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예레미야강해(03) 하나님은 사명자를 어떻게 정하시고 어떻게 쓰시는가?(렘1:4~10)_2023-02-09(목)

https://youtu.be/83R1wXVPc3E [또는 https://tv.naver.com/v/33097020]

 

1. 사명자는 어떻게 정해지는가?

  구약시대로 치자면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나 선지자가 되는 것이요, 신약시대로 치자면 사도와 복음전하는 자가 되는 것은 어떻게 정해지는가? 그것은 대부분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이루신다. 즉 사명자의 배출은 오늘도 역시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따라서 결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토기장이가 토기로 그릇을 만들 때 어떤 그릇으로 만들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여 만드는 것과 똑같이, 누구를 사명자로 쓸 것인가 하는 것은 절대주권을 가진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급속도록 무지해지기 시작하였고 무능해진 상태에 놓여 있게 되었는데, 인류를 참길로 인도하기 위해 사람을 쓰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무지하고 무능한 사람을 선택하여 쓰시지는 않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 실패할 만한 사람을 이 땅에 결코 보내시지 아니하시며, 또한 장차 실패할 사람을 선택하지도 않으신다. 

 

2. 하나님께서는 사명자를 언제 어떻게 선택하시는가?

  사명자가 이 땅에 있을 때에 선택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하늘에서 이미 결정된 상태에서 이 땅에 보내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천국의 낙원이라는 곳에서 자라고 있는 한 영혼을 선택하시어 이 땅에 사명자로 보내시는 것이다. 예레미야 역시, 이 땅에 있을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역자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모태에 짓기 전에, 또한 그의 어머니의 배에서 나오기 전에 이미 선택하신 것이다. 고로 그가 선지자가 된 것은 이미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결정한 사항이 성취된 것 뿐이다. 다만 이러한 영혼을 과연 이 땅에 살고 있는 누구에게 보낼 것인가가 남은 과제일 뿐이다. 그런데 이것 역시도 하나님께서 정하신다. 왜냐하면 아무래도 기도를 많이 하는 부모나 몇 대째 신앙생활을 하는 경건한 집안에 사명자를 보내 주실 확률이 훨씬 더 높기 때문이다. 그래야 어린 사명자를 잘 길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외는 항상 있다. 어떤 사람은 불신의 가정이나 혹은 찌든 우상숭배자의 집에 태어나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께 붙들림받으면 얼마든지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험악한 집안에 태어나게 하기도 한다. 

 

3. 예레미야는 어떻게 선택된 사람인가?

  예레미야는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그는 가만히 있었다면 아마도 제사장이 되었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제사장으로 쓰시지 않고 그를 선지자로 쓰시기로 작정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제사장의 가문에 보내신다. 그래서 선택받은 사람이 제사장의 가문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가 바로 '예레미야'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레미야는 베냐민 지파의 땅의 아나돗에 살고 있던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당신이 선택한 영혼을 힐기야의 아들로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이는 그를 사명자로서 쓰시기 위한 계획에 따른 그 결과였다. 

 

4.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어떤 사명자로 계획하시고 보내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남유다의 선지자로 계획하시고 이 땅에 보내셨다. 그러나 그의 사명은 남유다를 위해 예언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여러 이방 민족을 위한 선지자로도 정해진 채 보내어졌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는 '열방의 선지자'로 보내어진 것이다. 그것도 남유다와 열방을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을 선언하는 예언자로 선택되어 이 땅에 보내어진 것이다. 

 

5. 예레미야의 예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사명자의 어떤 것을 정하시는지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경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과연 사명자의 어떤 부분을 정하시는지를 알 수가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사명자가 장차 태어나게 될 집안과 가문을 선택하시고, 또한 그가 태어날 시기와 그가 사역할 시기까지도 다 정하신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제사장의 가문에서 제사장의 아들로서 태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사역할 시기는 약 40년 정도로서, 남유다 16대 왕이었던 요시야 제13년(B.C.627년)에 부르심을 받았고 남유다 20대 왕이었던 시드기야 때에 자신의 사역을 마치게 된다. 고로 그는 약 20세 정도의 나이에 부르심을 받은 것이며, 약 60세 정도에 그의 사역을 마치게 된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사명자의 사역의 분량(그릇의 크기)도 정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단지 한 민족이나 한 세대의 선지자로 세운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남유다와 열방 민족 10개국의 선지자로 세우셨고(렘46~51장), 한 세대가 아니라 몇 세대에 걸쳐서 예언할 사역자로 선택하신 것이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사명자의 사역의 방법도 정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이 땅에 사명자로 보내실 때에, 예언하는 자로 보내셨다. 예언 중에서도 여러 나라들에 대한 심판과 멸망 그리고 회복을 예언하는 선지자로 이 땅에 보내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메시아 예언 선지자로 보내셨으며, 에스겔은 성전 예언 선지자로 보내셨다. 그리고 엘리야와 엘리사의 경우는 예언만 하는 사명자로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기적도 행하는 사명자로 이 땅에 보내셨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심판과 멸망, 회복을 예언하는 사명자로 이 땅에 보내어졌으며, 약 40년간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다가 하늘로 부르심을 받게 된다. 

