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후세에 길이 남을 찬송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6. 사가랴와 엘리샤벳의 삶이 들려주는 그들의 영성은 어떻게 정리할 수 있는가?

  사실 사가랴와 엘리샤벳의 영성은 요셉과 마리아보다 더 뛰어났으면 뛰어났지 그녀보다 작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마리아보다 더 중요한 하늘의 일들을 잘 알고 있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우선 이들이 뛰어난 영성가였다는 것은 그의 기본적인 삶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먼저 그것은 그들이 주님이 보시기에 의인이었고 주의 율법과 규례를 흠이 없이 실천해온 사람이라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기도는 매우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뛰어난 영성가였다는 사실은 이들 부부가 메시야가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된 사실을 제일 처음 알아본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 부부는 약한 마리아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해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이 자식이 없었던 것은 본인들에게 흠이 있어서가 가 아니라, 마리아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갓 임신을 했지만 약한 마리아의 믿음을 견고하게 해 주기 위해 이들 부부의 임신을 주님이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들이 임신 못한 것은 마리아로 하여금 이들 부부가 이미 많이 늙었고 또한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임신함으로 인하여, 마리아도 처녀이지만 임신할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한 도구로서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에 불행이 찾아왔을 때에 결코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를 간절히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실 일을 지금 준비시키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부부는 장차 태어날 메시야가 어떤 일을 수행할 것인지를 알았던 부부였다. 그렇다. 이들 부부는 대단히 믿음이 훌륭한 부부였던 것이다.

 

7. 나오며

  오늘날에 우리 성도들을 보면, 자신에게 불행이 닥쳐왔을 때에 그들이 어떻게 처신하는지를 살펴볼 수가 있다. 상당수는 그러한 환경이 주어진 것에 대해 원망하거나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또한 어떤 이는 그러한 환경이 자신에게 주어졌는데 불구하고 그것을 타개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그 사람을 통해 어떤 일을 이루시고자 그로 하여금 기도하라고 보낸 싸인인데도 그것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저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 안주해버리는 것이다. 아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더 이상 쓰시지 않는다. 이런 일로 인하여, 그들에게는 더이상의 영적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들을 향한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되지가 않는 것이다. 구약시대 한나의 경우를 살펴보라. 사무엘상 1장을 읽어보면, 그녀도 역시 엘리샤벳과 같이 임신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자꾸 두번째 부인이었던 브닌나가 자신을 놀리고 격동을 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때 한나는 어떻게 그것을 대처했는가? 브닌나를 내어쫓으라고 시켰는가? 아니면,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비관하며 슬퍼하고 그저 안주해버렸는가? 둘 다 아니었다. 그녀는 그때 여호와의 성막에 나아가서 기도하는 것을 택했다. 사실 그녀가 임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기도하라고 그렇게 막았던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장차 다윗에게 기름부을 선지자를 얻고 싶어하시는데, 그러한 선지자를 낳아줄 여인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차 태어날 사무엘이 끝까지 자신의 소임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너무나 필요한 것이었기에, 기도를 시키려고 하나님께서 한나의 임신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에게도 무엇인가가 막혔으면 기도로 뚫어야 한다. 엘리샤벳과 사가랴는 기도로 자신의 문제를 뚫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끝내 기도의 사람이 된 세례 요한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과 동시에 메시야를 낳게 될 마리아에게 견고한 믿음을 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지금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는지 둘러보라. 그러면 우리가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그 해답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2022년 12월 25일(주일)

정병진목사

 

2022-09-28(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4) 세례요한에 대한 재평가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의 증언(요3:22~36)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Oz78Yh09CfQ  [혹은 https://tv.naver.com/v/29537866 ]

 

1. 들어가며

  사람은 자신만의 선입관을 가질 수 있다. 이전에 들어왔던 것이 있고, 그것이 점차 고정화될 때에 그것은 이내 고정관념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볼 때에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아니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결국 사람에 대한 평가를 잘못 내리는데 일조한다는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세례 요한에 대한 평가를 다시 들여다 보려고 한다. 세례 요한은 정말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인가? 아니면, 그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천국에서 큰 자가 된 사람인가? 그리고 이어서 우리는 예수님의 탁월성 및 그분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볼 것인데, 예수님에 대한 반응에 따라 어떤 사람은 영생을 얻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 안에 머물기도 한다는 것을 함께 살펴볼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반응이 중요한 것이다. 

 

2.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왜 투덜대기 시작했으며 이때 세례 요한은 그것을 어떻게 해소시켰는가?

  어느 날이었다. 한 유대인이 찾아와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정결예식 곧 세례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가 논쟁이 붙었다(요3:24~25). 그러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그 문제를 자기의 스승에게 가서 물어보기로 했다. 그것은 스승인 세례 요한이 증언했던 이 곧 예수님께서 자기들과 떨어진 곳에서 세례를 주고 있는데, 사람들이 다 그리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괜찮은 것이냐고 물은 것이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은 만약 그것이 하늘에서 주어진 채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진행되고 있는 일이라고 말하였다(요3:27). 그리고 자신은 그리스도가 결코 아니며 또한 그분 앞에서 파송받은 채 있는 선구자라는 것을 증언해 줄 자가 바로 자기의 제자들이라고 말했다(요3:28). 그리고 자신은 예수님 때문에 기뻐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가는 것은 신부가 신랑을 찾아가는 것이므로, 그것을 보고 있는 자신은 신랑의 친구로서 매우 기쁘다고 하였던 것이다(요3:29). 그래서 그분은 더욱 더 커지고 그분의 사역은 증가되어야 하겠고 자신은 더 작아지고 자신의 사역은 감소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요3:30).

