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에서 서문(1:1~18)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선언하는 일종의 선포문과도 같다. 서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성을 공유하시는 하나님으로 나온다. 그분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요,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빛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께서 죄많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으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 땅에 자기자신의 처소를 얻으셨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성막으로 오신 예수님에게 나아가야 한다. 그때에 우리는 속죄의 은총과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다. 이 놀라운 신비가 오늘 말씀에 가득하다.

 

2022-06-29(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06)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에 대한 사도 요한의 위대한 선언(02)(요1:1~18)_2022-06-29(수)

https://youtu.be/kn22nybEroA   [혹은 https://tv.naver.com/v/27973893 ]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의 서문(요1:1~18)에는 어떤 말씀이 기록되어 있을까? 학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요한복음의 서문은 크게 2가지 것을 말씀하고 있다고 하겠다. 하나는 예수께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분은 육체를 입고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요한복음 서문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짧게 줄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의 서문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기록해야만 했던 것일까? 거기에는 장차 요한복음을 읽게 될 독자들이 어떤 영향으로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서다. 그것은 2가지였는데, 하나는 유대인에 의한 핍박이었고 또 하나는 영지주의자들에 의한 미혹이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총체적인 답변을 서문에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요한복음 서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지난 주에는 요한복음 1:1~3의 말씀을 통하여, '말씀(로고스)'의 선재성과 영원성 그리고 창조성을 살펴보았고, 그분이 곧 예수님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서 예수께서 가지고 계신 신성한 본성으로서 '생명'과 '빛'에 대해 다뤄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분의 성육신이 우리들에게 가져다 주는 축복으로서 '은혜'와 '진리(실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이렇듯 예수님에 대한 2가지 본성과 2가지 혜택은 요한복음을 읽는 모든 독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오늘도 제공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 

 

2.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서문에서 '말씀(로고스)'에 대해서 무엇을 선언하고 있는가?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서문의 첫 문장에서 의도적으로 '말씀(로고스)'에 대한 선언으로 요한복음을 시작한다. 이는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한 선포를 통해 유대인들의 갖은 핍박에 못 이겨 다시 유대교로 되돌아가려는 자들에게 대하여 올바른 신앙관을 제시하기 위함인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은 '여호와'라고 자신이 이름을 계시한 바로 그분 뿐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서 믿는 이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아버지와 자신은 하나'라는 말씀(요10:30)과 하나님을 가리켜 자신의 친아버지로 언급한 것(요5:18)에 대해서 예수께서 신성 모독죄를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어찌 하나님이 두 분, 혹은 세 분이실 수가 있겠느냐고 반문하였고 또한 어찌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실 수 있겠느냐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있던 이방지역에 사는 유대인 성도들은 이제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출입할 수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을 추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선재하신 말씀으로 하나님과 신성을 공유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알려 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서문의 첫 부분(1~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선재하신 말씀으로서 하나님 자신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3. 말씀(로고스)이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말씀이 하나님이신 이유를 1~3절의 말씀을 통하여 이렇게 말했다. 첫째, 태초에(시작 안에) 말씀이 있어 왔는데,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혹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에게서) 그리고 하나님으로 있어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1~2절). 즉 처음부터 말씀은 하나님으로 있어 왔던 것이라고 말했다. 둘째, 모든 것들(만물)은 말씀을 통하여 존재하게 되었으며, 말씀이 없이는 하나도 존재하게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3절). 고로 말씀은 만물의 창조주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의 통로요 대리자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사도 요한은 말씀이 곧 아버지라고 말하지는 않았다라는 것이다. 말씀이 아버지와는 구별되지만 하나님으로서 같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의 서문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이렇다.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또한 이 말씀은 모든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통로였는데, 이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것이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육신을 입기 전에 아들로 존재하고 있었는가 아니면 다른 하나님으로 존재하고 있었는가? 사도 요한은 분명히 말한다. 예수께서 성육신 하기 전에는 아들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아직 육신을 입지 않았던 그분을 누구냐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그분은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곧 홀로 아버지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18절). 그러므로 하나님은 태초부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교리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후에야 비로소 만들어질 수 있는 교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예수께서 성육신 하기 전에는 어떻게 계셨는가? 그분은 말씀으로 계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품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계신 것이다. 

 

4. 왜 사도 요한은 성육신 하기 이전의 예수님을 굳이 '말씀(로고스)'이라고 표현한 것인가?

