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예레미야강해(19) 진짜 주의 종 선지자는 어떤 경우에 가장 고통스러워하는가?(렘20:1~18)_2023-02-28(화)

https://youtu.be/TTVT9pmQXBY [또는 https://tv.naver.com/v/33751117]

 

1. 예레미야서 20장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

  예레미야서 20장은 예레미야서의 본론부 있는 제1부(2~25장) 12개의 단편 예언들 가운데, 제8예언의 뒷부분에 해당한다. 제8예언(렘18~20장)은 18장부터 20장까지로서, 그중에 18장은 그 유명한 '토기장이'의 비유가 나온다. 이는 개인과 민족의 쓰임(용도)에 관하여 절대주권을 갖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비유 말씀이다. 그리고 19장에는 토기장이가 옹기를 파쇄함으로서 회개를 거부하는 남유다의 철저한 파괴가 예언되어 있다. 그리고 20장에는 성전 총 감독자인 제사장 바스훌에 의한 예레미야의 핍박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동료들을 심판하실 것에 대한 예언(렘20:1~6)과 더불어 홀로 핍박과 조롱거리가 되어 버린 예레미야의 탄식(렘18:7~18)이 기록되어 있다. 

 

2. 예레미야는 왜 성전에서 험한 꼴을 당하게 되었는가?

  B.C.597년경 남유다의 여호야긴왕의 통치 말기였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과 함께 힌놈의 골짜기의 도벳 사당에 가서 토기장이의 옹기를 깨뜨리면서, 한 번 깨뜨린 토기는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렇듯 남유다의 멸망의 확실성을 실물적으로 보여 주었던 예레미야는 이제 성전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도시에 이러한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성전 총 관리 감독자인 제사장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잡아다가 폭행을 하고 그의 목에 차꼬를 채워 밤새도록 성전문에 묶어 두게 된다. 그렇다면 예레미야가 이처럼 험한 꼴을 당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성전에 와서 남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성전의 파괴와 멸망 곧 재앙을 예언했기 때문이다(렘19:14~15, 20:8). 

 

3. 핍박당하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무엇이었는가?

  이렇듯 죄없는 예레미야가 성전 총 관리 감독자인 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에게 끌려가 모욕을 당하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3가지 말씀을 들려주신다. 첫째, 바스훌의 이름이 '마골밋사빕'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했다(렘20:3). 바스훌이라는 이름의 뜻이 '자유를 가져다 주는 자'였는데, 마골밋사빕이라는 이름의 뜻 곧 '사방으로부터의 두려움(공포)'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알려 주신 것이다. 이는 바스훌이 남유다에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하고, 오히려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사방으로부터 공포를 가져오게 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둘째, 남유다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칼에 죽고 나머지는 바벨론으로 옮겨가서 거기에서 죽을 것이며, 예루살렘의 모든 귀중품들이 약탈당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렘20:4~5). 셋째, 바스훌과 바스훌의 거짓 예언을 지지했던 그의 친구들까지 전부다 포로로 바벨론에 잡혀가서 거기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했다(렘20:6). 이처럼 하나님은 참된 주의 선지자를 핍박하고 거짓 예언을 한 바스훌에게 공의로운 심판을 집행하신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과 입을 함부로 놀려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4. 제사장과 그의 동료들로부터 심한 모욕을 받고 조롱거리의 대상이 되었던 예레미야는 어떤 탄식을 하게 되는가?

  그런데 성전의 총 관리 감독자인 바스훌과 여러 동료들로부터 심한 모욕을 받고 조롱거리가 되었던 예레미야는 이제 탄식하며 기도한다.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주께서 자신의 사정을 감찰해 달라고 하는 기도를 드린 것이다. 그러면서 차라리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면서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호소한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는 그것을 내팽개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탄식 중에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바로 참된 주의 종 선지자의 마음이다. 

렘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며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5. 진짜 주의 종은 어떤 경우에 가장 고통스러워하는가?