 

3. 요한복음에서는 세례요한을 어떤 사람이라고 언급하고 있는가?

  만약 우리가 요한복음에 나와있는 세례 요한에 대한 기사만을 읽는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세례 요한을 추켜세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과 관련지어서 자신이 누군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사명대로 자신의 일에 충성했던 이이자 겸손한 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은 '빛'이 아니라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고 하였으며(요1:6~9), 자신은 선지자 이사야의 말처럼 주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한 자라고 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은 그분의 신발끈을 풀기에도 합당하지 않는 자라고 말했으며(요1:23~27), 자신의 존재목적은 그리스도를 이 땅에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했다(요1:31). 그렇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이며,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았던 자이다. 예수님은 먼저 계신 이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주는 이라는 것을 세례 요한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땅에서 난 이로써 땅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요3:31). 그러므로 그는 자신은 점점 더 약해져야 하고 이제 예수님께서 더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4. 오늘날 세례 요한을 저평가하고 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런데 오늘날 교회 가운데 세례 요한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진짜로 세례 요한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 보다도 더 작은 자로 있는가? 나중에 천국에 가 보면 다 알겠지만 천국에서 세례 요한은 24장로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왜 세례 요한은 실제보다 더 작은 자로 평가받고 있는가? 그것은 아마도 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는 기사들 중에서 마태복음 11장과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죽음직전의 사건과 예수님의 평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11장이나 혹은 누가복음 7장에 의하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 때문에 실족한 사람처럼 나오고, 그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잘못 해석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1장에 의하면, 세례 요한이 죽기 전에 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내리신 평가가 나온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평가를 믿어야 한다. 그런데 이 평가에 대한 해석이 아주 분분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과연 세례 요한에게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셨는가? 그것은 크게 3가지다. 첫째, 세례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보다더 더 나은(뛰어난) 자라고 하셨다는 것이다(마11:9). 왜 그런가? 세례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 중의 마지막 주자로서, 메시야(그리스도)가 바로 이분이라고 소개했던 최종 주자였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고만 예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그 메시야가 바로 이분입니다"라고 소개한 마지막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 중에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던 것이다. 둘째,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최고라고 하셨다(마11:11a).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기 전에 먼저 그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가 세례 요한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일으켜진 채 없다고 하셨다(마11:11). 고로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최고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최고'라는 의미는 무슨 뜻인가? 그것은 죄인으로서 여인으로부터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 요한이 최고라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첫째로, 그는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따라 사가랴와 엘리샤벳 사이에 잉태되어 태어났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는 모태로부터 성령으로 충만케 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셋째로, 그는 어려서 광야로 보내져서 금식과 기도로 단련되고 영성으로 무장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려 30년동안 그는 광야에서 지냈다. 넷째로, 그가 30세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메시야의 오실 길을 준비했던 자였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그는 제사장과 선지자로서 예수님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예수님에게 안수를 통해 인류의 죄를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게 했기 때문이다. 여섯째로, 그는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셋째, 세례 요한이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는 예수님의 평가다(요11:11b). 이 말씀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아주 저급하게 평가하고 있다. 그를 천국에서 진짜로 가장 작은 자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5. 세례 요한이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세례 요한이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그것은 보통 2가지로 해석되어 왔다. 첫째는 세례 요한이 마지막에 가서 실족했기 때문에 천국에서 진짜로 가장 작은 자로 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니까 천국에 있는 성도들은 중에 실제로 세례 요한보다 더 작은 자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는 세례 요한이 마지막에 죽기 전에 실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자신의 제자를 예수님에게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질문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마11:3).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례 요한이 질문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지를 모르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요 자신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파송받아 온 자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몰라서 질문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는데 돌아보지 아니하는 것을 조금 섭섭해서 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 하나 잘못했다고 세례 요한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로 전락해버린 것일까? 둘째는, 세례 요한은 구약시대의 인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받은 마지막 주자였고, 그후부터는 구원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받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그가 가장 작은 자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과 가까이 있는가를 기준으로 본다면, 세례요한은 예수님 밖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구원받은 성도는 자기 안에 성령으로서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는 더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구약의 성도나 신약의 성도나 천국에 가면 하나님의 백성이기도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구약의 성도라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을 얻고, 신약의 성도라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는 것은 아닌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늦게 태어난 게 더 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니다. 천국에 들어가 보라. 구약의 성도라고 해서 신약의 성도보다 못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 대한 가장 바른 해석은 무엇인가?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는 이 말씀을 우리가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로, 이 말씀이 헬라어 원문에서는 어떻게 나와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천국에서 작은 자가 되거나 큰 자가 되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첫째로,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이렇다. "그런데 하늘들의 왕국 안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그이보다는 더 크다"이다. 먼저는 이 말씀이 앞 문장을 뒤집는 역접의 문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러나'가 아니라 '그런데'라고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앞의 정의도 맞는 것이지만 그런데' 다른 말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준이 '천국 안에서'라고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천국 안에 있는 성도들이라면 아직 이 세상에 살아있는 세례 요한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인생을 마칠 때 어떤 사람이 될른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가 그만 실족해버리면(걸려 미끄러지면) 그가 쌓아놓은 모든 것이 결국 물거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 안에 들어가 있는 성도들은 이 땅에 지금 살고 있는 어떤 성도들보다도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큰 자가 되고 작은 자가 되는 기준은 무엇인가? 즉 천국에서 받을 지위는 어떤 이유로 변동이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자. 사실 천국에서의 지위는 그 사람이 이 땅에서 행한 것으로 인해 결정되는데, 혹시 실수하여 잘못을 범했다고 할지라도 이미 하늘에 올라가 있는 것들은 결코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늘이 이미 쌓아둔 것이 허물어지는 유일한 경우가 있기는 있는데, 그것은 그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그 사람이 일평생 수고하여 쌓아둔 하늘의 것들은 절대 없어지거나 허물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일평생 모태로부터 성령이 충만하여 30년을 준비하여 예수님을 메시야로 드러내었고 소개한 일과 예수님이 세례받으러 오실 때까지 회개를 외치며 주님이 오실 길을 준비했던 모든 것은 다 하늘에 남아 있다. 마지막에 가서 그의 섭섭한 말 한 마디로 인해 그것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로 고스란히 하늘에 남아 있는 것이다. 사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예수께서 메시야인지 몰라서 "당신이 오실 그이입니까"라고 질문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옥에 갇혀 있는데도 자신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예수님에 대해 조금 섭섭한 마음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렇다. 세례 요한에 대한 평가는 그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는 미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리자면 그는 선지자들의 중의 최고이며, 여자가 낳은 자 곧 죄인이 낳은 자 중에 최고였지만, 아직 그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천국의 기준으로 볼 때 그는 아직 그들보다는 작은 자였던 것이다. 