 

 

2023년 02월 09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104) 사명자와 독사(행28:1~15)_2023-02-02(목)

https://youtu.be/uyApafndIHw [또는 https://tv.naver.com/v/32826023]

 

1.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고 있을 때에 바울을 죽이려고 공격했던 두 가지 세력의 실체는 무엇인가?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호송되고 있었을 때 바울은 두 번의 위기를 만난다. 둘 다 생명과 직결되는 것들이었다. 하나는 바다에서 유라굴로라고 하는 큰 광풍을 만난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 일행은 배 안에서 해와 별도 보지 못한 채 14일 동안 표류하게 된다. 그렇지만 바울은 죽지 않고 멜리데 섬에 도착한다. 또 하나는 멜리데 섬에서 독사에게 물린 것이다. 육지에 도착했는데 젖은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불을 지피고 있었는데, 나무를 불속에 넣다가 뜨거운 기운에 독사가 나와서 그의 손을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바울은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 그런데 이 둘은 겉으로는 바다에서 폭풍을 만난 것이며 육지에서 짐승을 만난 것이다. 하지만 공통점은 둘 다 해로운 것으로서 생명에 위협을 주는 것들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을 영의 눈으로 보면 조금 다르다. 왜냐하면 둘 다 영물의 공격으로서, 앞의 것은 귀신들의 공격이라고 할 수 있고, 뒤의 것은 뱀의 공격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풍랑을 일으켜 배를 파손시키거나 전복시키려는 바람의 배후에 귀신들이 있었기 때문이요, 독사의 배후에 악한 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2. 바울이 당한 일들을 가리켜 왜 영적으로 공격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바울이 '바다'(지중해)와 '육지'(멜리데 섬)에서 공격당한 것은 사실 영적인 공격들이었다. 그 이유는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지 못하도록 악한 영들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악한 영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복음 전파 사명자들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는 귀신으로부터 공격받는 것이며 또 하나는 뱀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것이다. 여기서 '귀신'이란 사람의 몸 밖에 있는 악한 영들을 가리키며, '뱀'은 사람의 몸안에 들어와 있는 악한 영들을 가리킨다. 우리 성도들은 이 둘의 공격에 잘 대비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자들을 매우 싫어해서 때로는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은 원래 하늘에서 하나님을 섬기던 천사들이었으나 범죄하여 하늘에서 쫓겨남으로 귀신들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혹은 뱀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들은 결국 천국에 절대 못 들어가게 될 것인데, 사람들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에,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자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다. 

 

3. 성경에서 뱀과 독사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가?

  성경에 등장하는 뱀과 독사는 파충류로서 존재하는 뱀과 독사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물론 파충류로서 뱀과 독사도 있다. 이것들 중에서 독사(헬, 에키드나)는 특별히 독이 있는 뱀(헬, 오피스)을 가리킨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보면, 사람 속에 있는 영물로서 뱀과 독사를 가리킬 때에도 역시 '뱀'과 '독사'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세례 요한(마3:7)과 예수님(마23:33, 눅10:19) 그리고 사도 요한(계12:9)도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 속에 실제로 영물들인 뱀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마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마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눅10: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계12: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4. 바울이 독사에 물리게 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바울이 불속에 마른 나무를 집어넣다가 독사에게 물린 것은 과연 불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수도 있다. 그러기에 멜리데 섬 주민들은 그가 바다에서는 구원을 받았으나 육지에 와서는 독사에 물렸으니 분명 죄가 많은 사람일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행28:4). 하지만 이것은 다음과 같은 영적인 의미가 있다. 첫째, 영물로서 독사가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복음 전파 사역에 힘쓰고 있는 사명자를 결코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영물인 뱀들(독사 포함)일지라도 죄 없는 사람을 공격할 수는 없다. 특히 하나님의 복음 전파 사역에 힘쓰는 사명자를 건드릴 수 없다.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사명자를 건드린다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그가 아무런 해를 입지 못하도록 다 막아 주시는 것이다. 둘째, 눈에 보이는 현상을 통해 사명자가 뱀에 물렸어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은 복음 전파의 귀한 도구가 된다는 점이다. 어떻게 되어서 멜리데 섬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그것은 사도 바울의 전도 때문이었다. 그러면 멜리데 섬은 어떻게 되어서 복음 전파가 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바울이 독사에 물렸으나 죽지 않음으로 인하여 보블리오라는 그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의 초대를 받게 되고, 그 집에 들어가 그 사람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안수하여 고침으로 그 병이 나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 섬에 있는 다른 환자들도 와서 병고침을 받고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자 그 섬은 순식간에 예수믿는 사람들으로 가득차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그 섬은 여전히 기독교 국가(몰타 공화국)로 남아 있는 것이다. 