  진짜로 하나님께서 쓰임받는 참된 종은 무엇에 가장 고통스러워할까? 자신이 받는 핍박과 조롱거리가 고통스러운 것일까? 예레미야는 자신의 동료였던 제사장이자 선지자였던 바스훌에게 심한 모욕적인 언사와 처벌을 받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바스훌이 아무런 잘못이 없는 자신을 처벌한 것에 대해 고통스러워했던 것일까? 아니다. 그는 자신의 동료 종들을 보면서 고통스러워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남유다의 백성들을 바른길로 인도하라고 세워준 지도자들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참된 음성을 듣지 못하여 가짜로 예언하고 있었고 가짜를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은 비단 그때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때처럼 가짜를 예언하고 가짜를 가르치는 주의 종들이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아니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에 성도들은 주의 종들이 선포하는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이 결코 틀린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 넓은 길을 가르치는 주의 종을 따라가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에 대한 책임을 성도 본인에게만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가르치는 지도자들의 잘못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 주의 종들이겠지만 그들의 말속에는 거짓이 들어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말로 성도들을 가르쳐 그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게 함으로, 결국 한 명의 성도라도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주의 종이 있다면, 그 책임은 목회자가 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하늘의 별따기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거짓말을 하는(거짓 예언하고 거짓된 말씀을 선포하는) 주의 종들은 결단코 새 예루살렘 성 안에 있게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들은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 넣게 되든지(계21:9), 아니면 새 예루살렘 성밖에 두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계21:27, 22:15). 고로 우리 성도들은 자신에게 말씀을 증거하는 목회자가 끝까지 참된 진리만을 선포하는 목회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로 지원해야 할 것이다. 목회자가 전하는 말씀은 곧 나의 생명과도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2023년 02월 28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예레미야강해(08) 진정한 회개의 조건 4가지는 무엇인가?(렘3:6~6:30)_2023-02-15(수)

https://youtu.be/ediVq8AnBAk [또는 https://tv.naver.com/v/33254109]

 

1. 예레미야가 회개를 촉구하는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예레미야가 남유다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했던 목적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것은 과연 남유다를 멸망함으로부터 건져내는 것이었을까? 아니었다. 예레미야가 남유다를 향해 회개를 촉구했던 것은 이미 예고된 멸망을 돌이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남유다 백성들 중에서 다만 몇이라도 건질 자를 건지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바라시지만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지는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모든 이들이 자신의 자유의지로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에 참여하기를 진정 바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남유다 백성은 선지자를 통해 외치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2.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 회개에 동참하여 구원얻을 사람은 대체 얼마나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 회개에 동참하여 과연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그것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극소수일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회개를 촉구했어도, 진정 예레미야의 외침을 듣고 회개에 동참하여 구원얻는 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그 숫자를 언급하셨는데, 그것은 성읍에서 한 명 정도요 족속 중에 둘 정도라고 말씀하셨다(렘3:14). 이 숫자가 회개의 외침을 듣고 구원얻을 자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 중에 보좌에 앉을 144,000명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천국에 들어가는 숫자가 그 숫자만큼 적을 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런데 성읍에 한 명, 족속에 둘 이라는 말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마도 144,000명에 포함될 숫자를 말하는 것같이 보인다. 

 

3.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12가지 단편 예언들 중에 2번째 단편 예언의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서에 말씀하신 단편 예언들이 앞부분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2장부터 25장에 수록되어 있다. 그것들 중에서 제1예언은 2:1~3:5까지 말씀이며, 제2예언은 3:6~6:30까지의 말씀을 가리킨다. 전후 문맥으로 볼 때, 제1예언은 요시야왕이 종교개혁을 시도하기 전에 주신 말씀으로 보이며, 제2예언은 요시야왕이 종교개혁(B.C.622년)을 단행한 이후에 주신 말씀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제2예언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북이스라엘을 답습한 남유다의 심판에 관한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남유다 백성들에게 진실한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남유다 백성들이 비록 요시야의 종교개혁에 동참하였으나 그들의 동참은 아주 피상적이었기 때문이다. 