  왜 사도 요한은 성육신 하기 이전의 예수님을 굳이 '로고스'('말씀')라고 표현하였던 것인가? 사실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인격체로 나타나기 이전에 그분은 말씀으로 있었다. 말씀이 인격을 입은 후 예수님은 사람이 되시어 비로소 아들이라는 존재로 탄생하셨다. 이러한 말씀의 성육신은 사실 서양 철학에서는 결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서양 철학에서도 우주 만물의 창조의 원리를 말한다. 그것을 그들도 '로고스(말씀)'라고 말한다. 하지만 말씀이 성육신하심으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요한이 '말씀'이라는 개념을 서양 철학에서 빌려왔다는 표현은 사실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도 요한은 선재하신 예수님을 가리켜 굳이 '말씀(로고스)'이라고 표현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요한이 유대인들을 생각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으로 창조되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창1:3). 특히 시편 기자는 하늘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지은 바 되었으며, 그것들의 만상(모든 군대=천사들)은 그분의 입 기운(루아흐=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또한 유대인들은 잠언 8장을 통하여, 지혜라는 것이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가지셨으며, 만세 전과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지혜가 세움을 입었고, 이미 났으며 또한 지혜가 하나님의 곁에서 창조자(장인)가 되어 매일 그분의 기뻐하시는 바가 되었다(잠8:22~31)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요한복음의 서문에 나오는 말씀(로고스)이 곧 창조 사역을 행하셨던 하나님과 같고,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이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는 표현과 유사하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만물의 창조의 대리인으로서 '말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5. 말씀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신성한 본질 2가지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말씀 안에는 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가? 사도 요한은 말씀 안에는 '생명'이 들어 있다고 언급하였으며, 이 생명이 세상 안으로 들어올 때에는 사람들에게 '빛'으로 들어오는 것이라고 했다(4~5절). 즉 말씀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신성한 본질은 곧 '생명'이요 '빛'인 것이다. 

  우선, 말씀 안에 들어 있는 '생명'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생명'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조에'라는 것인데, 이 생명은 '아버지의 생명'이라는 점에서 아버지만 가지고 있는 생명을 가리키며(요5:26), 이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점에서 계속해서 지속되는 생명을 가리키고(요3:16), 이 생명은 '부활 생명'이라는 점에서 사망이 파괴할 수 없는 생명을 가리킨다(요11:25~26). 사실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아들 되심으로 인하여 이 생명을 그에게 주어 있게 하셨다(요5:26). 그리고 예수께서 죽으신 후에는 본인이 생명 주는 영이 되심으로(고전15:45),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그 생명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믿는 이들에게 성령께서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심으로 사람들도 그 생명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영적으로 보면, 이 생명이 사람들에게 분배됨으로 인하여 사람은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생명은 창조된 창조물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생명은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요14:6).

  이어 사도 요한은 이 생명이 이 세상에 나타날 때에는 '빛'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이때 빛으로 나타난 분을 우리는 '예수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참고로 이때 물로 나타나는 분을 우리는 '성령'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요한은 세상에 들어오는 그 빛을 가리켜 '참 빛'이라고 했다(요1:9). 그것도 불충분한 빛이 아니라 완전한 빛, 참 빛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헬라어로 '참'(9절)이라는 헬라어 단어('알레디노스')는 거짓과 반대되는 개념('알레테스')으로서의 참 빛이 아니라, 뭔가 부족한 것, 불완전한 것, 부분적인 것에 대한 완전함으로서 참을 의미하는 단어('알레디노스')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말씀 안에 있는 생명과 그 빛의 관계를 이렇게 언급하였다.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어 왔다.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으로 있어 왔다. 그리고 그 빛이 어둠 안에 비추고 있다. 그러나 그 어둠은 그것을 이해하지(따라잡지, 이겨보지) 못하였다(요1:4~5). 그리고 "참 빛이 있어 왔다. 이런 그 빛은 세상 안으로 들어오고 있으면서 지금도 각 사람을 비추고 있다"(요1:9)고 했다. 그렇다. 보이지 않는 생명이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올 때 그것은 빛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리하여 어둠을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어둠'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빛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모든 이 땅의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빛으로 나아와서 빛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므로 빛으로 나아오기를 싫어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날까 두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자는 어찌하든지 빛으로 나아와야 한다(요3:19~21).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빛은 예수님 그 자체였다. 그러므로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자는 그 빛을 믿고 그 빛을 영접해야 한다. 그래야 빛의 아들이 될 수 있으며, 어둠 가운데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요12:35~36).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리켜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요8:12).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할 것이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 사실 어둠은 빛과 결코 서로 공존할 수는 없다. 그래서 어둠은 빛이 오면 그냥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둠은 결코 빛을 이겨보지 못할 것이다.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또한 요한은 생명이 물로도 나타날 수도 있는데, 그것을 가리켜 '성령'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생수(생명의 물)"라는 표현이나(요4:14), '생수의 강'이라는 표현(요7:38)이 곧 성령을 가리키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과거 창세기 강해(172강)를 통해서도 살펴보았지만,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물들 안에 '빛'과 '물'은 포함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빛도 결코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지구 안으로 들어온 것이요, 물도 역시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와서 지구 안으로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에 나오는 것 가운데 창조되지 아니한 2가지는 '빛'과 '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성령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긴 했어도 그분들을 결코 피조물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6. 세례 요한은 누구이며 어떤 목적으로 이 땅에 파송받아 온 것인가?

