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82) 왜 사도 바울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세례를 주지 않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는가?(행19:4~5)_2022-12-15(목)

https://youtu.be/9gaQT-a2zD8 [혹은 https://tv.naver.com/v/31818228 ]

1.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세례를 줄 때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는가?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성도들이 12명이나 있었다. 이들은 아볼로에 의해 전도된 자들이며 이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상태에 있었다. 그러자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가 자신의 뒤에 오시는 이를 믿기로 했으니 그분이 바로 주 예수님이신 것을 알려 준 뒤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행19:5).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성도들에게 세례를 베푼 것이다. 

 

2. 사도 바울은 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지 않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인가?

  오늘날 교회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 오늘날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곳은 거의 없다. 왜 오늘날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있는데, 사도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인가? 그런데 믿는 이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신 분은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마28:18~20).

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렇다.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때에는 오늘날처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다. 의미야 같은 것이겠지만 글자로 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 사도 바울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따라서 세례를 베풀지 않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에는 2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다. 둘째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처음 초기 교회에서는 과연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는가?

  사도행전에는 초기 교회가 어떻게 세례를 베풀었는지가 나온다. 그런데 교회적으로 세례를 베푼 경우는 총 4번 나오는데, 두 번은 베드로에 의해서 세례가 베풀어진 것이요, 한 번은 빌립 집사가 세례를 베푼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사도 바울이 세례를 베푼 것이다. 첫 번째는 사도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 3천 명에게 세례를 베푼 것이다. 아마도 베드로는 이때 11사도들과 함께 세례를 주었을 것이다. 이때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였다(행2:38). 그리고 두 번째는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성도들에게 세례를 베푼 것인데, 이때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행8:16). 그리고 세 번째는 다시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세례를 베푼 것인데, 이때도 역시 처음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였다(행10:48).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세례를 준 것인데, 이때는 빌립 집사와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 결국 초기 교회에서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고 할 수 있다. 

 

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오늘날 교회에서는 대부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분명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다(마28:19). 그런데 A.D.100년경 거의 모든 교회에서 통용되고 있던 교회의 가르침을 모아 놓은 책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디다케'라는 책이다. 이 책은 '12사도들의 가르침'이라고 불려지는데, 여기에 보면 세례를 어떻게 주는지가 나와 있다. 여기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살아 있는 물로 침례를 주어야 하지만, 만일 그러한 물이 없다면 다른 물로 침례를 주되, 찬물로 세례를 줄 수 있고, 그것이 없다면 더운물로 침례를 줄 수 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찬물이나 더운물도 풍성하지 않다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머리에 세 번 물을 부으라고 하였다. 그렇다. A.D.100년경에 교회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둘 다 의미는 같은 것이지만, 뉘앙스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한 것이 삼위일체적인 신관을 반영하는 표현이라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한 것은 한 분 하나님의 신관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요10:30에서도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으며,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도 말씀하셨고,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내 속에서 그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씀하심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을 늘 강조하셨기 때문이다. 고로 성부와 성자라는 용어를 잘못 사용하게 되면, 우리도 역시 '성모'라는 표현을 동일한 위치에 가져다 놓을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니 천주교에서는 A.D.451년 칼케돈 종교회의 이후 성모 마리아를 성부와 성자의 신격의 동일한 위치에 놓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를 '데오토코스' 즉 하나님을 낳으신,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칭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1964년 제2바티칸 회의에서는 아예 대놓고 '마리아가 하나님을 출산하였다'고 공식으로 규정한 바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마리아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낳은 것이다. 고로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인 것이지(행1:14, 요2:1,3, 막3:31), 결코 하나님의 어머니가 아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태를 빌려 쓴 것이다. 

 

5. 초기 교회는 세례를 줄 때에 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을 대신하여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인가?