 

4. 남유다는 종교개혁 중에도 어떤 것을 답습하고 있었는가?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자매'라고 하셨다. '언니'가 '북이스라엘'이고 '동생'이 '남유다'라고 하셨다(렘3:6~7). 그런데 북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다가 그만 회개하지 못하고 나라가 망해버렸다. 그때가 B.C.722년 남유다의 13대 히스기야왕 때다. 이때 북이스라엘은 19대 호세아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앗수르의 살만에셀의 침입을 받아 나라가 멸망했다. 그런데 남유다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의 모습을 자기들도 역시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남유다는 언니 북이스라엘의 영적 음행을 그대로 따라가고 말았다. 높은 산 위의 푸른 나무 아래에서 우상들을 섬기면서 그들에게 절하며 향을 피웠고 음식을 바쳤기 때문이다(렘2:20, 3:6).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을 가리켜 '변절자'라고 말씀하셨고, 이혼 증서를 써서 그들과 이혼한 관계라고 언급하셨다(렘3:6,8). 그런데 이것을 지켜본 남유다도 역시 똑같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따라가고 있었다. 남유다도 북이스라엘과 똑같이 '돌'과 '나무'와 더불어 영적 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여기서 '돌'이라 함은 남성신으로서, '풍요'를 상징하는 '바알신'을 가리키고, '나무'라 함은 여성신으로서, '다산'을 상징하는 '아세라신'을 가리킨다. 

 

5.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회개의 4가지 조건을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남유다가 주님께 돌아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4가지를 언급하셨다.

  그것은 첫째로, 가증한 우상들을 제거하되 망설이지 말고 제거하라고 하신 것이다(렘4:1). 이는 이방신들과 완전한 결별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회개는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들과의 완전한 결별을 하는 것이라야 한다. 하나님도 섬기면서 우상들도 함께 섬겨서는 절대 아니 되는 것이다. 둘째로, 진실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회개여야 한다고 밀씀하셨다(렘4:2). 즉 회개는 말이 아니라 삶이 따라오는 회개여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행함으로 그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회개란 사실상 하나님께서 회개로 인정해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이요, 또한 행함없는 믿음이 죽은 것같이,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는 회개 역시 죽은 회개일 뿐인 것이다(약2:26). 셋째로,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위에 씨를 뿌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렘4:3). 이는 기존에 갖고 있는 생각과 관념을 뒤집어 엎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을 낱낱이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가시덤불 위에 씨를 뿌리는 격이 되고 말아서, 결코 열매를 수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 마음이 잘못된 생각과 관념을 유지한 채로 회개하면, 회개의 모양은 있겠지만 그 결과는 결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시덤불 위에 씨를 뿌리면 그 사이에서 씨앗이 싹은 틔우겠지만 결코 열매를 거두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넷째로, 스스로 할례를 행하되 자신의 마음의 가죽을 제거해야 한다고 하셨다(렘4:4).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라 진정 마음을 다해서 돌이키는 회개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진심을 담지 않은 회개는 회개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시야왕 때에 남유다 백성이 그러했다. 그들도 역시 요시야왕의 종교개혁에 동참하고 있는 듯했으나 그들은 위의 4가지와 같은 진실한 회개를 실천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를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알려 주시면서, 그들에게 회개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유다는 회개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무인 그들에게 불이 되어 그들을 사를 것이라고 하셨다(렘5:14). 

 

2023년 02월 15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예레미야강해(07) 구약시대에 회복이 불가능한 2가지 죄는 무엇이었는가?(렘2:1~3:5)_2023-02-14(화)

https://youtu.be/6IszWb5P8OI [또는 https://tv.naver.com/v/33254108]

 

1. 예레미야 선지자는 구약시대의 인물인데 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가?

  예레미야는 구약시대의 인물이다. 그는 B.C.627년(요시야 13년)~B.C.586년(시드기야 11년)에 활동한 남유다 선지자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를 주목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가? 그것은 그가 예수님 당시에 메시야를 예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세례 요한과 엘리야의 뒤를 이어 메시야의 예표자로 불려졌기 때문이다(마16:14). 그는 예루살렘 성이 망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눈물을 흘려야 했으며,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엄청난 책망을 쏟아냈던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예수님처럼 홀로 어쩌면 외로이 자신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해야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레미야를 메시야의 예표라는 관점에서 볼 때도,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 

 