  사도 요한은 말한다.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받은 채 있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가 바로 '세례 요한'이라는 바로 그 선지자다(6절). 그는 빛이 아니며 그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였다(7~8절). 그럼, 그가 이 땅에 파송받아 온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빛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7절). 그래서 그는 광야의 소리가 되어서 외쳤다. "이 분은 내가 말했던 바로 그분입니다. 이 분은 비록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신 이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나보다 먼저 있어 왔기 때문입니다(15절)" 그랬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는 예수님보다 앞선 자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육신을 입고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7. 참 빛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런데 이 세상에 생명을 주려고 참 빛으로 그분이 오신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속한 땅인 유대 땅에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속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오셨다. 하지만 그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여 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더 이상 혈통과 육정과 사람(남자)의 뜻으로서가 아니라, 자기를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식들이 되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자식들'이란 출생으로 통한 자식을 가리키는 단어 '테크논(children)'이 쓰이고 있다. 참고로 이 단어는 출생을 통한 자녀 뿐만 아니라 양자로 삼아서 자식 삼는 단어로서 '휘오스(son)'가 쓰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생각했다.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으로서 하나님의 자식이 될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혈통을 가진 자들이었어도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배척을 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자식들을 얻는 방법으로 더 이상 혈통을 따르지 않겠다고 하셨다. 또한 육체의 뜻 곧 남여의 결합으로 자식들을 얻지도 않을 것이며, 사람(남자)의 씨를 통해서도 자식을 얻지 않겠다고 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식만을 얻겠다고 하신 것이다(12~13절).

 

8. 이천 년 전에 왜 말씀은 육체를 입고 사람이 되셨는가?

  드디어 2천 년 전에 하나님으로 계셨던 말씀이 육신을 입으셨다. 말씀이 육체가 되신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성육신'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이 땅에 생겼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분이 이 땅에 장막을 치셨다고 했다(14절). 여기서 '장막(성막)'이란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처소를 가리킨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당신 자신의 거주처로서 성육신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요14:9). 그리고 "나를 믿는 것은 나를 보내셨던 이를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요12:44). 예수 안에 아버지가 거하시게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있는 독생자와 같은 영광을 나타내게 되신 것이다(14절).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말씀이 육신을 입으심으로 그분을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2가지 은총이 베풀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육신하신 아들을 통하여 모든 인류는 이제 새롭고 놀라운 혜택을 입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은혜'와 '진리'(실제)가 인간에게 제공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14~18절). 여기서 '은혜'('카리스')라는 말은 값없이 제공되는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진리'('알레데이아')는 거짓에 대하여 참이라는 뜻과 허상과 가짜에 대해서 진짜라는 의미의 '실제'라는 뜻, 둘 다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당시 모세를 통해 율법을 받았다. 그런데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이들에게 제공된다(17절). 왜냐하면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은 '공의'와 '모형'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공된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은혜와 진리는 값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어지게 되었으며,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실제로 보게 해 주는 실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태초 이래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를 보고 살아남을 자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볼 수 있는 형태로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18절).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신 것이다(18절). 그러므로 우리는 신성만 갖고 계신 아버지되신 하나님을 영원히 볼 수 없겠지만 인성을 취하셔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가 가신 예수님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리지 아니할 수가 없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하나님을 볼 수도 없었을 것이며, 직접 가까이 나아가서 그분을 뵙고 만나고 만져 볼 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이 아니었다면 피조물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분 때문에 존재의 은총도 누리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분께 감사드리자. 그분만이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니까...

 

9. 나오며

  예수님은 누구시며 어떻게 존재하고 있었는가? 첫째로, 예수님은 육신을 입기 전에는 말씀으로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통하여 모든 만물을 지으셨다. 그러므로 만물이 말씀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을 입으심으로 우리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구약 시대에 예수님은 빛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이 세상에 들어올 때 그것은 빛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온전하고 완전한 참 빛으로 말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자는 그 빛으로 나오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좋아해서 빛으로 나아오지 않았으며, 빛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그 빛을 영접하는 자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을 주어 그 사람을 하나님의 자식들이 되게 하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자식이 되는 것은 혈통적으로 유대인이 아니어도 된다. 부모가 사랑해서 혹은 남자의 씨가 들어가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이 땅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둘째로, 예수님은 육신을 입어서 사람이 되셨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 주님은 2가지 은총을 쉼없이 부어 주신다. 하나는 은혜와 또 하나는 진리이자 실제다. 율법은 공의와 모형으로 제공된 것이지만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이자 실제로 제공된 것이다. 우리는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며,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실제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서문의 핵심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모든 흐름을 이끌어 간다. 