  우리는 베드로 사도나 바울 사도가 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대신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첫째, 아들의 이름인 '예수' 속에 아버지의 이름인 '여호와'라는 이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예호수아, 예수아,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이다. 고로 굳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쓰지 않아도 예수라는 이름 안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들어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이름 대신에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신은 아버지의 이름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왔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요5:43).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인 여호와가 누군지를 분명하게 제자들에게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셨다(요17:6). 그리고 둘째, 성령의 이름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는데, 성령님께서는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친히 성령님을 가리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요14:26). 그렇다. 성령님은 아들이신 예수의 이름으로 오신 하나님이다. 고로 '예수'라는 이름 안에는 '여호와'라는 이름도 들어 있는 것이고, 성령님을 대신할 수 있는 이름도 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고로 초기 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던 것이다. 특히 '예수'라는 이름은 '아버지와 아들와 성령의 이름' 곧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을 지칭하는 것이었기에, 초기 교회에서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 수가 있었던 것이다. 

 

 

2022년 12월 15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성령은 누구신가(20) 성령세례란 무엇인가?(행1:4~8)_2020-06-11(목)

https://youtu.be/W0D8NeQxbQA [혹은 https://tv.naver.com/v/14234494 ]

 

 

  

1. 성령세례란 무엇을 가리키나요?

  "성령세례"란 한 마디로 "성령으로(혹은 성령 안에서) 세례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라는 뜻의 주안점은 "세례"라는 말에 있습니다. 고로 "세례"라는 의미가 어떻게 쓰이는 것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로 예수께서는 성령세례를 물세례와 견주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행1:5). 고로 우리가 성령세례의 확실한 의미를 이해하려면, "물세례"의 의미부터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물세례를 최초로 베푼 사람은 사실 세례자요한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회개하게 하기 위해 물로(물 안에서) 세례를 베풀었지만, 자신의 뒤에 오시는 이인 예수께서는 "성령과 불로"(성령 안에서 그리고 불 안에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외쳤습니다(마3:10~12). 그러므로 성령세례에 올바른 의미를 찾으려면, 물세례와 불세례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2. 물세례와 불세례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세례요한은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시만, 예수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마3:11). 여기서 "불"이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곧 죄를 용서받지 못한 불신자)를 태우거나, 알곡이 되지 못한 쭉정이를 태우는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불세례에서 "불"이라는 것은 태워버려 삼켜버리게 하는 도구를 가리킵니다. 마찬가지로, "물"은 사람을 잠기게 함으로서 물로 사람을 삼켜버리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물세례나 불세례는 둘 다 똑같이, 무엇인가를 사로잡아 삼켜버리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들입니다. 동시에 물세례나 불세례는 죄를 씻거나 태워버리는 도구로서 기능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물세례가 사람의 죄를 씻어내는 세례 혹은 사람을 물로 잠그는 세례를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성령세례도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인하여 사람의 죄를 씻어내는 세례의 일종이면서 동시에 성령에게 사람의 영혼이 사로잡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예수께서 언급하신 성령세례는 "아버지의 약속"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약속은 어떤 약속인가요?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임할 성령세례가 곧 "아버지의 약속"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하셨습니다(행1:4, 눅22:49).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성령에 관하여 어떤 약속을 해 주셨던 것인가요? 이것을 위해 구약성경에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장차 보내실 성령에 대해 2가지를 약속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첫째로, 장차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며, 둘째로, 사람들 속(안)으로 하나님의 영을 보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모든 사람에게 다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것은 요엘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약속입니다. 

욜2:28-30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그러므로 이 약속은 몇몇 사람들 위에 내려오셔서 역사하셨던 구약의 방식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모든 사람들 위에 성령이 부어질 것에 대한 약속입니다. 심지어 성령께서는 어떤 신분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육체 위에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둘째, 하나님께서는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 "속에(안으로)" 하나님의 영을 보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에스겔과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한 약속입니다. 

겔36:26-27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렘31:31-3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런데 에스겔과 예레미야 선지자에 의하면, 돌비과 두루마리(책)로 쓰여진 율법만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 언약을 자꾸 깨뜨리니, 장차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맺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날이 되면 하나님의 새로운 영(경륜의 영, 사람 속에 들어오시는 성령)을 사람 속에 집어넣어두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지켜 행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4. 성령에 관한 아버지의 약속은 어떻게 정리할 수 있나요?