2. 예레미야 2:1~3:5의 말씀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

  예레미야서는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은 1장으로서 예레미야의 소명과 사명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결론은 맨 마지막 52장으로서, 예루살렘이 정말 멸망하는 과정에 대한 역사적 기록과 여호여긴왕이 어느 정도 회복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 남유다의 불씨가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중간이 본론 부분인데, 본론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눠진다. 첫째로, 먼저 유다의 심판에 관한 12가지 단편 예언들이 나온다(2~25장). 그리고 둘째로 예루살렘 멸망 전후에 있었던 이야기와 심판 예언이 나온다(26~45장). 그리고 셋째로, 남유다 주변에 있는 10개국에 대한 미래와 운명 예언이 나온다(45~51장). 그중에서도 예레미야 2:1~3:5의 말씀은 본론의 유다의 심판에 관한 단편 예언들이 기록되어 있는 2~25장의 맨 첫 부분으로서, 12가지 단편 예언들 중에 첫째 예언에 해당한다. 그리고 학자들은 이때를 예레미야가 부름받은 직후(B.C.627)의 어느 시점으로 적어도 요시야왕이 종교개혁(B.C.622)을 아직 시작하지 않는 시점에 받은 것으로 본다. 

 

3. 남유다에 관한 제1예언의 핵심 사항으로서, 구약시대에 회복이 불가능한 2가지 죄는 대체 무엇인가?

  남유다에 관한 제1예언(2:1~3:5)의 핵심 사항은 예레미야 2:13에 나와 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저수조)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저수조들)이니라(렘2:13)" 그렇다. 남유다 백성이 두 가지의 악을 행한 것이다. 하나는 그들이 생수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이요 또 하나는 물을 가두어 놓기 위해 스스로 웅덩이(저수조)를 팠지만 그 웅덩이는 물을 저장할 수 없는 터진 웅덩이를 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배은망덕하여 하나님을 저버렸다는 것인데 이같은 사실은 2:1~2:12에 나오며, 또 하나로 터진 웅덩이를 팠다는 것인데, 이것은 2:14~3:5에 그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죄가 회복이 불가능한 죄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심판의 불가피성을 언급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는 더이상 죄를 그냥 묵과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오직 심판으로서만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유다의 멸망은 이미 결정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다만 죄가 조금 덜 차서 그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죄가 가득 차야(관영해야)만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노아의 홍수 때를 보라. 그때 죄가 관영했다고 했다. 즉 그때도 역시 죄악이 가득찼기에, 하나님께서도 홍수를 통해 전 인류에게 심판을 행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무슨 죄를 저질렀길래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 있었는가? 그것은 좀 전에 렘2:13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첫째는 하나님을 버린 죄요, 또 하나는 터진 웅덩이를 판 죄인 것이다. 

 

4. 회복 불가능한 2가지 죄는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가리키는가?

  남유다가 심판을 피해 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은 무슨 죄 때문인가? 그것은 첫째, 그들이 하나님을 버린 죄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망각하고 은혜를 저버린 죄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어 하나님을 버리게 되었는지를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민족의 태동기 때 곧 출애굽 하여 광야에 있을 때에는 그들이 하나님을 따랐지만(렘2:1~3) 그들이 기름진 가나안 땅에 정착하자 그만 하나님을 저버렸다는 것이다(렘2:4~8). 왜 그랬는가? 그것은 그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에 있을 때에는 그곳 사막에서는 농사할 수 없었기에 하나님이 주신 양식(만나, 메추라기, 반석에서 생수)만을 바라고 먹었으며, 또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받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기름진 땅, 과목이 있고 농사를 할 수 있는 땅에 이르자 금새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살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도 살 만했기 때문이다. 이는 남유다가 가나안 정착 때부터 배도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렘2:4~8).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방 지역의 사람들 곧 서쪽의 깃딤의 사람들이나 동쪽으로 게달 민족을 보더라도, 그들이 비록 하나님을 섬기지는 않는다 해도 자신의 신들만큼은 배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유다는 자신의 신을 무익한 것들과 바꾸어 버렸다는 것이다(렘2:10~11).