 

6. 세례 요한에 대한 사도 요한의 평가는 어떠한가?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위로부터 곧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계시는 이'이신 예수님은 만물 위에 계신 분이시지만, 땅에서부터 있는 이이자 땅에 속해 있는 이인 세례 요한은 땅에서 말하고 있는 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말 자체부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그분이 스스로 지어내서 하신 말씀이 없다. 왜냐하면 그분이 하신 말씀은 당신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셨던 아버지께서 그에게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기에(요12:49~50), 그 말을 그대로 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아요 나를 보냈던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14:24)"이라고 하셨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의 레마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고 계셨던 것이다(요3:34).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에는 실수가 없다. 즉 예수님의 말씀에는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으며, 불필요한 말씀도 하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달랐다. 그는 땅에서 난 자이기 때문에 말에 실수가 있을 수 있고 섭섭함을 표현하는 말도 간혹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얼마나 그 사람 위에 부어주셨는가 하는 것에 달려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는 성령을 한량 없이 부어주셨지만, 세례 요한에게는 그렇게까지 부어주지는 않으셨던 것이다(요3:34).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는 심판의 권한 마저 주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셨지만 직접 사람이 되어 육체를 입으셨기 때문이요, 육신을 입어 인류의 죄를 속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차 우주의 종말이 찾아올 때,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실 이는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요5:22,27). 그리고 그분이 죽고 부활하실 때에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고(마28:18), 사망의 음부의 열쇠마저 가지셨다(계1:17~18). 

 

7. 사람이 영생을 얻기도 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떨어지기도 하는 것은 대체 무슨 이유에서인가?

  그렇다면 사람이 최종적으로 영생을 얻기도 하고 혹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머물러 있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그것을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으며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이다(요3:36). 즉 하나님의 아들을 계속해서 믿고 있는 자는 결국 영생에 이른다는 것이다. 참고로, 여기서 '영생'이란 '다음 시대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사람이 죽고 났을 때에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서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살고 있을 때에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우리 죄인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믿고 그분의 음성을 순종하며 산다면, 그는 틀림없이 죽어서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즉 다음 시대에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 땅에 살면서도 아들을 믿기를 거부하며, 그분의 음성에 불순종하며 산다면,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을 뿌리친 것이 되어 자신이 지은 죄의 댓가를 자신이 치러야 할 것이다. 또한 이전부터 이미 운명 지워있는 하나님의 진노를 마침내 받고 말 것이다. 즉 그런 자 위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계속해서 머물러 있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가 살아있을 때에 주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아야 하며, 그분을 믿어야 한다. 그것이 결국 한 사람을 영생과 하나님의 진노로 나누기 때문이다. 