 

2022년 06월 29일(수)

정병진목사

 

2022-06-22(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05)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에 대한 사도 요한의 위대한 선언(요1:1~18)_2022-06-22(수) https://youtu.be/eeJmrAZF9BA [혹은 https://tv.naver.com/v/27593552 ]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이 책의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을 믿어서 영생을 얻도록 특별히 기록한 네 번째 복음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 자신인 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특별히 이 책은 유대인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는 유대계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헬라인들로부터 미혹을 받고 있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쓴 책이다. 그러기에 누군가 이 책을 조심스럽게 읽는다면 그는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며,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이 땅에 성육신하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됨으로서, 그 삶을 유대인들의 핍박과 헬라적 영지주의의 이단의 미혹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것이다. 오늘은 우리가 다룰 본문은 지난 번에 이어 요한복음의 서론 부분이다. 특히 요한복음 1:1~18의 말씀을 시간 되는대로 하나씩 하나씩 다루려고 한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아예 처음부터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실상에 대해서 선언하고 있는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2. 요한복음의 서론은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요한복음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첫 부분은 서론(1:1~18)이고 마지막 부분은 결론부(21:1~25)이다. 그리고 중간에 본론부(1:19~20:31)가 있다. 본론부는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부분(1:19~12:50)은 7가지 표적을 중심으로 기록된 예수님의 3년간의 공생애를 다루고 있고, 뒷부분(13:1~20:31)은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밤에 있었던 일들(세족식, 고별 연설, 대제사장적 기도)과 그분의 붙잡힘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읽어 보면 아시겠지만 서론 부분(1:1~18)은 매우 신학적인 주제들로 가득 차 있다. 그만큼 이 편지를 읽을 독자들에게 상당한 어려움이 발생하였던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귀납법적인 구조가 아니라 연역적인 구조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말씀이 아주 잘 정리되어 쓰여 있기 때문이다. 고로 요한복음 서론에서는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당하고 있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신성을 공유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며, 헬라인들에게 영지주의의 미혹을 당하고 있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육체를 가지신 분이신 것을 알 수 있게 도와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의 서론 부분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발견할 수 있으며 그분을 영접하는 자가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문제는 과연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어야 하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이 누구시며, 어떻게 영생을 얻는지에 대한 대답이 이 요한복음 서론에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서론 부분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군지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리고 이 서론에 기록된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3. 요한복음의 서론에서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요한복음의 서론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가? 그것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그분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라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즉 예수님의 신성과 더불어 예수님의 인성을 신학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첫째로, 예수님의 신성은 여기서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 그것은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 나온다. 이 첫 번째 신학적 선포의 핵심은 예수께서는 모든 만물이 있기 전에 말씀으로 선재하고 있었으며, 그 말씀은 하나님으로 있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세례 요한보다 먼저 계신 분이자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은 이 세상에 들어와서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참 빛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생명이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을 것이며, 은혜와 진리의 풍성함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 이러한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말씀은 어떤 의도로 기록된 것일까? 그것은 오직 여호와만 유일한 하나님이고, 예수님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헬라파 유대인이었다가 예수님을 믿었다는 이유로 유대인들로부터 출교당하는 등의 강경 조치를 당해 흔들리고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핍박을 이겨내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둘째로, 예수님의 인성은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 그것은 9절부터 18절에 나온다. 여기에서 두 번째 신학적 선포의 핵심은 예수께서 육체를 입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들처럼 흙이 육신이 되신 것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어떤 의도로 이러한 두 번째 신학적인 정의를 내린 것일까? 그것은 헬라 철학에서 기원한 영지주의자들이 예수께서는 절대로 육체를 입으신 적이 없다고 하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함이다. 헬라주의적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신성은 인정하나 인성을 부인하고 있었다. 즉 예수님은 절대로 사람이신 적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께서 육체를 입지 않으셨기에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그분이 죽으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대신 달려 죽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어떤 이들은 예수라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라는 신성한 분이 들어갔다가 십자가를 지기 전에 떠났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면 어떤 결론이 나오게 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그분의 피흘림의 속죄 사역이 아무 쓸모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굳이 사람이 되셔야 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의 결론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값을 대신하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게 된다면 그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속죄의 죽음을 무효화시키는 격이 된다. 그러면 아담의 후손으로서 죄 가운데 태어나는 어느 누구도 죄사함을 받을 수 없을 것이며, 예수께서 하늘에 준비하고 있는 새 집 곧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는 틀림없이 사람으로 오신 것이 맞고 사람으로 사셨다는 것을 요한복음 서론에서 언급한 것이다. 