  고로 성령(오순절이후 오실 경륜의 영)에 관한 아버지의 약속은 2가지 유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의 내주에 관한 약속입니다(겔36:26~27, 렘31:31~33, 요14:1~17). 하나님께서 언젠가 성령을 사람의 위에나 옆에 있지 않게 않고, 사람들 속에(안으로) 들어가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또 하나는 모든 사람들 위에 부어지는 성령으로서, 성령에 의한 세례를 약속하신 것입니다(요일2:28~29). 이는 신분이나 성별이나 나이에 차별없이 모든 육체 위에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A.D.30년 오순절날에 마가다락방에 경륜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오순절날 오신 성령은 사람 속에 내주하시러 오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부어지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날 내주하시는 성령에 의해 사람들은 거듭 태어나게 되고, 부어지는 성령에 의해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5. 이제 성령세례를 다시 정의해보십시오. 

  이제 성령세례를 다시 정의해본다면, 성령세례란 이미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예언들에 대한 성취로서, 성령의 내주와 더불어 성령께서 믿는 이들 위에 부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물세례를 받을 때에 어떤 경우에는 물이 부어지듯, 사람 위에 성령께서 부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때 사람은 대부분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하게 되며, 동시에 다른 여러가지 은사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다른 의미의 성령세례 곧 물세례의 의미처럼 옛사람이 죽고(물에 잠길 때) (물에서 올라올 때)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부활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성령세례(고전12:13)도 있음을 알고는 있어야 합니다. 

 

2020년 06월 11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예수께서 온 인류의  속죄제물이 될 수 있었던 3가지 조건은 무엇이었는가?(레4:1~12)_2020-03-17(화)

https://youtu.be/4XIQOI48a1k

[ 또는 https://tv.naver.com/v/12905134 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1. 예수께서는 언제 어디에서 무엇 때문에 돌아가셨나요(죽으셨나요)?

  예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유대의 예루살렘 성문밖 골고다언덕의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2. 예수께서 죽으신 것이 인류의 속죄를 위한 죽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했나요?

  예수께서 그날 돌아가신 것이 인류를 위한 속죄의 죽음이 되기 위해서는 3가지가 필요했습니다. 첫째, 속죄하는 장소가 정한 장소여야 했습니다. 둘째, 제물이 속죄제물로서 합당해야 했습니다. 셋째, 합법적인 집례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돌아가실 장소가 어디여야 했었는지는 어제 말씀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그곳은 반드시 성막(성전)이어야 했습니다. 아무데서나 속죄제물을 잡아서 제사드린다고 해서 속죄제물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택한 장소,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는 곳이어야 했고, 그곳은 성전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골고다언덕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9:1~12과 10:19~20의 말씀을 조합해보니,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치신 [걸어다시는] 성막(성전)이었습니다(요1:14, 2:19~21). 또한 그분이 골고다언덕에서 죽으신 것은 그 언덕의 지하(예레미야동굴)에 법궤가 놓여있었고 여호와를 위한 속죄제물의 피가 그곳에 떨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사셀을 위한 속죄제물로서 예수께서 버림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께서는 속죄제물이 되기 위한 가장 합당한 장소에서 정확하게 돌아가신 것입니다.

 

3. 예수께서는 어떻게 인류의 구원을 위한 속죄제물로서 합당하신 분이셨나요?

  예수께서 인류의 속죄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합당한 장소에서 돌아가셔야 했을 뿐만 아니라, 제물로서도 합당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류를 위한 속죄제물이 되려면 어떤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했습니까? 그것은 3가지입니다. 첫째는 제물로서 흠이 없어야 했으며, 둘째는 사람이어야 했으며, 셋째는 인류의 죄를 전가받으셔야 했습니다. 우선 첫째조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께서 합당한 속죄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흠없는 제물이 되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속죄제사로 사용되어지는 모든 제물들은 비록 속죄하는 사람 신분에 따라 각기 다른 제물을 드리기는 했어도, 다 흠이 없는 제물을 드려야 했기 때문입니다(레4:3,14,23,28). 여기서 "흠이 없다"는 표현은 죄가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태어나실 때부터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과 같은 분으로 태어나셨기에(벧전1:19), 그분에게는 죄된 본성도 없었으며(고후5:21), 또한 범죄하지도 아니하셨습니다(히4:15,요일3:5). "너희가 대속함을 받은 것은...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라(벧전1:18~19)",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려 하심이라(고후5:21)",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으시니라(요일3:5)"

 