  둘째, 그들이 스스로 웅덩이를 팠는데 터진 웅덩이를 판 죄 때문이다. 이스라엘 나라는 물이 귀한 나라다. 그래서 물이 생명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와 천국의 모든 땅을 적시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이치다. 그런데 그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에 있을 때에는 물을 저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광야는 물을 흡수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 도착하니 물을 가둬놓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저마나 농사를 위해 웅덩이(저수조)를 만들어 농사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것은 다 터진 저수조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의지했던 가나안의 신들 및 우상들, 그리고 주변 민족들(애굽과 앗수르)은 생수를 계속해서 공급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고로 남유다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섬기기 시작한 신들 및 우상들 그리고 주변 민족들은 다 가짜였던 것이다. 일시적으로 그들에게 물을 공급해 줄 수는 있지만 그들은 결코 하늘에서 단비와 늦은 비를 제공해 줄 수는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생수의 근원이기 때문에 언제라도 하늘에서 단비와 늦은비를 공급해 줄 수 있는데, 남유다 백성들은 터진 웅덩이를 하나님으로 알고 그들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다.

 

5.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사항은 무엇인가?

  그러자 하나님께서 유다에 대한 심판의 불가피성을 신명기의 말씀을 들어서 언급하신다. 그것은 어떤 남자의 아내가 수치되는 일이 발견되어서 이혼증서를 써서 보내면 그 여자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갈 수 있으나 그 남자에게서 또다시 버려질 경우 다시 본 남편이 그 아내를 취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하다고 하셨다(신24:1~4). 그러므로 그 아내가 아무리 불쌍하다고 할지라도 전 남편은 그를 아내로 맞이하지 말라는 것이 율법 규정이었다. 그러므로 남유다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기며 살고 있는데, 그들도 얼마 안 있으면 이방신들에게 버림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남유다를 또다시 받아 주겠느냐고 물으시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은 어리석어서, 하나님은 자기들의 소시적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노여움을 한없이 내지 않으실 것이고, 끝까지 노여움을 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렘3:4~5). 하지만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겠느냐면서 반문하신다. 그렇다. 이와 같은 상황은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복음이 들어왔던 초기에는 가난했고 병들었기에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눈물로 기도하여 잘사는 나라를 일구어 놓았는데, 이제 나라가 살만해지니까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가는 상황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구원하였으니 그분을 절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 한국 교회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한 번 구원을 받았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은 것이요, 자신의 구원은 만세 전에 작정된 전적인 예정에 따른 것이니 자신은 절대 지옥에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과거에는 내 아내였지만 다른 남자에게 가서 그 남자에게서까지 버려진 아내를 다시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이다. 

 

2023년 02월 14일(화)

정병진목사

2023-02-12(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예레미야강해(05) 하나님은 왜 예레미야에게 2가지 환상을 보여주셨는가?(렘1:11~19)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ZK8ijFC0zEQ [또는 https://tv.naver.com/v/33097032]

 

1. 들어가며

  예레미야는 대선지자다. 그는 이사야와 에스겔 그리고 다니엘과 더불어 대선지자로 분류된다. 아마도 그가 쓴 책의 분량이 52장으로 많아서였거나 아니면 그가 예언했던 기간이 40년으로 많아서 그렇게 분류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우리는 그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예레미야서를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레미야는 메시야의 예표로 분류되었던 세 사람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마16:13~14). 그가 예수님 당시 메시야의 예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가 예루살렘 성의 파괴를 앞두고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날카로운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세상의 대제국인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는 것이 장차 종말에 있을 영적 바벨론인 마귀에게 의해 영적으로 타락한 예루살렘인 교회가 멸망당하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려 할 때에 예레미야서는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 교회는 선지자적인 부르심이 있는 교회다.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지자적인 사명을 감당할 교회로서 우리가 어떤 자세로 이 시대에 회개와 천국복음을 외쳐야 할 것인지에 관하여 많은 힘이 되는 말씀이 바로 오늘 말씀이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역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 주는 2가지 환상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사역 초기에 보여 주신 2가지 환상의 의미를 파악해 보고 종말을 향하여 회개를 외쳐야 하는 선지자적인 교회의 자세와 각오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2. 예레미야, 그는 어떤 선지자이며, 하나님은 왜 그에게 환상을 보여 주셨는가?