 

4.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어떻게 말씀(로고스)으로 선포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장막을 치신 것으로 정의한다(요1:1,14).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이 세상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선재하고 계셨던 하나님이신 것을 증언한다. 그것은 첫째로, 태초에 말씀이 있어 왔는데, 그 말씀은 하나님에게서 있어 온 것이며, 그 말씀은 하나님으로 있어 온 것이라고 언급한다(요1:1~2). 즉 예수께서 육신을 입기 전에 곧 모든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그분은 말씀으로서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하나님과 함께 말씀으로 있어 왔다고 증거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둘째로 모든 만물이 그 말씀을 통하여 있게 되었다고 증언한다(요1:3). 그러므로 모든 만물은 그 어느 것 하나라도 그 말씀이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했다. 다시 말해 모든 만물의 창조자가 곧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14절에 가서 그 말씀이 육신을 입었고 그분이 이 세상에 장막을 치셨는데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정의한다(요1:14,17). 그러므로 예수님은 결코 피조물이 아니며 만물의 창조자로서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을 증언한다. 한편, 이러한 영적 비밀을 알고 있었던 사도 바울도 그의 말년에 기록한 골로새서를 통하여,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자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만물의 으뜸이자 원형)이시다는 것과 모든 만물 곧 하늘들과 땅에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천사들)이 다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고, 그분을 통하여 창조되었으며,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증거하였다(골1:1~15~16).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세상 어떤 철학에서도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인격체가 되었다는 표현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헬라 철학에서는 만물의 기원을 '말씀(로고스)'에서 찾고 있지만 이러한 로고스가 육신을 입고 인격체가 되었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헬라 철학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이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말씀이 육신을 입어 예수님이 되셨다는 것은 오직 여호와만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야말로 나타난 하나님이신 것을 증언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5. 나오며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한 분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육신을 입으시기 전에 그분은 말씀으로 계셔 왔다. 모든 만물은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그리고 그 창조물의 최고의 아담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담에게 영원히 사는 생명이요 죽음도 이기는 생명을 주려고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를 가져다가 심어 놓으셨다. 하지만 거짓과 어둠의 아버지인 마귀의 말을 듣고 아담은 타락하였다. 그때부터 이 세상은 마귀가 세상 임금이 되어 죄를 지은 인간들에게 사망 권세를 휘두르며 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거짓과 어둠에 휩싸여 사망에 빠져서 허우적대며, 하나님의 실제를 보지 못하고 있는 인류를 딱하게 여기시고는 직접 사람이 되는 절차를 밟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에게서 나와 말씀으로 계셨던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들어오신다. 그리고 인류의 죄값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다. 그래서 어둠과 사망에 둘러싸인 인류에게 빛이 어둠을 이길 수 있으며, 생명이 사망을 이긴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주님께서 치르신 속죄를 믿고 주님을 영접하는 자에게 영생을 허락하신다.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는 날에는 그 영혼을 천국에 마련된 새로운 처소로 들이신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실제로 누리게 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생명이자 빛이며, 은혜를 주시는 분이자 진리와 실제를 보여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2022년 06월 22일(수)

정병진목사

 

 
 

성탄절은 어떤 날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류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새로운 방식을 취하신 날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날에 영이 아니라 사람이 되시는 새로운 방식을 취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인류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새로운 방식을 취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그리고 이렇게 새로운 방식을 취한 일로 인하여 우리 인류가 누리게 될 혜택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무려 7가지나 된다. 2021-12-25(토) 성탄축하예배 제목: 임마누엘 성육신이 가져다 준 7가지 놀라운 축복(마1:2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W0cJDBx4UlQ [혹은 https://tv.naver.com/v/24312797 ]

 

 