4. 인류의 대속제물이 되기 위한 두번째 조건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둘째로, 그분은 사람이셔야 했습니다. 수송아지나 숫양같은 제물로서는 인류의 죄를 속죄할 수가 없는데, 이는 장차 진짜가 와서 죽을 것에 대한 예행연습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히10:1,4). 고로 사람(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이 범죄한 것을 짐승이 대속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감당해야 했습니다(창9:5~6). 고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셨는데(딤전3:16), 죄없는 속죄제물이 되시기 위해서(막10:45) 그리고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참 희생제물이 되시려고,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고로 예수님의 잉태는 남자(아담)의 씨가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실 수밖에 없었으며, 동정녀(처녀)인 마리아의 태만 빌려 태어나셔야 했던 것입니다.

 

5. 인류의 대속제물이 되기 위한 세번째 조건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셋째로, 그분은 인류의 대표자의 안수를 통해 죄를 전가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확실히 그렇게 해서 죄를 전가받으셨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세례요한의 외침을 통해서입니다. 예수께서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난 다음날 세례요한은 그분을 보자마자 성령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세례요한을 통해 죄를 전가받으셨기에 이제는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계시는 속죄양"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받은 사건이 어떻게 인류의 죄를 전가하는 의식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세례요한더러 "선지자보다 더 나은(위대한) 자"라고 칭했으며(마11:9), 그를 가리켜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라고 보냄받은 선구자(마11:10)라고 하셨고, 오리라고 예언된 엘리야(선지자의 대표)로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마11:14), 그는 율법과 선지자의 마지막 주자였으며(마11:13), 더욱이 그는 여자가 낳은 자들 중에 가장 큰 자였기 때문입니다(마11:11). 또한 그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 가운데 아비야 반열(24반차 중에 8번째 반차)의 제사장이었던 사가랴의 아들로 태어나셨기에 선지자요 선구자요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눅1:5).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인류의 죄를 넘기기에 가장 합당한 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은 어떻게 예수님에게 인류의 모든 죄를 넘길 수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세례의식을 통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죄된 본성도 없고 죄도 짓지 아니했기에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본 세례요한은 말리면서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에 [어찌]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3:1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세례요한이 당신에게 세례를 주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한 의를 성취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반드시 그렇게 해서 당신이 죄를 넘기지 않는다면 인류의 죄를 대속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례요한은 두 손으로 안수하여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온 백성의 속죄를 위한 대속죄일 제사 때에도 대제사장으로서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대표적인 아론이 속죄염소에게 두 손으로 안수하여 죄를 넘기듯이 말입니다(레16:21). 그리하여 죄를 넘겨받으신 예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시다가 3년반동안 흠없는 제물인 것을 인정받으신 후에, 절기의 규례에 따라 유월절 저녁 해질녘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속죄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이제 우리는 그분을 믿음으로 그분이 치룬 속죄의 은총을 누구나 다 받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내일은 예수께서 과연 대제사장으로서 합당하신 분인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2020년 03월 17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이 사흘만에 희생제물을 바치고 절기를 지켰던 홍해도강사건에 대한 신약의 보증(출3:18)
https://youtu.be/9IbW8y2IfxI


1. 하나님께서 모세더러 바로왕을 찾아가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로 사흘길을 가서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킬 것이라(출3:18, 5:1)"고 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로 사흘길을 광야로 가서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켰던 것일까요?


2. 출애굽기를 읽어보면, 이스라엘백성들이 출애굽후 사흘길에 어디에 도착했는지 그리고 정말 사흘만에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켰는지를 알려주는 본문을 찾기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모세가 바로에게 이스라엘백성을 내보내 줄 것에 대한 구실로 그냥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버리고는 넘어갑니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말씀이 실제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건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사건은 무엇이었을까요?