 

8. 나오며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여전히 세례 요한에 대해서 아주 얕은 평가를 하고 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이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다. 세례 요한이 살아있는 당시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 그는 아직 죽지 않아서 그가 어떤 사람으로 천국에 들어갈 지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천국 안에 있는 성도들에 비해서 그는 아주 작은 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의 최종적인 상태는 우리가 죽을 때에 결정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는 날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뤄가야 한다. 죽기 전에 우리가 어떤 말을 하며 어떠한 믿음으로 죽게 될른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주인공이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쌓아놓은 모든 상을 다 얻게 될 것이다. 그러한 상에는 천국 집도 있을 것이고, 면류관도 있을 것이고,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지위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전부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준비하는 것이지, 우리가 하지 않은 일들로 인해 천국에 상이 준비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있음으로 인하여 감사해야 한다. 아직도 천국에서 받을 영원한 상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은 오직 예수님을 믿은 자가 얼마나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또한 충성했는가에 달려 있다. 그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한다거나 그분의 음성을 불순종하여 날마다 죄짓고 산다면 그는 죽을 때에 결코 영생을 보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아들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시대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면 즉시 회개하기를 바란다. 성령께서 어떤 것을 하라고 지시하면 즉시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천국에서 어떤 자가 되는지를 결정해주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천국에 들어갈 때에 과연 나는 칭찬을 받고 상급받는 자가 될 것인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떨어질 것인가를 결정해 주기 때문이다. 

 

 

2022년 09월 28일(수)

정병진목사

 

요한복음에서 서문(1:1~18)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선언하는 일종의 선포문과도 같다. 서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성을 공유하시는 하나님으로 나온다. 그분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요,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빛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께서 죄많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으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 땅에 자기자신의 처소를 얻으셨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성막으로 오신 예수님에게 나아가야 한다. 그때에 우리는 속죄의 은총과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다. 이 놀라운 신비가 오늘 말씀에 가득하다.

 

2022-06-29(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06)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에 대한 사도 요한의 위대한 선언(02)(요1:1~18)_2022-06-29(수)

https://youtu.be/kn22nybEroA   [혹은 https://tv.naver.com/v/27973893 ]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의 서문(요1:1~18)에는 어떤 말씀이 기록되어 있을까? 학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요한복음의 서문은 크게 2가지 것을 말씀하고 있다고 하겠다. 하나는 예수께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분은 육체를 입고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요한복음 서문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짧게 줄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의 서문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기록해야만 했던 것일까? 거기에는 장차 요한복음을 읽게 될 독자들이 어떤 영향으로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서다. 그것은 2가지였는데, 하나는 유대인에 의한 핍박이었고 또 하나는 영지주의자들에 의한 미혹이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총체적인 답변을 서문에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요한복음 서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지난 주에는 요한복음 1:1~3의 말씀을 통하여, '말씀(로고스)'의 선재성과 영원성 그리고 창조성을 살펴보았고, 그분이 곧 예수님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서 예수께서 가지고 계신 신성한 본성으로서 '생명'과 '빛'에 대해 다뤄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분의 성육신이 우리들에게 가져다 주는 축복으로서 '은혜'와 '진리(실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이렇듯 예수님에 대한 2가지 본성과 2가지 혜택은 요한복음을 읽는 모든 독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오늘도 제공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 

 

2.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서문에서 '말씀(로고스)'에 대해서 무엇을 선언하고 있는가?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서문의 첫 문장에서 의도적으로 '말씀(로고스)'에 대한 선언으로 요한복음을 시작한다. 이는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한 선포를 통해 유대인들의 갖은 핍박에 못 이겨 다시 유대교로 되돌아가려는 자들에게 대하여 올바른 신앙관을 제시하기 위함인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은 '여호와'라고 자신이 이름을 계시한 바로 그분 뿐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서 믿는 이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아버지와 자신은 하나'라는 말씀(요10:30)과 하나님을 가리켜 자신의 친아버지로 언급한 것(요5:18)에 대해서 예수께서 신성 모독죄를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어찌 하나님이 두 분, 혹은 세 분이실 수가 있겠느냐고 반문하였고 또한 어찌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실 수 있겠느냐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있던 이방지역에 사는 유대인 성도들은 이제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출입할 수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을 추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선재하신 말씀으로 하나님과 신성을 공유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알려 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서문의 첫 부분(1~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선재하신 말씀으로서 하나님 자신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3. 말씀(로고스)이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말씀이 하나님이신 이유를 1~3절의 말씀을 통하여 이렇게 말했다. 첫째, 태초에(시작 안에) 말씀이 있어 왔는데,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혹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에게서) 그리고 하나님으로 있어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1~2절). 즉 처음부터 말씀은 하나님으로 있어 왔던 것이라고 말했다. 둘째, 모든 것들(만물)은 말씀을 통하여 존재하게 되었으며, 말씀이 없이는 하나도 존재하게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3절). 고로 말씀은 만물의 창조주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의 통로요 대리자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사도 요한은 말씀이 곧 아버지라고 말하지는 않았다라는 것이다. 말씀이 아버지와는 구별되지만 하나님으로서 같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의 서문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이렇다.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또한 이 말씀은 모든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통로였는데, 이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것이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육신을 입기 전에 아들로 존재하고 있었는가 아니면 다른 하나님으로 존재하고 있었는가? 사도 요한은 분명히 말한다. 예수께서 성육신 하기 전에는 아들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아직 육신을 입지 않았던 그분을 누구냐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그분은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곧 홀로 아버지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18절). 그러므로 하나님은 태초부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교리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후에야 비로소 만들어질 수 있는 교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예수께서 성육신 하기 전에는 어떻게 계셨는가? 그분은 말씀으로 계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품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계신 것이다. 

 

4. 왜 사도 요한은 성육신 하기 이전의 예수님을 굳이 '말씀(로고스)'이라고 표현한 것인가?