1. 들어가며

  오늘 성탄절날이다. 성탄절은 우리 주 예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것을 기념하는 기독교 최대의 절기 가운데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아들로 오심으로 인하여 절망에 빠져 있고 마귀에게 매여 종노릇하던 우리 인생들이 드디어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분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하신 일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요, 또한 그분께서 그 일을 다 감당하시고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19:30).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했던 바로 그 복을 받아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받게 되는 놀라운 축복이 있다면 그것 7가지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 7가지 축복을 받아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성탄절을 맞이하여 그분의 성육신이 들려주는 놀라운 영적인 의미들을 다시 한 번 새겨보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2. '임마누엘'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마태복음의 기자는 태어난 아기 예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언급했다(마1:23). 그런데 이것은 마태복음의 기자가 지어낸 말인가? 아니면 이미 있어온 예언의 말씀을 인용해서 한 말인가? 그것은 이미 있어온 이사야서의 예언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그때는 B..C.733년경으로 그때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그렇다. 그것은 이사야가 알려준 하나님의 아들의 새로운 이름이었언 것이다. 그렇다면 태어날 아기의 이름인 '임마누엘'이라는 단어는 어떤 뜻을 가졌는가? 그것은 "임+마누+엘'의 합성어로서, "하나님 우리와 함께"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신 것을 알려주는 귀한 이름이 바로 '임마누엘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땅에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하지 않았는가? 아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이래로 하나님께서는 줄곧 인간들과 함께 하고 계셨다. 특히 당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과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도, 야곱에게도, 모세에게도, 여호수아에게도 줄곧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라는 뜻은 대체 무슨 뜻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던 방식이 아닌, 새로운 종류의 함께 하심으로 함께 하시겠다는 뜻이다. 이는 이전에는 없던 방식이었는데 이제는 새로운 이 방식으로 함께 하시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럼, 이전에는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인류와 함께 하셨는가? 그때에는 영으로 함께 하셨다. 그런데 이제 시작하는 새로운 방식은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인간이 되어 오심으로 함께 하시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던 방식이다. 이것을 우리는 '성육신'의 방식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사람의 육신을 입고 오시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3.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전과는 다른 함께하심의 방식을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인가? 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인가? 왜 부족함이 없는 전능자께서 피조물인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려고 하시는 것인가? 그 이유와 목적은 마태복음 1장 21절에 나와 있다. 

마1:21 [그리고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칭]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부터]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그렇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죄를 지은 인간들을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으면 그것으로 다 된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는 이유는 그렇게 하심으로 인간의 죄값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그분이 인간 대신 피흘려 죽기 위함이었다(히9:22, 롬6:23). 그러므로 예수께서 공생애를 마치시던 날, 드디어 유월절에 우리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신 피흘려 돌아가신 것이다. 그리고 돌아가시던 날 십자가에서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 이루었다"(요19:30). 이것은 그분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야 해야 했던 일을 다 이루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분은 숨을 거두셨다. 그리하여 인류가 지은 죄값을 다 지불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죄를 많이 지은 자라 할지라도 그분을 믿고 회개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자기의 죄를 용서받을 수가 있게 되었다. 동시에 사망에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로부터 놓임을 받게 되었으며(히2;14), 하나님에게터 발을 형벌에서도 놓임을 받게 되었다(살후1:8)

 

4.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오셨음을 확인해주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다시 말해 모든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우리 인류는 어떻게 알아 볼 수가 있는가? 혹시 누군가가 말하기를, "내가 바로 그 사람이요"라고 말했을 때에 우리는 "당신은 아니요"라고 어떻게 말할 수가 있는가? 다시 말해, 그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와 함께 하기 위해 육신으로 오신 분인지를 어떻게 알아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육신되신 그분을 우리가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의 장치를 마련해 주셨다. 그것은 아무나 흉내를 낼 수 없는 그러한 종류의 방식이었다. 그것은 바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방식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야 출생 예언의 핵심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 하나님께서 인류와 함께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임을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성경기록을 볼 때, 탄성을 질러야 한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신화적인 인물로 만들기 위하여, 초기 기독교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아니다. 처녀가 아들을 잉태한 방식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독특한 방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누가 되었든 자신이 바로 약속된 그분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야, 너는 가짜거든... 왜 그러는 줄 알아! 하나님이 사람되실 때에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야"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에만 해도 30명 이상의 하나님과 재림예수가 있다고 하는데, 그들이 모두 가짜인 것은 그들은 모두 처녀가 잉태하여 태어난 아들을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처녀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 곧 그분이 원래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증거하신 것을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살펴볼 수가 있다. 그분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신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특히 그분이 죽었다가 3일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분만이 하나님이신 것을 확실하게 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5.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방식을 새롭게 바꾸셔야 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 인간들과 함께 하시는 방식을 이렇게 새롭게 바꾸셔야 했는가? 그것은 조금 전에도 살펴보았지만 먼저는 첫째로, 인류의 속죄를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방법을 취하지 아니하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류 가운데에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을 수 있는 속죄양이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담 이후에 그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다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흠없는 속죄제물이 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되신 이유는 흠없는 속죄제물이 되시어 우리 대신 죽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놓아주기 위해서 그러한 방식을 취하신 것이다. 마귀는 사실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직전까지 하늘에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실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오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했는데, 이 소식을 마귀 자신도 듣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들이 있었다는 것을 하늘에서 한 번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인지를 아닌지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40일을 금식하신 예수님을 찾아가 시험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그때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고 예수님께 시험한 것이다. 마귀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가 누군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예수님도 먹으면서 살고 있고, 화장실도 가야 하고, 또한 먹지 않으니 그만 피골이 상접해있다는 것을 보고서는 자기가 얼마든지 그를 처치할 수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을 꼬드겨서 예수님을 죽게 만든다. 그러나 사탄마귀는 오직 죄를 지은 사람에게만 사망권세를 사용할 수가 있었는데, 죄없는 예수님에게 그것을 사용하고 말았다. 그는 사실 예수님만 죽여 없앤다면 세상은 자기 것이 될 줄을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러한 불법적인 행동으로 인하여 사망권세를 빼앗기게 되었고 결국 예수믿는 자들 위에 더이상 왕노릇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류와 함께 하시는 방식을 '사람의 방식'으로 바꾸셨던 것이다. 