3.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은 정말로 사흘길을 간후에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것은 홍해를 건넌 후 미디안광야(바알스본)에서 춤을 춘 사건이 있기 때문입니다(출15:19~21). 먼저, 사흘길을 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출애굽후 라암셋을 출발하여 숙곳에 진을 치고 광야 끝 에담을 거쳐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바닷가에 진을 친 것이 삼일째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어린이와 노약자포함 200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이 도보로 삼일만에 그곳까지 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정상적인 도보속도로 갔다면 라암셋에서 비하히롯(오늘날의 누웨이바)까지는 적어도 20일에서 한 달 정도 걸리는 코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출19:4의 말씀처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시내산으로 인도하였(출19:4)"습니다. 이동에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제1차 집결지였던 "숙곳"에서 제2차 집결지였던 "광야 끝(가장자리) 에담(경계)"까지 하나님께서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이동시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에담부터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안내함으로 밤낮으로 이동하게 하여 결국 사흘만에 비하히롯(골짜기들의 입구)까지 가게 했습니다. 둘째, 거기서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켰다는 말은 히브리어원문을 보면 금방 이해가 갑니다. 여기서 제사를 드렸다는 말은 히브리어 원문으로 희생제물을 바쳤다는 뜻이며, 절기를 지켰다는 말(하가그)은 그들이 춤을 추며 즐거워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스라엘민족이 430년동안 애굽에 있을 동안에는 단 한 번도 절기(유월절,무교절,초실절...등등)같은 절기를 지킨 적이 없습니다. 지금 만들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삼일삼야를 이동하여 비하히롯에 도착한 것입니다. 출발은 1월 14일 날 밤이었습니다. 그때 애굽에서 탈출했기 때문입니다. "이 밤은 그들을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출12:42)" 그리고 삼일 뒤 홍해를 건널 때도 밤이었습니다. 그들은 새벽녘이 되었을 때 비하히롯 건너편의 미디안의 바알스본에 도착했습니다(출14:20~23). 그런데 새벽녘이 되어 홍해도강이 끝나자, 애굽군대가 곧바로 홍해 안으로 진격해 들어왔고 그때 하나님께서는 물을 합쳐버렸습니다. 그러니 애굽군대가 사흘만에 바쳐진 희생제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의 모든 여인들은 선지자 미리암을 따라 노래를 부르며 손에 소고를 잡고 춤을 추게 되었던 것입니다(출15:19~21). 한 마디로, 이스라엘민족이 홍해를 건너 미디안광야에서 절기를 지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흘만에 홍해를 건너 미디안의 육지로 올라오는 동안 절기를 지킨 것에 대한 신약의 보증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에 영적인 의미는 대체 무엇입니까?


4.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여 사흘만에 절기를 지킨 것에 대한 사건에 대해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정확히 성취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에 대한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사도바울은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백성이 사흘만에 홍해를 건너 육지로 올라온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거쳐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건과 일치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께서는 구약시대 요나선지자의 예언처럼, 삼일삼야를 땅속에 있다가 부활하셨습니다(욘1:17,2:10, 마12:40). 참고로 여기서 사흘(3일)이란 바로 부활의 숫자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백성의 장로들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당신의 직접적인 예언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유월절양으로 죽으셨고(유월절) 무덤에 묻히셨다가(홍해를 건너) 3일후에 초실절에 부활하신 것입니다(미디안의 육지에 상륙함).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것을 일컬어 그리스도인들의 세례와 같다고 해석했으며(롬6:4~6), 구약시대에는 아브라함이 칭의를 받은 후 할례를 행했던 것과 똑같다고 해석했습니다(골2:11~12).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월절양이신 예수님을 믿고 칭의를 얻은 후, 세례를 받아 홍해를 건너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이 홍해를 건넌 것은 죄된 본성을 가진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장사지낸 것이요, 육지로 올라간 것은 부활하여 새 생명으로 살게 된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 사건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칭의를 얻은 후에(창15:6), 비로소 할례를 행함으로 죄된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창17:10~11,골2:11~12). 그렇다면 지금 나는 과연 세례로 말미암아 옛사람을 장사지내고, 새 생명으로 살고 있습니까?


5. 문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할례 곧 세례를 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예표적으로 분명히 홍해를 건넜고 육지로 나왔지만, 실제로는 옛사람의 본성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노예로서의 근성, 원망불평하는 근성을 홍해에 수장시키지 못하고 건넜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외형적으로는 홍해를 건넜지만 속으로는 죄된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나왔기에 광야에서 다 엎드려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탄마귀(바로왕)을 좇아 살던 옛사람을 완전히 장사지냅시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조성된 새 사람으로 살아봅시다. 그렇지 아니하면 출애굽1세대처럼 죽는 날에 영원한 멸망으로 내리달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2018년 10월 8일(월)
정병진목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