  왜 사도 요한은 성육신 하기 이전의 예수님을 굳이 '로고스'('말씀')라고 표현하였던 것인가? 사실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인격체로 나타나기 이전에 그분은 말씀으로 있었다. 말씀이 인격을 입은 후 예수님은 사람이 되시어 비로소 아들이라는 존재로 탄생하셨다. 이러한 말씀의 성육신은 사실 서양 철학에서는 결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서양 철학에서도 우주 만물의 창조의 원리를 말한다. 그것을 그들도 '로고스(말씀)'라고 말한다. 하지만 말씀이 성육신하심으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요한이 '말씀'이라는 개념을 서양 철학에서 빌려왔다는 표현은 사실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도 요한은 선재하신 예수님을 가리켜 굳이 '말씀(로고스)'이라고 표현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요한이 유대인들을 생각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으로 창조되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창1:3). 특히 시편 기자는 하늘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지은 바 되었으며, 그것들의 만상(모든 군대=천사들)은 그분의 입 기운(루아흐=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또한 유대인들은 잠언 8장을 통하여, 지혜라는 것이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가지셨으며, 만세 전과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지혜가 세움을 입었고, 이미 났으며 또한 지혜가 하나님의 곁에서 창조자(장인)가 되어 매일 그분의 기뻐하시는 바가 되었다(잠8:22~31)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요한복음의 서문에 나오는 말씀(로고스)이 곧 창조 사역을 행하셨던 하나님과 같고,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이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는 표현과 유사하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만물의 창조의 대리인으로서 '말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5. 말씀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신성한 본질 2가지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말씀 안에는 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가? 사도 요한은 말씀 안에는 '생명'이 들어 있다고 언급하였으며, 이 생명이 세상 안으로 들어올 때에는 사람들에게 '빛'으로 들어오는 것이라고 했다(4~5절). 즉 말씀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신성한 본질은 곧 '생명'이요 '빛'인 것이다. 

  우선, 말씀 안에 들어 있는 '생명'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생명'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조에'라는 것인데, 이 생명은 '아버지의 생명'이라는 점에서 아버지만 가지고 있는 생명을 가리키며(요5:26), 이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점에서 계속해서 지속되는 생명을 가리키고(요3:16), 이 생명은 '부활 생명'이라는 점에서 사망이 파괴할 수 없는 생명을 가리킨다(요11:25~26). 사실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아들 되심으로 인하여 이 생명을 그에게 주어 있게 하셨다(요5:26). 그리고 예수께서 죽으신 후에는 본인이 생명 주는 영이 되심으로(고전15:45),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그 생명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믿는 이들에게 성령께서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심으로 사람들도 그 생명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영적으로 보면, 이 생명이 사람들에게 분배됨으로 인하여 사람은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생명은 창조된 창조물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생명은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요14:6).

  이어 사도 요한은 이 생명이 이 세상에 나타날 때에는 '빛'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이때 빛으로 나타난 분을 우리는 '예수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참고로 이때 물로 나타나는 분을 우리는 '성령'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요한은 세상에 들어오는 그 빛을 가리켜 '참 빛'이라고 했다(요1:9). 그것도 불충분한 빛이 아니라 완전한 빛, 참 빛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헬라어로 '참'(9절)이라는 헬라어 단어('알레디노스')는 거짓과 반대되는 개념('알레테스')으로서의 참 빛이 아니라, 뭔가 부족한 것, 불완전한 것, 부분적인 것에 대한 완전함으로서 참을 의미하는 단어('알레디노스')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말씀 안에 있는 생명과 그 빛의 관계를 이렇게 언급하였다.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어 왔다.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으로 있어 왔다. 그리고 그 빛이 어둠 안에 비추고 있다. 그러나 그 어둠은 그것을 이해하지(따라잡지, 이겨보지) 못하였다(요1:4~5). 그리고 "참 빛이 있어 왔다. 이런 그 빛은 세상 안으로 들어오고 있으면서 지금도 각 사람을 비추고 있다"(요1:9)고 했다. 그렇다. 보이지 않는 생명이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올 때 그것은 빛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리하여 어둠을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어둠'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빛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모든 이 땅의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빛으로 나아와서 빛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므로 빛으로 나아오기를 싫어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날까 두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자는 어찌하든지 빛으로 나아와야 한다(요3:19~21).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빛은 예수님 그 자체였다. 그러므로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자는 그 빛을 믿고 그 빛을 영접해야 한다. 그래야 빛의 아들이 될 수 있으며, 어둠 가운데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요12:35~36).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리켜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요8:12).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할 것이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 사실 어둠은 빛과 결코 서로 공존할 수는 없다. 그래서 어둠은 빛이 오면 그냥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둠은 결코 빛을 이겨보지 못할 것이다.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또한 요한은 생명이 물로도 나타날 수도 있는데, 그것을 가리켜 '성령'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생수(생명의 물)"라는 표현이나(요4:14), '생수의 강'이라는 표현(요7:38)이 곧 성령을 가리키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과거 창세기 강해(172강)를 통해서도 살펴보았지만,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물들 안에 '빛'과 '물'은 포함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빛도 결코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지구 안으로 들어온 것이요, 물도 역시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와서 지구 안으로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에 나오는 것 가운데 창조되지 아니한 2가지는 '빛'과 '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성령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긴 했어도 그분들을 결코 피조물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6. 세례 요한은 누구이며 어떤 목적으로 이 땅에 파송받아 온 것인가?