  예레미야는 베냐민 땅 아나돗 출신의 제사장의 아들이었다. 그가 경건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뜻이다. 이는 그가 성경 기록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의 나이 약 20세 정도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선지자로 불러내신다(렘1:5~11). 그때는 남유다 제16대 요시야왕 13년이 되던 해였다(B.C.627년). 그리고 그의 사역은 남유다 20대 시드기야왕 11년(B.C.586년)에 비로소 끝났으니 약 40년간 선지자로 활동했던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내실 때에 그는 작은 사역자가 아니라 크게 쓰실 사역자로 불러내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남왕국 유다의 5명의 왕들을 향하여 예언할 뿐만 아니라 열방의 멸망과 파괴까지도 선언해야 했기 때문이다(렘1:5). 그래서 그는 당시 대제국이었던 앗수르와 애굽 그리고 바벨론의 흥망성쇠까지 예언하였으며, 남유다의 5명의 왕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선포할 내용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여러 이방 민족들과 여러 남왕국 왕들을 향하여 그들을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그리고 그것을 건설하고 심는 일에 대하여 선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0세 남짓의 예레미야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좋은 일을 선포하는 예언이 아니라, 멸망을 주로 선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격려하고 그의 사명에 확신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곧바로 2가지 환상을 그에게 보여 주신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었던 '살구나무 가지' 환상이며, '끓는 가마' 환상이다(렘1:11~15). 

 

3. '살구나무 가지' 환상은 대체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그의 소명에 대해 확신을 갖게 하고 그가 해야 할 사역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 2가지 환상을 보여 주셨다. 그중에 첫 번째 환상은 바로 '살구나무 가지' 환상이었다(렘1:11~12). 여기서 '살구나무'는 히브리어로 보면 '샤케드'라는 나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샤케드'를 '살구나무'라고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이스라엘 나라에서 '샤케드'는 아몬드나무를 지칭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샤케드'를 살구나무라고 번역한 것일까? 그것은 두 나무의 꽃 모양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똑같이 꽃잎이 5개로 같고, 꽃잎 색깔도 흰색과 분홍색이라는 것도 같으며, 또한 봄이 되면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나무로서, 잎사귀를 내기 전에 꽃부터 먼저 피운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 나라에는 살구나무가 서식하지 않고, 우리나라에서는 아몬드나무가 서식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아몬드나무와 비슷한 살구나무라고 번역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왜 먼저 살구나무 가지를 보여 주셨는지를 설명해 주셨다. 그 말씀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번역하면 이렇다. "왜냐하면 내 말이 이루어지기를 내가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렘1:12). 여기서 '지켜본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샤카드'라는 동사다. 이 동사는 뜻이 '경계하다, 파수하다, 유심히 지켜보다, 감시하다, 깨어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어 유희(사케드, 사카드)를 사용하여 예레미야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레미야가 과연 어떤 나뭇가지를 보았길래, 그 나무를 아몬드나무라고 판단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 나뭇가지에 피어 있는 꽃을 보았거나 그 열매를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환상에 있어서 이제 갓 초보자였던 예레미야는 그냥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살구나무가 대체 무슨 의미를 갖고 있길래, 하나님께서는 꽃이 피어 있는 살구나무 가지를 그에게 보여 주신 것일까? 대체 이 나무가 어떤 의미를 지녔길래, 예레미야의 소명에 대해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 이 환상을 보여 주신 것일까?