 

5. 사명자가 받는 축복은 무엇인가?

  이상의 사건들을 통하여 우리는 복음 전파 사명자가 받게 되는 놀라운 축복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사명자를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복음 전파 사명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광풍 속에서도 지켜 주셨고, 독사의 독으로부터도 지켜 주셨듯이 우리와 같은 사명자들도 지켜 주실 것이다. 우리는 바울에게 일어난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막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2023년 02월 02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103) 사명자와 광풍(행27:1~44)_2023-02-01(수)

https://youtu.be/O-K1rgU1brg [또는 https://tv.naver.com/v/32826006]

 

1. 사명자가 가는 길인데도 왜 광풍이 부는가?

  바울은 사명자였다. 그런데 그가 가는 길에 아니나 다를까 광풍이 휘몰아쳤다. 왜 그랬는가? 왜 사명자가 가는 길에도 광풍이 휘몰아치는 것인가? 그것은 사명자가 가는 길에는 상대적으로 사탄의 방해 역시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면 사탄의 나라가 그만큼 축소되기 때문에, 사탄도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기어코 막으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역자가 가는 길에 광풍과 장애물이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에 어떤 광풍을 만났는가?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로마 황제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항소하자, 유대 총독 베스도는 백부장 율리오를 시켜 그를 로마로 압송하게 한다. 그러자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아드라뭇데노'라는 배로 출발한다. 그리하여 시돈 항구를 거쳐서 구브로 해안을 따라 길리기아와 밤빌리아를 거쳐 루기아의 무라성에 도착한다. 거기에서 '알렉산드리아'라는 배를 갈아타고 니도 맞은편에 도착하지만 풍세가 허락하지 않아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섬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남쪽인 미항에 도착한다. 그러나 바울의 말보다는 선장의 말을 따라 그레데 섬의 서편에 있는 뵈닉스에서 겨울을 보내려고 출발하게 되는데, 그만 '유라굴로'라고 하는 광풍대작을 만나게 된다. 조난을 당하여 14일 동안 해도 별도 보지 못한 채, 바다 가운데서 헤메다가 어느 날 육지에 도착하게 되는데, 도착해 보니 그곳은 이달리아의 남단에 위치한 섬 멜리데였다. 죽지 않고 살게 된 것이다. 그것도 276명 전원이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육지에 상륙하게 된 것이다. 

 

3. 알렉산드리아 배에 탔던 276명 전원이 광풍을 만났지만 살 수 있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만약 그 배에 사명자 바울이 타고 있지 않았다면 그 배는 좌초되어 전원 사망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배에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가진 바울이 타고 있었다(행23:11). 그리고 거기에는 바울의 동역자인 의사 누가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타고 있었다(행27:1~2). 그러므로 그 배가 비록 엄청난 광풍을 만나 14일간을 표류했기는 했지만 그 배는 깨어지지 않았고 좌초되지도 않았으며, 무사히 멜리데 섬에 도착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지켜 주시기를 원하지만 특히 사명자가 있을 때 그를 지켜 주시고 보호하신다. 주님께서 그 사명자를 통해 하실 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76명의 사람들은 사명자 바울로 인해 한 사람도 죽지 않게 된다. 사명자와 함께 하면 이러한 복이 주어지는 것이다.

 

4. 바울이 광풍을 만났을 때 어떤 영적 전투가 벌어졌는가?