  사도 요한은 말한다.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받은 채 있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가 바로 '세례 요한'이라는 바로 그 선지자다(6절). 그는 빛이 아니며 그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였다(7~8절). 그럼, 그가 이 땅에 파송받아 온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빛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7절). 그래서 그는 광야의 소리가 되어서 외쳤다. "이 분은 내가 말했던 바로 그분입니다. 이 분은 비록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신 이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나보다 먼저 있어 왔기 때문입니다(15절)" 그랬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는 예수님보다 앞선 자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육신을 입고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7. 참 빛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런데 이 세상에 생명을 주려고 참 빛으로 그분이 오신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속한 땅인 유대 땅에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속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오셨다. 하지만 그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여 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더 이상 혈통과 육정과 사람(남자)의 뜻으로서가 아니라, 자기를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식들이 되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자식들'이란 출생으로 통한 자식을 가리키는 단어 '테크논(children)'이 쓰이고 있다. 참고로 이 단어는 출생을 통한 자녀 뿐만 아니라 양자로 삼아서 자식 삼는 단어로서 '휘오스(son)'가 쓰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생각했다.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으로서 하나님의 자식이 될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혈통을 가진 자들이었어도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배척을 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자식들을 얻는 방법으로 더 이상 혈통을 따르지 않겠다고 하셨다. 또한 육체의 뜻 곧 남여의 결합으로 자식들을 얻지도 않을 것이며, 사람(남자)의 씨를 통해서도 자식을 얻지 않겠다고 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식만을 얻겠다고 하신 것이다(12~13절).

 

8. 이천 년 전에 왜 말씀은 육체를 입고 사람이 되셨는가?

  드디어 2천 년 전에 하나님으로 계셨던 말씀이 육신을 입으셨다. 말씀이 육체가 되신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성육신'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이 땅에 생겼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분이 이 땅에 장막을 치셨다고 했다(14절). 여기서 '장막(성막)'이란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처소를 가리킨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당신 자신의 거주처로서 성육신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요14:9). 그리고 "나를 믿는 것은 나를 보내셨던 이를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요12:44). 예수 안에 아버지가 거하시게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있는 독생자와 같은 영광을 나타내게 되신 것이다(14절).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말씀이 육신을 입으심으로 그분을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2가지 은총이 베풀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육신하신 아들을 통하여 모든 인류는 이제 새롭고 놀라운 혜택을 입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은혜'와 '진리'(실제)가 인간에게 제공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14~18절). 여기서 '은혜'('카리스')라는 말은 값없이 제공되는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진리'('알레데이아')는 거짓에 대하여 참이라는 뜻과 허상과 가짜에 대해서 진짜라는 의미의 '실제'라는 뜻, 둘 다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당시 모세를 통해 율법을 받았다. 그런데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이들에게 제공된다(17절). 왜냐하면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은 '공의'와 '모형'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공된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은혜와 진리는 값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어지게 되었으며,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실제로 보게 해 주는 실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태초 이래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를 보고 살아남을 자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볼 수 있는 형태로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18절).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신 것이다(18절). 그러므로 우리는 신성만 갖고 계신 아버지되신 하나님을 영원히 볼 수 없겠지만 인성을 취하셔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가 가신 예수님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리지 아니할 수가 없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하나님을 볼 수도 없었을 것이며, 직접 가까이 나아가서 그분을 뵙고 만나고 만져 볼 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이 아니었다면 피조물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분 때문에 존재의 은총도 누리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분께 감사드리자. 그분만이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니까...

 

9. 나오며

  예수님은 누구시며 어떻게 존재하고 있었는가? 첫째로, 예수님은 육신을 입기 전에는 말씀으로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통하여 모든 만물을 지으셨다. 그러므로 만물이 말씀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을 입으심으로 우리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구약 시대에 예수님은 빛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이 세상에 들어올 때 그것은 빛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온전하고 완전한 참 빛으로 말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자는 그 빛으로 나오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좋아해서 빛으로 나아오지 않았으며, 빛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그 빛을 영접하는 자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을 주어 그 사람을 하나님의 자식들이 되게 하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자식이 되는 것은 혈통적으로 유대인이 아니어도 된다. 부모가 사랑해서 혹은 남자의 씨가 들어가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이 땅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둘째로, 예수님은 육신을 입어서 사람이 되셨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 주님은 2가지 은총을 쉼없이 부어 주신다. 하나는 은혜와 또 하나는 진리이자 실제다. 율법은 공의와 모형으로 제공된 것이지만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이자 실제로 제공된 것이다. 우리는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며,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실제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서문의 핵심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모든 흐름을 이끌어 간다. 