  그것은 첫째, 이 나무가 바로 '깨어 있음, 지킴, 파수함'이라는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나무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될 때에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나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 나라 사람들은 이 나무를 보고서, 겨울철에도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다가 봄이 오자마자 꽃을 피운다는 생각 가운데 '깨어 있음, 파수함, 지켜 봄, 잠자지 않음'이라는 뜻으로 그 나무의 이름을 '샤케드'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이것을 증명해 주는 일이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성막의 금등대를 살구(아몬드)꽃 모양으로 만들라고 하셨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출25:32~33). 이는 금등대가 캄캄한 밤에도 꺼지지 않고 항상 불을 밝히면서 성막을 지키고 경계하는 역할을 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고로 이러한 사실은 대체 무엇을 말해 주는가? 그것은 "비록 네가 어려운 심판 예언을 쏟아내야 하겠지만, 나는 반드시 네게 일러준 말이 그대로 실현되는지를 잠도 안 자고 깨어서 지켜보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너는 내 말만 전하면 된다. 그 다음은 내가 지켜보면서 반드시 그것을 이루게 하겠다"는 말씀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을 들었던 예레미야는 많은 힘을 얻고 용기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말을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앞으로 그 말을 이루실 것이니, 그 정도면 나도 할 수 있어"라는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둘째, 이 나무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때 예레미야가 살구나무만을 본 것이 아니라 살구나무 가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가지'는 '지팡이, 막대기'라는 뜻으로도 쓰이는데, 그것은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통해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 확실히 밖으로 드러나게 된다. 어느 날 레위 자손들이 모세와 아론을 대항하여 제사장직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레위 자손들에게 향로들을 준비하게 하셨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고라 일당을 심판하시면서 향로를 들고 있던 250명의 레위인들까지 다 불살라 죽여 버리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왜 아론을 들어쓰시는지를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 12지파의 족장들에게 각각 자기의 지팡이 하나씩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성막 증거궤 앞에 두라고 하셨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의 지팡이에만 싹이 날 것이라고 하셨다(민17:4~5). 그때 레위 지파에게는 아론의 지팡이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 다음 날이었다. 오직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움이 돋고 싹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아몬드) 열매가 맺혀 있는 것이 아닌가!(민17:8). 고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살구나무 가지를 보여 주신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대제사장 아론처럼 귀히 쓰시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예레미야는 자신에 대한 부르심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끓는 가마' 환상은 대체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두 번째 환상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무엇을 보는지를 물으셨다. 그러자 예레미야는 "제가 끓는 가마(솥)를 보나이다. 그 윗면(얼굴)이 북쪽에서부터 기울어져 있나이다"라고 대답했다(렘1:13). 이전에는 단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라고 답변한 것에 비하면 많이 발전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은 다 의미가 있는 것들인데 지난번 살구나무 가지 환상에서는 그가 일부를 생략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좀더 소상하게 대답했던 것이다. 벌써 많이 배운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끓는 내용물은 북쪽에서부터 들이닥칠 재앙이라고 하시면서 그것은 북방 왕국들이 모든 족속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쳐들어와서 파괴시킬 것을 뜻한다고 하셨다. 실제로 그러한 일은 그때로부터 약 20년 뒤부터 성취되기 시작하여 40년에 마쳐지게 된다. 왜냐하면 바벨론의 4차 침공 끝에 예루살렘이 패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당시 예레미야가 이러한 환상을 보고 있을 때는 요시야왕 통치 13년으로서, 북방의 앗수르 제국이 쇠퇴하고 있는 시기로서, 남유다가 오랜만에 태평세대를 누리고 있는 시기였고 또한 신앙적인 부흥도 앞두고 있는 시기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벨론은 이제 자그마한 나라를 이루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환상은 먼 미래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미리 내다보는 전능자이실 뿐만 아니라 세계 대제국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자 예레미야도 역시 이것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게 되었으며, 또한 자신이 외치고 선포할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깊이 각인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5.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부름받은 선지자의 각오와 자세를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그때였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소명과 사명을 부여받은 선지자의 각오와 자세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3가지였다(렘1:17).