  바울이 광풍을 만났을 때 영의 세계에서는 놀라운 영적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사탄의 세계에서는 '알렉산드리아'라는 배를 파손하기 위해 엄청난 숫자의 악한 영들이 파송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일으킨 광풍이 바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도 역시 당신의 천사를 직접 그곳에 보내셨고(행26:23~24), 또한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을 돕기 위해 이미 파송된 채 있는 천사들도 역시 그 악한 영들과 싸우게 된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배가 광풍을 만났으나 파손되지 않고 더 빨리 이달리야에 도착하게 된다. 사실 그 배가 광풍을 만나서 파손되지 않은 것도 기적인데, 그 배가 서북쪽을 향하여 이동하게 되었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정상대로 그 배가 휩쓸려 갔다면 그 배는 반드시 서남쪽인 아프리카 해안 쪽으로 갔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배는 반대로 서북쪽을 향해 나갔으니, 자연의 바람을 거스리는 항해가 그때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선한 천사들이 그 배를 이끌어 서북쪽으로 가게 이끌었으며, 그 배가 파손되지 않도록 붙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5. 사명자들을 돕기 위해 파송되는 하늘의 전투천사는 어떤 천사들인가?

  사람은 태어나면서 기록천사가 달라붙는다. 그래서 그가 죽는 날까지 그의 행적을 기록한 뒤에 해가 질 무렵에 하나님께 보고한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면 수호천사가 달라붙는다. 그래서 그를 지켜 준다. 그리고 사명자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도 그가 자신이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전투천사를 붙여 준다. 성도가 사명자가 되었을 때 맨 처음 받는 계급장은 '소위'라는 계급이다. 그리고 그때에는 20~40명 정도의 전투천사가 붙여진다. 그래서 중위가 되면 80명으로 배가 늘어나고, 다시 대위가 되면 160명으로 늘어난다. 그리하여 소령은 320명, 중령은 640명, 대령은 1,280명의 천사들이 달라붙는다. 전투천사가 적어도 1,000명이 넘으면 그때부터 실질적인 사역이 가능하다. 축사와 치유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별1개에서 별 6개까지 계급이 올라갈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사명자의 계급을 정해 주신 대로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사역자라도 사역을 하지 않게 되면 더 이상 계급이 올라가지도 않을 뿐더러, 급기야는 계급장이 떨어지기도 한다. 이때 사도 바울의 계급이 별 5개에 플러스 80% 정도였으니, 그를 돕기 위해 붙어 있는 전투천사들의 숫자는 적어도 35,000명 이상의 천사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 누가 사도 바울이 가는 길을 막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도 부지런히 회개하고 사역하여 계급을 높일 수 있기를 바란다. 

 

2023년 02월 01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94) 사명자의 길 곧 결박과 환난 그리고 하나님의 지키심(행21:27~36)_2023-01-05(목)

https://youtu.be/41UKahTn9eM  [혹은 https://tv.naver.com/v/32156100 ]

 

1. 바울이 예루살렘에 와서 부딪혔던 두 가지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면서 부딛혔던 문제는 2가지였다. 하나는 예루살렘교회의 구성원들인 믿는 유대인들과의 충돌이었다. 이들은 당시 수만 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을 오해하고 있었고 불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이 율법을 무시하고 할례를 폐지하며 관습들을 지키는 일에 반대하는 자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행21:21). 그러나 실은 바울이 이것을 반대했던 것이 아니라, 이것들은 실체이신 예수님에 대한 예표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의식법들이 말하고 있는 실체를 붙들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이었던 야고보의 제안을 따라, 정결의식을 행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때 바울이 정결의식을 행했던 것은 바울이 그것을 통해 의롭다함을 얻거나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유대인들에게 유대인과 같이 되어 그들 중의 얼마를 구원하고자 함이었던 것이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바울은 율법 아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구원하고자 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예루살렘에 있는 오리지널 유대인들과의 충돌이었다. 

 

2. 바울과 유대교인들과의 충돌은 어떻게 해서 발생했는가?

  그런데 정작 문제는 유대교인들과의 충돌이었다. 야고보의 중재로 믿는 유대인들과 충돌을 피할 수 있었지만, 유대교인들과의 충돌을 피해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럼 누가 과연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없애버리려고 시도했던 것일까? 그들은 다름 아닌, 바울이 가장 왕성하게 사역했던 에베소에 있던 바로 그 유대교인들이었다. 이들 역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있었는데, 그때 자신들이 에베소에서 보았던 바울을 예루살렘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 옆에는 에베소 사람이자 헬라인인 드로비모가 같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의 바울에 대한 적개심은 하늘로 치솟았다. 그래서 그들은 2가지로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교인들을 선동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는 바울이 이방 지역에서 유대인들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전했다는 것이었다. 즉 바울이 이방인들이 사는 각처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무시하라는 가르침을 전파했다는 것이다(행21:28). 그리고 또 하나는 바울이 거룩한 성전에 이방인인 드로비모를 데리고 들어가서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다. 바울은 성전 안에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간 적이 없었다. 다만 예루살렘에 헬라인인 드로비모와 함께 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에베소 거주 유대인들이 잘못 추측하여 바울을 가만 두지 않으려고 거짓 선동을 한 것이다. 그러자 온 성이 소동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군중들은 성전에서 바울을 붙잡았고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다. 