 

2022년 06월 29일(수)

정병진목사

 

2021-12-31(금) 송구영신예배 제목: 마음과 뜻을 바쳐 더 구하는 해(눅1:80)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vdMMiXiPKDA [혹은 https://tv.naver.com/v/24416570 ]

 

1. 들어가며

  오늘은 한 해를 마감하고 새 해를 준비하는 날, 주님과 함께 한 해를 마감하고 주님과 함께 새 해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각 교회들은 올 한 해 동안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 교회는 저마다 사명이 있다. 이 땅에 세워진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이다. 물론 모든 교회는 다 복음전파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교회나 개인이나 마찬가지다. 한 번 주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일을 위해 주님께서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사에도 일반 은사가 있고 특별 은사가 있듯이, 교회도 일반적인 사명이 있고 특별한 사명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탄명성교회는 어떤 사명이 주어져 있을까? 그래서 오늘은 송구영신예배를 맞이하여 동탄명성교회 교회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이며,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과연 어떤 준비가 필요하며, 그 준비의 핵심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동탄명성교회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인가?

  그렇다. 교회는 저마다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그 교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사명이 또한 있다. 그것을 가리켜 '특별 사명'이라고 한다. 이것은 개별 그리스도인에게서도 동일하게 적용이 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다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지만, 동시에 어떤 사람은 특별 사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 사명은 받은 자는 그 길을 가야 한다. 그렇다면 동탄명성교회는 어떤 사명이 주어져 있는가? 동탄명성교회는 2007년에 세워졌고 올 해로 15년차가 되었다. 일반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껏 달려왔다. 그러다가 2013년 10월경,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회개와 천국복음'이다. 그래서 만 7년을 회개와 천국복음을전파하면서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특별 명령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젠 그 사명에 올인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동탄명성교회에서 부여한 사명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천국복음' 전파인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그런데 천국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회개'가 필요하다(마4:17). 그래서 회개와 천국복음이라는 사명 타이틀이 완성된 것이다. 

 

3. 특별 사명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가?

  그렇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이나 모든 교회는 특별 사명을 가지고 있는가? 성경 전체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이나 모든 교회는 복음전파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교회의 사명은 담임목회자의 사명과 직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특별히 부여한 사명을 받은 목회자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구약시대에도 특별 사명을 받은 자들이 있었다. 에녹이나 노아가 그랬으며, 아브라함과 모세가 그랬다. 그리고 이사야나 예레미야 선지자도 그랬다.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사도 바울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특별 사명자들은 이미 하늘에서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다. 다시 말해 이 땅에서 하나님의 특별 사명을 부여받은 자들도 있지만 사명자들의 상당수는 하늘에서부터 그의 영혼이 이 땅에 보내어질 때부터 사명을 받고 이 땅에 어느 집안의 어떤 아이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명자들은 자신이 모태로부터 혹은 모태 이전부터 하나님의 택정하심을 입었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경우를 보자. 

렘1:5-7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그렇다. 이 세상을 살다간 사람들 중에는 사명자가 있었던 것다. 그렇다면 사명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그가 그냥 사명자가 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사명자는 그 사명을 감당할 만한 그릇으로 준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4.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에게 혹은 교회에게 부여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사명자는 준비되어야 한다. 사명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준비가 될 때 사명자는 그 사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명자로 태어났거나 혹은 이 땅에서 사명자로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쓰임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준비되지 못한 자는 결국 중도에 미끄러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등장하는 사명자들이 이 땅에 태어나서 어느날 자신이 사명자인 것을 깨닫고 그것을 준비하기까지 적게는 10년에서 많게는 40년을 준비한 사람들도 있음을 본다. 예를 들어, 노아는 정확한 기간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가 부름받은 이후 수 십 년동안 방주를 준비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75세 때에 부름을 받아 하나님께서 인정을 받기까지 25년동안 지속적으로 훈련을 받았으며, 야곱은 20년간, 요셉은 13년 그리고  다윗은 15년, 모세는 40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약의 사람으로서 세례요한은 적어도 25년간을 광야에서 지내며 메시야가 오실 길을 준비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도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나 그가 본격적으로 하나님께서 쓰임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10년을 수양을 쌓아야 했던 것이다. 

 

5. 세례요한은 예수의 초림을 준비하는 사명자였다. 그는 무엇이 준비되어야 했는가?

  사명자들 중에 세례요한은 메시야가 이 땅에서 활동하도록 그 길을 닦는 자로 보내심을 받은 자였다. 그는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제사장으로 쓰임을 받아야 했으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어릴 적에 광야에 보내져서 거기에서 기도의 훈련을 쌓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나이 30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었다. 그리고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요단강으로 데리고 가서 세례를 주었다. 하늘의 왕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죄씻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은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사명은 언제 주어진 것인가? 그것은 하늘에서부터다. 이미 메시야가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가 출현할 것이라고 B.C.700년경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을 하였으며(사40:3~5), 말라기 선지자가 B.C.430년경 예언을 한 채 있었기 때문이다(말3:1, 4:5~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집안에 그러한 영을 보낼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때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이던 사가랴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가정에 그 영을 보내주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어떤 영을 파송하신다. 그때에 어느 가정에 보내실 것인지를 정하시어 보내신다. 그런데 사무엘을 낳았던 한나와 엘가나 부부와 요한을 낳았던 사가갸와 엘리샤벳 부부처럼 하나님은 기도하는 가정, 경건한 가정을 보내신다. 아무래도 기도가 준비된 가정에서 태어나는 것이 사명자가 자신의 사명을 더 잘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반드시 그러한 것만은 아니다. 모두가 다 타락해 있을 때에는 좋지 못한 가문에도 보내실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수 있었고, 어릴 적에 구별된 지역에 보내서 경건훈련을 받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눅1:13-16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6. 사명자로 태어난 세례요한은 어떤 준비를 하였는가?