  첫째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서라"고 하셨다. 이는 '너도 이제 자신에 대한 소명과 사명을 알게 되었으니 일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언제든지 명령만 떨어지면 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둘째는 "내가 명령한 바를 다 말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을 다 그들의 귀에 들려주라는 것이며, 하나도 빼놓지 말고 다 전하라는 것이다. 혹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 된다고 할지라도 꼭 그것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려고 할 때, 이것을 전하면 백성들이 싫어할 것 같고, 저것을 전하면 왕들이 싫어할 것 같으며, 또한 저것을 전하면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싫어할 것 같으니, 골라서 전하려는 마음도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디를 보내든지 가야 하며, 누구에게 전하라고 하든지 가감없이 전하라고 하신 것이다. 셋째는 "결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사실 예레미야가 가서 전해야 할 대상은 왕들이며 또한 종교지도자들인 선지자와 제사장들이었다. 그리고 그 땅의 지주들과 같은 지도자들이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이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이들도 예레미야를 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견고한 성읍과 쇠기둥 그리고 놋성벽이 되게 하셔서 결코 예레미야를 이기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자는 그 누구도 맞설 수 없으며, 그를 해칠 수 없고 죽일 수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보호자가 되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역자는 하나님이 직접 당신의 손으로 붙들어 주시는 자다. 그래서 목숨까지도 책임져 주시는 것이다. 나중에 우리가 예레미야서를 읽어 보면 알겠지만, 자신의 고향 사람들도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였고, 여호야김왕도 예레미야를 없애려고 하였으며, 선지자들과 제사장들도 그를 치고 그를 괴롭혔고, 시드기야왕은 그를 웅덩이에 처넣어 죽이려고 시도하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예레미야에게 맞선 자들은 다 죽임을 당하였거나 가족까지 포로로 잡혀갔으며, 시드기야왕은 자신이 보는 앞에서 자기 자식들이 죽임당하는 것을 보아야 했으며 자신의 눈이 뽑혀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자는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특별한 은혜와 보호하심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를 대적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가만 놔두지 않는 것이다. 

 

6.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한 예레미야는 어떻게 되었는가?

  어떻게 되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명령했던 바대로 되었다. 왕들도 백성들도, 선지자들과 제사장들도 그리고 여러 이방 제국들도 예레미야가 선포한 말씀대로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리하여 이 모든 일에 사명을 완수하게 된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사명을 마친 예레미야는 천국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은 천국에서 144,000석의 보좌자리 가운데 2번 줄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런데 실로 그 자리는 어마어마한 자리다. 수억 명의 구원받은 이들 가운데 겨우 몇백 명밖에 되지 않은 숫자에 예레미야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수천 평이 넘는 대저택 같은 곳에서, 생명수가 철철 넘치는 곳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는 충성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등 무수한 면류관이 씌여져 있다. 그렇다. 자신의 부르심을 따라 목숨걸고 사명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보상해 주는 것이다. 하늘나라에서도 부러움을 살 만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7. 나오며

  오늘의 시대에 교회는 사실상 두 종류의 교회로 분류가 된다. 하나는 제사장적인 일을 수행하는 교회이고, 또 하나는 선지자적인 일을 수행하는 교회다. 제사장적인 일을 수행하는 교회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복을 받으라는 사역을 주로 하지만, 선지자적인 일을 수행하는 교회는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며 하늘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시켜 주는 일을 주로 한다. 신앙생활하기는 제사장적인 일을 수행하는 교회가 좀더 편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말세에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베드로에 의하면, 말세에는 꿈을 꾸고 환상을 보며 예언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말했다(행2:17~18). 그리고 사도 요한은 말세에는 두 증인과 같은, 강력한 불의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사역할 것이라고 했다(계11:3~10). 그리고 예수께서도 말세에는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그리스도들이 일어나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할 것이라고 하셨다(마24:24). 이는 말세가 되면 선지자가 출현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말세가 될수록 참된 선지자를 찾아보기가 어렵겠지만, 그래도 그러한 선지자적 기능을 수행하는 주의 종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주님이 오시기 직전에는 선지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교회와 주의 종이 활동하는 시대가 되는 것이다. 이때 참 선지자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과 보호를 받고 천국에 입성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평소 때에 환란과 시련을 이겨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레미야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에 그를 도와주었던 구스인 에벳멜렉이나(렘38:12~13), 예레미야가 불러 준 말씀을 기록하여 낭독한 서기관 바룩도(렘36:4), 하나님의 은총으로 환난 중에 보호하심을 받았다. 그렇다. 오늘날에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외쳐 참된 생명의 길을 제시하는 교회를 주님이 찾고 있다. 그리고 그런 직무를 수행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의 때에도 특별한 은총과 보호로 함께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서를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도록 하자. 

 

 

2023년 02월 12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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