 

3.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소동은 어떻게 진정될 수 있었는가?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간 유대인들은 바울을 성전 밖에서 치기 시작했고 그래서 그를 죽이려고 시도하였다. 그때였다. 온 예루살렘이 소동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로마 군대의 천부장 루시아가 즉시 개입을 하였다. 적어도 2명의 백부장과 200명 이상의 군인들을 끌고 항오를 짜고 대열에 맞춰 성전쪽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러자 성난 군중들이 바울 치기를 그쳤다. 그러자 천부장은 즉시 바울을 쇠사슬로 결박하게 한 다음 성난 군중들에게 바울 그가 누구이며 무슨 일 때문에 이런 소란을 일으켰느냐고 질문을 했다. 하지만 저마다 대답이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바울은 결코 성전에 이방인을 데리고 간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실체도 없이 바울에 대한 적개심만으로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그들의 계획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성난 군중들은 루시아 천부장에게 계속해서 그를 제거해 달라고 요청하고 따라갔다. 이때 바울을 죽지 않게 건져낸 사람은 누구였는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 수만 명이나 되는 믿는 유대인들이었는가? 아니었다. 단 한 명도 바울의 일에 나서는 자가 없었다. 다만, 로마의 천부장이 그 일에 개입하여 바울을 죽지 않도록 살려낸 것이다. 

 

4. 사명자는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되는가?

  대부분의 사명자는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되는가? 평탄하고 안전한 길을 걸어가게 되는가 아니면 환난과 핍박과 고난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가? 지금까지 역사적인 사실들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사명자치고 평탄한 길을 걸어간 사람은 거의 없다. 다 환난과 핍박을 당하면서 고난의 길을 걸어갔던 것이다. 왜 사명자는 그러한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사명자란 본래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도록 실행하는 자일 뿐만 아니라, 마귀에게 속한 자들을 건져내어서 하늘나라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는 종류의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자 사탄 마귀가 하나님이 보낸 사명자들을 그냥 가만 둘 리가 없는 것이다. 고로 사명자에게는 반드시 고난이 뒤따른다고 봐야 한다. 만약 자신이 사명자라고 주장하는데도 자신에게 아직 환난과 핍박과 고난이 뒤따르지 않았다면 그는 진짜 사명자가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다.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바울은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 자로 부르심을 입은 자였다. 그래서 이제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그러자 바울은 위험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이다. 그러자 아니나다를까 유대인들은 벌떼처럼 바울에게 달려들어 바울을 없이 하려고 모의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5. 사명자는 과연 누가 지켜 주는가?

  그렇다면 위험에 처한 사명자를 누가 건져내고 누가 지켜 주는가? 그들은 수만 명이나 되는 믿는 유대인들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이방인이었다. 그랬다. 그때 바울은 예루살렘의 성전에 들어갔고 큰 고난에 봉착하게 되었다. 에베소 거주 유대인들이 성전에 있는 바울을 발견한 후에 그를 거짓 고소하여 죽이려고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즉시 로마 군대의 천부장인 루시아를 보내어, 그로 하여금 바울을 보호하도록 하셨다. 그리하여 유대교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로마인들이 와서 결국 위기에 처한 바울을 건져낸 것이다. 그렇다. 사명자가 죽는 것은 사명이 끝났기 때문이다. 즉 사명이 끝나서 죽을 때가 되었기 때문에 사명자는 죽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사명자는 결코 함부로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을 때가 되어야 죽게 되는 것이지, 여전히 이루어야 할 사명이 남아 있다면 그는 절대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아플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사명자의 길이다. 사명자는 그를 꼭 도와줄 것 같은 사람이 있어 그가 사명자를 지켜 주는 것이 아니다. 사명자는 자신이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사람 곧 하나님께서 예비한 사람에 의해 보호되고 죽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명자들은 위험한 일을 만나도 겁먹지 말아야 한다. 그때 죽으면 자신의 사명이 끝났기 때문이니 할렐루야하고 찬송하면서 천국가면 되는 것이요, 그때 죽지 않고 살아나게 된다면, 아직도 자기 자신이 부여받은 사명이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담대히 그 사명을 잘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2023년 01월 05일(목)

정병진목사

+ Recent posts