  그렇다면 사명자로서 이 땅에 태어났던 세례요한은 그가 쓰임받는 날까지 어떤 준비를 하였던 것일까? 누가복음 1:80에 의하면, 그는 3가지 준비를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첫째 그는 자랐다고 했다. 여기서 '자랐다'는 단어는 '아욱사노'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식물이 크듯 성장하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다. 그렇다. 하나님께로부터 쓰임받으려면, 누구든지 장성한 신체적인 나이까지 자라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구약시대의 경우를 보라. 어떤 남자가 군인으로 쓰임받으려면 적어도 20세까지 자라야 했다. 그리고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이도 그가 제사장으로 쓰임받으려면 30살까지 자라야 했다. 이는 사명자라도 신체적으로도 성장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어떤 사람이 신체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탄명성교회는 2007년에 개척되었다. 나이로 볼 때 14년이 흘러간 것이다.

  둘째, 그는 영이 강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헬라어('크라타이오')로 보면, 이는 영이 능력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다. 정말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받으려면 그는 반드시 영 안에서 성장해야 한다. 신체적인 성장과 더불어 영에 있어서도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육체적으로는 나이가 많아졌지만 영적으로는 나이를 먹지 않아 어린 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기도 한다. 만약 그런 자가 지도자가 된다면 그가 속한 공동체는 매우 힘들다. 바람 잘 날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명자는 영이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이 성장하게 굳세지고 강건해지고 능력있게 되려면 어떤 과정이 필요한가? 그것에는 최소한 2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죄 땜누에 영이 힘을 쓸 수가 없다. 회개해서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영권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울왕의 경우를 보라. 그는 자신의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거역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영이 자랄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는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었지만 시기질투심과 혈기분노의 감정을 이기지 못함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셋째, 그는 때가 찰 때까지 광야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광야에서 숨어지내다시피 한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하나님께서 그를 공식적으로 드러내는 날까지 광야(빈들)에 거주하면서 거기에서 훈련을 하였던 것이다. 사실 광야라는 개념은 구약시대로 치자면, 하나님의 백성이 애굽 땅을 탈출하여, 약속의 땅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 거주하는 장소였다. 척박한 땅이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자라야 했다. 과거에도 이야기했지만 '광야'라는 곳은 사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매우 살기 힘든 장소를 가리킨다(출16:3). 그런데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면 부족함이 없는 장소이기도 하다(신8:4). 무엇보다도 광야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 곧 천국에 들어갈 자와 못 들어갈 자를 선별하는 장소다(민14:22~23).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광야에 나왔으나 광야를 통과하지 못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전철를 밟지 말아야 한다(고전10:7,8,9,10). 즉 우상숭배하지 말고, 음행하지 말고, 시험하지 말고, 원망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를 통과했던 것이다. 그러자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기회가 주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7.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사명을 받은 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성실히 잘 감당했을 때에는 어떤 축복을 받게 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가 되어질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왕노릇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광야의 시험을 잘 통과하였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했다. 그것은 메시야를 이 땅에 소개해주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의 왕을 맞을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세례를 줌과 동시에 그가 바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증언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면서 예수님에게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던 것이다. 비록 그가 죽기 전에 약간의 시험에 들기는 했으나 그는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했기에 천국에서도 24장로들 중의 한 사람이 될 수 있었고, 지금도 천국에 있는 24개의 마을들 가운데 하나인 '세례요한'의 마을의 대표자가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신약의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 오직 4명만이 24장로 안에 포함되었는데 그중에 세례요한이 들어있다는 것을 실로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정말 잘 준비하였고 감당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8. 나오며

  2021년이 다 지나가고 2022년의 새 해가 밝아오는 시간이다. 한 해동안 나와 내가 속한 교회가 어떤 경주를 했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시간이 되었다. 동탄명성교회가 창립된 이후 가장 열심히 달려왔고 가장 놀라운 열매들이 나타났던 한 해가 2021년이 아니었나 싶다. 비록 환경은 코로나19의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회개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을 체험하였으며, 천국복음이 전파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이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탄명성교회가 이렇게 회개와 천국복음 전파를 한 해동안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것은 사명을 붙잡았고 사명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22년도에도 역시 사명에 충실한 교회가 되도록 힘차게 달려가야 한다. 특히 2023년에 시작하는 회개와 천국복음 연수소 건립을 위하여 힘차게 달려가야 한다. 회개와 천국복음 연구소는 초교파적인 선교단체로서, 회개와 천국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는 기관으로서, 3가지 사역을 감당할 것이다. 문서사역, 방송사역, 훈련사역이다. 책을 출판하여 보급하고(출판사도 만들 것이다), 방송을 통해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파할 것이다(작은 방송국 시설도 갖출 것이다). 그리고 주의 종과 평신도들을 위한 일주일간의 훈련 프로그램을 열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건물이 필요하고, 기도와 물질과 인적자원이 필요하다. 바울선교팀처럼 팀으로 사역이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오직 사명에 충성하고 사명에 목숨을 걸 때 하나님께서 그 일에 함깨 하시고 복을 줄 것이다. 벌써 기대가 된다. 

 

 

2021년 12월 31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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