 

6. 임마누엘 성육신이 가져다 주는 놀라운 축복 7가지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 그분이 우리 인류와 함께 하신 방식을 성육신의 방법으로 바꾸심으로 인하여 우리 믿는 이들이 입게 된 놀라운 은총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려 7가지나 된다. 여기서 굳이 7가지라고 말하는 것은 '7'이라는 숫자가 이 땅에서의 완전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첫째, 아무도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을 직접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있을 당시에 살았던 제자들은 직접 예수님을 만져볼 수도 있었고, 그분의 육성을 그들의 귀로도 들을 수가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요일1:1).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성육신하신 것은 그때 당시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셋째, 영의 세계가 물질세계로 침투해 들어온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신 것이다. 사실 영의 세계는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영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심으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성육신의 사건은 모든 인류가 영의 세계가 실재하고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해 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첫째 아담이 이루지 못했던 일을 이제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께서 해 내심으로 우리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을 수가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아담은 범죄로 인하여 이 세상에 죄가 들오오게 하였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오게 했는데, 둘째 아담이자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으로 죄값을 지불하셨고, 그때 사망도 함께 멸하셨으며 또한 하늘에서 오르실 때에 당신이 가진 생명을 해방시켜 주셨다. 그래서 그분은 생명주는 영이신 성령을 통하여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해주셨다.  한 마디로 그분이 죽고 부활하심으로 그분은 생명주는 영이 되셔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분배하심으로 그분을 믿는 자들이 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을 수 있게 하신 것이다(고전15:45). 

  다섯째,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값을 지불하셨기에 이제는 그분을 믿고 회개하기만 하면 그분이 이루신 속죄의 효력을 누구든지 다 받을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분의 성육신이 아니었다면 사실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고 그분 앞에 자신의 죄를 토설하면 누구든지 다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다. 

  여섯째, 마귀에게 눌려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안겨주었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세상 임금은 마귀다(요12:31,14:30,16:11). 마귀는 지금도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인 이 지구와 음부와 둘째 하늘에서 여전히 왕노릇하고 있는 존재다. 단지 사람들이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인류에게 죄짓게 만들고, 그들이 죽은 다음에는 자기들이 있는 곳으로 끌어가는 악한 세력을 예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 한 마디로 그들을 십자가에서 무장해제키심으로 누구든지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마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또한 귀신들을 내어쫓을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아 그들과 함께 영적으로 싸워서 승리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일곱째, 마지막으로로 이제는 더이상 다른 구원자를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예수께서 그때 오시지 않았더라면 우리 인류는 구약의 백성들처럼 마냥 인류의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가짜 사기꾼들에게 농락을 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그분이 오셔서 속죄하는 일과 생명주는 일 그리고 마귀를 멸하는 일을 다 행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 이외에 다른 구원자가 있는 것인지 찾아볼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는 다른 메시야를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고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을 입으셨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그분 이외에 다른 구원자가 있다고 말하는 자들이 다 사기꾼임을 금방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또 다른 종류의 구원자를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2천년전에 이 땅에 오셨다가 가셨던 그분만을 다시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7. 그분이 이루신 일을 우리가 경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임마누엘로 성육하신 것을 우리가 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즉 그분이 이미 성육신하심으로 인하여 이루어놓으신 혜택을 누리고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럴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4가지 조치를 취해야 한다. 

  첫째, 예수께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예수께서 바로 만세전 전에 계셨던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없이는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죄사함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요, 그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가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그분이 이루어놓으신 일들을 효과있게 하시는 성령을 선물로 받아야 한다. 성령이란 믿는 자들에게 오시는 영으로서, 예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신다. 그리고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에 하셨던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셋째, 그분이 이루어놓으신 것을 체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서 마귀의 포로로부터 탈출해야 하며,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 그리고 가난과 질병과 저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믿는 자라도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이러한 기적은 체험되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를 통하여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루어놓은 일들을 내 것이 되게 해야 한다. 넷째, 마지막으로 그분이 해놓은 일들을 남들에게도 전해 줌으로 하늘에서 받을 상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이 누구시며 주님이 무엇을 해 놓으셨는지를 전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고 마귀로부터 벗어나게 도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틀림없이 하늘에서 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천국집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며, 여러가지의 면류관으로 주어지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신분과 계급으로 드러날 것이ㅊ다. 

 

8. 나오며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은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를 잘 모른다. 보통 아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 정도가 많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더 무지한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성탄절은 착한 사람들에게 산타클로스 아저씨가 선물주는 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은 그저 그런 평범한 날이 아니었다. 이날은 인류 역사에 가장 거룩한 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날 영의 세계에서 존재하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형태로 자신을 드러낸 날이었기 때문이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보여주신 날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방식을 새롭게 제시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날로 인하여 우리 인류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되었으며, 그분이 속죄양으로 우리 대신 죽으셨고 그분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새로운 경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에 그분이 이루어놓으신 속죄의 은총을 누리게 될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역사하고 있는 악한 영들까지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분 때문에 모든 것이 다 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요, 그분 때문에 우리가 죽는다 하여도 하늘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려졌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 때문에 하늘에서 영원히 누리게 될 엄청난 상급에 대해서 듣게 되었고 그것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2021년 12월 25일(토)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놓치기 쉬운 부활신앙의 절반은 무엇인가?(고전15:12~19)_2020-04-15(수)

https://youtu.be/UtPMGQ39XZc [혹은 https://tv.naver.com/v/13368687 ]

 

1. 부활신앙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가요?

  부활신앙이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앙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쁜 희망의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또한 죽음을 이길 수는 생명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부활의 기쁜 소식과 더불어 또 하나의 좋은 소식을 우리에게 주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인류를 위한 속죄의 죽음이었다는 것을 증거해주는 표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부활의 절반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한 속죄의 혜택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은 어떻게 되어서 예수님의 죽음이 인류를 위한 속죄의 죽음이었음을 알려주는 표적이 되는가요?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이긴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께서 실수가 있어서 죄를 하나라도 지었다면 예수께서는 결코 사망을 이기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인데, 죄가 하나라도 있으면 다시 살아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다시 살았다는 것은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에 전혀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음은 자신의 죄로 인한 죽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럼, 그분의 죽음은 어떤 죽음이었습니까? 그것은 인류의 속죄를 대신하는 대속의 죽음이었던 것입니다(고전15:3,고후5;15,살전5:10). 그렇지만 만약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했다면 예수님의 죽음이 과연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음이었는지, 아니면 인류의 속죄를 위하여 대신 죽은 죽음이었는지 사실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하여, 그분의 죽음은 자신의 죄로 인한 죽음이 아니었으며, 반대로 그분의 죽음은 인류의 속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던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왜 죽으셨나요?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그분이 죄가 있어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인류의 속죄를 위하여 대신 죽는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우리 죄들을 위하여 이 땅에 일부러 오셨고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죽음은 대신 죽는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인류가 지은 모든 죄들을 속죄하기 위한 죽음 곧 댓가를 지불하는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6:23).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15:3에서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대신하여] 죽으시고"라고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죽음(고후5;15)이었기 때문입니다.

 

4.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에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어떻게 말씀하셨나요?(마20:28)

  예수께서 공생에 기간에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가? 그때 예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대속물"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뤼트론"이라는 낱말로서 "속전(ransom), 몸값"을 뜻합니다. 우리 인류가 범죄하여 마땅히 우리가 죽었어야 했는데, 예수께서 오셔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가 죽을 죽음에 대한 몸값을 지불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었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사탄마귀도 죄인들을 자기의 것으로 주장할 권리를 박탈당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대신 죄값을 지불해버렸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께서 대신 죽기 위해서 하신 일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류를 살리기 위하여 하신 것은 대신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창조주께서 죽기 위하여 피조물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죽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일컬어 하나님의 "성육신"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요4:24) 사실 죽으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죽으시기 위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 인류의 죄값을 지불하셨다고 알고 있을 것입니다(요3:16). 그것은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이해수준을 맞추기 위한 표현이라는 것도 알아야 합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따로, 아들 따로, 성령 따로 존재하고 있었던 하나님인데 그분들 중에서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 성육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것이 성육신인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면, 이 땅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계시지만 한 분이시다)이 맞는 표현이지만, 천국에 가면 하나님은 한 분만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아들이 오셨다고 말해도 맞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고 해도 맞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사건입니다(딤전3:16). 그러나 사람이 그것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을 아시고,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이 땅에 보내셨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내가 하나님이다"라고 말했다면 그때 즉시 돌에 맞아 죽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지도 못한 채 죽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한사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아들을 통하여 속죄의 은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지 않았다면 우리 인류의 속죄는 없었을 것이며, 그러면 죄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영원한 멸망을 받아서 둘째사망의 해를 받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직접 사람이 되셔서 그 죄값(몸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새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며 우리 편에서 볼 때에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끝까지 잘 지켜내어 지은 죄들에 대한 모든 용서를 받고 꼭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0년 04월 15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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